오사카 상인은 20세기에 들어 일본을 대표하는 대기업을 탄생시킨다.
일본의 3대 재벌 중의 하나인 스미토모 그룹이 오사카에서 잔뼈가 굵은 대기업이다. ‘경영의 神(신)’이라 불리는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도 오사카 상인 출신이고, 기린 맥주와 쌍벽을 이루는 아사히 맥주, 산토리 위스키, 세계 최초로 라면을 개발한 닛신(日淸)식품, 일본을 대표하는 백화점 중의 하나인 다이마루(大丸)백화점도 오사카에서 창업했다.
⊙ ‘先義後利’(이익은 후에 생각하라. 먼저 고객에게 신용을 지켜라)라는 글귀는 오사카 상인의
대표적인 정신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의 物産과 상인을 모으면서 번영 시작
⊙ 들어오는 배가 1000척, 나가는 배가 1000 척
⊙ ‘회덕당’이란 학교 세워 오늘날도 상인정신 계승
洪夏祥 작가
⊙ 1955년 서울 출생.
⊙ 중앙大 문예창작과 졸업.
⊙ 논픽션 및 다큐멘터리 작가 28년.
⊙ 상훈 및 저서: <오사카 상인들>, <신용-도쿄 상인>, <개성상인>, <이건희>, <정주영 경영정신>
등 25권. ‘MBC방송대상 작가상’ 등 다수 수상.
일본의 3대 재벌 중의 하나인 스미토모 그룹이 오사카에서 잔뼈가 굵은 대기업이다. ‘경영의 神(신)’이라 불리는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도 오사카 상인 출신이고, 기린 맥주와 쌍벽을 이루는 아사히 맥주, 산토리 위스키, 세계 최초로 라면을 개발한 닛신(日淸)식품, 일본을 대표하는 백화점 중의 하나인 다이마루(大丸)백화점도 오사카에서 창업했다.
⊙ ‘先義後利’(이익은 후에 생각하라. 먼저 고객에게 신용을 지켜라)라는 글귀는 오사카 상인의
대표적인 정신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의 物産과 상인을 모으면서 번영 시작
⊙ 들어오는 배가 1000척, 나가는 배가 1000 척
⊙ ‘회덕당’이란 학교 세워 오늘날도 상인정신 계승
洪夏祥 작가
⊙ 1955년 서울 출생.
⊙ 중앙大 문예창작과 졸업.
⊙ 논픽션 및 다큐멘터리 작가 28년.
⊙ 상훈 및 저서: <오사카 상인들>, <신용-도쿄 상인>, <개성상인>, <이건희>, <정주영 경영정신>
등 25권. ‘MBC방송대상 작가상’ 등 다수 수상.
그가 오사카 성을 그처럼 빨리 완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信賞必罰(신상필벌) 원칙 때문이었다. 열심히 하는 자에게는 아낌없이 포상을 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는 가차없이 죽였던 것이다. 휘하의 일꾼들은 기왕에 일하는 거 열심히 해서 포상을 받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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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
쌀은 경제력의 척도다. 지방 제후들 중에 쌀 생산량이 많은 城主(성주)가 가장 강성한 군주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에게 반감을 갖고 있던 세력,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등 천하 제후들의 경제력을 박탈하는 것만이 그들을 무력화시키고, 나아가 충성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쌀만 가지고 안심할 수 없었던 그는 副食(부식)인 채소, 그리고 일본인들의 거의 유일한 단백질원인 생선까지, 당장 필요한 양을 제외하고는 오사카로 올려 보내라는 포고령을 낸다. 한마디로 지방 제후의 경제력을 완전히 빼앗으려는 계략이었다. 이제 막 천하를 통일한 서슬 퍼런 권력자의 명령이었으므로 지방의 제후들은 그 명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두 번째로 취한 정책은 일본의 유능한 商人(상인)들을 오사카 성 아래로 집단 이주시키는 일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본래 바늘장수 출신인 데다가 전쟁을 치르면서 상인의 힘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상인이 화를 내면 천하의 제후도 놀란다”는 말처럼 도요토미는 자신이 일본을 통치하기 위해 商術(상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 하카다(후쿠오카)의 巨商(거상)인 가미야(神谷)를 찾아가 茶會(다회)를 베풀면서 협력을 구했다.
物産의 중심 오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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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카의 商人 철학자 이하라 사이가쿠의 동상. |
천하의 물산이 오사카로 집하되고, 그것이 전국으로 유통되어 오사카가 천하의 경제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유능한 상인들이 필요했다. 당시 일본에는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큰 상인들이 많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중에서 교토의 대표적 상인인 후시미 상인과 이세 상인, 오사카의 히라노 상인과 사카이의 사카이 상인을 오사카 성 아래에서 살도록 집단 이주시켰다.
후시미 상인은 본래 천황가나 쇼군가에 비단옷을 납품하던 상인이었고, 이세 상인은 칠기 밥그릇을 파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히라노 상인은 藥種商(약종상), 사카이 상인은 총을 만들어 팔던 상인이었다. 이들은 일본 각지에서 장사를 하면서 수백 년간 상업의 노하우를 꿰뚫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상인들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들을 오늘날 오사카의 중앙구 본정통 일대로 집단 이주시키는데, 이 지역을 가리켜 센바(船場)라고 한다.
센바란 ‘선착장’을 말한다. 오사카는 108개의 다리가 있는 운하의 도시다. 천하의 모든 물산들이 바다나 강을 통해 오사카로 올라오면 그것들은 다시 운하를 통해 센바에 모였다. 바로 그 센바 지역에 천하의 물산이 모였고, 천하의 상인들은 그 물건들을 오사카 성이나 교토, 그리고 전국에 보냈던 것이다.
도요토미에 의해 1580~1590년대에 오사카에 정착한 이들은 그 후 오사카를 물산의 중심, 상거래의 중심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이들이 오늘날 ‘상인의 도시’ 오사카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도요토미의 시대에 요도야 조안(淀屋常安)이라는 토목업자가 있었다. 서기 159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카 히데쓰기에게 쇼군 자리를 물려주고 교토 남부에 있는 후시미에 은거하려 했다. 이 당시 후시미에는 城(성)이 없었으므로 후시미 성을 짓는 문제가 대두됐다. 당시 공사 발주 금액은 金(금) 500관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후시미 성을 신축하려던 자리에 높이 7m, 폭 14m에 달하는 엄청난 바위가 있어 그 바위를 제거하지 않고는 공사를 할 수 없었다. 토목 담당 관리가 바위를 제거하기 위한 하도급업자 선발 회의를 주재했다. 업자들은 바위 때문에 공사를 포기했다. 그때 요도야 조안이 공사금액의 10분의 1인 50관만 받고 공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요도야 조안이 쉽게 큰 바위 덩어리를 제거해 버렸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때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요도야 조안이라는 사람을 주목하게 됐다. 이런 요도야 조안에게 두 번째로 맡겨진 일이 바로 요도가와의 제방 쌓기였다. 요도가와는 지금도 오사카 시내를 관통하는 큰 강이다. 그 강은 해마다 장마철이 되면 강둑이 무너지고, 물이 넘치는 바람에 오사카 시내가 물바다가 됐다. 더구나 요도가와 강 주변의 수백 개의 쌀 창고가 물에 잠겨 수백만 석의 쌀이 썩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요도가와의 제방은 늘 골칫덩어리였다. 해마다 응급처치로 요도가와의 둑을 보강했지만 큰물이 한 번 지고 나면 제방은 씻긴 듯이 사라져 버리곤 했다. 제방 공사를 맡은 요도야 조안의 제방 공사 공법은 이번에도 간단했다.
그가 도요토미 막부에 요청한 것은 쌀을 가득 담은 가마니였다. 그는 그 쌀을 가득 담은 가마니로 우선 제방을 쌓았다. 그러고는 돌을 가득 담은 가마니를 가져오면 그만큼의 쌀섬과 바꾸어 주겠다는 공고를 냈다. 공고가 나자마자 오사카 시내는 난리가 났다.
돌과 쌀을 같은 양으로 바꿔준다니 오사카 주민들은 너도나도 쌀 가마니에 돌을 가득 채워 요도가와로 갔던 것이다. 요도야 조안은 돌 가마니를 가져온 주민들에게 그 자리에서 쌀섬과 바꿔주었다. 즉, 쌀섬이 있던 자리에 돌 가마니를 그대로 채웠던 것이다. 주민들은 신이 나서 밤새는 줄 모르고 돌 가마니를 날라왔다.
공사는 단시일 내에 쉽게 끝났다. 쌀과 돌을 1 대 1로 바꿨으니 막대한 공사비가 들었지만 홍수 때문에 창고에 저장한 수백만 석의 쌀이 썩어버리는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이것이 상인 요도야 조안의 지혜였다. 그는 그렇게 번 돈으로 오늘날 오사카의 중심가인 나카노지마(中之島)를 개발했다.
나카노지마는 요도가와 강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삼각주 섬이다. 당시에는 갈대 숲이 우거진, 버려진 땅이었으나 요도야 조안은 거기에 제방을 쌓고 준설을 해서 나카노지마를 상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나카노지마에 무려 130개 藩(번)의 쌀ㆍ채소ㆍ생선 등의 대형 창고가 자리잡기 때문이다. 그 후 나카노지마는 일본의 3대 시장이 들어서는 상업의 메카로 자리잡았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오사카의 센바(선착장) 시장이다.
센바는 일본의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일본 최대의 시장이 된다. 오늘날 오사카를 가리켜 ‘천하의 부엌’이라 부르는 것은 이때부터 형성된 별칭이다. 이 3대 主副食(주부식) 시장은 1931년까지 400년 간이나 그 기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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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키가하라 전투도. 1600년 9월 초, 세키가하라 벌판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대신한 이시다 미즈나리 軍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대가 천하를 놓고 한판 승부를 벌였다. |
센바(船場) 商道
센바가 일본의 경제를 좌우하면서 ‘센바商道(상도)’라는 것이 탄생한다. 센바상도란 손님에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손님에게 지는 정신이었다. 그 정신의 핵심은 ‘돈을 남기는 것은 下(하), 가게를 남기는 것은 中(중), 사람을 남기는 것은 上(상)’ 이었다. 즉, 센바상도는 돈보다 가게, 가게보다 사람, 즉 고객을 가장 중시하는 정신이다.
자신을 믿어주는 고객이 있는 한 사업은 영원하기 때문에 그들은 눈앞의 이익보다, 가게를 남기는 것보다 사람을 남기고 싶어했다. 그들이 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 그들 장사꾼들은 입신출세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士農工商(사농공상)이라는 제도의 틀 아래에서 그들은 정치적으로 출세하기는 틀렸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자신이 먹을 것은 스스로 책임진다는 독립자존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또 출세가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경쟁할 필요도 없었고, 자신들의 처지를 알기에 공동으로 연대해서 장사를 도모해 나갔다.
그들은 탁상공론보다는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현장경험을 통해서 깨닫고 있었다. 세상은 산업이 발달하고 있었고, 參勤交代(참근교대 : 2년간 천황의 경호업무를 맡는 것)제의 영향으로 도로교통도 발달하고 있었다. 이동과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전국에 5개의 큰 가도가 생기고, 그 가도에는 역참이 생겨났다.
해운도 발달하고 있었다. 물자를 수송할 때 배를 이용해 막부나 다이묘(大名)가 거둔 연공미(세금)는 모두 오사카로 집결됐다. 오사카에서는 그것을 현금과 맞교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단과 술, 종이와 같은 수공업도 발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통일로 평화가 오자 농민들은 농사에 열심이었다. 황무지를 개간해서 전답은 더욱 늘어났으며, 농구가 개량되어 재배작물도 다양화됐다. 이에 따라 쌀의 생산량도 늘어났다. 이로 인해 오사카는 상인의 도시, 경제 중심지로 더욱 발전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를 천하의 중심으로 만들고 그 자신도 막대한 돈을 벌었다. 오사카 성에는 언제나 요즘 돈 약 5000억 엔(5조 원)에 달하는 금ㆍ은괴가 쌓여 있었고, 그는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지방의 성주나 신하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썼다. 그는 하루에 최대 60억 엔(600억 원)의 금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도요토미는 잘하는 자에게는 놀랄 정도로 포상을 하고, 못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형해 버리는 신상필벌의 철학을 가지고 세상을 통치했다. 또 그 자신도 사치의 극을 달렸다. 오사카 성 안에 ‘황금다실’을 만든 것이 대표적인 예다. 차 마시기를 좋아했던 그는 가로 세로 10.9cm의 황금판 20만 장을 붙여서 ‘황금다실’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약 7t의 금이 들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茶道(다도) 스승이었던 센노리큐는 “다도는 와비사비(검소) 정신의 구현인데 너무 사치하다”고 비판했다가 할복자살을 명받아 죽기도 했다. 도요토미의 시대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천하를 통일한 지 불과 15년인 1598년 위암으로 사망한다. 다시 그의 아들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하제패를 위한 한판 승부가 시작됐다.
상인이 시체를 공짜로 치워준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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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다실’ 모습. 차 마시기를 좋아했던 도요토미는 오사카 성 안에 약 7t의 금을 사용해 ‘황금다실’을 만들었다. |
그는 도쿠카와 이에야스를 찾아갔다. 당시 도쿠가와는 병사의 숫자와 병참 물자 등 모든 면에서 불리했다. 도쿠가와 군이 7만2000명인 데 비해 이시다 미즈나리 군은 8만2000명이었다. 도쿠가와 군은 천막이 모자라 병사들이 찬 이슬을 맞으면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모든 것이 열세였던 도쿠가와는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요도야 조안은 도쿠가와에게 “세키가하라 언덕에 원하는 만큼의 천막과 쌀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도쿠가와는 내심 뛸 듯이 기뻤으나 요도야 조안이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 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망설였다. 그러나 워낙 사정이 급박했던 도쿠가와는 조안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조안은 도쿠가와에게 그가 원하는 만큼의 천막을 세키가하라 언덕에 지어주었다. 곧 수천 동의 천막이 세워졌다. 도쿠가와 진영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용기백배했다.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던 도쿠가와 진영에 그보다 큰 선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1600년 9월 15일 새벽 6시부터 양 진영의 군대는 격돌했다. 결국 전쟁은 도쿠가와가 이겼다. 천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으로 굴러들어갔다. 조안은 천하의 주인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찾아갔다. 도쿠가와의 입장에서는 고맙기 그지없는 손님이었다. 도쿠가와는 조안에게 뭔가 보답하고 싶었다.
“그대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 보답하고 싶은데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얘기해 보라.”
요도야 조안은 “괜찮습니다”라고 사양했다. 주고 싶은 입장에서 상대가 사양하면 더욱 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다.
“그래도 이야기해 보라.”
그러자 요도야 조안이 겨우 대답했다.
“들판에 널려 있는 저 시체들을 치우게 해주십시오.”
도쿠가와에게는 뜻밖의 청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들판에 널려 있는 수만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던 차였다. 여름이 되면 시체가 썩어 악취가 진동할 것이고, 전염병도 우려됐다. 도쿠가와는 돈을 들여서라도 시체를 치우려 했던 판이었다. ‘이자는 지난번에는 공짜로 천막을 수천 동 지어주더니, 이번에는 시체까지 처리해주겠다고 하는구나’ 하면서 도쿠가와는 내심 감동했다. 그러나 본심을 들키고 싶지 않은 도쿠가와는 못이기는 척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 다음날부터 요도야 조안은 부하들과 함께 시체 처리에 나섰다. 시체의 수가 많았지만 시체 옆에는 그들이 쓰던 투구와 갑옷, 창과 칼이 무수히 널려 있었다. 요도야 조안은 시체를 처리하는 한편, 갑옷과 투구, 창과 칼을 따로 모았다. 결산을 해보니 시체 처리비용을 모조리 뽑고도 몇 곱의 이익이 남는 장사가 됐다.
장사꾼은 장사꾼이었다. 세상엔 공짜가 없는 법. 당시 일본의 투구와 갑옷은 매우 高價(고가)였다. 갑옷의 경우는 완전 수공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어서 지체가 높은 무사의 것은 하나를 만드는 데 3년씩 소요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 품질 좋은 칼의 값은 금과 은의 가치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요도야 조안이 투구와 갑옷, 칼과 창을 모조리 수거해 갔다는 보고를 받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릎을 쳤다.
“역시 장사꾼이다!”
요도야 조안은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오사카에 요도교라는 다리를 놓는다. 오늘날 오사카 중심에 있는 요도야바시(淀屋橋)라는 지명은 그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사의 귀재였지만 요도야 조안은 오사카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 중 하나가 나카노시마(中之島)의 개발이었다. 이후 요도야 조안 집안은 2대 겐요온(玄庵), 3대 가이사이(箇齋), 4대 가이온(庵), 5대 신고로(辰五郞)를 거치면서 천하의 巨商(거상)으로 자리잡는다. 그들의 5대 100년은 오사카 발전을 위한 헌신이었다.
특히 5대 신고로의 경우는 오사카를 ‘천하의 부엌’으로 자리잡게 하는 데 막대한 기여를 했다. 일본의 3대 시장인 쌀시장과 채소시장, 생선시장을 구축하고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오늘날 오사카가 ‘천하의 부엌’이 된 것은 쌀과 채소, 생선이라는 3대 주ㆍ부식이 모두 오사카에 입하되고 출고되기 때문이다.
이 3대 주ㆍ부식 시장은 1931년까지 무려 300년간이나 그 기능을 발휘했다. 요도야 조안의 도움으로 천하를 제패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를 상업의 중심지로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그도 세상이 발전하려면 상업이 융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사카의 3대 시장
도쿠가와 막부는 오사카에 3대 대규모 시장을 연다. 쌀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주식이다. 당시 일본에는 약 266개의 지방 다이묘가 있었는데, 그들은 최하 5만 석에서 65만 석까지의 쌀을 생산해서 연간 2000만 석에서 2600만 석 정도의 쌀이 생산되고 있었다. 문제는 이들 지방의 다이묘 중에서 두 번째로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도자마 다이묘(外樣大名)들이 상당수 있다는 데 있었다.
특히 일단 충성을 서약했으나 언제고 모반을 할 수 있는 도자마 다이묘들의 경제력을 박탈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천하의 쌀을 일단 한 곳에 모았다가 그 쌀을 다시 분배하려 한 것이다.
당시 쌀은 천하의 주식이므로 쌀의 통제야말로 지방 藩(번)의 경제력을 통제하는 지름길이었다.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쌀 시장을 오사카와 도쿄 두 곳에 두고 그것을 통제해 나갔다. 쌀 다음으로 중시된 것은 부식, 즉 채소였다. 이것 또한 오사카나 도쿄로 일단 모으는 것도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어 개설한 것이 생선 시장이다. 일본인은 지금도 생선을 쇠고기나 돼지고기보다 더 좋아하는 민족이다. 따라서 일본인의 3대 주ㆍ부식을 오사카나 도쿄 같은 대도시에 집하시켜 천하의 경제를 손아귀에 넣으려 했다. 오사카에 쌀시장, 즉 나카노시마의 米市場(미시장)이 열린 것은 그 때문이다.
나카노시마는 말 그대로 작은 섬이다. 오사카의 강과 강 사이에 있는, 서울로 치면 여의도와 같은 섬이다. 그 섬은 운하로 연결되어 있어 전국에서 모은 수백만 석의 쌀을 부리기에 좋았다. 당시 나카노시마에 집하된 쌀은 전국 생산량의 7% 정도인 150만 석 정도였는데, 이 쌀은 지방의 번에서 수집된 연공미, 즉 세금으로 거둔 쌀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지방의 번주들은 연공미를 오사카의 나카노시마 창고에 보관했는데, 지방의 번이 17세기 말에 오사카에 설치한 창고는 90개였다.
그 후 오사카가 점점 더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18세기 중엽이 되면 110개에 이르고, 19세기 전반에는 124개로 늘어난다. 이는 전국 최대 규모였다. 당시 그 창고들은 나카노시마 연안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예부터 오사카에는 ‘들어오는 배가 1000척, 나가는 배가 1000척’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쌀이나 생선 등의 입하와 출하가 많았다는 뜻이다. 전국에서 이렇게 모인 쌀은 오사카에 있는 각 번의 창고에 쌓였다.
세계 최초의 先物 거래
특히 추수가 끝난 가을철에는 막대한 양의 쌀이 전국 각지로부터 도착했는데, 커다란 배가 바닷길을 거쳐 쌀을 가득 싣고 오면 10석 선, 20석 선과 같은 작은 배들이 나가 큰 배로부터 쌀을 10섬, 20섬씩 싣고 운하를 통해 쌀창고까지 부렸다.
창고에 부려진 쌀은 오사카의 유력한 상인 중 한 사람이 수송에서부터 보관,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졌다. 그를 당시에는 창고 우두머리 상인(町人藏元) 정도로 불렀는데 쌀을 비싼 값에 팔고 못 파는 것에서부터 수송상의 손실, 보관상의 손실 등이 모두 그의 책임하에 있었다. 이렇게 창고에 쌓인 쌀은 중매인들을 모아 입찰에 부쳤다.
‘한 손에 천 냥의 돈을 들고 간다.’
오사카 상인들의 속담에 그런 말이 있다. 쌀을 사러 가는 오사카의 도매상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만큼 쌀 거래 규모가 컸다는 뜻이다. 당시 각 번으로부터 쌀을 실은 배가 도착할 때 특이한 풍속이 하나 있다. 우리말로 하면 ‘깃발통신’이라는 것이다.
가을추수가 끝나면 일본 전국 각지로부터 쌀을 잔뜩 실은 수많은 배가 올라온다. 한데 어느 날은 각 번으로부터 쌀이 일시에 한꺼번에 도착하는 때가 있다. 창고는 이미 포화상태이고, 쌀 공급이 한꺼번에 몰리므로 오사카의 쌀 도매상들은 쌀값을 후려쳐서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사려고 한다.
창고가 포화상태이므로 이제 막 도착한 쌀은 야외에 그냥 쌓아두게 된다. 이럴 때 비라도 쏟아지면 쌀이 썩어버리므로 각 번에서는 싸게 쌀을 팔아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바로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만든 방법이 깃발통신이다.
창고지기는 창고의 쌀이 넘치거나, 오사카 쌀 시장의 쌀값이 좋지 않으면 빨간 깃발을 들고 부두에서 신호를 보낸다. 당시 깃발의 크기는 가로 세로 각 90cm 정도였는데 깃발로 배의 속도를 늦추라거나 빠르게 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이 깃발신호는 깃발에서 깃발로 연결되어 오사카로부터 교토, 심지어 200km 떨어진 히메지까지 전달됐다. 즉, 오사카 미시장의 쌀값이 쌀 때는 배의 속도를 늦추어 천천히 오게 하고, 비쌀 때는 흰 깃발을 들어 빨리 오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초기 오사카 미시장은 쌀의 공개경쟁 입찰제도에 의해 판매가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이러한 입찰제도가 유지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先物(선물) 거래로 바뀐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도 격년 주기로 흉년이 들었고, 그 때문에 쌀의 공급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사카의 쌀 도매상인들은 미리 돈을 주고 쌀을 맞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요즘 말로 선물거래였다. 이것이 아시아 최초로 행해진 선물거래의 시작이다. 선물거래는 16세기 초 네덜란드 안트워프에서 처음 시작됐고, 미국이 시작한 것도 19세기 후반이었다.
그런 면에서 오사카 상인들은 뛰어난 商才(상재)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훗날 오사카 상인을 일본 최고의 상인, 나아가 일본 상인이 세계를 제패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본래 오사카 미시장의 쌀 거래는 쌀을 입찰함과 동시에 대금을 지불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쌀 수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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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월 작고한 안도 모모후쿠. 일본 닛신 식품 회장이자 인스턴트 라면 창시자다. 대표적인 ‘오사카 상인’의 후예다. |
쌀을 파는 번의 입장에서는 미리 쌀을 적당한 값을 받고 팔 수 있어서 좋고, 상인은 언제고 쌀을 사갈 수 있어서 좋은 거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藩主(번주)들의 자금 악화에 그 사정이 있었다.
각 번의 번주들은 쌀을 오사카에 올려보낼 때는 늘 고정비용이 따랐다. 농민으로부터 쌀을 공출하거나 살 때 지불되는 비용과 운반비용, 보관비용 등이 고정적으로 지출되어야 하는데, 쌀이 싸게 팔릴 경우에는 자금사정이 악화되기 마련이다. 더구나 지방 번주들은 사치가 심했으므로 늘 돈이 필요했다. 상인 입장에서는 쌀을 미리 확보해 놓아 적기에 쌀을 사들여 원하는 구매자에게 비싼 값에 팔 수 있어 좋았을뿐더러, 선물수표의 경우는 지방의 다이묘가 막부로부터 재산몰수 명령을 받거나 파산해도 막부의 회수품목에서 제외된다는 보장이 있었다.
말하자면 언제라도 쌀을 받을 수 있는 보증수표가 선물수표였고, 쌀값의 오르내림에 구애받지 않는 고정자산이었다. 이런 선물거래 수표는 쌀의 유통성을 높일 뿐 아니라, 화폐로서도 가치가 높아 당시로서는 양질의 자산이었다. 따라서 ‘쌀 수표’는 상인들끼리 서로 팔고 사는 인기품목이었다.
이런 쌀 수표의 인기가 높아지자 오사카에는 쌀 수표만 전문적으로 팔고 사는 전문 환전상까지 등장했다. 오늘날에는 오사카를 대표하는 건설회사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환전과 대부업으로 이름났던 고노이케(鴻池)가 그랬다.
城主를 이긴 상인, 고노이케
오사카의 대표적인 豪商(호상)이었던 고노이케 가문은 은행처럼 선물수표를 팔고 사고, 지방 성주인 다이묘들에게 대부업을 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오사카의 상인들이 士農工商(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적 제약을 거꾸로 商士農工(상사농공)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바로 이런 선물거래 덕분이었다.
돈이 급한 다이묘는 쌀수표를 받고 미리 선물로 쌀을 팔아 급한 불을 껐는데, 쌀수표가 쌓여가면서 결국은 상인에게 쌀을 모두 털리고 나중에는 상인에게 급전을 더 빌리기 위해 사정을 해야 하는 형편에까지 몰린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조슈번(長州藩ㆍ오늘날의 야마구치현)의 모리(毛利) 가문이었다. 조슈번의 다이묘 모리는 평소 오사카의 호상 고노이케 이치뵤에(鴻池市兵衛)로부터 돈을 자주 빌려 썼다. 금전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꾸어온 돈을 갚아야 하는데 돈이나 쌀이 없었다. 모리는 다이묘의 힘을 앞세워 채무상환을 미뤘다. 고노이케 이치뵤에는 화가 났다.
돈을 갚지 않는 것보다 다이묘의 권위를 앞세워 상인을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고노이케 이치뵤에는 그날로 거래를 중단했다. 어느 날 모리는 300여 명의 무사를 이끌고 參勤交代(참근교대)를 위해 교토로 가다가 그만 도중에서 돈이 바닥나버렸다. 아직도 교토까지는 300km가 남아있었다. 모리는 하는 수 없이 고노이케 이치뵤에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고노이케는 단칼에 거절했다. 교토까지 정해진 기일 내에 도착하지 않으면 쇼군으로부터 어떤 징벌이 떨어질지 모르므로 사정이 워낙 다급했던 모리는 다시 고노이케에게 통사정했다.
결국 고노이케 이치뵤에는 지난 날의 모든 일을 사과하고 돈을 갚겠다는 각서를 쓰면 돈을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모리는 치욕을 무릅쓰고 상인인 고노이케 이치뵤에에게 사죄각서를 쓰고 돈을 빌렸다. 다이묘가 일개 상인에게 머리를 조아린 것이다. 일본 역사상 있을 수 없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상인의 자존심이 얼마나 센지를 깨달은 모리는 얼마 후 고노이케 이치뵤에를 조슈번으로 정중하게 초청해서 극진히 대접한 후 번의 벼슬을 맡아달라고 의뢰하기도 했다. 돈이 급한 다이묘가 오사카의 상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상황이 되는 판국이니, 사무라이 정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유곽에서조차 사무라이보다 상인을 우대하게 되고, 사무라이가 상인에게 고용되는 역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덴만(天滿)의 청과물시장(靑物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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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쓰시타 전기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 |
채소를 취급하는 청과물 시장이 교바시(京橋)의 남쪽에 공식적으로 설치된 것은 1651년이었다. 교바시 부근은 예부터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오사카에는 이미 1496년경부터 청과물시장이 있었다. 오사카 성이 축성되기 전인데, 바로 오사카 성 자리에 있었던 이시야마(石山) 본원사라는 절의 신자들에게 청과물과 야채를 공급하기 위해 시장이 있었던 것이다. 이 청과물 시장을 도쿠가와 막부가 1651년에 교바시 남쪽으로 옮겼으나, 교통이 혼잡해져 상업활동이 불편해지자 상인들이 해당관청에 이전을 의뢰, 덴만(天滿)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여기서는 일본 전국에서 생산된 과일ㆍ채소ㆍ씨앗ㆍ연초ㆍ면 등을 취급했는데, 이 또한 오사카 야채상들에 의해 수집되어 교토를 비롯한 일본 전국에 퍼져나갔다. 교토는 예로부터 ‘고반자이’ 등 야채반찬과 채소요리가 유명한데, 오사카로부터 입하된 야채는 각종 절임반찬으로 만들어져 천황가와 귀족, 사무라이들에게 공급됐다. 이 채소시장은 300년간 유지되다 1931년에 오사카 중앙도매시장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어시장은 청과시장이 있던 교바시의 북쪽 입구에 있었다. 여기서는 살아있는 생선, 절인 생선, 말린 생선과 비료로 쓰던 말린 정어리 등을 취급했다. 이곳의 생선은 산지별로 西國物(서국물), 東國物(동국물), 北國物(북국물)로 분류되었는데, 서국물은 오사카 서쪽, 즉 히로시마ㆍ규슈 등지로부터 온 것이고, 동국물은 도쿄 등 관동지방, 북국물은 혼슈의 북쪽과 홋카이도에서 온 것들이었다.
이것과는 별도로 홋카이도 초입에 있는 마쓰마에 港(항)으로부터 마쓰마에몬이라는 물품이 취급되었는데, 그것은 비료로 쓰기 위해 현지에서 대량생산된 청어가루였다. 이런 생선비료들은 일본에서 화학비료가 생산되기 전까지 일본의 중요한 비료로 쓰였고, 모두 농촌지역으로 팔려나갔다.
이곳 어시장에 입하되는 생선류들은 모두 배편으로 전국 각지에서 집하됐는데, 배를 대기 쉬운 서쪽 선착장 지역의 로도(鷺島)라는 섬에 집하됐다가 1931년에 채소시장과 함께 오늘날의 오사카 중앙도매시장으로 이전한다.
이곳 어시장에 입하된 생선도 교토ㆍ나라 등지로 소매상들에 의해 퍼져나갔고, 심지어는 도쿄에까지 판매됐다. 재미있는 것은 오사카 사람들이 쇼군이 있던 도쿄로 보내는 생선이나 야채 등을 ‘내려보내는 물건’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오사카 상인의 자존심이 담긴 표현인데, 도쿄를 오사카보다 한 수 아래로 보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당시 오사카의 도매상들은 일본 전국에서 생선이나 야채를 가지고 오는 선장이나 화주에게 미리 돈을 주고 물건을 맞추었다. 이것 또한 선물거래인데, 당시 지급되던 돈은 은괴였다. 은괴를 미리 주고 얼마만큼의 생선이나 야채를 미리 선매하면, 荷主(하주)나 船主(선주)들은 그 돈으로 어촌에 가서 미리 필요한 만큼의 양을 주문했던 것이다. 이렇게 오사카 상인들은 생활의 절대필수품인 쌀과 부식인 야채ㆍ생선 판매로 부를 쌓았고, 앞서 말한 대로 결국에는 의류ㆍ옷감ㆍ미술품ㆍ무기ㆍ기름ㆍ술ㆍ종이ㆍ비단 등 거의 전 품목에 걸쳐 행동반경을 넓혀나갔으며, 나중에는 다이묘를 상대로 한 금융 대부업에까지 진출한다.
이어 17세기에는 동남아로 구리를 수출하고, 대신 물소뿔ㆍ향료ㆍ토기 등을 수입 판매하면서 거의 전 품목에 걸쳐 영향력을 확장해나갔다. 18세기에 일본에 왔던 네덜란드의 의사이자 과학자였던 시볼트(1796~1866)는 오사카를 본 후 이 나라 무역의 본거지라고 평했다. 모든 물산을 오사카 상인들이 쥐고 흔들었기 때문이다.
1600년대 이후의 오사카는 상인의 천국이었다. 정보만 있으면 물건을 사고 팔아서 막대한 부를 손에 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사카라는 장사꾼의 거리에서는 수완만 있으면 살아나갈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있었다. 오사카 상인들은 새로운 계획에 착수했다. 훌륭한 상인 양성을 위해서는 배워야 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문적인 상인 학교의 설립에 나선다.
장사꾼 학교, 회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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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경의 회덕당 모습. 회덕당은 1723년 상인 5명의 손에 의해 설립된 일본 최초의 상인학교다. |
삼성옥무우위문은 1674년생으로 본래 주택 임대업을 하던 사람이었고, 당시 50세로 가장 연장자였다. 그가 회덕당 운영의 우두머리 역이었다. 도명사옥길좌위문은 채소가게로 출발한 후 간장을 제조하여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였다. 주교옥사랑우위문은 털실 도매상, 비전옥길병위는 목재 도매상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五同志(오동지)라 부르며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장사꾼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학교설립은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서당에 해당하는 데라코야의 설립은 막부에서 인정하고 있었으나 상업고등학교에 해당하는 회덕당의 설립은 막부의 재가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 학교는 서당 정도의 규모가 아니었고, 가르치는 내용도 기초소양인 한문이 아니라 상업을 가르치는 학교를 민간인, 그것도 최하위 신분인 상인들이 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회덕당 설립을 위해서는 오사카 관청의 허가가 아니라 에도(도쿄)의 쇼군의 허가가 필요했다. 결국 오동지 중 두 사람과 초대 교장으로 내정된 나가이쇼멘(中井?庵)이 에도로 올라갔다. 그들은 쇼군 요시무네(吉宗)의 측근 중 한 사람에게 학교 설립을 허가해달라고 간청했다. 5개월의 간청 끝에 쇼군 요시무네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회덕당은 가로 20m, 세로 36m 정도의 건물이었으니, 요즘으로 치면 작은 건물이었으나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건물이었다.
이것이 1723년, 상인들의 손에 의해 설립된 일본 최초의 상인학교였다. 학생은 누구라도 입학이 가능했다. 상하,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았다. 당시 신분제도가 엄했던 봉건사회에서는 파격적인 학교였다. 학생들은 주로 상인의 자제들이었지만, 문호를 개방해서 사무라이의 자식들도 입학이 가능했다. 그러나 교실에서는 상인의 아들, 사무라이의 아들 할 것 없이 모두 평등한 대우를 받았다. 수업료는 부잣집 자제의 경우는 약간의 은(2g 정도)을 받았으나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그들이 공부하는 데 필요한 종이 한 근과 붓 한 자루를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장사꾼에게 지식과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학설 따위는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전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경영해야 하는가를 중시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고전의 고루한 세계가 아니라 거기에 쓰인 유연한 사고를 가르쳤고, 그 과정이 끝나면 고전의 비판을 통한 합리적인 사고의 배양과 한문에 대한 독해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 덕분에 회덕당에서 배운 학생들 중에는 당대를 대변할 만한 유능한 학자들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것은 고전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새로운 학문 체계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회덕당이 배출한 대표적인 상인 학자로는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 야마가타 반토(山片蟠桃), 구사마노카다(草間直方) 등이다.
한학의 소양이 어느 정도 쌓이면 이어 <대일본사>를 필사하면서 역사관을 기르게 했다. 역사관이 서면 <조선통신사와 러시아 함대 티나호의 관계>와 같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안을 가르쳤다. 그들의 교육목표는 사물의 핵심을 알게 하는 格物致知(격물치지)였다. 그에 따라 필요한 경우에는 해부학까지도 가르쳤다.
비록 상인들이 세운 학교였지만 회덕당은 이처럼 단계별로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교육을 통해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회덕당은 그 후 146년 동안 오사카의 상인을 기르다가, 1869년에 폐교한다. 일본에도 서양의 근대적인 교육제도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47년 후인 1916년에 다시 부활한다. 서양의 근대적인 교육도 오사카의 상인정신을 가르치지 못한다는 비판이 일었기 때문이다.
상인에 의한 상인의 교육을 목표로 상인들은 회덕당을 살려낸다. 오늘날 오사카대학 문학부 내에 있는 ‘회덕당센터’가 그것이다. 회덕당센터는 오사카의 여러 기업들로부터 지원받아 일본의 고전문학에서부터 중국 고전에 나오는 商道(상도)와 일본의 근대 경영사상 등에 관한 세미나를 연간 60회 정도 열고 있다. 회덕당을 통해 오사카 상인의 전통이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초기 회덕당의 교육 목표는 형식보다는 실제, 이론보다는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었고, 그러한 오사카 상인의 실용주의 정신은 훗날 파나소닉, 스미토모(住友), 미쓰이 그룹 등 세계적인 대기업을 탄생시킨다.
오사카 상인의 생활
오사카 상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생활은 검소했다.
‘인간의 의식주는, 武士(무사)는 영지에서 나오고, 상인은 벌이에서 나온다.’
상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벌이만이 그들을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제도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하는 지름길이었다. 그들은 상술을 발휘해서 자신의 지위를 사무라이와 맞먹는 위치로 끌어올리는 데 전력투구했다. 당시 사회는 비록 사농공상이라는 엄격한 신분의 틀이 정해져 있긴 했으나 실제로는 돈의 유무에 따라 사회적 대접이 달랐다. 사농공상의 가장 머리에 있었던 사무라이라 할지라도 돈이 없으면 대접을 받지 못했다. 상인들은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상도를 만들기 시작한다.
오사카의 상인이었던 이하라 사이가쿠(井原西學ㆍ1642~1693)는 겐로쿠 시대 서민의 생활을 묘사한 소설가로 유명한데 그의 대표작인 <好色一代男>(호색일대남ㆍ1682년 작)이나 <世間胸算用>(세간흉산용), <日本永代藏>(일본영대장)에서는 돈에 운명이 좌우되는 인간들의 모습과 향락적인 당시의 세태가 잘 그려져 있다. <세간흉산용>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
<핫스케(八助)라는 떠돌이 생선장수가 있었다. 그는 이문을 좀 더 남기기 위해 문어 다리 하나를 잘랐다. 본래 여덟 개인 문어의 다리가 일곱 개가 된 것이다. 그는 문어는 배가 고프면 자기 다리를 뜯어 먹는다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핫스케는 자신의 거짓말이 먹혀들자 점점 더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문어 다리를 두 개나 잘라서 팔기 시작했다. 무사는 왜 문어의 다리가 여섯 개인가 하고 물었다. 이번에도 변명을 했는데, 무사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상인이 가지고 있는 문어는 모두 다리가 여섯 개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모든 문어의 다리가 여섯 개란 말이냐. 이 문어들이 모두 배가 고파서 자기 다리를 딱 두 개씩만 뜯어먹었단 말이냐?”
그렇게 무사가 묻자 상인은 대답을 못하고 얼굴이 빨개졌다. 무사가 사실대로 말하라고 하자, 그는 자신이 문어 다리를 두 개씩 떼어냈다고 실토했다. 무사는 그 자리에서 핫스케를 체포해서 감옥에 넣어버렸다. 핫스케는 그 일로 신세를 망쳤다.>
‘이 세상에 돈처럼 재미있는 물건은 없다’는 이하라 사이가쿠의 말처럼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가 왔다. 특히 그는 부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서민들에게 부자가 되는 방법에 대해 소상하게 썼는데 그것이 <일본영대장>이었다. 이 책은 1688년에 쓰인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는데,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이 부자 되는 법이 제시되어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5냥, 가업 20냥, 저녁 늦게까지 일하기 8냥, 근검절약 10냥, 건강 7냥 등의 재료 50냥을 잘 섞어서 장자환(長者丸)이라는 환약으로 만들어 매일 아침 저녁으로 복용하면 반드시 누구나 부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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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인 학자 이하라 사이가쿠가 쓴 <세간흉산용>이란 책에 들어 있는 삽화. |
실제로 그의 책에선 위에 제시한 예 등을 비롯, 패가망신한 사례를 들었다. 꽃구경 때문에 망한 상인은 분고(豊後 : 지금의 규슈 오이타현)의 산야(三彌)이다. 그는 황무지를 개간해서 많은 돈을 벌었으나 교토에 꽃구경을 갔다가 그만 여색에 빠져 패가망신한 케이스였다. 화류계에 출입하다 망한 사람의 예로는 아버지가 한평생 모아놓은 돈으로 요정에 출입했다가 불과 4~5년 만에 망한 부호 2세를 그렸다.
오사카 상인들은 이하라 사이가쿠가 지적한 점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근검과 절약을 통한 실리적인 금전 추구로 그들의 부를 쌓아 나갔다. 한편, 상인들은 스스로 공부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시장에는 그들을 상대로 하는 도서가 쏟아졌다. 도쿠가와 막부 초기의 가나조시(假名草子)가 그 대표다. 한자가 섞인 이 책은 상인들의 교양의 원천이었다.
이렇게 형성된 오사카 상인은 상인기질과 반골기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그 속에 능청스런 유머와 번개보다도 빠른 계산속이 도사리고 있다. 오늘날 전자제품 시장 중에서 가장 큰 도쿄의 아키하바라의 상인이 제일 긴장하는 상대는 바로 오사카 사람이다.
오사카 사람은 물건값을 깎는 데 명수여서 일단 협상에 들어가면 닳고 닳은 아키하바라 상인도 두 손 들고 만다. 깎다 깎다 안 되면 상인조차 미처 찾아내지 못한 상품의 흠까지 찾아내 결국 원하는 값에 물건을 손에 넣고 마는 것이다. 상인의 고장 사람답게 상대의 심리를 꿰뚫고 흥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가져가는 것이다.
오사카 상인의 기질은 수백 년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다. 이세 상인, 교토의 후시미 상인, 히라노 상인, 사카이 상인 등의 장사 철학의 바탕 위에 장사꾼 학교인 회덕당의 교육과 이하라 사이가쿠 같은 철학자의 교훈이 보태졌다.
오사카의 대표적 商人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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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일본을 통치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
오늘날 스미토모 그룹은 스미토모 건설, 스미토모 상사, 스미토모 은행, 스미토모 금속공업 등 20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일본 거대 기업 중의 하나다. 경영의 神(신)이라 불리는 파나소닉 그룹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도 오사카 상인 출신이다. 그는 여덟 살 때 오사카의 화로가게의 애보개(아이를 돌보는 직책)로 들어갔다가, 이후 자전거포 등에서 상술을 배우고 훗날 파나소닉 그룹을 창업했다. 현재 파나소닉 그룹은 570개 계열사에 25만 명의 사원을 거느린 세계 5대 전자 회사 중의 하나다.
기린 맥주와 쌍벽을 이루는 아사히 맥주도 오사카 상인들이 만든 기업이다. 현재 아사히 맥주는 3995명의 종업원에 1조900억 엔의 매출을 올리는 일본 최고의 맥주 회사다. 산토리 위스키도 1899년에 오사카에서 창업, 종업원 수 2만1000명에 연간 1조4000억 엔의 매출을 올리는 일본 최고의 위스키 회사다.
산토리는 문화사업으로도 명성이 자자한 회사로 산토리홀과 산토리미술관이 유명하다. 산토리홀은 1969년 산토리사 창업 7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 음악계의 주요한 공연장 중의 하나다. 산토리미술관 역시 일본 고대미술ㆍ공예품ㆍ회화ㆍ도자기ㆍ염색ㆍ유리그릇 등 약 2000여 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명소이다. 산토리 위스키에는 오사카 상인의 의지와 집념, 과감한 투자정신이 담겨 있다. 그런가 하면 상인으로서 부를 축적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사회에 환원해야 하는가도 보여준다. 산토리는 지금도 위스키 한 병의 이익으로 미술관의 벽돌 하나를 쌓고 있다.
세계 최초로 라면을 개발한 닛신(日淸)식품도 오사카에서 출발한 기업이다. 닛신은 인류에게 가장 만들기 쉬운 음식인 라면을 창조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백화점 중의 하나인 다이마루(大丸)백화점도 1717년 오사카에서 창업, 현재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대형 백화점이다.
‘先義後利(선의후리)’.
다이마루 백화점은 이 한 줄의 글귀로 유명하다. ‘이익은 후에 생각하라. 먼저 고객에게 신용을 지켜라’라는 이 글귀는 오사카 상인의 대표적인 정신이다. 다이마루는 1738년 에도(도쿄)점을 낸 이후 현재까지 전국에 7개 지점을 거느린 백화점 그룹이 된다.●
▣ 오사카 상인의 商道
현재 오사카에는 100년 이상 된 점포나 중소기업이 500여 개나 있다. 그들은 수백 년간 점포마다 나름대로 상도를 가지고 살아왔다. 그들이 수백 년간 장사하면서 보고 배우고, 듣고 느낀 것들은 상인의 유전자가 되어 후손들의 피 속에 흐르고 있다. 오사카 상인 역사, 400여 년. 그것의 결정체는 다음과 같은 원칙들이다.
1.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과 교제하지 않는다. 돈만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는다면 번영하지 못한다.
2. 이익에만 혈안이 되면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외형상의 규모만 확장하게 된다. 이것은 위험하다.
3. 모든 거래는 현금으로 한다.
4. 재력 이상의 역할을 하는 인격과 신용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5. 번 돈을 유용하게 사용하면 그에 비례해서 돈이 굴러들어온다.
6. 장삿돈과 생활비는 엄격하게 구분한다.
7. 이익분배를 분명하게 한다.
8. 이익이 생기면 상업자본과 별도로 분리시켜 적립한다.
9. 간부의 태도나 언행에 따라 점원은 교육된다.
10. 동업자의 나쁜 습성에 물들지 않는다.
11. 자기 가족을 사랑한다.
12. 우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13. 자기 힘만 믿지 말고 겸손하게 손님을 맞아라.
14. 지불일에 지불하지 말고 지불일보다 먼저 지불하도록 노력한다.
15. 외상은 상인에게 필요하지만 외상의 양과 이익의 양은 정비례하지 않는다.
16. 구매자가 좋아하는 판매자가 되어야 한다.
17. 장사를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이다.
18. 먹고 입어야 예절도 안다는 말은 거짓이다. 예절을 아는 사람은 스스로 먹고 입는 것에 만족한다. 장사는 그만큼 예절이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