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淸나라 상인이 포로 200명을 데리고 왔는데, 조선이 70명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보낸 기록이 있습니다』
[대담]
朱燉植 세종大 석좌교수·前 문화체육부 장관
1937년 충남 천안 출생. 서울사대부속高·서울大 국문과 졸업. 美 하버드大 국제문제센터 국제정치학 수료. 조선일보 정치부 부장 및 편집국장,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문화체육부 장관, 정무제1장관, 세종大 석좌교수 등 역임. 現 성남아트센터 후원회장. 저서 「문민정부 1천2백일」, 「우리도 좋은 대통령을 갖고 싶다」,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 등.
申東埈 서울大·고려大 강사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역임. 現 고려大 강사. 저서 「관중과 제환공」, 「통치학원론」, 「삼국지통치학」, 「조조통치론」, 「논어론」, 「공자의 군자학」, 「실록 열국지」, 「순자론」 등 20여 권.
[대담]
朱燉植 세종大 석좌교수·前 문화체육부 장관
1937년 충남 천안 출생. 서울사대부속高·서울大 국문과 졸업. 美 하버드大 국제문제센터 국제정치학 수료. 조선일보 정치부 부장 및 편집국장,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문화체육부 장관, 정무제1장관, 세종大 석좌교수 등 역임. 現 성남아트센터 후원회장. 저서 「문민정부 1천2백일」, 「우리도 좋은 대통령을 갖고 싶다」,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 등.
申東埈 서울大·고려大 강사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역임. 現 고려大 강사. 저서 「관중과 제환공」, 「통치학원론」, 「삼국지통치학」, 「조조통치론」, 「논어론」, 「공자의 군자학」, 「실록 열국지」, 「순자론」 등 20여 권.
「三田渡의 굴욕」은 민족의 恨(한)으로 남았지만, 丙子胡亂 이후 60만 명의 조선인이 노예로 팔려 간 사실은 역사에서 잊혀졌다. 1000만 인구의 6%가 瀋陽(심양) 노예시장으로 끌려갔지만, 조선은 그저 대책 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朱燉植(주돈식·70) 前 문화체육부 장관이 기구한 민족사의 裏面(이면)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했다.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라는 제목 그대로 丙子胡亂 당시 끌려간 민초들의 이야기와, 이후 孝宗(효종)에 의해 살아나는 북벌의 혼이 담겨 있다.
月刊朝鮮은 역사 속으로 잊혀져 간 조선 민초들의 피눈물을 되새기고자 朱燉植 前 장관과 申東埈(신동준·51) 박사 대담을 마련했다. 두 사람은 丙子胡亂, 조선 포로 60만, 昭顯世子(소현세자)의 사망, 그리고 孝宗의 북벌 등을 놓고 열띤 대화를 나눴다.
淸太宗實錄에서 출발
申東埈 조금은 생소한 주제인데, 자료 수집에 어려움이 많았겠습니다.
朱燉植 꽤 어려웠습니다. 사실상 총서가 「淸太宗實錄(청태종실록)」입니다. 몇 권 구했는데, 읽을 수 있어야죠. 「노예시장」과 같이 큰 제목은 대충 아니까, 필요한 부분만 번역을 했습니다.
申東埈 납치된 조선 백성 60만 명에 대한 부분은 사료를 많이 참고하신 것 같습니다. 당시 60만 명이면 정말 대단한 것 아닙니까.
朱燉植 그럼요, 조선 인구를 1000만 명으로 계산한다면 6%에 이르죠.
申東埈 다른 학자들은 丁卯胡亂(정묘호란) 때도 수만 명이 끌려갔다고 합니다. 물론 丙子胡亂이 시일이 길었고, 규모도 컸기 때문에 충분히 수십만이란 추측이 가능한데요.
60만과 함께 의미 있는 대목이 昭顯世子의 급사 부분입니다. 원래 통설처럼 전해진 것은 독살설 아닙니까.
朱燉植 그렇죠. 독살설이 있고, 또 仁祖가 龍硯(용연)을 던져서 죽었다는 설이 있죠.
申東埈 벼루를 던졌다는 것은 일단 野史(야사)입니다. 책은 이 부분에 이의를 제기한 셈입니다. 2006년 7월 昭顯世子의 「東宮日記(동궁일기)」가 완역되면서, 독살설이 기존의 내용과는 다르다고 발표되었습니다. 이 책은 瀋陽狀啓(심양장계)와 瀋陽日記(심양일기) 등을 인용해서 병이 있었다고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살설이 위력을 떨치는 이유는 昭顯世子가 조선으로 돌아와서 갑자기 죽게 된 배경입니다. 침을 연속으로 맞았고, 昭顯世子의 아들은 귀양 가서 비참하게 죽었죠. 姜嬪(강빈)은 사약을 받았습니다. 전후 맥락을 보고 이렇게 추측을 많이 합니다.
책에서는 독살이 아니라 간경화에 의한 病死說(병사설)을 주장했는데, 이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요.
朱燉植 가장 생생한 기록이 「王朝實錄(왕조실록)」인데, 그것은 체제 편에서 쓰는 것이거든요. 姜嬪의 경우도 그렇고, 사후에 벌어진 상황을 타당하게 바꿨을 수 있죠. 반대편에서 쓴 기록은 없으니까요.
申東埈 저 개인적으로는 아직 昭顯世子의 독살설에 좀더 무게를 둡니다. 더 중요한 것은 동궁일기를 쓴 사람이 昭顯世子가 아니라는 것이죠. 실록과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당시의 약재와 증상을 토대로 현대 한의사들이 간경화의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을 내렸는데, 치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朱燉植 네, 昭顯世子와 鳳林大君(봉림대군)이 중국에 8년간 머무를 당시 기록이 나중에 나온다면 좀더 입체적으로 사실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申東埈 검찰사였던 金慶徵(김경징)을 책에선 아주 실제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朱燉植 金慶徵에 대해선 이야기가 더 많이 있어요. 淸나라 군대가 그의 집에서 3일 정도 머물렀습니다. 그때 金慶徵의 부인이 집에 남았는데, 그게 이상한 점입니다. 집에 보물과 패물이 많아서 할 수 없이 淸軍과 함께 살았던 것 같습니다. 金慶徵 본인뿐 아니라 부인에게 문제가 많았다는 거죠. 한 기록엔 金慶徵 부인 얘기가 나오면 사람들이 마구 침을 뱉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증오를 많이 받은 모양이에요.
丙子胡亂은 仁祖와 西人세력이 자초
![]() |
| 淸太宗 皇太極(청태종 홍타이지·1592~1643). |
책은 기본적으로 크게 네 가지 시간대로 나뉩니다. 丙子胡亂, 조선포로의 납북 과정, 昭顯世子의 사망, 마지막으로 북벌이죠.
金自點(김자점)의 狀啓(장계)와 함께 이야기는 긴박하게 시작합니다. 丙子胡亂 배경에 대한 설명 없이 바로 사건으로 들어가는데, 丙子胡亂 자체가 仁祖를 비롯한 西人(서인)세력들이 자초한 면이 있는 것 아닌가요.
朱燉植 서인들이 「별것 아니다」라고 상부에 보고했죠. 淸太宗은 丁卯胡亂을 한 번 치러 봤기 때문에 조선의 실력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침략군의 선봉인 龍骨大(용골대)와 馬夫大(마부대)가 장사꾼으로 변장해 전국을 돌며 현지 점검까지 하지 않습니까. 많은 준비를 했던 것 같아요.
申東埈 龍骨大와 馬夫大는 소위 만주족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인데, 그들이 장사꾼으로 변장했다는 가정은 사실과 다른 것 아닌가요.
朱燉植 龍骨大의 骨大, 馬夫大의 夫大가 바로 관직 이름입니다. 침략군의 여단장 격으로 나오죠. 그런데 仁祖는 이들이 변장하고 왔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엔 淸太宗의 사신들이 직접 침략에 대한 암시를 줬는데, 오랑캐 하면서 묵살을 했죠.
申東埈 그런 면에서 보면 확실히 丙子胡亂은 조선이 자초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朱燉植 그렇죠.
申東埈 결과적으론 조선인들이 피해자였습니다. 丁卯胡亂 때는 평양까지 순간적으로 3만 군대가 와서 淸軍이 뒤를 염려해 바로 화의가 성립됐습니다. 그런데 丙子胡亂 때는 충분히 예고된 전쟁이었는데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 못하고 허겁지겁 도망가기에 바빴죠.
朱燉植 일주일 내려와서 수도를 지나 남한산성까지 포위했습니다.
申東埈 포위하는 과정을 보면 淸나라 軍의 특징인 「짐승몰이」와 닮아 있습니다. 만주족이 원래 굉장히 전투적이에요. 수렵을 하면서 농경을 하고, 거기에 유목을 합니다. 淸 이전엔 金나라를 세운 걸 보면 결코 미개한 민족이 아니었어요. 책에서 나온 대로, 큰 틀에서 보면 고구려 민족으로 볼 수 있죠.
朱燉植 그렇죠.
조선의 장수, 부하 말발굽에 밟혀 죽어
![]() |
| 淸太宗이 자신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三田渡碑(삼전도비). 2007년 2월 철거를 주장하는 백모씨가 스프레이로 훼손했고, 3개월 만에 복구됐다. |
조선시대 명분을 중시하는 사대부들이 볼 때 오랑캐는 결코 황제가 될 수 없었죠. 계속 반발하고, 요구를 안 듣는 조선을 皇太極(홍타이지)가 10만 대군을 동원해 친 겁니다. 점령하기보다는 순간적으로 기습해서 제압한 거죠. 그런 점에서 보면 조선이 자초한 결과라는 측면이 강한데, 책에는 그런 부분이 덜 부각된 것 같습니다.
朱燉植 덜 부각된 면이 있죠. 사실 그때 조선이 明나라를 너무 일방적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淸의 동태나 성장과정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었어요. 한마디로 淸을 몰랐던 거죠.
또한 主和派(주화파)의 대표인 崔鳴吉(최명길)을 비롯, 洪瑞鳳(홍서봉)·金藎國(김신국) 등이 淸과 실무적인 접촉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이 문집이나 관련 글들을 남겼을 가능성이 큰데, 시간을 갖고 살펴볼 대목입니다.
말을 못 타는 조선의 장수들
申東埈 仁祖가 여러 가지 열등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왕이 되는 과정이 그랬잖아요. 명분을 앞세운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치니까 이를 만회하기 위해 오히려 自激之心(자격지심)으로, 강경노선으로 간 측면이 있습니다. 조금 대비를 한 후에 치받기라도 해야 하는데, 무턱대고 明나라만 믿었어요. 근거 없는 낙관론에 기초했던 것이죠.朱燉植 反正(반정)으로 잡은 정권이라 그런지 안보문제와 대륙정책 같은 것에까지 생각이 못 미쳤던 것 같습니다.
조선 군대의 수준이 얼마나 낮았는지 보여 주는 예가 있습니다. 許完(허완)이란 이름의 장수가 있었는데,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李舜臣(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丙子胡亂까지 세월이 많이 흘러 장수가 늙어 말을 못 타는 겁니다. 경상도에서 충주까지 4만여 군대를 이끌고 왔다가 淸에 대패한 후 부하의 말발굽에 밟혀 죽습니다.
申東埈 완전히 코미디네요.
朱燉植 코미디죠. 각 장수들의 전투 능력이나 기력을 점검할 시간이 없었는지, 아니면 안 했는지… 軍의 총수가 軍 관리를 전혀 안 한 상태였죠.
申東埈 淸나라 군대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부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직적으로 훈련된 八旗軍(팔기군)이 있었고, 明나라 장수가 귀순하면서 紅夷砲(홍이포: 중국식 대포)를 갖고 왔어요. 그런 상황에서 전혀 대비를 안 했으니, 그런 시국적인 사건이 벌어진 거죠.
朱燉植 조선 군대는 평소에 농사 짓다가 상황이 벌어지면 소집하는 체계였습니다. 淸나라가 워낙 기습작전으로 왔기 때문에 소집할 겨를이 없었죠. 소집을 한다 해도 응하는 사람들이 무기나 장비, 복장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였습니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얼어 죽고 굶어 죽고 그랬죠.
벼슬하던 양반들이 장수를 겸한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현장에 나가 훈련 한 번 안 해본 장수들이 많았어요. 시키면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자기들끼리 서로 충돌이 일어나고 말도 아니었죠.
申東埈 근왕병이라 각 道(도) 여기저기에서 왔습니다만, 모두 패퇴했습니다.
朱燉植 두 가지입니다. 淸軍과의 전투에서 패한 경우와 아예 오지 않은 경우입니다. 경상도의 4만 군대는 충주까지, 함경도 군대는 파주, 황해도의 金自點이 이끄는 군대는 가평 쪽으로 가서 숨어 버립니다. 전라도의 수군은 원래 서해로 가서 한강을 끼고 올라와야 하는데, 동해로 가버립니다.
仁祖, 자신의 보위 유지에만 관심
![]() |
| 崔鳴吉의「遲川集(지천집)」17권. 청나라에 잡혀간 포로의 수가 50여만 명이라고 명기돼 있다. |
朱燉植 仁祖뿐 아니라 주변에 있던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모두 조선의 체제 유지에만 매달린 거죠. 백성을 돌보지 않았다는 게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포로를 데려가겠다는데 포로가 몇 명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국가가 잘못해서 만주까지 팔려갔는데, 나랏돈 주고 사온 후 천인이 되게 합니다. 지금 관점에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해야 할 판인데, 오히려 노비나 기생 등 천인이 된 거죠. 백성을 너무 천시했어요.
申東埈 한 淸나라 상인이 포로 200명을 데리고 왔는데, 조선이 70명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보낸 기록이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죠.
노예들은 주로 농사를 짓는 데 투입되거나 전쟁에 끌려갑니다. 여자들은 만주 귀족들의 侍妾(시첩)이나 노비로 갔습니다.
책에서는 특히 경제적인 면이 부각됐는데, 속환할 때 분명 조선인 자체적으로 자기네 사람의 가격을 올렸어요. 仁祖를 포함해 벼슬아치들부터 민초들의 현실에 관심이 없었다는 겁니다.
仁祖가 三田渡의 굴욕 후 도성으로 갈 때 백성들은 『우리를 버리고 임금이 어디로 가시나이까』하며 통곡했다고 실록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항복의 명분이 있다기보다는 一身(일신)의 안녕과 一族(일족)의 안녕을 위한 듯싶습니다.
朱燉植 그럼요.
허공을 붙잡고 산 조선
申東埈 조선은 淸 제국이 확고하게 선 이후에도 明나라와의 명분 때문에 성리학의 허공을 잡고 있었죠.구한말 아시아에 서구열강이 들어왔을 때, 다른 나라들은 조금이라도 싸웠지만, 조선은 전쟁 한 번 못 해 보고 일본에 망했죠. 모두 丁卯·丙子胡亂 때부터 시작된 후유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명분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中華(중화)」입니다. 조선에서 자꾸 明나라와의 관계를 들먹이며 『임진년에 明의 神宗(신종·1563~1620)이 천하의 군사를 동원해 우리를 구해줬기 때문에 그 의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니까 淸太宗이 이런 말을 했죠.
『천하는 크고 나라는 많은데 너희를 구해준 것은 오직 明나라뿐이다. 어찌하여 천하의 모든 군사가 다 왔다고 하는 것이냐』
明나라라고 천명을 수천년 이어갈 수 없고, 지금은 천명이 만주족에게 왔다는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천하의 주인은 늘 바뀔 수 있다는 것이죠.
3일 뒤에 보낸 것은 더 통렬합니다.
『이 조그만 산성을 취하지 못한다면, 내 어찌 중국 본토로 내려갈 수 있겠는가. 만일 간사한 꾀를 구사해서 너를 잡는다 할지라도, 어찌 크나큰 천하를 모두 간사한 꾀로 속여 취할 수 있겠는가』
얼마나 正正堂堂(정정당당)하고 浩浩蕩蕩(호호탕탕)합니까.
『皇太極은 스케일의 차원이 달랐다』
![]() |
| 淸나라 八旗軍의 모습. |
그때 淸太宗은 『내가 다 살려 준다고 했으면 살려 주고 가야지, 포위하고 있다가 하나씩 나눠 먹고 가면 되겠냐. 그럼 의리 없어서 안 된다』고 합니다.
申東埈 남한산성을 포위했을 때의 대화인가요.
朱燉植 네, 장군들과 대책회의 때 분배론이 나왔죠. 皇太極은 처음부터 스케일이 달랐어요. 신의·실리·전략 모두 중원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申東埈 여러 가지로 따져 보면 淸太宗의 집안은 조선초기 함경도 북쪽 사람들의 후손이거든요. 같은 뿌리인 것도 모르고 淸나라가 황제를 칭하니까 「오랑캐가 감히」 하며 벌컥 뒤집어졌죠. 조선이 너무 성리학에 찌든 바람에 천하의 주인이 바뀔 수 있다는 걸 간과했습니다.
조선후기 실학에서 淸朝를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여러 논쟁이 있었습니다. 朴趾源(박지원)의 경우 「熱河日記(열하일기)」 등에서 나타나듯이 淸이 세계의 제국이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宋時烈(송시열)을 비롯한 주류 세력들은 계속 「오랑캐」라 해서 받아들이지 않았죠.
이 비극이 모두 한 많은 백성의 고초로 이어졌다는 겁니다. 조선조 최대의 치욕적인 일이었죠.
朱燉植 맞습니다. 최대 치욕이죠. 우선 우리가 너무 대비를 소홀히 했고, 세계의 움직임을 모른 채 明만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孝宗 때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왕이 두 달 동안 포로생활을 직접 목격한 경험이 있어 그들의 恨을 더 잘 알았으리라 봅니다.
朱燉植 淸太宗이 죽고, 順治帝(순치제)-康熙(강희)-乾隆(건륭)으로 이어지는데 그때 北京(북경)으로 천도를 합니다. 허허벌판인 만주에는 살지 말라는 「封禁政策(봉금정책)」으로 만주가 비었었어요. 孝宗의 북벌은 그 틈을 타 압록강을 건너고자 했던 겁니다. 워낙 恨 맺힌 사람 아닙니까. 다만, 그의 북벌이 만주를 다 「먹으려」 한 건 아니었어요.
孝宗의 북벌
申東埈 중원을 점령한 淸이 封禁을 한 이유는 만주 八旗軍(팔기군)의 순수성과 혈통·혈족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원을 완전히 석권한 이후 淸이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이죠.
鳳林大君 시절부터 孝宗은 昭顯世子와 다른 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昭顯世子는 학구적이면서 외교적인 반면, 孝宗은 군사적인 면이 더 강했죠. 그러다 결국 그도 급작스럽게 죽어 독살설의 대상이 됐죠. 책에서는 宋時烈에 대해 사실적인 분석을 했네요.
孝宗이 죽기 전 宋時烈과 독대를 합니다. 孝宗은 북벌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宋時烈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어요. 그후 급작스럽게 죽어 독살이 아니냐는 말이 나옵니다.
책은 孝宗의 아들 顯宗(현종)이 북벌의 뜻을 이어받아 대업을 이루겠다고 하면서 대미를 맺습니다. 그런데 사실 孝宗이 죽으면서 북벌론은 완전히 끝난 것 아닙니까.
朱燉植 顯宗의 경우 일곱 공주 틈에서 자란 개인적인 성장과정이 영향을 끼쳤죠. 일단 마지막 순간에 좌절되긴 했지만, 文弱(문약) 일변도로 왔던 조선사에 文武(문무)의 밸런스를 어느 정도 맞춘 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벌은 일종의 사회운동』
申東埈 조선조 초기의 상무정신이 어느 순간 사라졌는데, 孝宗은 확실히 武風(무풍)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壬辰倭亂 때 明나라의 장수도 성리학 일변도의 조선을 질타한 적 있죠. 특히 문관이 무관직을 겸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게 안 고쳐지는 거예요. 결국 이는 大院君(대원군)에 와서야 개혁이 됐습니다. 그런 점에선 孝宗의 역사적 안목을 상당히 높게 평가할 만합니다.노비 推刷(추쇄)에 대해 깊이 언급돼 있는데 이에 대한 사료가 많이 있습니까. 실록엔 별로 안 나와 있던데요.
朱燉植 「推刷都監儀軌(추쇄도감의궤)」란 책이 있습니다. 국립도서관에 딱 두 권 보관하고 있어요. 成宗(성종) 때 인적자원을 확보하고자 했는데, 난리를 겪으면서 제도가 헝클어집니다. 그래서 실패한 것을 孝宗이 다시 강력하게 추진합니다. 반대하는 사대부들에게 화를 많이 내고 했죠. 사료에 한심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니, 얼마나 분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申東埈 1차 사료를 통해 노비들을 군역으로 전환해 무력을 강화했다는 대목은 역사소설 이전에 사실 발굴 차원에서 상당히 의미 있다고 봅니다.
朱燉植 孝宗의 북벌은 일종의 사회운동입니다. 文武의 균형을 잡은 것뿐 아니라, 노비를 찾아 주고,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推刷御使(추쇄어사)까지 두고 점검했습니다.
大同法(대동법)을 시행하고 구리돈을 사용하게 했어요. 죄인을 때려죽이는 사형방식을 사약을 내리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孝宗은 북벌과 함께 사회운동을 겸했습니다.
申東埈 새 정부가 출범한 시점인데, 丙子胡亂을 통해 현대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나라의 위상이 그때와는 분명 다르지만 아직 남북이 갈라져 있고, 여러 열강들 틈에 끼여 있는 건 丙子胡亂 때나 100년 전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정리·金正友 月刊朝鮮 인턴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