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의 어느 하부 조직이 독단적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했을 가능성이 있다」(게리 하트 상원의원)

- 1963년 11월22일 피격 직전의 존 F.케네디.
온라인 신문 「살론닷컴」(Salon.com)의 창립자인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탈봇이 지난가을에 펴낸 이 책은 케네디 형제가 죽게 된 배경을 다루고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주변 사람들의 새로운 증언을 많이 담고 있는 이 책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이 오스월드의 단독범행이 아님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물론 저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당시 케네디 형제가 처했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어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1963년 11월22일 존 F. 케네디는 텍사스州(주) 댈러스 방문 중 암살당했다. 법무장관이던 로버트 케네디는 그 소식을 에드거 후버 FBI 국장으로부터 들었다. 로버트는 『후버의 목소리는 케네디의 사망을 즐기는 것 같은 퉁명스러운 調(조)였다』고 말했다.
로버트는 정부內에서 무슨 일이 생겨서 자신의 형이 죽었다고 직감했다. 형의 암살 소식을 듣는 순간에 로버트는 CIA 국장이던 존 매콘과 함께 있었다. 부유한 공화당 정치인 출신인 매콘은 CIA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매콘은 케네디 암살자가 두 명이라고 생각했다』고 주변 사람들이 전했다.
로버트는 형의 죽음이 CIA와 마피아, 그리고 쿠바와 관련 있다고 믿었다. 에드거 후버는 『오스월드가 아마 쿠바의 요원일 것』이라고 말했지만, 로버트는 후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스월드가 잭 루비에게 살해당하자 미국이 마치 갱들의 세계로 전락한 것처럼 보였다. 로버트는 측근을 시켜 잭 루비의 배후를 조사하게 했다. 루비는 시카고 마피아의 멤버임이 드러났다. 로버트는 친구 빌 월튼을 비밀리에 모스크바에 보내서 크렘린이 형의 암살에 관련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크렘린은 자신들이 관련되지 않았다고 확인해 주었다. 로버트는 형과 자신이 미국 정부內 기존 세력과 전쟁을 벌인 결과로 형이 죽었다고 확신하게 됐다.
軍部, 대통령과 국방장관 지시 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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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6월5일 서한 서한에게 피격당해 쓰러진 로버트 케네디. |
케네디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美軍(미군) 지휘부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猛將(맹장)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공군참모총장은 독일과 일본에 대한 무차별 융단폭격 전략으로 유명한 커티스 르메이 大將(대장)이었고, 해군참모총장은 구축함 戰團(전단)을 최고속도로 몰아붙이는 전술로 명성을 얻은 알레이 버크 대장이었다.
이들은 젊은 대통령이 나치에 대한 宥和主義(유화주의)를 주장했던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주도하는 합동참모본부는 젊은 대통령과 포드 자동차 전문경영인 출신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의 지시를 공공연하게 무시했다. CIA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과 마찬가지로 앨런 덜레스가 계속 국장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케네디 형제는 軍部, CIA, FBI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에 CIA가 수립한 쿠바 침공 계획을 승인했다. 1961년 4월17일 CIA가 이끄는 쿠바 反共 민병대는 쿠바의 피그스灣(만)을 침공했다. 이들은 늪지에 상륙했으나 쿠바軍(군)의 우세한 화력에 무너졌다. 기대했던 美 공군기는 지원폭격을 하러 오지 않았다.
케네디를 학생 다루듯한 합참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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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네디 대통령 당시 美 합참 수뇌부. |
1961년 7월 합참의장 렘니처 대장은 核(핵)미사일로 소련을 先制(선제)공격하는 전쟁계획을 케네디 형제에 대해 브리핑했다. 렘니처는 선생이 학생 대하듯이 대통령을 대했다.
얼마 후 쿠바의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군복 차림으로 뉴욕의 유엔 본부를 방문했다. 케네디 형제는 이들을 일종의 知的(지적) 호기심을 갖고 보았다. 軍部와 보수층은 이 같은 케네디의 반응에 경악했다.
그해 가을 케네디는 피그스灣 침공의 실패에 대한 문책으로 CIA의 덜레스 국장과 비셀 부국장을 파면했다. 나중에 CIA 국장이 된 리처드 헬름스 등 CIA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케네디 형제를 어떻게 보았을지는 상상할 수 있다. 이어 케네디는 공공연하게 대통령을 무시한 렘니처 합참의장을 경질하고, 학자風(풍)의 맥스웰 테일러 대장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軍·CIA·마피아의 이해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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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 (데이비드 탈봇, 프리 프레스, 478쪽) |
마피아는 로버트 케네디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로버트의 아버지는 마피아의 친구였고, 그의 형은 마피아 덕분에 대통령에 당선됐기에, 특히 그러했다.
마피아가 케네디 형제에게 분노한 이유는 또 있었다. 마피아는 쿠바의 호텔 카지노 등 위락시설에 많은 투자를 했는데, 카스트로에게 빼앗겼던 것이다. 마피아는 케네디 행정부가 쿠바에 침공해서 그들의 재산을 도로 찾아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것이 無爲(무위)로 돌아간 것이다. 쿠바에 대해 美 軍部·CIA 그리고 마피아가 같은 입장을 갖고 있었다.
1962년 5월 한 흑인 학생이 흑인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 미시시피 주립대학에 등교하려 하자 백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미시시피 경찰은 폭도들을 제어하지 않았고, 흑인 학생을 호송하던 연방 보안관들은 생명에 위협을 받았다.
로버트 케네디의 요청에 따라 케네디 대통령은 육군 부대의 투입을 명했다. 하지만 이런 지시에 불만을 느낀 육군은 출동을 지연시켜서 상황이 거의 끝날 무렵에 도착했다. 백악관에 대한 軍部의 불신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1962년 10월 미국의 U-2 정찰기는 소련의 미사일이 쿠바에 설치되고 있음을 밝혀 냈다. 합동참모본부에선 의장인 테일러 장군만이 온건파였다. 공군참모총장 르메이 대장은 『쿠바를 당장 폭격하자』고 했다. 『소련의 보복이 있지 않겠냐』는 케네디의 질문에 르메이는 『소련은 달리 취할 조치가 없다』고 했다.
케네디는 쿠바 봉쇄에 나선 해군 戰團이 쿠바에 임의로 작전할 가능성을 경계했다. 앤더슨 해군참모총장은 대통령과 국방장관에게 『그것은 해군의 영역이지 당신들의 관할이 아니다』라고 대들었다. 소련이 미사일을 철수하지 않으면 케네디 대통령은 전쟁을 하자는 장군들을 억제할 수 없게 됐다.
로버트는 워싱턴 주재 소련대사 도브리닌에게 미사일 철수를 애원했다. 장군들은 케네디 형제의 이런 모습을 조롱했다. 케네디 형제는 軍部 몰래 터키에서 미국 미사일을 철수하고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소련에 약속했다. 그러자 비로소 소련은 미사일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르메이 공군참모총장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수치』라고 공공연하게 대통령을 비난했다.
軍과 CIA, 케네디의 베트남 철군에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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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잭 루비에게 피살되는 순간의 케네디 암살범 오스월드. |
쿠바 난민단체는 자신들 단체의 뉴올리언스 지부에 가입한 후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 카스트로를 찬양하는 활동을 하는 리 하비 오스월드라는 전직 해병대원을 수상하게 생각했다.
피그스灣 참전용사로서 쿠바 난민단체를 이끌던 안젤로 무가도는 『오스월드가 FBI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로버트 케네디에게 알려 주었다. 형이 암살당한 직후 로버트가 FBI를 의심한 것은 무심히 흘려들었던 무가도의 말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1963년 6월10일 케네디 대통령은 아메리칸 대학에서 『미국과 소련이 군사주의의 차가운 魔手(마수)를 벗어나자』고 제안하는 연설을 했다. 그해 8월 「核실험 금지조약」이 조인되었다. 세계가 美蘇(미소) 核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케네디가 당면했던 또 다른 문제는 베트남이었다. 케네디가 베트남 문제를 존슨과 달리 접근했을 것인지에 대해선 많은 논쟁이 있다. 근래에 공개된 자료는 케네디의 진심이 撤軍(철군)에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케네디는 1963년末 군사고문단 1000명을 철수하고, 1964년 大選(대선)에서 승리한 후 완전히 철군할 생각이었다. 軍部와 CIA는 백악관의 이런 움직임에 강력히 저항했다.
케네디의 진보적 정책에 대해 美 남부의 백인 유권자들은 분노했다. 1964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케네디는 남부 유권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선거인단 표가 많은 텍사스를 잃어버리면 케네디는 再選(재선)을 자신할 수 없었다. 린든 존슨 부통령이 텍사스 출신이지만 텍사스의 민심은 이미 케네디를 떠나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케네디는 댈러스를 방문하기로 했다.
텍사스 주지사이던 보수성향의 존 코널리는 비록 민주당원이기는 했지만 케네디의 방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반면 진보성향의 야보로 상원의원은 케네디의 방문을 적극 추진했다.
「보이지 않는 정부」에 희생된 케네디
적대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댈러스 시내에서 오픈카 퍼레이드를 하는 것은 보안 측면에서 볼 때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은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는 式(식)의 케네디家(가)의 무모함 때문에 케네디는 11월22일 오픈카를 타고 시내를 누비다가 델리 플라자 코너에서 총탄을 맞았다.
사건 후 FBI는 오스월드가 교과서 빌딩 6층에서 케네디를 단독으로 저격했다고 발표했다. 저격범이 12.78달러짜리 라이플로 6초도 안 되는 순간에 3발을 발사해 멀리 아래에서 움직이는 차에 탄 대통령을 맞힌 것이다. 형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로버트는 미국에 「보이지 않는 정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형의 죽음을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케네디 암살을 조사한 워런 위원회는 암살은 오스월드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에 대해 법무장관이던 로버트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형이 죽은 후 권한과 영향력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 로버트는 달리 취할 조치가 없었다. 워런 위원회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 멤버는 CIA 국장에서 물러난 앨런 덜레스였다. 덜레스는 CIA와 쿠바의 관계 등 CIA에 관한 문제가 위원회에서 거론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로버트 케네디, 『음모가 형을 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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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11월22일 피격 순간의 존 F. 케네디. |
암살 당일 대통령의 리무진 바로 뒤를 따라간 차에는 케네디 형제의 측근인 케니 오도넬과 데이브 파워스가 타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이들은 처음 두 발의 총성은 前方(전방)에서 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서 이들은 『총탄이 모두 오른쪽 뒤에서 발사됐고, 전방에서 발사된 것으로 들은 것은 혼란 때문』이라는 FBI의 설명에 동의했다.
1964년 8월, 로버트는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발표했다. 상원의원이 된 후 로버트는 형의 죽음의 진실을 캐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상원의원으로서 로버트는 인종 갈등과 빈곤 문제에 큰 관심을 두었다. 그러면서 로버트는 『내가 대통령이 되어야만 형의 암살 진상을 밝힐 수 있다』고 주변에 말했다.
1966년 末 「케네디 암살범은 한 명이 아니라 두세 명」이라고 주장하는 책이 몇 권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됐다. 1996년 11월호 「라이프」誌(지)는 케네디 암살이 오스월드의 단독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내용을 담은 특집을 내보냈다. 1967년 들어서 한 여론조사는 美국민의 60%가 「케네디 대통령이 음모로 암살됐다」고 믿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1967년 초 뉴올리언스의 연방검사 짐 개리슨은 케네디 암살을 다시 수사한다고 발표했다. 개리슨은 『케네디가 뉴올리언스에서 시작된 음모로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그해 2월 개리슨이 관련자로 지목해 수사를 받던 사람이 돌연히 죽었다. 3월 개리슨은 뉴올리언스의 명망 있는 사업가 클레이 쇼를 오스월드의 배후로 체포했다.
개리슨은 연일 선정적 修辭(수사)를 동원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개리슨은 『오스월드는 카스트로를 제거하기 위해 CIA가 훈련시킨 요원이며, 단지 케네디 암살을 쿠바의 소행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로 분장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개리슨 검사의 배후를 알아보기 위해 법무부 시절의 동료이던 월트 세리단을 뉴올리언스로 파견했다. 세리단은 개리슨이 뉴올리언스 마피아와 관련이 있음을 알아냈다. 개리슨의 수사에 무리가 많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고, 결국 1969년 3월 클레이 쇼는 無罪(무죄)평결을 받았다. 개리슨의 무리한 수사로 인해 케네디 암살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여론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1967년 3월 로버트 케네디는 상원에서 北베트남에 대한 공습 중지와 협상으로 통한 전쟁 종식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로써 로버트는 존슨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결별했다.
그러자 「로버트가 카스트로 암살을 지시했고, 그로 인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음해성 기사가 언론에 등장했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 지친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퇴진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로버트는 맥나마라에게 자기 편에 서줄 것을 요청했다. 맥나마라는 이를 거절하고 존슨이 마련해 준 세계은행 총재 자리를 수락했다.
형의 이름 부르며 죽은 로버트 케네디
1968년 초 평화를 내건 유진 매카시 의원은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존슨 대통령에게 근소한 차이로 따라 붙어 충격을 주었다. 大選 경쟁에 더 이상 局外者(국외자)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로버트 케네디는 뒤늦게 후보 출마를 선언했다.
그해 3월31일 존슨은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민주당 예비선거는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과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의 3파전으로 진행됐다. 민주당의 진보진영은 로버트가 오히려 진보 표를 분산시킨다고 비난했다.
1968년은 분노와 폭력이 함께하던 해였다. 4월4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멤피스에서 피살됐다. 로버트는 인디애나州와 네브래스카州 예비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5월 말에 치른 오리건州 예비선거에선 매카시가 승리했다.
문제는 대의원 수가 많은 캘리포니아州였다. 만일 캘리포니아에서 패배하면 케네디家의 神話(신화)는 끝나는 것이었다. 로버트와 케니 오도넬, 피에를 샐린저 등 그의 보좌관들은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민심을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로버트는 캘리포니아에서 大勝(대승)을 거두었다.
6월5일 로스앤젤레스의 앰배서더 호텔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나오던 로버트는 서한 서한이라는 24세의 팔레스타인 청년에게 저격됐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 다음 날 운명했다. 총에 맞은 로버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잭(존 F. 케네디의 애칭), 잭』이었다. 그는 최후의 순간 형을 불렀던 것이다.
CIA-마피아-쿠바 망명단체 3角 커넥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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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워드 헌트. |
「워터게이트 사건」 후 의회는 베일에 싸였던 CIA의 불법적인 첩보활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프랑크 처치 상원의원이 이끄는 특별위원회는 CIA의 국내외 정치사찰과 외국 지도자들의 암살 활동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이 과정에서 CIA와 마피아, 그리고 쿠바 망명단체의 관계가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암살활동을 조사하던 게리 하트 상원의원은 이 3각 連帶(연대)가 갖고 있던 「反케네디 구조」를 알고는 충격을 받았다.
하트 의원은 「CIA의 어느 하부 조직이 독단적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1975년 6월에 상원 조사위원회에서 증언할 예정이던 시카고의 마피아 代父(대부) 샘 지앙카나가 피살됐다. 1976년 7월에는 CIA와 마피아 사이의 중개인으로 알려진 자니 로실리가 소환을 앞두고 처참한 시신으로 마이애미에서 발견됐다. 두 사람은 마이애미의 代父 산토 트라피칸트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생각됐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의회의 조사는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1990년대 들어서 케네디 암살에 관련되었다는 의심을 받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음을 맞게 됐다. 리처드 헬름스, 제임스 앵글턴 등 국장과 부국장을 지낸 간부들은 죽을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현장에서 활동했던 요원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케네디 암살에 관여했음을 암시하고 죽음을 맞았다. 反共 쿠바軍과 관련을 맺었던 데이비드 필립스는 1988년 사망하기 전에 가족에게 자신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던 그날 댈러스에 있었다고 말했다.
피그스灣 침공작전에 참가했던 하워드 헌트는 2007년 初 사망하기 전에 『케네디 암살이 CIA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두 번째 암살범이 前方에 있었다』는 내용의 口述(구술) 증언을 남겼다. 헌트는 1970년에 CIA를 퇴직한 후 백악관 비밀팀에 고용돼서 민주당 선거본부가 있던 워터게이트 빌딩에 침입했다가 발각됐던 인물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미국의 언론이 이 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하지 않은 부분이다. 주요 신문은 오히려 오스월드의 단독 범행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몰고 갔다.
「형제」의 저자 데이비드 탈봇은 그 이유에 대해 『1960년대는 CIA가 언론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CIA의 간부들이 예일大 등 명문대학 출신이라서 주요 언론사 간부들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