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스 암살 100주년 맞는 샌프란시스코 교민들

페리역에 張仁煥 의사 동상 건립 추진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등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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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스 암살은 미국에서 일어난 첫 무력 항일투쟁… 安重根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큰 영향』(이석찬 한인회장)

金淸 在美 언론인
1942년 경남 거창 출생. 경희大 졸업. 조선일보 기자, 중앙일보 뉴욕지사 편집부국장, 샌프란시스코 라디오서울 편성국장, 선데이토픽 편집국장 역임.
장인환 의사가 스티븐스를 암살한 샌프란시스코 페리역.
『탕, 탕, 탕!』
 
  세 발의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고, 미국인 巨漢(거한)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8년 3월23일 오전 9시23분, 샌프란시스코 페리역에서 張仁煥(장인환) 의사가 미국인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저격했다.
 
  세 발 가운데 두 발은 스티븐스의 허파와 허리에 박혔고, 한 발은 동포인 田明雲(전명운) 의사의 오른쪽 어깨를 관통했다. 張仁煥은 在美동포, 스티븐스는 舊韓末(구한말) 한국 정부에 파견된 미국인 외교 고문이었다. 스티븐스는 워싱턴行 열차를 타기 위해 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미국 朝野(조야)의 인사들을 만나 일본의 침략정책을 홍보하려던 참이었다. 張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됐고,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다가 사흘 후에 죽었다.
 
  스티븐스는 일본 정부로부터 1만 달러(현재 100만 달러 상당)를 후원받고 한국을 끊임없이 비방하는 발언을 일삼아 在美동포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스티븐스는 한국의 公敵
 
장인환 義士.
  張仁煥의 거사는 미국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1908년 3월23일자 석간인 「샌프란시스코 클로니클」은 『스티븐스는 한국의 公敵(공적)』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는 일본의 한국통치를 정당화하고 두둔했다. 在美 한국동포들은 스티븐스를 숙소로 찾아가 일본 옹호발언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를 거절했다」
 
  같은 날짜의 「뉴욕타임스」는 張仁煥 의사의 거사에 동정적이었다.
 
  「미국 朝野에서 일본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확산될 무렵, 통감부는 駐日미국공사관 3등 서기관 스티븐스를 한국정부 외교고문관으로 추천했다. 1908년 2월 통감부는 스티븐스에게 1만 달러를 주고 일본의 한국 외교권 박탈 정책을 찬양하도록 알선, 미국으로 보냈다. 在美동포들은 스티븐스의 거듭되는 일본의 한국통치 정당성 주장에 분개해 그를 살해하게 됐다」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교포는 150만 명이지만 당시는 유학생 등을 포함해 150여 명에 불과했다. 1876년 3월 평양에서 출생한 張의사는 1905년 하와이 마우이로 이민을 왔다가 이듬해 美 본토로 이주했다. 거사 당시 나이는 32세. 張의사는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 창설멤버였으며, 非정치단체인 「大同敎育會(대동교육회)」 회원이었다.
 
  在美동포들은 고국의 소식에 어두운 편이었다. 이때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된 헐버트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본의 강요로 체결된 乙巳勒約(을사늑약) 등 일본의 만행을 동포들에게 상세히 알리고 反日(반일)투쟁을 종용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1907년 대동교육회는 張仁煥 의사를 중심으로 「大同保國會(대동보국회)」로 명칭을 바꾸고 고국의 국권회복을 다짐했다.
 
 
  大同保國會
 
페리역 3번 홈(저격현장)을 가리키고 있는 이석찬 회장.
  大同保國會는 1907년 10월, 「大同弘報(대동홍보)」를 발행하면서 美 서부지역에 5개 지회를 두는 등 교포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해 丁未七條約(정미7조약)으로 국내외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해지자, 大同保國會는 한국의병의 독립투쟁을 지지하고 나섰다.
 
  張仁煥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할 무렵, 1904년 8월 한국 외무대신 尹致昊(윤치호) 서리와 일본 측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사이에 제1차 韓日협약이 체결돼 「고문정치」가 시작됐다.
 
  일본은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를 재정고문, 미국인 스티븐스를 외교고문으로 임명해 한국에 파견했다. 조선의 財政權(재정권)과 外交權(외교권) 박탈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1905년(광무 5년) 11월, 일본은 을사늑약을 통해 한국의 외교권을 찬탈했다. 을사늑약은 온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분함을 참지 못한 시종무관 閔泳煥(민영환)이 백성에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는가 하면, 趙秉世(조병세)·洪萬植(홍만식) 등의 자결이 잇따랐다. 무력으로 반항한 의병들이 각지에서 봉기했다.
 
  황성신문의 장지연은 사설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1907년(융희 1년) 고종 황제를 退位(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일명 한일신협약)을 체결했다. 을사늑약 등으로 대한제국의 내정간섭을 해오던 일본이 노골적으로 한국 지배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張仁煥을 비롯한 大同保國會 회원들은 일제의 만행에 대항해 해외에서 할 일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들 앞에 스티븐스가 나타났다.
 
 
  스티븐스, 『조선인의 집은 畜舍와 같다』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이석찬 회장.
  스티븐스는 저격당하기 사흘 전 샌프란시스코港(항)에 도착했다. 서울을 떠나 인천에서 니혼마루(日本丸)에 승선, 요코하마를 거쳐 왔다. 그는 하선하기가 무섭게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의 한국통치의 정당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스티븐스의 회견이 석간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한국은 한마디로 未開國(미개국)이다. 교활한 대신들이 王을 둘러싸고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 致富(치부)만을 일삼는다. 백성들은 굶주려 있고, 畜舍(축사)와 같은 곳에서 살고 있다. 조선에는 畜舍와 같은 집들이 널려 있는데, 그것은 축사가 아니고 분명 사람들이 사는 집들이다」
 
  스티븐스는 『조선에는 철도가 부설되고 전기가 어둠을 밝히고 있다』면서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고 국민생활을 향상시켰다. 일본의 善意(선의)를 침략이라고 한다면 朝鮮의 실정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했다.
 
  그는 『3월23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워싱턴으로 가 정부 要路(요로)에 일본의 善意를 알릴 계획』이라고 했다. 張仁煥 의사 등 大同保國會 회원들은 신문에 난 스티븐스의 주장을 접하고 분노했다. 특히 고국의 동포들이 살고 있는 집을 畜舍라고 비유한 것에 대해 참을 수 없었다. 더욱이 스티븐스가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계속한다는 사실이 동포들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최익정 등 4명의 大同保國會 대표들은 3월22일 스티븐스가 묵고 있는 호텔을 찾아갔다. 그들은 유니언스퀘어에 위치한 페어몬드호텔 방에서 스티븐스를 만났다. 스티븐스는 발언을 취소해 달라는 大同保國會員들의 요청에 대해 『나라도 없는 것들이 남의 나라에 와서 겁도 없이 날뛴다』고 했다. 격분한 네 명의 대표들은 한꺼번에 달려들어 스티븐스를 호텔방에 내동댕이쳤다. 주먹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했고, 그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事前 공모하지 않았다
 
한인회관 대강당에 안치돤 장인환(왼쪽)·전명운 의사의 흉상.
  張仁煥 의사는 암살 당일인 3월23일, 새벽 댓바람에 페리 정거장으로 갔다. 품속에는 총탄 세 발이 장전된 권총이 들어 있었다. 스티븐스가 타고 갈 페리는 오전 9시30분 출발 예정이었다.
 
  출발 시각 10분 전이 되자 역구내가 떠들썩해졌다. 스티븐스를 전송하는 일본인들의 배웅 소리였다. 일본인들은 스티븐스가 니혼마루로 샌프란시스코항에 내릴 때도 만세를 외치는 등 온갖 아첨을 해댔다. 스티븐스가 자신들보다 한국의 일본 지배의 정당성을 더 소리 높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티븐스가 개찰구를 빠져나와 3번 홈으로 오는 모습이 張仁煥의 시야에 들어왔다. 거리는 약 10m 전방이었다. 승객인 체 가장하고 품속의 권총을 잡고 스티븐스에 접근하려는 찰나, 張仁煥은 느닷없이 나타난 田明雲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張仁煥과 田明雲은 형님 아우하는 사이였다.
 
  더군다나 田明雲이 권총을 뽑아 스티븐스를 쏘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랐다. 田明雲의 권총은 두 발 모두 불발이었다. 당황한 田明雲은 권총으로 스티븐스를 내리쳤다. 田明雲과 스티븐스 사이에 육박전이 벌어졌다.
 
  이때 요란한 금속음이 플랫폼을 흔들었다. 張仁煥이 스티븐스를 향해 세 발의 총탄을 발사했던 것이다. 張仁煥은 태연하게 경찰에 연행됐다.
 
  張仁煥, 田明雲 두 의사가 처음 만난 것은 거사 1년 반 전인 1906년 9월이었다. 張의사가 田의사를 샌프란시스코 부두로 마중 나갔던 것이다. 하와이에 있는 단체로부터 『3명의 한국인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는 전갈을 받고 대동회원들이 이들을 마중한 것이다. 그때 張의사는 산호세 기술학교를 휴학하고 철도 노동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고, 10년여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학문에 뜻을 두긴 했으나 호구지책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張의사는 철도 노동자로, 田의사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張의사에 비해 田의사는 무인기질이 있는 호탕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급여가 후하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알래스카 漁場(어장)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들은 매월 평균 37달러를 받았고, 연장근무를 해서 월 50달러를 벌기도 했다.
 
  알래스카에서 일본 노동자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을 차별했다. 노동조합장을 독점한 그들은 한국인들에게 더럽고 힘든 일을 맡겼다. 어업 노동자들은 각국에서 온 인종시장을 방불했는데, 일본인 組長(조장)들은 한국인들에게만 유독 차별을 두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일본인들과 다투면서 한국인 권리를 주장했으나 묵살당하기 일쑤였다.
 
  두 사람은 7개월을 견디다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거사 5개월 전인 1907년 10월 말이었다. 이들은 스티븐스 저격을 사전공모하지 않았다. 각자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자기 혼자의 희생으로 족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재판은 거의 1년을 끌었다. 지방법원을 거쳐 대법원에 항고된 張仁煥 의사는 1909년 1월6일, 2등급 살인죄로 25년 금고형이 언도됐다. 거사일로부터 280일이 지난 판결에서 張의사는 사형판결을 면했다. 田明雲 의사는 구속 97일 만에 보석으로 출감했다.
 
 
  張仁煥 의사에게 성금 7390달러 답지
 
  배심원 12명이 장장 3시간이 넘는 평결회의를 열었고, 8차에 걸친 비밀투표를 거쳐 「애국적 환상에 의한 무모한 인명살상」이란 죄목으로 2등급 살인죄를 평결했다. 2등급 살인죄는 사형을 면한 일종의 종신형이다. 형기는 최고 30년, 최하 10년에 해당한다. 張의사는 형 확정을 받고 샌퀸턴주립형무소에 수감됐다.
 
  재판 도중 張仁煥 의사의 태도는 의연했다. 그는 시종일관 『스티븐스는 수년간 한국의 國祿(국록)을 받아먹은 인간으로서 한국에 대한 감사는커녕 간첩질과 배반으로 보답했다』고 주장했다.
 
  張의사는 『스티븐스가 주장하는 일본의 한국보호 「은혜론」은 삼척동자가 들어도 웃을 일』이라면서 『그가 받은 총탄은 정정당당한 한국 민족의 정의의 罰(벌)』이라고 했다. 張의사는 과묵하고 침착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田明雲 의사를 끝까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해 무죄를 받게 했다.
 
  재판 도중 미국 전역과 한국·중국·연해주 등지에서 답지한 「張仁煥 의사 돕기 성금」이 7390달러에 달했다. 당시 노동자 임금은 시간당 25센트였다. 이 성금이 변호사 비용과 통역비 등으로 사용돼 그의 형량을 낮추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한다.
 
  張仁煥 의사는 모범수로 10년 만인 1919년 1월17일 석방됐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張의사는 석방 8년째인 1927년 51세의 나이로 고국을 찾았다. 그는 曺晩植(조만식) 선생의 주례로 평양 여성인 尹致福(윤치복·당시 25세)과 결혼해 평북 선천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경영했다. 재차 渡美한 그는 병을 얻어 1930년 4월23일 치료 중이던 병원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했다. 파란만장한 張仁煥 의사의 죽음을 접한 동포들은 「동포 사회장」으로 그를 애도했다.
 
  張仁煥 의사의 거사는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거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安重根(안중근), 이완용을 찌른 李在明(이재명), 사이토 총독을 저격한 姜宇奎(강우규) 의사, 시카가와 대장 등을 폭사시킨 尹奉吉(윤봉길)로 이어지는 한국침략 원흉 척결의 嚆矢(효시)였다.
 
  한국 정부는 張仁煥 의사의 의거를 기려 1962년 3월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複章(복장)을 추서했다. 1975년에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으며, 유해는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1947년 영면한 田의사의 유해는 1994년 이장됐다.
 
관광객을 싣기 위해 페리부두에 정박해 있는 유람선. 100년 전에는 이 부두에서 기차여객을 싣고 오클랜드 기차역으로 출항했다.
 
  한국 서적들, 스티븐스 저격장소를 오클랜드驛으로 기록
 
  張仁煥 의사가 거사를 했던 페리驛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샌프란시스코 페리부두의 심장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옛날 대륙횡단 승객들을 싣고 오클랜드 기차역으로 향하던 일들은 사라졌다. 페리역은 유람선 승객이나 연안의 출퇴근 승객들을 실어나르는 역할로 변신했다.
 
  샌프란시스코 페리역은 기차역이 아니고 배 선착장이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차역은 샌프란시스코 건너편에 있는 오클랜드市에 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灣(만)을 건너는 교통수단은 배나 보트뿐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美 동부 시카코나 보스턴, 뉴욕, 워싱턴으로 가려면 샌프란시스코 페리역에서 배를 타고 灣을 건너서 기차역이 있는 오클랜드로 가야 했다.
 
  스티븐스가 저격을 당한 장소는 오클랜드역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페리역 선착장이었다.
 
  필자도 처음에는 張의사 거사현장이 페리역이 아니고 오클랜드에 있는 기차역으로 착각해 오클랜드역에 가서 자료를 수집한 적이 있다.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을 포함해 많은 한국인들이 지금도 張의사의 거사 장소를 오클랜드 옛 기차 역사로 잘못 알고 있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스티븐스를 암살을 기록한 한국서적에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떠나기 위해 오클랜드역에 나타나자…」 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리역內에는 각종 상점이 들어서 성업 중이고, 대한 남아의 기개를 떨친 3번 플랫폼은 상가를 드나드는 일반통로로 변했다. 한때 열혈청년이 쏟았던 흔적은 상상 속에만 남았다. 자동차와 항공기에 밀려 1960년대 이후부터 철도가 사양길에 접어들기는 했으나 페리역의 여객청사는 張仁煥 의사를 흠모해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에겐 진한 향수를 안긴다. 가끔 동양인들이 찾아와 3번 플랫폼을 배경으로 사진촬영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십중팔구 한국인들이다. 그들은 이역만리에서 敵의 심장에 총탄을 퍼부은 張의사의 거룩한 애국심에 심취해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역장이 바뀔 때마다 동상 건립 요청』
 
  산호세, 오클랜드 등 약 15만 명에 이르는 샌프란시스코 지역 동포들은 두 의사의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충만해 있다. 올해 벽두부터 한인회를 비롯한 각종단체의 회의실, 대형 한국계 마켓, 음식점, 노래방, 골프장 등 동포들이 모이는 곳이면 「張仁煥 의사 100주년」 얘기로 꽃을 피운다. 韓人 동포사회는 張仁煥 의사의 거사 100주년 기념행사 준비로 분주하다.
 
  샌프란시스코 한인회는 3월21일 한인회 대강당에서 「의거의 역사적 의의와 在美한인의 과제」란 주제의 학술세미나를 열기로 했다.
 
  100주년 기념식의 하이라이트는 3월22일 거사 현장인 페리 정거장 앞 광장에서 펼쳐지는 기념식이다. 기념식에는 샌프란시스코 全사회단체장을 비롯, 한글학교 학생 등 수백 명이 참석해 두 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릴 예정이다. 한인회는 한인회 대강당에서 두 의사의 기념도록 발간, 사진전시회 등을 열기로 했다.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이석찬(49) 회장은 『역대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들은 페리 역장이 바뀔 때마다 그를 찾아가 저격현장에 두 의사의 동상을 건립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면서 『미국인들이 동상 건립에 동참할 수 있도록 교포사회가 힘을 모을 것』이라고 했다.
 
  이석찬 회장은 『張仁煥·田明雲 두 분의 거사는 미국에서 일어난 첫 무력 항일투쟁으로 安重根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큰 영향을 준 의열투쟁』이라고 했다.
 
  문충환(77) 前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은 『張仁煥·田明雲 두 분은 조선이란 나라가 있다는 것을 미국땅에 알렸고, 세계 조류에 어두웠던 조선 민족에게 애국심이란 단어를 선사했다』고 했다.
 
  스탠포드大 동양학과 에밀린 깁슨 교수는 『張仁煥의 거사는 당시 미국사회에 대단한 충격을 안겼다』면서 『그의 거사는 잠자는 나라 조선의 독립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신호탄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張仁煥·田明雲 의사의 의거에 대해 2~3세 동포들의 생각은 다르다.
 
  대학생 박희수(20)씨는 『스티븐스 저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지난해 버지니아텍의 사건이 연상됐다』며 『엄밀히 말하면 테러가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버클리大 3학년 이수진(22)씨는 『학생회에서 3월이 스티븐슨 암살 100주년이란 말을 들었다』면서 『역사를 잘 모르는 많은 학생들은 스티븐스 암살이 테러라고 말하기도 한다』고 했다.
 
  2~3세들의 희미해져 가는 역사의식에 대해 이석찬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은 『민족교육을 받고 동포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역사적 시각이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경이(46) 샌프란시스코 한국학교 교장은 『금년 학기부터 고교생들에게 스티븐스 암살 관련 교육교재를 만들어 가르칠 것』이라며 『체계적인 역사교육을 시킨다면 교포 2~3세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9·11 테러에 민감한 미국인들에게 義擧가 평가절하
 
  미국인들 가운데 동양사나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자를 제외하고 張仁煥 의사의 거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많은 미국인의 눈에는 거사가 테러로 인식되고 있다.
 
  아일랜드계 뉴욕 변호사인 매킨 로버트(45)씨는 張의사를 알고 있었다. 그는 『한국과 아일랜드는 외국의 압제와 수탈에 시달린 점이 비슷하다』면서 『張仁煥 의사가 약소국의 설움을 대표해 발산한 것』이라고 했다.
 
  노드콜로라도 주립대학원생인 일본인 3세 노다 이치무라(野田一村·32)씨는 『일본어로 출간된 張仁煥·田明雲 의사 관련 기록은 보았지만, 영문 기록을 보지 못했다』면서 『두 의사의 거사가 테러로 인식되지 않기 위해서 두 의사의 생애를 조명하는 출판물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했다.
 
  낸시 펠로시 美 연방 하원의장의 한 비서는 『100여 년 전에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고 했지만, 스티븐스 암살에 대한 美국민들의 역사적 평가를 묻는 질문에는 『노코멘트』라고 했다.
 
  100년 전 親日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한 張仁煥·田明雲 두 의사의 거사는 교민사회의 추모 열기와는 달리 美 국민들에게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석찬 한인회장은 『스티븐스 암살 사건 자체를 아는 미국 인사가 거의 없다는 점, 9·11 사태 이후 테러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미국인들의 테러 공포증 때문에 張仁煥·田明雲 두 의사의 거사가 평가절하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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