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인물 탐험] 가장 오해받는 애국자 李範晉

러시아 의지해 日 견제-아관파천 주도
을사늑약 후 항일투쟁 벌이다 自決

  • : 신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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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 저는 적을 복수하고 벌할 수 없는 데 대해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자결로 목숨을 끊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이범진의 遺書)

申東埈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교수신문 편집국장 역임. 現 고려大 강사. 저서 「논어론」, 「순자론」.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제자백가 사상을 논하다」 등 20여 권.
李範晉
지난 1월8일 프랑스 파리에서 한 在佛(재불)교포가 주최한 이색행사가 열렸다. 1900년에 대한제국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여한 대규모 국제행사인 파리 만국박람회의 朝鮮館(조선관) 사진전이 그것이다.
 
  이날 사진전에는 박람회 폐막 후 프랑스에 기증되었다가 최근 파리의 한 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돼 화제가 된 가야금과 아쟁 등 당시의 전시물품과, 조선관 명예위원장 閔泳瓚(민영찬)과 초대 러시아공사 李範晉(이범진)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민영찬은 壬午軍亂(임오군란) 때 난군에게 죽임을 당한 閔謙鎬(민겸호)의 아들로 박람회 참석 당시 학부대신 서리로 재직하고 있었다. 당시 李範晉은 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 3國 공사의 자격으로 박람회에 참석했다.
 
  李範晉은 오랫동안 俄館播遷(아관파천)을 주도한 뒤 조선의 이권을 러시아 측에 넘긴 친러파의 거두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사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이역만리인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애국자였다. 그는 庚戌國恥(경술국치) 직후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원래 李範晉은 李芳蕃(이방번)의 後嗣(후사)로 出系(출계: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음)한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廣平大君(광평대군)의 후손인 李景夏(이경하)의 서자로 태어났다. 이경하는 대원군 이래 高宗 때까지 포도대장과 어영대장 등을 역임하며 병권과 경찰권을 20년 넘게 장악한 대표적인 宗親系(종친계) 무인이었다.
 
  그는 高宗 3년(1866)의 丙寅洋擾(병인양요) 당시 申櫶(신헌)과 韓聖根(한성근), 梁憲洙(양헌수) 등이 이끄는 조선군을 지휘하며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의 해병대와 접전해 승리를 거둔 바 있다.
 
  당시 박해를 피해 치푸(芝)로 탈출해 로즈에게 구원을 청함으로써 병인양요를 촉발시킨 주교 리델은 10년 뒤 재차 입국했다가 투옥된 뒤 공교롭게도 이경하에게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훗날 「리델 문서」에서 이경하의 당시 풍모를 이같이 묘사해 놓았다.
 
  『60세쯤 되어 보이는 이경하는 대장 정복인 푸른 비단 옷에 보석이 현란한 띠를 두르고 양편에 새 깃을 드리운 모자를 쓰고 있었다. 장신에 깡말랐으며, 눈빛이 날카로웠다』
 
  전형적인 무인상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이경하를 두고 「駱洞閻羅(낙동염라)」로 불렀다는 「매천야록」의 기록과 일치한다.
 
  낙동의 당시 명칭은 「會賢坊(회현방) 낙동」이었다. 이경하의 집은 현재 중국 대사관이 있는 서울 명동에 있었다. 구한말의 풍운아 李範晉이 바로 「낙동염라」의 아들이다. 「매천야록」은 「범진」의 작명 배경을 이같이 설명해 놓았다.
 
 
  민비의 총애
 
  『이경하가 晉州兵使(진주병사)로 있을 때 한 기생에게서 그를 낳았기 때문에 이름을 「범진」이라고 한 것이다』
 
  이경하는 「夏(하)」의 아래 항렬인 「範(범)」자에 진주의 「晉(진)」자를 덧붙여 자식의 이름을 지은 셈이다. 당시 이경하는 해주 오씨와 한양 조씨 사이에서 각각 딸 하나씩을 얻었을 뿐 아들을 두지 못했다. 이에 족친의 아들 李範升(이범승)을 양자로 들였다.
 
  철종 4년(1853) 음력 9월에 기녀의 소생으로 태어난 李範晉은 비록 서출이기는 했으나 이경하의 유일한 혈통이었다. 그가 생장과정에서 嫡出(적출)과 하등 다름없는 대우를 받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훗날 그가 嫡兄(적형)인 이범승을 제치고 8촌형인 李範朝(이범조) 및 4촌형인 李範大(이범대)와 함께 일족의 가옥 매도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초 회현방 낙동에는 이 세 집안의 가옥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高宗 21년(1884) 초에 이범조와 이범대의 80칸과 62칸의 두 가옥이 淸國 상인조합인 商淸會館(상청회관)에 팔리게 되자 두 집안은 李範晉의 집 마당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 문제를 놓고 淸國 상인과 커다란 갈등이 빚어졌다. 군란 직후인 당시는 淸國의 입김이 막강할 때였다. 李範晉은 이 문제에 깊숙이 개입했다가 이내 삭탈관직을 당하고 말았다. 「高宗실록」(21년 윤 5월1일 조)에 수록된 의정부의 보고가 그 증거이다.
 
  『전 正言(정언) 李範晉이 집을 파는 일로 청국 상인과 함께 商務公署(상무공서)에 도착했을 때 형조 郞官(낭관)과 좌우포도청 從事官(종사관)이 그 자리에 있다가 함께 이들을 신문했다고 합니다. 李範晉은 朝令(조령)도 없이 제멋대로 이들을 신문하여 나라의 체모를 크게 손상시켰습니다』
 
  李範晉은 반년 뒤 中批(중비)로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다. 「中」은 的中(적중), 「批」는 決裁(결재)를 뜻하는 말로 「중비」는 곧 「특채」를 의미한다. 이는 민비의 입김에 따른 것이었다. 그에 대한 민비의 신임은 대단했다. 그가 홍문관 수찬에 제수된 지 두 달 후에 터진 甲申政變(갑신정변) 때 조대비와 민비, 세자가 李範晉의 집으로 피신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가 대과에 급제할 때 高宗 및 민비의 寵任(총임)이 적잖이 작용했다. 高宗 15년(1878)의 柑製(감제)에서 성균관의 생원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학과 이수 이전에 대과에 응시할 수 있는 소위 直赴殿試(직부전시)의 자격을 얻었다. 감제는 제주도에서 매년 진상하는 黃柑(황감)을 성균관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시험을 보게 한 특별전형을 말한다. 그러나 그가 이듬해에 치러진 식년시의 丙科(병과)에 당당히 급제한 데에는 그의 뛰어난 실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대과 급제 17년 만에 大臣으로 승진
 
  李範晉은 高宗 33년(1896)에 駐美공사에 임명되어 해외로 나가기 전까지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高宗 19년(1882)에 통리기무아문 주사, 高宗 21년(1884)에 홍문관 수찬을 지낸 뒤 이조참판으로 있던 高宗 25년(1888) 8월에는 李完用(이완용)과 함께 일본으로 가 한 달 가까이 체류했다. 그는 43세가 되는 高宗 32년(1895)에 농상공부대신에 제수되었다. 26세 때 대과에 급제한 후 17년 만에 대신의 반열에 올랐다.
 
  여기에는 대략 高宗과 민비의 寵任(총임)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面從腹背(면종복배)가 일상화된 난세의 상황에서 그가 시종 왕실의 안녕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高宗은 훗날 측근들에게 『死地(사지)에 처한 나를 네 번이나 구해준 李範晉이야말로 내가 가장 신뢰하는 유일한 股肱(고굉)이고, 그 은혜는 평생 잊을 수 없다』고 술회했다.
 
  李範晉이 아관파천 직후 법부대신에 제수되어 警務使(경무사: 경찰청장)의 직책까지 겸임했다. 高宗은 李範晉이야말로 자신의 신변과 왕실의 안녕을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종친으로 간주했다.
 
  그간 학계에서는 아관파천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주를 이뤄 온 게 사실이다. 일국의 국왕이 他國(타국)의 공사관으로 파천한 것은 主權(주권)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런 일을 획책한 李範晉은 나라를 亡國(망국)으로 이끈 자에 불과하다는 혹평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당초 일본은 淸日(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朴泳孝(박영효)와 金弘集(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親日내각을 만들어 세력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주동이 된 이른바 「三國干涉(삼국간섭)」의 견제에 걸려 곤혹스러운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의 약점을 간취한 高宗과 민비는 재빨리 러시아공사 베베르(Weber: 韋貝)와 짜고 李範晉과 李完用 등을 입각시켜 제3차 金弘集 내각을 발족시켰다.
 
 
  을미사변 후 러시아공사관에 구원 요청
 
  조선의 내각이 친러 쪽으로 기울어지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곧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소환하면서 무인 출신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보내 민비를 ?殺(장살)했다.
 
  당시 러시아공관 무관으로 재직했던 미하일로프 중위는 훗날 「조선방문기」에서 「여우사냥」을 목격한 미국인 훈련교관 다이와 러시아공사관을 설계한 사바틴 등의 증언을 토대로 이들의 만행을 소상히 기록해 놓았다.
 
  2003년 외교통상부 러시아과가 펴낸 「李範晉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에 수록돼 있는 미하일로프의 「조선방문기」는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묘사해 놓았다.
 
  『궁궐 북문을 부수고 들어온 폭도들 몇몇은 칼집이 없는 군도나 양날 장검을 쥐고 있었다. 폭도들이 괴성을 지르며 왕비의 침전으로 돌진해 왕비를 내놓으라고 다그치자 왕비와 궁녀들은 「여기에 왕비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왕비가 이내 참지 못하고 복도로 뛰쳐나가자 폭도들이 그 뒤를 쫓아가 낚아챈 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그녀의 가슴 위로 뛰어올라가 발로 세 번이나 짓이기고는 칼로 마구 찔렀다. 잠시 후 폭도들은 시체를 근처의 숲으로 끌고 가 석유를 뿌려 태워 버렸다』
 
  공교롭게도 농상공부대신 李範晉은 궁궐에 있었다. 그가 어떤 연유로 당시 궁궐에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길이 없으나 사건 직전 高宗과 민비의 命(명)으로 궁궐 宿衛(숙위)에 임했을 공산이 크다. 미하일로프의 다음 기록이 그 증거이다.
 
  『왕은 궁궐을 폭도들이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李範晉에게 명하여 미국과 러시아공관에 도움을 청하게 했다. 서쪽 담을 타고 올라간 李範晉은 폭도들이 궁궐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내 동남쪽 구석에 있는 탑을 타고 담 위로 올라갔다. 다행히 이 부근은 일본군 2명만이 감시를 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다리를 약간 다치기는 했으나 기회를 틈 타 들키지 않고 달아날 수 있었다.
 
  미국공사관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궁궐 쪽에서 첫 번째 총성이 울렸다. 거의 찢어지다시피 한 옷을 걸치고 러시아공관에 뛰어든 그는 급히 「궁궐 안에서 일본군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왕비를 죽이려 하는 게 분명하다」고 소리쳤다. 이어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왕이 러시아와 미국 공사에게 급히 도움을 청하고 있다」고 알렸다』
 
  乙未事變(을미사변)을 최초로 외국공관에 알린 사람이 李範晉이었다. 그가 사건 직후 한동안 러시아공관에 은신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는 얼마 후 兪吉濬(유길준)과 徐光範(서광범) 등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제4차 金弘集 내각으로부터 「즉시 러시아공관을 떠나라」는 명을 받았으나 은신처를 미국공관 등으로 옮겨 다니며 이를 거부했다.
 
 
  춘생문 사건
 
  이 와중에 그는 李忠求(이충구) 등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高宗을 경복궁에서 탈출시키려는 소위 「春生門事件(춘생문사건)」을 주도했다. 이는 高宗이 「率兵來護(솔병내호: 병사를 이끌고 와 왕을 보호함), 宮城誅討凶逆(궁성주토흉역: 왕의 명으로 흉악한 역도를 토벌함)」라는 밀지를 내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高宗은 민비가 장살된 후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는 독살을 우려한 나머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직접 딴 깡통 연유와 날달걀 외에는 일절 먹지 않으면서 밤에는 미국 선교사들을 궁 안으로 불러 불침번을 서게 했다.
 
  李範晉이 주도한 춘생문 사건은 이해 10월12일에 결행되었으나 내부의 밀고로 인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당시 배재학당 영어교사였던 李承晩(이승만) 前 대통령도 이 사건에 개입돼 있었다.
 
  훗날 李承晩의 고문을 지낸 올리버 박사는 영문전기에서 李承晩이 이 사건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기록해 놓았으나 서정주 시인이 李承晩의 구술을 토대로 1949년에 펴낸 「李承晩박사전」의 내용은 이와 약간 다르다.
 
  이에 따르면 李承晩은 가족을 부탁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이충구로부터 거사계획을 전해 듣고는 적극 가담할 뜻을 내비쳤으나 이내 6代 獨子(독자)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춘생문 사건은 비록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으나 아관파천의 서곡에 해당했다. 사건 직후 베베르의 도움으로 러시아 군함을 이용해 상하이(上海)로 피신했던 李範晉이 얼마 후 斷髮令(단발령)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틈을 타 국내로 잠입한 뒤 재차 高宗의 궁궐 탈출을 시도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베베르·스페이어 등과 아관파천 주도
 
아관파천 당시 李範晉에게 협력한 이윤용.
  당시 러시아공관에 몸을 숨긴 李範晉은 춘생문 사건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베베르 및 후임공사인 스페이어(Speyer: 士貝耶)와 함께 치밀한 탈출계획을 세웠다. 베베르는 이미 몇 달 전에 멕시코공사로 전보발령을 받은 상황이었다. 그는 후임공사인 스페이어가 도착할 때까지 서울에서 대기하던 중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게 됐다.
 
  이들이 주목한 사람은 바로 嚴尙宮(엄상궁)이었다. 민비의 시기로 10여 년 전에 출궁 조치를 당한 바 있는 嚴상궁은 민비 사후 高宗의 명으로 재차 입궁해 독살 위협에 시달리는 高宗의 寢食(침식)을 전담하며 寵恩(총은)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연금 상태에 처한 高宗이 믿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李範晉은 제4차 金弘集 내각에 참여하고 있는 李完用의 친동생 李允用(이윤용)을 매개로 嚴상궁과 수시로 교신하며 궐내 상황을 점검했다.
 
  스페이어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高宗 33년(1896) 1월9일이었다. 그는 부임에 앞서 도쿄에 들렀다가 駐日 러시아공사 히트로보를 비롯해 일본 당국자들로부터 을미사변 직후의 조선 상황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리와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외상 등은 스페이어에게 『조선은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해 평온을 유지하고 있고,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간여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면서 조선의 평화유지를 위한 양국 간 협정체결을 주문했다.
 
  스페이어가 서울에 도착해 목도한 조선의 상황은 이들의 주장과는 정반대였다. 그가 접한 보고는 전국 각지에서 조선의 義兵들이 일본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전개하고 있고, 조선의 백성들은 길에서 만나는 일본인에게 노골적인 殺意(살의)를 내비칠 정도로 일본의 만행에 분노하고 있다」는 내용뿐이었다.
 
  스페이어가 볼 때 조선의 내각은 대원군이 實權(실권)을 장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신들 모두 일본인 고문의 지시를 좇아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면서 反러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을미사변의 조선인 측 배후인물인 趙羲淵(조희연)이 군부대신으로 복귀한 사실에 주목했다. 「윤치호일기」에 따르면 이는 일본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였다.
 
 
  高宗의 메모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韓國館(한국관) 관련 사진들을 담은 폴 제르의「1900년」에 실린 이범진(왼쪽)과 민영찬의 사진.
  이에 스페이어는 베베르 및 李範晉과 머리를 맞대고 국면전환을 위한 대책을 숙의했다. 이때 李範晉이 러시아의 지원을 호소하는 高宗의 메모를 전하자 스페이어는 高宗의 진의를 직접 확인코자 했다. 그가 베베르와 함께 취임 인사차 입궐하자 高宗은 은밀히 그의 주머니에 절박한 심경을 담은 메모를 넣어 주었다. 스페이어로서는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스페이어가 곧바로 이 사실을 러시아 당국에 보고했으나 로바노프 외상은 의외로 유보적인 내용의 훈령을 내렸다. 이는 히트로보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였다. 당시 모든 보고와 훈령은 도쿄를 경유해 이뤄지고 있었다. 히트로보는 스페이어의 전문을 접하고서 크게 경악한 나머지 극히 신중히 행동할 것을 본부에 타전했다.
 
  로바노프의 훈령을 접한 스페이어가 재차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는 수단은 오직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병력만큼 러시아 군사를 파견하는 길밖에 없다」는 내용을 타전했다. 그러나 로바노프는 「기본취지는 동의하나 군사 파견은 거부한다」는 내용의 훈령을 보냈다.
 
  이는 영국의 개입을 극도로 우려한 데 따른 것이었다. 실제로 영국은 高宗 22년(1885)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구실로 2년 동안 조선의 巨文島(거문도)를 무단으로 점거한 바 있다.
 
  러시아 외무당국은 을미사변 직후에 전개되고 있는 일련의 상황을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이에 로바노프는 곧 러시아 주재 일본공사 니시(西德二郞)를 불러 조선 문제를 추궁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은 조선에 개입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니시의 변명을 듣고 이를 액면 그대로 믿었다. 여기에는 사이온지 일본 외상의 선전에 넘어간 히트로보의 왜곡된 보고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러시아軍의 서울 입성
 
舊韓末 서울 정동 러시아공사관의 모습.
  당시 일본은 을미사변 직후 고무라를 辦理公使(판리공사)로 임명하는 등의 조치로 列强의 비난이 잦아들자 이에 고무된 나머지 미우라를 비롯한 관계자 48명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전원 석방하는 후안무치한 모습을 보였다. 이를 접한 조선의 백성들은 경악했다.
 
  조선 내에는 「이들이 다시 돌아와 高宗을 살해하고 대원군의 적손인 李埈鎔(이준용)을 일본에 유학시켜 사실상 인질로 잡으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여기에 義兵의 서울진공說까지 나돌자 피란 봇짐을 싸는 사람까지 나타나는 등 조선의 정국은 兵亂(병란) 직전을 방불했다.
 
  아관파천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빚어졌다. 당시 高宗은 조희연이 군부대신으로 복귀한 다음 날인 이해 2월2일에 은밀히 李範晉을 통해 파천에 대한 러시아 측의 수락 여부를 타진했다. 스페이어는 일단 이를 승낙했으나 당국의 승인이 문제였다. 이에 곧 본부에 조선의 상황을 상세히 타전하면서 러시아 군사의 서울진주 필요성을 거듭 역설했다.
 
  이때는 차르를 비롯한 러시아 수뇌부의 생각이 크게 바뀌어 있었다. 한창 건설 중인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완성 시기까지만이라도 조선의 영토를 일본이 점거토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수용된 데 따른 것이었다. 마침내 뤼순(旅順)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의 제물포 입항 명령이 떨어졌다.
 
  高宗은 李範晉을 통해 러시아의 군사개입 의지를 확인하자 곧바로 파천 준비에 들어갔다. 이해 2월7일에 스페이어가 李範晉을 통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최종 통보했으나 高宗은 일본군의 무력개입을 우려한 나머지 공관 수비 상황을 문의하며 결행을 미뤘다. 스페이어가 제물포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 제독에게 수병의 급파를 요청하자 마침내 2월10일에 러시아 수병 100여 명이 공관보호를 구실로 대포 1문을 끌고 입성했다.
 
 
  궁녀가 타는 가마 타고 경복궁 탈출
 
  당시 李範晉은 충청과 황해, 경기 등지의 보부상과 義兵 등을 은밀히 궁문 앞으로 집결시키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는 혹여 있을지 모를 일본군의 무력개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규모가 가장 컸던 춘천의병장 李昭應(이소응)이 李範晉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이에 적극 호응했다고 한다.
 
  을미사변 이후 자신감에 차 있던 일본은 당시 義兵의 서울진공에 대비해 수병을 공관 주변에 배치했다는 러시아 측의 해명에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았다. 실제로 서울 주둔 일본군과 일본교관 휘하의 조선군 병력 대다수가 이미 義兵 진압을 위해 각지에 파견된 상황이었다. 李範晉은 이를 틈타 2월11일 새벽을 결행시점으로 잡았다.
 
  마침내 高宗과 세자는 이날 새벽 嚴상궁의 도움으로 궁녀로 변장한 뒤 궁녀들이 타고 다니는 轎子(교자)에 올라 무사히 궁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당시 특별한 일이 아닌 한 궁녀의 교자는 검문하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
 
  高宗이 궁궐을 무사히 빠져나오는 데에는 불면증으로 인해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는 습관이 크게 기여했다. 일본 측은 이른 아침에 高宗과 세자가 궁녀의 교자를 타고 밖으로 빠져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高宗과 세자가 俄館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7시경이었다. 아관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李範晉은 高宗이 도착하자 곧바로 베베르의 침소를 개조한 행궁으로 안내했다. 미하일로프는 당시 상황을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이른 아침에 李範晉은 우리에게 다가와 잠시 후 高宗이 궁궐을 탈출해 우리 공관으로 올 것이라며 유사시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주의를 주었다. 오전 7시30분쯤 동쪽 문으로 궁녀의 교자 2개가 보였다. 쪽문이 재빨리 열리더니 교자 2개가 문간방으로 옮겨졌다. 첫 번째 교자에는 高宗, 두 번째 교자에는 세자가 타고 있었다」
 

 
  러시아, 아관파천을 「혁명」으로 표현
 
러시아식 제복 차림의 高宗.
  李範晉과 함께 高宗을 기다리던 스페이어는 高宗이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각국 공관에 「궁궐에 머무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세자와 함께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는 高宗의 성명을 통보했다. 러시아 외무당국은 즉시 「파천에 대해 사전에 인지한 바가 전혀 없었다」는 성명서를 내놓았다.
 
  외국 공관은 이를 그대로 접수하며 스페이어와 베베르의 노고를 치하했다. 李範晉에 대한 칭송이 뒤따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미하일로프의 다음 기록이 그 증거이다.
 
  「李範晉의 열정과 명민함 덕분에 이번 「레볼루차(혁명)」는 아무런 인명 피해 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로 인해 高宗의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아관파천을 일종의 「혁명」으로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아관파천에 대한 러시아 측과 列强(열강)의 평가는 일본과 정반대였다.
 
  사건 직후 일본의 언론은 외무 당국에 호응해 『일국의 군주가 왕궁을 버리고 타국의 공사관으로 피란한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며 연일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일부 언론은 『조선의 왕을 새로 앉혀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마저 서슴지 않았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아관파천으로 빚어진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기 위한 속셈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당시 「독립신문」을 비롯한 일부 개화파 인사들은 『아관파천은 국가의 체통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고 나섰다.
 
  이는 당시의 정황에 비춰 무책임한 주장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즉각 환궁을 요구하는 것은 당위론으로는 타당할지 모르나 현실적으로는 高宗을 계속 연금 상태로 묶어 두어 일제의 허수아비로 방치하겠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었다. 당시 조선은 高宗과 궁궐을 지켜 줄 군사나, 이를 뒷받침할 財源(재원)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관파천 직전 일본은 열강을 상대로 「조선은 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해 평온한 상황을 유지하고 있다」고 선전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곳곳에 親日派 인사를 심어 조선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高宗과 李範晉이 러시아를 지렛대로 삼아 이를 타개하고자 한 것은 당시 상황에 비춰 일종의 苦肉之計(고육지계)에 해당했다.
 
  파천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기본적으로 일본 측 자료를 無비판적으로 인용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파천 당시 일본 측이 親日派 관원 등을 앞세워 여론을 조작한 뒤 무력을 동원해 高宗을 재차 궁으로 「납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궁궐에 난입해 민비를 장살했을 때와는 정반대로 오직 구두공세로 일관했다. 이는 러시아와의 전면전을 우려한 데 따른 것이다.
 
  아관파천을 두고 최근 학계 일각에서는 「19세기 말의 東北亞(동북아) 정세를 일거에 뒤바꿔 놓은 대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는 아관파천으로 인해 일본의 강압적인 조선경영 계략이 결정적으로 좌절된 사실을 주목한 데 따른 것이다.
 
 
  법부대신 겸 경무사에 임명
 
  아관파천 직후 高宗은 친러 및 親美(친미)인사들로 구성된 새 내각을 출범시켰다. 미국과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제를 견제한다는 생각이 완연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초대 駐美공사를 역임한 朴定陽(박정양)을 수반으로 하는 새 내각에서 파천 모의에 가담한 李完用은 駐美공사를 역임한 경력 등을 인정받아 외부대신에 제수되었다. 미국 유학파 출신인 尹致昊(윤치호)는 학부대신에 임명되었다.
 
  러시아는 李範晉을 통해 조선경영의 복안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는 李範晉이 법부대신에 제수되어 경무사를 겸한 사실이 뒷받침한다. 俄館으로의 파천이 상징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高宗의 큰 관심은 신변안전이었다. 李範晉이 바로 이런 중책을 떠맡았다.
 
  李範晉은 중책을 맡자마자 즉각 을미사변에 대한 再수사에 들어갔다. 그는 사건의 배후를 철저히 규명해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 당국이 배후에서 조종한 이 사건에서 일본 측 관련자들을 소환조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수사를 지휘한 지 얼마 안 되는 이해 6월20일 갑자기 駐美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됐다.
 
 
  駐美공사 부임
 
  러시아는 아관파천에 호의적이었던 열강이 시간이 지나면서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일본에 동조하는 쪽으로 기울자 내심 일본과의 전면적인 충돌을 크게 꺼리고 있었다.
 
  독립협회 등이 주동이 된 高宗의 환궁 운동이 이듬해인 高宗 34년(1897) 2월에 성사됐다. 아관파천을 주도한 李範晉이 駐美공사에 임명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李範晉이 駐美공사로 부임하기 위해 제물포에서 프랑스 군함에 승선한 것은 高宗 33년(1896) 7월 중순이었다. 그는 도중에 淸國 선적의 連陞號(연승호)로 갈아탄 뒤 상하이(上海)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9월 초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가 굳이 프랑스 군함을 고집한 것은 일본 측의 危害(위해) 가능성 때문이었다. 군함에 승선할 때 조선 순검들이 경비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랑스 제독에게 신변보호를 강력히 요청했다. 그의 미국行에는 후처인 부인 朴씨와 둘째 아들인 李偉鍾(이위종), 통역관, 하인 등이 동행했다.
 
  이후 李範晉은 대략 3년 반가량 미국에서 공사업무를 수행했으나 당시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반 알려진 게 없다.
 
高宗이 니콜라이2세에게 보낸 친서.
 
  유럽 3개국 겸임공사에 임명
 
  李範晉이 閔泳煥의 뒤를 이어 러·불·오 등 유럽 3국의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된 것은 高宗 36년(1899) 3월이다.
 
  이듬해 중국에서는 열강의 利權(이권)침탈에 분노한 민중들이 철도를 파괴하고 외국 선교사들을 살해하는 義和團事件(의화단사건)이 발생했다. 歐美列强과 일본은 병력을 보내 의화단의 亂(난)을 진압했고, 淸國의 半(반)식민지화는 더욱 촉진됐다.
 
  당시 列强의 利權침탈에 대한 조선 백성들의 반감 역시 중국 못지않았다. 자칫 조선판 「의화단사건」이 촉발돼 列强이 무력으로 조선을 점거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한 상황에서 李範晉은 高宗 37년(1900) 5월 초에 런던을 경유해 부임지인 파리에 도착했다.
 
  그가 부임할 당시 마침 파리에서는 만국만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민영찬 등 대한제국 대표단 일행을 안내하며 대한제국 최초로 참여한 국제행사를 무사히 치러 냈다.
 
  그는 이듬해 2월에 빅토리아 영국 여왕의 장례식에 참가한 직후 러시아 주재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었다. 일본의 노골적인 압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도움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하다는 절박한 위기감에서 나온 것이다.
 
  일본內에서는 조선을 둘러싸고 「러시아派」와 「영국派」가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 러시아派는 러시아에 만주에서의 우월권을 인정해 주는 대신 조선內에서의 우월권을 인정받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에 반해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영국派는 이미 조선內에서 확고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는 러시아가 결코 조선을 놓고 협상에 응하지 않으리란 이유 등을 들어 조선을 武力으로 점거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은 영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할 수만 있다면 러시아와의 一戰(일전)에서 열국의 예상을 깨고 능히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고무라 외상은 영국派에 동조했다. 이에 마침내 「영국과 밀약을 체결하는 동시에 러시아를 안심시키는 양면교섭을 전개한다」는 내부 방침이 확정되었다.
 
  高宗 39년(1902) 1월에 런던에서 제1차 英日동맹이 체결됐다. 이에 놀란 러시아는 이를 견제할 속셈으로 곧 淸國과 「만주반환조약」을 맺고 3차에 걸친 만주 주둔군의 撤兵(철병)을 약속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제2차 撤兵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러시아군이 압록강 연안의 森林(삼림)지역을 武力으로 점거하는 사건이 빚어졌다.
 
  李範晉은 全力(전력)을 다해 베조브라조프의 조선이권 침탈계획을 좌절시켰다. 당초 블라디보스토크에 근거를 둔 러시아 상인 줄리어스 브리너(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할아버지)는 高宗 33년(1896)에 조선 정부와 협약해 「대한삼림회사」를 세우고 압록강변의 삼림을 벌채해 큰 수익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자본 부족으로 高宗 37년(1900) 초 마튜닌에게 소유권을 넘기자 마튜닌은 차르의 최측근인 베조브라조프를 동원해 기한이 임박한 採伐權(벌채권)의 3년 연장을 꾀했다. 이에 람스도르프 외무장관은 파블로프 駐韓 러시아공사에게 훈령을 보내 삼림개발협약에 관한 전권을 李範晉에게 위임토록 高宗을 설득할 것을 명했다.
 
  파블로프가 가까스로 이듬해인 高宗 38년(1901) 초에 高宗의 동의를 얻어 냈다. 李範晉이 이에 강력히 반발하자 러시아 외무부는 갖은 압력을 가하고 나섰다.
 
  李範晉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공관 철수를 운위하며 완강히 버텼다. 결국 최고 실세인 베조브라조프를 동원한 마튜닌의 계책은 좌절되고 말았다.
 
  서울에서는 李範晉이 삼림채벌에 관한 밀약을 마튜닌과 체결하고 금전적 보상까지 받았다는 터무니없는 怪聞(괴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李範晉의 러시아에 대한 기본입장은 확고했다. 그가 러시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조선침략을 견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는 단순한 친러파 인사가 아니었다.
 
  일본 당국은 내부적으로 러시아와의 일전을 결정하고 은밀히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러일전쟁 발발하자 러시아와 동맹 주장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李範晉은 高宗의 지시를 좇아 유사시 高宗이 재차 아관에 파천할 준비가 되어 있고, 여의치 않을 경우 러시아로 亡命(망명)할 수 있다는 뜻을 러시아 외무당국에 전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의 반응은 극히 부정적이었다. 자칫 진행 중인 對日협상에 불리하게 작용할 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의 우위현상을 동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러시아는 高宗 40년(1903)에 만주와 조선에서의 현상유지를 꾀할 목적으로 39도선을 기점으로 러·日 양국이 각각 북남에서의 우위권을 인정하는 밀약 체결을 일본 측에 제시했다. 이미 일전불사의 방침을 굳힌 일본 정부는 고의적으로 협상을 지연시키면서 開戰(개전)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러시아는 일본의 은밀한 움직임에 시종 둔감했다.
 
  결국 일본은 開戰 준비가 완료되자 高宗 41년(1904) 2월4일의 어전회의를 통해 전쟁개시를 결정한 이틀 뒤 러시아에 國交(국교)단절의 공문을 보냈다. 전쟁은 이로부터 이틀 후에 일본 군함이 뤼순港과 제물포港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동시에 기습 공격함으로써 개시되었다.
 
  高宗은 황급히 조선의 中立化 방안을 통해 戰禍(전화)를 모면하고자 했다. 高宗의 시종무관이 파블로프 공사를 찾아가 이를 통보하면서 상하이 주재 러시아 총영사관을 통해 세계 각국에 이를 打電(타전)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 소식을 접한 李範晉은 곧 서울로 타전해 「무력을 동원한 일본의 조선장악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도움이 절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동맹국임을 선언하는 게 낫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高宗은 『순서상 먼저 中立을 선언한 뒤 일본의 무력점거를 구실로 列强의 지원을 호소하는 게 낫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李範晉이 高宗의 뜻을 러시아 외무당국에 전하자 람스도르프 외무장관은 이를 즉각 수용했다.
 
  그러나 일본 측이 이를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일본이 이해 2월23일 조선을 무력으로 점거한 뒤 군사적 침략을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韓日議定書(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러시아는 황급히 각국 주재 공사관에 훈령을 보내 이 사실을 널리 알리도록 명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일본은 전쟁 발발 직전부터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해 李範晉의 소환을 요구했다. 李範晉의 법적 지위는 조선 측 외무당국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인해 극히 애매해졌다. 일본이 어전회의에서 전쟁을 결정한 당일 李範晉이 駐獨공사로 전보발령되었다가 20일 뒤 재차 러시아 주재 공사에 임명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러시아 주재 공사관 폐쇄명령에 저항
 
  마침내 李範晉은 이해 3월 초 조선 외부대신으로부터 페테르부르크 공관을 폐쇄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李範晉은 곧 람스도르프를 찾아가 자신은 高宗의 직접적인 命을 받기 전까지는 결코 외부대신의 命을 좇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그의 이런 판단은 옳았다. 이해 7월에 高宗이 람스도르프에게 보낸 電文(전문)이 그 증거이다. 전문은 「외부대신의 命에 결코 복종하지 말 것과 어떤 일이 있어도 계속 공사 자리를 지켜 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李範晉이 끝내 귀국하지 않은 채 1910년까지 여권발급 등의 공사업무를 계속한 것은 바로 高宗의 이런 당부에 따른 것이었다.
 
  李範晉은 곧 체재비 문제로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국내의 送金(송금) 중단 조치로 인한 것이었다. 람스도르프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은 차르가 곧 李範晉의 법적 지위가 분명해질 때까지 3개월마다 7300루블을 지불하도록 배려했으나 체재비를 補塡(보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일본은 李範晉을 소환하기 위해 송금 중단을 비롯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신분보장을 조건으로 恩典(은전)을 베푸는 방안과, 러시아 주재 일본공사관에 소속시켜 통감부의 통제하에 두는 회유방법 등이 동원되었으나 李範晉의 거부로 모두 무산되었다.
 
  일본은 李範晉을 회유하기 위해 高宗 41년(1904) 6월 프랑스의 한 은행을 통해 당시까지의 경비와 귀국여비조로 2만원을 송금했다. 李範晉은 이를 거절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가서 借金(차금)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 측의 방해로 일이 여의치 않게 되자 이내 현지 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일본의 방해 행위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에 일본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조선정부를 압박해 마침내 1904년 9월1일자로 그를 파면시키는 데 성공했다. 「高宗실록」에 수록된 외부대신서리 尹致昊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李範晉의 소환과 관련해 본부에서 전보와 명령을 보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직 귀국하지 않고 있습니다. 매우 해괴한 일로 그냥 둘 수 없으니 그를 파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러시아軍 內 조선인 부대 결성
 
   李範晉은 파면조치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의 초대 러시아 주재 공사 자격으로 업무를 계속 수행하면서 러시아의 승리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는 전쟁 중 러시아 측에 만주와 조선의 주요 전략 거점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이해 9월에 高宗의 지시를 받아 러시아 측에 이같이 전했다.
 
  「조선 황제와 조선정부는 예전 그대로 러시아의 도움과 러시아 군대의 주둔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를 뒤늦게 안 일본정부가 곧 성명을 발표해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해 러시아의 한 구역으로 만들려 한다고 비난하자 李範晉은 곧바로 반박성명을 내 일제의 중상모략에 속지 말 것을 당부했다. 당시 그는 지속적으로 高宗과 차르 간의 친서를 중계하며 高宗을 독려했다. 高宗의 첫 친서를 전해받은 차르가 高宗 41년(1904) 6월에 보낸 답신이 이를 뒷받침한다.
 
  「저는 폐하에게 예전처럼 조선이 러시아에 얼마나 귀중하고 가까운 나라인지, 우리가 폐하에 품고 있는 우정과 호의가 결코 변치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선이 겪고 있는 현실에 깊이 공감하면서 머지않아 조선의 미래가 밝아질 것을 기대합니다」
 
  아무르州 연안의 카자흐 혼성부대에 조선인 부대가 결성돼 일본군에 맞서 싸운 것은 李範晉의 이런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부대에는 李範晉의 족친인 李範允(이범윤)이 조직한 「조선해방부대」가 있었다.
 
  李範允은 李範晉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사냥꾼들로 구성된 射砲隊(사포대)를 조직해 러일전쟁에 참여했다. 高宗 40년(1903)에 間島管理使(간도관리사)가 되어 간도지역의 韓人보호에 애쓴 바 있는 李範允은 러일전쟁 참전 경험을 토대로 훗날 金佐鎭(김좌진)이 지휘하는 北路軍政署(북로군정서)와 제휴해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패배로 끝났다. 高宗 42년(1905) 9월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독보적인 우월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됐다. 李範晉은 람스도르프에게 高宗의 서신을 전하며 列强이 스위스와 벨기에 등의 중립을 보장한 전례를 들어 조선의 主權보장을 위해 애써 줄 것을 호소했다.
 
  그의 이런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강화조약 검토를 위해 열린 러시아 측 관계장관 회의에서 「조선의 主權을 인정하는 조항을 삽입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기본방침이 정해진 게 그 증거이다. 실제로 러시아 측은 줄다리기 협상을 통해 「조선의 主權과 관련된 모든 정책은 조선정부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을 넣는 데 성공했다. 이는 전적으로 李範晉의 공이었다.
 
  큰 틀에서 볼 때 이미 대세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제가 1905년 11월17일의 심야에 조선의 대신들을 강압해 외교권을 박탈하는 「乙巳勒約(을사늑약)」을 조인한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李範晉의 이런 노력이 없었더라면 일본이 늑약을 체결하는 식의 「요식행위」를 생략한 채 곧바로 합방을 추진했을지 모를 일이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李範晉은 러시아의 즉각적인 개입을 청하는 高宗의 친서를 람스도르프에게 전했다. 차르에게 보내는 친서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 일본은 한밤중에 군대와 경찰력을 동원해 궁궐에 침입한 뒤 강제로 저의 옥새와 국새를 빼앗아 갔습니다. 저는 유럽 列强 및 미국정부가 이 문제를 적극 검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황제 폐하가 이 사실을 널리 알려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차르의 命을 받은 러시아 외무당국은 곧 각국 주재 러시아공사관에 훈령을 내려 이를 속히 列强에 알리도록 조치했다. 列强의 반응은 오히려 정반대로 나왔다. 조선에 파견된 自國의 공사들을 모두 소환함으로써 을사늑약을 뒷받침하고 나선 것이다. 러시아는 공사의 소환을 거부하며 이에 반발했으나 이내 일본 및 列强의 반대에 부딪혀 영사를 서울에 두는 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국제미아가 되다
 
  李範晉은 끝내 조선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간 조선에 한두 번 왕래했던 그의 後妻(후처)마저 러일전쟁 직후 발이 묶이고 말았다. 李範晉의 駐美공사 부임 두 해 뒤인 高宗 35년(1898)에 書記生(서기생)의 자격으로 공관에 합류했던 큰아들 李璣鍾(이기종) 역시 베베르와 함께 高宗 39년(1902) 10월에 귀국한 이후 다시는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당시 이기종은 高宗의 즉위 40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열릴 예정이었던 稱慶禮(칭경례)에 러시아 측 대표로 訪韓(방한)하는 베베르 특사를 좇아 휴가를 내고 귀국했다. 그러나 둘째 아들 李偉鍾(이위종)은 시종 부친과 함께 있으면서 수족의 역할을 수행했다.
 
  을사늑약 이듬해인 高宗 43년(1906) 일본 측의 공작으로 러시아 주재 조선공관이 공식으로 문을 닫았다. 李範晉은 즉시 차르에게 도움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차르는 매달 100루블의 체재비를 지급하자는 람스도르프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는 조선 측 공관원들의 체재비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액수였다.
 
  그는 결코 이에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 독립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강구했다.
 
  여기에는 영어와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한 둘째 아들 李瑋鍾의 도움이 컸다. 파리 체류 당시 생시르사관학교에 다닌 李瑋鍾은 러일전쟁 때 러시아 주재 공관의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며 부친을 도왔다. 차르는 이들의 공을 높이 사 李範晉에게는 스타니슬라프 1급 훈장을, 李瑋鍾에게는 스타니슬라프 3급 훈장을 수여했다. 훈장을 받은 20세의 李瑋鍾은 세 살 아래인 놀켄 남작의 딸과 결혼식을 올리면서 러시아 정교회의 관행을 좇아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헤이그 밀사 후원
 
헤이그 밀사들. (왼쪽부터) 李儁, 李相卨, 李瑋鍾.
  을사늑약 이후 李範晉 父子(부자)의 활약은 高宗 44년(1907) 여름의 「헤이그 밀사사건」에서 빛을 발했다. 이 사건은 高宗이 李範晉을 통해 列强과 국제사회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취한 최후의 시도였다.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李相卨(이상설)과 李儁(이준)은 李範晉의 주선으로 차르에게 국제여론의 환기에 앞장서 줄 것을 간청하는 高宗의 서한을 전달할 수 있었다.
 
  러시아 측의 반응은 유보적이었다. 외무대신 이즈볼스키가 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 駐佛 러시아대사에게 보낸 電文이 그 증거이다.
 
  「일본정부가 조선과 관련된 문제에 민감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으니 조선의 밀사들이 도착해 대사의 협조를 요청하면 정중히 거절해 주시기 바랍니다」
 
  밀사의 임무수행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제1차 회의에서 제기된 무기감축 및 세계평화 확립 방안을 주요 의제로 삼은 헤이그의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이해 6월 중순에 시작되었으나 밀사는 7월경에 현지에 도착했다. 37세의 李相卨이 正使(정사), 48세의 李儁이 副使(부사)였으나 현지 언론은 통역관 겸 대변인인 李瑋鍾을 正使로 오인했다.
 
  이들 3인의 밀사가 러시아 병사의 호위를 받고, 러시아 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기자들 앞에서 연설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李範晉의 후원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일본정부가 사건 직후 高宗과 李範晉에게 극도의 적대감을 드러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高宗은 이해 7월19일에 보위를 내놓고 上皇(상황)으로 물러났다.
 
  연해주의 韓人들은 「이준이 자결하고 일본이 高宗도 모르는 사이에 순종을 조종해 조선의 군대까지 해산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크게 격분했다. 李範晉은 곧바로 義兵을 이끌고 있는 李範允과 서신을 교환하며 義兵의 조선 진공 방안을 제의하고 나섰다. 그는 李範允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연해주 방면에서 두만강을 건너 일거에 함경도를 점령한 뒤 더욱 깊게 몰아쳐 마침내 입성해 승리의 노래를 연주해야 합니다」
 
  그는 이 서신에서 러시아의 후원을 장담하면서 자신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李範允을 부사령관으로 삼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적잖은 오해를 낳았다. 李範允 휘하에 있던 嚴仁燮(엄인섭)과 安重根(안중근) 등은 李範晉이 러시아의 힘을 빌려 高宗을 폐하고 조선의 황제가 되려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이들은 곧 李範晉이 군자금을 보내면서 적극적인 후원에 나서자 오해를 풀었다.
 
 
  연해주의 義兵들에게 군자금 후원
 
   李範晉의 행보는 매우 구체적이었다. 1908년 4월에 노우키예프스크(延秋) 지역을 중심으로 擧族的(거족적)인 義兵단체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즉각 李瑋鍾과 사돈인 놀켄 남작을 연해주로 파견했다.
 
  당시 義兵조직의 구심점은 노우키예프스크 촌장인 崔在亨(최재형)이었다. 훗날 상하이임정의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된 崔在亨은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의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한 뒤 이내 귀화해 러시아군의 御用(어용)상인으로 큰돈을 번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두 차례나 차르를 알현해 여러 개 훈장을 받은 바 있는 그는 러일전쟁 직후 李範允과 상의해 國民會(국민회)를 발족하고 회장이 됐다.
 
  李範晉은 李瑋鍾을 시켜 崔在亨에게 1만 루블을 지원했다. 연해주 軍총독이 아무르江 연안 총독에게 보낸 비밀보고서의 다음 대목이 그 증거이다.
 
  「李瑋鍾은 40~5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한 후 두만강 상류지역으로 잠입하기 위해 러시아 국경지대에서 훈춘으로 이동했습니다. 페테르부르크 독지가가 崔在亨을 통해 기부한 1만 루블이 독립군 진영에 전달되었습니다」
 
  「페테르부르크 독지가」는 말할 것도 없이 李範晉을 말한다. 李範晉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자금을 보냈다. 李瑋鍾이 수차례 연해주를 방문해 李範允 및 崔在亨과 만나 義兵조직 문제를 깊숙이 논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李瑋鍾과 그의 장인 놀켄 남작의 등장은 연해주 韓人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1908년 4월 초 南우수리스크의 국경수비원이 연해주 軍총독에게 보낸 비밀보고서가 그 증거이다.
 
 
  대규모 義兵조직 同義會
 
崔在亨
  「李瑋鍾과 놀켄이 군자금을 갖고 여기에 나타난 이유를 외무당국이 모를 리 없을 것입니다. 李瑋鍾은 저에게 두 달 이상 머물지 않겠다고 말했으나 정작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연해주 각지에 흩어져 있던 義兵을 하나로 묶어 대규모의 새로운 義兵조직을 발족시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同義會(동의회)의 창립이 그 구체적인 성과였다. 창립총회 결과 총장에 崔在亨, 부총장에 李範允, 회장에 李瑋鍾이 선출되었다. 동의회의 탄생은 기본적으로 李範晉 父子의 열정적인 격려와 막대한 자금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다.
 
  崔在亨 등은 동의회 발족 직후 李範晉의 계책을 좇아 義兵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進攻(진공)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일본군과의 현격한 병력 차이로 인해 끝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는 방관적인 입장에서 점차 한인 義兵의 활동을 금지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결국 크라스키노와 블라디보스토크를 분주히 오가며 연락책의 역할을 수행한 李瑋鍾은 동의회 義兵이 두만강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자 1908년 7월 말 부친이 있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한 李範晉의 노력은 비단 義兵에 대한 지원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연해주 지역 최초의 한글신문인 「海潮新聞(해조신문)」의 발간을 적극 후원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4만여 명의 韓人이 살고 있었다. 비슷한 수의 美洲(미주) 한인들이 여러 종류의 신문을 보유한 것과 달리 이들은 단 하나의 신문도 갖지 못했다. 李範晉은 신문 발간을 적극 독려하고 나섰다. 일본 측의 「재러한인발행신문」 관련 기록을 보자.
 
  「李範晉은 張志淵(장지연)을 초빙해 일본의 통감정치를 공격하는 한편 義兵을 일으켜 일본인의 驅逐(구축)에 힘써야 한다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신문간행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는 장지연의 「海港日記(해항일기)」 기록과 일치한다. 李範晉은 「해조신문」이 창간되자 곧 격려서신을 보내 신문 창간을 축하하면서 적잖은 지원금을 송금했다. 「해조신문」의 1908년 5월7일자에 게재된 서신 내용이다.
 
  「귀 신문이 시대의 목탁이 되어 이미 망한 우리나라가 중흥하고 다시 독립 자주하여 만국과 동등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귀 신문의 발전을 위해 금화 50원을 송금합니다」
 
  연해주 최초의 한글신문 일간지 「해조신문」은 자금문제로 인해 1908년 2월 말부터 5월 말까지 총 75호밖에 간행하지 못했으나 러시아에 사는 韓人의 민족운동 고취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일제는 이 신문의 조선內 발매를 엄금했다.
 
 
  高宗에게 유서 남기고 자살
 
  李範晉은 변함없이 공사 업무를 계속하며 조선의 主權회복을 위해 진력했다. 그는 1910년 韓日합방 소식을 접한 뒤 이내 의기소침해진 나머지 대외활동을 거의 전폐하다시피 했다. 그는 페테르부르크 시내의 노바야 제레브냐 체르노레첸스키街(가) 5번 주택의 누추한 아파트에 머물고 있었다. 그의 2층 아파트에는 조그마한 방이 6개 있었다. 그중 3개는 그가 사용하고 나머지 3개는 비서들이 사용했다.
 
  러시아 측 자료에 따르면, 李範晉은 늘 한복을 입고 다니며 호기 있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마차를 빌려 시내로 나갈 때면 그의 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합방소식을 접한 이후 초대 러시아공사로서의 자부심을 잃고 점차 자신의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는 마침내 1911년 1월13일 자신의 사무실에서 목을 매 自盡(자진)하고 말았다.
 
  그가 자진할 당시 그에게는 7만 루블 가량의 거액이 있었다. 그는 美洲 국민회에 5000루블, 美洲 무관학교에 3000루블, 美洲 신문사에 1500루블, 하와이에 1000루블, 블라디보스토크 청년회에 2000루블, 블라디보스토크 신문사에 1000루블, 자신의 장례비조로 5000루블, 아들 李瑋鍾 부부에게 약간의 금액을 전하게 하는 유언을 남겼다.
 
  현재 遺贈金(유증금)의 사용처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블라디보스토크 청년회에 유증된 자금이 新韓村(신한촌) 내 韓人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 건립에 사용된 것이 최근 발견된 자료에 의해 확인되었다.
 
  차르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심심한 애도를 표하면서 외무 당국에 명해 장례와 관련한 일체의 사무를 떠맡게 했다. 서울 주재 러시아총영사 소모프는 본부에 타전한 電文에서 서울의 반응을 이렇게 전했다.
 
  「李範晉의 자진 소식은 번개처럼 재빨리 서울에 전해졌으나 신문에는 검열로 인해 극히 짧은 기사만이 실렸을 뿐이다. 일본인들은 모든 불명예가 자신들에게 덧씌워지게 되었다며 불쾌하게 생각했다」
 
 
  高宗과 차르에게 유서 남겨
 
李範晉을 후원한 차르 니콜라이2세.
  러시아의 도하 신문은 그의 죽음을 크게 보도했다. 러시아 측 신문기사를 종합해 당시 상황을 추적하면 대략 이러하다.
 
  그는 죽기 얼마 전부터 집에 잘 들어오지 않은 채 자신의 가재도구들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물으면 잠시 파리로 나갈 생각이라고 둘러댔다. 사건 당일 그는 평소대로 일찍 일어났고 오전 11시까지 자신의 서재에서 작업을 했다. 낮 12시경에는 식당으로 가 잠시 머물었다. 비서는 문득 그의 방에서 나는 총소리를 듣고 급히 밖으로 나가 이 사실을 알렸다.
 
  관할 경찰서장 쿠즈네조프 대령이 몰려든 사람들을 해산시킨 후 문을 열 것을 지시하자 비서가 맨 먼저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천장의 램프 갈고리에 혁대를 맨 李範晉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흰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의 발 밑바닥에는 조그만 조선식 탁자가 뒤집혀 있었다. 6연발 장전 권총은 세 발이 발사된 상태였다.
 
  검시의는 그가 목에 올가미를 건 뒤 몸부림을 치다가 탁자 위로 굴러 떨어진 후 3분 이내에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혁대에 목을 맨 후 마지막 질식사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총을 발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총알은 문과 벽에 박혀 있었다. 의사가 응급소생 조치를 취했으나 허사였다.
 
  경찰과 사법당국 조사원들은 그의 유품을 조사했다. 두 번째 방의 탁자 위에서 죽기 직전에 작성한 듯한 3통의 전보가 발견되었다. 高宗과 차르, 李範允에게 보내는 영문으로 된 전문이었다. 高宗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황제 폐하, 우리의 조국은 망했습니다. 폐하 또한 모든 권력을 박탈당했습니다. 저는 적을 복수하고 벌할 수 없는데 대해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자결로 목숨을 끊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그가 남긴 지갑에는 인근지역의 장의사가 발행한 영수증이 들어 있었다. 당시의 보도에 따르면 李範晉은 죽기 직전에 자신이 주문한 棺(관)을 살펴보았고, 관 뚜껑에는 한글로 그의 짧은 생애와 관직 등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영문 전보는 평소 知面(지면)이 있는 카발로프스키라는 속기사가 작성한 것이었다. 카발로프스키는 李範晉의 부탁을 받고 크게 놀라 이를 극구 거부했으나 李範晉의 설득에 넘어가 이를 작성했다고 한다. 추도사를 실은 「레치」紙의 필자는 李範晉과 가까이 지낸 知人의 말을 인용해 당시 李範晉의 심리상태를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李공사는 國權피탈 소식을 접한 후 아이처럼 울고는 오랫동안 끙끙 앓았다」
 
 
  러시아 주재 공관 매각대금 반환 거부
 
페테르부르크 시내를 지나는 李範晉의 장례 행렬.
  매달 100루블의 러시아 정부보조금으로 생활하던 李範晉은 그토록 막대한 유증금을 어떻게 마련했을까.
 
  당시에 발표된 서울 주재 일본총영사의 성명서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합방 직전 서울 주재 러시아총영사가 조선정부 측에 李範晉의 러시아 외교활동에 대한 代價(대가)로 연간 1200루블의 평생연금을 지급할 것을 청원한 것에 대한 답변으로 나온 것이었다. 일본총영사는 「李範晉이 페테르부르크 소재 조선공관의 國有재산을 팔아넘기고, 여행경비조로 지급된 자금을 횡령했다」고 비난했다.
 
  李範晉은 결코 「횡령」한 적이 없다. 그는 高宗으로부터 활동비 조로 건네받은 돈과 페테르부르크 소재 조선공관을 매각한 대금 등을 일본의 國庫가 된 조선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다. 李瑋鍾이 장지와 관련해 「레치」와 가진 회견에서 밝힌 소감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친의 유해를 고국에 모시고 싶으나 일본인들이 유해를 모독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조국이 다시 독립을 찾는 그때 유해를 서울로 모실 것입니다』
 
  李範晉의 유해는 예배당에서 조촐한 영결식을 마친 후 인근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최근 페테르부르크內 한 국영 수장고에서 발견된 40초짜리 필름에는, 당시 많은 추모객이 李範晉의 시신을 담은 조선식 꽃상여를 마차에 싣고 페테르부르크 시내를 도는 장면이 담겨 있다. 그의 유해는 1975년 소련 당국의 명에 따라 묘역을 再정비하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페테르부르크 시내 북쪽의 공동묘역에 그를 추모하는 높이 2m의 화강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비에는 한글과 러시아어로 「李範晉 공사는 페테르부르크에서 殉國(순국)한 大韓(대한)의 忠臣(충신)이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李範晉이 근무했던 3층짜리 공관 건물은 이곳에서 자동차로 3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임대 아파트로 사용되고 있는 이곳 현관 앞에는 2002년 한국정부가 새겨 넣은 현판이 부착돼 있다. 여기에는 「이 건물에서 1901년부터 1905년까지 李範晉 러시아 주재 대한제국 초대 상주공사가 집무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서 제출
 
  부친과 함께 조국의 主權회복을 위해 헌신했던 둘째 아들 李瑋鍾은 부친 死後 생활고에 시달렸다. 1911년 1월26일 그는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서를 냈다.
 
  「존경하는 황제 폐하, 고인이 된 저의 부친인 前 러시아 주재 조선공사는 조선에 대한 일본정부의 행위와 또한 조국의 자주권 상실, 그리고 고인 또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슬픔을 이겨 내지 못해 올 1월23일 마침내 스스로 自盡했고, 이로 인해 동포와 가족들은 깊은 통탄에 빠져 있습니다. 고인이 된 저의 부친은 러시아에서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힘쓰신 유일한 분으로 저에게 러시아 황제 폐하에 대한 깊은 애정을 심어 주었고, 러시아를 항상 제2의 조국으로 여기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일본정부는 저의 부친과 저의 모든 재산을 몰수해 갔고, 부친의 죽음으로 인해 부친에게서 받은 정신적·물질적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저와 저의 식구는 말 그대로 생계비조차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의 너그러운 자비를 기대하며 모쪼록 제가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성실히 일할 수 있는 기회와, 황제 폐하의 궁궐 내 한 자리를 마련해 주거나, 제게 생활연금을 지급해 주시기를 폐하의 발아래 머리 숙여 청원합니다」
 
  러시아 정부는 이 청원서를 검토한 후, 3년간 그에게 매년 600루블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1911년 11월 李瑋鍾은 니콜라이 2세에게 자신을 러시아 국민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과 귀족의 지위를 내려 달라는 청원을 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高宗이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서한에 李範晉을 두고 「나의 친애하는 형제」라고 부른 사실에 주목했다.
 
  1912년 봄 李瑋鍾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그러나 경제상태는 계속 악화돼 좀더 작은 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1912년 6월, 그는 페테르부르크역 철도 세관에서 서기로 일하게 되었다. 수개 국어에 능통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그에게 이는 성에 차지 않는 자리였다. 1913년 1월11일 李瑋鍾은 사조노프 외무대신에게 청원서를 보내 외무부內 극동부서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원했지만, 거부당했다.
 
 
  李瑋鍾, 赤軍에 가담해 抗日투쟁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李瑋鍾은 赤軍(적군)에 가담해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다. 1919년 8월에 그가 모스크바의 조선인 집회에서 행한 연설을 수록한 「이즈베스티야」紙의 다음 기사가 그 증거이다.
 
  「조선인 빨치산 수장으로 활동한 李瑋鍾은 조선인 부대를 조직해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말로 연설을 마쳤다」
 
  그러나 李瑋鍾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 또한 조선의 몰락과 더불어 부친과 함께 망각 속의 인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림 : 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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