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인물 탐험] 자주적 개화론자 金弘集

積弊 일소로 부국강병 추구
피살 순간까지 自主개혁 도모

  • : 신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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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오. 내가 조선인을 위해 죽는 것은 천명일 것이오. 다른 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구출되는 것은 오히려 깨끗하지 못한 것이오』

申東埈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교수신문 편집국장 역임. 現 고려大 강사. 저서 「관중과 제환공」, 「통치학원론」, 「삼국지통치학」, 「조조통치론」, 「논어론」, 「공자의 군자학」, 「순자론」 등 20여 권.
제2차 수신사로 渡日할 당시의 金弘集.
金弘集(김홍집)은 開化(개화)사상가 중 특이하게 中道(중도)노선을 취한 인물이다. 그는 俄館播遷(아관파천) 직후 親日派(친일파)의 거두로 몰려 백성들에 의해 노상에서 打殺(타살)되었다. 이는 그가 취한 中道노선에 대한 곡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金弘集이 中道노선을 취한 것 또한 風前燈火(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하기 위한 深謀(심모)에서 나온 것으로, 적당히 중간노선을 취해 保身(보신)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朴殷植(박은식)의 「韓國痛史(한국통사)」에 나오는 다음 대목을 보면 알 수 있다.
 
  『金玉均(김옥균)과 朴永孝(박영효), 洪英植(홍영식), 徐光範(서광범) 등은 少年黨(소년당)으로 일본과 친한 자들이다. 閔台鎬(민태호)와 趙寧夏(조녕하), 金允植(김윤식), 魚允中(어윤중) 등은 老成派(노성파)로 淸(청)나라와 친한 자들이었다. 같은 시기에 韓圭卨(한규설)과 李祖淵(이조연), 趙定熙(조정희) 등은 親露黨(친로당)이었다』
 
  金弘集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전후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여러 파벌이 대립하고 있었으나 유독 金弘集만이 中道的 입장에서 開化自强(개화자강)에 매진했다.
 
 
  대사헌 지낸 부친 김영작, 개화사상가들과 交遊
 
金弘集의 스승 朴珪壽.
  金弘集은 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淸廉(청렴)과 忠君愛民(충군애민)을 가훈으로 삼았다. 그의 부친의 유고집인 「邵亭詩稿(소정시고)」에 따르면, 金弘集이 만 26세로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설 때 그의 부친은 이같이 당부했다.
 
  『오늘부터 너 자신이 나라에 출사해 國祿(국록)을 직접 받게 되니 그 책임이 중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로부터 이르기를, 「항상 나라 일에 정성을 다해 국록에 대한 책무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金弘集은 헌종 8년(1842) 7월에 부친 金永爵(김영작)과 모친 창녕 성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당시 관례를 좇아 외가가 있는 서울 龍山坊(용산방)에서 출생했으나, 이후 줄곧 北村(북촌)의 順化坊(순화방) 본가에서 생장했다.
 
  그의 원래 이름은 「宏集(굉집)」이었으나 훗날 「홍집」으로 개명했다. 자는 景能(경능), 호는 道園(도원) 내지 以政學齋(이정학재)라고 했다. 金弘集의 학문과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일차적으로 부친이었다. 그가 쓴 부친의 墓誌(묘지)가 이를 뒷받침한다.
 
  『출사한 뒤 事君(사군)에 耿耿一念(경경일념: 늘 근심하는 한 가지 마음)이었다. 이르기를, 「氣淸(기청: 기가 청명함)·容肅(용숙: 용모가 엄숙함)·言雅(언아: 말이 단아함)·情摯(정지: 인정이 도타움)」라고 했다. 군자가 아니고서는 어찌 능히 이럴 수 있겠는가』
 
  그의 부친 김영작은 본관이 경주 김씨로 숙종의 장인인 慶恩府院君(경은부원군) 金柱臣(김주신)의 5대손이고, 모친은 栗谷(율곡)과 더불어 西人(서인)의 비조로 숭상된 牛溪 成渾(우계 성혼)의 10대손이었다.
 
  숙종 때의 실학자 朴世堂(박세당)에게서 수학한 김주신은 順安縣監(순안현감)으로 재임할 때 그의 딸이 숙종의 계비인 仁元王后(인원왕후)에 책봉되어 부원군, 즉 왕의 장인이 됐다. 김주신의 후손들은 少論(소론)에 속했으나 대대로 북촌에 世居(세거)한 까닭에 집권세력인 老論(노론)과 친밀하게 교유하며 지냈다.
 
  김영작은 이조와 호조의 참판과 대사헌 등의 중앙 요직을 차례로 역임하고, 高宗 즉위 초기에 開成留守(개성유수)를 지낸 뒤, 高宗 5년(1868)에 67세로 작고했다. 그는 생전에 조선말기 최후의 실학자 내지 초기의 선구적인 개화사상가로 손꼽히는 많은 인물들과 교유했다. ?齋 朴珪壽(환재 박규수)를 위시해 淵齋 尹宗儀(연재 윤종의), 海莊 申錫雨(해장 신석우) 등이 바로 그들이다.
 
  김영작은 평소 이들과 더불어 북한산의 승가사 등지에서 다양한 詩社(시사)를 열어 유대를 다지며 利用厚生(이용후생)과 經世致用(경세치용)의 학풍을 체득했다. 김영작은 선배 실학자들의 田制(전제) 개혁론을 계승해 조세의 金納化(금납화)를 주장했다. 김영작이 개화에 눈을 뜨게 된 것은 冬至副使(동지부사)로 入燕(입연)하여 淸나라의 변모한 모습을 견문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철종 때 천주교도가 되었다.
 
  金弘集은 26세 때인 高宗 4년(1867) 2월 식년시 진사과에 급제했다. 이때 부친 김영작은 박규수와 함께 高宗에게 경전을 강독해 주는 日講官(일강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의 음덕이 적잖이 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高宗실록」(4년 2월25일조)의 다음 기록이 그 증거이다.
 
  『전교하기를, 「과거에 새로 합격한 진사 金弘集은 바로 講官 김영작의 아들이다. 특별히 賜樂(사악: 풍악을 내림)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과거 합격은 전적으로 그의 실력에 의한 것으로 봐야 마땅하다. 그가 이해 10월과 이듬해 3월에 잇달아 치러진 殿試(전시)와 庭試(정시) 문과에 합격해 승정원 정7품의 事變注書(사변주서)에 임명된 사실이 뒷받침한다.
 
 
  『實心으로 實政을 행해야』
 
  金弘集이 出仕(출사)한 1860년대는 赴燕(부연)사신들이 들여온 웨이유엔(魏源)의 「海國圖誌(해국도지)」 및 쉬지유(徐繼)의 「瀛環志略(영환지략)」 등을 통해 서양 사정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일부 사대부들은 丁若鏞(정약용)과 朴趾源(박지원) 등 여러 실학자의 저술을 섭렵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 선구자가 바로 박규수와 吳慶錫(오경석), 劉大致(유대치) 등이었다. 박규수의 문인인 金弘集은 일찍부터 개화의 필요성에 눈을 떴다. 벼슬길에 나아간 지 얼마 안 돼 高宗에게 이같이 상주했다.
 
  『무릇 질환이 깊어졌을 때 고치려고 하면 평시보다 10배나 힘이 들게 마련이고 그 효과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로 힘을 쓰고자 하면 實心(실심)으로 實政(실정)을 행해야 합니다. 自强不息(자강불식)이 있을 뿐입니다. 이는 聖學(성학: 유학)에서 말하는 誠(성) 한 자에 집약되어 있는 것으로 가장 切要(절요)한 工夫處(공부처: 힘써 노력해야 할 대상)입니다』
 
  이는 일찍이 李?光(이수광)이 인조에게 「懋實(무실) 12조」를 올린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實事求是(실사구시)」의 실학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金弘集은 高宗 5년(1868) 5월에 외교문서를 취급하는 權知承文院(권지승문원) 副正字(부정자)를 겸했다. 이해 7월에 부친상, 2년 뒤인 高宗 7년(1870) 2월에 모친상을 당했다. 그는 이로 인해 4년 동안 관직을 떠나 있었다.
 
  그는 거상이 끝난 뒤 高宗 9년(1872) 5월에 史官(사관)으로 복직했다. 이후 藝文館(예문관) 검열과 훈련도감의 從事官(종사관), 사간원 正言(정언) 등을 거쳐 高宗 12년(1875) 7월에 興陽(흥양: 지금의 전남 고흥)현감에 제수되었다. 그의 목민관으로서 치적은 매우 볼만했다. 전라감사 趙性敎(조성교)의 추동절 평가가 그 증거이다.
 
 
  목민관으로 높은 평가받아
 
  『흥양현감 金弘集의 初政(초정)은 蔚有聲譽(울유성예: 그 명성이 매우 성함), 上(상)』
 
  이후 3년간에 걸쳐 전라감사 鄭範朝(정범조)와 李敦相(이돈상) 등이 모두 「上」으로 고과를 올렸다.
 
  그는 高宗 13년(1876)에 혹심한 가뭄을 맞아 27차례에 걸쳐 험산을 오르내리며 기우제를 올렸다. 그는 기우제문에서 천지신명에게 이같이 빌었다.
 
  『비는 내리지 않고 햇볕이 연일 내리 쪼여 백리의 땅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 허물은 태수된 이 몸에 있습니다. 벌은 이 몸에 내리고 백성이 재앙을 당하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당시 전라도를 순찰 중이던 암행어사 沈東臣(심동신)는 書啓(서계)에서 「金弘集은 錦絲(금사) 한 오라기조차 취하지 않아 가히 지조가 염결한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렸다.
 
  黃玹(황현)은 「매천야록」에서 金弘集의 목민관으로서 치적을 이같이 칭송했다.
 
  『饑民(기민)을 살리기 위해 萬計(만계)를 썼다. 官道(관도) 변에 옛 충신의 旌閭(정려)가 있어 그 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下馬(하마)해 지나갔으니 비록 雨夜昏黑(우야혼흑: 비 오는 어두운 밤)일지라도 반드시 이를 폐한 적이 없다. 그 절조와 愼篤(신독)이 이와 같았다』
 
  金弘集은 高宗 14년(1877) 12월에 홍문관 修撰(수찬)에 내정되었다가 이듬해에 내직으로 영전했다. 이후 호조와 공조참의를 거쳐 高宗 16년(1879)에 병조참의가 되었다. 그가 내직으로 전보될 때는 이미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개항이 이뤄진 뒤였다. 일본의 무력에 굴복해 개항을 수용한 閔씨 척족정권은 국제 정세에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열강의 치열한 각축전에 대처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閔씨 척족정권이 金弘集을 위시한 신진개화세력을 급히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당시 그는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세상의 흐름에 밝은 인물로 통했다.
 
 
  제2차 수신사로 訪日
 
  金弘集은 高宗 16년(1879)에 來韓(내한)한 하나부사(花房) 駐韓(주한)일본공사와 만나 개항 이후에 불거진 여러 문제를 놓고 담판을 벌였다. 당시 일본은 「미곡수출의 금지조치를 해제하고, 빠른 시일 내에 인천을 개항하는 동시에 일본공사관의 서울 설치를 허용하라」며 조선을 압박하고 있었다.
 
  金弘集은 담판 자리에서 하나부사가 「조선 정부가 사절 파견을 희망한다면 반대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것을 계기로 이듬해인 高宗 17년(1880) 3월에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의 正使(정사)로 내정되었다. 강제적으로 맺어진 강화도조약의 개정을 교섭하기 위해서 시무에 밝은 金弘集이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金弘集은 이해 5월 예조참의에 제수된 뒤 6월25일 日本使行(일본사행) 길에 올랐다. 金弘集을 단장으로 한 제2차 수신사 일행 58명은 부산을 떠나 10일 만에 도쿄에 도착했다. 이는 高宗 13년(1876) 金綺秀(김기수)의 제1차 수신사행에 이어 두 번째로 이뤄진 대일본 공식사행에 해당한다. 당시 「도쿄일보(東京日報)」는 이들의 渡日(도일) 상황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金弘集을 이같이 묘사했다.
 
  『수신사 김공은 매우 침착한 인물로 조선국 조정이 인선에 얼마나 신중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그는 학문이 流麗(유려)하고 문장이 매우 출중할 뿐만 아니라 만사에 스스로 정중한 태도를 보이는 등 용모와 자세가 지극히 淸秀(청수)하다』
 
  수신사 일행은 도착한 지 3일 만에 일본 외무성을 예방하면서 예조판서 尹滋承(윤자승)의 書契(서계)를 전달했다. 서계는 슈펠트 美 제독의 국교요청에 대한 접수거절과 그 이유를 소명한 것 등이 골자를 이루고 있었으나 別錄(별록)에는 防穀(방곡) 문제를 포함해 일본 측의 요구에 대한 조선 조정의 답변이 상세히 수록돼 있었다.
 
  金弘集은 약 한 달 동안 도쿄의 「히가시혼칸지(東本願寺)」에 머물렀다. 이 사이 그는 조선 문제와 수신사 일행의 동정을 보도한 일본의 도하 신문과 淸國(청국) 신문의 기사를 세심히 검토하며 조약의 세칙개정을 위한 초안 작성에 몰두했다. 당시 일본은 구미제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駐日(주일) 淸國공사관 측과의 접촉을 통해 이런 사실을 알게 된 金弘集은 관세 자주권 등 통상과 관련한 국제법상의 실무지식을 동원해 세칙개정 초안을 제시했으나, 日本은 그가 전권사신이 아니라는 구실을 내세워 거절했다.
 
 
  「조선책략」은 金弘集의 요청으로 만들어져
 
  金弘集은 日本使行을 통해 국제 정세와 외교적 실무를 배우게 되었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황준센(黃遵憲)의 「朝鮮策略(조선책략)」과 정콴잉(鄭寬應)의 「易言(이언)」 등 개화와 직결된 저서를 조선에 들여온 점이다.
 
  金弘集이 일본에 체류할 당시 일본 정부는 형식적인 연회를 베풀면서 수신사 일행이 목적하는 실질 교섭에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다. 하나부사 공사를 비롯한 외무성 당국자들은 일본 국왕에 대한 알현과 各部(각부) 대신에 대한 예방을 강압적으로 권했다. 金弘集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던 중 그는 주일 淸國공사관 참찬관인 황준센의 내방을 받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나라에 모욕을 초래하고 양국 간에 불화를 일으킨다면 이는 中正(중정)을 얻는 일이 못 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먼저 孔子廟(공자묘)를 참배하고 淸國공사관을 예방한 뒤 비로소 일본 당국자들을 방문했다.
 
  이 와중에 金弘集은 주일 淸國공사 허루장(何如璋) 및 참찬관 황준센 등과 6차에 걸친 면담을 갖고 세계 정세의 흐름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다. 허루장은 「治平(치평)의 寶書(보서)」에 해당하는 「관자」를 주석한 당대의 巨儒(거유)였다.
 
  황준센의 「조선책략」은 金弘集의 요청에 의해 처음으로 저술된 것이다. 이는 金弘集의 유고인 「大淸欽使筆談(대청흠사필담)」의 기록이 뒷받침한다.
 
  이에 따르면 1880년 7월6일자의 필담에서 金弘集은 국제 정세 등을 논하면서 황준센이 지은 「日本雜事詩(일본잡사시)」와 허루장 및 황준센의 공저인 「日本志(일본지)」를 보여 주기를 요청한 바 있다. 金弘集은 7월21일의 네 번째 만남에서 허루장의 국제 정세에 관한 견해에 동조하면서 귀국 즉시 반포할 것을 전제로 그의 저서인 「使東述略(사동술략)」을 건네줄 것을 간청했다.
 
  허루장은 「남아 있는 책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간곡히 사절하면서 다른 날 다시 만나 얘기할 것을 약속했다. 열흘이 지난 8월2일에 황준센이 金弘集을 찾아와 이같이 변명하며 「조선책략」을 건네주었다.
 
  『평소 공사와 조선의 급무에 대해 의논해 왔는데 김공의 귀국일이 촉박한 까닭에 급히 책으로 만들어 이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정콴잉의 「易言」을 들여오다
 
   金弘集은 극구 稱謝(칭사)하면서 귀국 즉시 국내에 널리 반포할 것을 다짐했다. 황준센이 「조선책략」을 급히 저술해 준 것은 金弘集이 누차 이들이 기왕에 펴낸 저서를 간곡히 요구하며 이들의 저서를 조선에 널리 반포하겠다고 다짐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황준센은 金弘集에게 「조선책략」과 함께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정콴잉의 「易言」을 건네주었다.
 
  「易言」의 저자 정콴잉은 광동성 香山縣(향산현) 출신으로 젊어서 미국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운 뒤 上海와 홍콩 등지에서 30년 동안 외국상사의 買辦(매판: 위탁판매)으로 일한 인물이다. 그는 직업상 서양인들과 많은 교제를 하면서 서양문물의 섭취와 중국의 부국강병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가 자신이 지득한 서양 지식과 서양 서적 등을 참고로 하여 펴낸 것이 바로 「易言」이었다.
 
  서구열강의 침략을 막기 위한 부국강병을 역설한 「易言」은 同治(동치) 원년(1862)에 「救世揭要(구세게요)」라는 서명으로 출간되었다. 이후 정콴잉이 계속 관계자료를 수집해 증보판을 내놓으면서 동치 10년(1871)에는 「易言」, 光緖(광서) 19년(1893)에는 「盛世危言(성세위언)」으로 간행되었다. 「易言」이라는 책 제목은 「시경」 대아편에 나오는 「쉽게 말하지 말라」는 뜻의 「無易由言(무이유언)」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정콴잉은 오히려 「쉽게 말하고자 한다」는 취지로 이런 서명을 택한 것이다.
 
  「易言」은 19세기 후반 중국의 개화사상이 서양기술의 습득만을 강조한 洋務論(양무론)에서 서양의 정치와 제도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變法論(변법론)으로 전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易言」이 조선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高宗 19년(1882)에 임오군란이 진압된 직후 高宗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 求言令(구언령)을 내리자 많은 사람들이 「易言」의 내용을 대거 참고해 적극적인 개혁 추진을 건의했다. 대표적인 예로 池錫永(지석영)의 상소를 들 수 있다.
 
  『무릇 自强禦侮之策(자강어모지책)은 모두 「易言」에 실려 있습니다. 신은 감히 贅進(췌진: 구구히 진언함)할 수 없습니다』
 
  魚允中(어윤중)은 「易言」을 감명 깊게 읽은 나머지 정콴잉을 직접 찾아갔다. 그는 高宗 18년(1881)에 일본 시찰단의 일원으로 도일한 뒤 중국을 거쳐 귀국하는 도중 上海로 저자를 방문했다. 高宗은 일부 개화파 인사들이 이 책을 백성들에게 널리 읽히기 위해 속히 복각할 것을 주장하자, 이를 받아들여 사역원에 「易言」의 대량 복각을 명했다.
 
  「해국도지」와 「영환지략」 등을 포함해 서양 사정을 소개한 여러 서적 중 한글 번역본이 나온 것은 「易言」밖에 없었다. 「易言」이 번역·출간된 것은 백성들에게 널리 읽혀 부강개화를 이루고자 하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易言」의 국내 전파는 말할 것도 없이 金弘集의 공이었다.
 
  「조선책략」의 저술은 金弘集이 의도적으로 황준센을 부추긴 데 따른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이는 허루장이 金弘集에게 조선도 속히 공사를 일본에 상주시켜 세계 정세를 세밀히 파악할 것을 권하자 金弘集이 조선 내부의 사정을 들어 난색을 표한 대목이 뒷받침한다.
 
 
  중국의 지원 아래 對美수교 모색
 
  허루장이 러시아 세력 방어를 위해 서양 각국과 교류해 均勢(균세: 세력균형)의 대책을 세울 것을 권하자 金弘集은 조선 조정이 외국을 맹수 보듯이 배척한다며 어려움을 표시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아직도 30년 전의 중국 사대부처럼 외국 사정을 알고자 하지 않아 그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허루장은 防俄(방아: 러시아 방어)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서구열강 중 신의가 높고 부강한 미국과 먼저 통상조약을 맺은 뒤 다른 나라와 교섭하라』고 권했다. 그러자 金弘集은 미국과의 교섭을 논할 수 없는 조선의 현실을 탄식하면서 조선 국내에서의 반포를 전제로 허루장에게 그의 저서를 간절히 요청했다.
 
  조선이 주도하는 對美수교는 그의 스승인 박규수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는 귀국 직전에 허루장의 저서 대신 황준센이 급히 저술한 「조선책략」을 건네받은 셈이다. 金弘集은 「조선책략」과 「易言」을 건네받을 때 허루장 등에게 중국 측의 지원을 은근히 요청했다.
 
  『조선의 독서인은 모두 통상이 불가하다고 하고 있소. 과연 어떻게 해야 이것을 時務(시무)에 붙여 논할 수 있을지 걱정이오』
 
 
  高宗에게「조선책략」헌상
 
  金弘集은 작별인사차 주일 淸國공사관에 들러 이후 淸國 측과의 지속적인 연락을 위한 비밀연락 장소까지 정했다. 金弘集은 중국 측의 우회적인 지원을 통해 對美수교를 적극 추진코자 했다. 사실 중국 측의 지원은 개국통상을 결사반대하는 국내 척사파의 반발을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었다.
 
  金弘集은 허루장 등과 면담하면서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한 朝·中·日(조·중·일) 3국의 협력 필요성에 공감했다. 그가 동양 3국이 합심해 서구열강의 침공에 대비하자는 취지에서 일본의 민간정치인 및 허루장 등이 주도해 설립한 「興亞會(흥아회)」에 참석할 것을 요청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는 「흥아회」의 설립취지에 적극 찬동하면서 수행원인 姜瑋(강위) 등 3人을 참석시켰다.
 
  강위는 武弁(무변) 출신으로 실학자인 金正喜(김정희) 밑에서 「실사구시」의 학풍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그는 草衣禪師(초의선사) 및 申櫶(신헌) 등과 교유하면서 많은 중인층의 제자들을 두고 자신의 개화사상을 전수했다. 그는 강화도조약 체결時 전권대신 申櫶의 수행원으로 참여해 박규수의 지시를 받으며 조약체결에 일조했다.
 
  강위에 대한 金弘集의 신임은 매우 돈독했다. 「金弘集유고」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그 증거이다.
 
  『강위는 어렸을 때부터 奇士(기사)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의 식견은 매우 넓어 일반 사람들의 생각 밖의 것이었다. 특히 국제문제에 대해 앞으로 변할지 모르는 일을 미리 내다보고 사전에 구제해 보려고 했다』
 
  강위는 귀국 직후 金弘集을 대신해 對美수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다녔다.
 
  수신사 일행은 도일한 지 한 달 만에 귀국했다. 金弘集이 高宗을 알현해 경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조선책략」을 헌상하자 高宗이 富國强兵(부국강병)의 방안을 물었다. 金弘集이 이같이 답변했다.
 
  『단지 부강만이 自强(자강)이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政敎(정교)를 밝히고 밖으로는 타국과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강의 急先務(급선무)입니다』
 
  高宗이 즉각 영의정 李最應(이최응)을 비롯한 중신들에게 명하여 그 내용을 검토한 후 보고토록 했다. 이최응은 곧이어 열린 중신어전회의에서 「조선책략」의 내용에 동의를 표명했다. 이최응의 이런 태도는 對美관계를 새롭게 조정하려는 조정 일각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다른 중신들까지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조선책략」에 대해 찬성의 뜻을 밝히면서 다만 「朝野(조야)의 강한 반발이 예견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척사파의 반발
 
朝美통상조약 당시의 전권대관 申櫶(왼쪽)과 朝英조약 당시의 전권대관 趙寧夏.
  당시 유림을 중심으로 한 斥邪派(척사파)들의 반발은 의외로 강력했다. 이는 「高宗실록」(11년 윤7월6일조)에 실려 있는 강원도 유생 洪在鶴(홍재학)의 상소문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원래 서양의 학문은 天理(천리)를 문란하게 하고 人倫(인륜)을 멸하는 것이 더 말할 것도 없이 심합니다. 「조선책략」을 가지고 온 자들은 말하기를, 「그 내용이 우리의 心算(심산)에 부합됩니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과연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까.
 
  이들은 전하의 신하가 아니라 바로 예수의 심복으로서 歐羅巴(구라파)와 내통한 자들입니다. 속히 신하로서 뜬소문을 꾸며내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들의 목을 베어 거리에 매달고, 서양사람들을 모조리 내몰아 우리나라 예의의 풍속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소서』
 
  홍재학 등은 『「조선책략」은 조선관리가 황준센의 이름을 빌려 작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金弘集 등에 대한 처벌을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金弘集 자신이 앞장서 對美수교를 추진하는 것은 결코 得策(득책)이 될 수 없었다. 강위가 서기의 자격으로 수신사행에 참여했다가 귀국 직후 對美수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다닌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강위는 이같이 주장했다.
 
  『러시아는 虎狼(호랑)의 秦(진)과 같은 나라이다. 그러나 미국은 만국 중 가장 평화를 사랑하고 다른 나라의 토지와 인민을 탐내지 않고 오직 公議(공의)를 펴서 타국의 신임을 받는 나라이다. 속히 미국과 수교를 맺어 만전을 기해야 한다』
 
  金弘集은 다각도로 對美수교 의지를 관철하고자 했다. 우선 그는 「信行別單(신행별단)」에서 서양과 수교해 근대문명을 이뤄 나가는 일본의 발전상을 자세히 소개함으로써 조선의 對美수교 필요성을 우회적으로 역설했다. 「조선책략」의 전달 역시 連美策(연미책)을 공론화하기 위한 深謀遠慮(심모원려)의 소산이었다.
 
  「조선책략」의 골자인 親淸(친청)·結日(결일)·聯美(연미)의 세 가지 방략 중 「친청」과 「결일」은 이미 추진되고 있는 사안인 까닭에 새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연미」는 향후 서구열강과의 교섭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어 있었다.
 
 
  통리기무아문 通商司 堂上 맡아
 
  「조선책략」과 「易言」의 전래는 對美수교의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이론적 도구였다. 金弘集은 귀국 직후 「조선책략」 등에 근거해 防俄(방아)정책의 수립을 비롯해 외국어와 기술학습을 위한 유학생의 파견, 병력의 정예화와 육해군의 육성, 巡査(순사)와 사법제도 운영 등을 건의했다. 이는 조선 조정으로 하여금 均勢정책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정책을 강구케 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金弘集은 高宗의 신임을 얻어 귀국한 그해 11월에 예조참판으로 승진했다.
 
  얼마 후 일본의 하나부사 공사가 국서를 갖고 다시 오게 되자 그는 講修官兼(강수관겸) 伴接官(반접관)에 제수되어 일본사신의 접대와 양국 현안 해결을 위한 회담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때 하나부사는 인천 개항 문제와 재경 공사관 駐箚(주차) 문제를 집요하게 요구하면서 『속히 타결되지 않을 경우 공사관을 철수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는 양국 간의 전쟁을 의미했다. 하나부사가 이를 빗대어 『獨·佛(독일·프랑스) 양국 간 전쟁이 있었는지를 아는가』라고 묻자 金弘集은 이같이 면박을 주었다.
 
  『나는 獨佛戰을 모른다. 우리 양국의 수호가 무르익어 가는 상황에서 어찌 만 리 외방의 전쟁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수차례에 걸친 회담 끝에 이듬해인 高宗 18년(1881) 2월에 인천 개항을 20개월 뒤로 연기하는 것으로 최종 합의점을 끌어냈다. 조선 조정은 이에 앞서 高宗 17년(1880) 12월에 統理機務衙門(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해 내외의 기무를 관장케 하면서 金弘集을 通商司(통상사) 堂上(당상)에 임명했다. 이는 對美조약 체결을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이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병조 정랑 柳元植(유원식)의 상소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高宗 18년(1881)에 前 판서 姜晉奎(강진규) 등이 주동이 되어 李晩孫(이만손)을 疏頭(소두)로 하는 소위 「嶺南萬人疏(영남만인소) 사건」이 빚어졌다. 「高宗실록」(18년 2월26일조)에 실린 영남유생 이만손의 상소는 「영남만인소 사건」이 일어난 배경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金弘集이 가지고 온 「조선책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서고 가슴이 떨렸으며, 이어서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황준센은 중국인으로 일본에서 演士(연사)로 행세하며 예수를 믿어 斯文亂賊(사문난적)의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속히 그 책을 물이나 불 속에 집어던져 백성들로 하여금 전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孔子(공자)와 朱子(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 요사스런 무리들이 간계를 부릴 여지가 없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나라의 예절 있는 풍속을 장차 만대에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高宗은 「조선책략」을 빙자해 또다시 번거롭게 상소하면 엄벌에 처하겠다는 비답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영남 유림들이 재차 상소를 기도하자 이만손과 강문규 등을 유배형에 처했다. 그래도 척사운동이 수그러들지 않자 高宗은 이해 5월에 소위 「斥邪綸音(척사윤음)」을 내렸다. 이에 척사파 유생들 대부분이 「至凶絶悖(지흉절패)」의 무리로 몰려 대거 유배형에 처해졌다. 과격한 상소를 올려 물의를 빚은 강원도 유생 홍재학은 이때 처형되었다.
 
 
  歐美諸國과의 수교협상에 참여
 
   이런 상황에서 金弘集은 정치적 후퇴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세 번에 걸쳐 사임을 청했으나 高宗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사직 상소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君恩(군은)에 보답코자 하면 요직을 멀리 피해 나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臣으로 하여금 어물어물 그 자리를 메우는 식으로 한다면 장차 조정이 어찌되겠습니까. 臣의 직책을 갈아치우고 臣을 사법에 맡겨 그 죄를 다스려 공사 간에 모두 다행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결국 金弘集은 이해 3월부터 7월까지 넉 달 동안 富平府(부평부)로 축출되었다가 講修官(강수관)과 반접관으로 교체된 뒤 다시 김포로 유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高宗이 유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고육책의 일환으로 취한 조치들이었다.
 
  金弘集은 자청해 벼슬을 물러나면서도 결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그가 通商司(통상사) 당상 겸 經理事(경리사)의 자격으로 구미 각국 등과 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각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반접관으로 활약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신념 때문에 가능했다.
 
  高宗 19년(1882) 4월6일에 歐美(구미)열강과 최초로 체결된 朝美(조미)통상조약 체결 당시 金弘集은 전권대관 申櫶을 보좌하는 전권부관으로 참여했다. 이는 강화도조약 개정을 위한 교섭 등을 통해 국제법상의 실무능력을 연마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어 6일 뒤에 이뤄진 영국과의 조약 체결 때에는 전권대관 趙寧夏(조녕하)를 보좌하는 전권부관으로 참여했다.
 
  다시 한 달 뒤에 독일과 조약을 체결할 때는 물론 임오군란 직후에 체결된 이해 7월의 제물포조약과 8월의 淸國과의 商民水陸貿易章程(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때 전권부관이 되었다. 이 조약들은 사실상 金弘集이 체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조선이 맺은 일련의 조약 중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조미통상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수신사 金弘集이 황준센의 「조선책략」과 정콴잉의 「易言」을 전달함으로써 연미책이 공론화한 데 따른 것이었다. 金弘集은 관세 자주권의 원칙을 처음으로 내세웠다. 이것이 조선의 對外통상외교정책을 유리하게 추진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는 독일과 통상조약을 체결할 당시 高宗의 밀지를 받고 조약체결 권고차 내한한 마젠충(馬建忠)에게 淸나라 차관의 도입을 타진해 이를 약속받았다. 그는 이런 공을 인정받아 이해 4월에 이조참판으로 승진했다.
 
 
  對淸 외교에서 활약
 
  개화파는 임오군란(1882년)을 계기로 개화방법론을 놓고 온건과 급진의 두 갈래로 나뉘게 되었다. 대원군은 군란으로 再집권하자마자 金弘集을 淸나라와 일본을 상대하는 접견대관에 임명한 데 이어 다시 군란의 뒤처리를 위해 閤門(합문) 내에 기무처를 신설한 뒤 行護軍(행호군)에 임명했다.
 
  얼마 후 대원군이 淸國에 피랍되고 閔씨 척족이 再집권하자 金弘集은 전권대신 李裕元(이유원)의 부관이 되어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조약 체결 직후 다시 謝恩兼陳奏使(사은겸진주사)의 副使로 임명된 그는 高宗의 친서인 「善後事宜六條(선후사의6조)」를 淸나라의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선후사의6조」는 조선의 향후 기본정책을 제시한 것으로 민심안정과 인재등용, 군제정비, 법제개정, 商務(상무)확대, 재정합리화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金弘集은 리훙장과의 회담에서 차관제공과 외국인 顧聘(고빙) 문제를 정식으로 요청해 이를 관철한 데 이어 대원군의 석방을 교섭하는 동시에 問議官(문의관)으로 온 어윤중과 같이 두 나라간의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조인했다. 이를 계기로 金弘集은 「일본통」만이 아니라 「청나라통」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金弘集은 이런 공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했다. 경기감사와 규장각제학 등을 거쳐 高宗 21년(1984) 9월에 예조판서로 승진했다. 이때 그는 督辦交涉通商事務(독판교섭통상사무)의 자격으로 대외교섭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임오군란의 실패를 계기로 척사파는 후퇴했으나 閔씨 척족과 급진개화파 간의 대결구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 와중에 中道노선을 취한 金弘集과 온건개화파인 金允植(김윤식) 등은 점진적인 개혁을 꾀해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高宗 20년(1883) 해관의 설치와 최초의 근대학교인 元山學舍(원산학사)와 同文學(동문학)의 설치, 「漢城旬報(한성순보)」의 창간, 治道局(치도국: 도로국)의 설치 등이 그 실례이다. 각종 개화서의 번역 및 편찬이 이때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임오군란 직후의 정국구도는 閔씨 척족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와 온건개화파의 연합으로 짜였다. 조선 주둔 淸兵(청병) 사령관인 유엔스카이(袁世凱)는 개화파를 적극 억압하고 나섰다. 이는 개화파가 추진한 일련의 개화정책을 淸國으로부터의 독립을 겨냥한 것으로 간주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옥균을 위시한 급진개화파가 점차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결국 이들은 甲申政變(1884년)을 일으켰으나 3日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좌의정으로 갑신정변 뒷수습
 
  외교총책을 맡고 있던 金弘集은 정변 당시 한성판윤에 임명되었으나 동문수학한 김옥균 및 박영효 등의 정변모의에는 가담하지 않은 채 뒷수습에만 전념했다. 이때 高宗은 金弘集으로 하여금 정변을 후원한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와 일본군의 행동에 항의하는 照會(조회)를 발송하게 하면서 그를 우의정에 제수했다. 그리고 다시 하루 만에 그를 좌의정 겸 외무독판으로 임명했다. 이는 일본과 漢城條約(한성조약)을 체결하기위한 임시조치로 취해진 것이었다.
 
 
  閔씨 정권에 회의 느껴 사직
 
  閔씨 척족의 세도정치는 국가재정은 물론 국내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 역시 淸·日의 첨예한 대립 속에 英·러가 대립하는 등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閔씨 척족세력은 흉흉한 민심에 겁을 먹고 감히 표면에 나서지 않으려고 했다. 이로 인해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기술해 놓았다.
 
  『소위 신진으로 시무를 말하는 자는 모두 혐오되어 疏遠(소원)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이에 개화진보의 길은 더욱 폐색되고, 완고한 형세가 더욱 확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金弘集은 좌의정으로 발탁되어 정변의 뒷수습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곧 사직 상소를 올려 한직인 판중추부사로 물러났다. 「閔씨 척족의 세도정치하에서는 개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판중추부사로 있던 그는 高宗 24년(1887) 10월에 이르러 3년 만에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이내 사직 상소를 네 차례 올린 끝에 다시 판중추부사의 자리로 물러났다.
 
  그렇다고 그가 부강개화의 의지를 꺾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할 수 있는 적당한 시기의 도래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가 高宗 25년(1888) 10월에 高宗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개화정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상황을 감안해 사직을 강청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오늘날 國計(국계)와 民憂(민우)가 실로 위급한 때입니다. 인재를 등용하면서 명실상부하지 못하면 나라가 병들고, 재물을 다스리는 데 冗費(용비)와 濫費(남비)를 절제하지 않으면 항상 가난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근원을 연구하지 않고 그 폐단만을 제거하려 하면 어찌 그 근본이 제거되겠습니까』
 
  이는 「자주적인 개화정책을 외면한 閔씨 척당 정권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을 강력히 피력한 것이었다. 당시 閔씨 척당은 淸나라에 의지한 채 백성들에 대한 가렴주구를 일삼는다는 원성을 듣고 있었고, 유엔스카이는 마치 조선총독처럼 군림하면서 온건개화파의 개혁까지 철저히 봉쇄하고 있었다. 高宗 31년(1894)에 들어와 동학 농민군이 일거에 봉기해 정국을 일변케 만든 데에는 바로 이런 요인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淸日전쟁(1894년) 당시 일본군의 포로가 된 淸軍.
 
  淸軍 요청 반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이에 놀란 조정은 급히 병조판서 閔泳駿(민영준)을 통해 淸國에 원병을 청했다.
 
  대신들은 高宗이 借兵(차병)에 관한 의견을 구하자, 소위 「三難(3난)」을 이유로 난색을 표하며 강화도 주둔 병사의 파송을 건의했다. 「3난」은 借兵할 경우, 첫째 수많은 생령을 剿滅(초멸)할 공산이 크고, 둘째 민심이 크게 동요하고, 셋째 각국 사절이 모두 自國(자국)의 군사를 불러 공관을 지키게 되어 전쟁의 단서를 자초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高宗은 초토사 洪啓薰(홍계훈)의 잇단 敗報(패보)로 놀란 나머지 다시 중신회의를 열어 이를 논의토록 했다. 이때 판중추부사로 있던 金弘集은 결연히 차병을 반대하며 이같이 주장했다.
 
  『이들을 효유하여 귀화시키는 방안은 오직 유능한 인사를 선발해 파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전주성 함락의 급보에 당황한 조정은 마침내 淸軍의 차병을 결정하고 말았다. 高宗이 교령을 내려 일본이 이를 구실로 출병할 것을 걱정하자 金弘集이 이같이 상주했다.
 
  『일본이 우리 쪽에서 請援(청원)하지 않았는데 어찌 妄動(망동)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이런 예측은 이내 지나친 원칙론에 근거한 낙관으로 판명 나고 말았다. 일본군은 이해 5월5일에 淸兵이 도착하자 곧바로 다음날 天津條約(천진조약)을 구실로 인천을 경유해 서울로 진군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官軍(관군)과 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자진 해산하고 있었다. 이때 高宗은 兩湖(양호: 충청과 전라)의 백성들에게 제반 폐단을 시정하는 大更張(대경장)을 시행하겠다는 취지의 윤음을 발표하고 난이 진압되었음을 서울 주재 각국 공사관에 통고하면서 淸·日 양국군의 즉각 철수를 수차에 걸쳐 요구했다. 그러나 開戰(개전)의 구실을 찾고 있던 일본군이 이를 들어줄 리 만무했다.
 
  일본군은 淸軍에게 난의 진압에 따른 내정 공동간섭 방안을 제의하면서 병력을 증강했다. 淸軍이 이에 불응하자 일본공사는 독단적으로 高宗에게 내정개혁의 필요성을 설명한 뒤 조속히 개혁조사위원을 임명해 일본공사와 협의할 것을 강요했다.
 
 
  갑오경장 주도
 
19세기 말 화가인 조석진이 그린 갑오경장 당시 군국기무처 회의 모습. 김홍집·유길준 등 회의 참석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高宗이 時·原任(시·원임)대신과 각신들에게 의견을 구하자 영의정 沈舜澤(심순택)은 『일본의 개입은 국가의 위기이니만큼 내정개혁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판중추부사 金弘集은 결연히 나서 조정이 주도하는 민심수습방안을 건의했다. 「高宗실록」(31년 5월12일조)의 다음 기록이 그 증거이다.
 
  『경장은 정치의 병폐를 시의에 맞도록 변통하는 것으로 어찌 굳이 옛 법도를 지켜 구차스럽게 목전의 편안만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 한 가지 賦稅(부세)도 감해 준 일이 없고, 한 가지 폐단도 고친 적이 없습니다. 백성이 믿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법이 있다 한들 이는 한낱 文具(문구: 공허한 문서)에 그칠 뿐입니다』
 
  그는 내정개혁에 앞서 민심수습을 급선무로 제시한 것이다. 이에 高宗은 농민동란의 원인이 된 제반 폐단을 적극 개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역설하면서 이를 수행할 자를 상의하게 했다. 高宗은 일본 측의 개혁 요구를 묵살하기 어려운 점 등을 감안해 능동적으로 대경장을 구상하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했다. 이는 일본군의 조속한 철병을 요구하기 위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이를 간파한 일본의 오토리(大鳥) 공사는 다시 내정개혁 강령 5개조를 제시하면서 개혁안 조사위원의 임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高宗은 金弘集에게 「總理交涉通商事務兼察(총리교섭통상사무겸찰)」을 겸직케 했다. 이는 외무독판 趙秉稷(조병직)만으로는 난국의 수습이 어렵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었다.
 
  조정 대신들은 일본 측이 제시한 내정개혁안을 놓고 크게 고심했다. 특히 이들은 「세도정치의 배제」에 관한 주문을 놓고 좌우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이때 金弘集만이 감연히 나서 이같이 일갈했다.
 
  『이는 皆當行之事(개당행지사: 모두 응당 행해야 할 일)이다』
 
  그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 속에서도 일본 측의 속셈이야 어떻든 일련의 개혁만큼은 우리 손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가 영의정 및 총리대신으로서 甲午更張(갑오경장)을 단행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金弘集의 일갈에 놀란 조정은 급히 校正廳(교정청)을 설치한 뒤 時元任(시원임) 대신 15명으로 구성된 당상과 2명의 郎廳(낭청)을 임명했다.
 
  교정청은 잡세와 공사채의 폐지 등 12개조를 심의 결정하는 등 동학농민군들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의 일부를 받아들이면서 개혁에 박차를 가했으나 대다수 당상들이 稱病(칭병) 불참하여 그 기능이 중지되고 말았다. 대다수 당상들이 개혁을 추진할 만한 안목이나 지식을 결여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뒷일이 매우 두렵습니다』
 
   일본은 이를 구실로 철병을 거부하면서 1894년 6월에 경복궁을 점령한 뒤 대원군을 앞세워 새 정권을 수립했다. 이로써 閔씨 척족정권이 타도되자 高宗은 붕당폐해의 제거와 인재 등용을 통한 내치외교의 일신 등을 골자로 하는 내정개혁안의 윤음을 내렸다.
 
  이해 6월25일에 개혁을 주관할 軍國機務處(군국기무처)가 신설되고, 金弘集이 영의정으로 임명되어 군국기무처의 의장직을 겸하게 되었다. 이날 高宗은 金弘集에게 이같이 諭示(유시)했다.
 
  『경은 이미 오랫동안 中樞府(중추부)에 한가하게 있었다. 그러나 時務(시무)가 한창 급하고 사람들의 기대가 더욱 간절하니 어찌 이번에 다시 제수하는 擧措(거조)가 없을 수 있겠는가. 경은 즉시 명을 받아 일을 처리하도록 하라』
 
  다음날 대원군은 왕명을 받들어 군국기무처의 개청식을 가진 뒤 金弘集을 의장으로 임명했다. 金弘集은 이해 7월15일을 기점으로 의장이 總理大臣(총리대신)으로 개칭되는 와중에 넉 달 동안 모두 205건에 달하는 개혁안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소위 제1차 金弘集 내각의 개혁이다. 이 개혁안을 포함해 이후에 나온 개혁조치를 묶어 통상 甲午更張이라고 한다.
 
  金弘集은 1차 개혁을 마무리한 뒤 高宗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500년의 祖宗(조종) 舊制(구제)를 臣의 손으로 개혁했으니 뒷일이 매우 두렵습니다』
 
 
  총리대신 세 번 역임
 
박영효
  갑오경장은 비록 일본 측의 강압적인 요구에 따른 것이기는 했으나 그 진행과정만큼은 조선의 조정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물론 갑오경장은 국내외의 정세 등에 비춰 볼 때 일정한 한계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간 조정에서 논의되어 온 일련의 개화정책과 동학농민군의 주장 등을 대거 포함시킨 점 등에서 일면 자주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럼에도 갑오경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일반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특히 갑오경장이 속도를 내던 이듬해에 민비가 살해되는 소위 乙未事變(을미사변)이 일어나면서 경장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이 경장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물론 高宗이 親露(친로)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면서 결국 이 사건은 俄館播遷(아관파천)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갑오경장은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조선이 淸日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당시 일본의 지원을 받은 朴泳孝(박영효) 등은 金弘集과 대립했다. 이로써 자주적이고 강력한 개혁의 추진은 점차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동학농민군이 재기하여 抗日戰(항일전)을 전개하자 민심은 점고하는 反日감정과 더불어 개혁안의 수용을 거부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자주적인 입장에서 경장을 행할지라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백성들이 볼 때 일본의 조선침략과 갑오개혁은 表裏(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金弘集 내각이 현실적으로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을 결여한 데 따른 것이기도 했다.
 
  이를 절감한 총리대신 金弘集은 이해 9월 중에 무려 네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모두 허락되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의 개혁이 지지부진한 틈을 타 오토리 대신 이노우에(井上)를 새 공사로 보내면서 조선의 내정에 대한 간섭을 좀더 노골화했다. 일본은 이해 10월에 개혁에 반대하는 대원군을 은퇴시킨 뒤 11월 초에 제2차 金弘集 내각을 성립시켰다.
 
  이 내각을 金弘集과 朴泳孝의 「친일연립내각」이라고 한다. 연립내각에 朴泳孝와 가까운 申箕善(신기선)과 尹雄烈(윤웅렬) 등이 참여하면서 종래의 軍國機務處는 중추원으로 대체되었다. 이로써 高宗의 親政을 명분으로 내세운 일본인 고문관들이 간여하는 내정개혁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국제 정세에 흔들린 自主개혁
 
아관파천 당시 高宗이 묵었던 러시아공사관內 처소.
  당시 高宗은 민비와 왕세자, 대원군 및 문무백관들을 이끌고 종묘로 나아가 誓告文(서고문)을 바치면서 「洪範(홍범)14조」를 제시하는 등 나름대로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위한 복안을 밝혔다. 이 와중에 제2차 金弘集 내각은 약 석 달간에 걸쳐 모두 213건의 개혁안을 마련했다. 제2차 개혁안은 왕실의 협조를 얻은 까닭에 제1차 개혁안에 비해 좀더 현실적인 방안이 많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개혁추진 도중에 소위 「三國干涉(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주춤하면서 내각은 金弘集과 박영효의 兩派(양파)가 극심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노정했다. 결국 金弘集의 자진사퇴를 계기로 제2차 金弘集 내각은 자동 해산되고 말았다. 金弘集이 사퇴한 지 10일 뒤 박영효마저 민비폐위 음모혐의로 재차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자 정국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연립내각이 무너진 후 초대 駐美공사를 지낸 朴定陽(박정양) 내각이 들어서면서 親露세력을 중심으로 한 민비 척족세력이 다시 발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미봉책으로 다시 중추원 의장으로 있던 金弘集을 불러들였다. 이로써 제3차 金弘集 내각이 구성되었다. 제3차 내각은 친미·친러파가 우위를 점한 까닭에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제에 저항하는 소위 「引俄拒日(인아거일)」 방략을 기조로 삼게 되었다.
 
  이 와중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은 신임 미우라(三浦) 공사를 보내 민비 살해를 자행하는 乙未事變을 일으킨 데 이어 대원군을 부추겨 민비의 폐위까지 선포하게 했다. 이를 계기로 친미·친러파 각료들이 대거 해임되고 친일파 일색의 새 내각이 구성되었다. 제3차 내각은 이해 10월에 터져 나온 「春生門(춘생문) 사건」에도 불구하고 모두 140여 건의 개혁안을 마련했다.
 
 
  일련의 개혁안 「일제의 사주」로 치부돼
 
  그러나 흉흉한 민심은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백성들의 反日감정이 이미 극에 달한 상황에서 金弘集 내각이 마련한 일련의 개혁안은 모두 일제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특히 이해 11월15일에 斷髮令(단발령) 조치가 취해지자 백성들의 분노가 일거에 폭발했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討賊(토적)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던 전국 각지의 유생들은 단발령을 계기로 일시에 거병했다. 시대적 조류를 거스르는 척사운동이 단발령을 빌미로 부활한 셈이다.
 
  金弘集 내각은 일본 측의 끊임없는 압력과 간섭에도 불구하고 구래의 積弊(적폐)를 일소해 부강한 나라를 만든다는 소신에 따라 나름대로 일련의 개혁안을 만드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백성들의 눈에는 「단발=개화=일본화」로 인식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제3차 金弘集 내각이 친일내각으로 매도된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金弘集 내각은 당초의 개혁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백성들의 들끓는 反日감정으로 인해 親日내각으로 매도되는 지경에 이르고 만 셈이다.
 
  조선 정부는 의병들의 봉기를 서둘러 진압하기 위해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을 급히 지방으로 파송했다. 再집권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친러파 세력들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마침내 이들은 高宗 33년(1896) 2월11일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짜고 高宗을 러시아공사관으로 빼내는 「아관파천」에 성공했다. 이에 金弘集 내각은 일거에 무너지고 李範晉(이범진)과 李完用(이완용) 등을 중심으로 한 親露내각이 새로이 성립되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같이 평했다.
 
  『이범진 등이 행한 이번 거사는 忠義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러시아를 후하게 하고 일본을 박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爭權(쟁권: 권력다툼)일 뿐이다』
 
  아관파천의 당사자인 高宗과 親露세력은 자신들의 일탈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백성들의 反日감정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했다. 이들은 단발령 등으로 民怨(민원)의 표적이 된 金弘集 내각에 주목했다. 高宗은 아관파천 직후 金弘集 내각을 「逆黨(역당)」으로 규정한 뒤 金弘集을 포함한 다섯 대신에 대한 捕殺令(포살령)을 내렸다. 포획하는 즉시 살해하라는 전대미문의 酷令(혹령)이었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궐내에 있다가 뒤늦게 아관파천의 사실을 알게 된 金弘集은 크게 놀라 곧바로 대신들을 소집해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때 兪吉濬(유길준)이 내각의 총사퇴 선언 후 각자 처신할 바를 강구하자고 제의하자, 金弘集이 비장한 어조로 이같이 말했다.
 
  『나는 먼저 주상을 알현해 주상의 마음을 돌리도록 촉구할 생각이오. 만일 여의치 않으면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수밖에 없소.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오. 내가 조선인을 위해 죽는 것은 천명일 것이오. 다른 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구출되는 것은 오히려 깨끗하지 못한 것이오』
 
  金弘集은 俄館으로 高宗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농상공대신 鄭秉夏(정병하)와 함께 俄館을 향해 가던 중 警吏(경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경리들에게 포위당하는 순간 휘하들이 급히 몸을 피할 것을 권했으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나라가 이 지경인데 구태여 도피해 목숨을 부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 그는 연행되어 가던 도중 지금의 세종로 한복판에서 성난 백성들에 의해 무참히 타살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高宗실록」은 당시 상황을 이같이 짤막하게 기록해 놓았다.
 
  『前 내각의 총리대신 金弘集과 前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가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총리대신의 자격으로 3차에 걸친 갑오개혁을 주도한 金弘集은 백성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순간까지 자주적으로 부강개화를 도모코자 한 자신의 의지를 결코 꺾지 않았다. 이는 鄭寅普(정인보)가 「金弘集유고」 서문에 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뒷받침한다.
 
  『당시 휘하가 일본 군영으로 달아나 화를 피할 것을 권하자 총리대신은 慨然(개연)히 말하기를, 「대신의 몸이 되어 어찌 구차히 화를 면하고자 할 것인가」 했다. 이로써 그의 인품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황현, 『國事에 마음을 다한 정치가』
 
  훗날 순종은 즉위 직후 金弘集 등의 죄명을 蕩滌(탕척)하고, 특히 金弘集에게 伸寃(신원)을 위한 祭享(제향)을 베푼 뒤 忠獻(충헌)의 시호를 내렸다. 이는 아관파천 직후에 빚어진 과거사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조치에 공감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오는 金弘集에 대한 총평이 그 증거이다.
 
  『金弘集은 비록 倭(왜)와 화친을 주장해 淸議(청의)에 죄를 지었으나 國事(국사)에 마음을 다한 정치가였다. 그는 亂時(난시)를 구제할 만한 재주가 있었다. 그가 죽자 모두 탄식하기를, 「개화할 사람이 없다」며 그의 죽음을 頗惜(파석: 크게 애석함)해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金弘集의 개화사상 및 업적에 대한 재조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는 갑오경장을 일제에 의한 개혁조치로 파악한 기존의 왜곡된 평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金弘集 사후 조선조는 날이 갈수록 혼미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日帝에 의해 병탄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자주적인 개혁의 기회를 自失(자실)한 데 따른 처참한 후과가 아닐 수 없다.
 
 
  中道的 입장에서 자주적 개혁 추구
 
  金弘集은 청렴과 충군애국의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성장한 조선의 전형적인 관인이었다. 그는 여타 개화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丁若鏞과 朴趾源 등 선배 실학자들의 저술과 웨이유엔의 「해국도지」 및 쉬지유의 「영환지략」 등을 읽고 개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탁월한 개화사상가로서의 그의 행보에서 가장 주목할 대목은 군란 이후 전개된 개화파의 분열 과정에서 시종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에서 中道노선을 견지한 점이다. 열강이 조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전개하는 와중에 한 차례의 영의정과 세 차례의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면서 시종 「志在死圖(지재사도: 뜻을 죽음으로써 보답하는 우국정신에 둠)」의 입장에서 자주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총리대신 자격으로 세 차례에 걸쳐 마련한 일련의 개혁안은 바로 그의 신념이 그대로 투영된 결과였다. 그는 온건한 개혁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온건개화파와 같이 親淸의 입장을 취하지 않았고, 일본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급진개화파와 같이 親日의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中道를 견지한 그가 취한 노선은 시종 조선이 주도하는 자주적인 개화노선이었다.
 
  최근 개화사상가에 관한 연구가 비교적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그에 관한 연구는 零星(영성)한 게 사실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그에 관한 자료가 크게 부족한 데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鄭寅普가 쓴 「金弘集유고」 서문에 따르면 金弘集의 遺文(유문)은 대부분 외교나 公牘(공독: 공문서)에 관한 것으로 그의 개화사상을 推察(추찰)할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散逸(산일)되고 남아 있는 遺文을 모아 1976년 「金弘集유고」를 출간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림 : 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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