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 아프가니스탄에서 보낸 1년, 그리고 한국인 인질 23명 납치의 시작과 끝

아프간 사람들「한국인은 모두 선교사」라 인식…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머리카락 보이면「나는 娼女」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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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디는 특유의 침착하고도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탈레반이 오늘 오후 8시30분경, 가즈니州 차르디왈 구역 아르조 마을에서 한국인 「성 심」(심성민씨)을 처형했다』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주선 프리랜서 사진기자
김주선(필명)은 프리랜서 사진기자이다. 뉴욕大와 미주리大 언론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3년 귀국 후 국내외에서 외신을 주로 담당, 활동해 왔다. 2006년 8월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시카고 트리뷴, 보스턴 글로브, 뉴스위크, 가디언, 데일리 텔레그라프 등에 사진을 게재했다.
작년 8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 밖으로 황토색 민둥산에 진흙으로 지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펼쳐졌다. 「비행기가 너무 낮게 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산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날따라 8월의 카불답지 않게 먹구름이 끼고 소나기가 쏟아졌다.
 
  카불공항에 도착하니 카르자이 대통령의 대형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소련군 및 탈레반 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암살된 북부동맹의 首長(수장)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마수드의 초상화가 카르자이 대통령 초상화보다 더 큰 것이 인상적이었다.
 
  마중 나온 영국인과 차를 타고 카불 시내로 들어갔다. 길거리에는 전화카드를 파는 남자들이 줄을 서 있었다. 간혹 당나귀가 끄는 달구지가 보였다. 소련제 칼라슈니코프 소총(AK)을 든 교통경찰관들은 군인인지 경찰인지 구분이 안 됐다. 「이곳이 아프가니스탄이구나. 나는 드디어 카불에 도착했다!」 1년간에 걸친 나의 아프가니스탄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카불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었다. 첫 보금자리를 꾸렸던 무스타파 호텔에서 아침에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면, 새벽부터 일어나 양고기 꼬치구이(케밥)를 굽는 사람들 옆으로 하얀 히잡(머리싸개)과 검은색 유니폼 차림의 여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케밥 굽는 하얀 연기 사이로 카불의 아침 햇살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허름한 간판, 쓰러져 가는 진흙 건물, 땅속에서 빵을 굽는 빵가게의 그을린 벽, 수레를 끌고 가는 당나귀 등이 나의 감성을 수세기 전으로 돌려 놓았다.
 
 
  카불로 가는 길
 
카불의 만다위 시장에서 여성들이「부르카」를 입고 거리를 거니는 모습.
  한국에서 카불로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바로 직전에 국내의 한 기독교 단체가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기획했던 대규모 행사 때문이었다. 당초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그 단체가 기독교 단체인 줄 모르고 행사를 허락했던 것 같다. 문제가 되자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한국인에게 비자 발급을 전면 금지했다. 델리나 두바이, 이슬라마바드 등 주요 공항에서는 카불로 가는 비행기편에 한국인을 탑승시키는 것이 전면 금지됐다.
 
  나는 7월 말 비자를 받아 아프가니스탄에 입국하려다가 그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20일을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비자를 받아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는 내 손에는 편도 티켓만이 쥐어져 있었다.
 
  당시 사진기자로서 슬럼프를 겪고 있던 나는 아프가니스탄行이 인생의 전환기가 되길 바랐다. 역사의 중심에서 제대로 된 사진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성공하기 전에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리」 결심했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기 전 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등 인근 중앙아시아 국가를 여행했다. 그래서 그 바로 밑에 위치해 있는 아프가니스탄도 다른 「스탄」 국가들과 비슷한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아프가니스탄은 舊소련에서 분리독립한 다른 국가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舊소련에서 분리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에서는 혼자 걸어다녀도 문제가 없었다. 물가가 싸서 300달러면 한 달간 통역을 고용할 수 있었다. 여성들도 상당히 개방되어 있어 우리나라 여성들보다 더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었다. 이슬람 국가이기는 해도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세속주의적이었고, 유럽化가 많이 진행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은 정반대였다. 비록 舊소련이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10년간 점령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작년 9월30일 가즈니州 안다르 지역 한 마을에서 미군 옆으로 어린아이들이 지나고 있다.
 
  탈레반의 「공포정치」
 
지난 8월6일 카불 시내에서 한 노인이 구걸을 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오랜 내전과 탈레반 지배로 경제가 피폐해졌다.
  소련군이 물러난 후, 소련에 맞서는 과정에서 富(부)와 武力(무력)을 축적한 군벌들이 세력 다툼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94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州 지역에서 「탈레반」, 즉 「이슬람의 학생들」이라는, 이슬람 종교학교(마드레사) 출신 무장세력이 급부상했다. 이들은 2년 후인 1996년 9월 수도 카불을 점령했다. 그들은 선지자 모하메드가 살던 7세기 이슬람 세계를 꿈꾸며 국민들을 이슬람 律法(율법)인 「샤리아法」에 기초해 공포정치를 폈다.
 
  여자들에게 교육 및 취직이 금지됐으며,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가리는 「부르카」(현지어로 「차데리」)를 입어야 했다. 藝術·美德局(예술·미덕국) 소속 경찰들은 길거리에서 부르카 착용 상태가 불량한 여성들을 붙잡아 회초리를 쳤다. 여성이 거주하는 집은 창문을 모두 검은색으로 가려 여자 얼굴이 창 밖으로 보이지 않게 했다.
 
  물건을 훔친 자는 공개적으로 손목을 잘랐다. 간통한 남녀는 카불 운동장에서 공개 총살했다. 남자들은 수염을 길러야 했는데, 이를 위반하는 자는 예술·미덕국 유치장에 구금했다. TV 시청, 음악 청취, 사진 촬영·인화 등은 철저히 금지됐다.
 
  탈레반은 일반인들이 결혼식을 할 때도 춤을 추거나 음악을 듣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이 연을 날리는 것을 금지했다. 속살을 드러내는 운동은 철저히 금지하거나, 온몸을 감싸는 운동복을 입어야만 할 수 있었다.
 
  여성들은 교육받는 것이 아예 불법이었지만, 남성들이라고 해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생계가 어려운 소년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탈레반은 남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라도 女교사가 있으면 무조건 학교문을 닫았다. 內戰(내전)과 탈레반의 暴政(폭정) 아래서 배우지 못한 국민들의 문맹률은 65%에 달했다. 평균 수명은 45세로 줄어들었다. 몽골族의 후예 하자라族은 수니派가 아닌 시아派 이슬람 교도라는 이유로 대량학살됐다.
 
지난해 11월13일 카불의 시장 풍경.
 
  동양 여성, 아프가니스탄에서 「중국인 창녀」로 통해
 
  탈레반의 통치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것은, 그 시절을 알아야만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탈레반의 가혹한 통치를 겪은 후 미국의 지원 아래 카르자이 정부가 들어서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탈레반 정권의 억압에 대한 반동 때문인지, 범죄율이 높아지고 치안상태가 악화된 것이다. 카불 시내나 카불 이북지역은 비교적 안전하지만, 카불 이남지역은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여성들은 마음대로 길거리를 다니지 못한다. 간혹 남자들을 대동하거나 안전한 지역에서 여성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다니기는 하지만, 혼자서 외출하는 것은 카불 내에서도 위험한 일이다.
 
  특히 외국인 여성이 혼자 다니는 일은 위험천만이다. 납치나 性(성)추행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외국인 여성들도 머리카락을 가리고, 엉덩이를 덮는 긴 옷을 입어야 한다. 간혹 이를 무시하는 외국인 여성들을 보는데, 필리핀·중국 등에서 온 동양인 여성들이 많다. 현지인들은 그런 모습의 외국인 여성들을 볼 때마다 「우리들의 문화와 종교를 무시하는 이교도들」이라고 불쾌해한다.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머리카락을 보이거나, 엉덩이 덮는 옷을 입지 않는 것은 「나는 창녀이니 강간해 주십시오」라는 것과 같은 의미다.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엉덩이를 덮는 옷을 입는다고 해도 외국 여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쉽다. 길거리에서 외국인 여성들을 건드리는 치한들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여자가 옆에 지나가기만 해도 손으로 신체 부위를 슬쩍 건드린다. 물론 옆에 키 크고 턱수염을 길게 기른 아프가니스탄 남편이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믿기 어렵겠지만 동양 여성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중국인 창녀」로 통한다.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의 타지크族과 파슈툰族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구별하지 못한다.
 
  아프가니스탄에 머무는 동안 나는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다리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었다. 현지에 사는 교포들도 마찬가지였다.
 
 
  납치된 한국인들 옷차림에 신경 썼다
 
카불 시내에서 아프가니스탄 소년들이 한국인 피랍자들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팔고 있다.
  일부 외신에서는 이번에 被拉(피랍)된 여성들이 영어가 쓰인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시장을 활보했다고 보도했는데, 납득하기 어려운 얘기다. 현지에서는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여성이 속살을 보이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피랍자들이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던 사진 등을 보면, 그들이 현지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옷차림에 신경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종교의 자유가 없는 나라다. 작년에 일부 한국 기독교 단체에서 추진했던 기독교 행사는 아프가니스탄人들에게 「한국인은 선교사들」, 「봉사를 명목으로 이슬람 교도인 우리를 개종시키려고 하는 이교도들」이라는 생각을 심어 줬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선교활동은 의료·교육 등 봉사를 앞세우더라도 결국 정체가 드러나게 돼 있다. 한국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대규모 기독교 행사를 개최하거나, 여러 명이 떼를 지어 거리에서 찬양·율동을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아프가니스탄人들을 붙잡고 『한국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를 도와주러 온 손님』이라는 것이다. 서로 미리 짠 듯이 똑같이 얘기한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1년을 지낸 지금, 나는 그들의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나,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은 절대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수십 년간의 內戰과 빈번한 정권 교체의 경험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거짓말도 불사한다.
 
 
  가즈니州 최근 탈레반에 접수당해
 
카불 시내 한복판에서 아프간인이 전화카드를 판매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1년이 다 되어 가는 지난 7월19일, 분당 샘물교회에서 파견된 23명의 한국인 봉사단원들이 아프가니스탄 남부 가즈니州에서 탈레반에 납치됐다.
 
  가즈니州는 작년 9월에 내가 방문했던 지역이다. 당시 그곳의 치안은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다. 가즈니州는 탈레반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었지만, 그 무렵에는 미군이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올해 들어 가즈니州의 치안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하더니, 근래에는 사실상 탈레반에게 접수당했다.
 
  납치사건이 터지자 「알 자지라」 방송과 협약이 돼 있는 현지 TV 방송국에서는 매일같이 이 사건을 다루었다. 라디오에서는 매시간 『「꾸리아 제노비(한국)」에서 온 방문객들이 가즈니州에서 탈레반에 의해 납치됐다』는 뉴스를 전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아프가니스탄人들은 나를 만나면 『이번 사건은 우리 모두 유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너희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인사했다. 그들은 『탈레반은 테러리스트다. 어떻게 이슬람 교도들이 허구한 날 납치만 할 수 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작년 9월30일 가즈니州 안다르 지역에서 미군과 아프가니스탄 軍警이 합동작전을 펴고 있다.
 
  아마디는 통화 中
 
  그들은 아무도 피랍된 한국인들이 기독교인들이라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나를 배려하는 마음이 엿보였다.
 
  한국 언론들로부터 의뢰가 들어와 나는 가즈니州 현지의 탈레반 대변인 「카리 유수프 아마디」의 전화연락처 확보에 나섰다. 아마디와 통화하기는 무척 힘들었다. 다른 기자들도 그에게 전화를 거는지 전화는 하루 종일 불통이었다.
 
  파슈토語를 구사하는 통역을 옆에 끼고, 1초에 한 번씩 아마디가 갖고 있는 두 개의 전화번호(아프가니스탄人들은 보통 「로샨」, 「아프가니스탄 와이어리스」라는 두 개의 이동통신회사 전화번호를 동시에 갖고 있다)로 번갈아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 하루에 한 번 통화할까 말까였다.
 
  아마디와 다른 사령관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던 지난 7월30일 오후 9시. 잠시 짬을 내서 부엌에 들어가 「난」(얇은 빵)을 먹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통역이 전화를 받았다. 아마디의 전화였다.
 
  그는 특유의 침착하고도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탈레반이 오늘 오후 8시30분경, 가즈니州 차르디왈 구역 아르조 마을에서 한국인 「성 심」(심성민씨)을 처형했다』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통역에게서 전화기를 빼앗다시피 한 후, 직접 아마디에게 물어보았다.
 
  『탈레반이 「성 심」을 처형한 게 확실한가? 무엇으로 처형했나. AK-47? 칼라슈니코프?』
 
  『예스, 예스』
 
페르피냥 포토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필자의 사진「카마르의 스토리」.
 
  철수령
 
  심성민씨 피살 이후 사태는 장기화되고 있다. 8월13일 두 명의 한국인 여성이 석방되기는 했지만, 남은 사람들이 언제 풀려날지는 알 수 없다. 더 이상의 희생자 없이 사건이 해결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납치사건 이후 현지에 사는 한국인들은 가슴 졸이며 사태 진전을 지켜보았다. 납치사건은 샘물교회 봉사단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모든 일이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피부에 와 닿았다.
 
  한국 정부와 탈레반 간 직접 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지난 8월3일 아침, 카불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이메일을 보내왔다. 제목은 「교민철수 공고」였다. 그동안 대사관에서 보내오는 이메일 「교민 공지사항」에 비해 톤이 한결 높아졌다.
 
  「교민철수 공고」는 사실상 「강제철수 공고」였다. 샘물교회 봉사단 파견의 책임을 지고 있는 「한민족 복지재단」 등 11개 NGO단체와, 「아프가니스탄 체류 프리랜서 기자」가 모두 「잠정철수」 대상으로 명시돼 있었다. 예외는 없었다. 철수 시간은 혼자 사는 사람은 8월10일, 가족이 있는 경우 8월31일이었다.
 
  나는 갑자기 정신이 멍해졌다.
 
  「작년 이맘때도 기독교 단체 때문에 너무 힘들게 아프가니스탄에 들어왔지 않은가? 왜 이런 일이 1년에 한 번씩 발생하는가?」
 
  「사진기자로서 지금 겨우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반을 잡고 있는데, 내 인생이 모두 카불에 있는데, 이게 웬 청천벽력과 같은 조치란 말인가?」
 
  물론 정부의 입장은 이해한다. 미국처럼 「테러단체와 협상 不可」 방침을 고집하지 않는 한, 피랍자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모종의 「거래」가 필요할 것이다. 피랍자 구출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그 경우 현지에 남아 있는 한국인들의 신변은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이제 한국인은 탈레반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춘 납치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도 우리들에게 잠시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라고 하는 것임을 이해한다.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며
 
  기자는 이곳에서 근 1년간 지내면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래도 마음씨 좋은 아프가니스탄人들을 많이 만났고, 여태까지 안전하게 취재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福(복)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 체류하면서 세계 유수의 기자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다. 아프가니스탄人 産母(산모)의 出産(출산)과 사망을 찍은 사진으로 「페르피냥 포토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를 받게 된 것은 사진작가로서 큰 보람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 가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고, 그곳에서의 생활도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그만큼 되돌려받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짐을 쌌다. 8월10일 카불을 떠나는 비행기에 한국인은 나 혼자뿐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며 나는 나 자신에게 다짐했다. 「지금은 정든 아프가니스탄을 떠나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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