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純宗, 일본 천황의 합방 축하 조서를 받으며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아
● 嚴妃, 일본에 볼모로 잡힌 영친왕을 귀국시키려 데라우치 총독과 설전… 영친왕은 장티푸스로 사망한 嚴妃를 못 보고 일본行
● 高宗과 純宗, 『不忠이 극에 달했다』며 李完用을 자주 경멸
● 高宗의 국장은 일본 神道식으로 거행… 조선인 조문객은 70여 명
● 친일파 윤덕영, 高宗을 47세 노처녀와 강제 결혼시켜
● 嚴妃, 일본에 볼모로 잡힌 영친왕을 귀국시키려 데라우치 총독과 설전… 영친왕은 장티푸스로 사망한 嚴妃를 못 보고 일본行
● 高宗과 純宗, 『不忠이 극에 달했다』며 李完用을 자주 경멸
● 高宗의 국장은 일본 神道식으로 거행… 조선인 조문객은 70여 명
● 친일파 윤덕영, 高宗을 47세 노처녀와 강제 결혼시켜

- 1910년 한일병탄 직후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자리를 함께한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과 대한제국 황족들. 앞줄 가운데 모자를 벗은 사람이 고종 황제이고 그 오른쪽이 순종이다.
月刊朝鮮이 국내 언론 최초로 입수 보도하는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의 「李王宮秘史(이왕궁비사)」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벌어진 조선왕조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인정전 내부는 쥐 죽은 듯 고요해서 엄숙한 기운이 감돌았고, 참석자들은 극도로 긴장한 모습이었다. 왕 전하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칙사도 아무 말이 없었으며, 양쪽의 수행원들은 기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동상처럼 서 있었다. 그때 칙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詔書가 담긴 국화 문장이 빛나는 梨地(이지: 금색 장식 칠기) 상자를 공손하게 전하에게 바쳤다. 전하는 이를 받아 든 후 서로 장중한 경례를 나눴을 뿐 한마디 말도 없이 완전히 無言劇(무언극)이었다>
「李王宮秘史」는 곤도 시로스케가 1907년 11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13년 동안 李王宮 안에서 李王職(이왕직) 관리로서 목격한 사실들을 기록한 것이다. 李王職이란 일제 강점기에 조선 왕실의 일을 맡아 보던 궁내부 소속 관청으로서, 조선총독부의 합법적인 왕실 감시기구였다.
곤도 시로스케는 인천상업회의소 서기장 겸 조선신문 고문으로 재직하다, 1907년 李王職 관리로 李王家와 인연을 맺는다. 庚戌國恥(경술국치)부터 3·1 독립운동에 이르는 기간 동안 高宗(고종)과 純宗, 두 임금을 모셨다. 1920년 李王職 관리에서 물러난 후 李王宮에서 보고들은 내용을 조선신문에 연재했다. 조선신문은 당시 한국 내에서 일본인들이 발행한 일본어판 일간신문이었다. 곤도 시로스케는 신문 연재물을 모아 1924년 조선신문사에서 「李王宮秘史」 초판을 발행했으며, 1927년 4판까지 나왔다. 月刊朝鮮이 공개하는 내용은 1924년 발행된 초판본이다.
서지학자인 崔書勉(최서면·80) 국제한국연구원장은 『고마츠 미도리(小松綠)가 지은 「조선병합의 裏面(이면)」 등 통감부 출신 일본인 관리들이 지은 李王家의 秘史는 대부분 「高宗은 우매하고 純宗은 무능했다」고 기술하고 있다』면서, 『곤도 시로스케는 高宗의 승하를 슬퍼했고, 純宗에 대해서는 聖君(성군)으로 묘사하는 등 일본인 李王職 관리로는 드물게 두 임금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崔원장은 『일본인으로서 일제하 총독정치와 총독관리의 부당함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高宗과 純宗의 처지를 이해하고 변호한 점이 특이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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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著者 곤도 시로스케 |
高宗과 純宗의 이완용 증오
崔書勉 원장은 『종래 한국의 舊韓末 연구자들이 곤도 시로스케의 책을 단편적으로 인용한 적은 있지만, 언론에 본격적으로 소개가 되지 않아 아쉬웠다』면서, 『月刊朝鮮의 발췌 소개를 계기로 구한말 李王宮 관련 비사들이 새롭게 조명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李王宮秘史」는 한일합병 조서전달식에서 純宗이 일본 칙사에게 침묵으로 일관한 사실, 합병에 따른 민중봉기를 우려한 통감부 경무총장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중장이 창덕궁을 포위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외척인 尹德榮(윤덕영)이 하세가와 총독의 사주를 받아 純宗을 일본 천황에게 進拜(진배)케 하기 위해, 高宗의 동의를 얻으려고 高宗에게 47세의 노처녀를 妃(비)로 삼으라고 협박한 사건을 기록했다.
閔妃(민비) 시해를 방조한 禹範善(우범선)을 살해하고 國寃(국원)을 푼 高永根(고영근)이 정부의 고관 취임을 거절하고 민비의 능참봉이 되어, 高宗 승하 후 총독부와 궁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雨中(우중)에 「大韓高宗大皇帝洪陵(대한고종대황제홍릉)」이라 쓰인 묘비를 세운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곤도 시로스케는 한일합병조약을 조인한 李完用을 高宗과 純宗이 「불충의 臣(신)」으로 얼마나 미워했는지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볼모로 일본에 끌려간 영친왕을 귀국시키려고 데라우치 총독과 설전을 벌이는 嚴妃(엄비)의 母情(모정), 조선의 마지막 皇女(황녀)로서 비극적인 삶을 산 덕혜옹주가 14세의 어린 나이에 미래를 모른 채 일본으로 끌려가는 장면 등이 몰락한 왕가의 비극적 최후를 웅변하고 있다.
崔書勉 원장은 『「李王宮秘史」에는 한국인의 민족적 감정을 상하게 할 표현들이 담겨 있지만, 한꺼풀을 걷어 내면 일본인이 일본의 惡行(악행)을 규탄한 내용이란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 병합의 기운이 무르익다
한 시간 만에 끝난 한일합병 어전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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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라우치 初代 조선총독. |
시기가 무르익는 것을 기다려 이윽고 메이지 43년(1910) 8월29일, 병합협약이 데라우치 총감과 李完用(이완용) 수상에 의해 체결되었다.
군대에 의존하지 않고 평화와 영광 속에서 국경을 없애, 대한제국 황제 폐하가 통치권을 일본 천황 폐하에게 양여함으로써 1만5000方里(방리)의 영토와 2000만 민중은 일본 황제의 綏撫(수무)하에 현대문화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당시 궁중의 모습은 매우 평온했고, 단지 한 번의 어전회의가 열렸을 뿐이었다. 이때 참가한 사람은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朴齊純(박제순), 농상공부대신 趙重應(조중응), 탁지부대신 高永喜(고영희), 법무대신 李載崑(이재곤) 이외에(학무대신 李容植은 불만을 갖고 있던 관계로 불참), 왕족을 대표하여 李熹公 殿下(이희공 전하: 李載冕-대원군의 장남), 원로를 대표하며 金允植(김윤식) 등 제씨가, 전하 측으로는 궁내대신 閔丙奭(민병석), 시종원경 尹德榮(윤덕영), 시종무관장 李秉武(이병무) 등이 侍立(시립)했다.
별실에는 왕비의 부친인 해풍부원군 尹澤榮(윤택영) 후작과, 총독부에서 특별히 差遣(차견)된 참여관 고쿠분 쇼타로(國分衆太郞), 고미야(小宮) 이왕직 차관 등이 자리하여 형세 여하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전회의는 오후 2시를 넘긴 시간에 大造殿 興福軒(대조전 흥복헌)에서 열렸다. 그 내용을 우리들은 당연히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특수한 명을 받아 내전에 들어 御璽(어새)를 수장하고 있는 금고에 이변이 생기지 않도록 살피는 임무를 띠고 안쪽 방에 있었다. 다행히 그 앞의 복도가 대조전으로 향하는 통로였던 관계로 출입하는 대관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서는 긴장된 표정보다는 오히려 일국의 운명이 여기에서 결정된다는 悲愴感(비창감)이 느껴졌다.
회의는 약 1시간 만에 끝나 드디어 이완용 수상에게 일한병합 체결의 전권 위임장이 하사되었다. 당시 한 시종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왕 전하가 몸소 발의하여 엄숙히 李수상에게 병합 단행의 칙령을 내렸고, 수상은 이에 대해 단 한 마디 『예』라고 명을 받들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나라가 망해 임금이 치욕을 당하니 신하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며 비분강개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미국의 하와이 병합을 예로 들며 廢帝亡國(폐제망국)의 말로에 오열했다고 한다. 반면 전하는 이미 大局(대국)을 달관하고 계셨는지 주저 없이 판단을 내리고 어떤 흔들림도 없었기 때문에, 이조 500년 최후에 이르러 국가인민을 구하기 위한 이 未曾有(미증유)의 중대 사안은 평화롭게 1시간의 회의로 결정, 폐회되었고 각 신하들은 내전을 물러갔다.
당일 창덕궁은 매우 靜穩無事(정온무사)하여, 어떤 특별한 경계 형식도 헌병·경찰의 增派(증파)도 없었다. 요부코(呼子) 황궁경찰서장이 경위의 중임을 띠고 그 기민함을 침착한 태도로 감춘 채, 전화기에 대고 시시각각의 상황을 아카시 경무총장에게 보고하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경찰서에는 비상사태에 대비해 약간의 銃器(총기)가 예비되어 있었고, 非番(비번) 경관이 궁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어전회의를 전후해서는 내전 출입을 금했으나, 이도 불과 2시간 만에 해금되었다. 일국의 흥망을 결정하는 중대사가 이루어진 왕궁의 모습치고는 너무 평범하고 싱거운 느낌이 들었다.
이에 앞서 어떻게 평화리에 병합의 대업을 단행할 것인지를 고심하던 데라우치 총독은 어느 날 밤 시종원경 윤덕영 자작을 은밀히 불러 일본 국무회의가 결정한 대방침을 설명하고 병합을 피할 수 없음을 이해시킨 후 李王(純宗) 및 李太王(高宗) 전하의 양해를 구하기 위한 방법 일체를 그의 수완에 믿고 맡겼다.
尹자작은 내외 형세를 보건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일대 결심을 하고는 민병석 궁내대신과 妃 전하의 아버지인 윤택영 후작과 함께 약 1주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伺候(사후:웃어른께 문안을 드림)하여 이치를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열의를 피력하여 왕가 百年安泰(백년안태)를 위한 결단을 촉구했다.
그들은 왕가의 지위, 宗親功臣(종친공신)의 대우, 서민의 혜택에 관한 협약의 골자 내용 등 일본 정부의 뜻을 아뢰어 미리 이해를 구했으며, 전하도 社稷民人(사직민인)의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협약의 원만한 성립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심중을 굳혔기에, 이 석상에서도 의연하게 칙명을 내리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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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亡國의 大臣들. 왼쪽부터 이완용·박제순·조중응·고영희·민병석. |
李王으로 책봉된 純宗… 일본 칙사와 장엄한 無言劇
병합조약이 성립되고 10여 일 후, 이나바(稻葉) 시종이 칙사로서 하치스가(蜂須賀) 式部官(식부관)을 동행하고 李王(純宗)에게 일본 황실의 조서를 전달하기 위해 조선에 왔다. 데라우치 백작은 제국 미증유의 대업을 평화리에 해결한 점에 대해 황족 중 누군가가 직접 찾아와 李王家에 대한 친애의 정을 표시하고, 조선 민중에게 隆渥(융악: 君主의 두터운 은혜)의 성은을 알려야 한다고 충심으로 희망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단지 시종을 파견한 데 그쳤기 때문에 그는 유감이 상당했다. 이는 내가 시종 접대를 위한 협의를 위해 고미야 차관을 따라 총독 관저를 찾았을 때, 데라우치 백작이 차관에게 『가쓰라(桂)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국가 미증유의 성대한 의식이 치러졌는데…』라고 격노하는 것을 옆에서 목격한 바로도 짐작할 수 있다.
칙사는 기병 2개 소대를 앞뒤에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창덕궁에 들었다. 왕 전하는 궁중 관료를 수행하고 차가 도착하는 입구까지 가서 맞이했고, 몸소 인정전으로 안내했다.
인정전 중앙에 놓인 황금빛 탁자를 중심으로 칙사는 서쪽에, 전하는 동쪽에 자리했고, 민병석 궁내 대신, 고미야 차관, 윤덕영 시종원경, 이병무 시종무관장 이하 우리들까지도 대례복 차림으로 侍立했으며, 칙사 쪽에는 데라우치 조선총독, 야마가타 정무총감, 아카시 경무총장이 정장 차림으로 착석했다.
이때 인정전 내부는 쥐 죽은 듯 고요해서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엄숙한 기운이 감돌아 참석자들은 극도로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여 잊혀지지 않는다. 왕 전하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칙사도 아무 말이 없었으며, 양쪽의 수행원들은 기침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동상과 같이 서 있었다.
칙사는 아무 말 없이 정중한 자세로 국화 문장이 빛나는 가로 90cm, 세로 약 23cm 크기의 梨地(이지: 금색 장식 칠기) 상자에 담긴 詔書(조서)를 전하에게 전했다. 전하는 이를 받아 든 후 서로 장중한 경례를 나눈 것뿐이었다. 이 동안에는 서로 한마디도 없는 無言劇(무언극)이 연출되어, 단지 거룩했다는 표현 이외에 형용할 말이 없을 정도다.
[해설]
일본은 高宗이 1907년 6월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것을 빌미로 高宗을 퇴위시키고 純宗을 즉위시켰다. 일본은 그해 8월1일부터 한 달 동안 한국 식민지化에 최대 장애요인이었던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했다. 그 뒤 일제는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3대 통감으로 임명, 한국 식민지化를 단행하도록 했다.
이어 통감은 1910년 8월16일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그 수락을 강요했으며,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되었다. 조약을 체결한 뒤 1주일 만인 8월29일에야 純宗으로 하여금 讓國(양국)의 조칙을 내리도록 함으로써 27代 519년 만에 조선왕조는 사라졌다.
일본 천황의 조서를 창덕궁에서 전달하는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정보장교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경무총장이 등장한다. 후쿠오카 출신의 육군대장인 그는 전역 후 조선헌병사령관과 제7대 대만총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아카시 총장은 민중봉기를 차단하기 위해 행사가 열릴 예정인 창덕궁을 미리 점검하고, 주요 궁궐 출입문의 열쇠를 확보하는 등 만반의 사태에 대비했다.
純宗은 일본 천황의 조서를 이나바(稻葉) 칙사에게 전달받았다. 총독 관저에 머물고 있는 일본 칙사를 예방하기 위해 황제로서 마지막 어가행렬을 떠나는 純宗을 향해 신하와 궁녀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
▣ 嚴妃의 승하, 그리고 왕세자의 첫 귀국
장티푸스로 승하한 엄귀비
메이지 44년(1911) 여름 7월, 李太王(高宗) 전하의 妃이며 당시 왕세자(李垠·이은)의 생모인 嚴妃가 승하하셨다. 세자는 메이지 40년(1907) 10월, 11세의 나이로 太子大師(태자대사)인 이토(伊藤) 공을 따라 東京(동경) 유학 길에 오른 이후 春風秋雨(춘풍추우)의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귀향한 적이 없었다.
자애로운 어머니인 엄비는 밤이나 낮이나 세자의 신변을 염려하고 건강한 성장을 기원했으며, 세자 또한 사랑하는 어머니의 안부를 기원하며 언젠가는 반드시 가족이 단란한 가운데 늙어 가는 어머니의 자애 속에 지낼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세자의 유학에는 중대한 의의가 있었는데, 메이지 천황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학업이 대성할 때까지는 절대 歸省(귀성)이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생모를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엄비가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전해 듣기로는 이 부음이 東京의 왕세자 거처에 달했을 때, 효심 지극한 왕세자의 비탄함은 이를 데 없었고, 떠난 어머니의 사진 앞에서 울며 꼼짝하지 않았으며, 시종들도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몰랐다고 한다. 그날 저녁 왕세자의 귀향에는 수행 임무를 띤 후루야 히사쓰나(古谷久綱), 사무관 高義敬(고의경), 무관 金應善(김응선), 贊侍(찬시) 嚴柱日(엄주일), 典醫(전의) 고야마 젠(小山善) 등이 함께 歸鮮(귀선) 길에 올랐다.
훈풍이 부는 도카이(東海), 산요(山陽)의 驛路(역로)도, 달 밝은 현해탄의 물결도, 경부선을 따라 펼쳐지는 고국의 정경도 세자의 哀愁(애수)를 달랠 수는 없었다. 차창에서 그리고 선실에서 수심 어린 우울한 표정으로 귀향길에 올라 7월23일 고향에 도착했다.
유학 전 통통하고 귀여웠던 왕세자는 근육질의 건강한 체격을 갖추었고, 혈색 좋은 고귀한 기품과 늠름한 태도를 겸비한 청년사관이 되어 있다. 원래는 제일 먼저 父君(부군)이 계신 덕수궁 咸寧殿(함녕전: 高宗 황제의 침전)에 들어 父子가 대면해야 마땅했으나, 엄비의 死因(사인)이 장티푸스라는 진단이 있었기에 왕세자의 몸을 염려하여 같은 덕수궁 내에 미리 마련된 석조전에 들었다.
東京에서부터 함께 수행한 사람들 이외에 李王職에서도 사무관 한 명을 전속시키게 되어 내가 그 임무를 맡고 세자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엄비의 질환 관계상, 특별히 왕세자 신변의 위생에 전력을 쏟고 감염의 위험이 없도록 예방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가장 고민스러웠던 것은 李太王 전하와의 대면을 어찌할까 하는 문제였다.
물론 함녕전으로 찾아뵙는 것이 당연한 도리였으나, 그곳에서 엄비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직 위생상 안심할 수 없다며 의사는 이를 반대했다. 특히 東京에서 왕세자의 위생에 위험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엄명을 받은 터라, 그때만큼은 예외로 전하가 석조전으로 오시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이를 장관이 전하에게 말씀드렸다.
전하는 이를 듣고 격노하면서 『나의 사랑하는 세자가 5년 만에 처음 돌아왔는데, 먼저 아비한테 와서 인사를 해야 도리일진대, 그것이 안 된다니 이 무슨 말인가? 이는 예의를 벗어날 뿐 아니라 父子의 정을 끊어 놓는 짓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이에 대해 시종이 病毒(병독) 감염의 위험이 있음을 아뢰고 왕세자의 건강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부득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간절히 설득하여 비로소 전하의 마음이 풀어졌다.
전하는 사랑하는, 소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운 왕세자가 처음으로 돌아온 터라 한시라도 빨리 그 건강한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에 바로 가마에 올랐고, 인접한 석조전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왕세자와의 대면이 이루어졌다.
긴 세월 동안 멀리 떨어져 꿈에서조차 잊은 적 없는 사랑하는 왕세자의 듬직한 모습을 접하고 전하는 기쁨에 넘친 얼굴로 손을 부여잡고, 『세자, 무사했는가? 잘 돌아왔다. 건강하고 많이 컸구나』라며 다가가 얼싸안기라도 할 듯했다. 왕세자도 무척 기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하고, 단지 아무 말 없이 늙고 지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왕세자의 유학(東京에서 규율 바른 학생 생활을 보내고 학업을 완수할 때까지 귀국이 허락되지 않는 일 등)은 모두 일본 황실의 뜻이었고, 이토(伊藤) 공 이래 지도를 맡았던 제씨들도 왕세자의 덕과 재능을 대성시키기 위해 어렵게 이 결정에 따라야 했다. 따라서 부모 자식 간의 정은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으나, 이를 견뎌내야만 했던 것이다.
사람의 정을 생각해서도 가혹한 이런 결정에 대해 전하는 물론, 李太王 전하, 세자 전하 사이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李王家가 지금과 같은 영명하신 李王 垠(이왕 은: 이은공) 전하를 모실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雲山萬里(운산만리)를 떨어져 골육의 정에 사무친 양 전하의 고심은 충분히 헤아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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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귀국길에 오른 英親王. |
生母 엄비의 시신도 보지 못한 英親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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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출하는 高宗. |
비록 어머니의 죽음이 疫病(역병) 때문이라고는 하나, 바로 인접한 함녕전에 누워계시는 어머니 유해에 다가가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세자의 슬픔을 충분히 이해하는 나로서도 황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숙직날 밤에 2층 복도를 둘러보고 있던 나는, 왕세자가 방에서 긴 의자에 기대 앉아 멍하니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그 마음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마음속으로 울었다.
또한 왕세자 전하를 키운 유모나, 어릴 때부터 돌보던 나이 든 궁녀조차 여러 사정으로 인해 왕세자를 가까이서 뵐 수 없었던 탓에, 그들은 아침저녁으로 석조전 통로나 정원을 배회하며 전하가 출입할 때마다 듬직한 성인으로 자란 왕세자의 모습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며 마음을 달랬다는 등 수많은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원래 엄비는 李太王의 正妃(정비)가 아니다. 따라서 왕가의 옛 관례대로라면 장례 행렬을 궁전 밖에서 거행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이미 醇妃(순비) 또는 貴妃(귀비)로 책봉되어 거처까지 「慶善宮(경선궁)」이라는 존호를 받아 정비에 준하는 자리에 올랐고, 왕세자의 생모이기도 했으므로 그 장례식은 거의 正妃에 준하여 장중히 치러졌다.
데라우치 총독을 비롯한 문무관 대관들이 殯殿(빈전)에 배례하고 장례행렬도 엄숙히 거행된 후 청량리에 안장되었고, 그 위패는 德安宮(덕안궁)에 봉안되었다. 왕세자는 다시 창덕궁과 덕수궁을 뒤로 하고 東京으로 돌아갔다. 엄비를 잃고 쓸쓸히 남은 아버지, 太王 전하에게 이별을 고하는 一幕(일막)은 어느 정도 염려했으나, 전하는 왕세자의 학덕이 대성할 수 있도록 잘 지도해 달라며 수행원 일동에게 부탁 말씀을 전하고, 왕세자를 격려하며 떠나 보냈던 것이다.
왕세자가 체재했던 3주 동안 나는 東京의 수행원과 마찬가지로 석조전에서 기거하며 한 번도 관사에 돌아가는 일 없이 제반 사무에 임했으며, 朝夕(조석)으로 식사 자리에 함께 하거나 말 상대가 되어 드렸다. 나는 3주간 시종을 맡은 것이 인연이 되어 이후 왕세자로부터 다른 이들보다 비교적 후대를 받았고, 그 성품을 접할 수 있었다.
엄비와 데라우치 백작의 舌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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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비 |
太王 전하는 여느 때처럼 흐뭇하게 듣고 계셨으나 옆에 있던 엄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각하! 세자는 매우 건강하고 학업도 우수하다는데 그런 왕세자를 어찌 돌려보내지 않으십니까? 이토 공이 데려갈 때는 반드시 1년에 한 번은 이 늙은 양친을 만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총독께서는 이를 모르시는지, 아니면 아시면서도 실행하지 않으시는지, 부모 자식 간의 골육의 정은 누구나 다 같은 법, 각하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을 속이다니 너무 무정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매섭게 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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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강제유학의 길에 오른 英親王(사진 오른쪽). |
엄비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학교에는 여름방학이 있어 학생들이 모두 귀성을 합니다. 왕세자가 홋카이도 같은 곳에 여행할 시간이 있다면 조선에 못 올 이유가 없지요. 꼭 귀성하게 해주십시오. 이토 공의 약속을 생각해서, 그리고 사람의 정을 생각해서라도…』라며 총독을 노려보았다.
총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태도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太王 전하는 엄비를 말리며 조용히 총독에게 아녀자의 어리석음을 해명하여 없던 일로 하기로 했으나, 한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궁궐 내에는 긴장감이 흘렀었다. 여성으로서 엄비는 상당히 강한 편이었고, 다소 히스테릭한 면이 있었다.
[해설]
英親王 李垠(영친왕 이은)은 高宗의 일곱째 아들로서 純宗 황제의 이복동생이다. 1900년 英王(영왕)에 책봉되었다가 1907년 황태자에 책립되었다. 그해 12월, 11세의 나이로 통감으로 부임해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끌려갔다. 일본 황실의 뜻에 따라 덕과 재능을 대성시킨다는 명목이었으나, 사실상 볼모였다.
1910년 국권피탈로 純宗이 폐위되자 王世弟(왕세제)로 불렸고, 1926년 純宗이 승하하자 李王(이왕)이라 하였다.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중장에 이르렀다. 광복 후 일본 왕족의 몰락과 더불어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1963년 11월, 56년 만에 환국하였으나 귀국 후 7년여 병상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쳤다.
▣ 불에 탄 창덕궁 대조전을 중건하다
純宗, 李完用을 꾸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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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純宗 |
왕 전하 측에 閔장관, 尹 贊侍長(찬시장), 고쿠분(國分) 차관 등이 함께 착석한 가운데 일일이 인사를 마치자, 전하께서 돌연 李후작을 불러 매우 격노한 목소리로, 『완용, 자네는 짐을 억지로 덕수궁에 귀환시키려고 일을 꾸미고 있는데, 그 경위를 짐은 모두 들었네. 자네 완용은 실로 不忠(불충)이 극에 달했도다』라며 노한 얼굴로 질책했다.
이완용은 단지 고개를 떨구고 황공해하며 아무 말도 못 한 채 물러났는데, 그로부터 한 달 동안은 궁중에도 伺候(사후)하지 않았다. 원래 전하는 이완용에 대해 그다지 호감을 갖지 않았다. 특히 전하는 王家 수백 년의 역사가 내려오는 궁을 떠나게 한다든지, 大廟(대묘)를 개방하여 공원으로 하자는 은밀한 논의가 있었다는 소문이 귀에 들어가 상당한 불안을 느끼고 있던 차에, 이완용 후작이 移宮(이궁)을 진언했기 때문에 감정이 폭발한 것이었다.
李王 전하(純宗)는 창덕궁에, 李太王 전하(高宗)는 덕수궁에 엄연히 거처를 달리하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李후작이, 이를 단행해야 할 입장에서 부득이 하게 택한 임시 조치라고 할지라도, 2년이 소요되는 공사가 끝날 때까지 덕수궁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낼 것을 진언한 것은 어떠한 연유에서였는지 李후작 생전에 듣지 못한 점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창덕궁 樂善齊(낙선재)에서 王 전하(純宗)가 기거하게 되면 불편하실 것을 헤아리는 순수한 마음에서인지, 太王 전하(高宗)를 위하는 마음에 그 뜻을 받들어서인지는 지금도 진상을 판단하기가 어렵다. 이는 어찌 되었든, 근친 귀족과 舊臣(구신)이 자리한 가운데 질타를 당한 것이 후작에게는 대단한 모욕이었다. 이로 인해 후작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이완용 후작의 덕수궁 移宮에 관한 진언은 한때 창덕궁에 파문을 일으켰으나, 결국 후작이 체면을 잃은 채 移宮 문제는 두 번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전하는 낙선재를 임시 거처로 정하고 대조전의 준공을 기다리게 되어, 이와 함께 복구 공사를 더욱 서둘러야 했다.
전각의 양식과 구조는 화재 전과 같은 모습으로 하고 내부 장식, 설비 및 채광, 통풍, 배수 방법은 최신식을 채용하여 고아한 조선 특유의 건축미를 현대적 기술로써 건축하기로 했다. 이로써 소실된 1000평에 달한 건물을 공사비 70만원, 그밖에 관급 機資材(기자재)의 견적가 30만원, 총 100만원을 들여 만 2년 걸려 완공할 계획이 확립되었다.
공사의 설계가 진행되고 기자재의 수집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대정 7년(1918) 6월경, 내가 영선과장의 명을 받았다.
이후 나는 이 사업에 모든 책임을 지고 사무 및 기술 방면의 직원들을 독려하여 때로는 직접 청부업자·어용상인과의 복잡한 절충을 행하고, 재료 구입과 토공 건축은 부분적으로 입찰에 부쳤으며, 물품에 따라서는 직접 구입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공사 진척에 힘을 기울였다.
1918년 하반기는 토공·목수들과 함께 생활할 정도였는데, 1919년 1월21일 조선 全道를 뒤흔드는 일대 흉변이 李王家에 일어났다. 이는 다름 아닌 덕수궁 李太王 전하의 薨去(훙거)이다. 이에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며 나의 그동안의 업무 전말에 대해 적어 보고자 한다.
[해설]
1910년 8월22일 총리대신으로 韓日합병조약을 체결, 일제에 나라를 넘겨주었던 李完用은 승승장구했다. 그 공으로 일제에 의해 백작이 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이 되었다.
1917년 창덕궁 내전에 발생한 화재를 계기로 이완용은 純宗에게 덕수궁으로의 移宮을 진언했다. 純宗은 창덕궁에, 高宗은 덕수궁에 거처를 달리하고 있었다. 복구공사까지 2년 이상의 기간 동안 덕수궁에서 아버지 高宗과 함께 지내라는 진언에 純宗은 불같이 화를 낸 것이다.
舊韓末 연구자들에 따르면, 高宗과 純宗은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다.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자, 高宗은 한국문제를 국제정치의 마당에 호소하고자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로 특사를 파견한다.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高宗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완용·송병준 등 親日(친일) 대신들과 군사력을 동반한 일제의 강요로 1907년 7월20일 퇴위했다.
高宗은 일제의 강요라고는 하나 固辭(고사)하지 않고 즉위한 純宗에 대해 섭섭하고 괘씸한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高宗은 太皇帝(태황제)가 되었으나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군주였다. 한편으로는 高宗과 純宗을 덕수궁에 동거시킬 경우, 감시가 수월해질 것이란 판단에서 일제가 사주했다는 설도 있다. 결국 덕수궁으로의 移宮 문제는 純宗이 단호하게 거절함으로써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 조선의 풍습을 무시한 國葬
高宗 국장에 참석한 조선인은 70명뿐
1919년 3월3일 國葬(국장)이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大漢門(대한문)을 나서는 어가행렬은 조선의 오랜 관례에 따라 大輿(대여)를 중심으로 흰 삼베로 지은 상복과 巾(건)을 두른 李王(純宗)·왕세자(이은공)·李堈公(이강공), 세 전하가 마차에 올라 이를 따랐다.
祭官長(제관장)인 이토 히로쿠니(伊藤博邦: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 부관장 趙東潤(조동윤) 남작 및 閔장관 이하 직원들은 모두 백색 의관의 위용을 갖추고 순수한 일본 방식에 따라 황실에서 하사한 비쭈기 나무(신전에 바치는 나무)와 각 궁 전하가 올린 비쭈기 나무를 엄숙하게 올렸으며, 의장병이 앞뒤를 경호하고, 국무대신 대표인 노다(野田) 체신 대신, 하세가와 총독 이하 문무관은 대례복 차림으로 참가했다.
조선 귀족 중 참석한 자는 이완용 후작, 송병준 백작 등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당시 조선인에 한하여 예로부터 장례에 착용했던 상복이 허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문에 참가한 인원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점에 대해서는 따로 후술하기로 하겠다.
국장은 매우 장중하게 치러졌는데, 식장은 너무나도 삭막하고 幄舍(악사)는 텅 비어 있었다. 이는 순수한 일본식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式服(식복)과 기타 제한이 있었고, 특히 조선 전역에서 민족운동이 일어 민심 동요가 극에 달했다는 등의 이유로, 참석한 조선인은 불과 70여 명뿐이었다. 그 외에는 모두 內地(내지)의 관리 및 공직을 가진 자들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內葬(내장: 친지들만 모여 치르는 장례)이 있은 후, 바로 장례행렬이 金谷里(금곡리)로 향했는데, 威儀(위의)를 가다듬은 참례자가 7000~8000명에 달해 6리에 이르는 연도에는 애도하는 민중이 길바닥에 무릎 꿇어 통곡했고, 밤이 되자 부근 마을에서 화톳불을 피워 그 행렬을 장엄하게 하였다. 금곡리의 참례자는 무려 1만5000명이 넘었다. 나는 국장과 내장 모두에 관여한 한 사람으로서 이 모습을 통해 민중의 슬픈 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금곡리에서의 장례는 4일 동안 치러져, 5일째 되는 날, 返虞(반우: 장례 후 신주를 모셔 오는 일) 행렬을 갖추고 경성으로 향했는데, 王 전하의 마차가 청량리를 지날 때, 유림들이 땅에 무릎 꿇고 상서를 올렸다. 그 내용을 열어 보니 그들도 꿈에 홀린 한국 독립론자들이었다. 호위 병사들은 이를 그 자리에서 일축하고 어가행렬을 조용히 덕수궁으로 귀환시켜 虞主(우주:신주)를 魂殿(혼전)에 봉안하였다.
이로써 太王 전하의 장례는 국장과 내장의 두 가지 형식으로 치러졌는데, 이 기간 동안 경성 전역은 마치 계엄령이 내려진 것과 같은 분위기였으며, 장례행렬과 장의장 주위를 완전 무장한 군대와 경관이 철통같이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일본식 國葬이 조선인의 민족 심리를 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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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궁중의식에 따라 행해진 高宗의 장례식. |
본디 국장 의식은, 법률이나 칙령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고 또한 황실의 典則(전칙)으로 따로 정해진 바가 없어, 모두 궁내성의 관례에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典禮(전례) 형식을 어떻게 치르든 국법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획일적인 형태가 아니더라도 죽은 이의 뜻을 존중하여 그 혼을 애도하고 유족이 안심과 흡족함을 갖게 하여 일본 및 황실의 뜻하는 바를 전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조선은 예로부터 예의지국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禮儀亡國(예의망국)이라 할 정도로 예를 중시하는 나라이다. 따라서 王家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冠婚喪祭(관혼상제)의 예법이 정비되어 있다. 太王 전하의 국장을 치르는 데 있어 오랜 전통의 관습이며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전례를 버리고 일본의 형식을 강행한 것에 대해 자신들의 본래 면목을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감을 일으켜 조문 자격이 있어도 식장에 참례하지 않았던 것이고, 그 결과 王家국장에 전하의 舊臣이 70여 명에 불과했던 점은 누가 뭐라 해도 당국의 형식에 얽매인 관료들이 자초한 일이라 하겠다.
李太王의 국장을 일본식으로 획일화하고, 일본 전통의 衣冠束帶(의관속대)를 조선인들에게 강요한 일 등은 일본의 국민사상이 얼마나 소극적이고 포용력이 없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당국이 이를 깨닫고 수년 후 실시된 창덕궁 전하(純宗)의 국장은 이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다소 미비한 점은 있었지만 조선 방식을 존중하여 거행했기에 일반적으로 매우 좋은 인상을 주었고, 왕가의 친척들도 만족하였으며 조선 민중의 감정도 적지 않게 누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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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일보사(現 서울시청) 앞을 지나는 고종의 因山 행렬. |
高宗 승하와 독살 유언비어
國葬이 어떻게 왕가와 근친 사이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했는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즉, 국장 의식은 10일재-20일재-50일재-100일재와 같이 순차적으로 집행하기 때문에, 이때는 전하를 비롯한 근친 대표자가 예복을 갖추고 참석해야 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들은 병이 났다는 둥 사고가 났다는 둥 하여 선뜻 나오려 하지 않았는데, 의식은 치러야 했기에 李王職 직원들이 서로 나누어 대표자 동원을 위해 뛰어다녔고, 참례를 애원하다시피 하여 겨우 형태만 갖춘 채 제사를 치른, 다소 어처구니 없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또한 국장으로서 전하의 유해가 안치된 大輿(대여)를 葬殿(장전)에 봉안하여 식을 치르는 것에 대해 일부에서는 『총독부가 권력으로 태왕 전하의 유해를 빼앗아 간 것이다. 우리는 저항할 힘이 없으므로 하는 수 없이 빌려 주었을 뿐이다. 우리 조선인은 그와는 달리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의식으로 奉葬(봉장)한다. 전하의 유해는 일본인한테 있을지언정 그 혼은 우리 조선인들에게 있다』는 등 상당히 과격한 언동을 보인 이도 있었다.
나는 당시 이 문제를 겪고 나서 일본 측 대응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통감했기에, 창덕궁 전하(純宗)의 국장을 치를 때에는 유아사(湯淺) 정무총감을 찾아가 직접 의견을 개진했는데, 총감도 생각을 같이 하여 『이번에는 이전의 실패 경험을 고려하여 어디까지나 조선 의식을 존중하여 집행하도록 계획 중』이라고 대답했다. 이에는 궁내성과의 관계가 있어 반드시 총감 의견이 모두 실현되었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그에 가까운 형태로 장례가 치러졌기에 특기할 만하다. 국장은 무사히 끝났으나, 민심은 더욱 동요하여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그것이 종종 太王 전하의 훙거와 관련된 것이기는 했는데, 예를 들어 『전하의 돌연한 죽음은 閔장관 및 尹찬시장이 총독부 대관의 뜻을 헤아리고 典醫(전의)인 安商鎬(안상호)에게 명하여 毒(독)을 넣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전하가 만년에도 조국을 되찾으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우려해서였다』든지 『전하의 유해는 승하와 함께 자흑색을 띤 채로 관에 안치되었는데, 후에 살이 녹아내려 액체가 되었다』는 등 실로 어이없는 풍설이 나돌아 민중을 현혹시키고 민중 일반의 애도의 뜻과 反日(반일) 분위기를 더욱 조장했다.
이토 공 이래 내외로 신망이 두텁고 이조 후기의 제1인자라고 할 정도로 당대에 학덕이 탁월했던 金允植(김윤식)과 前 학부대신으로 유림의 泰斗(태두)였던 李容植(이용식)은 連署(연서)로 조선 독립의 의견서를 하라 다카시(原敬) 수상, 하세가와 총독에게 보내고 朝野(조야)의 정치가에게 공표하는 등 더욱 불온한 형세로 발전했다. 특히 閔장관과 尹찬시장은 관직을 물러나고 작위 훈장까지 반납하겠다고 했다.
두 사람의 뜻은 太王 전하의 독살 문제가 아무리 허위라 할지라도 이는 자신들이 부덕한 소치이며, 이대로 영위를 연모하는 일은 민중의 감정을 자극하고 왕가에 누를 끼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사직은 후에 聽許(청허)되었지만, 辭爵(사작)은 암중에 묻히고 말았다.
무저항주의 민중운동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경성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경찰·헌병과 조선인들이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살상 방화 등의 폭거 소식이 자주 전해졌고, 피에 광분한 민심은 극도로 험악해졌다. 다행히 太王 전하의 혼전을 봉안한 덕수궁과 李王 전하가 계신 창덕궁만은 독립만세의 외침이 들리는 가운데 그 소요의 소용돌이를 뛰어넘어 매우 평화로웠다.
왕세자 전하는 장례식이 끝나고 20여 일 후에 東京에 귀환하셨다. 왕 전하는 장례식 이외에 왕가의 전통에 따라 魂殿(혼전)의 제사는 정례적으로 창덕궁으로부터 찾아와 직접 행하셨다. 나는 국장 및 내장의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모두 종료되었기 때문에 이후 본 업무로 돌아가 궁전의 중건 공사로 바빠져 극히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 이조의 遺臣, 高宗의 陵碑를 세우다
4년 동안 방치된 高宗의 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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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宗의 능비. |
세상을 떠난 太王 전하의 혼이 鎭座(진좌)하는 금곡 홍릉에서의 어느 날 밤은 깊어만 갔다. 별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적막 속에서 망치로 돌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정적 속에 울려 퍼져, 노인의 결의를 더욱 굳게 하는 듯했다.
高永根은 죽음을 받드는 일은 삶을 받드는 일과 같다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太王 전하의 혼이 잠든 금곡 홍릉에서 參奉(참봉) 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 경기도 長湍(장단) 군수를 시작으로 이조시대에는 太王 전하의 총애를 받았고, 민씨 일가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은 완강한 성품의 인물이었다.
金玉均(김옥균)·禹範善(우범선) 사건인 「을미사변」이 있은 후에는 자객이 되어 우범선을 암살하고 히로시마(廣島)의 철창 속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형을 마치고 귀국해 전하의 따뜻한 은혜 속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太王·왕비 양 폐하가 승하하신 후로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홍릉 인근에 자리를 잡고 초록이 무성한 松柏(송백) 속에서 조용히 지난날의 은총을 기리며, 한편으로는 민씨 종가인 閔貞植(민정식) 가문의 총지배인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오랜 세월의 인습에 얽매여 시대 사조의 변화에 무감각했던 많은 근친 귀족에게 둘러싸인 李王 궁내에는 지금까지 여러 문제가 상당히 많았다. 금곡 홍릉에 잠든 太王 전하의 능비 건립 문제도 그중 하나였다.
이 비석에 「大韓高宗大皇帝洪陵(대한고종대황제홍릉)」이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어서 총독부가 이에 반발했고, 궁내성과 총독부가 수차례에 걸쳐 절충한 결과 碑銘(비명)에 「前(전)」이라는 글자를 덧붙이기로 결론지었는데, 왕가의 근친과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비석은 허무하게도 高宗 승하 후 4년이 지날 때까지 비각에 풀에 뒤덮인 채 방치되었던 것이다.
4년이란 세월 동안을 세워지지 않고 비바람 속에 방치된 비석을 능참봉으로서 매일 바라봐야 했던 高永根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다. 달아오르기 쉬운 그의 피가 역류할 정도로 끓어올랐다. 효도 追遠(추원: 제사에 정성을 다함)의 정 깊은 왕 전하(純宗)가 홍릉을 참배할 때, 父君 전하의 승하 이후 아직도 비석이 비각에 누운 채 건립되지 못하는 것에 흐느껴 비탄하는 모습을 보고, 高永根은 전하의 심중을 헤아려 지난날의 왕가의 殊遇(수우)를 떠올리고는 피가 들끓었던 것이다.
마침내 비석을 세워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을 굳히고 몰래 인부들을 모아 찬바람이 살을 에는 어느 날, 齋戒(재계)하고 직접 그들을 감독하여 누워 있던 능비를 깨끗이 닦은 후 단숨에 능 앞에 세웠다.
이 일을 마치고 나서 高永根은 『大事(대사)를 끝내고 臣(신)은 선왕의 洪恩(홍은)에 보은했나이다』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지참하고는 전하 슬하에서 죽겠다며 돈화문 앞에서 待罪(대죄)했다. 李王職에서는 「그 마음은 이해하나 죄는 면할 수 없다」며 참봉직을 박탈했다.
갑작스런 상소문을 접한 李王職에서는 매우 낭패하여 장관·차관 이하가 鳩首協議(구수협의)하여 선후책을 강구했고, 당장 우에바야시(上林) 차관이 총독부에 출두하여 상세한 사정을 설명하고 궁내성에 장문의 보고를 올렸다. 하지만 이미 건립한 것을 없앨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고영근의 敢然(감연)한 결의가 승리를 거두고 「대한고종대황제」라는 존호는 영구히 남게 되어 李太王 전하도 땅속에서 편히 잠들게 되었다.
이 일로 왕가의 근친과 舊臣들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장관 李載克(이재극) 남작과 차관인 우에바야시 게이지로(上林敬次郞)가 직을 물러난 것은 다른 여러 사정이 있었겠으나, 가장 큰 원인은 이 때문이었다. 고영근은 참봉직을 물러난 후에도 금곡의 송백 숲 속에 草庵(초암)을 짓고 無官(무관) 참봉으로서 만년을 보냈는데, 이듬해 병으로 사망하여 太王이 잠든 가까이에 묻혔다.
[해설]
高永根은 高宗 황제의 신임을 받아 사적인 비밀 업무를 맡곤 했다. 高宗이 만민공동회를 밀탐하라고 지시했는데, 오히려 그 취지에 찬동하고 입고 있던 관복과 관대를 벗어 던지고 등단하여 연설을 해서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는 황제를 배신한 혐의를 입은 채 일본으로 망명했다. 살아날 길을 모색하던 고영근은 민비 시해를 방조한 禹範善을 유인 살해하기로 했다.
「대한계년사」 광무 7년(1903) 11월24일자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고영근이 우범선과 만나 술을 마시면서 말싸움을 하더니 영근이 단도를 빼 우범선의 목을 찌르자 영근과 공모한 노원명이 철퇴로 머리를 쳐 살해했다. 그리고 구레(吳)시 경찰에 자수하고 국모복수 격문을 제출했다>
고영근이 무기징역 형을 받고 복역 중 감형되어 귀국했을 때, 高宗은 純宗에게 황위를 물리고 덕수궁에 물러나 있었다. 그는 다시 高宗의 은총을 입고 민씨 종가인 閔貞植 가문의 재산을 총괄하면서 살았다. 高宗이 승하하자 홍릉의 능참봉으로 여생을 살았다. 고영근은 홍릉에 고종의 비석을 세우고자 「대한고종대황제홍릉」이라 비명을 새겨 놓았다.
총독부에서는 이를 문제 삼았다. 지금은 없어진 「대한」이라는 국호며 「황제」란 말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영근은 4년 동안 세우지 못하고 버려져 있던 이 비석을 아무도 몰래 밤중에 독단으로 세웠다.
일제는 이미 세운 비석을 쓰러뜨린다는 것은 3·1 운동으로 사나워진 민심에 기름 붓는 일로 보고 비석은 그냥 두되, 고영근과 당시 궁내부 장관이요 종친인 이재극을 파면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비석을 세우고 쫓겨난 고영근은 홍릉 바로 이웃에 초막을 짓고 무관의 능참봉을 자처하고 살다가 이듬해 신병으로 별세했다. 1993년에는 소설가 김원우가 고영근의 삶을 소재로 「우국의 바다」란 소설을 출간했다.
▣ 왕손의 탄생
英親王의 득남에 축전 보낸 일본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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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晉을 안고 있는 英親王(이은) 부부. |
이 기쁜 飛報(비보)는 8월18일 오전 8시30분경 창덕궁에 입전되어 찬시가 즉각 왕(純宗)과 왕비 양 전하에게 아뢰었는데 양 전하는 매우 기뻐하며 흐뭇한 표정이었다. 이 경사는 근친과 舊臣들에게도 전해져 창덕궁 내에는 밝고 상서로운 기운으로 가득하고, 왕래하는 이왕직원의 눈가에는 희색이 감돌았다.
瑞相(서상)으로 가득한 창덕궁은 왕손 탄생의 기쁨에 싸여 8월18일 저녁이 되자 다음과 같이 聖上(성상) 폐하의 황공한 詔勅(조칙)이 이왕손에게 내려져, 찬시가 바로 왕과 비 전하에게 전했다. 조칙이 내려진다는 급전에 이어, 닛코(日光)의 어용저에 행차 중이시던 황후 폐하에게서 令旨(영지)를 받았다.
<왕손의 優詔(우조)-왕세자인 李垠은 李家의 후계자로서, 그 令名(영명)은 태양이 오르는 것과 같고, 학덕이 달에 다다를 정도이며, 실로 내외의 선망의 대상이다. 선대 천황(메이지 천황)은 어린 아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여 (짐도) 오랜 세월 동안 총애를 받았다. 왕세자에 대한 짐의 情義(정의)도 특별히 두터워 가족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이다. 금번에 李家에 경사가 있어, 그 탄생한 남아는 世家(세가)의 준하는 가문의 후계자이므로, 도리에 따라 休祉(휴지)를 받은 후 황족의 예를 갖추어 특별히 「전하」의 칭호를 사용하도록 한다. 이에 선대 천황의 마음을 받들어 殊遇(수우)의 뜻을 표명한다>
왕손 晉의 돌연한 죽음
왕세자와 왕세자비 양 전하는 성혼 후 처음으로 함께 歸鮮(귀선)하시어, 조선의 2000만 민중이 뜨겁게 맞이하는 가운데 入京하신 후, 祖宗(조종)의 종묘에서 이뤄진 廟見禮(묘견례)를 비롯하여 창덕궁 양 전하, 근친, 舊臣이 인사 나누는 자리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2주간의 체재를 마치고 기쁜 마음으로 退京(퇴경)을 이튿날로 앞둔 5월8일, 돌연 왕손 李晉(이진) 전하의 병환이 전해져 양 전하가 몸소 간호하시고, 시가(志賀), 이와이(岩井)·고노(河野)·이케다(池田)·고야마(小山)의 다섯 名醫(명의)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진료했으나 2000만 민중의 쾌유를 비는 마음도 부질없이 슬프게도 결국(1922년) 5월11일 오전 3시12분 승하하셨다. 애처롭고도 슬프기 그지 없는 일이다.
故 李晉 전하의 유해가 잠든 덕수궁은 애도의 구름이 짙게 깔렸고, 經夜(경야) 6일 밤을 보낸 후 유해를 청량리 永徽園(영휘원)의 묘역에 안장하는 가장 비통한 날이 왔다. 전날 오후 5시 마지막 祖奠(조전)은 李제관장 이하 祭員(제원)들에 의해 거행되어, 6일째 경야를 마친 5월17일은 아침부터 회색빛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천지는 온통 슬픔으로 가득했고, 건물마다 달린 조기는 애처로웠으며, 모두 한탄에 잠겨 있었다.
비애로 가득한 덕수궁. 이른 아침부터 弘德殿(홍덕전) 咸有齋(함유재)에서 발인 준비로 분주했다. 淨砂(정사)가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마차 바퀴 소리 또한 슬프게 울려 퍼졌다. 배례장인 홍덕전은 완벽하게 준비를 마치고 오전 6시 근친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가 잠든 梓宮(자궁: 관)은 함유재에서 배례장 제단으로 봉안되어, 천황 황후 양 폐하가 보내신 생화를 비롯하여 攝政宮(섭정궁) 전하, 후시미(伏見)·아리스카와(有栖川)·강인(閑院)·히가시후시미(東伏見)·가초(華頂)·야마시나(山階)·가요(加陽)·구니(久邇)·나시모토(梨本)·아사카(朝香)·히가시쿠니(東久邇)·기타시라카와(北白川)·다케다(竹田)의 각 황족, 다카하시(高橋) 수상 이하 각 국무대신, 조선 총독, 조선군 사령관, 정무총감이 보내 온 생화가 애처롭게 영전에 바쳐졌다. 食饌(식찬)도 정갈하게 올려지니 새삼 슬픔이 밀려왔다.
생화와 식찬이 엄숙하게 마련된 가운데 분향 연기가 흔들리는 애수 속에서, 오전 7시30분 양 전하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초췌하고 망연한 모습으로 배례장 복도를 디디는 발 소리도 고요하게 자리하여, 영전에 얼굴을 묻고 마지막 분향을 했다. 사랑하는 자식과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터라 분향하는 손은 떨렸고, 비 전하는 흐느끼는 비통의 울음소리로 배례했는데, 실로 비통한 이 광경에 近侍(근시)들은 모두 슬픔의 눈물에 목이 멨다.
이렇게 양 전하의 마지막 긴 이별은 끝났다. 누가 뒤에서 잡아 끌기라도 하듯 비 전하는 몇 번이고 영구를 뒤돌아보며 故 전하의 명복을 비셨다. 아! 애처롭고 슬프도다.
[해설]
李方子(이방자) 여사는 일본 메이지 천황의 조카인 모리마시 親王(친왕)의 딸로 태어나, 히로히토(裕仁) 왕세자의 妃로 내정되었다. 이후 學習院(학습원)에 입학, 왕비수업을 받던 중 1916년 일본에 볼모로 잡혀와 일본 육군사관생도가 된 英親王과 정략적 약혼을 하고, 1920년 왕세자비가 된다.
1921년 영친왕비(李方子)가 왕손 晉(진)을 낳았을 때 일본 황실의 속내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어린 나시모토 마사코가 임신할 수 없다는 일본 황실 御醫(어의)들의 은밀한 진단결과에 따라 영친왕과 정략결혼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崔書勉 원장에 따르면,『이 소식을 듣자 불임진단을 내렸던 황실 의사는 할복자살했다』고 했다.
1922년 영친왕 내외는 돌배기 晉을 안고 조선 인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보름 동안의 체재를 마치고 東京으로 돌아가기 전날, 晉은 갑자스레 병이나 사흘 만에 죽고 만다. 곤도 시로스케는 『누가 뒤에서 잡아 끌기라도 하듯, 비 전하는 몇 번이고 영구를 뒤돌아보며 故 전하의 명복을 비셨다』고 했다. 영친왕 내외는 10년 만인 1931년 다시 아들 玖(구)를 얻었다.
李方子 여사는 1945년 광복으로 일본 왕족에서 제외되어 거처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1963년 의식불명이 된 병석의 영친왕과 함께 귀국했다.
1962년 한국 국적 취득 후 영친왕의 유지를 받들어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정박아·지체부자유자들의 기술교육 등 육영사업에 정성을 쏟았다. 조선왕족의 단절을 꾀한 정략결혼의 희생자이기는 하였으나, 『내 조국도, 내 묻힐 곳도 한국』이라는 신념으로 봉사해 왔다. 1989년 5월11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병으로 일생을 마쳤다.
▣ 덕혜옹주의 東京 유학
누이동생도 일본 황실의 볼모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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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나기 전 송별회장에서의 덕혜옹주. |
이날 히노데 소학교의 정든 학우 100여 명과 관민 다수는 역 앞에서 배웅했다. 덕혜옹주는 연보라 바탕에 금사로 장식된 기모노(후리소데) 위에 보라색 큰 장미 무늬가 그려진 코트 차림이었는데, 곱게 빗은 머리와 옅게 화장한 모습이 아름다웠고, 기분은 여느 때보다 좋아 보였다. 덕혜옹주가 다소곳하게 전망차에 오른 후 정각에 열차가 흔들리기 시작하니 한없이 아쉬운 표정으로 몇 번이고 공손히 인사를 하면서 東京 유학길에 올랐다.
후에 들은 바로는 덕혜옹주의 유학은 李王 전하(純宗)의 영단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20년 전 왕세자(영친왕) 유학이 메이지 천황의 깊은 叡慮(예려)로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옹주의 유학도 李王家의 여성 교육에 대해 각별한 배려를 갖고 있던 황후 폐하가 東京에 체재 중이던 사이토 총독을 불러 그러한 뜻을 비쳤고, 총독은 이를 바로 李王家에 전달한 것이다. 이를 전해 들은 李王家도 그런 숙망이 있었기에 바로 이를 결정했다고 한다.
도리이사카(鳥居坂)에 있는 왕세자(영친왕) 저택에서는 이미 어학·음악 등을 지도할 교사의 선정이 끝나 옹주가 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특히 淑德(숙덕) 높은 비 전하(李方子)는 덕혜옹주에 대해 마치 친동생과 다를 바 없는 자애로움으로 옹주의 상경이 결정되자 매우 기대하며 직접 옹주의 의복 마련을 지시하는 등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따라서 함께 상경한 궁녀나 스미나가(住永) 여사 등은 오랫동안 옹주를 곁에서 보살피기를 희망했으나, 옹주의 가쿠슈인(學習院) 입학 절차가 끝나자마자 조선으로 돌아왔고, 옹주는 왕세자비 전하의 교양 아래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풍토 기후의 변화로 옹주의 건강이 문제되는 일 없도록 당국은 철저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해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25일 高宗과 후궁인 福寧堂(복녕당) 梁貴人(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高宗의 고명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金章漢(김장한)과 약혼했다.
1925년 4월 오라버니인 영친왕에 이어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일본에 볼모로 갔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친 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對馬)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해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조선왕조의 대를 끊기 위해 영친왕을 정략결혼 시킨 일본은 이번에는 조선의 藩臣(번신)이었던 쓰시마 도주의 후예와 덕혜옹주를 결혼시킴으로써 조선의 國格(국격)을 낮추려 했다.
결혼 후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병상생활을 계속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했다. 하나 있는 딸마저 결혼에 실패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고, 1962년 1월26일 귀국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않아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21일 세상을 떠났다.
▣ 純宗 전하의 일본行을 논의하다
하세가와 총독, 純宗 일본行 위해 체력 검정
純宗 전하가 친히 東京에 가서 일본 천황에게 문안을 여쭙고 각 황족들과 친밀을 도모하는 것은 한일합병의 즈음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병합의 결단을 내린 메이지 천황의 심정도 그러했다고 듣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民情(민정)과 李王家 주위의 사정은 아직 그것을 실현하기에 이르지 못하고, 특히 왕 전하의 건강상태가 과연 海陸長途(해륙장도)의 여행에 견딜 수 있느냐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테라우치 총독으로서는 이 문제에 관해서 매우 고심을 했다.
테라우치 총독이 하세가와 총독에게 임무를 인계할 때에 『나는 衷情(충정)으로 감추고 싶지만, 大局으로 보아 국가인민을 위하여 한일합병에 있어서 통치권의 이양을 실현시켰다. 더 이상 강요할 것은 못 되지만, 천황 폐하의 마음을 살펴 중대 안건의 하나로서 귀관에게 임무를 인계한다』라는 뜻을 전했다고 들었다.
하세가와 총독은 이 문제를 취임하는 의의로 생각할 만큼 고쿠분(國分) 궁내부 차관에게 명하여 내밀히 그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선결문제는 純宗 전하의 건강 문제였다. 이에 그 준비 행위로서 이조 발상지인 함경남도 咸興(함흥)의 大廟(대묘)를 참배하는 일을 계획했다.
대묘 참배는 純宗 전하의 오랜 숙원이기도 해서 大正 6년(1918) 5월 상순, 薰風(훈풍)이 불고 新綠(신록)이 우거진 좋은 시절을 택해 純宗 전하는 장관, 차관, 贊侍長(찬시장) 이하 사무관, 典祀(전사) 직원 외에 가까운 친척인 윤택영 후작 이하 많은 사람을 데리고 경성을 출발했다.
鐵路(철로)로 원산에 이르러 이곳에서 20여 리 떨어진 곳을 자동차를 타고 咸南(함남)평야를 가로질러 雨後(우후)에 진흙 속에 차바퀴가 빠지는 것 같은 惡道(악도)를 다녀왔다. 그간 엄숙한 제사식전을 행하고, 宿食의 불편도 있고 官民의 환송ㆍ환영의 절차가 복잡했음에도 불구하고, 九重宮闕(구중궁궐)에서 자란 純宗 전하의 건강은 조금도 이상 없이 오히려 좋은 성적을 보여 주었다.
이로 인해 건강문제는 완전히 시험을 끝냈으나, 누가 어떻게 高宗 전하에게 東京에 가는 이야기를 進言(진언)할 것인가, 이것은 高等政策으로서 하세가와 총독이 직접 지휘했다. 重望(중망)이 깊은 이완용 후작 외에는 이것을 진언하고 결단을 구하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하세가와 총독은 이완용 후작을 불러 이 일을 지시했다.
이완용 후작도 난색을 표시했으나, 총독의 눈치를 보고 승낙하고 물러나왔다. 이완용 후작은 우선 李王宮의 본부인 덕수궁(高宗)을 움직여 인가를 얻고, 그 다음으로 純宗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완용은 곧바로 高宗을 알현하고 『병합 후 10년 가까이 된 扶槿(부근: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볼 때, 왕 전하(純宗)께서 한번 東京에 가셔서 친히 천황의 문안을 여쭙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행히 왕 전하의 건강도 매우 좋으시고 여행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보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高宗은 이를 듣고 매우 냉정하게 『그것은 그렇게 해야겠지만 나는 세상일에 관계가 없다. 이는 창덕궁(純宗)에게 달려 있는 것』이라며 묘한 말로 거부했다고 한다. 이완용은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다시 純宗을 찾아가 총독의 의향을 넌지시 떠보았더니, 전하는 평소 너그러운 태도와는 달리 語氣(어기)를 높여 『완용, 네가 총독의 위세를 등에 업고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을 강요하느냐. 병약한 내 건강은 이를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더이상 나를 괴롭힌다면 극도로 불충한 신하다』라고 힐책하여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윤덕영 자작이 純宗이 평소 이완용에게 호감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이용해 이완용을 궁지에 빠뜨리기 위해 純宗에게 이런 進言을 하도록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완용은 이 일 때문에 하세가와 총독의 신임을 잃은 것은 물론, 많은 근친 귀족에게도 완전히 면목을 잃었다. 하세가와 총독은 정치상의 문제라면 다소 왕실에 압박을 가할 수 있었겠지만, 宮廷(궁정)에 관한 일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총독의 위신상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역시 병합 당시와 같이 윤덕영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윤덕영을 불러 문제해결을 일임했다.
윤덕영은 총독부에서 돌아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큰 결심을 하고, 실행에 착수하면서 가능한 모든 악랄한 책략을 써서 舊臣의 情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까지 시도해, 드디어 병합 이래 중대 안건을 해결했다. 총독은 덕분에 겨우 체면을 유지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尹자작에 대한 조선 上下의 증오는 더욱 심해져 갔다. 『그놈은 결코 제명에 죽지 못할 놈!』이라는 심한 이야기를 듣기에 이르렀다.
尹자작은 후에 『옛 신하로서 참기 힘든 일까지도 참아 가며 그런 일을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하세가와 총독의 뜻을 받고 했는데, 이제 와서 나만 나쁜 사람이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敵本主義
윤덕영은 문제해결의 열쇠는 오로지 高宗 手中(수중)에 있기 때문에 高宗 전하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심상치 않은 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고, 이 방면에 대해 극도로 악랄한 책략을 쓰기로 결심하고, 급거 덕수궁으로 가 高宗을 알현해 하세가와 총독의 意中(의중)을 살피기 힘들다는 것을 말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렸다.
『老體(노체)이신 전하를 괴롭히는 일이라 송구하오나, 王家의 百年安泰(백년안태)를 위해서 참으시고 친히 동경에 가셔서 천황에게 伺候(사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것을 하지 않는 경우 전도에 어떤 禍根(화근)이 올지 알 수 없나이다. 이에 대해 전하의 깊은 고려를 바라나이다』
高宗은 『나는 늙어서 隱遁(은둔)의 몸인데 너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一言之下에 거절했다. 윤덕영은 재삼 강요하고, 자리를 뜨지 않고 밤이 깊어도 퇴청하지 않았다. 다음날도 움직이지 않고 이 말을 반복했고, 또 밤이 됐다. 그렇게 하기를 일주일, 高宗이 피곤해 누우면 그는 별실에서 쉬었고, 高宗이 눈을 뜨면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가 결심을 강요했다. 그 집요함, 대담함, 버릇없음은 眼中(안중)에 옛 신하의 情도 예의도 없다는 듯 행동하여 궁녀들을 겁먹게 하였다.
그래도 高宗은 듣지 않았다. 노령 60여 세에 40년간 조선에 군림한 高宗이 친히 東京에 간다는 것은 아무리 강요해도 그 뜻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윤덕영도 알고 있었지만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실은 「敵本主義(적본주의)」였다. 즉, 高宗이 이 난제에 급박한 나머지 『나는 불가하지만 창덕궁(純宗)에게 대신 東京에 가도록 하라』는 한마디를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高宗 전하는 자기 자신이 東京에 가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창덕궁의 동경行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래서 윤덕영은 측면에서 악랄한 술책을 썼다.
윤덕영은 고쿠부(國分) 차관과 짜고 사람 좋은 閔장관의 동의를 얻고 하세가와 총독의 內意(내의)를 받아, 덕수궁(高宗)의 집기를 정리한다는 핑계를 대고 宮內 大小多數(대소다수)의 창고에 있는 高宗 신변의 문고·서류 등을 범죄혐의자에 대한 가택수색이라도 하듯 엄밀히 검사하고 일일이 封印(봉인)을 하고, 물품을 보관하는 궁녀를 罷免(파면)해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궁녀는 전하가 晩年(만년)에 총애했던 여성이었는데, 조그마한 결점을 트집 잡아 이를 핑계로 참혹한 처분을 내린 것이다. 궁녀는 尹자작에게 無情(무정)의 눈물을 흘리며 高宗 전하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남기고 하는 수 없이 쫓겨났는데, 동시에 高宗 전하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윤덕영의 책략
그러나 윤덕영은 掌侍司長(장시사장: 시종장)의 직에 있으면서 냉대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이게 高宗 전하로 하여금 憤?(분만)에서 窮迫(궁박)으로, 궁박에서 降伏(항복)에 이르게 한 책략이었다.
尹자작의 책략은 옛 황실의 암투극에나 등장할 만한 연극을 꾸미기에 이르렀다.
高宗이 30년 전에 閔妃(민비)를 잃은 후 다시 妃를 맞아들이는 內議(내의)가 있었고, 당시 많은 양반집 처녀들을 물색했었다.
이 중 金씨라는 여인이 제1후보로 뽑혀 약혼까지 성립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궁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30여 년 동안 獨守空房(독수공방)을 하고 있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거의 믿을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꼬투리잡아 윤덕영은 하세가와 총독에게 보고했다. 하세가와 총독은 고쿠부 차관과 貴族舊臣(귀족구신) 몇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하세가와 총독도 내심 『이것은 더 없이 좋은 기회』라며, 표면적인 이유로 윤리적으로 한 번 약혼한 사람을 버리고 돌보지 않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 여성을 덕수궁에 받아들여 高宗의 신변에 봉사토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역시 윤덕영은 이 기괴한 일을 高宗으로부터 純宗의 동경 伺候 허가를 받을 「지원 사격」으로 하기로 하고 덕수궁에 들어가 高宗을 肉迫(육박)했다.
윤덕영은 『임금의 말은 땀과 같아 한 번 나가면 들어올 수 없는 것이옵니다(尹자작을 비롯해 李朝의 귀족들은 이 말을 즐겨 썼다). 지금 金씨는 30년 전에 전하가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은총을 내릴 것을 믿고, 이후로 독수공방을 지키고 貞節(정절)을 지켜 이제 나이가 먹은 것조차 잊을 만큼 세월이 흘렀사옵니다. 그 여인의 충정, 참으로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바, 그 여인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오로지 전하의 마음에 달렸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도덕에 따라 君德(군덕)을 내려 주시옵소서. 특히 이 일은 하세가와 총독도 알게 됐고, 전하를 부도덕하게 보지 않을까 심히 우려되옵니다』라고 高宗을 힐문했다.
高宗은 잠자코 들은 후, 『당시 侍臣(시신)들이 비를 책봉한다고 많은 여자들을 물색하다가 생긴 일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데, 나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이제 와서 그것을 운운하는 것은 不忠의 극이다』라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윤덕영은 끝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고압적인 태도로 압박했다. 매일 오후 2시, 3시부터 밤 2시까지 직접 高宗의 면전에서 움직이지 않고 高宗에게 정신적인 고통과 육체적인 피로를 견디지 못하게 했다. 그 수단의 악랄함, 냉혹한 끈기는 정1품의 끈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高宗은 『집안 私事(사사)를 총독의 위력을 빌려 老境(노경)의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무슨 짓인가. 윤덕영은 이조 500년 동안 보지 못한 不忠의 무리다. 그 행위는 간흉하기 짝이 없다』라고 시종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윤덕영은 전하의 분노를 사고 조선인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윤덕영의 잔악하고 악랄한 수단이 나온 것은 당시 총독 하세가와가 배후에서 지휘·독려하고 고쿠부 차관이 일체 모의에 참여한 결과였다. 따라서 하세가와 총독과 고쿠부 차관은 윤덕영이 짊어진 벌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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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宗과 純宗을 핍박했던 친일파 윤덕영(왼쪽)과 윤택영(오른쪽·純宗妃 윤씨의 아버지). |
불쌍한 여인 貞和堂
윤덕영이 총독의 위력을 빌려 강한 압박을 한 것에 高宗은 궁지에 몰렸지만, 그렇다고 純宗의 東京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수수께끼 같은 30년 전 왕비 후보자라고 하는 알 수 없는 金씨라는 여인을 옆에 두는 것도 동의할 턱이 없었다.
그래서 윤덕영은 高宗을 궁박하고, 극도의 싫어하는 짓을 해서 高宗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이 여인을 덕수궁에 넣기로 하고, 金씨의 아버지에게 그 뜻을 전했다.
金씨의 아버지는 끼니도 거를 만큼 가난한 양반이었다. 그 집안 사람들은 자신의 딸이 일약 덕수궁의 왕비로 冊立(책립)됐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바꾸어 말하면 그 집안은 李王家의 외척이 되고, 장래에는 작위와 祿(녹)을 받아 一家가 번영하게 될 터이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5월 말 黃道(황도) 길일을 택해, 贊侍長(찬시장) 윤덕영은 부하인 贊侍(찬시) 金永甲(김영갑)이라는 자를 高宗 전하의 칙사로 만들어 위풍당당하게 金씨 집에 보냈다. 칙사는 47세가 넘은 金씨에게 화장을 진하게 시키고 혼례복을 입혀 梨花文章(이화문장)이 달린 쌍두마차에 태워 당당히 혼례행렬같이 대한문 안으로 데려왔다. 희극이랄까 비극이라고 할까. 정략으로써 60여 세의 高宗 전하에게 하등 사랑도 없는 부자연한 결혼을 강제하는 것은 실로 잔학무도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李王家 내외에서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놀랄 뿐이었다. 나도 한두 번 그 여인을 본 일이 있다. 과연 30년 독수공방한 생활을 보내서인지 이마에 주름이 있고, 창백한 얼굴에서 나이든 여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여인은 궁궐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高宗이 옆에 부르지 않을뿐더러, 일절 만나 주지 않았다. 아무리 윤덕영이 흉폭했다고 해도 高宗이 마음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貞和堂(정화당)」이라는 존칭만 붙여 주고, 덕수궁에서 떨어진 別堂(별당)에 살게 했다. 그 후 그 여인은 비좁은 방에서 궁녀생활을 했고, 그 수당으로 매달 300원씩을 받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외척의 지위나 권세, 富(부)가 모두 一場春夢(일장춘몽)으로 사라지고, 한때 윤덕영에게 이용당해 입궁한 것을 후회하고 몇 번인가 불평을 토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金씨를 덕수궁에 들인 것은 실로 30여 년의 정절을 동정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윤덕영이 때를 빌린 정략에 지나지 않았다. 불쌍한 것은 그 여인이고 그 여인의 집안이다. 그들은 오직 윤덕영이 高宗을 압박하는 희생물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불합리한 강제결혼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 여인은 평생을 번민·실망·원망을 하며 살게 되었는데, 1919년 高宗이 승하하셨을 때, 비로소 덕수궁 殿內(전내)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생전 한 번도 알현하지 못했던 高宗의 유해에 배례하면서 통곡하는 그 모습은 참으로 비통한 장면이었다. 지금도 李王家는 그 여인에 대해서 집과 약간의 생활비를 주고 있다고 들린다.●
[해설]
純宗은 1917년 6월3일부터 30일까지 27일간 일본에 다녀왔다. 純宗의 일본 방문은, 조선 황실이 일본 황실에 완전 굴복한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황실뿐만 아니라 일본 민족에 대한 조선 민족의 종속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