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崔承喜의 춤을 전수한 新무용의 기수 金白峰

『춤은 영감으로 찾아가는 修道의 길
정형화되는 순간 춤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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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白峰
1927년 평양 출생. 평양 명륜여학교, 일본 訟蔭여고 졸업, 최승희무용원 수료. 김백봉무용연구소장, 경희大 무용과 교수, 한국예술원 회원, 최승희춤연구회 이사장. 現 서울시무용단장. 대한민국예술원상, 보관문화훈장 受賞.

金文成 국악평론가
지난 11월3일 세종문화회관 공연 장면.
지난 11월3~4일 양일간 「무용, 무대예술 80年史 ― 한아름 보듬어 맺고 풀고」라는 춤 공연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한국 무용계가 걸어온 길을 名舞(명무)들의 춤을 통해 회고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공연이었다. 원로무용가 金白峰(김백봉·79)이 총연출을 맡았다. 白峰은 한국 新무용의 巨頭(거두)이다.
 
  공연을 며칠 앞두고 리허설이 한창인 세종문화회관 서울무용단 연습실에서 그를 만났다. 창작舞(무) 「만다라」의 시작을 알리는 동종이 울리자 金白峰 선생은 다소곳이 합장을 하고는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사바세계의 어지러움을 꾸짖는 침묵이 흐르더니, 연꽃이 한잎한잎 봉오리를 벌리듯 白峰의 여윈 손이 허공을 하늘거렸다. 얽히고설키는 線(선)들 사이로 영겁의 煩惱(번뇌)와 찰나의 頓悟(돈오)가 끊임없이 생멸해 갔다. 손끝을 따라 전후좌우로 바지런히 오가던 시선은 옷깃을 스치며 작고 가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인연의 作法(작법)을 토해 내던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팔순의 노인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집중력을 지닌 白峰. 그녀의 춤에 취해 순서를 놓쳐 버린 제자들에게 「춤에 집중하라」며 다그쳤다.
 
  『「白峰」의 뜻이 무엇입니까』
 
  愚問(우문)이라 생각했지만 이름이 담고 있는 뜻이 궁금했다. 그녀는 유려한 필체로 「白鳥峰子」(백조봉자)를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일본식 이름입니까』라고 되묻자 白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지방공연이 한창이던 어느 날 최승희 선생이 오더니 「무용실력은 출중한데 이름이 소박해 대중들이 너를 잘 기억 못 하는 듯하다. 安漠(안막:월북 무용가 崔承喜 남편) 선생과 고심 끝에 지은 이름이니 다음 공연부터는 이 이름으로 활동해라」고 하는 거야. 그러더니 「白鳥峰子」라고 지어 주시더군. 백조처럼 아름다운 태를 가졌다고 하여 「白鳥」라는 이름과 고향 평양의 牧丹峰(모란봉)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峰」자를 넣어 만들어 주셨지. 일본에서 활동하려면 일본식 이름이 필요하다는 스승의 배려를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본식 이름을 쓰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지. 고민 끝에 崔承喜 선생에게 「백조의 白자와 모란봉의 峰자를 따 白峰이라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
 
 
  부모와의 생이별
 
  白峰은 1927년 2월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포리 기양마을(현재는 강서군 기양읍)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릴 적 이름은 「나라에 충성하고 좋은 결실을 얻으라」는 의미의 金忠實(김충실).
 
  고향 얘기가 나오자 白峰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광복 직후 월남하면서 생이별을 한 부모님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운전사로 일했어. 돈을 조금 모았지. 그 돈으로 운수용 트럭을 마련해 중국을 오가며 수입상을 했어. 아버지는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을 개설해 유학자금을 준비하고 계셨어. 귀가가 늦은 아버지 때문에 집안살림은 죄다 어머니 몫이었지. 어머니는 전형적인 조선여성이었어. 남에게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은 분이셨지』
 
 
  崔承喜의 「보살춤」에 넋을 잃어
 
젊은 시절의 崔承喜(앞줄 오른쪽)와 남편 安漠. 安씨는 일본 유학생이었던 金白峰에게 친동생을 소개시켜, 결혼하게 했다. 최승희와 김백봉은 동서가 됐다. 가운데는 崔承喜의 딸(정병호 교수 제공).
  白峰이 崔承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버지를 통해서였다.
 
  『내가 여섯 살 때야. 한밤중에 아버지가 나를 깨우셨지. 어디서 구했는지 사진 석 장을 들고 오셨어. 崔承喜 사진이었지. 아버지는 「민족의 자랑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남자가 손잡는 그런 기생이 아니야」 하시더군. 아버지가 건네준 사진을 벽에 붙여 놓고 그날부터 뚫어져라 쳐다봤어. 「어떡하면 저렇게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어린 나이에 품기 시작했어』
 
  그날 이후 崔承喜는 白峰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崔承喜 선생은 내게 신앙과 같은 존재였어. 崔承喜와 관련된 모든 것을 수집하기 시작했지. 신문자료며 사진자료를 죄다 모았고, 심지어 친구들이 소장한 자료를 돈 주고 사기도 했어. 아침에 학교 갈 때는 벽에 붙은 崔承喜의 사진을 보며 절을 하고 갔어. 부모님께 한 번도 하지 않은 절을 말이야』
 
  어린 白峰이 무용을 하기로 심지를 굳힌 데는 외삼촌의 죽음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외조모가 아끼던 외삼촌이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외조모는 어린 白峰을 쓰다듬으며 『사람이 농사만 잔뜩 지어 놓고 먹지도 못하고 이렇게 가는 게 얼마나 허무하니? 한 번 사는 인생이라면 이름이라도 남겨 놓아야지』라며 넋두리를 풀어 놓았다고 한다. 그때 白峰은 「보살춤」을 추는 崔承喜의 모습을 떠올렸고, 「무용만이 내가 갈 길」이라고 마음먹었다.
 
  평양사범부속학교 시절, 유일하게 무용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가정수업 시간이었다. 白峰은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간단한 무용동작을 응용해 친구들 앞에서 시범을 보였는데, 친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白峰이 14세 되던 때의 일이다. 崔承喜의 평양공연이 일본경시청의 방해로 무산되자 진남포에서 대신 열렸다. 어린 白峰은 아버지를 졸라 기차를 타고 공연을 보러 갔다.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崔承喜의 춤판은 환상 그 자체였다. 무대에서 춤을 추는 崔承喜의 시선이 오로지 白峰 자신에게만 쏠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특히 보살춤은 白峰의 넋을 사로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金白峰 춤의 기본은 무엇이냐」고 묻곤 하는데 소리든 무용이든 배움에 있어 처음 자신을 감동시킨 공연이 원형이고 기본이지. 그날 본 崔承喜 선생의 공연이 내 춤의 영원한 교과서야』
 
  공연 직후 부친은 신문기자의 도움으로 어린 白峰을 崔承喜 앞에 데려갔다.
 
  『崔承喜 선생에게 무턱대고 「제자가 되고 싶다」고 했어. 현장에서 崔선생은 허락하셨어. 그런데 몇 달이 다 가도록 연락이 안 오는 거야. 결국 나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고 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崔承喜 선생과 연락해 「일본으로 건너오라」는 약속을 받아냈지』
 
 
  스승 崔承喜를 만나러 현해탄 건너
 
金白峰씨.
  어린 나이에 현해탄을 건넌 白峰은 악착같이 崔承喜의 춤을 연마했다. 崔承喜 선생의 수업은 독특했다. 이론적인 부분보다 동작을 중시했던 崔承喜는 『공연현장이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며 제자들을 끊임없이 무대현장으로 내몰았다. 무대의 무희와 관객들이 함께 호흡하며 유기적으로 일체되는 과정을 스스로 터득하도록 했다.
 
  白峰은 열일곱 살 때 일본 제국극장에서 정식으로 데뷔했다. 당시 그녀가 춘 춤은 「현대무용 기본」, 「한국무용 기본」, 「남방무용 기본」, 「초립동」, 「궁녀무」, 「화립무」, 「태평무」 등이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가슴이 벅찼지. 스승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는 그 사실만으로 감격스러웠지만 金白峰이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순간이었거든』
 
  1943년은 그녀가 무용계에 화려하게 데뷔한 해이지만 또한 남편 안제승과 본격적으로 교제한 해이다. 白峰이 안제승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은 安漠·崔承喜 부부의 합작품이었다.
 
  『安漠씨가 나중에 그러더라고. 무용연구소에서 처음 본 순간 弟嫂(제수)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거야. 그래서 일본에 막 건너온 내게 安漠 선생은 자신의 동생을 가정교사로 붙여 준 거야. 난 그 사실을 전혀 몰랐지』
 
  안제승은 白峰이 일본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그때만 해도 결혼은 전혀 꿈꾸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안제승에게 학도병 차출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남동생의 운명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安漠과 崔承喜는 金白峰과 안제승의 결혼을 급하게 추진했고, 1944년 중국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 들러 화촉을 밝혔다.
 
  1945년 8월15일 崔承喜 일행은 중국 공연차 北京(북경)에 체류하고 있었다. 단원들과 휴식을 취하는 중 광복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白峰은 스승이자 동서가 된 崔承喜 일행과 함께 피란선을 타고 인천으로 들어와 고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생활은 白峰이 생각했던 것처럼 순탄치 못했다. 시국이 어지럽고 정세가 불안한 것에 회의를 느낀 白峰은 남편을 설득해 평양을 빠져나와 서울로 내려왔다. 스승 崔承喜에게는 말 한마디 못 하고 야반도주하듯 평양을 떠나온 것이다.
 
 
  홀로서기
 
金白峰이 1954년 창작한 장고춤. 김백봉류 장고춤에는 독무와 두 종류의 群舞(군무)가 있다.
  서울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한 金白峰은 崔承喜를 능가하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녀는 새로운 형태의 춤들을 하나씩 만들어 냈다. 1947년 세상에 선보인 獨舞(독무) 「부채춤」은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白峰은 이후 십수 년을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했다. 그런 金白峰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쳤다. 1972년 뮌헨올림픽 민속예술제 참가를 앞두고 온천에 다녀오던 중 차량이 전복해 얼굴과 늑골 등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교통사고는 그녀의 무용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그녀의 무용이 「동작」에 집중되었던 반면, 교통사고 이후에는 무용의 근원을 찾는 철학적 고민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녀의 재활 노력과 의식의 전환은 「무용」, 「봉산탈춤 무보」 등으로 빛을 발했다.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의지는 상처를 빨리 아물게 했다. 병원에서는 기적이라고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가 살아있나 싶어. 내 춤이 소유와 집착을 버리고 求道(구도)하는 모습을 담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 시련이 또 다른 승리를 낳은 셈이지. 崔承喜 선생에게서 받은 동작과 사고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은 영감이 철학과 합해졌고 내 춤사위가 좀더 진정성을 갖기 시작한 거야』
 
 
  경봉 스님과의 일화
 
1953년 공연된「조국찬가」중에서 선녀춤 장면. 金白峰은 사진 속의 의상과 소품을 직접 제작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白峰은 무용가이기 이전에 삶의 원리와 이치를 깨달은 도인처럼 느껴졌다. 白峰은 경봉 스님과의 일화를 들려줬다.
 
  『공연장에서 우연찮게 경봉 큰스님 일행을 만나게 되었지. 다짜고짜 「金선생은 왜 무용을 하십니까」 하고 물으시는 거야.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나를 쳐다봤어. 궁금했겠지. 「하나가 되기 위해 합니다」 했어. 말 그대로 선문답이지』
 
  경봉 스님은 白峰의 대답에 미소로 답했다고 한다. 白峰은 당시 마음속에 꼭꼭 감춰 둔 나머지 대답을 꺼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작품세계에 들어가면 작품과 하나가 되어야 하며, 道의 세계에 들어가면 道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야. 무용에서 잡념은 가장 큰 적이야. 무용을 하는 동안 무아지경에 빠져야 하는데 많은 제자들이 무용과 하나 되지 못하고 잡념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면 여지없이 날벼락이 떨어지지』
 
  金白峰이 안무를 짠 작품은 수백 편이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때 「아침의 나라」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좋은 날」 역시 白峰의 손을 거쳤다. 특히 서울올림픽 때 1000여 명의 남녀 학생들이 춘 群舞(군무) 「화관무」는 올림픽 공연사의 명장면 중 하나로 손꼽힌다.
 
  白峰은 화관무와 부채춤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화관무는 우리의 전통 춤사위를 바탕으로 해서 창작한 춤으로 많은 사람들이 궁중무용으로 알고 있으나, 실은 의상이 궁중복식과 유사할 뿐 연출방법은 전혀 다른 창작무용이다.
 
  부채춤은 원래 북한에서 발표할 생각으로 만들었으나 서울로 넘어와 발표한 춤이다. 부귀영화와 태평성대를 화려한 동작에 실어 표현한 것인데 金白峰이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무용이다.
 
  화관무와 부채춤은 처음에는 「古典型式(고전형식)」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는데 후에 「화관무」·「부채춤」으로 명명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행사에 반드시 얼굴을 내미는 춤이 부채춤이다.
 
  白峰은 서양무용의 토대 위에 우리 무용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新무용을 개척했다. 우리의 민속춤과 음악은 그녀의 무용에 있어 중요한 소재이자 출발점이다.
 
 
  한국적인 춤사위 「승무」와 「태평무」
 
金白峰은 광복 후 1947년 평양 국립극장에서 처음으로 개인 발표회를 열었다. 당시「고전형식」이란 이름의 발표된 이 작품은 이후 「화관무」로 명칭을 바꿨다. 사진은 1989년도 작품.
  白峰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대구로 피란을 갔을 때 영남의 대표적인 풍류객 朴枝洪(박지홍) 선생에게서 승무를 배웠다. 「영남 살풀이」의 大家(대가)들인 권명화·최희선 같은 제자를 배출한 朴枝洪 선생의 춤을 우연찮게 목격한 白峰은 가장 한국적인 춤사위라는 생각에 그에게서 승무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당시 동대문에서 학원을 하던 화성 才人廳(재인청: 조선 후기 민간 예능인의 연예활동을 관장하던 기구) 출신인 이동안 선생에게 태평무를 배웠다. 그의 춤은 소박하지만 격조가 높았고 剛柔(강유)와 濃淡(농담)이 잘 배합된 춤으로 훗날 白峰의 창작에 많은 영감을 주게 된다.
 
  최근 북한 무용수들이 한국을 빈번하게 왕래, 崔承喜의 춤사위라며 무대에 올려 소개한 적이 있다. 「북한판 崔承喜 춤」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崔承喜의 춤은 확실한데, 동작에 많은 변화가 있어. 崔承喜의 딸인 안성희의 춤처럼 몸동작이 크고 다양한 변화를 주더군. 崔承喜의 춤을 계승한 안성희의 안무로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
 
  崔承喜의 춤을 승계한 안성희는 초기에 전통적인 기법을 많이 중시했으나 후에 이념성을 강조했다. 국내 무용전문가들은 이러한 안성희의 무용이 현재 북한 무용의 주요 골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崔承喜의 춤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白峰의 무용이 더욱 소중하고 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白峰은 한국무용의 외연확장을 위해 무용인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무용은 자신의 영감과 철학과 안목으로 끊임없이 만들어 가는 끝이 없는 길이고, 그래서 그 길엔 정답이 없어. 新무용, 창작무용, 나아가 민속무용의 세계에 완성된 형태의 무용이 있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불과해. 완성된 무용, 정형화된 무용을 고집하는 것은 구름이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우둔한 생각이야. 무용수의 영감과 감정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탄생할 수 있는 게 무용이지』
 
 
  代를 잇는 두 딸
 
  白峰은 우리 무용의 정체성에 대한 무용인들의 인식에 대해서 충고했다.
 
  『우리 무용은 철저히 우리 것을 바탕으로 「우리 것」化한 방식이어야 해. 춤의 藝脈(예맥)이 잘 지켜지려면 우리 것을 어떤 식으로 「우리 것」化할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돼.
 
  오늘날 무용수들의 춤사위를 보면 지나치게 예쁘고 화려한 동작에만 집착해서인지 전통무용이든 현대무용이든 놀이로 전락되어 버린 듯한 느낌을 받아. 우리의 것인지 서양의 것인지 출처가 불분명한 춤은 실험무용으로서 한두 번쯤은 무대에 올릴 수 있겠지만 그것을 「경향」으로 치부해서는 안 돼. 춤은 자기가 좋아서 해야 아름다운 거야』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白峰의 딸인 안병헌씨가 공연 때 입을 무용복을 손수 손질해 가져왔다. 安씨는 현재 서울시립 무용단원으로 있다. 白峰은 마지막 장면을 위해 딸의 부축을 받으며 연습실로 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운명처럼 무용수의 길에 선 자식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운명은 자기가 개척하는 거니까. 다만 여태껏 한 번도 나를 원망해보거나 탓해 본 적 없는 두 딸(안병주·안병헌)과 손녀딸이 고마울 뿐이지. 그들이 무용수로서 그들만의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길 바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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