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 때문에 임진왜란에서 참패하고도 조선말기까지 火器개발 지지부진
趙明濟 前 한국산업기술사연구회장
1931년 경기 부천 출생. 부산大 工大 졸업. 美 노스캐롤라이나工大 대학원 수료. 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원, 한국기계연구소 성능연구부장, 한국동력자원연구소 에너지기기연구부장 역임. 국민훈장 석류장 수훈. 저서 「한국의 에너지동력발달사」 등.
趙明濟 前 한국산업기술사연구회장
1931년 경기 부천 출생. 부산大 工大 졸업. 美 노스캐롤라이나工大 대학원 수료. 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원, 한국기계연구소 성능연구부장, 한국동력자원연구소 에너지기기연구부장 역임. 국민훈장 석류장 수훈. 저서 「한국의 에너지동력발달사」 등.

- 種子島화승총보존회의 철포 試射. 임진왜란 당시 일본 보병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고려 말 이래 우리나라에서는 활발하게 火器(화기)를 개발, 北邊(북변)의 오랑캐와 西南 해안에 출몰했던 倭寇(왜구)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약 2세기 늦게 火器를 개발했지만, 이를 급속도로 발전시켜 이미 乙卯倭變(을묘왜변) 당시에는 조선군을 苦戰(고전)케 했다.
조선에서는 16세기 중·후반 김지가 勝字銃筒이라는 휴대용 화기를 개발했다. 勝字銃筒은 종전의 火砲(화포)에 비해 휴대와 화약 장전에 편리해 여진족이나 왜구들과의 싸움에 많이 이용됐지만, 사격時 銃身(총신)에 금이 가는 경우가 있었다. 勝字銃筒은 鳥銃에 비하면 크게 뒤떨어지는 병기였음에도, 당시 관료들은 勝字銃筒의 성능을 과신했다.
宣祖(선조) 25년(1592) 4월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倭(왜)의 주력부대는 東路(동로)·中路(중로)·西路(서로)로 나누어 서울을 향해 破竹之勢(파죽지세)로 北進(북진)했다.
李鎰(이일)과 申砬(신립)이 병력을 이끌고 나가 맞섰으나, 잇달아 패배하고 말았다. 申砬은 彈琴臺(탄금대)에서 背水陣(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간밤에 내린 비로 기병들의 작전이 용이하지 못했고, 鳥銃 소리에 軍卒(군졸)들은 이미 기가 질려 있었다.
조선군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졌고, 申砬 장군은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결국 임금은 北으로 蒙塵(몽진)길에 올랐고,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20일 만인 1592년 5월3일 서울에 입성했다.

勝字銃筒보다 10배 위력 지닌 鳥銃
도대체 「鳥銃」이 무엇이기에 조선 군졸들이 전쟁터에서 기를 펴지 못했을까? 당시 勝字銃筒과 鳥銃에 대하여 살펴보자. 勝字銃筒은 점화방법이 指火式(지화식: 한 손으로 총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불씨를 藥線(약선) 구멍에 갖다 대어서 화약에 점화시키는 방식)인 데 비해, 조총은 火繩式(화승식: 화승을 S자형 금속기구에 끼워 이를 방아쇠로 당김으로써 화승을 藥線 구멍에 대어 화약을 점화시키는 방식)이었다. 鳥銃의 치사율이나 명중률은 勝字銃筒에 비해 10배나 되었다고 한다. 상대가 기병인 경우 50m 범위에서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나는 새도 능히 맞힐 수 있다」는 뜻에서 「鳥銃」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고, 宣祖는 「천하의 神器(신기)」라고 경탄했다고 한다. 李舜臣(이순신) 장군은 鳥銃을 勝字銃筒을 압도하는 火器로 인식했다.
행주산성 전투는 勝字銃筒과 鳥銃이 맞대결한 대표적인 전투였다. 조선군이 이 전투에서 사용한 화약 병기는 地字(지자)총통, 勝字銃筒, 火車 그리고 震天雷(진천뢰) 등이었다. 왜군은 전체 병력 중에서 20%의 병사가 鳥銃手였는데, 이 전투에 동원된 鳥銃만도 6000정에 달했다.
행주산성 전투에 사용된 조선군의 勝字銃筒 수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수백 정 정도로 추정된다.
지화식 점화방법을 사용하는 勝字銃筒은 화승식인 鳥銃에 비해 명중률이 크게 떨어졌다. 게다가 왜군은 事前에 화승을 불씨 역할을 하는 분말화약에 접속시켜서 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粒狀(입상)의 화약이 發火하여 총알을 멀리 밀어내게 했다. 사정거리가 길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화승식인 鳥銃은 사격하는 동안 두 손으로 화기를 잡을 수 있어서 勝字銃筒에 비해 조준이 정확하고 명중률이 높았다.
행주산성 전투 당시 조선군은 화약이 부족해 크게 고생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서울의 화약고 재고량 2만7000여 근이 난민의 방화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宣祖는 임진왜란 이후 화약병기 조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선조실록」(권 39)을 보면 宣祖는 倭軍이 陸戰(육전)에서 連戰連勝(연전연승)한 것은 火器 사용 때문이며, 조선군의 약점은 火器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데 있다고 보았다.
「선조실록」 권 53, 54, 56에는 왜란 중 鳥銃을 둘러싼 여러 가지 견해와 문제가 기록되어 있다. 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宣祖 26년 2월에 接伴使(접반사) 李德馨(이덕형)과 평안감사 이원식은 戰利品(전리품)인 鳥銃을 본따 鳥銃을 만드는 제조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난색을 표명했다. 같은 해 12월 備邊司(비변사)에서는 鳥銃의 제조법이 교묘하여 세심하고 정교한 기술 없이는 제조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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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쪽은 포르투갈 傳來 철포(가고시마縣 지정문화재), 아래쪽은 傳 八板金兵衛 제작 種子島銃(니시노오모테市 지정문화재). |
鳥銃 생산을 위한 노력
宣祖 27년 3월 비변사는 포수 훈련용 총이 부족하다고 문제제기를 했다. 鳥銃의 수요가 증가하자 훈련도감은 鳥銃 제조를 위해 匠人(장인)을 양성하고 황해도 은율 등지에 鐵店(철점)을 증설해 鐵(철)·銅鐵(동철) 조달에 힘썼다. 그러나 宣祖 29년 은율에서 8개월 동안 제작한 軍器 372점 가운데 鳥銃은 불과 38자루뿐이었다.
銃筒 성능개선 노력은 임진왜란 이후까지 지속됐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쳐들어온 倭將(왜장) 가운데 특이한 사람이 있었는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장수 沙也可(사야가)가 바로 그였다. 평소 仁義의 나라를 동경하던 그는 조선에 상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으로 귀순했다. 그는 『평소 中華(중화)의 문화를 사모했는데 조선에 건너와서 그 자취를 찾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戰功(전공)을 세워 金忠善(김충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다. 그는 조선에 鳥銃과 화약 다루는 기술을 전수했다.
약간의 과장이 있을지 모르나, 그의 존재는 당시로서는 구세주나 다름 없었다고 한다. 1626년 조선땅에 漂着(표착)한 네덜란드人 벨테브레(조선 이름 朴淵)는 훈련도감에서 병기의 제작법과 조정법을 교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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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勝字銃筒 |
오다 노부나가 조총으로 신켄軍 제압
그럼 일본에는 어떻게 조총이 전래되었을까?
1543년 중국으로 향하던 포르투갈 사람이 탄 범선이 일본 규슈(九州) 남방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나타났다. 이 배는 심한 폭풍우로 인하여 항로를 이탈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유럽 사람이 일본에 온 최초의 일이다. 다네가시마의 島主(도주)는 포르투갈 선원들이 가지고 온 小銃의 사용법과 제작법을 집안 사람들에게 배우도록 했다.
1550년에 이르러 교토 인근을 비롯한 일본 곳곳에서는 봉건 영주들 간의 전쟁에서 소총이 사용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성벽을 쌓을 때는 소총을 염두에 두고 방어 시설을 고안한 축성방법이 등장했다. 오사카(大阪)에 인접한 사카이(堺) 등 여러 곳에서 총이 생산됐다.
소총은 많은 다이묘(大名·영주)들이 갖고 싶어 하는 新병기였다. 1562년 구매다(久米田) 전투에서 대량의 소총이 사용되었다. 용맹한 武士들이 소총에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에 잘 알려져 있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연합군은 3000명의 소총부대를 동원해 1만5000명이나 되는 다케다 신켄軍에 大勝(대승)을 거두었다. 다네가시마에 소총이 전래된 지 32년 후 일이다. 소총의 등장은 戰國시대의 전쟁 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고, 30만 자루의 소총이 만들어졌다.
소총 제작에는 銃身이 火力에 견딜 수 있는 강도를 유지하게 하는 것과, 硝石(초석)에서 화약을 만들어 내는 제작기술이 필요하다. 일본에는 소총 재료인 철이 많았고 鍛冶法(단야법)도 발달해 있었다.
소총 제조 관련 匠人집단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하나의 藩(번) 또는 몇 개의 藩 단위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총을 재빠르게 만들 수 있는 제철 기술 못지않게, 새로운 문물에 대한 일본인의 호기심, 그리고 기술을 곧바로 익혀 자기 것으로 소화 흡수하는 능력이다. 지금도 구니모토(國友)에 가면 옛 鍛冶工(단야공)의 후예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동네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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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製 鳥銃 |
無爲로 돌아간 鳥銃 성능개량 노력
이에 비해 조선은 勝字銃筒의 획기적인 성능 提高(제고)를 못 이루고 전쟁을 맞았다. 宣祖 30년(1597) 투항한 倭兵을 鳥銃제조에 참여시킬 것을 상소하자, 宣祖는 『우리에게는 우수한 工人이 있다』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쯤이면 어느 정도 소총 제조에 관한 기술이 확보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1615년 正鐵(정철) 사용과 鑽穴照星(찬혈조성) 등 鳥銃의 製法(제법)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거의 손색없는 새로운 利器로 발전될 수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鳥銃 생산은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갖고 있었다.
첫째, 조선 팔도에 산재한 철 생산지(주조소가 설치되어 있음)에서 鳥銃을 할당량만큼 제조해 냈으나, 통일된 표준공법을 기대할 수 없었다.
둘째, 銃身의 耐久性(내구성)은 銃身이 받는 負荷(부하)의 크기, 화약의 폭발력과 열응력, 총신의 環狀肉厚(환상육후: 총신 외경과 내경 간의 두께) 그리고 주조물의 금속조직 사이의 상관성에 좌우된다. 軍門鐵店(군문철점)에는 각종 器物의 수리·복원 건수가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아 鳥銃의 품질이 상당히 부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셋째, 조준과 명중률인데 이는 照門(조문)·照星(조성)의 설계 등에 좌우된다. 이 부분의 기술이 상당히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火器 제조는 주조법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지만,「火器都監儀軌(화기도감의궤)」나 「五洲衍文長箋散稿(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면 鳥銃 제조에 간혹 단조법이 시도된 흔적이 보인다. 오늘날 남아 있는 鳥銃을 보면 銃身이 상당히 긴데, 이는 조총의 성능 개선을 위한 노력의 결과로 여겨진다.
조선의 火器 개발은 대원군 집정기까지 후진성을 면하지 못했다. 운현궁에서 직접 지휘하여 주조했다는, 병인·신미 洋擾(양요)와 운양호 사건 때 동원된 火砲는 일본의 것에 비교하면 성능이 한참 뒤처져 있다.
「삼국사기」에 百鍊剛(백련강)이라는 말이 나온다. 100번 두들겨서 만든 강철이라는 뜻이다.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冶鐵神(야철신)을 보아도 그 당시 冶鐵 匠人이 사회적으로 우대받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시대에 일본은 백제 王으로부터 鐵鋌(철정)을 하사받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일본으로 전래된 백련강 제조 기술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日本刀 단련에 활용되었다. 이러한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이미 세계 최대의 소총 생산국이 된 데 비해, 조선에서는 古代의 우수했던 제철 기술의 맥이 끊긴 탓에 勝字銃筒이나 왜란 때 전래된 鳥銃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