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世一의 비교 評傳 (52)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嘉興의 피신생활과 歐美委員部의 활동재개

  • : 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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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해,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尹奉吉 의거가 있고 두 주일쯤 지난 5월15, 16일 이틀 동안 杭州에서 臨時政府 國務會議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中國人들이 제공해 준 資金을 두고 金九와 金澈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어 金澈의 조카 金晳의 安昌浩 비방투서 문제로 兩派 사이에 폭력사태까지 벌어졌다.
 
  嘉興에 피신한 金九는 日本警察의 추적을 받고 다시 海鹽으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도 中國警察에 신분이 노출되어 嘉興으로 돌아왔다. 金九는 南湖의 여사공 朱愛寶와 선상생활을 하면서 몸을 숨긴 채 「大連爆彈事件의 眞相」과 「東京炸案의 眞相」을 발표하고, 계속하여 폭열투쟁을 추진하고자 했다.
 
  다시 워싱턴으로 간 李承晩은 歐美委員部 사무소를 이전하고, 美國人들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재개하는 한편, 美國본토에서 지지기반을 확충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뉴욕동지회보」가 창간되었다.
 
  李承晩은 日本의 滿洲侵略을 토의할 國際聯盟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다. 美國政府는 그에게 일찍이 없었던 특이한 外交官旅券을 발급해 주었고, 臨時政府는 趙素昻의 주선으로 全權特使 委任狀을 만들어 보냈다. 李承晩은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뉴욕항을 떠나 유럽으로 갔다.
 
 
  (1) 嘉興피신생활과 南湖의 여사공 朱愛寶
 
 
  황급히 피치(George A. Fitch) 집을 나와서 安恭根과 함께 ?杭線[호항선: 上海와 杭州 사이의 철도] 열차에 오른 金九는 피란처가 마련되어 있는 嘉興(가흥)에 내리지 않고 가흥에서 두 시간쯤 더 떨어져 있는 杭州(항주)로 갔다. 항주에는 피치 집에 같이 피신해 있다가 나흘 전에 먼저 떠난 金澈이 淸泰제2여사에 머물면서 그곳에 임시정부 판공처를 개설하고 있었다. 趙琬九와 趙素昻도 항주에 와 있었다. 金九는 5월14일 늦게 항주에 도착하여 聚英旅舍(취영여사)에 투숙했다.1)
 
 
 
 國務會議에서 論爭 벌어져
 
   5월15일과 16일 이틀 동안 국무회의가 열렸다. 그것은 虹口公園(홍구공원) 폭파사건이 있고 나서 처음 열린 국무회의였다. 가흥으로 피신해 있던 李東寧도 항주로 와서 국무위원 다섯 사람 전원이 참석한 회의였다. 홍구공원 폭파사건은 임시정부의 활로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무위원들은 저마다 심기가 예민해져 있었다. 金九 혼자만 천하의 영웅이 되고 자신들의 신상에는 위험만 들이닥쳐 허둥지둥 상해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홍구공원 폭파계획을 보고한 국무회의에서, 그와 같은 일을 한다면 한국인들, 특히 임시정부 요인들은 상해에 거주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반대했던 조완구와 조소앙의 주장은 적중했던 셈이다.
 
  회의에서는 선후조치와 앞으로의 활동계획 등에 대한 협의가 있은 다음 자금문제와 관련하여 金九와 김철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김철, 조소앙 등은 홍구공원 폭파사건 직후에 중국 쪽에서 임시정부에 지급한 은 5,000달러를 金九가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한편 金九는 김철과 조소앙 및 김철의 조카인 한인청년단 이사장 金晳이 上海市商會가 윤봉길과 安昌浩의 가족에 대한 위로금으로 거두어 준 은 7,000달러를 움켜쥐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金九와 김철 등이 각각 받은 자금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閔弼鎬는 자기가 中國華洋振災委員會 위원장 朱慶欄에게서 1萬元을 받아 金九에게 전했다고 했고,2) 상해시상회가 김철, 조소앙 등에게 전한 돈은 5,000달러였다고 일본군 헌병대에서 진술했다고 한다.3) 논쟁 끝에 金九는 정부의 직책을 사임하겠다고 말하고는 이동녕과 함께 가흥으로 갔다.4)
 
  한편 1932년 5월22일자로 공포된 임시정부의 「公報」 호외에 따르면, 21일에 열린 국무회의는, 각종 중요사항을 결의한 뒤에 국무위원들의 담당 부서를 새로 결정했는데, 내무장 조완구, 외무장 조소앙, 법무장 이동녕은 유임되고, 군무장 김철은 재무장으로, 재무장 金九는 군무장으로 자리가 서로 바뀐 것으로 되어 있다.5) 이러한 조치는 아마도 중국인들이 자기 개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에 제공하는 자금의 관리권이 재무장인 자신에게 있다는 金九의 주장을 배제하기 위하여 김철과 조소앙이 조완구를 설득하여 결정된 것이었을 것이다. 조완구는 이때에 국무회의의 주석이었다.
 
 
 
 嘉興의 補成이 피신처 제공해 줘
 
金九의 피신을 도와 준 嘉興의 실력자 저보성.
  金九와 가까운 임시정부 관계자들의 피신처를 가흥에 마련한 데에는 중국 국민당의 배려가 있었던 것 같다. 金九 일행에게 피신처를 제공해 준 사람은 가흥 명문가의 -補成(저보성)이었다. 저보성은 일찍이 일본에 유학한 뒤에 孫文(손문)을 따라 辛亥革命에 참가했고, 중화민국 초엽에는 중의원 의원, 북벌전쟁 시기에는 절강성 정무위원회 주석대리 등을 역임했고, 이 무렵에는 상해 법정학원 원장이면서 동북의용군 후원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6) 동북의용군 군사후원회는 일본군의 만주침략에 대항하여 싸우는 동북의용군의 경제적 후원을 목적으로 조직된 의연금 모금단체였다. 연설과 선전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저보성은 상당한 자산가였으나 항일운동에 그의 재산을 모두 써버렸을 정도로 반일의식이 강한 인물이었다.7) 저보성에게 金九 일행의 피신을 부탁한 사람은 민국 초기에 중의원 의원, 재정차장 등을 지내고 남경정부의 福建省 정무위원 등을 역임했던 殷汝驪(은여려: 鑄夫)8)였는데, 홍구공원 폭파사건 뒤에 金九는 민필호의 주선으로 은여려를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국민정부의 정무위원과 감찰원 부원장 등을 역임하고 1933년에 江蘇省 정부 주석이 되는 중국 국민당의 실력자 陳果夫(진과부)9)가 부하 蕭錚(소쟁)을 은여려에게 보내어 저보성에게 부탁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쟁은 절강성 보안처장 蕭伯誠(소백성)을 은밀히 만나서 金九를 잘 보호해 줄 것을 부탁했고, 소백성은 〈가슴을 두드리며 안전에 관한 책임을 지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10)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피신해 있는 곳은 秀綸紗廠(수륜사창)이라는 허술한 공장이었다. 수륜사창은 저보성의 아들 ?鳳章(저봉장)이 경영하는 면사공장인데, 세계공황으로 공장 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에 피신처로는 안성맞춤이었다.11) 저봉장은 煙臺해군학교를 졸업하고 제1함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엘리트였다. 1930년에 가흥의 民豊제지공장 공정사로 임명되었고, 1933년에는 항주의 화풍제지공장 공정사를 겸직했다.12) 수륜사창에는 이동녕과 李始榮, 嚴恒燮 가족, 金毅漢(김의한) 가족 등이 먼저 와 있었다.13)
 
 
 
 烟雨樓와 落帆亭의 슬픈 傳說
 
   저보성의 집은 남문 밖에 있었는데 구식 집으로 그다지 크지는 않았으나 사대부 저택의 위엄이 있었다. 저보성은 수양아들 陳桐蓀(진동손: 桐生)의 정자 한 곳을 金九의 숙소로 정해 주었다. 그 정자는 호숫가에 반양식으로 정교하게 지은 건물로서 수륜사창과 마주보는 가까운 곳에 있었고, 경치도 매우 아름다웠다. 이때부터 金九는 본명을 숨기고 변성명을 썼다. 성은 조모의 성을 따서 「張」이라고 하고 이름은 「震球」 또는 「震」이라고 쓰면서, 廣東사람으로 행세했다. 金九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저씨 내외와 그의 아들 저봉장 내외, 그리고 수양아들 진동손 내외뿐이었다. 가장 답답한 것은 언어문제였다. 金九는 중국말이 너무 서툰 데다가 광동말은 상해말과 또 달라서, 벙어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언어문제 한 가지를 빼놓고는, 13년 동안이나 상해 프랑스조계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던 金九에게 가흥생활은 자유스럽고 행복했다. 가흥은 상해와는 사뭇 다른 별천지였다. 金九는 가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가흥에는 산이 없으나 호수가 낙지 발같이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일여덟 살 되는 어린아이라도 다 배를 저을 줄 알았다. 토지가 비옥하여 각종 물산이 풍부하며, 인심과 풍속이 상해와는 딴 세상이다. 상점에 에누리가 없었고, 그 상점에 고객이 무슨 물건을 잊어버리고 놓고 갔다가 며칠 뒤에 가서 찾으면 잘 보관했다가 공손히 내어주는 것은 상해에서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풍속이었다.〉14)
 
金九가 처음 피신해 있던 嘉興의 陳桐蓀의 집.
  金九는 진동손 내외의 안내로 명나라의 壬辰난리 때의 유적지인 南湖의 烟雨樓(연우루)와 서문 밖 三塔 등을 구경했다. 왜구들이 이곳에 침입하여 근처 부녀자들을 잡아다가 절에 가두고 한 승려에게 감시하도록 했는데, 승려는 밤중에 왜구들 몰래 부녀자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이 사실을 안 왜구들이 승려를 살해하여 그 핏자국이 아직도 돌기둥에 나타났다 없어졌다 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고 했다.
 
  동문 밖 10리 되는 곳에 있는 한나라 때의 문신 朱買臣(주매신)의 무덤과 북문 밖에 있는 落帆亭(낙범정)도 구경했다. 낙범정에는 주매신과 그의 아내 최씨부인 사이의 애틋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주매신은 글만 알고 세상일에는 문외한이었다. 하루는 부인 최씨가 그에게 마당에 늘어놓은 보리나락을 잘 보라고 당부하고 농사일을 나갔다. 그런데 최씨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보니까 주매신은 소낙비에 보리나락이 떠내려가는 것도 모르고 글만 읽고 있었다. 최씨는 더 참지 못하고 목수에게 개가하고 말았다. 그 뒤에 주매신은 과거에 급제하여 會稽太守(회계태수)가 되어 돌아오던 길에 도로를 수리하는 여자를 만났다. 자기의 전 아내 최씨였다. 주매신은 최씨를 뒷수레에 태우게 한 다음 관사에 도착하여 불렀다. 그때서야 주매신이 귀하게 된 것을 안 최씨는 다시 아내 되기를 원했다. 주매신은 최씨에게 물 한 동이를 길어와서 땅에 엎질렀다가 다시 퍼 담아 한 동이가 되거든 같이 살자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최씨는 그만 낙범정 앞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었다.
 
金九가 피신해 있으면서 둘러본 嘉興의 명소들. 왼쪽부터 烟雨樓, 三塔, 落帆亭.
 
 
 趙素昻 등 구타하고 가진 돈 뺏어 와
 
  그러나 金九는 유유자적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金九가 가흥에 도착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5월21일자 중국 신문 「時事新報」에 안창호를 비방하는 글이 실렸다. 〈안창호는 이미 비혁명적 경지에 전락한 사람으로서 그가 미국으로부터 돌아온 뒤에 그가 통솔하는 단체에는 많은 친일적 주구가 섞여들고 있다. 4월29일 폭탄사건 당일도 안창호는 그 사실을 모르고 만연히 배회하고 있었으므로 체포된 것이다〉라는 요지의 글이었다.15) 그것은 김철의 조카인 김석이 익명으로 투고한 것이었다. 격분한 金九는 南京에 있는 朴贊翊을 통하여 홍구공원폭파사건 이후로 소원해져 있는 안창호의 측근 李裕弼과 상의했다. 이유필은 항주로 피신했다가 상해로 돌아가서 교민단사무소를 중국지역으로 옮기고 안창호 석방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金九는 안공근과 교민단 의경대원이던 朴昌世, 金東宇, 文逸民을 5월28일에 항주로 보냈다.16) 일설에는 박찬익이 박창세와 李秀峰 등 병인의용대원 5명을 데리고 항주로 갔다고 했다. 이들은 임시정부 판공처에서 김철, 조소앙, 김석 세 사람을 만나서 훌닦아 세우고 구타까지 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돈을 뺏어 왔다. 일본총영사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상해시상회는 윤봉길 가족에게 5,000원, 안창호 가족에게 2,000원을 전하라는 조건으로 7,000원을 제공했었는데, 이날 뺏어 온 돈은 조소앙이 가진 900원, 김석이 가진 100원이었다.17)
 
  금전문제를 둘러싼 이러한 분규는 중국인들의 신망을 잃을 위험이 있었다. 6월 상순에 가흥에서 두 차례 열린 국무회의에서 항주 판공처 습격사건을 심의하기 위하여 한국독립당 이사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6월 하순에 항주시내의 한 소학교에서 열린 회의에는 金九를 포함하여 이동녕·이시영·조소앙·이유필·김철·宋秉祚 등 14명이 참석했다. 한국독립당 이사 전원이 모인 것이었다. 회의는 나흘 동안이나 계속되어 격론이 벌어졌으나 좀처럼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결국 회의는 가해자인 박창세와 김동우를 출석시켜 판공처 습격사건의 전말을 보고하게 한 다음, 박찬익·김두봉·엄항섭 세 사람을 진상조사위원으로 선출하는 것으로 타협하고 해산했다.18)
 
저보성의 가족과 嘉興으로 피신한 臨時政府 가족. 뒷줄 왼쪽부터 陳桐蓀, 한 사람 건너 金懿漢·李東寧·朴贊翊·金九·嚴恒燮·鳳章. 앞줄 왼쪽부터 진동손의 부인, 김의한의 부인 鄭靖和, 閔泳玖의 어머니, 엄항섭의 부인 延薇堂, 저봉장의 부인 주가예.
 
 
 日本總領事館에 日本人情報員 심어 두어
 
  金九는 일본총영사관 경찰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가흥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어느 날 상해로부터 비밀 연락이 왔다. 일본총영사관 경찰이 상해에 金九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抗線(호항선)이나 京?線[경호선: 북경과 상해 사이의 철도] 방면으로 숨었을 것이라면서 정탐꾼을 양 철로 방면으로 파견하여 몰래 정탐하기로 하고, 오늘 아침에 수색대가 항주 방면으로 출발했으니까 만일 金九가 그쪽에 피신해 있거든 근처 정거장에 사람을 보내어 일본 경찰의 거동을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金九는 정거장 부근에 사람을 보내어 몰래 살펴보게 했다. 과연 변장한 일본경찰이 기차에서 내려 눈에 불을 켜고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돌아갔다.19)
 
  일본경찰의 동향에 대한 이러한 정보는 일본총영사관에 근무하는 일본인 관리가 몰래 안공근에게 알려 준 것이었다. 金九가 일본인 관리를 매수하여 일본인들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만큼 金九는 위기상황의 관리에 철저했던 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金九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세상에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일도 있다. 4·29[홍구공원 폭파사건] 이후에 상해의 일본인의 삐라에 「金九만세」라고 인쇄된 것이 배포되었다는데, 실물을 얻어 보지는 못했다. 일본인으로서 우리 금전을 먹고 밀탐하는 자도 몇 명 있었다. 韋惠林(위혜림)군의 알선으로도 몇 명 있었는데, 매우 신용이 있었다.〉20)
 
  상해에서 활동하던 일본 무정부주의자들의 삐라에 「金九만세」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매우 신용이 있게〉 정보를 제공해 준 일본인 관리의 존재와 함께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일본총영사관에 근무하는 복수의 일본인 관리를 안공근에게 정보원으로 알선한 위혜림은 평양 부호의 아들로서 외국유학을 하고 하얼빈에서 러시아은행에 근무했고, 상해에 와서 안공근에게 포섭되었다가 뒤에 무정부주의 운동자가 된 사람이었다.21)
 
 
 
 大連에 보낸 愛國團員들은 日警에 체포돼
 
  金九는 진동손의 별장에 느긋하게 머물면서도 남몰래 초조하게 기다리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大連에 파견해 놓은 한인애국단원들의 거사소식이었다. 金九는 가흥으로 온 뒤에도 프랑스조계 新天祥里20호의 안공근의 집을 통신연락처로 삼아서 대련으로 파견한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崔興植 등은 리튼(Victor A. G. B Lytton)조사단이 5월26일 하오 7시40분에 대련역에 도착할 때에 관동군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 남만주철도 총재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 관동청 장관 야마오카 만노스케(山岡萬之助) 등 만주의 일본 수뇌부가 먼저 와서 기다릴 것이므로, 그 기회를 이용하여 폭살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만일 그 기회를 놓치면 조사단이 대련을 떠나는 5월30일 오전 9시에 거사를 단행할 참이었다. 그러나 5월9일에 중국 안동에서 여단원 金兢鎬가 체포된 데 이어 5월24일 새벽에는 대련에서 최흥식이, 다음날에는 역시 대련에서 柳相根 등 세 사람이 체포되는 바람에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5월 중순에 대련 우체국에서 상해로 보낸 중국식 비밀전문이 단서가 되어 일본경찰에 적발되었던 것이다.22)
 
  일본경찰은 김긍호와 최흥식이 체포된 사실을 숨기고 두 사람을 이용하여 金九의 피신처를 알아내려고 했다. 일본경찰은 두 사람을 시켜 金九에게 거짓편지를 쓰게 했고, 그 사실을 알지 못한 金九는 두 사람이 체포된 뒤인 5월30일에도 최흥식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興植군에게.
 
  그동안 상해는 일대수라장이 되어 출입이 극히 불편하며 교통은 단절되고 상업은 부진이나, 그곳에서라면 영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일화 2백원을 보내 두어 소상업이라도 경영하게 했는데, 아직 돈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분명치 않아 매우 노심초사하고 있네. 상품은 군이 기초를 정하고 통신하든지 군이 와서 가지고 가든지 형편에 좋을 대로 하게. 나는 이번 전쟁하에서 투기영업을 하여 대성공했네. 지금부터는 좀더 대규모의 영업을 경영 중이나 군들에게는 상업의 기초가 정해져야만 큰 신용이 있을 것일세. 무엇이든 생각대로 잘 해 보게. 반드시 신용에 중점을 두지 않으면 안 되네.〉
 
  매우 암시적인 내용이다. 같은 날 金九는 김긍호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4월8일에 보낸 편지는 어제 겨우 받아보았네. 생활상 노고가 많을 줄 짐작하고 백원을 준비했으나 인편이 없어서 못 보내고 있네. 내 몸이 좀 자유스러워지면 보내겠네. 이전의 50원을 받았다면 송금은 어렵지 않네. 상해는 대소란 중으로 홍구에서 대사건이 일어나 10여명이 체포되고 집에는 계집애와 어린애 뿐이라네. 군이 무사한지 근심하고 있네. 애쓰는 김에 끝까지 해주기 바라네. 여비는 충분히 보내겠네. 편지를 가끔 해주게. 그리고 편안하게 보양하고 있기를 기도하네. 나의 이름은 「郭潤」이라고 봉투에 써주게.〉
 
  이처럼 金九는 이때까지도 두 사람이 일본경찰에 체포된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일본경찰은 김긍호로 하여금 5월26일에 金九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게 했고, 金九는 6월4일에 다시 답장을 썼다. 이 편지는 6월11일에 안동에 도착했다.
 
  〈돈도 받지 못하고 고생하여 미안하네. 이곳에서 대풍파가 일어난 뒤로 여기저기 주소를 정하지 않고 방황하고 있네. 편지는 친구가 먼저 보고 나에게 전달되므로 편지에 노골적인 일을 쓰지 않아 도리어 잘됐네. 편지가 내 손에 직접 들어오게 되거든 겁내지 말고 마음껏 써주게. 성의를 알리기 위해 생활비로 매월 20원을 보내는데, 송금이 불편하여 사람을 시켜 한번에 많이 보낼 생각이니 가거든 믿고 받아 주게.〉
 
  그러나 최흥식과 유상근 등이 체포된 사실이 5월31일에 국내 신문에 보도되자 金九는 더는 편지를 쓰지 않았다.23) 일본경찰은 이처럼 金九를 체포하기 위하여 갖은 수단을 동원했던 것이다.
 
 
 
 『氏夫人 모습 활동사진으로 찍어 놓았으면…』
 
  일본경찰이 역주변을 다녀가는 것을 본 金九는 가흥도 안전지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봉장은 金九의 피신문제를 아내 朱佳?(주가예)와 상의한 결과 金九를 海鹽縣(해염현) 성내에 있는 처가집 산당으로 피신시키기로 했다. 주씨네 산당은 해염현에서 서남쪽으로 40여 리 거리에 있었는데, 그곳은 주씨 집안의 피서 별장이었다. 미인인 주가예는 가흥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해염여자소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한 재원으로서, 스물일곱 살에 저봉장의 재취로 시집와서 첫아들을 낳은 지 대여섯 달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24)
 
  金九는 주가예와 동행하여 배를 타고 반나절 걸려서 해염성 내 武原鎭에 있는 朱家花園에 도착했다. 주가화원은 현성 新橋弄 서쪽에 있었는데, 청나라 同治 년간의 진사이며 일찍이 광동 潮州知府를 지낸 주가예의 할아버지 朱丙壽(주병수)의 개인 유원지였다. 화원 안은 담장으로 앞뒤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金九는 주가화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주씨 저택은 해염현 내에서 규모가 가장 광대한데, 나의 숙소는 집 뒤쪽에 있는 양옥 한 곳이었다. 대문 앞에는 돌이 깔려 있고 밖은 호수로서 배들이 오고갔다. 대문 안에 정원이 있고, 다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사무실이 있어서, 그곳에서 집안일을 전담하는 총경리가 매일 주씨댁 생계를 맡아 꾸려 나갔다. 종전에는 4백여 명의 식구들이 한식당에서 식사를 하였으나, 최근에는 식구 대부분이 사·농·공·상의 직업을 따라 흩어졌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개별 취사를 원해서 물품을 분배하여 각각 취사한다고 했다.
 
  건물 구조는 벌집과 같은데, 집집마다 서너 개씩 방이 있고 앞에는 화려한 응접실이 한 칸씩 딸려 있었다. 구식 가옥 뒤쪽에는 2층짜리 양옥 몇 채가 있고, 그 뒤쪽은 화원이며, 화원 뒤쪽은 운동장이었다. 해염의 3대 화원 가운데 주가 화원이 두 번째요, 錢家화원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나는 전가화원도 구경했는데, 화원 설비는 주가화원보다 나았으나 건물 설비는 주가화원만 못했다.〉25)
 
  金九가 錢家화원이라고 한 것은 徐家화원의 착오이고, 가장 큰 화원은 憑家(빙가)화원, 곧 綺園(기원)으로서, 기원은 현재 성급문물보호단위가 되어 있다. 26)
 
  金九는 해염현에 온 다음날 주가예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주씨네 산당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南北湖에서 5, 6리쯤 떨어진 盧里堰(노리언)27)에서 차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오솔길이라서 걸어가거나 가마를 타야 했는데, 두 사람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걷기로 했다. 노리언에서 5, 6리쯤을 걸어서 野鴨嶺(야압령)에 도착했다. 야압령은 관음산과 구기산 사이에 있는 높이 80미터가량 되는 고개였다. 옛날부터 매년 가을과 겨울에 들오리 떼가 몰려와서 깃들었기 때문에 「들오리 고개」라는 뜻의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28) 고갯길을 걷는 주가예의 모습이 金九는 무척이나 안쓰럽고 고마웠다. 그는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저씨 부인은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칠팔월 불볕더위에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산 고개를 넘었다. 저씨 부인의 친정 여자 하인 하나가 내가 먹을 음식과 고기류를 들고 우리를 뒤따랐다. 나는 우리 일행이 이렇게 산을 넘는 모습을 활동사진기로 생생하게 담아 영구 기념품으로 제작하여 만대자손에게 전해 줄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사진기가 없는 당시 형편에서 어찌할 수 있으랴. 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저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치 않으리오. 활동사진은 찍어 두지 못하나 문자로나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쓴다.〉29)
 
  「백범일지」의 이러한 서술은 金九가 자기행동에 대하여 강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 특별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일지」를 집필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14년 동안 주렸던 山水 실컷 즐겨
 
金九가 피신했던 해염의 朱씨네 載靑別莊.
  두 사람은 산마루에 올라 주씨가 지어 놓은 길가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래쪽으로 수백 걸음을 더 걸어가자 산허리에 그윽하고 아담한 양옥집 한 채가 보였다. 집을 지키는 고용인 가족들이 나와서 주가예를 공손하게 맞이했다. 주가예는 고용인에게 친정에서 가지고 온 고기류와 채소와 과일을 건네주면서 金九의 식성은 이러이러하니까 주의하여 모시라고 말하고, 또 등산하면 안내값으로 하루에 3角을 받고, 鷹?頂(응과정)에 가면 4각을 받으라는 등 세세한 사항까지 일러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金九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그날로 해염의 친정집으로 돌아갔다.
 
  金九가 든 산당은 주가예의 숙부 朱贊卿(주찬경)이 1916년에 지은 載靑(재청)별장이었다. 재청별장은 본채 세 칸, 부엌 한 칸, 응접실 한 칸으로 이루어진 남북호의 첫 근대식 별장이었다. 건물은 호수 면보다 10m쯤 높은 곳에 있으며 누런 돌로 쌓은 베란다가 있어서 호수와 산의 경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별장을 짓고 얼마되지 않아서 주찬경은 폐병을 얻어서 이 별장에서 요양했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부인과 함께 별장 서쪽에 묻혔다. 그 뒤로 재청별장은 주찬경 내외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는 祭廳으로 사용되었다.30)
 
  金九는 날마다 묘지기 吳金山을 데리고 산과 바다의 풍경을 구경하러 다녔다. 서른 살이나 되어 보이는 오금산은 그곳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온 순진한 농부로서,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는 부지런한 성격 탓에 별장 주인이 신임하고 있었다.31)
 
  金九는 상해생활 14년 만에 비로소 한가하게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이때의 감상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본국을 떠나 상해에서 생활한 14년 동안, 다른 사람들이 남경·소주·항주의 산천을 즐기고 이야기하는 말도 들었으나, 나는 상해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서지 못해 산천이 몹시 그립던 차에 날마다 산에 오르고 물가에 나가는 취미는 비할 데 없이 유쾌했다. 산 앞으로 바다 위에는 범선과 화륜선이 오가고, 산당의 좌우에 푸른 소나무와 가지가지 紅葉(홍엽)의 어우러진 광경은 떠도는 사람에게 더욱 가을바람이 쓸쓸함을 느끼게 하였다.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날마다 산에 오르고 물구경하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14년 동안 산수에 주렸는데, 10여 일 사이에 실컷 산수를 즐겼다.〉32)
 
 
 
 鷹頂 암자의 화장한 비구니들
 
응과정 정상에 있는 비구니 암자 雲岫庵.
  하루는 묘지기를 따라서 유명한 鷹?頂(응과정)에 올랐다. 응과정은 남북호의 서남쪽에 있는 해발 180미터의 야트막한 봉우리인데, 아흔아홉 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고 매가 그 사이를 날아다닌다고 하여 응과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호수 가운데 긴 둑을 일직선으로 쌓아 호수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남북호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두 호수는 마치 은쟁반 같고 호수 가운데 있는 작은 흙무지는 쟁반 속의 보석처럼 반짝이고, 산 앞으로 멀리 일망무제의 항주만이 내려다보였다.33)
 
  응과정에는 비구니 암자가 있었다. 늙은 비구니 한 사람이 金九를 맞이했다. 묘지기는 그 비구니와 잘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묘지기는 金九를 늙은 비구니에게 소개했다.
 
  『이 손님은 해염현 주씨댁 큰아가씨가 모셔온 분으로서 광동인이고, 약을 드시러 산당에 오셔서 머물고 계십니다. 여기는 구경하러 왔습니다』
 
  늙은 비구니가 金九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미타불. 멀리서 잘 오셨는지요? 아미타불. 내당으로 들어가시지요. 아미타불』
 
  金九는 쉬지 않고 『아미타불』을 외우는 비구니를 따라서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암자의 각 방에는 붉은 입술과 분 바른 얼굴에 승복을 맵시 있게 입고, 목에는 긴 염주를 걸고 손에는 짧은 염주를 쥔 젊은 비구니들이 있었다. 젊은 비구니들이 나와서 고개를 숙이고 추파를 던지는 듯한 인사를 하는 광경을 보자, 金九는 상해의 八仙橋에 있는 하등 창녀촌 野鷄窟(야계굴)을 구경하던 광경이 떠올랐다.34)
 
  이 암자는 송나라 때에 창건된 雲岫庵[운수암: 본명은 雲鷲寺]이고, 金九를 맞이한 늙은 비구니는 운수암의 주지 慈信師太(자신사태)였다. 이때에 자신사태는 환갑 가까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세상물정에 밝고 절을 다스리는 수단이 좋아서 불당에 향불이 꺼질 날이 없었다. 귀빈이 오면 꼭 雪寶샘물로 佛前茶[불상에 올리는 여린 차]를 풀어 대접했다. 설보천은 물맛이 좋고 사철 끊이지 않으며 일년 내내 바닥이 보이도록 맑아서 절에서는 이 샘물로 산에서 나는 차잎을 끓였는데, 맑은 향기가 그윽하여 절간 참배자들과 귀빈들이 그 맛을 칭찬했다고 한다.35)
 
  묘지기는 金九의 시계줄 끝에 작은 지남침이 있는 것을 보고서 말했다.
 
  『뒤쪽 산자락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지남침을 놓으면 금방 바뀌어 指北針(지북침)이 된답니다』
 
  金九는 밥을 먹고 나서 묘지기를 따라가 보았다. 뒤쪽 산자락에 이르러 바위 위에 동전 한 개를 들여놓을 만한 우묵 파인 자리가 있었다. 거기에 지남침을 올려놓자 묘지기 말대로 지북침이 되었다. 이때에 金九가 구경한 것은 남북호 특유의 倒針石(도침석)이었다. 도침석은 응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北睦山(북목산) 꼭대기에 있는 넓고 평평한 돌인데, 나침반으로 움푹한 곳을 누르면 돌 속에 자석이 있어서 바늘이 거꾸로 북쪽을 가리킨다고 한다.36)
 
 
 
 浦의 장구경하다 中國警察의 심문받아
 
金九가 장구경을 갔다가 검문을 당한 浦鎭.
  하루는 묘지기가 해염 성 밖으로 5리쯤 떨어진 해변에 있는 鎭(진)의 장날이라면서 구경가지 않겠느냐고 하기에 金九는 따라나섰다. 둑길을 따라 강을 건너 서문으로 들어가서 남북호 동북쪽에서 가장 큰 마을인 浦(감포)의 장마당에 도착했다. 감포는 네 개의 성문이 있고, 성문은 구름다리를 통해서 성 밖으로 통하도록 되어 있고, 성벽 위에는 포대가 있었다.37) 성 안에는 십자거리가 있었다. 金九는 성 안을 한 바퀴 돌면서 대강 구경했다. 외진 곳에 있는 진이라서 그런지 장꾼은 많지 않았다.
 
  金九는 어떤 국수집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金九의 모습을 본 노동자와 경찰과 여러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金九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경찰은 묘지기를 불러내고, 金九에게도 직접 캐물었다. 金九는 서투른 중국말로 광동상인이라고 대답하고, 벽 너머로 묘지기와 경찰이 주고받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경찰은 金九가 광동사람이 아니라 일본사람이 아니냐고 물었다. 묘지기는 金九는 해염 주씨댁 큰아가씨가 산당에 모셔온 손님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묘지기가 『주씨댁 큰아가씨가 일본인과 동행하겠느냐』고 당당하게 되묻자 경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金九는 묘지기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해염 일대에서의 주씨 집안의 위력을 실감했다.
 
  경찰은 金九를 놓아 준 뒤에도 산당을 몰래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러 날을 감시해도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하자 경찰국장이 직접 해염 주씨댁에 출장 나와서 산당에 머무는 광동인의 정체를 조사했다. 저부인의 부친이 사실대로 말하자 경찰국장은 크게 놀라면서 『그렇다면 힘써 보호하겠다』고 하고는 돌아갔다.
 
  金九는 자신의 신변이 노출되었다고 생각하고 산당을 떠나기로 했다. 며칠 뒤에 金九를 데려가기 위해 안공근과 엄항섭이 진동생과 함께 산당으로 찾아왔다. 金九는 그들과 함께 응과정의 빼어난 경치를 다시 한 번 감상하고, 해염현 성에 들러서 청나라 乾隆(건륭)황제가 남쪽 지방을 순시했을 때에 술을 마셨다는 樓房(누방)을 구경하고 가흥으로 돌아왔다.38)
 
 
 
 여사공 朱愛寶와 船中生活
 
  가흥으로 돌아온 金九는 砂灰橋(사회교)에 있는 엄항섭의 집에 잠시 묵었다가 五龍橋 진동생의 집으로 옮겨 숙식하면서 낮에는 남호에 나가 朱愛寶(주애보)라는 여사공이 젓는 작은 배를 타고 가까운 운하로 다니며 이곳저곳의 농촌을 구경했다. 시골마을에서 닭을 사다가 배 안에서 삶아먹는 맛이 아주 좋았다.39) 남호는 잘 알려진 명승지로서 호수에는 놀잇배들이 많았는데, 그 놀잇배는 여자 사공들이 노를 젓고 다녔다. 손님들은 낮에는 관광을 하고, 밤에는 배 위에서 마작놀이를 하며 음식을 먹고 놀다가 밤이 늦으면 배 안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이들 노젓는 여자들을 船娘(선낭)이라고 했다.40) 주애보도 그런 선낭이었다.
 
  金九는 틈나는 대로 가흥 성 안에 있는 유적지들도 구경했다. 옛날에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된 것으로 유명한 陶朱公(도주공)의 집터라는 鎭明寺도 구경했다. 도주공은 춘추전국 시대에 越나라의 왕 句踐(구천)을 도와 吳나라를 멸망시키고 구천을 천하의 패자로 만든 范?(범려)를 말하는데, 그는 벼슬을 버리고 교통의 중심지인 陶(도)로 가서 큰 부자가 되어 사람들은 그를 도주공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하루는 동문으로 가는 큰길가 광장으로 나가 보았다. 그곳에는 군경의 조련장이 있었다. 군대가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길 가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金九도 사람들 틈에 끼어 훈련광경을 구경했다. 그러자 훈련장에 있던 한 군관이 金九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뛰어와서 『어디서 온 사람이냐』고 물었다. 金九는 『광동사람』이라고 얼른 대답했다. 그러나 그 군관이 바로 광동사람이었다. 곧바로 보안대 본부로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나는 중국인이 아니오. 당신들 단장을 만나게 해주면 본래 신분을 직접 필담으로 설명하겠소』
 
  그러나 단장은 오지 않고 부단장이 얼굴을 내밀었다. 金九는 다시 말했다.
 
  『나는 한국인이오. 상해 홍구공원사건 이후로 상해에 거주하기가 곤란하여 이곳 저봉장의 소개로 오룡교 진동생의 집에 잠시 묵고 있소. 성명은 장진구요』
 
  경찰은 곧바로 남문 저씨 집과 진씨 집에 가서 엄밀한 조사를 한 모양이었다. 네 시간쯤 지나서 진동손이 와서 보증을 서고 난 뒤에야 풀려났다.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저봉장은 金九에게 결혼할 것을 권했다.
 
  『김선생은 마침 홀아비시니까, 나의 친우 중에 과부로 나이 서른 가까이 된 중학교 선생이 있습니다. 만나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얻으시는 것이 김선생의 피신방법인 듯한데, 어떠십니까?』
 
  그러나 金九는 저봉장의 제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중학교 선생이라면 즉각 나의 비밀이 탄로날 터이니 아니되오. 차라리 여사공을 가까이 하여 의탁하면 좋겠소. 주씨[주애보] 같은 일자무식이면 나의 비밀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오』
 
  이때부터 金九는 여자 뱃사공 주애보와 아예 船中生活을 시작했다. 오늘은 남문 호수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강변에서 자며, 낮에는 육지에 올라 돌아다녔다. 주애보는 金九가 정말로 광동사람인 줄로만 알고 정성을 다했다. 이렇게 시작된 관계가 5년 가까이 계속되는 동안 두 사람은 부부나 다름없는 관계가 되었다.41)
 
金九와 피신생활을 함께했던 여사공 朱愛寶와 南湖.
 
  (2)「大連爆彈事件의 眞相」과 「東京炸案의 眞相」 發表
 
 
  대련에서 체포된 최흥식과 김긍호를 이용하여 金九의 소재를 파악하려고 한 공작이 수포로 돌아가자, 일본경찰은 7월 초에 그들이 체포된 사실을 신문에 발표하여 대련사건을 역이용하려고 했다. 金九가 최흥식 등을 보낸 목적이 관동군사령관이나 만철총재 등 만주의 일본고관들의 암살이 아니라 리튼조사단을 암살하려 한 사건으로 신문에 보도하게 한 것이었다. 그동안 金九는 최흥식 등 4명의 단원이 체포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사건의 진상을 공개하는 것이 그들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것을 염려하여 발표를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일본의 역공세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진상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韓人愛國團宣言」으로 大連爆彈事件의 眞相 밝혀
 
  金九는 8월10일에 대련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한인애국단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대련폭탄사건의 진상을 발표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본단은 일찍부터 실행을 중하게 여기고 발언을 피하여 왔다. 그런 까닭으로 이번 대련사건에 대하여도 일체 침묵을 지켰으나, 놈들 간악한 적은 여러 가지로 謠言[요언: 뜬소문]을 만들어 내고 또 본단의 대련폭탄사건은 국제연맹 조사단원을 암살하려는 음모라고 선전하고 있으니, 이는 본단원으로서 용인할 수 없는 바이다.〉
 
  이렇게 전제한 다음 「선언」은 이봉창과 윤봉길 등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간단히 설명하고 일본인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가) 왜적은 본단을 가리켜 싸움하기를 즐긴다 하나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싸우기를 희망할 뿐이고 침략성을 가진 이름 없는 싸움을 바라는 자가 아니다. 우리가 허다한 희생을 돌아보지 않고 끝끝내 폭렬한 행동으로 대항하는 것은 우리 손에는 아무런 무기가 없고 사선으로 쫓기어 난 우리 한국 사람인지라 이 길을 버리고는 또 다른 길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독립이 성공되지 못하는 날까지는 이런 폭렬한 행동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 본단은 왜적 이외에는 어느 나라사람이나 다같이 친우로 대하려 하며 절대로 이들을 해치려 하지 않으니, 이것은 홍구공원사건이 증명하고 있는 바이다.
 
  (다) 최흥식 유상근 두 의사의 사명은 동북을 침략하려는 적수, 즉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 남만철도총재 우치다 고사이, 관동청 장관 야마오카 만노스케 등을 죽이려 함에 있고 결코 국제연맹조사단에 해를 가하자는 것이 아니다.
 
  (라) 우리 한민족은 신성한 민족의 후예이요 본단은 순수한 애국단체이다.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왜놈들과 같은 야만적 방법을 흉내내어 국제문제를 일으키려고 하지 않는다.
 
  (마) 본단은 철저한 구국단체로 오직 견고한 자립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분투할 뿐이요 결코 어느 외국인이나 어느 외국정부를 의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왜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요언을 만들어 이런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놈들 자신의 죄상을 덮어 버리려는 것이다. 기실 일본은 국제연맹조사단에 대하여 外剛內懼(외강내구)의 태도를 가지고 극도로 이들을 혐오 또 기피하고 있으니, 그중에도 현재 정부를 지배하고 있는 군벌들이 더욱 심하다. 놈들은 암암리에 파시스트단에 명하여 조사단을 위협하려 했고, 그중에는 놈들의 사주를 받고 동 조사단에 대하여 암살을 획책한 분자도 있으니, 이에 왜놈의 정부는 몹시 낭패하여 이 죄상을 본단에 전가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7월15일에 도쿄에서는 리튼조사단을 살해할 목적으로 실탄이 장착된 권총을 휴대하고 기회를 노린 자가 체포되기도 했다. 「선언」은 끝으로 리튼조사단에 대하여 한인애국단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국제연맹조사단의 임무는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철저히 조사하고, 본단이 반박하는 왜놈들의 허위선전을 은밀히 조사함에 있으니, 우리로서는 동 조사단에 대하여 한국인의 분함을 직접 호소해 보려 했으나 그 시기가 적절치 못하여 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그대로 멈췄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 조사단이 그들의 임무를 철저히 이행할 때에는 본단의 호소함이 없다 하더라도 한국이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깊이 인식할 것이다. 한국은 동양평화의 관건을 쥐고 있으니 이것은 역사상으로, 지리상으로 다같이 증명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중_일 충돌의 영구한 해결을 희망한다면 한국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없이는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다. 만일 조사단이 이 중요성을 관찰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일세를 놀라게 한 위대한 노력도 결국은 수포에 돌아가고 말 것이다.〉42)
 
  이러한 주장은 리튼조사단의 활동에 대한 한국 독립운동자들의 일반적인 기대가 얼마나 컸던가를 보여 준다.
 
大連으로 파견한 (뒷줄 왼쪽부터) 崔興植, 柳相根 등 한인애국단 동지들과 金九.
 
 
 「東京炸案의 眞相」 발표
 
  9월 들어 이봉창의 공판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다. 구속된 지 8개월 만에 열린 공판이었다. 9월16일에 열린 일본 대심원의 구형공판에서는 이봉창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 9월30일에 열릴 선고공판에서도 사형이 선고될 것이 뻔했다. 金九는 이봉창이 사형되기 전에 도쿄폭탄사건의 전말을 밝히기로 했다. 「虹口公園爆彈事件의 眞相」을 발표하면서도 이봉창사건에 대한 자세한 사실은 다음 기회에 밝히겠다고 말했었다. 도쿄폭탄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중국인들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재미동포들도 사건 당시에는 보도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궁금해 하고 있던 차였다. 金九는 가흥에 같이 있는 엄항섭과 함께 이봉창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글을 작성했다. 이봉창의 선고공판이 있기 이틀 전인 9월28일자로 된 장문의 「東京炸案의 眞相」이 그것이다. 발표명의는 「韓人愛國團團長 金九」로 되어 있다. 「홍구작안의 진상」보다 더 자세한 「동경작안의 진상」은 「발표의 이유」로 시작하여 마지막의 「장엄한 그의 의기」에 이르기까지 12개 항목으로 나누어 자세히 적었다.43) 金九는 발표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늘 성명한 바와 같이 절박한 환경의 필요를 인식하는 특수한 경우를 제한 외에 일정한 시기까지 나는 내 사업에 대하여 절대로 緘默(함묵)하기로 하였다. 그러면 이에 동경작안의 진상을 발표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느냐. 본월 16일에 일본 대심원에서 이의 본안에 대한 제1회 공판이 열리고 그 결과로 이의사가 미구에 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즉 본안의 진상을 영원히 몽롱한 안개 속에 감출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본안에 관련된 언론으로 왜적에게 청도의 (국민당)市黨部가 파괴되고 상해의 「민국일보」가 영구폐간됨으로써 중국 4억만 민중이 그 진상을 알고자 하는 요망이 더욱 큰 까닭이다.〉
 
  「동경작안의 진상」은 이어 거사의 자초지종을 설명한 다음 재판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敵官이 소위 심문을 행하려고 하면 의사는 준엄한 말로 『나는 너희 임금을 상대로 하였거늘 너희 쥐새끼 같은 놈들이 감히 나에게 무례히 하느냐』 하였다. 그러므로 안건발생 후 9개월에도 필경 예심을 행하지 못하고….〉
 
  「동경작안의 진상」은 끝으로 동포들에게 이봉창이 사형되는 날 한 끼 밥을 굶자고 다음과 같이 제의했다.
 
  〈듣건대 적은 본월 말에 이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리라 한다. 이 영광의 죽음! 억만인이 欽仰(흠앙)치 아니할 리 없을 것이다. 그가 비록 단두대상의 한 점 이슬이 될지라도 그의 위대한 정신은 일월로 더불어 천추에 뚜렷이 살아 있을 것이니, 우리는 오히려 愚蠢[우준: 어리석고 굼뜸]한 적을 一笑할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 한인은 그의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남을 기념하기 위하여 적이 그에게 형을 집행하는 날에 전체가 한 끼의 밥을 끊기로 결정하였다. 만천하 혁명동지여! 그날에 우리와 희비를 함께 하자!〉44)
 
  이봉창의 사형은 10월10일에 도쿄 이치가야(市ケ谷)형무소에서 집행되었다. 金九는 「동경작안의 진상」을 이봉창의 사형집행이 있기 하루 전인 10월9일에 중국어 번역문과 함께 중국통신사 상해지부에 우편으로 발송했다. 그리고 10월11일에는 이 글을 발표하여 주기 바란다는 편지를 따로 부쳤다.45)
 
  金九의 편지를 받은 중국통신사는 13일에 중국어 번역문을 여러 부 등사하여 중국어 신문사에 보냈다. 외국어 신문사에는 한 부도 보내지 않았다. 중국통신사는 「동경작안의 진상」을 각 신문사에 보내면서 〈이 성명서는 애국단 단장 김구로부터 최근에 원문 2부를 우송하면서 번역발표를 의뢰하였으므로 이를 번역하여 각 신문사에 보내어 우리 국민들로 하여금 분기케 한다〉는 「中國社附言」을 달아 중국국민들의 항일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동경작안의 진상」은 10월15일자 「申江日報」에 게재되었다. 「申江日報」는 孫文의 아들 孫科가 발행하는 신문이었는데, 이 「中國社附言」까지 함께 실었다. 그러나 「동경작안의 진상」을 게재한 신문은 「申江日報」뿐이었다. 다른 신문들은 이봉창사건이 있고 난 직후에 청도의 「民國日報」가 일본인들의 습격을 받아 파괴되고 뒤이어 상해의 「民國日報」가 총영사의 협박으로 폐간되었던 일을 감안하여 극도로 자제했기 때문이었다.46) 이봉창보다 먼저 일본의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5월25일에 사형이 선고되었던 윤봉길은 11월18일에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로 이송되었다가 12월19일에 가나자와(金澤)에서 총살되었다.47)
 
 
 
 暴烈鬪爭 계속 위해 일할 靑年 찾아
 
  백방으로 金九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던 상해의 일본총영사관은 「동경작안의 진상」이 「申江日報」에 보도되자 여간 긴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이 중국통신사나 「申江日報」의 위작이 아닌가 의심하고 통신사를 찾아가서 원고와 원고를 넣어 부친 봉투까지 조사했다. 金九가 보낸 것이 확실하자 그들은 金九가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동시에 중국인들의 동정에 따른 신변보호와 물질적 원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동경작안의 진상」을 발표한 것이라고 본국정부에 보고했다.48) 그러나 金九의 행적에 대해서는 계속 우왕좌왕했다. 廣東으로 간 것 같다느니, 멀리 南洋으로 피했다는 풍문이 있다느니, 홍콩에 왔다 간 것 같다느니, 남경의 국민당 당사에 나타났다고 한다느니 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49)
 
  한편 金九는 대련폭탄사건이 실패한 뒤에도 폭렬투쟁 계획을 계속해서 추진하고자 했다. 상해에는 여전히 의기가 넘치는 청년투사들이 많았으나 막상 목숨을 내어놓겠다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9월 하순에 안공근을 시켜 상해의 전차차장 감독 劉一平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는 그가 사람을 찾느라고 얼마나 고심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劉君에게.
 
  요즈음 생활곤란이 어떠한가. 요사이 듣건대 버스회사 사변을 그토록 강경하게 진행시키려고 하는 君의 立志에는 무한히 찬성하나, 좀더 큰 사건을 결행하기 바라네. 가족의 생활문제는 고려할 것 없이 일을 하는 데 노력했으면 하네. 금전은 문제가 아니네. 이 편지를 보는 대로 곧 의향을 통지하기 바라네. 白凡〉50)
 
  가족들의 생활은 자신이 책임질 테니까 노동쟁의보다 〈좀더 큰 사건〉을 결행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한 것이다. 그러나 유일평은 金九의 제의에는 응하지 않고 남경으로 가서 한국독립당 남경지부 당원으로 활동했다.51)
 
 
 
 曺奉岩이 共産主義運動 이끌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의 여파로 민족주의운동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활동이 약화되자 상해 한인사회에서는 공산주의운동이 활기를 띠었다. 이 시기의 상해 한인공산주의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중국공산당 상해한인지부 책임비서인 曺奉岩이었다. 조봉암은 1931년 12월3일에 洪南杓, 姜文錫 등과 상해한인반제동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反帝戰線」을 창간하는 등 활발한 선전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조봉암의 동생 曺龍岩도 中國革命互濟會 상해한인분회 책임자로 활동했다.52)
 
  상해의 공산주의운동자들은 5월25일에 援助一架飛機給紅軍委員會를 열고 비행기 한 대를 홍군(중공군)에 원조하기로 결의하고, 「上海工人號」라는 이름까지 정했다.53) 같은 날 이들은 전상해 한교일동 명의로 주상해 프랑스영사 및 프랑스 정부에 한국교민들의 거주권 확보, 혁명가 보호, 한국교민의 무리한 체포 및 가택수색 반대, 프랑스조계 안의 일본경찰의 구축 등을 요구하는 항의문을 발송했다.54)
 
  또한 중국공산당 상해한인지부는 6월10일자로 「붉은기」라는 등사판 잡지 창간호를 발행하고, 같은 날 6·10 운동을 기념하여 「中國勞動群衆」과 「革命的日本兵士兄弟」에게 보내는 격문을 발표했다.55)
 
  상해한인 반제동맹 집행부는 7월1일부터 상해 한인동포들을 상대로 의연금 모금을 시작하면서 〈혁명단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라. 혁명적 민족으로서 의무를 다하라〉라는 격문을 발표했다. 또 같은 날 상해한인 반제동맹, 중국혁명호제회 상해한인분회, 상해한인 소비에트 벗의 모임, 재상해 혁명적 한국부녀 일동의 4개 단체 연서로 준비한 홍기를 홍군에 기증하는 식을 거행한다고 공포했다. 이어 8월1일에는 중국혁명호제회 상해한인분회 등 4개 단체 명의로 〈제국주의자의 반소비에트전쟁은 개시되었다. 모든 투쟁을 소비에트옹호투쟁에 결부시켜라〉는 격문을 발표했다.56) 한인공산주의자들은 8월 말부터는 일본군의 상해재진격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57)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9월28일에 조봉암이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일본경찰과 프랑스공무국 경찰에 체포된 데 이어 주도 인물들이 잇따라 체포됨으로써 크게 약화되었다. 조봉암은 10월10일에 일본경찰에 인도되어 11월27일에 국내로 압송되었다.58)
 
 
 
 民族主義者들은 韓國獨立黨 재정비 나서
 
  중국인들의 관심과 성원이 증대하자 민족주의운동자들 사이에서는 임시정부 초창기와 같은 黨同伐異[당동벌이: 같은 패끼리는 서로 돕고 다른 패는 물리침]가 두드러졌다. 교민단의 정무위원장 이유필은 민단사무소를 중국지역 老西門金家坊112호로 옮기고, 7월8일에 재무부장 崔錫淳, 서무부장 엄항섭, 의경대장 박창세, 간사 이수봉을 새로 임명했다. 엄항섭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이유필그룹의 사람들이었다. 9월20일자로 엄항섭이 사표를 제출하자 후임에 金枓奉이 임명되었다. 이로써 교민단에서 金九의 세력은 완전히 배제되고 이유필그룹 일색이 되었다. 이유필은 기관지 「上海韓聞」을 통하여 자파 선전에 힘쓰는 한편 중국의 항일단체의 지원을 얻어 폭렬투쟁을 전개하려고 했다. 또한 이유필은 10년의 목표기간이 경과했다는 이유로 10월 말에 韓國勞兵會를 해산했다. 노병회는 회비와 그밖의 자금 약 2,000달러를 日夜銀行에 예금해 놓고 있었는데, 은행의 파산으로 회수가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유필그룹은 金九가 홍구공원사건 이후에 거주에 위협을 받고 직장을 떠나 돌아다니는 무고한 동포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원망했다.59)
 
  金九와 김철 및 조소앙 등의 간극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었다. 항주 판공처 습격사건의 진상조사가 흐지부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독립당에서는 金九가 상해로 와서 협력할 것을 요망했다. 그러나 일본경찰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金九가 상해로 간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金九는 한국독립당의 요청에는 응하지 않고, 도리어 한국독립당과 대립적 관계에 있는 韓國革命黨을 편드는 듯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한국혁명당은 임시정부 초창기에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인사들이 1932년 2월에 창당한 단체로서 이사장 尹琦燮, 총무 鄭泰熙, 외교부장 申翼熙, 재정부장 金弘壹 등의 진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무렵 신익희는 남경에서 국민당 중앙당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한국혁명당은 당원이 40명쯤 되었는데, 상해와 남경에 반쯤씩 거주하고 있었다. 金九는 이들도 다시 임시정부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60)
 
  金九가 상해에 오기를 거부하자 한국독립당 이사장 宋秉祚가 金九와 이동녕을 찾아갔다. 송병조는 10월5일에 항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조완구에게 두 사람과의 면담주선을 부탁했고, 조완구는 이튿날 가흥으로 두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어 항주로 오라고 했다. 그러나 金九는 그곳에 없다고 했고, 이동녕은 병이 나서 갈 수 없다면서 면담을 거절했다. 송병조는 10월12일에 크게 분격하여 상해로 돌아왔고, 조완구는 그 사실을 상해로 돌아가 있던 김철에게도 따로 알렸다.
 
  상해로 돌아온 송병조는 이유필·김철·박창세 등 한국독립당 간부들과 회의를 열었다. 金九의 태도에 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金九의 금전문제를 조사하여 발표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金九와 한국독립당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소원해졌다.
 
  문제의 핵심은 金九가 가지고 있는 자금이었다. 일본총영사는 이 무렵 金九가 6만 달러가량의 자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61) 그것은 물론 터무니없이 과장된 액수였을 것이나, 독립운동자들 사이에 그렇게 알려져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金奎植이 와서 對日戰線統一同盟 결성
 
  天津에 있던 金奎植과 만주에서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崔東旿가 10월 상순에 상해에 나타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자들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김규식은 1927년에 천진으로 가서 그곳 北洋大學의 교수로 생활하고 있었고, 최동오는 만주에서 朝鮮革命黨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가 만주사변으로 운신이 어렵게 되어 상해로 온 것이었다. 상해에 도착한 두 사람은 교민단사무소에서 이유필을 만나고, 각지에 설치된 한인교민단을 연합하여 상해에 한교연합회를 조직하고 중국 쪽의 화교연합회와 제휴하에 중·한연합회를 조직하자고 말했다. 이유필은 한교연합회를 새로 조직하는 것보다는 각지에 있는 기성단체를 연결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중·한연합을 도모하는 방안을 제의했다. 후자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서, 10월12일에는 김규식·최동오 두 사람과 한국독립당, 한국혁명당, 조선의열단의 대표들 9명이 民國路 小東門에 있는 東方旅舍에서 모였다. 이들은 각 단체주비위원회를 성립시키고 5명(김규식·김두봉·신익희·최동오·朴建雄)의 주비위원을 선정했다. 주비위원들은 10월23일에 다시 동방여사에 모여 연합회의 명칭을 「對日戰線統一同盟」으로 하고 연합회의 성격을 협의기관으로 할 것 등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0월25일에는 각 단체의 위임장을 가진 대표 9명이 모여 통일동맹을 정식으로 성립시키고, 대회선언과 규약을 기초할 위원들을 선정했다. 이러한 결성 절차를 거쳐서 11월10일에 규약과 선언문을 공포함으로써 통일동맹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62)
 
  통일동맹의 성격은 3개항의 「강령」에 잘 나타나 있다. 규약 제2조에 천명된 통일동맹의 강령은 1) 우리는 혁명의 방법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완성코자 한다. 2) 우리는 혁명역량의 집중과 지도의 통일로써 대일전선의 확대 강화를 기한다. 3) 우리는 필요한 우군과 연결을 기한다는 것이었다.63) 통일동맹은 이러한 「강령」 아래서 중국지역뿐 아니라 국내, 미국본토, 하와이, 러시아령까지 포괄하는 조직체가 될 것을 「결성선언문」을 통하여 발표했다.64)
 
  통일동맹을 주도한 김규식은 동맹이 한인독립운동자들의 통일전선기관이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체로 하여 항일공동투쟁 기운이 고조되고 있는 중국인들과의 연대도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통일동맹결성 작업과 병행하여 상해에 있는 중국인 항일단체인 中華民衆自衛大同盟과의 제휴를 교섭했다. 그 결과 11월14일에 대일전선 통일동맹과 중화민중 자위동맹은 中韓民衆大同盟을 결성했다.65)
 
  민족주의운동의 중심 정당인 한국독립당과 1920년대 후반 이래 상당히 좌경화해 있던 의열단의 주도 아래 결성된 통일동맹은 민족유일당운동에 뒤이은 좌우익 연합의 통일전선운동체라고 할 만했다.66) 그러나 이동녕·이시영·조완구 등 임시정부 옹호파들과, 특히 이제 한국독립운동의 실력자로서 중국과 미주지역에 있는 동포들뿐만 아니라 중국국민당을 비롯한 각계의 중국인들의 기대와 성원을 받게 된 金九가 참여하지 않는 통일운동은 처음부터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다.67)
 
 
 
 議員 9명으로 臨時議政院 會議 열려
 
  11월28일에 항주에서 개회된 제2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는 정원 20명 가운데에서 9명의 의원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의장 이동녕도 참석하지 않아서 부의장 車利錫이 사회를 보았다. 임시의정원법에는 정기회의는 10월 첫째 화요일에 열리게 되어 있었으나 두 달 가까이 연기된 것이었다.
 
  새로운 위기 상황 속에 개회된 정기회의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안은 이동녕의 의장사직청원서 처리문제를 비롯한 몇몇 의원들의 자격심사와 국무위원 선거가 전부였다. 그동안 국무위원들은 전원이 차례로 사표를 제출해 놓고 있었다. 임시정부 판공처 습격사건이 있고 난 직후인 5월30일에는 조소앙이, 가흥에서 국무회의가 열린 뒤인 6월22일에는 이동녕·조완구·김철·金九가 모두 임시의정원 의장 앞으로 사표를 제출해 놓고 있었다. 이날의 의정원회의는 이들 국무위원들의 사표를 처리하기보다는 다섯사람 국무위원들의 임기가 만료된 것으로 간주하고 전원을 새로 선출하기로 했다. 국무위원 수도 9명으로 늘리기로 하여, 이동녕·김구·이유필·윤기섭·차이석·신익희·최동오·송병조·曺成煥을 새 국무위원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이날의 국무위원 선출은 국무위원 임기에 대한 계산 착오로 그 뒤에 무효화되었다. 임시약헌 제33조에는 국무위원의 임기는 3년으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다음해 곧 1933년 11월에 가야 개선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국무위원 선거를 마친 임시의정원 회의는 그날로 폐회했다. 폐회식도 생략했다.68) 회의가 얼마나 황망한 분위기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3) 歐美委員部 이전하고 제네바로
 
 
  李承晩은 1932년 내내 고독한 모색의 시간을 보냈다. 그의 「여행일지」에는 그가 곧잘 하던 강연여행을 했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미국사회 전체가 대공황의 깊은 늪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와이를 떠나온 것은 소송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는 동포사회의 분규에서 벗어나서 만주사변[9·18 전쟁] 이후의 극동사태를 논의할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라는 동지들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으나, 막상 워싱턴에 도착하고 보니까 그전에 해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워싱턴에는 尹致暎이 구미위원부를 지키고 있었다.
 
  李承晩은 워싱턴에 도착한 지 열흘 뒤인 1931년 12월16일에 美 국무부를 방문하여 스팀슨(Henry L. Stimson) 장관에게 보내는 석 장의 긴 편지를 전했다. 이 편지에서 李承晩은 먼저 국내의 2,000만, 시베리아의 200만, 만주의 60만, 하와이의 7,000, 미국본토와 쿠바의 4,500명 동포를 대표하여 청원한다고 전제하고,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그의 견해와 미국정부에 대한 요망을 피력했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함으로써 만주의 풍부한 자원을 손에 넣게 되어 더욱 강대해지고 더욱 침략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므로 세계문명의 적으로 간주해야 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李承晩은 특히 그러한 일본은 미국의 안녕을 위협하게 될 것이므로, 새로운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이 강경한 태도를 취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일본의 계속적인 팽창은 한국의 독립을 더욱 멀리하는 것이고, 또 일본의 만주점령은 만주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심대한 고통을 주고 있으므로, 후버(Herbert C. Hoover) 대통령이 연두교서를 통하여 강력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에게 힘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글에 대해 국무부 극동문제 담당관은 그의 메모에서 〈이 편지는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아직 활동하고 있는 증거이며 또 만주사변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보여 주고 있어서 읽을 가치가 있다〉고 지적했다.69) 극동문제 담당관의 이러한 각서로 미루어 李承晩의 편지는 1932년 1월7일에 발표된 스팀슨의 불인정선언(「스팀슨 독트린」)70)의 작성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개연성이 없지 않다.
 
 
 
 스코필드의 책 출판 위해 出版社 찾아
 
  李承晩이 당장 정리해야 할 일은 구미위원부 사무실 문제였다. 윤치영은 金鉉九가 할부로 구입했다가 은행소유로 넘어간 서북구 파크 로드의 구미위원부 건물인 2층 단독주택에서 나와서 개인 집에서 살고 있었다. 1932년 새해가 되자 李承晩은 1월3일에 뉴욕으로 가서 南宮炎(남궁염) 등 친지들을 만났는데, 그들과 가장 심각하게 상의한 것은 구미위원부 유지문제였을 것이다. 그동안 뉴욕에서 「삼일신보」를 발행하면서 李承晩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許政은 얼마 전에 귀국길에 오르고 없었다.71) 李承晩이 뉴욕에 머무는 동안 李奉昌의 일본천황 저격사건이 일어났고, 사건 이틀 뒤인 1월9일에 라디오방송 연설을 한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月刊朝鮮」 2006년 5월호, 『왜 日本天皇을 안 죽이오』 참조).
 
  2월26일까지 뉴욕에 머물던 李承晩은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길에 뉴저지 주의 캠던(Camden) 시에 들러 해던출판사(Haddon Publishing Co.)를 찾아갔다.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한국명 石虎弼)의 책 출판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스코필드는 1916년에 캐나다 연합장로교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세브란스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李甲成과 가까이 사귀었고, 그리하여 3·1운동 때에는 모의단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사진 기술이 뛰어났던 그는 3·1 운동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찍은 사진을 외국 신문에 보내어 3·1 운동에 대한 세계여론을 환기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1920년 5월에 귀국했는데, 출국할 때에 3·1 운동 관계 사진과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자세히 기록해 놓은 원고를 불편한 다리에 감은 붕대 속에 감추어 가지고 갔다.
 
  그는 그것을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고자 했다. 원고를 검토한 런던의 한 출판사는 내용이 매우 소중한 것이기는 하나 英-日同盟 아래 있는 영국의 출판사로서는 출판할 수 없다고 했다. 스코필드는 생각 끝에 워싱턴에 있는 李承晩을 찾아갔다. 李承晩은 무척 기뻐하면서 그가 아는 뉴욕의 플레밍 리벨(Fleming Revell)사를 소개했다. 그러나 출판사는 출판비 부담을 요구했다. 두 사람은 미국선교회에 상의해 보기로 했다. 선교회는 출판비용 부담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자기네 처지로서는 그런 책을 출판했다가는 앞으로 일본이 선교회가 하는 사업에 대해 어떤 방해를 할지 모른다면서 거절했다. 李承晩과 스코필드는 출판비가 마련되는 대로 플레밍 리벨사에서 출판하기로 하고 원고를 그 회사에 맡겼다. 그러나 끝내 출판하지 못했다.72)
 
  李承晩이 10년이나 지나서 다시 스코필드의 저서 출판문제를 알아보려고 한 것은 일본의 만주점령을 계기로 다시 한번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성과 한국인의 희생을 세계에 고발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李承晩이 해던출판사를 찾아간 것은 그동안 플레밍 리벨사에 맡겨 두었던 스코필드의 원고를 찾아다가 그 출판사에 맡겨 두었거나 구미위원부 또는 다른 친지가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원고는 그 뒤에도 출판되지 못했다.
 
 
 
 歐美委員部 사무실을 이전
 
  워싱턴으로 돌아온 李承晩은 3월7일에 구미위원부 사무실을 노스웨스트 H가 1343번지의 인민생명보험회사 빌딩(People’s Life Insurance Bldg.)의 1010호로 옮겼다.73) 李承晩은 새 구미위원부 사무실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우선 가장 절실했던 문제는 동지식산회사의 납품 불이행으로 말미암아 미국 해군에 물어야 할 손해 배상금 6,016달러를 면제받는 일이었다. 그는 하와이를 떠나오기 전에 하와이 출신 미국 하원의원 휴스턴(Victor Stwart Kaleoaloha Houston)에게 이 문제의 해결을 부탁했었고, 휴스턴은 1931년 12월8일에 동지식산회사 구제를 위한 청원안을 하원에 제출해 놓고 있었다. 이 청원안이 심의되는 동안 李承晩은 미국 해군부와 하원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리하여 미국 해군참모총장 애덤스(C. F. Adams)가 동지식산회사의 사업이 인도주의적인 사업이라면서 배상금을 면제해 주어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고, 마침내 청원안은 1933년 2월8일에 하원, 2월16일에는 상원을 통과하여 3월1일에 후버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진주만 해군과의 계약서 위반에 따른 배상금을 면제받았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月刊朝鮮」 2006년 3월호, 「韓國獨立黨 결성하고 在美同胞들에게 편지」 참조).
 
 
 
 中國問題 다룰 國際聯盟會議에 참석하기로
 
  리튼조사단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중국문제를 다룰 임시총회가 소집되는 등 극동사태에 관한 국제연맹의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李承晩은 국제연맹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이기 위하여 유럽과 제네바를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리튼조사단은 2월29일에 東京에 도착하여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를 비롯한 일본의 각계인사들을 만나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3월14일부터 6월28일까지 上海, 南京, 양자강 연안, 北京, 滿洲 각지를 방문하면서 汪精衛(兆銘)행정원장, 蔣介石 군사위원장 등 중국 각계의 요인들뿐만 아니라 혼조 시게루(本庄繁) 일본 관동군 사령관, 「만주국」 집정 溥儀(부의) 등 광범위한 인사들을 만났다. 조사단은 만주에 머물던 4월29일에 예비보고서를 작성하여 제네바로 보낸 다음, 6월28일에는 한국을 거쳐 동경으로 다시 가서 새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도(齊藤實) 총리 등을 만나고 7월20일 이후에는 북경에 머물면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9월4일에 완성된 보고서는 10월1일에 중국과 일본 및 국제연맹에 교부되고, 이튿날 공표되었다.
 
  18만 단어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리튼보고서」는 먼저 중국이 통일국가의 길을 걷고 있는 점을 논증하고, 만주가 중국의 구성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9월18일의 일본군의 군사행동[만주사변]은 정당방위라고 볼 수 없으므로, 「만주국」은 승인할 수 없다고 판정했다. 그러면서 「보고서」는 중국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만주를 포함한 중국의 문호개방원칙의 유지 및 국제협력에 의한 중국의 통일과 근대화의 촉진이 필요하고, 만주에 자치적 지방정부를 설립하여 이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하며, 이 지역의 유일한 군사력인 헌병대에 의하여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일본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외국인 고문을 자치정부의 정치, 경찰, 재정 및 만주중앙은행의 고문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은 만주를 일본을 주로 한 열강의 국제관리 아래 둠으로써 일본과 다른 열강과의 타협을 꾀하려는 것이었다.74) 이 「리튼보고서」는 12월6일부터 열리는 국제연맹 총회에서 토의될 예정이었으므로 李承晩은 이번 국제연맹 총회야말로 한국의 독립문제에 큰 영향을 줄 중요한 국제회의로 생각했던 것이다.
 
 
 
 美國婦人들과 동굴 구경 가기도
 
  그러나 그보다 앞서 도망치다시피 하여 하와이를 떠나온 李承晩으로서는 미국본토 동포사회에 지지기반을 새로 확충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는 3월29일에 다시 뉴욕으로 가서 두 달 넘게 머물면서 뉴욕 일대의 동포들을 규합하여 동지회 운동을 활성화시키려고 부심했다. 李承晩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동지회 뉴욕지부는 7월16일자로 「뉴욕동지회보」를 창간했다. 「뉴욕동지회보」는 한 달에 두 번씩 발행하기로 했는데, 창간호는 「특별부록」으로 구미위원부 관련 뉴스를 자세히 보도했다.75)
 
  이 무렵의 李承晩의 활동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尹奉吉의 홍구공원 폭파사건 이후에 일본총영사관 경찰과 일본군 헌병들이 프랑스조계에 거류하는 동포들을 마구잡이로 검거하는 사태에 대하여 미국주재 프랑스대사에게 항의편지를 보내어 시정조치를 하도록 요구한 일이었다(「月刊朝鮮」 2006년 6월호, 「虹口公園폭파사건과 金九의 上海탈출」 참조).
 
  홍구공원 폭파사건이 있고 나서 李承晩은 제네바행을 더욱 서둘렀던 것 같다. 그는 徐載弼을 비롯하여 동부 각 지방의 동지들을 찾아다녔다. 이 무렵 尹炳求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앨런타운(Allentown)에서 가까운 뉴저지 주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李承晩은 8월5일에 남궁염과 강왕조와 함께 윤병구를 찾아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윤병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李承晩은 1904년에 처음으로 미국에 와서부터 윤병구와는 변함없이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는 터였다.
 
  李承晩은 마음이 착잡하고 울적할 때에는 미국부인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는 습성도 여전했다. 이 무렵 李承晩은 더지차를 구입하여 직접 몰고 다녔는데, 8월20일에는 스쿨리(Schooley) 부인과 그녀의 아들, 그리고 그녀의 친구 스톤(Stone) 부인과 함께 버지니아 주의 루레이(Luray)에 있는 유명한 동굴을 구경하러 갔다. 그곳은 워싱턴에서 서쪽으로 151km쯤 떨어져 있었는데, 아침 7시30분에 출발하여 저녁 9시30분에 돌아왔다. 귀로에는 블루 리지(Blue Ridge) 산을 넘어 남북전쟁 때의 여러 전적지들을 거쳐서 왔다.76)
 
 
 
 『韓國의 獨立機會는 美·日의 충돌에 있어』
 
  이 시기의 李承晩의 국제정세에 대한 생각은 11월11일자로 발표한 그의 「기회를 이용하자」는 글에 잘 표명되어 있다. 그는 한국의 독립기회는 언제나 미_일의 충돌에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광복사업에 절대한 기회는 언제든지 일_미 충돌에 있다. 다른 나라들은 다 강토의 욕심을 가진 고로 그 야심이 일본이나 다름이 없으되, 오직 미국은 동양에서 상권과 덕의상 세력을 세우는 것이 더 유력할뿐더러 미국이 필리핀을 찾은 뒤로 손해를 많이 본 고로 민심이 원동에 강토를 점령하는 것을 절대로 반대하는 고로, 중국과 만주의 강토를 보호하야 타국이 점령치 못하게 하는 것이 연래로 미국의 일정한 원동정책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 덕의상 응원을 얻는 것이 곧 대세를 순응함이요.…〉
 
  곧 우리가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도덕적 지원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미국의 도덕적 지원을 얻는 것이 다른 나라의 지원을 얻는 것보다 더 유력하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예를 들어 말하건대 아일랜드를 자유국으로 만든 것과 인도국의 비폭력운동이 다 미국인의 공론을 얻어가지고 되는 것이라. 만일 미국인의 공론을 기탄치 않았다면 영국이 아일랜드 사람들과 간디의 운동을 병력으로 진압하기를 거리끼지 않았을 것이며, 국제연맹회도 미국의 덕의상 응원을 얻어가지고야 능히 자체를 보유하는 터이라. 영국이 미국세력이 자라는 것을 시기하야 연래로 친일정책을 지켜왔으나, 그 영지(領地)에서는 절대 친미하는 감상을 가진 고로 미국의 공론을 영국도 무시하지 못하는 내용이라.…〉
 
  李承晩은 이어 이제 미국의 친일주의가 변하고 있고, 미_일의 충돌이 날로 증대하게 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지금은 미국의 친일주의가 변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일_러전쟁 때에 미국이 러시아의 세력을 제일 의려[疑慮: 의심하여 염려함]했는 고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을 후원하야 러시아를 방어하게 하고, 평화시의 중국과 만주독립을 보호하기 위하야 조선을 희생한 것이니, 조선을 일본에 주면 일본은 조그마한 나라이므로 다른 야심이 없어서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미국의 이익이 확장되는 것을 막을 자가 없으리라 한 것이다. 지금 와서는 일본의 육해군 세력이 러시아보다 앞서고 상업상과 정치상으로 중국과 만주를 다 병탄하려는 야심이 드러난 고로 미국의 대등적 강국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라.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일_미의 충돌이 날로 자랄 것은 면치 못할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광복을 위한 큰 기회가 점점 가까워 온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회를 맞아 우리가 할 급선무는 무엇보다 민족합동이라고 李承晩은 강조했다.
 
  〈한국독립은 한족의 합동을 이룬 후에야 찾을 것이요, 합동이 못 되면 독립을 찾지도 못하려니와 찾아도 우리 것이 아니며, 독립은 고사하고 민족의 생존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 여기저기서 남에게 몇십 명, 몇백 명씩 밟혀 죽어도 세상에서 알지도 못할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수십년래로 당하여 온 것이며, 장래도 점점 더 심할지언정 나을 수는 영영 없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李承晩은 앞으로의 구미위원부의 활동방향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구미위원부로 인하야 하려는 것은 말과 글로 미국인의 동정을 얻어서 루스벨트 대통령 적에 불공평한 대우를 받은 억울함과 미국의 친일정책이 실책인 사실과 한족을 덕의상으로 응원하는 것이 미국정책에 도움이 될 것을 차차 깨닫게 하야 비공식, 무형식한 동맹적 연락을 맺는 것이 큰 외교정책이니, 이것이 남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피차에 후원을 얻는 것이다.〉77)
 
 
 
 趙素昻에게 臨時政府特使委任狀 요청
 
  李承晩은 이처럼 구미위원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특사자격으로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고자 했다. 李承晩은 항주로 피신해 있는 趙素昻에게 임시정부의 위임장을 만들어 보내라는 전보를 여러 차례 쳤다. 李承晩이 친 전보 가운데에는 엉뚱한 곳으로 잘못 배달되었다가 몇 달 뒤에야 항주로 전해진 것도 있었다.
 
  국무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고 또 반목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임시정부의 위임장에 국무원 다섯 사람이 한자리에서 서명 날인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소앙은 中文으로 위임장을 작성하여 우편으로 국무원 한사람 한사람의 서명 날인을 받았다. 그렇게 마련한 위임장은 李承晩의 촉박한 일정을 감안하여 워싱턴으로 보내지 않고 프랑스로 보냈다.
 
  조소앙은 위임장을 파리로 보냈다는 사실을 李承晩에게 알리면서, 남경의 국민정부와 교섭하여 제네바에 파견되어 있는 중국대표들에게 李承晩과 협력하도록 훈령하게 하겠다고 말하고, 그러나 현재의 정세로 보아 뜻대로 될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조소앙은 1월 중순에 자기가 직접 남경으로 가서 羅文幹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 보겠다고 말했다. 조소앙은 또 한국의 국제연맹회원국 가입자격이 英聯邦에 속한 자치국으로서 국제연맹에 가입해 있는 아일랜드, 캐나다, 인도와 같은 것이 되기를 임시정부 동료들이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완전독립국이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14년 전의 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문제로 벌어졌던 논란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조소앙의 편지에는 또 〈內地에 유포하는 한 가지 일은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마땅히 적극 선전하여 일체를 돕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대목도 있어서 눈길을 끈다. 李承晩은 조소앙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내에 연락하여 국내동포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고 유지들의 자금지원을 얻도록 힘써 줄 것을 당부했던 것 같다. 조소앙도 경비는 의레 부족할 것이므로 법을 만들어 후원하려고 하나 제대로 될지 모르겠다고 걱정하고 있다.78) 그런데 李承晩은 유럽으로 떠날때까지 조소앙의 이 편지를 받지 못했다.
 
 
 
 하와이 同胞들이 李承晩의 旅費 거두어
 
  李承晩의 유럽여행 경비도 하와이 동포들이 염출해 주었다. 미국본토에 있는 동포들에게는 구미위원부의 활동경비를 지원받고 있었기 때문에 또다시 여행경비 지원을 부탁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李承晩이 떠나온 뒤에 하와이의 동지회 중앙이사부는 安玄卿과 李元淳을 서무대판으로 선정하여 임시정부에 보낼 인구세 수합과 구미위원부 지원을 위한 의연금 수합사업을 벌이고 있었는데,79) 1932년 11월 들어서는 李承晩의 국제연맹회의 참가를 위한 여비를 모금했다. 「新韓民報」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매우 부정적으로 보도했다.
 
  〈「국민보」에 의하면 『근일 호놀룰루 항내에 전하는 말을 들은즉, 리승만씨가 국제연맹회의에 가서 참여하겠다 하야 노비 3천 달러를 거두는 중이라더라』 운운하였으나, 미주에서는 구미위원부를 위하야 돈을 거두는 것이 적확한 사실인즉, 호놀룰루 항에서 전하는 소식은 낭설일 것 같다.〉80)
 
  「新韓民報」의 이러한 기사는 李承晩이 국제연맹회의에 참가한다는 이야기에 대한 반대파들의 반응이 얼마나 냉소적이었는지를 말해 준다.
 
  한편 하와이 교민단은 1931년 10월에 자체조직과는 별도로 부장 鄭斗玉, 서기 金鉉九, 李容稷, 金元容, 재무 車申浩, 교섭위원 韓吉洙 등으로 구성된 선전부(The Korean National Information Bureau)를 설치했었는데,81) 1932년 11월14일에는 정두옥과 김현구의 공동명의로 국제연맹 사무총장 드라몬드(Eric Drummond)에게 한국의 독립과 세계평화를 위해 일본의 불법침략행위를 저지시켜 줄 것을 요망하는 편지를 보냈다.8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李承晩이 제네바로 직접 가서 같은 취지의 운동을 하는 것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유례가 없는 外交官旅券 발급받아
 
  李承晩은 12월12일에 미국 국무부를 방문하여 혼백(Stanley K. Hornbeck)박사를 만났다. 여권발급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위스콘신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중국에 건너가서 항주의 浙江(절강) 대학과 봉천법과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귀국하여 「극동의 현대국제정치(Contemporary Politics in the Far East)」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던 혼백은 파리강화의회, 워싱턴회의 등에서 「전문가」 또는 경제고문 스태프 등으로 활동했다가 1928년에는 국무부 극동국장이라는 요직에 발탁된 사람이었다.83) 李承晩은 이때부터 혼백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이게 된다.
 
  미국 국무부로서는 미국시민권이 없는 李承晩에게 여권을 발급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李承晩은 14년 전에 대한인국민회의 대표자격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미국 국무부에, 그리고 나중에는 대학 은사인 윌슨 대통령에게 여권발급을 간곡하게 부탁했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던 쓰라린 경험이 되새겨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국무부의 태도가 달랐다. 李承晩에게 여권발급에 관한 의견서를 써내라고 했다. 李承晩은 그대로 하고 돌아왔다. 하루인가 이틀 지나서 그 문서가 되돌아왔다. 그런데 문서에는 미국 법무부 장관이 국무부에 李承晩의 여권을 발급해 줄 것을 요망하는 글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서 끝에는 스팀슨 국무장관의 서명이 있었다. 이렇게 하여 그것이 李承晩의 외교관 여권이 되었다. 일찍이 유례가 없었던 이 특이한 여권을 발급하기 전에 혼백은 다른 국무부 스태프들과 함께 상의를 했다고 하는데, 李承晩이 전년 12월16일에 스팀슨에게 보낸 편지가 이들로 하여금 李承晩에게 여권을 발급해 주는 것이 미국정부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하게 했을 것이다.
 
  이 문서는 영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 및 그밖의 나라 공사관과 대사관에 발송되었다. 입국 비자를 받기 위해서였다. 여러 장의 서류 앞뒷면에 각국 영사 담당관들의 스탬프가 찍혔다. 프랑스는 이 무렵에 일부 프랑스 여권 소지자들이 미국 이민국으로부터 입국이 거부되고 있었기 때문에 李承晩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李承晩은 프랑스 비자는 유럽에 가서 기차 안에서 받았다. 李承晩은 이 문서여권으로 여행하는 동안 내내 거의 모든 곳에서 외교관의 예우와 특권을 누리게 된다.84)
 
  李承晩은 드디어 12월23일 오후 5시에 영국의 리버풀로 향하는 「라코니아(S.S. Laconia)」호를 타고 뉴욕항을 떠났다.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이었다. 부두에는 많은 친지들이 나와서 전송해 주었다.85) 쉰여덟의 李承晩은 이제 匹馬單槍[필마단창: 홀로 한 필의 말을 타고 창 하나를 비껴 든 차림]으로 파동치는 국제 정치무대에 뛰어들고 있었다.●
 
 

  1) 國會圖書館,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國會圖書館, 742쪽.
 
  2) 閔弼鎬, 「大韓民國臨時政府와 나」, 金俊燁編, 「石麟閔弼鎬傳」, 1995, 나남출판, 89쪽.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749쪽)에는 金九에게 전해진 돈은 19로군에서 제공한 1만 달러였다고 閔弼鎬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3)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49~750쪽. 4)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Ⅱ」, 1967, 原書房, 499쪽;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44쪽. 5)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號外」(1932.5.2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 헌법·공보」, 2005, 국사편찬위원회, 174쪽. 6) 劉壽林 等編, 「民國職官年表」, 1995, 中華書局, 424쪽; 朱宏達·吳潔敏, 「김구의 남북호 피난기」,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편, 「한국독립운동과 중국」, 1998, 국학자료원, 280~282쪽. 7)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46쪽; 朱宏達·吳潔敏, 앞의 글, 280~282쪽. 8) 「民國職官年表」, 1357쪽. 9) 「民國官職年表」 689쪽, 1392쪽: 朱宏達·吳潔敏, 앞의 글, 266쪽. 10) 같은 글, 283~284쪽. 11) 정정화, 「녹두꽃」, 1987, 未完, 87~88쪽. 12) 朱宏達·吳潔敏, 앞의 글, 280쪽.
 
  13) 정정화, 앞의 책, 87쪽. 14)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344쪽. 15)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臨政篇Ⅲ」, 1973, 探求堂, 552쪽.
 
  16)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499쪽 . 17) 「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臨政篇Ⅲ」, 550쪽. 18)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499쪽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44쪽. 19) 「백범일지」, 346쪽. 20) 위와 같음.
 
  21) 이정식 면담, 김학준 편집해설,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2005, 민음사, 426~427쪽. 22) 「大連炸案之眞相」,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編, 「白凡金九全集(1)」, 1999, 대한매일신보사, 611쪽, 717쪽. 23)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33~735쪽. 24) 「백범일지」, 346~347쪽; 朱宏達·吳潔敏, 앞의 글, 279~280쪽.
 
  25) 「백범일지」, 347쪽. 26) 朱宏達·吳潔敏, 앞의 글, 268쪽. 27) 노리언은 「향리언(向里堰)」을 말한다. 지금은 도로가 나 있어서 중형버스가 직접 통하고 있으나 金九가 넘었을 때에는 한 갈래의 오솔길밖에 없었다(朱宏達·吳潔敏, 앞의 글, 269쪽). 28) 朱宏達·吳潔敏, 앞의 글, 269~270쪽. 29) 「백범일지」, 348쪽. 30) 「백범일지」, 348쪽 ; 朱宏達·吳潔敏, 앞의 글, 271쪽.
 
  31) 朱宏達·吳潔敏, 앞의 글, 283쪽. 32) 「백범일지」, 348~349쪽. 33) 朱宏達·吳潔敏, 앞의 글, 271쪽. 34) 「백범일지」, 349쪽. 35) 朱宏達·吳潔敏, 앞의 글, 274~275쪽. 36) 같은 글, 275~276쪽.
 
  37) 같은 글, 277쪽. 38) 「백범일지」, 350쪽. 39) 위와 같음. 40) 정정화, 「녹두꽃」, 未完, 88쪽.
 
  41) 「백범일지」, 353~354쪽, 362쪽.
 
  42) 「大連爆彈事件의 眞相」, 「白凡金九全集(1)」, 716~721쪽. 43) 홍인근, 「이봉창평전」, 2002, 나남출판, 333~346쪽. 원문에는 제목의 「眞相」이 「眞狀」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이는 착오일 것이다. 44) 金九, 「東京炸案의 眞狀」, 홍인근, 앞의 책, 337~346쪽. 45)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53~754쪽.
 
  46) 위와 같음. 47) 金學俊, 「梅軒 尹奉吉評傳」, 1992, 民音社, 423~428쪽. 48)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53쪽. 49)「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51쪽, 770쪽 ; 「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臨政篇Ⅲ」, 554쪽. 50)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47쪽. 51) 「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臨政篇Ⅲ」, 573쪽. 52) 日本外務省, 「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6)」, 1989, 高麗書林, 758쪽, 776~777쪽. 53) 在上海日本總領事館,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년 5월25일조. 54)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년 5월25일조. 55)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년 6월10일조. 56)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년 6월10일조, 7월1일조, 8월1일조. 57)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년 8월31일조, 9월11일조, 9월12일조.
 
  58) 「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6)」, 769쪽, 774쪽. 59)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44~746쪽. 60)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50~751쪽. 61)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50~751쪽.
 
  62) 「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臨政篇 Ⅲ」, 478쪽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74쪽. 63) 「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臨政篇 Ⅲ」, 474쪽. 64) 韓相禱, 「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과 民族協同戰線運動」, 「尹炳奭敎授華甲紀念 韓國近代史論叢」, 1990, 知識産業社, 922쪽. 65)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 1973, 延世大學校出版部, 27쪽. 66) 韓相禱, 앞의 글, 291쪽 ; 강만길·심지연, 「우사김규식의 생애와 사상 ① 항일독립투쟁과 좌우합작」, 2000, 한울, 100쪽. 67) 李庭植, 「金圭植의 生涯」, 1974, 新丘文化社, 104쪽 참조. 68)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 임시의정원Ⅰ」, 국사편찬위원회, 194~197쪽, 276~277쪽.
 
  69) 방선주, 「1930년대의 재미한인 독립운동」, 「한민족독립운동사(8)」, 1990, 국사편찬위원회, 440~441쪽. 70) Henry L. Stimson, The Far Eastern Crisis, Harper & Brothers, 1936, pp. 91~109. 71) 「新韓民報」 1932년 1월7일자, 「허정씨 귀국하는 길에 등정」. 72) 이장락, 「한국땅에 묻히리라――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 전기」, 1980, 정음사, 139~142쪽. 73) Log Book of S. R. 1932년 3월7일조 ; 방선주, 앞의 글, 43쪽.
 
  74) F. P. Walters, A History of the Leage of Nations, 1952, Oxford University Press. pp. 490~496 및 海野芳郞, 「國際聯盟と日本」, 1977, 原書房, 217~227쪽 참조. 75) 「太平洋週報」 1932년 8월10일자, 「뉴욕동지회보를 정기로 발행」. 76) Log Book of S. R. 1932년 8월30일조.
 
  77) 리승만, 「기회를 이용하자」, 「美洲韓人民族運動資料: 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料(ⅩⅩⅡ) 美國篇 ④」, 1998, 國家報勳處, 304쪽.
 
  78) 「趙素昻이 李承晩에게 보낸 1932년 12월26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十八권) 簡札3」, 1998, 延世大現代韓國學硏究所, 240~241쪽. 79) 「太平洋週報」 1931년 12월19일자, 「중앙부리사회」. 80) 「新韓民報」 1932년 11월17일자, 「하와이 : 리승만박사 유럽여행설」. 81) 鄭斗玉, 「在美韓民族獨立運動實記」, 「한국학연구」(3) 별집, 1991,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81쪽. 82) 洪善杓, 「在美韓族聯合委員會硏究(1941~1945)」, 2002, 한양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2쪽. 83) 細谷千博外編, 「開戰に至る十年 1931~1941(1) 政府首腦と外交機關」, 2000, 東京大學出版會, 142~143쪽. 84) Log Book of S. R. 1932년 12월11일조. 85) Log Book of S. R. 1932년 12월23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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