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주거문화를 바꿨다는, 온 힘을 다해 나라에 충성했다는 자부심 한 조각은 있습니다』
張東雲
1927년 황해도 재령 출생. 육사 8기. 경희大 법대 졸업. 서울大 행정대학원 수료. 대한주택공사 총재(1ㆍ4代), 준장 예편, 공화당 중앙사무차장, 한국원양어업협회장, 서울신문 이사, 원호처장, 고려조선·동원시스템 회장, 자민련 중앙당 후원회장, 陸士 8기 명예회장. 現 세부유통 회장.
張東雲
1927년 황해도 재령 출생. 육사 8기. 경희大 법대 졸업. 서울大 행정대학원 수료. 대한주택공사 총재(1ㆍ4代), 준장 예편, 공화당 중앙사무차장, 한국원양어업협회장, 서울신문 이사, 원호처장, 고려조선·동원시스템 회장, 자민련 중앙당 후원회장, 陸士 8기 명예회장. 現 세부유통 회장.
육사 8기생인 그는 야전공병 중대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死線(사선)을 넘나들었다.
5·16 때는 朴正熙(박정희) 장군의 2군사령부 직할 공병대대장으로 거사에 참여했다. 「혁명 주체」들이 政界(정계)와 官界(관계)로 진출할 때 그는 공병 특기를 살려 대한주택공사 총재로 두 차례 일하면서, 한국인의 주거생활을 바꾸는 자신만의 「혁명」에 나섰다.
서울 한남동 하얏트호텔 인근 이탈리아 레스토랑 「라 쿠치나」에서 張東雲 前 총재를 만났다. 장남이 운영하는 이 레스토랑 2층에 그의 작은 사무실이 있다. 1990년에 문을 연 「라 쿠치나」는 국내 최고 수준의 이탈리아식 레스토랑으로 꼽힌다.
올해 喜壽(희수·77)인 張씨는 낮은 목소리로 『지병으로 최근에 큰 수술을 두 번 받았지만 아직까지 견딜 만하다』며 기억의 밑바닥에서 40여 년 전의 일들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겠다고 목숨을 걸고 쿠데타에 앞장섰던 젊은 군인은, 햇빛을 받고 있는 풀잎 위의 이슬방울처럼 약해 보였다.
그는 日帝시대에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내고, 한국전쟁을 몸으로 치르고, 산업화·근대화를 이끌어 온 대한민국의 「위대한 세대」다. 「칠십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그는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선지 요즈음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대한민국 현대史의 한복판에서 일생을 보냈어요. 피바람이 부는 전쟁터를 누볐고, 군사혁명에 동참했고,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아파트를 건설해서 한국인의 주거문화를 바꾼 일이죠. 미약하지만 내 온 힘을 다해, 나라에 충성했다는 자부심 한 조각은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5·16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하나, 계급은 육군 중령이었다. 군사혁명을 주도한 육사 8기들이 그의 동기생들이다. 그는 2군 사령부 직할 공병대대장으로 대구에 주둔하고 있었다. 5·16 참여는 그의 인생행로를 바꿔 놓았다.
5·16이 일어난 지 두 달 만인 1961년 7월 그는 대한주택공사의 전신인 「대한주택영단」 이사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주택영단은 1962년 「대한주택공사(住公)」로 이름을 바꿨다. 그는 住公 총재로 있다가 1963년 공화당 사무차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5·16 직후 주택공사로 간 계기가 뭐였습니까.
『내 병과가 공병이었잖아요. 거사가 성공한 후 혁명 동지들이 「住公을 맡아 달라」고 해요. 住公이 정치적 파워 측면에서는 약하지만, 당시 혁명정부가 내건 「국가재건」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아주 중요한 자리였어요』
『야, 아파트에 어떤 놈이 살겠냐』![]() |
| 張東雲씨는 1961년 5·16 직후 住公총재로 임명돼 1963년까지 初代 총재로 재직했다. 이후 1968년부터 1970년까지 4代 총재로 다시 住公을 맡았다. |
『계획은 무슨 계획을 세워요(웃음). 국가재건최고회의 주도세력들은 아파트 건설에 대부분 반대했어요. 아파트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육사 동기생 중 한 명이 「야, 아파트에 어떤 놈이 살겠냐」고 그래요. 제가 「임마, 앞으로 젊은 사람들은 전부 아파트에 살 거야. 모르는 소리 하지 마」 했죠』
─비슷한 나이의 육사 동기생들이 생각하지 못한 아파트 건설을 어떻게 생각하게 됐습니까.
『그 친구들이 보지 못한 아파트를 저는 봤으니까요(웃음). 저는 1953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休戰(휴전) 소식을 들었어요. 미군 공병학교 고등군사반에서 교육을 받기 위해 그해 초 미국에 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전쟁 중인 데도 한국군 장교들을 데려가 교육을 했어요. 전쟁이 끝나고 민주국가를 건설하는 데 써먹기 위해서였지요.
어느 날 영어잡지를 읽다가 아파트에 대한 기사를 봤어요. 한 건물에 수십 가구가 사는 아파트 건물들이 거대한 단지를 형성하고 있더라구요. 저는 생전 처음 보는 건물들이었어요. 「야! 우리나라는 앞으로 아파트를 지어야겠다. 땅이 좁으니까 아파트를 지으면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1953년 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았을 때 가졌던 「아파트 건설」 아이디어를 5·16 때까지 가슴속에 품고 계셨던 겁니까.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죠(웃음). 住公 총재로 발령을 받고 나니까 갑자기 그 생각이 났던 겁니다. 참 신기한 우연이죠』
─인터뷰하려고 자료조사를 하다가 일제시대에 서울 충정로에 「유림아파트」라는 것이 있었고, 1958년 서울 종암동에 「종암아파트」, 서대문에 「개명아파트」가 건설됐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住公이 아니었더라도 민간 건설회사가 아파트 건설을 준비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아파트라는 이름을 내건 건물이 있었지만 한 건물에 여러 세대가 사는 다세대주택에 불과했어요. 아파트 한두 채가 아니라 수십 棟(동)의 아파트 단지를 만든다는 건 상상을 못 할 때였어요. 무엇보다 그런 걸 만들 돈이 없었어요. 住公도 마찬가지였구요.
부임하고 보니 직원들이 월급을 제대로 못 받고 있었어요. 「일감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월급만큼은 제대로 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아파트 건설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부임 직후 제 보좌관이던 김희동 대령이 「마포에 있던 마포형무소 채소밭이 매물로 나왔다」고 했어요. 5·16 직후 마포형무소가 안양으로 옮겨졌는데 형무소 부속 채소밭 부지가 나온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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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張東雲씨가 1970년 한강외인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朴正熙 대통령(사진 맨 오른쪽)에게 건설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
人糞 냄새 나는 채소밭에서의 담판![]() |
| 1962년 완공된 최초의 아파트 단지인 마포아파트 전경. |
『법무부가 그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서울市가 공원을 지으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곧바로 법무장관이었던 高元增(고원증)씨에게 연락했지요. 高장관이 「尹泰日(윤태일) 서울시장도 욕심을 내고 있으니, 나는 모르겠다. 두 사람이 알아서 하라」고 해요. 高장관과 尹시장에게 마포 현장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형무소 채소밭에 갔더니 거름으로 人糞(인분)을 온통 뿌려 놓아 냄새가 지독했어요. 채소밭 현장에 나온 尹시장에게 「내가 대한민국 최고의 아파트를 지어볼 테니 당신이 양보하시오」라고 했어요. 인분 냄새가 지독해서인지 尹시장이 선선히 「정말 아파트를 지을 수 있겠느냐. 이왕 시작하는 거 잘 해보라」며 양보를 하더군요』
1961년 10월 착공된 마포아파트 단지 건설공사는 동절기 3개월을 쉬고 1962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朴正熙 혁명정부가 내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중 주택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그때까지 소형 단독주택만을 지어 온 住公에 대형 아파트 단지 건설은 모험이었다. 착공에서 준공까지 많은 일화와 기록을 남겼다.
張총재의 회고다.
『그 당시 「아파트」라고 불리던 다세대주택은 주로 영세민들이 살고 있어서 「빈민굴」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이런 인상을 불식시키려고 10층의 최신식 아파트 단지를 지으려고 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중앙집중식 난방을 하고,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려고 했어요. 40년 전인 1962년에 이런 생각을 했으니, 제가 엄청나게 획기적인 발상을 한 거죠』
그의 계획은 초기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주택 관련 자금을 지원해 주던 미국의 대외원조 기관인 USOM은 「난민 구호주택을 많이 짓는 게 낫다」는 입장이었다. 여론이 들끓었다.
『전기 사정이 나빠 정전이 잦은데 엘리베이터가 뭐냐』,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중앙난방이 뭐냐』, 『마실 물도 귀한데 수세식 화장실이 뭐냐』
「垈地(대지)로 사용하려는 채소밭이 자갈밭의 河床(하상)이어서 홍수가 나면 한강물이 범람해 침수 우려가 크다」는 지적도 있었다. 계획을 수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0층 아파트는 6층으로 낮아지고, 엘리베이터가 사라지고, 기름 사정을 고려해 세대별 연탄보일러 난방으로 변경했다.
1962년 12월 1차연도 물량인 6개동 450호가 건설됐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 날씨로 전체 물량의 10분의 1 정도만 입주가 이뤄졌다. 빈 집이 많다 보니 수도 파이프가 여기저기 동파했다. 排煙(배연)이 잘 되지 않아, 입주자들이 연탄가스 중독을 걱정했다.
모르모트 6마리로 연탄가스 실험『「연탄가스 중독으로 몇 명이 죽었다」는 게 당시 신문 사회면의 중요 기사였어요. 현장소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밤새 아파트 단지를 돌며 입주자들의 상태를 점검했어요. 새벽에 입주자들로부터 「연탄가스가 새어 나오는 것 같다」는 전화가 걸려 와 잠을 잘 수 없었어요. 주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모르모트 여섯 마리를 여러 방에 풀어 놓았는데 가스 중독은 없었어요. 그래도 입주자들의 불안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住公 건축부장 등 간부들이 『죽더라도 내가 생체실험 대상이 되겠다』고 나서서 「가스가 샌다」는 방에 들어가서 잠을 잤어요. 다들 다음날 아침 아무 이상 없이 일어났어요. 연탄가스 문제가 해결되자 입주자들이 빠르게 늘기 시작했습니다. 「明洞 사람들이 마포로 이사 왔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고, 마포아파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유명세를 탔습니다』
─당시 서울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서울시청 인근에 있던 6층짜리 빌딩이었다고 하던데, 마포아파트는 누가 설계했습니까.
『住公 건설이사였던 嚴德紋(엄덕문·87)씨가 설계를 맡았습니다. 嚴이사는 당시 국내 최고의 설계 전문가였습니다. 그 분에게 「10층짜리 아파트 단지를 설계하라」고 하니 깜짝 놀라더군요. 「住公 수준으로는 설계를 못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설계를 못 하면 누가 하느냐, 반드시 설계를 해내라」고 했어요.
이분이 며칠 후 대책을 마련해 왔어요. 각 대학 건축공학·전기공학 교수와 건물구조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설계를 하겠다는 겁니다. 10여 명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들이 밤을 새우며 일을 했습니다』
─住公이 주도해서 마포아파트를 짓지 않았다면, 언제쯤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건설됐을까요.
『아마 10년 후쯤 가능했을 겁니다. 민간 건설회사들은 엄두를 못 내는 상황이었어요. 서울市 아니면 住公에서 아파트를 지었을 텐데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만든다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없었어요. 돈을 조달하기도 쉽지 않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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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직후 대구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시민환영대회. 가운데 꽃다발 들고 있는 사람이 張東雲 2군사령부 공병대대장. |
USOM과의 담판─마포아파트 건설자금은 어떻게 마련했습니까.
『제일 먼저 USOM에 부탁했지요. 주택국장을 맡고 있던 이탈리아계 미국인 낫소氏에게 「국민주택 자금으로 쓸 돈을 내놓으라」고 막무가내로 얘기했어요. 만 30세의 새파란 젊은 장교가 「돈 달라」고 하니, 이 사람도 기가 막혔던 모양입니다. 「국민소득 100달러도 안 되는 한국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10층짜리 아파트 단지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 돈을 못 내놓겠다」고 해요.
제가 「아파트 수명이 50년이 넘는데 50년 후에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이 100달러밖에 안 되겠느냐. 시범적으로 아파트를 짓는 거니까 딴말 말고 돈이나 달라」고 압박을 했죠』
─돈을 내놓던가요.
『그 양반과 여러 번 만나서 실랑이를 했어요. 그런데도 「죽어도 돈을 못 내놓겠다」는 거예요. 할 수 없이 그 문제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상정시켰어요. 건설부 장관이었던 趙性槿(조성근)씨와 최고회의 자금담당이었던 吳定根(오정근)씨에게 자금을 요청했어요.
육사 8기 동기생인 金鍾泌(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도 부탁했지요. 金부장에게 「내가 아파트를 지으려고 하는데 협조해 달라」며 아파트 조감도를 보여 줬더니 「아주 좋다」고 하더군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일본인 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귀속자금으로 마포아파트 자금을 마련했어요. 당시 화폐로 5억원 정도 됐을 겁니다』
마포아파트는 군사정부의 강력한 리더십과 혁명주체들 간의 유기적 협조에 의해 건설이 가능했다. 당시 설계를 주도했던 嚴德紋씨의 증언이다.
張東雲의 협상력과 리더십
『저보다 나이로는 한창 아래인 張東雲씨가 住公 총재로 오자마자 「아파트 단지를 설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한번도 그런 걸 설계해 본 적이 없다. 불가능하다」고 했더니 「어찌됐든 해내라」고 하더군요. 참 난감했어요. 張총재가 구조조정을 위해 住公 직원들을 80% 가까이 퇴직시키는 걸 보고, 대단히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 사람이 하라니 어쩔 수 없었지요. 서울工大 교수들을 주축으로 자문위원을 구성해 일을 해내는 수밖에요. 일을 하다 보니 자문위원들도 신이 났고, 1961년 7월 자문위원을 구성한 지 3개월 만에 설계를 마쳤습니다』
마포아파트 설계 자문위원들은 이듬해 중앙정보부가 주도했던 워커힐 지역 개발사업에 참여했다. 당시 일본으로 휴가를 가는 駐韓미군들이 한국에서 달러를 쓸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 워커힐 주변을 휴양지로 만드는 사업이었다. 嚴씨는 『당시 워커힐호텔에서 남한산성까지 케이블을 설치할 계획이었는데 워커힐 비자금 사건으로 수포로 돌아갔다』고 했다.
嚴德紋씨는 일본 와세다大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국내 건축학계의 원로이다. 그는 마포아파트 외에 남산 외인아파트를 설계했다. 제2정부종합청사, 워커힐 민속관 및 별관, 세종문화회관, 소공동 롯데호텔, 리틀엔젤스 예술회관 등이 그의 작품이다.
嚴씨에게 마포아파트 건설 때의 기술적인 문제점에 대해 물었다.
─마포아파트 부지가 한강변이라 모래가 많았다고 하는데, 아파트를 짓는 데 문제는 없었습니까.
『건물을 짓기 위해 지질조사를 한 게 마포아파트가 최초일 겁니다. 다행히 지반이 괜찮았어요. 나무말뚝을 박아 지반을 더욱 튼튼히 했지요. 소나무는 땅속에서 수분을 흡수하면 수명이 200년 이상 갑니다』
─마포아파트는 Y자형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구조적으로 Y자형이 튼튼하지요. 一字(일자)형은 바람을 많이 받아요. Y자는 강한 바람이 불어도 압력이 분산돼 역학적으로 유리하지요. 요즘은 Y자를 잘 안 쓰는데 건폐율을 높이다 보니 一字형으로 많이 짓지요』
침대생활·입식생활의 출발점![]() |
| 마포아파트를 설계한 嚴德紋 前 한국건축가협회장. |
『문화주택의 시초였어요. 단지 안에 잔디공원과 연못을 조성했고, 건물 배치가 참 좋았어요. 그 당시 자동차가 얼마 없었는데 주차 공간을 마련했지요. 1990년 초 재개발로 해체되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최첨단·최신식 아파트였습니다』
─마포아파트가 가져온 사회·경제적 파급효과는 뭡니까.
『침대생활과 입식생활이 시작됐다는 점이지요. 주택산업의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변기와 싱크대 등 주택 생활산업의 발전을 가져왔지요. 물론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았어요. 수세식 화장실이 대표적이죠. 양변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전통 가옥에서는 화장실을 안방에서 가장 멀리 두잖아요.
양변기 위에 올라가서 볼일을 보는 바람에 양변기가 고장이 많이 났고, 휴지가 귀하던 시절이라 신문지로 뒤처리를 해서 양변기 구멍이 막혀 버리기 일쑤였지요. 또 양변기를 공용으로 사용하다 보니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볼기짝을 맞닿을 수 없다」고 불만을 털어놓는 노인이 많았어요』
마포아파트를 성공시킨 張東雲 총재는 1963년 군사정부가 민간정부로 전환하면서 공화당 사무차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하지만 이듬해 金鍾泌씨와 정치적 견해 차이로 공화당에서 밀려났다.
『金鍾泌씨가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면서 주체세력 간에 알력이 생겼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니었는데 그때는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싸움이 대단했지요』
張東雲씨는 1968년 住公 총재로 되돌아오기까지 한국원양어업협회장, 서울신문 이사 등을 지냈다. 이 무렵 애국선열동상건립위원회 위원장(1966년)으로 있으면서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 李舜臣(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웠다.
그는 1968년 청와대로부터 「住公 총재를 다시 맡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당시 住公은 서민용 주택단지와 외국인(힐탑아파트), 공무원(공무원아파트) 등 특정계층을 위한 아파트를 건설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1970년 한강맨션 完工의 의미![]() |
| 張東雲 前 총재가 1969년 한강맨션아파트 기공식에 참석한 정부 관계자에게 사업전반을 설명하고 있다. |
서울 동부이촌동에 있는 한강맨션(現 한강아파트) 건립이 바로 그것이다. 한강맨션은 중산층用 아파트 건설의 출발점이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아파트 분양제도가 처음 도입됐고, 프리미엄이 붙은 최초의 아파트였다. 모델하우스를 지어 일반인에게 사전 공개했고, 계약금·중도금·입주금을 받아 일반인에게 분양했다.
대지 2만3500평에 5층 건물, 23개동으로 27평형(144호), 32평형(258호), 37평형(198호), 51평형(40호), 55평형(20호), 점포 40호를 건설했다. 총 660가구의 아파트를 건설하는 데 29억7200만원이 들어갔다.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규모의 건설공사였다.
한강맨션 분양이 성공하자 민간 건설회사들이 앞다투어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한강 모래사장 위에 200만원을 들여 32평짜리 모델하우스를 짓고, 800만원을 들여서 신문광고를 했습니다. 1000만원을 들여 시작한 게 한강맨션입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丁一權(정일권)씨가 「張총재, 꼭 봉이 김선달 같구먼. 한강 모래 팔아 돈 버는 것 같아」 라며 농담을 하더군요. 「住公의 공신력으로 집장사를 좀 해야겠습니다」하고 웃어넘겼지요』
─모델하우스를 짓고 분양제도를 도입한 배경이 뭡니까.
『정부에 돈이 없으니 민간자본을 끌어들일 수밖에요. 5·16 혁명 이후 근대화·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중산층이 급격히 증가했어요. 중산층용 아파트가 성공할 사회적 토대가 마련됐다고 봤지요』
일본 신문에 난 주택광고에서 힌트![]() |
| 1970년 완공된 한강맨션은 프리미엄이 붙은 최초의 아파트이다. |
『한국원양어업협회장으로 있으면서 일본을 자주 드나들었어요. 그때 일본 신문을 보면 주택광고가 80% 가까이 차지했어요. 광고를 보고 중산층 아파트를 생각해 냈지요.
住公 총재로 올 당시 수자원개발공사에서 한강변을 매립한 땅을 내놓았는데 安京模(안경모) 사장과 땅값으로 많이 싸웠습니다. 저로서는 싼 값에 구해야 할 판이었으니까요. 安사장이 평당 2만3000원을 달라고 하더군요. 그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어음으로 구입했어요』
―1969년 무렵 일본의 경제력은 한국과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이미 1964년에 올림픽을 치른 일본에서 성공한 아파트 분양이 한국에서도 성공할 걸로 자신하셨습니까.
『일을 벌여 놓고 밤잠을 못 잤죠. 혹시 분양이 안 되면 시공업체들이 다 부도가 날 판이니까요. 분양을 촉진시키려고 住公 직원들에게 2만~3만원씩 활동비를 지급했습니다. 당시 2만원이면 좋은 양복 한 벌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어요. 「한강맨션이 분양되지 않으면 감원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직원들에게 겁을 줬어요. 직급별로 책임분양을 유도했어요. 손님을 데려오는 데 드는 택시비, 점심값 조로 활동비를 지급했습니다』
―효과가 있었나요.
『직원들이 죽기 살기로 뛰니까(웃음). 분양개시하고 두 달쯤 후 분양 신청자가 늘어나기 시작해 몇 달 만에 분양이 완전히 끝났습니다. 나중에는 국회의원들이 분양권을 달라고 청탁을 해와 골치가 아팠어요. 입주할 무렵 프리미엄이 100만원가량 붙었어요』
姜富子씨의 증언![]() |
| 한강맨션 입주 1호인 탤런트 姜富子씨. |
姜씨의 기억이다.
『100만짜리 공무원아파트에 전세로 살다가 1969년에 한강맨션 27평형을 345만원에 구입했어요. 제가 살던 공무원아파트가 한강맨션 건축현장 인근에 있었어요. 우연한 기회에 모델하우스를 보고 마음에 들어 「꼭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때 한강맨션을 두고 「모래사장에 집을 지어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개의치 않았어요. 시공사뿐만 아니라 住公 직원들이 현장에서 합숙을 하는 걸 보고 아파트 품질을 믿게 됐어요.
당시 張총재를 건설현장에서 만났는데 「모래 위에 집을 지어 기적을 이룬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한강맨션에 입주하니까 고은아, 문정숙, 패티김씨가 차례로 이사를 오더군요』
한강맨션은 중앙집중식 난방을 채택한 최초의 아파트다. 당시 시설투자가 과다하고 최신 기술이 필요한 방식이어서 시기상조라는 반대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張총재는 이 문제로 1969년 국회 국정감사장에 불려 나갔다.
국회에 나간 그는 『국내 난방기술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고, 앞으로도 과감히 밀고 나가겠다』는 고집을 접지 않았다. 이때의 경험으로 1972년 반포 1단지 아파트, 1977년 반포 2, 3단지를 건설할 때 순수 국내 기술만으로 난방시설을 설치할 수 있었다.
住公 역사의 산증인인 趙恒九(조항구·73) 前 住公 건설이사는 張총재의 「뚝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분이 처음 住公 총재로 온 후 「아파트를 짓겠다」고 했을 때 「저런 무모한 사람이 다 있나. 완전히 깡패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성공해 내더군요. 한강맨션을 지을 때 「국가기관이 호화로운 아파트를 짓는다」고 말들이 많았어요. 그래도 밀어붙였어요.
그 덕분에 우리나라 건설산업이 탄력을 받아 꽃을 피운 겁니다. 張총재가 추진한 마포아파트, 한강맨션 건설은 「주택건설사업의 경부고속도로」에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張東雲을 만나러 온 鄭周永![]() |
| 육사 8기 출신으로 張東雲 총재와 함께 아파트 건설에 참여한 金明植 前 삼환기업 사장. |
『鄭周永(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이 사무실로 저를 찾아왔어요. 「아파트 사업 그거 돈이 되겠습니까」 합디다. 「무조건 되니까 해보라」고 했지요. 그러더니 鄭사장이 한강맨션 인근에 있던 회사 부지에 아파트를 짓더군요. 鄭사장은 큰 재미를 봤습니다. 그 이후에 삼익주택, 한양, 라이프주택 등이 잇달아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張東雲 총재는 조립식 건물에도 관심을 가졌다. 조립식 건물은 저렴한 가격에 시공 기간을 단축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 8월 일본 大成建設(대성건설)과 합작해 住公의 子회사로 (주)한성프리훼브를 설립했다. 초대 사장에 金明植(김명식·78)씨를 임명했다. 金 前 사장은 張총재와 육사 8기 동기생으로 5·16 혁명 이후 住公에서 함께 일했다. 金씨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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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趙恒九 前 住公건설이사. |
金明植 前 사장은 『한성프리훼브에서 쌓은 기술력 덕분에 우리 기업이 中東(중동)에 진출해 큰 성과를 냈다』고 했다.
『조립식 건축 기술은 中東 시장에 진출할 때 유리하게 작용했어요. 사우디아라비아가 발주한 KKMC라는 프로젝트는 도시 전체를 조립식으로 짓는 대형사업이었어요. 공사비용이 11억 달러에 달했지요. 당시 삼환기업이 건설을 맡았는데 이 회사의 주요 간부와 기술진이 대부분 한성프리훼브 출신이었습니다』
남산 외인아파트 건설朴正熙 정권이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을 펴면서 외국인의 국내 거주가 급격히 늘어났다. 張東雲 총재는 이들을 위해 남산 외인아파트와 한강 외인아파트를 추가로 건설했다.
─당시 외국인 거주 상황은 어땠습니까.
『1960년 후반부터 외국 바이어들이 한국에 많이 몰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서울 시내에 그들이 거주할 곳이 부족했습니다. 이태원과 한남동의 외인주택이 대부분이었어요. 1968년 서울시내 외국인 거주 실태를 조사했더니, 1500세대의 주택이 모자라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朴正熙 대통령에게 「외국인 주거시설을 지어야 하겠다」고 보고했더니 「좋은 생각이다. 실행에 옮겨라」고 하세요. 朴대통령이 지도 위에 한남동 외인주택에서 남산공원부지 쪽으로 줄을 쫙 긋더니 「선 안쪽으로 아파트를 건설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산 외인아파트 2개동 450호를 지었어요』
─남산 외인아파트가 1994년 남산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폭파됐습니다. 당시 심정은 어땠습니까.
『가슴이 많이 아팠지요. 물론 자연경관을 훼손한 측면이 없지 않아요. 하지만 그때 우리의 목표가 뭐였습니까? 먹고살기 위해서는 수출이 최우선이었어요. 우리 물건을 사러 온 외국 바이어들이 편히 쉴 곳이 없었지요. 외인아파트는 그래서 필요했던 겁니다. 시대가 변해 남산 복원사업이다 뭐다 해서 폭파해버렸지만 참으로 안타까워요.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는데. 외인아파트가 해체되자 외국 바이어들은 중국과 홍콩으로 떠났어요. 국가적으로 손해를 본 거예요.
외인아파트를 폭파할 무렵 인왕산·북한산 주변 산기슭에 고층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더군요. 한쪽에서는 복원을 하겠다고 폭파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 짓고 하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졌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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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광화문 사거리의 李舜臣 장군 동상 제막식. 張東雲 前 총재는 1966년 애국선열동상건립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전국 각지에 동상 건립을 추진했다. |
아파트 건설의 춘추전국시대張東雲 前 총재의 대규모 아파트 건설정책이 성공을 거두면서 1970년대 이후 아파트 단지 건설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았다.
1971년 서울市가 여의도에 시범아파트단지(15동 1584가구分) 건설을 추진했다. 시범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민간 건설회사들이 여의도에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만들었다.
1973∼1974년에는 住公의 도곡아파트, 삼익주택의 개나리아파트와 진달래아파트, 한보주택의 은마아파트가 건설되어 대규모 주택단지를 형성했다. 이 무렵 한강 상류에 댐이 건설되면서 하류의 溜水地(유수지)나 고수부지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住公이 1974년 반포 일대에 99개동 3650호의 반포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것을 시작으로, 1976년 10월 한신공영이 이 지역에 126개동 1만1429호를 지었다. 압구정동 유적지에 들어선 현대아파트는 1975~1977년 사이에 23개동 1562호가 세워졌다.
현대아파트 동쪽으로 1978년부터 한양아파트 33개동 2735호가 들어서서 이른바 압구정동 아파트지구를 형성했다. 상습 수해지역이었던 잠실에는 住公이 1976년부터 잠실주공아파트 1, 2, 3, 4단지를 건설했다.
광복 60년이 흐른 현재, 아파트는 산업화·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人의 대표적인 거주양식이 됐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주택 종류 중에서 아파트가 523만 호로 전국에서 제일 많았다. 단독주택이 406만 호, 연립주택은 81만 호, 다세대주택은 45만 호로 그 뒤를 이었다. 서울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아파트가 100만 호에 달해 서울 인구 1000여만 명 중 350여만 명이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집값이 제일 비싼 것도 아파트였다. 건설교통부가 지난 5월2일 발표한 전국 아파트 공시가격을 보면,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아이파크 104평형이 39억 9200만원으로 가장 비쌌다.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 102평형은 31억 6500만원, 서울 압구정동 한양2차아파트 최고 평수는 24억7200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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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張東雲 前 총재가 1970년 한강외인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朴正熙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고 있다. |
金日成 박해 피해 월남張東雲씨는 황해도 載寧(재령)이 고향이다. 이곳에는 北에서 보기 드문 넓은 경작지(재령평야)가 있다. 백산리·장담 저수지가 있어 물이 풍부해 쌀 생산지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나는 北栗無砂米(북률무사미)는 조선시대 왕실 進上米(진상미)로 알려져 있다.
張씨 집안은 고향에서 富農(부농)에 속했다. 그러나 金日成 정권이 들어서면서 地主(지주)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
『고향에 땅이 조금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지요. 그 덕에 광복 후 서울에 혼자 내려와 중앙고등학교에 다녔어요. 그런데 金日成이 실권을 잡으면서 우리 집안을 地主라고 괴롭히기 시작하더군요. 그 무렵 방학 때 고향에 갔는데 이북 순사들과 한바탕 싸우는 일이 벌어졌어요.
경찰서 유치장에서 일주일 동안 고생했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분통이 터져 죽겠더군요. 「이 빨갱이 놈들 가만 안 놔두겠다」는 생각에 陸士(육사)에 지원했지요. 金日成이한테 全재산을 빼앗긴 다음에 어머니를 모시고 월남했습니다』
―아버지는 월남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돌아가셨지요. 아버지 산소가 고향 뒷산에 있어요. 요즘 들어 고향 생각이 더 나요.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그는 『고향이 있어도 갈 수 없는 실향민의 아픔을 달래 주는 기사를 많이 써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육군사관학교는 언제 입학했습니까.
『1948년 중앙고등학교 2학년 말에 육사 8기생으로 들어갔어요. 실제 나이로는 입학이 불가능했지요. 그래서 원래 나이보다 세 살을 더 올렸어요. 당시 이북에서 온 사람들은 호적을 다시 만들었거든요. 동기생들보다 두세 살 어린 셈입니다』
육사 8기는 죽음을 초월한 사람들─임관은 언제 했습니까.
『1949년 5월 少尉(소위) 계급장을 달았어요. 육사 8기생 수는 이전 기수에 비해 많은 1350명이었어요. 建國(건국) 직후라 당시 軍에 장교가 턱 없이 모자랐고 명령계통이 엉망이었지요. 우리 동기생들이 각 사단에 배치되면서 軍기강이 확립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 3월 중위로 진급한 지 석 달 만에 6·25가 터졌죠. 육사 8기생은 소대장·중대장으로 최전방에 나가 싸웠어요. 소모품이었지요. 동기생 450명이 戰死(전사)했습니다. 부상자까지 합치면 훨씬 많아요』
─전쟁 당시 어디서 싸웠습니까.
『소위 때 1사단 13연대 소대장을 했는데 공병대대가 창설되면서 제 휘하 소대 전체가 공병대로 전과됐어요. 전쟁이 터지면서 동해안 야전공병단 중대장으로 배속받았지요.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하는 함경북도 백암이라는 곳까지 진격해 갔어요. 北進했다가 다시 후퇴해 내려오곤 했지요』
─부상당하지는 않았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면 반드시 죽거나 다치지요. 그냥 싸웠습니다. 육사 8기생들은 죽음을 초월한 사람들입니다. 그 때문에 5·16 혁명이 성공했는지 모르지요』
─전쟁 이후 軍생활을 어디서 했습니까.
『6사단 공병대대장으로 몇 년 근무한 후 전후방 인사교류 때 대구 208공병대대장으로 발령 났어요. 2군 사령부 직할대대였지요. 대구지역에서 전투병력을 갖고 있는 지휘관은 저뿐이었지요. 당시 朴正熙 장군이 2군 부사령관으로 있었고, 李周一(이주일) 장군이 참모장이었습니다』
─5·16의 핵심이었던 朴正熙, 李周一 장군 휘하에 있으면서 5·16에 참여하게 됐군요.
『대구에 있는 2군 사령부를 점령하기 위해 내가 필요했던 모양이에요. 1961년 초 어느 날 朴基錫(박기석) 당시 2군 공병부장(대령)이 「점심 먹자」고 해서 나갔더니 朴正熙 장군의 뜻을 전달하더군요.
이후 朴正熙 부사령관과 李周一 참모장을 만나 구체적인 계획을 들었지요. 내가 전투병력을 갖고 있다 보니 대구시내에 있는 2군 사령관, 경찰서, 도청, 도지사 관사, 경찰국장 관사, 방송국 등을 장악하는 게 모두 내 몫이었어요. 내 병력으로는 그 임무를 수행하기엔 역부족이라서 머리를 짜냈지요.
당시 대구공항 비행장 공사를 위해 육군본부 직할공병대대 2개 대대가 대구에 내려와 있었어요. 「이 친구들을 포섭해야겠다」고 작정했지요. 다행히 대대장 한 명이 8기 동기생 任光燮(임광섭)이었고, 다른 한 명은 軍후배인 육사 9기 김진국이었어요. 1개 공병대대 병력이 700~800명 정도니까 내 병력까지 합치면 2000여 명이 됐어요. 5관구 공병부장이던 서상린씨도 포섭했지요. 혁명 당일 全병력을 지휘해 대구 시내를 완전 장악하는 데 성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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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張東雲 당시 원호처장(가운데)이 베트남을 방문해 李世鎬 駐베트남 한국군 사령관(오른쪽)과 鄭得萬 駐베트남 맹호사단장(왼쪽)으로부터 戰況을 전해듣고 있다. |
『정치란 국민이 잘 살도록 해주는 것』─부인이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실패하면 반란죄로 죽을 수 있었는데요.
『말을 안 했지요. 혁명이 일어나는 5월 말에 첫아이 출산을 앞두고 있었어요. 혁명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집사람이 눈치를 챘어요. 내 호주머니에 들어 있던 병력 이동 메모지를 본 거예요. 말이 없더군요. 死地(사지)로 향하는 길이라도 남편이 하는 일이라면 그냥 말 없이 따라오는 사람이에요. 고마울 따름이지』
―쿠데타가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습니까.
『성공할 거라 생각했어요. 전쟁 이후 자유당을 거치고 張勉(장면)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회 전체가 불안했잖아요. 나라를 걱정하던 대부분의 장교들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혁명은 사회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기에 성공할 수밖에 없었지요』
張東雲씨는 住公을 그만둔 직후 3년간 원호처장(現 국가보훈처)으로 재직했다.
『원호처장으로 있으면서 베트남에도 다녀왔고, 못 볼 일도 많이 봤지요.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을 치르면서 상이군경이 많이 생겼어요. 그들은 보상을 요구하며 나를 많이 괴롭혔어요. 사무실에 들어와 뱀을 풀어 놓기도 했고, 義手(의수)와 義足(의족)을 던지기도 했죠. 그들에게 「나도 전쟁에 참여했다. 당신들만 참여한 것이 아니다. 지원이 충분히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달래는 게 일이었어요』
─원호처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는데 이후에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다른 중앙부처에서 일하라는 제의가 들어왔는데 민간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 공직을 떠났어요. 일반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어요』
現 정권에 하고 싶은 말張東雲 前 총재는 1980년대 新군부가 들어선 후 수모를 겪었다. 사회정화 바람이 불면서 보안사는 「前 정권에서 비리를 저질렀다」며 그를 조사했다. 그러나 그에게서 비위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다.
『저는 軍생활을 어렵게 했어요. 나 하나 잘 살자고 파렴치한 행동을 하지 않았어요. 5·16 혁명세력들은 사회정의감이 강했어요. 지난 정권과 비교해 보세요』
그는 『요즘 들어 억울한 생각이 많이 든다』며 『現 정권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정권을 잡은 이른바 386세대들은 지난 세대의 功(공)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같아요. 우리는 愛國(애국)한다는 생각으로 일했어요. 정치라는 게 뭡니까. 국민이 잘살도록 해주는 것 아닌가요.
요즘 청와대 있는 사람들은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는 데 참여해 본 사람들이 거의 없잖아요. 우리는 生死(생사)를 초월해서 일을 추진했어요. 그런 우리의 마음을 이 정권 사람들은 알아야 해요. 더 이상 대한민국을 망쳐서는 안 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