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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泰完이 만난 사람] 金榮泰

아름다움에 미쳐 詩와 춤, 음악, 그림에 빠진 영원한 보헤미안

김태완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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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榮泰 시인
1936년 서울 출생. 홍익大 서양화과 졸업. 1959년 「사상계」를 통해 등단, 「草芥手帖」, 「여울목 비오리」, 「결혼식과 장례식」 등의 시집과 산문집, 음악·무용 평론집, 인물소묘집 등 56권의 책을 냈다. 현대문학상, 시인협회상, 서울신문사 제정 예술평론상, 허행초상 등 수상. 동아무용 콩쿠르·유니버설 키로프 발레 콩쿠르·서울 국제무용제 심사위원과 무용평론가회 회장 역임.
草芥訥人
  「全方位 딜레탕트」, 「大시민주의자와 小시민주의자 사이에 끼여 있던 無시민주의자」, 「문단의 마지막 남은 보헤미안」, 「예술동네의 시민이자 超俗주의자」
 
  시인 金榮泰(김영태·71)에게 붙여진 수식어는 셀 수 없이 많다. 다소 시니컬해 보이고 병약해 보이는 얼굴에 줄담배, 162cm 작은 체구의 그는 자신만의 세계와 美學(미학)에 빠져 살아왔다. 스스로 「황량했던 세상에서 조금 비켜 서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고약한 항암치료 탓에 빠져 버린 머리를 감추기 위해 벙거지를 꾹 눌러쓴다. 밥 먹을 때와 잠잘 때를 빼고는 모자를 벗는 법이 없다.
 
  아호는 草芥訥人(초개눌인). 「지푸라기처럼 하찮고 어눌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란 뜻이란다. 자신을 한껏 낮춘다는 의미다. 하지만 평생을 보헤미안처럼 살았으면서 자신을 「지푸라기」라고 부르니 역설적이다. 봄바람이 몹시 불던 지난 4월24일 오전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그를 만났다.
 
  『정식 호는 아닌데 편지 쓸 때 제 이름 석 자 그냥 써서 보내는 게 쑥스러워서 지었습니다. 草芥가 「지푸라기」라는 뜻 아닙니까. 편지 꼬리에 「草芥 拜(배)」라고 쓰다가 요즘은 두 자가 더 늘었어요. 訥人이라고 「어눌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보헤미안처럼 화려하게 살지도 못했습니다. 욕심이 많아 여러 장르를 넘나들었을 뿐입니다. 음악도 하고, 미술도 하고…』
 
  그는 어느덧 古稀(고희)를 넘겼다. 『나는 칠 벗겨진 사람이지만 주어진 운명을 색칠하다 간 「칠장이」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칠장이 인생은 홍익大 서양화과(57학번)에 입학하면서 「꼬이기」 시작했지만 유전적 기질을 타고났다.
 
  『아버지가 원래 화가였어요. 그러니 예술에 대한 기본기는 물려받은 것이지요. 대학 시절 弘大 주변은 그냥 논밭이었어요. 와우산을 넘거나 당인리로 가는 버스 유리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 닭들과 함께 실려 다녔습니다. 당인리 농가 닭들은 거세당한 파리넬리처럼 울곤 했어요. 비가 오면 장화를 신지 않고선 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金鍾和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그는 이 시대 마지막 보헤미안이다(사진 최영모).
  그의 아버지 金鍾和(김종화)는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武野美術大學)을 수료한 뒤 서울 양정高 미술교사로 잠시 재직했지만 그림을 업으로 삼진 않았다고 한다. 집안 형편이 넉넉해서 유년 시절 그는 서울 필운동 99칸 한옥에서 자랐다. 조부는 말죽거리 일대(지금의 서울 서초구 양재동) 땅을 소유한 지주였고, 자신의 이름을 딴 「김인기 포목점」이 종로통의 멋쟁이들을 불러 모았다.
 
  『하지만 조부와 달리 아버지는 장사나 理財(이재)에는 취미가 없으셨어요. 대신 「문예춘추」 등을 구독하며 읽으셨고 SP 음반을 구해 듣거나 장독대에 분칠해 말린 백구두를 신고 우미관으로 영화를 보러 가시는 게 일과였습니다』
 
  金榮泰가 詩·음악·무용·미술 등 다방면에 독특한 개성적인 성과를 낸 배경에는 핏속에 흐르는 끼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름 뒤에 붙은 꼬리표가 많지만 아무래도 詩가 본업입니다. 中 2, 3 때부터 詩를 썼어요. 美大 가기 전 불문과에 가려다 방향을 틀었어요. 불문과를 갔더라면, 지금쯤 대학교 선생 노릇을 하거나 번역일을 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서양화를 전공한 것이 제 삶에 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해요』
 
  그는 美大 2학년 때 논산훈련소에서 뒹굴다가 등단 소식을 듣게 된다. 1959년 「사상계」 9월호를 통해서다. 시인 朴南秀(박남수·1918~1994) 선생이 그를 추천했다.
 
  『학창 시절 詩人이 되고 싶었어요. 당시 김광균 시집 「와사등」이나 정지용 시집 「백록담」을 읽은 후부터입니다. 어려운 한자가 나오면 행간에 토를 달아 가며 읽었습니다.
 
  美大 2학년 때 학보병으로 군대생활을 하던 중 시단에 데뷔했어요. 성균관大 불문과 학생이었던 서림환이 데뷔 동급생이었습니다. 저를 시단에 내보내시고 1966년 주례를 서 주셨던 朴南秀 선생의 은혜를 잊을 수 없어요. 「詩人이 되기 전에 짐을 진 나귀가 돼라」고 하셨습니다』
 
 
 
 스승에 대한 추억
 
   金榮泰의 기억에 남아 있는 스승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이던 蘭丁 魚孝善(난정 어효선·1924~2004) 선생이다. 蘭丁은 동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 「과꽃」, 「꽃밭에서」 등을 지은 아동 문학가이자 교육자. 당시 24세였던 스승은 제자에게 여러 개의 도장을 손수 파 주셨다. 그 도장으로 시인은 자신의 저서 인지란에 낙관을 찍기도 했다. 그가 스승을 떠올리며 쓴 詩(「나무도장」)도 있다.
 
  <蘭丁 魚孝善 선생님은/초등학교 은사/새겨 주신 나무도장/인주 묻혀 찍을 때마다/절하고 싶다/세월의 땟국을/마시며 살았어요/절 받으셔야 할 참스승도/이제 몇 분 안 남으셨으니>
 
  문단에서는 그를 『김종삼 이후 마지막 보헤미안』(평론가 김인환)이라고 부른다. 金榮泰는 당대에 金宗三(김종삼·1921~1984)과 교우했으며 그에 대한 애틋함이 남아 있다. 金宗三은 정훈국 방송국과 동아방송에서 배경음악을 담당하며 20여 년 근무했지만 말년엔 술값 마련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궁핍했다. 자주 어울렸던 金榮泰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
 
  『金宗三 선생과 한동네에 살았어요. 선생이 동아방송 다닐 때 그는 내수동, 저는 사직동에 집이 있었어요. 저는 그때 결혼하기 전이었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돈을 빌려 달라시는데 다 응하지 못해 지금도 마음에 남습니다.
 
  최인훈의 소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연극으로 공연할 때 선생에게 배경음악을 맡겼습니다. 일종의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 드린 셈이지요. 하루는 저를 찾아오셨는데, 신문지로 포장한 물건을 겨드랑이에 끼고 왔습니다. 불쑥 내밀고 가셨는데, 나중에 뜯어 보니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누드 사진이 찍힌 레코드였습니다. 나름의 고맙다는 뜻이었지요』
 
 
 
 춤과의 짝사랑에 빠지다
 
1990년 1월 프랑스 파리. 그는 외환은행 재직시절, 연·월차를 묶어 20일씩 외국공연을 보러가곤 했다. 그 때문에 인사고과 점수가 사내에서 꼴찌였다.
  金榮泰는 지금까지 시집 17권, 무용평론집 12권, 무용자료집 2권, 산문집 12권, 시론집 2권, 소묘집 9권, 음악평론집 2권 모두 합쳐 56권의 책을 썼다.
 
  본업이 詩人이지만 무용과 음악평론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서울문화예술평론상(무용·1989)을 수상했고, 1989년 무용평론가회 회장과 2004년 동아무용 콩쿠르·유니버설 키로프 발레 콩쿠르·서울 국제무용제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중학교에 다닐 무렵 경기女高 앞 외국서점에서 발레 사진집을 보고 무용수들의 몸의 아름다움에 홀딱 빠졌습니다. 그때부터 무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인사동 古서점에서 제일 처음으로 산 무용책이 당시 소련 볼쇼이 발레단의 스타였던 스베틀라나 밸리 오소바였고, 「빈사의 백조」로 유명한 안나 파블로바의 사진집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본격 무용평을 쓰기 전 100여 권의 발레 사진집을 모았어요』
 
  그는 그때부터 춤과의 짝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여인의 육체도 아름다웠지만 발끝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춤을 추는 무희의 모습에서 극기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1966년 자유극장 동인으로 10여 년 참여했던 저는, 아내와의 부부싸움을 소재로 한 「리화부부」라는 단막극을 끝으로 연극평을 접고, 1970년 초부터 무용평을 써 왔습니다. 연극대본 연극평보다는 무용대본 무용평이 제 적성에 맞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동양화가 장욱진 화백에게 「당신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까치 그리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는데, 제게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사시사철 춤 보러 다니는 구경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팔월 한 달만 빼고 일년 내내 춤 공연장에 앉아 있어요. 각종 무용 콩쿠르 심사도 하고 1년에 한 번은 국제무용제를 보러 갔습니다. 미국보다는 유럽 공연을 자주 봤습니다』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舊문예회관) 대극장 「가열 123번」 자리는 金榮泰의 지정석이다. 리모델링한 이후 지금은 「L10번」으로 바뀌었지만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그만의 자리다. 극장 측에서도 그 자리는 아예 비워 둔다.
 
  『L10번은 통로자리입니다. 거의 지정석이 돼버렸어요. 제가 가면 극장 카운터에서 알아서 자리를 내어 줍니다. 다른 사람에겐 그 자리를 넘겨주지 않아요. 무용을 관람할 때면 사람의 솜털까지 보인다는 독일제 망원경을 통해 봅니다. 망원경을 쓰는 이유는 눈도 나쁘지만, 몸의 표정을 보려고 그럽니다』
 
 
 
 
무용은 인체의 詩

 
   ―대극장에는 언제부터 가게 됐나요.
 
  『1968년부터 다니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연극 쪽에 관심이 있었지만 나중에 무용으로 갔습니다. 연극대사만 들으니까 짜증이 나더라고요. 1969년 무용에 관여하면서 무용대본을 많이 썼습니다. 지금까지 40~50편 정도는 썼을 거예요. 나중에 무용대본을 「아르코 자료원」에 모두 이관시킬 계획입니다. 한 2~3년 뒤 전시회를 연다고 들었어요』
 
  ―詩와 무용, 춤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무언극이 「인체의 언어」라고 하면, 무용은 「인체의 詩」입니다. 그만큼 압축적이고 상징적이에요. 제가 연극에서 멀어진 것은 대사를 다 들어야 한다는 괴로움 때문이었지요. 어떤 때는 역겨운 적도 있고, 지겨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용은 계속 움직이면서 뭔가를 전달하려고 하니 집중하게 되는 거지요.
 
  외국의 경우 안나 키셀코프나 뉴욕 타임스에 무용평을 기고하는 작가 대부분이 詩人입니다. 詩와 춤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정기적으로 춤에 관련한 리뷰를 쓰십니까.
 
  『「월간 객석」에 「사에라」라는 타이틀로 살아왔던 이야기를 씁니다. 원고지 20매 정도입니다. 또한 무용 잡지 「몸」에 40매 정도를 써요. 한 달 평균 60매는 쓰는데 요즘은 몸이 아파 공연장에 다 가지 못해 리뷰를 쓰는 데 어려움이 많아요』
 
  그는 개인전을 8차례나 가졌고, 「文學과 知性」 시집의 인물소묘 그리는 일을 수십 년간 해오고 있다. 한국의 웬만한 詩人과 예술가는 한 번쯤 그에게 얼굴을 맡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가 초상화만 1000여 장 넘게 그렸다.
 
  『「문지」 시집 그림은 弘大 57학번 동기인 이제하와 번갈아 그렸습니다. 시집을 내는 사람이 소묘화가를 선택합니다. 예술가 소묘집만 지금까지 아홉 권을 냈어요. 전람회를 끝내고 출판사의 요청이 있으면 내곤 했지요. 책 한 권에 100명 정도의 그림이 실리는데 「문지」에만 300명 이상을 그렸습니다. 모두 합치면 1000명 이상은 그린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詩人 천상병과 김종삼, 박용래의 그림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제하와 김영태의 그림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저도 추상적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리얼리즘 쪽에 가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이제하는 추상적으로 뭔가를 끄집어 낸다고 할까요. 그런 차이가 있지요』
 
 
 
 김환기, 카페 테아트르, 돌체
 
  ―자화상을 소유하고 계십니까.
 
  『한 10년 전인가, 전람회에서 제 자화상이 팔렸어요. 자화상을 내놓을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한번 내놓으면 못 그리니까요. 요샌 후회를 하고 있어요. (전시회에) 카피를 낼 순 없으니까요. 그때 110명의 캐리커처를 전시했는데 제 자화상과 천상병·김춘수·김종삼·기형도 등 5장의 그림이 30만원씩 팔렸어요』
 
  弘大 미대 스승이었던 樹話 金煥基(수화 김환기·1913~ 1974) 화백에 대한 그리움은 아직도 절절하다. 美大 재학 시절, 樹話는 그림도 지도해 주셨지만 인간이 돼라고 타이르셨다고 한다.
 
  『樹話의 가르침은 「사이비 예술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었습니다. 이중섭·박수근은 올려놓고, 樹話의 그림은 포장지 감이라고 하던 콧대 높은 친구와 격렬히 싸운 기억도 납니다.
 
  자하문에 樹話 기념관이 문을 열었을 때 「현대문학」誌에 추천 글도 썼습니다. 덕수궁에서 그의 추모전이 열렸을 때 한겨울 루파슈카(러시아 외투)를 입고 교정에 서 있던 선생님을 회상했습니다』
 
  1960년대 말 소극장이 별로 없던 충무로에 北歐風(북구풍)으로 치장된 단막극 전용 「카페 테아트르」가 오픈했을 때 그가 그린 연극 패널 그림과 구불텅한 글자(이른바 「봉두난발체」)는 「카페 테아트르」와 함께 그 일대의 화제였고, 1970년대 많은 아류를 낳았다고 한다. 「카페 테아트르」가 문을 닫은 뒤에는 한국 마임 1세대인 金成九(김성구)를 위해 판토마임 대본을 쓰기도 했다.
 
1993년 10월 서울 동숭동 예총회관에서 열린「김영태 스케치展」. 왼쪽부터 김혜식, 육완순, 金榮泰, 원필여, 최현씨.
 
 
 
「자유극장」 동인으로 활동

 
  『1960년대 말 「자유극장」 동인으로 활동했어요. 당시 연극인 박정자씨 같은 분이 이화女大 신문학과를 나와서 처음 오디션 보러 올 땐데요. 한 11~12년쯤 동인 활동을 하면서 충무로에 나가 지금은 없어진 「카페 테아트르」 같은 곳에 앉아 있곤 했지요. 당시 소극장 공연 패널은 제가 다 그렸습니다』
 
  음악, 그중에서도 클래식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다. 대학 시절 「돌체」나 「르네상스」와 같은 음악다방에 출근하면서 고전음악 LP 음반을 수집했다. 그의 집에는 1400여 장이 넘는 LP 음반이 빼곡히 꽂혀 있다. 하지만 요즘은 LP 음반이 튀어서 대부분 들을 수 없다고 한다.
 
  그는 『1970년대 초반 「음악펜클럽」 회원이 된 것은 SP 음반 시대 모차르트를 즐겨 듣던 아버지의 피를 대물림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1967년쯤 「한국 음악펜클럽」을 결성했어요. 「음악방」이라는 동인지를 통해 기성 음악가를 매달 한 명씩 발굴, 소개했지요. 몇 사람을 소개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요즘 이름이 꽤 알려진 연주자·성악가·작곡가 대부분을 망라했다고 보면 됩니다. 멤버가 황병기·백병동 등 11명인데 지금은 모두 나이가 연로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역임한 이강숙 선생이 「낭만음악」을 결성하셔서 요새는 활동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린 인물소묘.
 
 
 외환은행에서 24년 근무
 
  金榮泰가 은행원으로 무려 24년간 근무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68년 「월간중앙」 기자로 입사했지만 몇 달 안 돼 한국외환은행 조사부로 자리를 옮겼다. 1992년 퇴사할 때까지 조사부에서 근무하며 은행 잡지와 단행본, 각종 통계자료 등을 만들었다.
 
  大文豪(대문호) 카프카가 낮에는 보험국 사원으로 일하며 밤에는 소설 창작에 매달렸던 삶과 닮았다.
 
  그는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오후 5시30분이 되면 누가 뭐라든 「땡 퇴근」을 했고, 여름휴가도 연·월차 모두 묶어 20일씩 쓰면서 외국 공연을 보러 가곤 했다. 회사로선 기가 막혔을 것이다. 실제로 외환은행에서 몇 년간 인사 고과점수가 「빵점」이었다고 한다.
 
  『월간중앙이 창간할 때 기자로 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기자 쪽과는 체질이 맞지 않았어요. 그때 외환은행에서 사람을 수소문하다 저한테 왔습니다. 조건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책 편집할 줄 알고, 또 하나는 그림 그릴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였어요.
 
  조사부에서만 일하겠다는 조건으로 이적해 24년간 붙박이 근무를 했습니다. 은행 대리라는 자리가 하루에도 몇 억원씩 사인하지만 저는 못 하고요, 돈이라고는 지폐 30장도 채 못 셉니다』
 
  ―은행원으로 24년간 근무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습니다.
 
  『아이들이 일찍부터 유학을 떠나 학비를 보내 줘야 했어요. 애 낳은 죄로 기숙사비라도 보내야 했습니다. 「조사월보」와 「애뉴얼 리포트」를 만들었고, 외환은행에서 한 달 평균 발간하는 서적이 네 권은 됩니다. 또 초창기엔 은행 사보도 만들었어요. 그림 그리는 사람을 원했던 게 그런 이유였습니다』
 
 
 
 무용과의 만남을 통해 해방감 느껴
 
   ―은행원 생활은 어땠나요.
 
  『거의 왕따였지요. 제 인내를 시험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머리도 길었고 색깔 있는 퍼런 와이셔츠를 입고 다녔으니까요. 쉽게 얘기해서 고과점수가 외환은행 사상 최악이었습니다. 몇 년간 0점도 받았으니까요. 왜 0점이냐,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무용을 보려면 오후 5시30분에는 퇴근해야 합니다.
 
  퇴근하려고 엘리베이터 앞에 얼쩡거리면, 윗사람이 눈을 부라리고 싫어할 수밖에요. 「이 새끼, 머리 깎으라고 했건만 아직 안 깎았네」 하는 식이지요. 그러니 고과점수 0점이 당연하달 수 있지요. 엘리베이터를 타면 여행원들이 뒤에서 킥킥 웃습니다. 제가 탔다는 신호지요. 매일 반복되는 일이니까요. 당시에도 무용공연이 8월 초, 보름과 정초만 빼고 거의 매일 있었습니다』
 
  은행에 재직하던 1982년 5월20일. 세계적인 발레 무용수의 율동을 화폭에 담은 「金榮泰 소묘전 - 꿈」이라는 전시회를 가졌다. 그가 5년 동안 여섯 차례 걸쳐 미국과 유럽, 일본을 돌면서 스케치한 발레리나 마카로바, 누레예프, 바리시니코프, 포루토비치 등의 群舞(군무) 모습을 그린 39점을 공개한 것이다. 당시 한 기자가 『왜 전시회 이름을 「꿈」으로 정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꿈」이라고 한 것은 사회생활을 하기엔 너무 무기력하고 약삭빠르지 못한 제가 무용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살아 있는 해방감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카로바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詩를 쓰기도 했다.
 
  <너무나 서툴게/나는 살아왔습니다/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저만치 하늘이 보이게/窓도 매달았습니다(中略) // 움직이는/조그만 균형을 만났습니다/한 부분이 가만히 정지하다가/접히다가/다시 포개어집니다/매우 아름다웠으므로/내색은 하지 않았으나/나는/더러운 손을 들고/뒤뚱거리며 따라갔습니다(中略)> (詩 「그림」 중에서)
 
  ―왜 회사를 그만뒀습니까.
 
  『1992년에 사표를 썼습니다. 조사부장이 동갑내기였어요. 그가 쓸데없이 저를 부르고 쪼더라구요. 며칠 참다가 사표를 내버렸습니다. 한계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지요. 그 사람도 조사부가 편한 줄 알고 왔다가, 적성에 안 맞았던지 제가 그만둔 뒤 1년도 안 돼 다른 부서로 갔다고 하더군요』
 
 
 
 암 투병
 
「현대시학」1976년 7월호에 실린 작가의 모습.
  시인 金榮泰는 대학 2년 후배인 아내(정복생씨)와 결혼했지만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미국으로 보내고 혼자 살고 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기 전부터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미국에 세 번밖에 가지 않았다.
 
  『저는 못 간다고 했어요. 모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이 미국에 가서 뭘 하겠어요. 또 생래적으로 미국 생활과 맞지 않았습니다』
 
  기껏 간 미국行도 主목적은 따로 있었다. 미국 뉴욕 링컨센터의 발레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단다.
 
  『아이들이 방학 때도 (한국에) 잘 못 들어와요. 다 직업이 있으니까. 둘 다 미국의 디자인 학교 「파슨스」를 나왔습니다. 현재 큰아이는 디자인 쪽 일을 하고 있고, 둘째는 LA에서 영화회사에 다닙니다』
 
  현재 그는 암 투병 중이다. 전립선 초기 암이어서 버틸 만하다고 하지만 그의 나이는 어느새 칠십을 넘었다. 「사시사철 춤 보러 다닌다」던, 「아름다움을 훔치는 사람」이라던 그도 이제 힘에 부친다. 담배와 커피는 평생의 친구였지만 둘 다 멀리해야 할 형편이다. 담배는 끊었고 커피는 사흘에 한 잔 정도만 허락받았다.
 
  『항암치료 때문에 먹지를 못해요. 의사가 6개월 치료해 보고 안 나으면 다른 처치를 하자고 하니 버텨 볼 생각입니다』
 
  ―누가 병상에서 수발을 합니까.
 
  『여동생이 도움을 줍니다. (아내는)조건이 안 되니까. 30년 가까이 떨어져 살다 보니 원치도 않고, 와서도 분란이 없으면 모를까, 마찰이 되니까』
 
  ―그 연배면 초월하실 것 같은데.
 
  『그럴 나이인데요…. 가족 얘기는 별로 하기 싫어서 얘기를 잘 안 합니다. 좋은 일도 아니고…』
 
 
 
 고독한 영혼이 품어 내는 언어
 
   金榮泰는 지난해 자신의 古稀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시집 「누군가 다녀갔듯이」(文學과 知性社 刊)를 펴냈다. 시집 후기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시인은 일흔부터라는 말을 읽은 기억이 난다. 어느새 나는 종점에 와 있다. 여기까지 와서 보니 裝飾(장식)이었다. 조그맣게 헐겁게 지나쳤던 線(선)들이 이 끝에 묻어 있다>
 
  그는 누구보다 지난한 삶을 살며 춤과 그림·음악·詩에 미쳐 한평생을 보냈다. 가족도 그의 안중에 없었다. 여러 장르를 전전했지만 예술에서도, 사적인 관계에도 반듯하고 철저하게 살았다. 정돈되지 않는 머리칼, 235mm 작은 발에 꼭 맞는 여성용 벨벳구두, 자유분방한 옷차림, 이국풍의 短杖(단장)까지 여전히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金榮泰는 「늙을수록 젊어지는 詩人」이다. 왜냐면 혼자일 줄 아는 사람은 늘상 젊은 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자식 없이 평생 동안 고독을 질겅질겅 씹으며 살아왔다. 고독한 영혼이 품어 내는 이미지로 승화된 그의 언어들은 내밀한 삶에 대한 의지와 다름이 아니었다. 그가 지난해 쓴 「늘그막에」라는 詩의 일부이다.
 
  <새 옷을 입혀도/헌 곳 같은 몸이 있다/내 몸 치수에 맞는 몸이여/(얼마나 이쁘냐, 이쁘고 뜨거우냐)/내게 와서 子時에/이리 문득 피었다 지는……>
 
  『황량했던 세상에서 저는 조금 비켜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필터 담배를 거꾸로 물고 불 붙이던 사람들 속에 서 있기도 했고, 물거품을 마시면서 아껴 가면서 허기를 채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헷갈릴 정도로 장르를 넘나들었습니다.
 
  화상이 訥人인데 아무도 쳐다보는 이 없습니다. 이젠 가지고 갈 짐도 많지 않고, 다 버렸으니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죽음조차도 추하거나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닌, 재생을 위한 불가피한 침전,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별로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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