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으로 인해 이 마을이 생겨났고 戰後 아무런 보상이 없었기에 이 사람들이 오갈 데 없어 여기에 남은 것 아닙니까. 정부가 외면하니 개인이 나선 겁니다』(「우토로를 지키는 모임」 다가와 아키코 회장)
사람들은 이곳을 「교토(京都)의 빈민촌」 또는 「일본에서 마지막 남은 징용 朝鮮人(조선인)들의 집단부락」이라고 부른다. 1941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이 일대에 軍用(군용)비행장을 만들면서 조선인 노무자들을 불러 노역을 시키다가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폭을 얻어맞자 그대로 내팽개쳐 버린 마을이다.
양철지붕에 판자로 칸막이를 한 함바(飯場: 노동자 합숙소)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노무자들은 일본이 패망하자 앞다투어 조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150여 세대는 그냥 남았다. 이후 6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노무자들이 마을과 세상을 떠났다. 그 빈 자리에 탄광이나 공사판을 떠돌던 징용 조선인들이 채워졌다. 戰後補償(전후보상)은커녕 일자리가 없어 날품을 팔던 노무자들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 부락을 철저히 외면했다.
조국도 이들을 잊어버렸다. 「비행장 노무자」들은 이제 90代를 넘고 있다. 훗날 이곳에 합류한 조선인들도 60~70代가 됐다. 이제 남은 주민은 65세대 200명, 대부분이 2~3세대들이다.
이 마을이 작년 한 해 국내 매스컴의 뜨거운 서치라이트를 받았다. 땅 주인이 퇴거소송을 걸어 마을이 강제철거 위기에 처한 탓이었다. 이 소식은 때마침 광복 60주년과 맞물려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韓·日 간에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도마 위에 올랐고, 우토로 주민들에 대한 성금과 격려가 잇달았다. 우리 국회의원들은 「우토로를 생각하는 모임」을 만들어 현지시찰에 나섰고, TV는 8·15 특집 생중계로 모금캠페인까지 벌였다. 각계의 유명인사들과 민간단체들도 「우토로 구하기」에 발 벗고 나섰다.
해가 바뀌자 잠잠해졌다. 「냄비」가 식은 탓이다. 그럴수록 우토로 소식은 궁금했다. 강제철거를 당한 걸까? 아니면 자구책이 마련될 걸까?
지난 4월17일 「우토로 국제대책회의」 사무실을 찾아가 보았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 허름한 빌딩의 1층 사무실은 10평이 채 못 됐다. 벽에는 「역사 청산! 거주권 보장! 우토로를 살리자!」는 구호가 붙어 있었다. 그 옆으로 성금액수가 적혀 있다. 집계날짜는 지난 2월28일에 멈췄다. 총 4억8092만2439원.
―상당한 금액인데요.
『많은 분들이 동참했습니다. 특히 「아름다운 재단」과 MBC가 수고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저희들은 콘텐츠만 넣었지요』
裵지원(35) 사무국장이 답했다.
일본 상지(上智)大에서 저널리즘學 석사를 받고 「지구촌청년동포연대(KINS)」 기획위원으로 일하던 그녀는 작년 4월 우토로 문제가 불거지면서 국제대책회의 사무국장을 맡았다. 裵사무국장은 모금열기가 예전 같지 않다며 안타까워했다.
『작년 5월부터 모금운동에 나섰습니다만 기대만큼의 성과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기업들은 실무진에서는 OK 하는데 결재 선에서 NO 해요. 그나마 20여 개 기업에서 100만~200만원씩 도와준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포스코(POSCO)도 처음에는 억 단위를 이야기하다가 위로 올라가면서 「없던 일」로 돼버렸다고 한다. 일본과의 비즈니스에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33人 모금캠페인이 기억에 남습니다. 최불암·안성기·김혜수·김미화氏 등 연예인들이 줄줄이 나섰는데 1000만원을 희사한 분도 있었어요』
철거에 앞장선 在日동포
―우토로는 어떻습니까.『예전 그대롭니다. 마을이 언제 철거될지도 모르고, 이사할 돈도 없고…. 남은 희망은 새 地主(지주)와의 타협입니다』
―땅 주인이 바뀌었습니까.
『네, 강제철거 계고장을 냈던 在日동포가 작년 11월9일 오사카(大阪) 고법의 소유권 재판에서 이전의 땅 주인이었던 일본 사람에게 졌어요. 그래서 당분간은 철거가 연기됐습니다. 그 사람이 최고재판소에 상소했는데 6월쯤 최종판결이 나온대요』
―그럼 在日동포가 조선인 부락의 철거에 앞장섰다는 얘깁니까.
『부끄러운 일이지요』
裵사무국장은 잠깐 숨을 돌렸다.
『사정이 꽤 복잡합니다. 이쪽 얘기 다르고 저쪽 얘기 다르니 현장에 가보셔야 정답을 얻을 겁니다. 百聞(백문)이 不如一見(불여일견)이잖아요』
마침 우토로 주민들의 대책회의가 일주일 뒤(4월23일)로 예정돼 있다고 했다.
『이왕 가실 거면 서두르는 게 좋겠네요. 현지에 가면 이분들을 꼭 만나 보세요』
裵사무국장은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의 다가와 아키코(田川明子·61) 회장, 우토로 주민회 嚴明夫(엄명부) 부회장, 오사카 총영사관의 金庚壽(김경수) 영사 등의 명단을 적어 주었다.
裵사무국장의 주선으로 다가와(田川) 회장과는 4월24일 오전 11시 우토로 광장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필자는 지난 4월23일 오후 오사카로 날아갔다. 숙소는 한국 총영사관이 가까운 남바(難波)에 정했다. 호텔방에서 전날 裵사무국장이 준 「우토로」란 책을 펼쳤다.
일본 가모가와 출판사가 낸 「우토로―버려진 마을」(1997년)을 번안한 이 책은 우토로 1세대들의 증언과 그곳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의 年表(연표)가 적혀 있었다.
<우토로 마을이 조선인 노무자들의 부락으로 형성된 것은 1941년 일본이 교토 오쿠보(大久保) 일대에 군용비행장을 만들면서부터다. 일본은 조선인 노무자들을 모집하면서 「여기 와서 일하면 다른 戰場(전장)에 징용하지 않는다」, 「배급제다」,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다」고 선전했다. 모여든 조선인들은 1300여 명이나 됐다. 이들은 함바를 짓고 6~8가구씩 함께 살면서 하루 13시간 이상씩 일했다.
1945년 7월 비행장이 폭격을 당한 뒤 한 달 만에 일본이 항복한다. 일대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그들은 함바에 살고 있던 조선인 노무자들을 疏開(소개)시키려 했다. 갈 곳 없는 노무자들은 맨몸으로 저항한다. 1956년 미군이 오쿠보 캠프를 일본 육상자위대에 반환했고, 그때 제외됐던 함바村이 지금의 우토로다>
「이곳에서 살고 싶다!」![]() |
|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의 다가와 아키코(田川明子) 회장. |
역무원에게 우토로의 위치를 물었더니 『걸어서 5분』이란다. 필자는 달동네를 연상하고 발품을 각오했는데 바로 역세권이었다.
「이런 주택가에 함바村이 있다는 말인가…」
아스팔트 도로의 양쪽은 말끔한 2층집들이 줄지어 있다. 200m쯤 가니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으로 접어들자 지금껏 숨어 있던 판자촌이 불쑥 튀어나왔다. 우토로였다.
마을 입구에는 어른 키만 한 입간판들이 낡은 건물 앞에 빽빽이 서 있다.
「强制退去(강제퇴거) 決死反對(결사반대)!」
「우토로를 없애는 건 在日 조선인의 역사를 없애는 것이다」
「우토로를 없애는 건 일본의 양심을 없애는 것이다」
「이곳에서 살고 싶다!!」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의 회장은 日本人월요일이어선지 마을은 조용했다. 다가와 아키코(田川明子) 회장과 만나기로 한 「광장」은 판자촌 가운데에 있었다. 50평 남짓 될까.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오전 11시15분. 한 바퀴 돌아보니 「한겨레 마당」이란 간판이 붙은 2층 블록집이 있었다.
건물 아래층 내실에 단정한 차림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쪽진 머리에 무테 안경을 쓴 田川 회장이었다.
―늦었습니다. 지리를 잘 몰라서….
『저도 온 지 얼마 안 됩니다』
역시 일본인이었다. 상대가 미안해할까 봐 에둘러 말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주민회의 金小道(김소도·81) 상임고문이 합석했다.
우토로 토지대책위원회 초대 사무국장이었던 金고문은 「우토로 지킴이」 다가(田川)와 회장과 함께 15년 전부터 미국·독일·한국 등지를 돌며 우토로의 실태를 고발해 왔다. 田川 회장의 부탁으로 통역 겸 나왔다. 말머리를 편하게 잡았다.
―일본의 地名(지명)은 대부분 漢字(한자)가 있는데, 왜 「우토로」는 가타카나뿐입니까.
田川 회장이 당겨 앉았다.
『이런 질문은 처음입니다. 우토로도 원래는 한자가 있었습니다. 집 우(宇), 흙 토(土), 입 구(口)로 「宇土口」였지요. 「집터 입구」라는 뜻으로 「우도구치」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 누군가가 「입 구(口)」 자를 가타카나의 「로」 자로 잘못 읽으면서 호칭이 「우토로」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 후론 한자가 사라졌지요』
우지시(宇治市)의 본토박이답다.
―일본인이면서 왜 조선인 부락 문제에 뛰어들었습니까.
『일본인이니까요. 일본의 전쟁으로 인해 이 마을이 생겨났고 戰後(전후) 아무런 보상이 없었기에 이 사람들이 오갈 데 없어 여기에 남은 것 아닙니까. 그건 일본의 책임이지요. 정부가 외면하니 개인이 나선 겁니다』
―주위의 일본인들이 뭐라고 하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제가 20년 넘도록 뛰어다니니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동참하고 있습니다』
다가와 회장과 1300명의 회원![]() |
| 嚴明夫 우토로 주민회 부회장. |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을 결성한 건 1989년 3월22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곳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5년부터입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하루는 시청에 갔다가 지문날인에 반대하는 조선인 여성을 만났습니다. 우토로 출신의 유정자氏인데 동갑내기였어요.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그녀가 「우리 마을엔 아직도 수도가 없다」고 합디다. 그건 충격이었습니다. 아무리 조선인 부락이라지만 일본정부가 이럴 수 있냐 싶데요』
―가슴이 뜨겁군요.
『학창 시절부터 좀 그랬어요. 1965년 도시샤(同志社)大 2학년 때 日韓회담에 반대하는 데모도 많이 했습니다』
―뭐가 맘에 안 들어서요.
『불공평하잖아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건 1910년 조선반도 전체인데 어떻게 남쪽만 협상주체가 됩니까. 북쪽도 같이 해야지요. 일본은 그 협정을 마치고는 朝鮮(조선)에 대한 모든 빚을 갚은 양 입을 싹 닦았습니다. 정신대 문제나 우토로가 방치된 것도 그런 데서 연유합니다』
―회원은 얼마나 됩니까.
『1300명입니다. 교직원·공무원·주부 등 직업이 다양합니다. 회비는 1년에 1000엔씩 내는데 가끔 특별기부금을 내는 회원들도 많아요. 작년 9월27일 우토로 강제철거 문제가 나왔을 때는 휴먼체인을 하려고 자청한 사람이 500명을 넘었답니다』
―우토로 문제를 유엔까지 끌고 간 것도 회장이시지요.
『제가 했다기보다는 제가 몸담고 있는 「국제 反차별운동(IMADR)」의 모리하라(森原秀樹) 사무총장이 애를 썼지요. 도쿄에 있는 그분이 이곳 사정을 듣고는 유엔에 알렸습니다』
IMADR은 작년 우토로 문제를 유엔 인권委에 고발, 인종차별특별보고관인 두두디엔氏(세네갈 출신)로 하여금 현지조사를 하도록 했다.
지난해 7월5~11일까지 우토로를 돌아본 두두디엔氏는 이런 보고서를 낸다.
<일본에는 아직도 인종차별과 외국인에 대한 혐오증이 존재한다. 일본 정부는 우토로의 조선인들이 식민지시대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해 노동력으로 동원돼 이 땅에 살게 됐고, 한 곳에서 거주를 60년간 인정받아 온 점을 고려하여 이들 주민들이 이곳에서 계속적으로 살아갈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보고관은 일본 정부에 대해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국내 법령을 제정할 것 ▲역사기술을 再검토하고 역사교육의 과정에 정확한 초점을 맞출 것 등을 골자로 한 권고안도 제출했다.
『日 정부, 65년간 전쟁노무자 외면했다』―이참에 한국 정부에 바라고 싶은 건 없습니까.
『우토로를 돕겠다면 서둘러 주십시오. 1세대들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10년 후면 모두 돌아가십니다. 일본 정부더러 「우토로에 관심을 갖고 현안을 해결하라」고 촉구해야 합니다』
그는 『일본에도 「밀집주택 시가지 정비촉진사업에 관한 법률」이 있는 만큼 정부의 지시만 떨어지면 지방자치단체가 즉각 환경정비작업에 나설 것』이라고 귀띔했다.
―일본 정부가 해야 할 부분은 없습니까.
『역사인식을 고쳐야 합니다. 우토로란 마을은 전쟁으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책임을 져야지요. 65년이 넘도록 전쟁노무자들을 외면했다는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교토의 제2도시인 우지시에 상하수도 시설이 안 된 마을이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건 분명한 차별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먼 데로 갔다.
―어제 주민들의 집회에는 몇 명이나 모였습니까.
『150명 정도 나왔습디다. 주민들 외에 우리 회원들도 많이 참석했습니다』
―어떤 결론이 났습니까.
『결정된 사항은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땅을 사 버리면 그만인데 그게 안 되니…. 현재 65세대 중 16세대가 경제력이 없는 독거노인들입니다. 이들은 집이 철거되면 거리에 나앉는 수밖에 없습니다』
―해결책은 없습니까.
『마을의 빈 집과 공터를 정리하면 1000평쯤 공간이 나옵니다. 그곳에 공영주택을 지어 노인들을 입주시키면 어떨까 싶네요. 문제는 「누가 해주느냐」입니다. 일본 정부? 한국 정부? 둘 다 뒷짐 지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본업은 무엇입니까.
『고슴도치 인형을 만들어 유럽에 수출합니다. 오늘은 당신이 온다고 해서 가게 문을 닫았어요. 고슴도치가 일본에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요? 그놈은 대륙에 삽니다』
인터뷰는 여기서 마무리했다. 오후 1시30분. 필자가 인천국제공항에서 사간 홍삼양갱으로 간단하게나마 요기를 했다.
길이 없는 마을
金小道 고문이 앞장을 선 상태에서 우리는 마을을 돌아봤다.『이 동네는 길이 없소. 집과 집 사이가 통로요. 그냥 잡초를 피해 빈 땅을 쭉 밟고 가면 한 바퀴 돌아진답니다』
올해 여든하나인 데도 정정한 金고문은 경북 迎日(영일) 태생이다. 그는 시모노세키(下關) 항공대에서 미군 전투기 식별훈련을 받던 중 일본이 패망하자 건설회사에 취직, 후쿠오카(福岡)·미야자키(宮崎)·나라(奈良) 등지를 옮겨 다니다가 1962년 우토로에 정착했다.
우리 셋은 마을 한가운데의 낡은 함바 앞에 섰다.
『이게 활주로 닦을 때 노무자들이 먹고 잤던 함바야. 다 허물어져 가는 데도 빤히 보고만 있어야 돼. 市에서 손을 못 대게 해』
목소리에 화가 담겨 있었다.
―살짝 고치면 안 됩니까.
『남의 사유지라고 안 된대. 잘못 건드렸다가 집채 내려앉으면 큰일이잖아. 하기야 이제는 고치려고 해도 노인네들뿐이라 연장 들 힘도 없고…』
비행장 노무자들이 살았던 함바는 두 채만 남아 있었다. 비어 있는 한 채는 65년간의 세월에 양철지붕이 녹슬어 군데군데 뚫린 채 찌부러져 있다. 안은 마구간 같았다. 잡초가 우거져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옆의 함바는 그런대로 버티고 있었다. 스무 평 남짓 될까.
『저기는 사람이 사는데 남들이 와서 구경하는 걸 아주 싫어해』
마을의 총 면적은 6400평. 단층 판잣 집과 2층 블록집들이 이리저리 섞여 앞뒤가 없다. 편의점은커녕 자판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뒤쪽으로 돌아가니 철조망 울타리가 길게 쳐 있다.
―저쪽은 어딥니까.
『오쿠보 자위대 훈련장이오. 미군이 10년간 진주했다가 일본에 반환한 땅인데 그 옛날 활주로를 깔았던 곳이지』
자위대 운동장에는 전차와 군용트럭들이 꽉 들어차 있다. 러닝셔츠 차림의 젊은 병사들이 삼삼오오 대열을 이뤄 둑 위를 뛰고 있다. 철조망 하나를 사이에 둔 양쪽의 풍경은 너무 달랐다.
이 울타리에도 주민들이 쓴 대형 플래카드가 빨래처럼 널려 있었다. 한글로 쓰인 구호도 있다.
「일본 정부는 식민지의 책임을 절대로 피할 수 없다」
「어르신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이곳을 없애지 마세요」
「우토로를 지키는 싸움은 지금부터다. 힘내자 ―」
수도가 없는 마을田川 회장은 마을 한구석 야트막한 판잣집 앞에 멈췄다. 문패는 崔仲圭(최중규)로 씌어 있다. 바깥 기척에 할아버지가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田川 회장을 보더니 반갑다고 손을 흔든다. 올해 91세인 崔할아버지는 26세 때 일본으로 끌려와 후쿠오카와 나가사키(長崎) 탄광에서 뼈 빠지게 일하다가 40년 전 이곳에 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가는귀가 먹은 듯 말을 잘 못 알아들었다. 거동도 버거워 보였다.
『우리 집에는 아직도 수도가 없어. 펌프로 지하수를 퍼 올려서 마시지. 이젠 늙어서 펌프 젓기도 여간 힘든 게 아녀. 변소를 푸는 일도 고역이고…』
崔할아버지는 올해 86세인 할머니와 단 두 식구였다. 田川 회장이 설명했다.
『노인네들만 사는 16가구 가운데 정화조 시설이 된 집은 여섯 채뿐입니다. 그 외의 집들은 화장실이 모두 바깥에 있어 캄캄한 밤이나 겨울에 애를 먹습니다』
田川 회장은 한 달 전 마을집회 때 조사한 「우토로 실태」를 얘기해 주었다.
▲상수도 보급률=44% ▲25년 이상 목조건물=82% ▲19세 이하=12% ▲남자=76% ▲무직=52%
「75세 이상 고령자의 하루일과」는 더 심각하다고 했다.
가정방문을 통해 20명에게 물어본 결과 「24시간 내내 우토로 안에 있다」고 답한 사람이 95%였단다. 이들의 외출은 「아파서 병원에 가거나 식료품을 사러갈 때」뿐이었고, 가장 큰 걱정거리는 「강제퇴거」였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일본인 국적이 8명이나 되네요.
『시집 온 여자들입니다. 일본인 신부는 있지만 일본인 신랑은 없습니다』
―저 앞의 2층집은 사람이 안 삽니까.
『폐가가 된 지 오랩니다. 저 집에 살던 사람이 주민들 몰래 땅을 사고팔았지요. 지금 문제가 된 마을철거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입니다. 동네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자 야반도주했는데, 그 후로 빈 집이 돼 버렸습니다』
주민들의 분노가 어떠했는지 「죽여라!」는 글이 담벼락에 씌어 있다.
우지市 총무부장의 묘한 응수![]() |
| 金小道 주민회의 상임고문. |
『李선생, 여기까지 왔으니 시청에 한번 안 가보실래요? 제가 우지(宇治)市 총무부장과 미리 약속을 해두었는데…』
田川 회장은 月刊朝鮮이 취재차 온다니 일본 당국의 반응도 필요할 것이라고 예단하고 오후 3시에 면담을 신청해 두었다는 것이다.
「不敢請 固所願(불감청 고소원)」이었다. 택시를 불러 시청으로 갔다. 총무부장실은 3층에 있었다. 50代 후반의 우메가기(梅垣 誠) 총무부장은 전형적인 공무원 스타일이었다.
3대 7 가르마에 검은 안경테, 흰 와이셔츠. 田川 회장과는 구면이었다. 우토로 문제로 자주 만난다고 한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朝鮮日報 일본어판은 자주 본다』면서 『月刊朝鮮의 聲價(성가)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고 운을 뗐다. 사노(佐野純二) 총무과장과 다카하시(高橋辰夫) 총무계장이 배석했다. 통역은 金고문이 맡았다.
―작년 7월 한국의 국회의원들이 우토로에 대한 공동실태조사를 우지市에 제안한 걸로 아는데 어떻게 진척되고 있습니까.
총무부장은 두 배석자와 몇 마디를 나누더니 말했다.
『당시 통역에 문제가 있었답니다. 공동실태조사는 약속한 것이 아니고 서로 노력하자고 했답니다』
응수가 묘했다.
―우토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곳 노무자들은 일본의 필요에 의해 모였고 일본의 패전으로 남았는데….
『그건 제가 답할 입장이 아닙니다. 역사나 전쟁에 관련된 이야기는 국가 간의 공식루트를 통해 문답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이 나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배석한 두 사람은 대화내용을 적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토로도 우지市의 한 부분인데 그곳의 주거환경이 악화되면 인근 지역에도 감염될 텐데 어떤 예방조처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그 부분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주민들이 마을 가꾸기에 나서면 市에서 행정지원을 하겠지요.
『당연하지요. 도시가 개발되는데 市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시장님부터 나설 겁니다. 문제는 주민들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실현하는지에 달렸지요』
이번에는 金고문이 나섰다.
―주민들은 공동주택을 원하고 있는데 市에서 보조할 생각은 있습니까.
『그 문제는 현재 재판 중인 토지의 소유주가 결정된 후에 의논할 사안이지요. 최고재판소의 판결을 본 뒤 얘기합시다』
공시지가도 없는 우토로―토지소유자가 누구든, 주거환경은 개선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지주가 결정돼야 개발비용이나 공사규모가…』
모든 게 땅 주인에게 집약됐다. 더 이상의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우토로의 공시지가는 어떻습니까.
『없습니다. 거긴 표준지역이 아니거든요. 우지市에는 공시지가가 없는 곳이 많습니다. 제가 사는 곳도 그런데요』
정부에서 고시하는 땅값이 없다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일어섰다. 머쓱했던지 총무부장이 한마디 덧붙인다.
『토지 소유주만 결정되면 市에서도 주민들과 협조해 환경개선에 앞장설 겁니다. 그리고 실례의 말씀이지만, 인터뷰 기사는 언제 나옵니까?』
시청을 나와 길가 식당에서 카레라이스로 배를 채웠다. 오후 4시였다. 점심인지, 저녁인지. 밥값은 田川 회장이 냈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전날 약속한 대로 오전 10시 오사카 총영사관에 갔다. 金庚壽 영사는 기다리고 있었다. 교토(京都) 담당인 그는 우토로 문제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 정보도 많았다. 마을의 형성과정은 물론 주민들의 생활상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필자는 전날 田川 회장에게 물어보려던 말을 金영사에게 던졌다.
―우토로의 땅 거래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본래 그 땅은 일본 국영회사 소유였는데 在日동포의 손에 넘어가면서 실타래처럼 엉켜 버렸습니다. 許昌九(허창구)→河炳旭(하병욱)→이나모토(稻本八十)→이노우에(井上正美), 이런 식으로 거치는 동안 3억 엔짜리 땅이 10억 엔으로 부풀어 올랐다가 2000만 엔까지 추락하는 요술까지 부렸습니다. 지금은 대략 6억 엔에 호가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땅값이 그토록 널을 뛰었을까.
金영사는 총영사관에서 만든 「우토로 문제」란 보고서를 보여 주었다. 우토로의 토지문제 진행경과가 6페이지에 걸쳐 적혀 있었다.
우토로의 역사<교토부(京都府) 소유였던 우토로 일대 땅은 비행장을 만들면서 국영기업인 일본국제항공공업의 소유가 됐다가 패전 후 닛산차체(닛산자동차 前身)로 넘어간다. 그 후 닛산이 경영난으로 땅을 처분하게 되면서 주민들에게 매입을 권한다. 지상 住居權(주거권)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자들이 돈이 있을 리 만무. 이들은 「일본을 위해 뼈 빠져라 일했는데 설마 살던 땅에서 나가라고 하겠느냐」며 무시해 버렸다.
닛산차체는 마을 유지인 許昌九씨에게 3억 엔에 땅을 사라고 꼬드겼고 許씨는 당시 거류민단 교토지방본부장이었던 河炳旭씨에게 돈을 빌려 땅을 매입한다. 河씨는 「西일본식산」이란 부동산 회사를 만들어 오사카 商銀(상은)으로부터 5억 엔을 대출받아 許씨에게 빌려 주었던 것. 이후 西일본식산 회사는 우토로 땅과 함께 일본인 건설업자인 가나자와(金澤德明)씨에게 10억 엔에 넘어간다. 1988년 9월의 일이었다>
―주민들은 몰랐나요.
『그런 모양입니다. 許씨가 애당초 돈도 없었고, 설사 형편이 된다 해도 어떻게 주민들이 수십 년째 살고 있는 땅을 사고팔겠느냐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땅이 거래된 직후 西일본식산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건물수거 토지명도」소송이 걸려오자 모두 화들짝 놀랐지요.
주민들은 가나가와(神奈川)에 있는 닛산차체 본사에 몰려가서 집단항의를 벌였고 일본인 NGO인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의 지원을 받아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에 강제철거의 부당성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원님 떠난 뒤 나팔」이었지요』
여기서 이상한 일이 또 생긴다. 西일본식산의 형식상 대표였던 이나모토氏가 실제 오너인 일본인 가나자와 몰래 在日동포인 이노우에氏에게 즉석화해 형식으로 2000만 엔에 땅을 넘겨 버린 것이다.
―어떻게 10억 엔짜리 땅이 2000만 엔에 거래됩니까.
『글쎄요. 소문에는 실제로 돈이 오간 적은 없다고 합디다만…』
어쨌든 작년 3월 京都지법에서 새 주인으로 인정된 이노우에氏는 땅값을 11억 엔으로 정하고 우토로 주민들에게 사라고 했다. 주민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그는 마을의 빈 집을 골라 「시범 강제철거」를 예고한다.
―작년 「우토로 강제철거 소동」이 바로 그거군요.
『맞습니다. 당시 총영사관에서는 철거에 따르는 공권력 투입으로 주민들과의 마찰이 예상돼 주민대표와 이노우에氏를 한자리에 불렀습니다. 이노우에氏는 나와서 「주위에서 반대하면 안 하겠다」고 합디다. 그런데 주민대표는 이날 안 나왔습니다』
金영사는 이 대목에서 「말하기가 참 조심스럽다」고 했다. 주민대표의 불참은 「수용」보다는 「맞대응」을 의미한다. 이는 개인 지주의 강제철거를 일본 정부의 조선인 부락 철거로 「이슈化」하려는 움직임으로 감지되더란다. 강제철거→집단저항→언론보도→정부차원의 해결. 그건 결코 바람직한 수순이 아니다.
金영사는 언론의 보도방향에도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우토로의 주거권은 2000년 11월14일 일본 최고재판소의 「퇴거명령 확정」으로 이미 사법적 절차가 끝났습니다. 최근의 쟁점은 그 땅의 소유주가 누구냐를 가리는 겁니다. 일본인이냐, 아니면 在日동포냐』
在日교포와 일본인이 땅 소유권 재판 중
그런데도 국내 언론들은 철거위기에 처한 「징용동포들의 극한상황」에만 포커스를 맞춘다는 것이다.토지 소유권 재판도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일본인 가나자와氏가 사망하고 그의 사위인 오오하다(大畑耕一·39)氏가 회사를 이어받았다. 그는 작년 11월9일 오사카(大阪) 고법에서 열린 상고심에서 이노우에氏에게 승소해 6월의 최고재판소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누가 이길까요.
『현재로선 99% 오오하다 쪽입니다』
―일본인이 지주가 되면 우토로 주민들에게 더 불리한 것 아닙니까.
『두고 봐야겠지요. 오오하다氏는 아직 강제철거에 대해 한마디도 안 했으니까』
―이제 주민들이 해야 할 일은 뭘까요.
『땅에 대한 구체안을 내놓아야 합니다. 매입할 것인지, 빌릴 것인지. 아니면 공동주택을 만들자든지 뭔가 결정을 해야 합니다. 지주와 담판할 카드가 나와야지요』
―교포사회에서의 지원도 필요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보다는 우토로 땅에서 재미를 본 사람들에게 그에 합당한 성금을 내라고 해야겠지요』
―주민회에서는 우토로에 박물관을 세워야 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아직은 이릅니다. 지금은 집 걱정할 때입니다』
金영사의 말은 단호했다. 녹음기를 껐다. 그는 『신사이바시(心齋橋)에 맛있는 메밀국수 집이 있다』며 안내했다. 점심은 필자가 샀다.
「우토로 어머니의 노래」다음 행선지는 다시 우토로. 오후 5시 주민회의 嚴明夫 부회장을 만나 주민들의 공동대책을 듣기로 했다.
이번에는 게이한(京阪)선을 타고 교토로 가다 단바바시(丹波橋)에서 긴데츠(近鐵)선으로 바꿔 타고 이세다(伊勢田)로 갔다. 전날보다는 차비도 적게 들고 시간도 20분 절약됐다.
약속시간이 좀 남기에 혼자서 마을을 다시 돌아보았다. 어제 못 보았던 구호도 많았다. 한 건물 벽에는 「우토로 어머니의 노래」가 적혀 있었다.
<싫어, 싫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를 떠나지 않아/ 저승사자가 날 데리러 올 때까지는 절대로/(중략)/ 나는 홀로 사는 재일조선인/ 몸이 아프면 옆집 친구가 보살펴 주지/ 난 외톨박이가 아니야. 외롭지 않다구/ 나는 우토로의 어머니니까>
주민들의 구술을 그냥 받아 적은 거란다. 嚴부회장 사무실은 마을 초입에 있었다. 「우토로 주민회(町內會) 부회장」인 그는 일본어로 인사를 했다. 한국말은 못 했다. 명함을 건네면서 「1953년 12월17일生」이라고 적었다.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오사카大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9년 전 우토로 토지대책위원회 사무국장 당시 아사히(朝日)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한국계 일본인』이라고 해서 화제가 됐다한다.
「미국에도 이탈리아계·일본계·중국계가 있듯이 일본에도 한국계·미국계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건설회사 사장인 그는 몸이 불편한 金敎一(김교일) 회장을 대신해 주민회의 모든 것을 처리하고 있었다. 필자는 「우토로 토지매입에 관련된 조사」 앙케트를 끄집어냈다.
작년 12월 在日한국청년회 교토지방본부가 만든 이 앙케트에는 「토지매입 의사가 있는 가구」 82%, 「자금마련이 가능한 가구」 54%, 「공영주택 거주를 희망하는 가구」 61%로 나와 있다.
세 가지 해결책―이 정도면 주민회에서 우토로 땅을 일괄 매입할 수 있겠네요.
『그건 잘못된 조사입니다. 현재 땅을 매입할 수 있는 가구는 10%도 안 됩니다. 자금마련도 쉽지 않고요. 수치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아니, 불과 5개월 전 자료인 데도 틀립니까.
『땅값 계산이 잘못됐습니다. 그땐 평당 3만 엔으로 계산했는데 지금은 평당 10만 엔이 넘어요. 세 갑절이나 뛰었는데 어떻게 수치가 예전과 같겠습니까』
그는 이틀 전 주민모임에서 검토된 「우토로 재생플랜」을 보여 주었다. 그 안에는 토지소유 형태와 관련한 세 가지 案(안)이 적혀 있다.
「1. 거주자가 토지를 사들이는 것
2. 거주면적만큼 借地料(차지료)를 내는 것
3. 살던 집에서 나와 신축 공영주택으로 옮기는 것」
『제1 안은 주민이 현재 점유하고 있는 토지면적을 실제가격으로 사들여 개인자산으로 만드는 것인데, 약 10%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제2 안은 토지 임대료(평당 3만~5만 엔)만 내고 現 상태대로 유지하는 방안으로 40~60%가 찬성했습니다. 제3 안은 주민회에서 공동주택을 지어 소정의 임대료만 받고 입주시키는 것으로 고령자들에게 국한됩니다』
―이 방안들도 지주와 합의가 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오사카 고법의 판결이 나온 뒤 승소한 西일본식산의 오오하다 사장과 두 차례 만났습니다. 장시간 대화를 나눴는데 분위기가 괜찮았습니다. 땅 문제는 앞으로 잘 풀릴 것 같습니다』
―평당 10만 엔이면 총 6억4000만 엔인데 그런 목돈이 어디서 나옵니까.
『일괄매입은 부담이 큽니다. 현재 주민들이 점유하고 있는 면적은 4000평이니 우선 그것부터 해결해야겠지요. 돈이 모자라면 융자를 받거나 주위에 도움을 청할 생각입니다. 조국에서도 힘을 보태주십시오』
嚴부회장은 『마침 서울에서 KINS(지구촌청년동포연대) 회원들이 왔으니 저녁이나 같이 하자』며 일어섰다. 필자는 사양했다. 그보다는 해거름의 우토로를 좀더 봐두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