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인물 탐험] 부국강병에 성공한 군주 世祖

『비가 너무 많이 내리거나 한 줄기 태양빛이 너무 많이 내려 쪼여도 나의 탓으로 여겨져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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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東埈 고려大 강사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역임. 現 고려大 강사. 저서 「관중과 제환공」, 「치도와 망도」, 「통치학원론」, 「삼국지통치학」, 「조조통치론」, 「중국문명의 기원」 등.
경복궁內에 있는 경회루.
나라를 개창한 시조의 廟號(묘호)는 통상 「太祖(태조)」 또는 「高祖(고조)」라고 했다. 중국의 漢(한)·唐(당)은 모두 高祖라고 한 데 반해 宋(송)·明(명)은 太祖라고 했다. 太祖와 高祖는 모두 조상을 뜻하는 「祖(조)」의 효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太祖와 高祖의 뒤를 이어 創業(창업)의 기틀을 다지고 守成(수성)의 문을 연 인물은 통상 「太宗(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明나라 永樂帝(영락제)의 묘호는 太宗이 아니라 「成祖(성조)」이다. 이는 거의 창건자에 버금하는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었다. 元(원)나라를 개창한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世祖(세조)로 칭했다. 北京을 점령해 명실상부한 황제가 된 淸(청)나라의 順治帝(순치제)도 世祖였다. 世祖 역시 사실상 開國시조에 버금하는 인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世祖와 成祖는 太宗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조의 世祖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그 역시 死後에 신하들로부터 창업주에 버금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로 평가받았다. 諡號(시호)만으로 볼 때 世祖는 父王인 世宗(세종)이나 祖父인 太宗보다 더욱 높은 칭송을 받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조의 역대 君王 중 가장 부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먼저 조선조 때의 일로는 영남 士林派(사림파)의 거두인 金宗直(김종직)의 罷職(파직)사건과 死六臣(사육신)사건을 들 수 있다.
 
  金宗直은 世祖의 정책에 반대해 파직된 뒤 世祖를 비난하는 내용의 「弔義帝文(조의제문)」을 지은 바 있다. 그의 문하생인 金馹孫(김일손)이 연산군 때 史草(사초)를 만들면서 스승의 조의제문을 삽입한 일로 인해 소위 戊午士禍(무오사화)가 빚어졌다.
 
  金宗直이 부관참시를 당한 이 사화로 인해 영남의 士林세력은 世祖를 극단적으로 배격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풍이 世祖를 왜곡하는 한 이유가 됐다.
 
 
 
 李光洙의 소설 「단종애사」가 世祖像 왜곡
 
李光洙의 소설「단종애사」는 世祖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켰다.
  死六臣 사건도 世祖를 왜곡하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원래 李塏(이개)와 朴彭年(박팽년), 成三問(성삼문) 등이 주도한 端宗(단종) 복위 음모 사건은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그토록 美化(미화)되지는 않았다.
 
  이들은 肅宗(숙종) 24년에 현감을 지낸 申奎(신규)의 상소를 계기로 肅宗이 賜死(사사)된 魯山君(노산군)을 端宗으로 追復(추복)하면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申奎는 『死六臣이 天命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음모를 꾸며 결국 端宗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端宗의 무덤을 돌보고 왕호를 내릴 것을 주장했다.
 
  肅宗은 이를 받아들여 노산군을 추복하면서 이들 사육신에 대해서도 그들의 절의를 기리는 조치를 취했다.
 
  18세기에 나온 河緯地(하위지)의 「丹溪遺稿(단계유고)」는 肅宗이 『當世에는 亂臣(난신)이나 後世에는 忠臣이다』 라고 말한 世祖의 가르침을 좇아 이들의 節義(절의)를 기리게 되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렇다면 世祖는 왜 현대에 들어와 그토록 왜곡된 것일까.
 
  이는 李光洙(이광수)의 역사소설 「端宗哀史(단종애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29년 6월에 발간된 이 소설은 조선조 후기의 野史인 「練藜室記述(연려실기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소설에서 李光洙는 端宗을 日帝의 핍박을 받고 있는 조선 민족처럼 그리면서, 首陽(수양)을 마치 日帝처럼 묘사해 놓았다. 이는 당시 독자들에게 世祖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왜곡현상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학자들의 안이한 자세였다. 이들은 「世祖실록」 등을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면밀히 검토하기는커녕 왜곡으로 점철된 「단종애사」와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했다.
 
  이들이 世祖의 그릇된 처사에 분개한 나머지 끝내 벼슬을 하지 않고 여생을 보낸 사람으로 기술해 놓은 生六臣(생육신) 중에는 南孝溫(남효온)과 같이 世祖 즉위 당시 겨우 한 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도 포함돼 있다.
 
  이는 남효온의 문집인 「秋江集(추강집)」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無비판적으로 수용한데 따른 것이다.
 
 
 
 君號가 「晉平」에서 「首陽」으로 바뀐 사연
 
  世宗은 소헌왕후 沈씨와의 사이에서 長子인 文宗(문종)을 비롯해 훗날 世祖가 된 2子인 首陽과 3子인 安平(안평), 6子인 錦城(금성) 등 모두 8명의 아들을 두었다.
 
  首陽은 원래 11세 때 군기부정 윤번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면서 「晉平(진평)」이라는 君號(군호)를 받았다. 재위 27년을 전후로 5子인 廣平(광평)과 7子인 平原(평원)을 한 달 간격으로 잃고 낙담한 世宗은 首陽이 王家의 버팀목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의 君號를 「으뜸 剛健(강건)」의 뜻을 지닌 「首陽」으로 바꾸었다.
 
  이는 首陽에 대한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당시 長子인 文宗은 매우 병약했다. 世宗은 유사시에 首陽이 文宗의 대리 역할을 할 것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世宗 말기의 국제정치 상황은 매우 불안했다. 世宗 31년에 몽골의 에센(也先)이 明나라 군사를 하북성의 土木堡(토목보)에서 격파하고 明나라 제6대 황제인 正統帝(정통제)를 포로로 잡아가는 소위 「土木之變(토목지변)」이 일어났다.
 
  그러자 明의 병부시랑 于謙(우겸)이 황제의 동생(景泰帝·경태제)을 帝位에 앉히고 정면대결의 자세를 취했다. 에센이 노하여 明나라에 침입해 北京을 포위했으나 明나라는 끝내 굴하지 않았다.
 
  결국 에센은 물러가고, 正統帝는 1450년에 조건 없이 송환되었다. 正統帝는 태상황제가 되어 南宮(남궁)에 유폐되었다가 7년 뒤에 景泰帝가 중병에 걸린 틈을 타 복위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奪門之變(탈문지변)」이라고 한다. 그는 제8대 황제에 다시 즉위한 까닭에 그때의 연호를 따라 天順帝(천순제)로 불리기도 한다.
 
  世宗은 正統帝가 송환되던 해에 운명했다. 文宗은 父王인 世宗을 닮아 好學(호학)하면서도 국방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의 身病(신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그는 재위 2년 3개월 만에 39세로 요절하고 말았다.
 
  조선조는 北邊(북변)의 위협이 상존한 상황에서 잇달아 國喪(국상)을 맞게 되었으나, 정작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어린 군주에 있었다. 12세의 端宗으로서는 이런 위기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해 나갈 수 없었다.
 
 
 
 黃標政事
 
  사실 이때 宗親과 元老대신들은 머리를 맞대고 先王의 왕자 중 나이가 많고 경륜이 있는 인물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러나 조선조는 이러한 사태를 맞이해 안이하게 대처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世宗 시절 이래 하나의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해 王權(왕권)을 압도하게 된 宰相府(재상부)의 안이한 자세에 있었다.
 
  당시 의정부는 영의정 皇甫仁(황보인)과 좌의정 南智(남지), 우의정 金宗瑞(김종서) 등이 있었다. 좌의정 南智는 신병으로 휴가 중이었던 까닭에 政事(정사)는 皇甫仁과 金宗瑞의 손에 의해 처결되었다.
 
  이로 인해 관료를 임명할 때 3명의 이름이 기재된 存案(존안)자료에 이들이 염두에 둔 자의 이름 아래 黃標(황표)를 부착해 올리면 端宗은 단지 그곳에 낙점하는 소위 「黃標政事(황표정사)」가 나타났다. 이에 대한 비판여론이 일자 잠시 편법으로 소위 特旨(특지)가 나타났으나 이내 황표정사로 환원되고 말았다.
 
  이를 기화로 皇甫仁과 金宗瑞의 자식과 일족이 司憲府(사헌부) 및 司諫院(사간원)에 대거 포진되었다. 宰相權(재상권)과 더불어 臣權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하고 있던 言論權(언론권)의 중추기관인 사헌부와 사간원이 재상권의 영향하에 들어가면 王權과 臣權의 균형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군주는 12세의 어린 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흔히 都廳(도청)으로 불리며 각종 건축과 토목을 담당한 分繕工監(분선공감)이 각종 토목공사를 주관하면서 禁軍(금군)을 마음대로 사역시켰다. 도청은 의정부의 지휘 아래 있었던 까닭에 이는 皇甫仁과 金宗瑞의 비호 아래 가능했다.
 
世祖가 묻힌 광릉.
 
 
 安平의 야심
 
  당시 이들과 내통해 야심을 키운 인물이 바로 安平이었다. 그는 사실 文宗 때부터 관료인사에 깊숙이 간여하고 있었다. 成三問의 부친인 의주목사 成勝(성승)이 위법행위로 告身(고신·임명장)을 회수당한 뒤 安平의 방문을 계기로 고신을 반환받은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실록에 死六臣 중 일부가 安平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기록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시 자신의 야망을 위해 安平을 부추긴 인물은 李賢老(이현로)였다. 풍수학에 재주가 있었던 그는 安平을 배경으로 각종 越權(월권)과 비리를 일삼으면서 首陽과 安平을 이간질했다.
 
  首陽의 입장에서 볼 때 국가존망과 왕실의 보전을 심각히 생각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韓明澮(한명회)가 등장했다. 李賢老와 친구이기도 한 韓明澮는 청주 출신으로 모친이 임신한 지 일곱 달 만에 낳은 까닭에 「칠삭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명민한 그는 이미 金宗瑞와 연계된 安平이 조만간 모반을 일으킬 것으로 내다보고 당시 장원급제해 사헌부 감찰로 활동하던 權擥(권람)을 首陽에게 소개했다. 權擥이 首陽에게 선제공격을 권했다.
 
 
 
 首陽, 明나라에 다녀오다
 
  『李賢老는 安平大君의 家奴(가노)로 반드시 장차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지금 安平은 羽翼(우익)이 이미 이뤄져 있습니다. 明公(명공)이 宗社(종사)와 生民(생민)을 염려하지 않으신다면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首陽은 신중했다.
 
  『安平이 비록 대신들과 결탁하였을지라도 모두 재물로 사귄 것이고, 그들 또한 모두 용렬한 자들이오』
 
  首陽은 비록 말은 이같이 했으나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후 韓明澮가 首陽을 찾아갔다. 首陽은 처음 본 그에게 마치 옛 친구를 대하듯 물었다.
 
  『지난번에 權擥을 보고 그대가 이 세상에 뜻이 있음을 알았으니 청컨대 나를 위하여 籌策(주책)을 해주시오』
 
  『安平이 대신들과 결탁하여 장차 不軌(불궤)를 도모하려 하는 것은 길 가는 사람들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安平의 역모를 폭로하지 않으면 즉시 擧義(거의)할지라도 성사키 어려울 듯합니다』
 
  首陽이 韓明澮와 손을 잡았다. 이때 마침 중국에서 端宗을 조선 국왕으로 봉하는 誥命(고명)이 왔다. 誥命이 있으면 반드시 고관인 정승이 謝恩使(사은사)로 가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순서상 金宗瑞가 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高齡(고령)을 이유로 이를 회피했다. 이때 首陽은 韓明澮와 權擥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使行을 자처했다.
 
  首陽이 使行을 자청한 것은 외교절차를 조속히 마무리 지어 왕실의 권위를 공고히 하고자 한 데 있었다. 首陽의 使行은 모두 넉 달 여의 시간이 걸렸다. 이 사이 首陽은 부패한 明나라 조정의 실상을 목도하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세계를 보는 그의 시각이 크게 확대되었다.
 
  首陽이 귀국한 후 정국의 기류는 더욱 급해졌다. 首陽이 家奴 趙得琳(조득림) 등을 시켜 安平의 가노 및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탐지케 했다. 韓明澮 또한 安平의 심복인 군기녹사 趙藩(조번)에게 접근했다. 韓明澮가 자주 왕래하자 조번이 이내 자랑스럽게 말했다.
 
  『安平은 관인한 도량으로 사람을 사랑하며 선비에게 몸을 낮추어 여러 사람의 환심을 얻고 있으니 재주와 덕을 가지고 어찌 오랫동안 남의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도 한번 만나면 마땅히 먼저 용납받을 것이네』
 
  韓明澮가 기쁜 빛을 하며 함께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을 묻자 조번이 모든 것을 숨김 없이 말해 주었다.
 
  이때 모반을 꺼림칙하게 생각한 皇甫仁이 金宗瑞와 같이 山陵(산릉)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시냇가에서 점심을 먹던 중 金宗瑞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지위가 極品(극품)에 이르렀고 이미 연로하였으니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편안히 자리 위에서 죽으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金宗瑞가 눈을 부릅떴다.
 
  『이미 정해진 일인데 어찌하여 이러고저러고 하는가』
 
  이들은 곧 安平의 우익인 李穰(이양)을 도체찰사, 閔伸(민신)을 이조판서, 조번을 軍器錄事(군기녹사), 李澄玉(이징옥)을 함길도 도절제사로 삼는 등 거사에 대비했다. 당시 이양은 늘 安平을 上典(상전)으로 부르며 이같이 말했다.
 
  『今上은 어리고 병이 많으니 비록 자란다 하더라도 반드시 시원치 못할 것입니다. 만일 상전이 보위에 오르면 진실로 민심에 부합할 것입니다』
 
  당시 金宗瑞는 端宗이 성년이 되기 전에 자신의 지위와 기반을 확고히 다져 놓고자 했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이런 구상을 실현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安平이었다. 그러나 金宗瑞는 知小謀大(지소모대: 아는 것이 협소한 데도 꾀하는 일이 원대함)의 인물이었다. 이는 「노산군일기」(원년 3월22일자)에 나오는 다음 기록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安平의 역모
 
  이날 金宗瑞의 집에 무리들이 모여 주연을 벌였다. 이때 首陽에게 마음이 기울어진 司僕直長(사복직장) 洪允成(홍윤성)도 참석했다. 주연이 한창 무르익자 金宗瑞가 말했다.
 
  『전에 安平大君이 누옥을 찾아와 굳게 맹서했으나 보답할 길이 없었소. 속히 安平大君이 친애하는 자들이 모두 요로에 앉을 수 있도록 천거하시오』
 
  이튿날 밤중에 金宗瑞가 사람을 시켜 洪允成을 불렀다. 洪允成이 들어가자 金宗瑞는 3명의 妾(첩)의 시종을 받으며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의 옆에는 强弓(강궁)을 잡은 2명의 무사가 호위하고 있었다. 金宗瑞가 洪允成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이같이 말했다.
 
  『너를 친자식같이 대접하니 어제 우리들이 논한 것을 누설하지 말라』
 
  이어 술을 내오게 하자 첩이 작은 잔에 술을 부어 가지고 왔다. 金宗瑞가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술고래다. 큰 사발에 부어 와야 한다』
 
  이어 세 번 큰 사발에 부어 마시게 한 뒤 활을 당기게 하자 洪允成이 힘껏 잡아당겨 활이 부러졌다. 金宗瑞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首陽은 엄하고 어질지 못하여 전혀 사람을 구제하지 못하니 남의 윗사람이 되기에 족하지 못한 데도 너는 그를 섬기고 있다. 그러나 安平大君은 거친 무리를 포용하여 도량이 크다. 그런데도 너는 섬기지 아니하니 무슨 까닭인가.
 
  李賢老는 安平을 일컬어 「끝까지 대군의 지위에서 늙을 분이 아니다」라고 했다. 하물며 지금 임금은 어리고 국가는 불안하니 섬기는 데 마땅한 사람을 얻기만 하면 공명을 누리는 데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이 기록을 통해 당시 金宗瑞가 안평을 끼고 모반을 획책했다는 사실을 확연히 파악할 수 있다.
 
  당시 首陽이 權擥 및 韓明澮와 대책을 논의하자 韓明澮가 중추원 첨지사로 있는 洪達孫(홍달손)을 비롯해 禁軍인 楊汀(양정) 등을 천거했다.
 
  이때 마침 安平이 일행 60여 명과 함께 황해도 해주로 온천욕을 떠났다. 얼마 후 그는 부인 정씨가 죽자 묘 자리를 알아본다는 핑계로 충청도로 내려가 충청도관찰사 安完慶(안완경)을 만났다.
 
  이들은 端宗 원년 10월12~22일 사이에 거사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창덕궁의 수리를 지연시켜 이를 구실삼아 외방의 군인 수천 명을 소집한 뒤 비밀리에 황해도와 충청도 해안지역의 군사를 징발해 합세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癸酉靖難
 
  이를 탐지한 權擥이 首陽에게 이를 알리고 속히 대처할 것을 건의했다. 당시 王命 전달을 전담한 환관 金衍(김연)은 安平의 추종자였던 까닭에 端宗에게 이를 보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首陽은 곧 임기응변의 權道(권도)로 먼저 음모자들을 제거한 뒤 나중에 보고하는 先斬後啓(선참후계)의 계책을 취했다. 先制공격의 날짜는 10월10일로 정해졌다. 安平 측도 이를 곧바로 눈치 챘다. 權擥이 거사 8일 전에 이 사실을 알고 首陽에게 말했다.
 
  『皇甫仁은 명공이 이미 거사하고자 한다는 것을 듣고 비밀히 金宗瑞에게 편지를 주어 이르기를, 「大虎(대호: 首陽을 지칭)가 이미 알았으니 어찌 해야 하오」 하자 金宗瑞가 이르기를, 「大虎가 비록 알았더라도 마침내 어찌할 수 있겠소」 했습니다. 장차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首陽이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저들이 비록 알더라도 회의하기를 3일, 經營(경영)하기를 3일, 약속하기를 3일로 하여 모두 8~9일은 걸릴 것이오. 만일 10일의 기한만 어기지 않으면 미칠 수 있을 것이오』
 
  「연려실기술」은 이를 두고 당시 金宗瑞 측의 모의 인원이 9명이었다는 식으로 기록해 놓았다. 항간의 떠도는 소문을 토대로 한 기록이 얼마나 부정확한지를 보여 주는 실례가 아닐 수 없다.
 
  「연려실기술」은 나아가 지략이 많은 金宗瑞를 두고 사람들이 「大虎」로 불렀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는 首陽을 두려워한 야인들이 大虎로 칭한 것을 교묘하게 바꿔 놓은 것이다. 당시 金宗瑞는 오히려 늙은 여우라는 의미의 「老狐(노호)」로 불리고 있었다.
 
  실록의 기록은 실질적인 兵權을 장악하고 있던 金宗瑞와 냉정한 판단력을 지닌 首陽의 운명이 일순간에 엇갈리게 된 배경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사실 金宗瑞는 德薄位尊(덕박위존: 덕이 박한 데도 자리가 높음)의 인물에 불과했다.
 
  당시 首陽은 거사 당일 저녁에야 비로소 추종자들을 모아 놓고 비로소 자신의 뜻을 밝힌 뒤 결연히 일어나 家奴 얼운과 함께 金宗瑞 집으로 향했다. 부인 尹씨가 따라 나오며 갑옷을 입혀 주었다.
 
  首陽이 金宗瑞의 집에 이른 뒤 면회를 청하자 金宗瑞가 한참 만에 나왔다. 당시 金宗瑞는 무사들을 모아 음식을 먹이고 병기를 정돈하던 중이었다. 그는 首陽이 이르자 사람을 시켜 담 위에서 엿보게 하면서 이같이 주문했다.
 
  『사람이 적으면 나아가 접하고, 많으면 쏘아라』
 
  首陽 일행이 얼마 안 된다는 보고를 접하고 金宗瑞가 마침내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首陽의 지략이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때 首陽이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왔으면 승패가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金宗瑞의 죽음
 
  당초 首陽은 金宗瑞의 집으로 갈 때 權擥을 시켜 무사들을 자신의 저택에 가두게 한 뒤 나왔다. 이때 무사들이 떠들어 대며 다투어 튀어나오려고 하자 權擥이 문에서 저지하며 이같이 말했다.
 
  『우리들은 용렬하지만 大君은 고명하니 익히 계획했을 것이다. 그대들은 의심하지 말라』
 
  당시 金宗瑞는 문 밖으로 나온 뒤 의심을 떨치지 못해 首陽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首陽이 말했다.
 
  『해가 저물어 문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한 가지 일을 청하려고 왔습니다』
 
  金宗瑞가 두세 번 들어오기를 청하였으나 首陽이 굳이 거절하자 金宗瑞가 부득이 앞으로 나왔다. 이때에 얼운이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首陽이 꾸짖어 물리친 뒤 金宗瑞에게 말했다.
 
  『청을 드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金宗瑞가 편지를 받고서는 물러서서 달에 비춰 보는 사이 얼운이 철퇴로 金宗瑞를 쳐서 땅에 쓰러뜨렸다. 首陽이 金宗瑞를 제거한 뒤 權擥을 시켜 입직 승지를 불러오게 한 뒤 곧 승지 崔恒(최항)에게 전후사정을 전달하고는 이를 端宗에게 보고하게 했다. 이어 무사들을 모두 풀어 宮으로 들어오는 요소를 모두 방비케 한 뒤 이같이 令(영)을 내렸다.
 
  『안으로 들어오는 길이 심히 좁으니 재상으로서 들어오는 사람은 시종을 두고 혼자 들어오게 하라』
 
  얼마 후 皇甫仁을 비롯한 金宗瑞의 무리가 모두 철퇴를 맞고 즉사했다. 首陽은 곧 수하를 보내 安平을 포획한 뒤 강화로 압송케 했다. 이때 首陽이 사람을 시켜 安平에게 편지를 보냈다.
 
  『네 죄가 커서 참으로 誅殺(주살)하지 않을 수 없으나 다만 世宗과 文宗이 너를 사랑한 마음으로 너를 용서한다』
 
  그러나 安平은 楊花渡(양화도)에 이르자 급히 비복을 불러 옷을 벗어 입히고는 이같이 부탁했다.
 
  『네가 급히 가서 金宗瑞 정승에게 때가 늦어진 실수를 말하라』
 
  당시 金宗瑞는 죽지 않았다. 그는 깨어난 뒤 사람을 시켜 宮門을 지키는 자에게 이같이 고하게 했다.
 
  『내가 밤에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어 죽게 되었으니 빨리 의정부에 고하여 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싸 가지고 와서 나를 구제하게 하고, 속히 安平에게 고하여 內禁衛(내금위)를 보내도록 하라』
 
  그러고는 곧 女服(여복)을 갈아입은 뒤 가마를 타고는 아들 金承壁(김승벽)의 처가에 숨었다. 이때 首陽은 金宗瑞 등이 살아날 것을 염려해 곧 좌우에 명하여 이들을 치게 했다. 이에 金宗瑞는 결국 이들에게 잡혀 죽고 말았다. 이날 곧바로 金宗瑞 부자와 皇甫仁, 趙藩, 李賢老 등의 시체가 저자에 효수되었다.
 
 
 
 全權 장악
 
端宗이 유배생활을 했던 영월 청령포.
  端宗은 다음날 숙부 首陽이 정치를 보조하면서 君國大事를 모두 위임받아 처리한다는 교서를 반포했다. 이에 首陽은 영의정으로 이조와 병조의 판사를 겸해 군사와 인사, 행정을 장악케 되었다. 安平은 양녕대군을 비롯해 成三問과 朴彭年 등의 요청으로 이내 賜死되었다.
 
  곧바로 대대적인 개각이 이뤄졌다. 이때 훗날 死六臣으로 몰린 집현전 출신이 대거 발탁되었다.
 
  朴彭年은 좌부승지, 李塏(이개)는 사헌부 집의, 河緯地(하위지)는 사간원 좌사간, 成三問은 우사간이 되었다. 申叔舟(신숙주)는 우승지에 발탁되었다. 이는 계유정난이 소위 「황표정사」에 비판적이었던 집현전 등의 관료층으로부터 폭넓은 지지하에 실행된 것임을 뒷받침한다.
 
  계유정난은 「靖難(정난)」이라는 말 그대로 端宗을 해치려는 역도들을 쳐 위난을 평정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는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단종이 豊儲倉副使(풍저창부사) 宋玹壽(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 사실이 뒷받침한다. 당시 首陽은 왕실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속히 正妃를 맞아들여 세자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宋씨는 端宗보다 1년 위로 14세에 왕비에 책봉되어 中宗 연간인 1521년에 81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당시 端宗과 首陽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端宗이 왕비를 대동하고 首陽의 私邸(사저)를 방문해 연회를 개최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시행된 사냥대회에 참관한 사실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臣僚들의 지지 속에 이루어진 世祖 즉위
 
  端宗 3년 2월 금성대군의 모반음모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首陽을 처치하기 위해 무인들이 금성대군의 집에 은밀히 모여 활쏘기와 연회를 개최한 것이다. 대사헌 崔沆(최항) 등이 이 사실을 알고 이들의 처벌을 요청하고 나섰다.
 
  이때 왕비 宋씨의 고명과 관복이 明나라로부터 인준되어 이를 전달키 위한 사신이 온다는 전갈이 왔다. 이해 4월 말에 중국 사신이 서울에 도착해 두 달여 동안 국내에 머물게 되었다.
 
  이해 윤6월에 이르러 의정부와 六曹(육조)에서 금성대군에 대한 엄벌을 청하는 건의가 있었다. 금성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처족의 딸이 간택되지 않은 것 등에 불만을 품고 왕비를 음해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이들은 모두 처벌되었다.
 
  당시 端宗은 首陽의 장인인 우의정 韓確(한확) 등에게 首陽에게 禪位(선위)할 뜻을 전했다. 端宗은 연이어 발생되는 간당들의 음모가 모두 자신이 어려 안팎의 일을 잘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자책했다.
 
  이에 곧바로 禪位가 이뤄지게 되었다. 이는 결코 「단종애사」에 묘사된 바와 같이 首陽의 압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관례에 비춰 볼 때 왕비 책봉을 위해 明나라 사신들이 와 있는 와중에 首陽이 禪位를 위해 압력을 가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 端宗이 중국 사신에게 승지를 보내 禪讓(선양)의 배경을 설명한 데 이어 指揮(지휘) 張雄(장웅)이 작별인사를 할 때 중임을 감당할 수 없어 선양했으니 황제에게 잘 전달해 달라고 당부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成三問을 비롯한 大小 관원들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首陽이 경복궁으로 입궁할 때 모든 관료가 侍衛(시위)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成三問은 우부승지로 승진해 世祖가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 모두 참여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의 부친도 중추원동지사로 승진해 활동하고 있었다. 충청도관찰사 朴彭年을 비롯한 각 道의 관찰사들이 글을 올려 世祖의 즉위를 축하했다.
 
  그럼에도 「연려실기술」은 世祖가 선위를 받는 그날 朴彭年은 경회루 연못에 투신하려 했고, 成三問은 禪位를 간곡히 만류한 것으로 기록해 놓았다. 士林세력에 의해 왜곡된 전설을 그대로 채용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死六臣, 世祖의 王權강화에 반발
 
서울 노량진에 있는 死六臣 묘.
  그렇다면 端宗의 禪位를 당연시했던 死六臣은 왜 2년 뒤에 世祖를 제거코자 한 것일까. 이는 기본적으로 世祖의 王權강화책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世祖는 즉위하자마자 강도 높은 王權강화책을 구사했다. 이는 世宗 말기 이래 연이은 國喪과 어린 왕의 즉위로 인해 땅에 떨어진 왕권을 바로 세워 안팎의 위기를 일거에 구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成三問 등은 王權우위 체제에 반발했다. 이들은 臣權우위의 관료지배 체제를 원했다. 이들이 端宗 복위를 내세운 것은 자신들의 속셈을 호도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이들의 불만은 世祖가 의정부를 無力化한 가운데 다시 六曹直啓制(육조직계제)를 부활하는 등 王權강화책을 가시화하고 나선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원래 강력한 王權은 君臣共治(군신공치)를 강조한 성리학의 이념에 배치되는 것이다. 死六臣은 재상 중심의 王道(왕도)국가를 꿈꾼 鄭道傳(정도전)의 사상적 후계자에 해당했다.
 
  당시 成三問 등은 이 사건을 고변한 成均司藝(성균사예) 金質(김질)과의 대질심문에서 기괴한 논리를 펼쳤다. 이들은 世祖의 통치를 殷(은)나라 紂王(주왕)의 暴政(폭정)에, 자신들의 행동을 周武王(주무왕)의 義擧(의거)에 비유했다.
 
  당시의 世祖를 폭군으로 모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아가 이들이 취한 弑君(시군)방안은 사실 성리학의 이념과도 배치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들은 端宗 복위를 꾀할 명분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성리학의 교조적인 이론에 함몰된 원칙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成三問과 申叔舟의 사상적 차이
 
世祖를 보좌한 申叔舟의 사상은 覇道를 긍정한 荀子의 사상에 가까웠다.
  일찍이 成三問은 世宗 29년에 치러진 重試(중시)에서 제도개혁을 묻는 策問(책문)에 대해 「요순 등의 王道를 토대로 제도개혁보다 마음을 바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내용의 답안을 제출해 장원급제했다.
 
  당시 申叔舟는 「人材를 바로 등용해야 하는 것이 제도개혁의 요체에 해당한다」는 식의 답안을 제출해 乙科에 급제했다.
 
  成三問은 覇道(패도)를 唾棄(타기)하는 孟子의 입장에 충실한 데 반해 申叔舟는 覇道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荀子(순자)의 입장에 가까웠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것도 이들의 이런 사상적 차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계유정난과 世祖의 受禪(수선)은 결코 일신의 부귀영화를 꾀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는 世祖가 재위 14년 동안 시종여일하게 추진한 爲民(위민)정책과 부국강병책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經國大典(경국대전)」의 편찬을 들 수 있다. 「경국대전」은 바로 국가통치에 관한 원칙적인 대강을 밝히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경국대전」은 成宗(성종) 때 완결되기는 했으나 이미 刑典(형전)과 戶典(호전)은 世祖 때 완성되었다. 戶典이 완비됨에 따라 대소 관원을 비롯해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號牌(호패)를 차게 되었다. 이는 조세와 병역의 기본법이 확고히 마련되었음을 의미했다.
 
  世祖 10년에는 국가재정의 예산안이라고 할 수 있는 橫看(횡간)이 마련되었다. 횡간은 물자절약과 국가의 경비지출을 절감해 서민구제와 국방강화에 사용코자 하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는 당시 동서양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도 나의 탓…』
 
조선왕조의 기본법인「經國大典」. 世祖 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世祖 12년에 현직 관료에 한해 토지의 收租權(수조권)을 허락하는 職田制(직전제)를 마련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대해 刑典은 서민들의 생활과 직결된 것이었다. 世祖가 형전의 정비를 서두른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투철한 愛民(애민)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이같이 말한 바 있다.
 
  『내가 왕이 되기 전에는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들어도 재해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왕이 된 후에는 비가 너무 많이 내리거나 한 줄기 태양빛이 너무 많이 내려 쪼여도 이런 일들이 나의 탓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져 가슴이 아프고 조심스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그의 愛民정신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世祖실록」 2년 5월7일조의 기록은 그가 얼마나 백성들을 아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당시 사헌부가 성문 밖 사당에서 제사지내는 백성을 잡아들였다.
 
  世祖가 이 얘기를 듣고 장령 金瑞陳(김서진)을 불러들여 사헌부의 법집행을 질책했다. 이에 金瑞陳이 「六典(육전)」에 따른 것이라고 변명하자 世祖가 일갈했다.
 
  『나는 육전의 법이 잘못됐다고 한 것이 아니다. 육전의 규정은 그대로 두고 세세한 금지규정은 시행하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의 유학자들은 大體(대체)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눈앞의 快(쾌)한 일만을 힘쓰니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전에 내가 「가혹하게 사찰하지 말라」고 전교한 바 있다. 그런데도 다시 이를 어기고 있으니 그것은 무슨 법인가』
 
 
 
 검소한 君王
 
  世祖의 愛民정신은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고 탐학한 관원을 축출하기 위해 御史(어사)를 파견한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충청도 관찰사 金震知(김진지)가 백성들로부터 橫斂(횡렴)해 중앙에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극형에 처해진 사실이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당시 世祖는 어사 파견에 그치지 않고 직접 전국을 순행하며 백성들의 노고를 살폈다. 그는 순행 도중 백성들이 御駕(어가) 앞에서 上言(상언)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의 이해와 직결된 민원을 다루기 위해 매일 광화문 밖에서 민원을 취합한 뒤 직접 민원인을 만나 이를 처결해 주는 소위 探籌法(탐주법)을 만들기도 했다. 東西古今을 통틀어 前無後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평생을 검소하게 산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사용하고 남은 石材와 木材를 이용해 세자궁을 짓도록 했다. 尙衣院(상의원)에서 東宮의 연적을 銀(은)으로 주조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실록은 그의 검약한 행보를 이같이 기록해 놓았다.
 
  『왕은 천성이 검약하여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의복은 항상 빨아 입고, 유희를 즐기지 않으며, 無益한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신들을 만나면 마음을 열고 성의를 다했다』
 
  그는 조선조의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단 한 명의 후궁을 둔 군주였다. 그는 늘 여러 功臣과 장수들에게 교만하지 말고 酒色(주색)에 탐닉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가 세자 교육에 남다른 열성을 기울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世祖실록」 13년 정월 29일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하늘이 장차 大任(대임)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려면 반드시 먼저 筋骨(근골)을 수고롭게 하고 그 心志(심지)를 고통스럽게 하는 법이다. 나는 이 말을 가지고 朝夕(조석)으로 세자에게 가르치고 있다』
 
  世祖는 大任을 맡은 최고통치권자의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4500호를 北邊으로 徙民
 
  그의 爲民정신은 「세조실록」 10년 5월17일조의 기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5경에 北所(북소: 도성 북쪽 초소)가 무너져서 숙직하던 군사들 가운데 압사한 자도 있었고 부상을 입은 자도 있었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서 도롱이만 걸치고 北門 밖으로 건너가자 숙위하던 여러 장수들이 모두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임금이 大怒(대로)하여 크게 힐책하자 여러 장수들이 후들후들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친히 스스로 감독하여 돌아보고, 죽은 자를 거두고 부상한 자를 약으로 치료했다. 임금이 측은하게 여겨 눈물을 흘리고 정오가 되도록 수라를 들지 않았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그가 간단없이 추진한 爲民정책은 그의 통치철학인 동시에 富國强兵의 大전제이기도 했다.
 
  그가 재위 6년의 武科시험에 무려 1800명을 합격시킨 사실은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北邊(북변)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평안도와 함경도에 대한 대대적인 徙民(사민)정책을 실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당시 徙民정책으로 인해 下三道(하삼도)에서 선발된 가구는 모두 4500호에 달했다.
 
  이는 아무리 영토를 확보할지라도 사람이 살지 않는 空地(공지)로 남겨 둘 경우 결코 영토로 편입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강병책이 약여하게 드러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世祖는 雜學(잡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재위 10년에 天文(천문)·風水(풍수)·律呂(율려)·醫學(의학)·陰陽(음양)·史學(사학)·詩學(시학) 등 소위 7門(문: 전공)을 만든 뒤 연소한 文臣들을 선발해 이를 전공케 했다. 이때 15세기 영남사림파의 비조인 金宗直(김종직)은 자신이 사학문에 배속되자 이를 거부하고 나섰다.
 
  『지금 文臣으로 7門을 나누어 닦게 하는데 詩學은 본래 유학자의 일이지만 그 나머지 雜學이야 어찌 유학자들이 마땅히 힘써 배울 학문이겠습니까. 雜學은 각각 業으로 하는 자가 있으니 능통하는 데에 반드시 文臣이라야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결국 金宗直은 世祖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고 말았다. 金宗直은 成三問 등과 마찬가지로 성리학의 교조적인 이념에 함몰돼 있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世祖는 父王인 世宗과 마찬가지로 실용학문에 관심이 매우 깊었다. 이는 그가 文臣들과의 고전강독 과정에서 四書三經(사서삼경) 이외에도 韓愈(한유)의 「原道(원도)」와 소동파의 「東坡集(동파집)」 등 漢唐(한당)을 포함해 先秦(선진: 춘추전국)시대의 책들을 두루 채택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世祖는 심지어 佛經인 「楞嚴經(능엄경)」을 강론하려고 시도했다.
 
 
 
 天祭를 지내다
 
  당시 世祖가 고루한 성리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분적 한계가 있는 韓明澮와 柳子光 같은 인물을 과감히 발탁한 것은 그의 확고한 主體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단군과 고구려 동명왕을 높이 기리고 ?丘壇(환구단)을 설치해 天祭(천제)를 행한 것이 그 실례이다. 그는 天子만이 天祭를 지낼 수 있다는 성리학자들의 기존 고정관념을 깨고 국가의 대내외적인 자주성을 높이 고양한 것이다. 조선조의 역대 君王 중 그처럼 자주적인 입장을 취한 군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성리학자들의 고식적인 자세를 질타했다. 그가 經筵(경연) 대신 토론회 형식의 특이한 강독회를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 강독회에서는 宣傳官(선전관)이 나와 陣法(진법)을 강의하기도 했다. 재위 5년부터는 世祖가 직접 나서 경전과 역사를 강의하는 親講(친강)이 행해졌다.
 
  世祖는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微官(미관)까지 돌아가며 만나는 輪對(윤대)를 중시했다. 이 또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탁월한 리더십으로 안팎의 위기를 슬기롭게 타개하고 富國强兵을 이룬 世祖의 리더십은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世祖를 두고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조카의 보위를 찬탈했다는 식의 잘못된 평가는 시정되어야 한다. 死六臣 및 士林세력, 柳子光 등에 대한 전면적인 再평가도 속히 이뤄져야 한다.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은 世祖의 리더십을 통해 21세기 東北亞 시대를 슬기롭게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열쇠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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