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테이코 엔지니어링」사장 鄭載勳

『내 경영철학은「정직」… 직원들에게「모르는 것을 정직하게 얘기하라」고 한다』

  • : 김성동  ksd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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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저號·컬럼비아號 참사로 구겨진 美國의 자존심을 회복시킨 세계적 우주공학자

鄭載勳
1948년 황해도 재령 출생. 서울大 금속공학과 졸업. 美 캘리포니아주립 롱비치大 공학석사. 美 캘리포니아 어바인大 공학박사. 現 테이코 엔지니어링 사장.
2005년 8월9일 새벽 5시12분. 7명의 승무원을 태운 미국의 세 번째 우주왕복선인 디스커버리號가 14일간의 우주 활동을 마치고 미국 캘리포니아州 모하비 사막 에드워즈 공군기지에 안착했다.
 
  디스커버리號의 안착 후 미국 항공우주국(NASA) 빌 리디 부국장은 『이번 귀환으로 우리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음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고 말했다. 2003년 2월1일 지구 귀환 중 폭발해 승무원 7명의 목숨을 앗아간 컬럼비아號 참사로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을 중단해야 했던 미국 우주공학 기술 수준의 자존심 회복을 선언한 것이다.
 
  무사귀환한 디스커버리號에는 한국인 과학자 鄭載勳(정재훈·58) 박사 팀이 개발한 결빙방지 히팅 시스템이 장착돼 있었다.
 
  디스커버리號는 원래 2005년 5월22일에 발사될 계획이었으나, NASA 발사준비점검위원회(FRR)가 안전성 문제를 들어 발사 연기를 결정했다. 鄭박사 팀이 개발한 결빙방지 히팅 시스템을 장착한 후 디스커버리號는 우주로 날아갔다.
 
  1986년 1월28일 미국 우주개발 사상 최초·최악의 참사가 발생했다. 우주왕복선 챌린저號가 발사 1분12초 만에 공중 폭발한 것이다. 챌린저號 추진 로켓의 연결 부위에 있는 「O-링」의 균열 때문이었다. 이 사고로 미국은 우주계획 중단 위기에 처했었다.
 
  鄭박사는 우주왕복선 균열방지용 특수 열가열 장치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NASA가 이를 채택했다. 미국은 1988년 9월 디스커버리號를 성공적으로 발사할 수 있었다.
 
  鄭박사는 2004년 화성 탐사 로봇 스피릿과 오퍼튜니티의 핵심 부품인 극저온신경조직과 1562종류의 열장치를 개발했다. 2006년 발사 예정인 우주정거장 로봇 팔의 신경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미세 케이블 등 부품 개발에도 성공했다.
 
 
 
 미국 이민 후 말단 제도사로 출발
 
  鄭박사는 1977년 미국으로 이민, 우주선 부품 개발 업체인 「테이코 엔지니어링」의 말단 제도사로 입사, 23년 만인 2000년에 그 회사의 CEO가 됐다.
 
  鄭박사는 지난 연말 귀국해 서울大 등 각 대학에서 강연하고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했다. 출국 직전 鄭박사가 묵고 있던 서울 밀레니엄 힐튼 호텔 클럽 라운지에서 그를 만났다.
 
  부인(정정숙)과 함께였는데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인터뷰 중 한창 열애 중인 연인들처럼 자연스럽게 서로의 손을 포개곤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鄭박사는 여러 차례 『하나님의 능력을 빼놓고는 저의 과학적 성취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고향은 황해도 재령이다. 1·4 후퇴 때 어머니(김정희)·형·누나와 함께 월남했다. 아버지는 6·25 전쟁 중 실종됐다. 서울 영등포에 정착한 후 鄭사장은 혜화초등학교, 서울中·高校, 서울大 금속공학과를 졸업했다. 세 살 위인 누나 정미령씨는 영국 옥스퍼드大 교수다.
 
  『월남을 했기 때문에 가정형편이 어려웠죠. 그런데 저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재미있게 즐기면서 살았다고 할까요』
 
 
 
 高校 시절의 일기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號에는 鄭載勳 박사 팀이 개발한 결빙방지 히팅 시스템이 장착됐다.
  대학을 졸업한 후 鄭박사는 대한전선에 취직했다. 금속 파트 설계를 맡아 2년간 근무하다가 철강 수출을 주로 하는 무역회사로 옮겼다. 在日교포가 운영하는 한성물산이라는 곳이었는데, 그가 일본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고민이 많았어요. 대한전선에 있을 때보다 월급을 세 배나 더 받고 젊은 나이에 상무로 일을 했어요. 물질적으로 성공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회사 운영을 하면서 여기저기 뒷돈도 주어야 하는 일들이 영 마음에 걸렸어요. 이민을 가게 된 데는 그런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시절인 1963년 1월21일에 쓴 鄭박사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영하 18도의 추위다. 가장 추운 날씨인데 開學(개학), 시험이다. 오늘부터 나흘 동안 시험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겠다. 우리 집을 일으킬 것은 내가 차지할 임무 같기도 했다.
 
  어떤 대학을 갈까. 아무래도 원자공학과? 내가 만일 원자공학과에 가서 수석을 계속한다면 대학 2년쯤에는 미국서 초청으로 도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안 되면 見學(견학) 형식으로도 다녀와 軍務(군무)를 마치면 대학 졸업 또 미국 원자력원에서 머리를 싸매고 연구를 한다면, 인류의 환희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꼭 그렇게 하고야 말겠다>
 
  鄭박사는 고교 시절의 꿈대로 미국으로 갔다. 말단 제도사로 테이코 엔지니어링에 입사했을 때 그곳의 직원은 30여 명. 다른 직원들이 오전 8시에 출근할 때 鄭박사는 오전 7시30분에 출근해서 회사 청소를 했다. 오후 5시에 다른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도 남아 뒷정리를 도맡아했다. 다른 제도사가 하루에 도면 한 장을 그릴 때 그는 열 장을 그렸다.
 
  경리 담당이 『연필을 너무 많이 쓴다』고 불평을 할 정도였다.
 
  6개월 후 말단 제도사에서 프로젝트 엔지니어로 승진, 3년 만에 엔지니어가 됐다. 직원은 鄭박사를 뺀 모두가 미국인이었다. MIT 출신도 있었다. 7년 후에는 부사장, 23년 만에 사장이 됐다. 그 과정 속에서 鄭박사는 롱비치大와 어바인大에서 석·박사 학위를 땄다.
 
 
 
 無차입 경영
 
  鄭박사의 경영철학은 「클린」이다. 「재정적·도덕적·시간적으로 클린하라」는 것이다. 여덟 시간을 근무하고도 열 시간을 근무한 것으로 적는 행위, 근무 중에 인터넷 서핑 등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행위 등을 그는 용서하지 않는다. 특히 강조하는 것은 「정직」이라고 한다.
 
  『직원들에게 저는 「여러분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야단치지 않겠다. 모르는 것을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고 이야기하죠. 솔직한 제 심정이고, 그렇게 직원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鄭박사가 입사할 당시 30여 명이었던 테이코 엔지니어링의 직원은 현재 160여 명이다. 매출은 4000만 달러 정도다. 이 회사의 장점은 은행돈을 단 한 푼도 빌려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알짜기업이다.
 
  ―테이코 엔지니어링이 특허 출원을 안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특허 출원을 하면 노하우가 다 알려지기 때문에 안 해요. 모든 인공위성마다 자세 제어 로켓장치가 있어요. 인공위성 코너마다 16개·25개씩 붙이는데, 그 로켓을 제작하는 장치를 저희가 가지고 있어요. 그 장치를 시장에 팔지는 않고 그곳에 들어가는 열조정 장치만 팔아요』
 
  ―자유 진영에서 발사한 인공위성 가운데 95% 이상이 테이코 엔지니어링에서 개발한 열조정 장치를 장착하고 있다면서요.
 
  『거의 그렇죠. 열조정 장치만큼은 저희 것을 써야 해요.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개발한 열조정 장치를 장착한 경우 6년 이상을 견딘 인공위성이 없어요. 우리 회사 제품을 써서 15년 이전에 망가진 경우는 없습니다』
 
  ―기술 노하우를 빼가려는 시도들이 많을 텐데요.
 
  『일본 같은 경우는 매년 100만 달러, 150만 달러를 들여서 한 개씩 사 가요. 유럽도 마찬가지고. 일본 같은 경우는 10년 이상을 조르고 있어요. 조인트해서 연구하자고』
 
  ―한국은요.
 
  鄭박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본과 비교하면 약이 오르기도 해요. 한국의 노력이라는 게 「애국심의 발로로 후배들을 위해 어쩌고」 하는 제의가 전부예요. 저는 어떻게든 우리나라를 위해서 뭐든 해주고 싶은데 말이죠』
 
  鄭박사가 연구개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팀워크다.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팀워크
 
  ―지금까지 연구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어떤 겁니까.
 
  『연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팀워크입니다. 같은 팀원들이 함께 자료를 보고, 분석·토론하면서 성공을 만들어 나가는 겁니다. 1986년 챌린저號 사건이 났을 때였는데, NASA로부터는 개발 방향을 인정받았어요. 그런데 정작 같은 회사의 연구원들이 안 된다는 거예요. 「되지 않을 것을 왜 하느냐」, 「망하고 싶으냐」 등 말이 많았어요.
 
  사실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것은 맞아요. 그런데 생각을 한 단계 뛰어넘으면, 저 같은 경우는 기독교 신자니까 기도를 통해서 지혜를 얻는 방식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면 된다고 봐요. 안 된다고 생각하는 한계를 뛰어넘는 생각,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중에 우리 연구원들이 힘을 합쳐서 잘 해결했지요』
 
  ―팀원들 간에도 자기만의 기술을 노출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가 있죠. 저 같은 경우는 제가 아는 것을 열심히 가르쳐 줍니다. 사실 자신도 잘 모르던 분야를 가르치려면 공부를 더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더 도움이 됩니다. 이번에 한국에 와서 강연을 할 때 학생들에게 그랬어요.
 
  「공부할 때 다른 학생들에게 가르쳐주라.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듣는 사람은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듣는 것의 20%밖에 소화를 못 한다. 80%는 가르치는 사람의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르치는 것이 더 이익이다」』
 
  ―사업가와 과학자의 길을 함께 간다는 게 어렵지 않습니까.
 
  『전혀 어렵지 않아요. 재미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의 70%는 마케팅이고, 25%는 팀워크가 잘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거고, 나머지 5%가 연구에 투자하는 시간이라고 보면 됩니다』
 
  ―과학자로서 연구에 전념하고 싶은 욕심은 없습니까.
 
  『없어요. 거듭 말하지만 과학 연구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팀이 하는 것이고, 우리 회사 연구원들은 저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아요(웃음). 혼자 잘난 것보다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죠.
 
  다만 연구원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는 靈感(영감)이 중요한데, 제 스스로 생각해도 저는 그런 점이 강한 것 같습니다. 어떤 분야를 잡아서 연구를 시작하고 그 방향을 잡아 나가는 아이디어를 얻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제가 그쪽은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全세계 유수 기업 CEO의 80% 이상이 이공계 출신이라고 합니다.
 
  『세계는 몰라도 미국의 경우는 그렇습니다』
 
  ―한국에서는 왜 이공계 기피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걸까요.
 
  『가치관의 문제인데, 저는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10년 이내에 하이테크 계통의 매니저는 이공계 출신이 아니면 하지 못할 날이 올 거라고 봅니다. 저희 회사 엔지니어 25명 가운데는 MBA를 한 직원이 4명 있어요. 저는 과학도들에게 경영 마인드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어요』
 
 
 
 한국 우주공학 세계수준에 20년 뒤져
 
  ―우리나라의 우주공학은 세계 최고 수준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
 
  『제가 보기에 한 20년 정도 뒤처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5년 만에 와서도 느꼈지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어요. 지원도 강화되고 있는 것 같고요』
 
  ―나름대로 생각하는 한국 우주산업의 발전 방향이 있습니까.
 
  『모든 분야를 다 하려고 하면 안 돼요. 특정 분야에 집중해야죠. 일본이 우주 산업 분야 중 카메라 분야에서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그런 분야를 만들어야 해요. 그게 IT 분야일 수도 있고, 제가 하고 있는 열장치 분야일 수도 있고…. 한국이 아니면 안 되는 분야를 꼭 만들어야 합니다』
 
  ―우주 관련 산업이 국력 신장에 어떤 도움을 줍니까.
 
  『모든 과학기술의 집약체가 우주산업입니다. 화학·기계·생물학까지 관련이 안 되는 과학기술 분야가 없어요. 일본이 탐사선을 보내 다른 행성 같은 데서 광석 등을 채취하면서 조사활동을 한다고 쳐봅시다. 광석을 채취하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탐사선을 보내고 다른 행성에서 광석 등을 채취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등 그 과정에서 비약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낯선 이민생활에 적응해야 하고, 회사일과 학업을 병행해야 했지만 鄭載勳 사장은 두 딸이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나지 않으면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할 정도로 가정적이다.
 
  鄭박사는 이민 초기 직장생활을 하면서 십수 년간 다른 직원들은 다 쉬는 토요일에 쉬지 못했다. 저녁에는 학위를 따느라 바빴다. 그래서 어떻게든 주말에는 두 딸과 지내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아직 골프를 배우지 못했다. 다행히 두딸 줄리(33)와 커니(30)는 2003년 「아빠 못지않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다.
 
  큰딸 줄리는 23세에 美 국무부 최연소 여성 외교관이 됐다. 영어·중국어·일본어·베트남어 등 8개 국어를 구사하는 줄리는 파월 국무장관 시절에는 북한 核담당관으로 북한을 10여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작은딸 커니는 샌프란시스코 KCBS 방송국의 뉴스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성공한 이민자 가정인 셈이다. 부인 정정숙씨는 그 이유를 『꿈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정숙씨의 말이다.
 
 
 
 큰 딸은 美 국무부 외교관
 
동갑내기인 鄭박사 부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모든 행사에 동행한다.
  『큰딸이 중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식장에서 대표 연설을 하게 됐어요. 「꿈을 가져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어요.
 
  「나는 네 살 때 한국에서 이민 왔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 우리는 집도 없었고, 아빠의 직장도 없었고, 동생 장난감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살았지만 한 번도 가난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정은 꿈이 있는 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연설을 마치고 나니까 졸업식에 참석한 학부형들이 기립박수를 보내더라고요』
 
  鄭박사가 성공적인 이민자 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꿈과 낙천성 외에 사람에 대한 신의도 한몫 했다.
 
  1977년 당시 이민자가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돈은 1인당 1000달러로, 鄭박사가 가지고 나간 총액은 4000달러였다. 미국을 한 바퀴 돌고 나니 남은 돈은 2000달러였다. 1000달러짜리 중고차를 사고 아파트를 얻고 나니까 남은 돈은 200달러뿐이었다.
 
  큰딸 줄리가 컬러 텔레비전을 사 달라고 졸랐다. 수중에 돈이 없었던 鄭박사는 무턱대고 회사 건너편에 있는 은행을 찾아갔다. 鄭박사는 은행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길 건너편에 있는 회사에 다니는데 시간당 4달러 25센트를 받는 제도사이다. 내가 미국의 MIT大에 해당하는 대학을 한국에서 나왔다. 딸이 컬러 텔레비전을 사 달라고 하는데, 크레디트도 쌓을 겸 돈을 빌리고 싶다. 1000달러만 빌려 달라』
 
  물론 담보는 없었다. 그 은행직원은 한참 동안 鄭박사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오 케이』 했다.
 
  『그 은행이 시티내셔널 뱅크인데 나중에 그 직원한테 그때 돈을 빌려 준 이유를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내 생전 처음인데, 웬 동양인 한 명이 오더니 영어도 잘 못하면서 MIT 어쩌구 하면서 돈을 빌려 달라는데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도박하는 셈치고 돈을 빌려 주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 후 두 사람은 친구처럼 지내게 됐고, 그 은행은 지금까지 테이코 엔지니어링의 主거래 은행이 되었다. 얼마 전 암으로 죽은 그 은행원은 시티내셔널 뱅크의 부사장까지 지냈다.
 
  ―처음 이민을 결심했을 때 두렵지는 않았습니까.
 
  『아뇨, 너무 신났어요』
 
 
 
 꿈·낙천성·신의
 
  ―이민생활을 하면서 인종차별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鄭박사는 손을 크게 내저었다.
 
  『전혀 없어요. 저는 오히려 인종차별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심하다고 생각해요. 미국의 인종차별은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정말 신사죠. 인종차별이 심하다면 오늘의 제가 어떻게 있고, 딸들이 어떻게 지금의 일을 하겠습니까』
 
  곁에서 부인 정정숙씨가 거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딸이 외교관 시험을 볼 때 면접관이 「당신은 한국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입니다. 당신이 한국에 외교관으로 나갔을 때, 한국과 미국의 이익이 상충되면 누구의 편이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답니다.
 
  큰딸은 「저는 한국의 편도 아니고 미국의 편도 아닌 정의의 편을 들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대요. 그런데 합격을 한 거예요. 미국은 그런 사회입니다. 미국은 아직도 정의를 향해서 가는 나라인데 오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우주공학자 가운데 無神論者(무신론자)가 많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요. 중간 수준의 사람들 가운데는 무신론자들이 많지만 頂上으로 갈수록 거의 없어요. 인간의 한계를 알게 되기 때문이죠』
 
  가정·직장·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이 과학자는 인터뷰 말미에 기자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저를 설명할 때 「성공」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이제 시작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얻은 결과들은 더 큰일을 하기 위한 시작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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