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所有權 아닌 耕作權만 분배… 정권이 大地主가 돼 농민부담 더 무거워져
李在敎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
1960년 경기 가평 출생. 연세大 법학과 졸업. 제26회 司試 합격. 美 인디애나 주립大 법학박사. 인천·대구·광주지방법원 판사 역임. 現 인천Law&Tax 법률사무소 대표,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 웹진 「new-right.com」 편집위원장, 美 공인회계사. 논문 「국제조세법의 移轉 가격에 관한 연구」.
李在敎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
1960년 경기 가평 출생. 연세大 법학과 졸업. 제26회 司試 합격. 美 인디애나 주립大 법학박사. 인천·대구·광주지방법원 판사 역임. 現 인천Law&Tax 법률사무소 대표,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 웹진 「new-right.com」 편집위원장, 美 공인회계사. 논문 「국제조세법의 移轉 가격에 관한 연구」.

- 1940년대 후반의 우리나라 농촌 풍경.
남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해서는 종래 左派성향 학자들의 연구가 主流를 이루었고, 정부는 농지개혁 사업을 완료하고도 사업보고서조차 내지 않을 정도로 무관심했다. 그러다 보니 종래에는 農地分配(농지분배)가 6·25 전쟁 직전에 시작되어 중단되었다가 수복 후에 재개되었다고 알려졌다(兪仁浩, 「해방전후사의 인식 I」, 421쪽). 그러나 1980년대의 연구에서 농지개혁이 1950년 4월15일경 모두 완료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정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美 軍政(군정)과 韓民黨(한민당)의 地主세력, 그리고 地主의 권익을 옹호한 李承晩 정부가 地主의 이익에 충실한 나머지 토지개혁을 지연시켰고, 뒤늦은 개혁마저 불철저하게 실시해 농지개혁은 실패했다」는 단정이 학계의 主流的인 견해로 통했다(姜禎求, 「좌절된 사회혁명」, 309쪽).
「李承晩의 토지개혁은 실패했다」고 단정지은 左派 지식인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는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졌다. 대한민국은 실패한 역사다」 라고 외쳐 댔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남북한의 토지개혁을 실증적으로 연구하고 그 후의 경제발전 과정을 추적 분석한 결과, 남한의 1970~1980년대 고도성장의 뿌리에 自作農(자작농)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킨 농지개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반해 북한이 현재 겪고 있는 기근 사태의 근본 원인에, 농민을 국가의 小作人(소작인)으로 전락시킨 북한式 토지개혁(사실은 토지몰수)이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기서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農經硏)이 1989년 12월 발간한 「農地改革史硏究」(농지개혁사연구·이하 「農改史」)를 중심으로 남한의 농지개혁 사업의 전말을 살펴보고, 북한의 토지개혁과 비교해 그 성과를 고찰해 본다.
북한의 토지개혁![]() |
| 경작권만을 분배한 북한의 토지개혁은 소유권을 분배한 李承晩 정권의 농지개혁에 비해 농민들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
姜禎求의 논문에 의하면, 한 소련군 장교는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자 대지주들이 농지와 재산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소작인들이 이를 자율적으로 분배했고, 따라서 일부 지역에서의 토지개혁은 이러한 분배를 합법화하는 역할에 그쳤다』고 증언했다고 한다(姜禎求, 324쪽). 「붉은 군대」 없이 이런 일이 초래될 수 없음은 多言(다언)을 요하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남한에서는 토지개혁은 고사하고 美 군정이 접수한 귀속농지(일본인 및 일본회사가 소유하였던 농지)에 대한 분배조차도 지지부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미국이 농지개혁에 소극적이었던 데에는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다. 미국은 한반도를 신탁통치할 계획으로 소련과 美蘇공동위원회에서 협상 중이었다. 미국은 농지개혁도 신탁통치下에서 시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소련은 신탁통치 방안을 협의하면서도 미국과 상의 없이 북한에서 농지분배를 완료해 버렸다. 북한의 소비에트化 및 金日成의 권력장악을 위한 조치로 토지개혁을 이용한 것이다.
美 국무성은 「토지개혁을 임시정부에 맡긴다」는 입장이었다. 현지 사정에 밝은 美 군정은 달랐다. 당시 남한에서 左右翼(좌우익)의 대립은 극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고, 그 중심에 농지문제가 있었다. 맥아더 사령관과 하지 美 군정장관은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을 무력화시킬 획기적인 조치로 농지문제의 해결을 촉구했다.
美 군정은 1946년 3월7일 귀속농지의 분배계획을 공표하기도 했다(번스案). 이 案은 남한 左右派(좌우파)의 일치된 반대로 곧 취소되었다.
美 군정下의 농지개혁 노력美 군정下에서 농지개혁법은 과도입법의원에서 추진됐다. 과도입법의원은 美 군정 아래 있는 한민족의 자치기구로서, 한민당系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한민당이 당시 地主의 이익을 옹호했다는 사실 또한 별 이견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농지개혁 법안 및 귀속농지 처분안이 상정되었지만 정족수 미달로 심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민당이 입법의원에서 정족수를 미달시킨 것은 고의적인 사보타주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左右翼 모두 일치해 美 군정에 의한 토지개혁에 반대했다. 「신생 정부가 수립된 후 자신들의 주도 아래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민심을 얻겠다」는 계산이었다.
美 군정은 농지개혁을 포기하고 1948년 3월22일 군정법령 173호로 귀속재산매각령을 공포해 귀속재산만 분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소작인들에게 귀속농지를 매각하고 대금은 연수확량의 30할을 매년 20%씩 15년간 균등상환」하는 내용이었다. 이 상환조건은 후일 대한민국 정부가 실시한 농지개혁법보다 과중한 것이었다.
美 군정의 귀속농지 매각조치는 남한 토지개혁의 제1단계 조치였다. 美 군정이 토지개혁을 左派의 선동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美 군정이 남한 단독정권 수립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든지, 「토지개혁의 의지가 미약하여 실시하지 아니하였다」는 비판(黃漢植, 「해방전후사의 인식 Ⅱ」, 286~290쪽)은 옳지 않다. 분단의 고착화는 金日成이 북한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해 남한과 다른 길로 들어섰고, 이를 바탕으로 金日成이 북한에서 지도자로 부각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美 군정下에서 左右翼 모두 「美 군정에 의한 농지개혁」에 반대했다.
兪鎭午, 『농지개혁만이 공산당을 막는 最良의 길』![]() |
| 제헌헌법 草案에 농지개혁 근거 규정을 명시한 兪鎭午. |
한민당이 과도입법의원 시절 美 군정에 의한 농지개혁을 반대해 관철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 수립 후 농지개혁의 당위성 내지 필연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당시 농지개혁은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농지개혁을 하지 않고서는 당시 국민의 70%를 점하는 농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민당은 제헌헌법에 농지개혁의 근거 조항을 넣는 데에, 그리고 농지개혁법 제정에 적극적이었다. 한민당은 「농지개혁은 피할 수 없다」고 보고 다만, 농지보상을 충분히 받아서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려는 심산이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初代(초대) 내각의 농림부 장관으로 曺奉岩(조봉암)을 임명했다. 전향한 공산주의자인 曺奉岩은 한민당과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법기초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曺奉岩은 혁신계 인사들을 위원으로 위촉해 농림부案을 기초했다.
농림부는 1948년 11월 농지개혁법의 농림부案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농지분배의 상한선은 2정보이고, 보상地價(지가)는 평균 수확량의 15할이되 3년 거치 10년 분할지급이고, 분배받은 농지에 대한 지가상환은 12할로서 매년 수확량의 2할씩 6년 균등상환이었다. 분배받은 농지는 상속을 허용할 뿐 매매·임대·담보제공 등 일체의 처분행위가 영구히 금지되었다.
金日成, 남한 농지개혁 방해하기 위해 南侵 앞당긴 듯![]() |
| 李承晩 대통령이 농지개혁 추진을 위해 기용한 曺奉岩 초대 농림부 장관. |
국회는 國會案(국회안)을 만들어 1949년 3월10일 상정했다. 한민당이 주도한 이 국회案은 토지보상대금 및 상환대금을 각각 30할로 정해 정부案보다는 지주에게 훨씬 유리한 내용이었다.
당시 제헌국회에서 한민당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심의과정에서 한민당의 의도는 관철되지 못했다. 당초의 국회案은 지가보상액이 15할로 반감되고, 지가상환액은 12.5할로 변경되어 1949년 4월25일 통과됐다.
흥미로운 사실은 남한에서 토지개혁법이 국회에 상정되던 바로 그 시기인 1949년 3월 북한에서는 閣令(각령) 제46호를 공포, 남한의 토지개혁을 실시할 특별기구로 「남조선토지개혁법기초위원회」를 발족한 일이다.
이러한 준비를 갖추었기에 북한은 서울 점령 직후인 1950년 7월6일 「남반부 토지개혁법」을 공포하면서 토지분배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대목은 「金日成이 남한의 토지개혁을 방해하기 위하여 당초의 開戰日을 앞당겨 6월25일로 잡았다」는 견해의 근거가 된다.
국회를 통과한 농지개혁법은 대통령에 의해 거부됐다. 法 체계상 서로 모순인 조항이 있었고, 또 일부 조항의 효력발생 시기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어서 그대로 시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함이 워낙 중대해 농지개혁에 소극적인 의원들이 고의로 문제점을 방치했다는 의심을 받았을 정도다. 이로 인해 국회와 정부가 대립하다가 당초의 농지개혁법을 그대로 공포하되 국회가 즉시 개정작업에 착수하기로 타협이 이루어짐으로써 농지개혁법은 1949년 6월21일자로 공포·발효됐다.
개정 농지개혁법은 1950년 3월10일 발효된다. 개정된 내용은 지가보상률 15할을 유지하면서 이를 나타내는 地價증권을 발행해 주고, 대금상환은 총 15할을 매년 3할씩 5년 균분상환한다는 것이다. 결국 당초 曺奉岩을 비롯한 혁신계가 만들었던 농림부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으로 귀결되었다. 농림부案과 다른 점은 상한이 3정보로 늘고, 분배된 농지에 대하여 상환이 종료된 후 제한 없이 처분이 가능하다는 정도다.
6·25 두 달 전 農地분배 마무리![]() |
| 제헌헌법에 서명하는 李承晩 대통령. 李대통령은 농지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해 실제 분배기준일은 1950년 3월25일이고, 분배작업이 완료된 것은 4월15일경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農改史」, 601쪽). 그렇다면 정부는 시행령조차 없는 상태에서 농지분배 작업을 강행했다는 것이니 엄밀하게는 違法(위법)이었다.
농림부가 이렇게 違法을 무릅쓰고 농지개혁을 강행한 것은 李承晩 대통령의 특별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春耕期(춘경기)가 촉박했으므로 추진상 不少한 곤란이 有하였으나, 萬難(만난)을 배제하고 단행하라는 대통령 각하의 諭示(유시)를 받들어 정부로서는 최선을 다하여 실행단계에 돌입한 것이다』라는 농림부의 「농지개혁지침」이 이를 보여 주고 있다.
당시 농림부는 국무회의에서 심의 중인 시행령을 근거로 분배사업을 집행했는데, 당시 형식적인 절차를 남겨 두고 있었을 뿐, 시행령 자체에 대해 부처 간 내부 합의가 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超法的인 조치가 가능했다.
만약 이러한 조치가 없었다면, 그 얼마 후 발발한 6·25로 인해 농지분배가 영영 불가능하게 되었을 수도 있고, 또 북한군이 점령한 남한지역에서 실시한 농지분배를 남한 농민들이 열렬하게 호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위법」하게 집행한 농지분배는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天幸(천행)이 아닐 수 없었다.
自作農 14.2가 농지개혁 후 80.7%로농지개혁으로 小作制(소작제)는 영구히 폐지되고, 自作農(자작농)이 대거 출현했다. <표1>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소작지율은 광복 당시 65.0%에서 1951년에 8.1%로 현저하게 낮아졌다. 그런데 여기서 실제 소작지율은 4.3%에 불과하다는 것이 연구 결과다.
地主가 小作人에게 放賣(방매)한 것처럼 은폐해 몰수를 회피한 채 계속 소작지로 남아 있던 은폐소작지는 8만5000정보이고, 1951년의 소작률은 이 은폐소작지에 의한 것인데, 그 은폐소작지가 8만5000정보에 불과하므로 실제 소작률은 4.3%라는 것이다(金聖昊, 「한국토지제도의 연속성과 단절성」, 1985).
그리고 <표2>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광복 당시 자작농은 14.2%, 소작농은 50.2%이었으나 농지개혁 후에는 각각 80.7%와 3.9%로 격변했다.


中農化에는 실패농지를 분배받은 농가의 93.1%가 기존의 소작지를 분배받았다. 농지를 적게 소유하고 있던 寡少農(과소농)이 분배받은 경우는 4.5%에 불과했다(「農改史」, 1040쪽). 그 결과 농지개혁으로 영세농을 中農으로 전환시키려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는 한계를 보여 준다.
<표3>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농지개혁에도 불구하고 0.5정보 미만의 농가가 1945년 33.7%에서 1951년 42.7%로 늘었고, 0.5~1정보 농가 역시 2.5% 정도 증가해 영세농化가 오히려 심화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점수제에 의한 전면적인 再분배가 아니라 上限制(상한제)를 통한 부분적인 再분배를 채택한 결과다. 북한은 모든 농지를 분배대상으로 삼은 다음 가족수에 부여된 점수를 합산해 그 점수에 따라 농지를 분배하는 점수제를 채택했다.
공평한 분배나 中農化(중농화)라는 면만을 본다면 점수제가 더 우수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남한이 점수제를 채택하지 않은 것이 중대한 결함이라는 비판(「農改史」, 1037~1042쪽)은 합당하지 않다. 私有재산제下에서는 私有재산의 전면부정을 수반하는 점수제를 채택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일본이나 대만이 모두 上限制를 채택한 것도 같은 이유다. 다만, 上限을 3정보가 아니라 농림부案과 같이 2정보였다면 좀더 공평한 분배와 中農化의 성과를 거두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남한에서 농지개혁의 결과 영세농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데에는 상한제에 의한 한계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農家數(농가수)에 비해 農地面積(경지면적)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70%가 농민으로 농업에 과도한 인력이 매달렸고, 전체 농지를 전체 농가에 균등하게 분배할 경우 농지면적이 中農의 규모에 못 미칠 정도이던 당시 상황에서 中農化는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그러나 小作制가 완전 폐지되고, 自作農이 대거 출현했을 뿐만 아니라, 自作地率(자작지율)이 95.7%에 이른다는 점만으로도 획기적인 성과라고 아니할 수 없다.
북한이 남한을 점령한 직후인 1950년7월6일 남반부 토지개혁법령을 공포한 후 59만6202정보를 농가 126만7809호에 분배했음에 불구하고(「로동신문」 1950년 9월30일자 보도), 남한에서 『金日成 만세』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 이전에 농지개혁이 단행되지 않았더라도 농민들이 그런 냉담한 반응을 보였을지 의문이고 보면, 농지개혁의 성과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의 토지개혁, 사실상 有償분배였다북한이 「無償몰수·無償분배」였음에 반해, 남한은 「有償몰수·有償분배」였으니 철저하지 못한 개혁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남한은 有償몰수로 地主의 권익을 옹호했고, 有償분배로 自作農에게 과중한 상환 부담을 안겨 다시 小作農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有無償 몰수 문제를 살펴보면, 이는 경제체제의 차이에 의한 당연한 귀결일 뿐이다. 대한민국은 제헌헌법에서 私有재산제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했으므로 無償몰수는 허용될 수 없었다.
반면에 북한은 「붉은 군대」의 점령 아래 진행된 소비에트化의 일환이었으니, 無償몰수를 했을 뿐이다.
즉, 몰수의 有無償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선택의 문제였던 것이다. 「無償몰수·無償분배」가 더 바람직하고 근본적인 농지개혁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 체제가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분배의 有無償 문제를 살펴보면, 농지개혁의 본질은 봉건적인 소작제의 폐지에 있지 無償 여부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無償분배냐 有償분배냐」 하는 문제는 소작제를 폐지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방안 중의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有償분배라서 철저한 개혁이 아니라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그리고 有償분배로 인해 영세농민이 상환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소작농으로 전락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일 뿐이다.
통계에 의하면, 농지상환대금 납부율이 법정 납부기간인 1955년까지 72.4%, 1957년에는 88.9%였다(「農改史」, 717쪽). 1963년 12월 말에는 99.1%로서 사실상 납부가 종료되었다. 6·25로 全국토가 거의 초토화된 상태에서 이러한 납부율은 농지상환 부담이 그렇게 과중하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무엇보다도 북한이 無償분배였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有償분배였다는 점을 左派들은 도외시한다. 즉, 북한에서는 분배한 농지에 대해서 연간 수확량의 25~40%를 現物稅(현물세)로 징수했으니, 이는 사실상 有償분배나 다름없다.
게다가 남한에서는 연간 수확량의 30%씩 5년만 납부할 뿐이지만, 북한에서는 현물세를 영구히 부담하므로 상환부담이 훨씬 무거웠다.
이 현물세의 징수가 얼마나 철저했던가는 6·25 당시 赤治下(적치하)에서 현물세를 징수당해 본 사람들은 안다. 징수원이 곡식의 낱알 수까지 일일이 헤아린 일이 유명한데, 이는 샘플 수확량을 산출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철저한 징수로 인해 실제는 작황에 따라 수확량의 50% 이상을 현물세로 납부하는 경우도 적잖았다고 한다.
북한은 所有權 아닌 경작권 분배![]() |
| 경북 영천군 대황면 조곡동의 전답 138평에 대해 1년에 3두 8홉을 상환한다는 내용의 지가증권. |
大地主가 된 북한정권은 현물세를 통해 엄청난 財政(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6·25 남침을 준비할 수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북한은 이러한 國家小作制(국가소작제)를 거쳐 1954년 4월부터 농지를 집단농장화 또는 國有化(국유화)시켰다. 결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土地 국유화의 前단계로 경작권을 분배한 것에 불과했던 셈이다.
이에 반해 남한에서는 地價상환을 완료한 후에는 농지를 다른 농민에게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었으니 所有權을 분배받은 것이고, 30%씩 5년만 납부하면 되었으므로 상환부담도 영구적인 현물세와 비교해 훨씬 가벼웠던 것이다.
사실 남한의 농지개혁에서 가장 심각했던 문제점은 有償分配(유상분배)가 아니라 실시가 지연되어 몰수대상 농지가 현저하게 감소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地主세력이 농지개혁을 방해한 데에 기인한다.
광복 당시의 일반 소작지 117만4000정보 중 분배된 면적은 59만7000정보에 불과하고, 地主가 放賣(방매)한 면적이 57만7000정보에 이른다(「農改史」, 1029쪽). 분배대상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면적이 地主의 임의처분으로 분배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소작지의 매각을 금지하는 특별조치법이 필요했으나, 제헌국회는 이를 제정하지 않았다. 국회에서 多數派를 이루던 한민당이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국회의원 91명이 1948년 11월12일 특별조치법을 발의했으나, 1949년 3월과 4월에 본회의에서 표결로 모두 否決(부결)됐다.
李承晩 대통령은 1949년 2월 특별담화를 발표해 『地主(지주)의 强賣(강매)는 위법』이라고 경고하고, 3월12일에는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특별조치법의 통과를 촉구했으나, 결국은 제정되지 않았다. 地主의 小作地 매각을 금지하는 내용이 농지개혁법 제27조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당시 이미 매수 및 분배가 집행되는 단계였으므로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농민들, 헐값에 농지 구입![]() |
| 농지개혁법에 따라 토지를 매각한 지주들에게 땅값 상환을 약속한 상환증서. |
당시 소작인들이 구입한 농지의 가격은 상환액수, 즉 年 수확량의 15할과 큰 차이가 없었으므로 소작 농민들에게 크게 불리하지 않았다. 농지의 가격이 1945년경에는 年 생산량의 20할 수준이었고, 1946~1947년에는 15~20할 수준, 1948년 이후에는 10할, 심지어 年 생산량에도 못 미칠 정도로 헐값에 거래되었다는 것이다.
농지개혁이 확실하게 된 1948년 이후에는 주로 年 생산량의 15할 이하였고, 대금지급도 2~3년 분납이 흔했으므로 强賣라기보다 投賣(투매)에 가까웠다는 것이다(한길사, 「한국사」(권18), 91쪽 및 장상환 321~322쪽). 농지개혁이 논의되지 않던 1940년경 토지의 가격은 보통 年 수확량의 50~60할이었으니 얼마나 헐값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소작지를 매수한 소작인으로서는 분배받은 경우와 별 차이가 없었다는 얘기다. 매수 농민의 3분의 1 가량은 분배받았을 때보다 오히려 유리한 조건이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장상환, 323쪽).
결국, 지주의 放賣(방매)로 인해 농지개혁의 취지가 다소 탈색된 것은 사실이지만, 몰각되거나 반감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실상과 동떨어진 분석이다. 당시 左派학자들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地主는 농민과의 관계에서 결코 지배적인 위치에 있지 않았다』(姜禎求, 296쪽)
그러므로 지주의 放賣로 자작농이 증가한 현상을 가리켜 토지제도가 『국가의 정책개입이 없는 상태에서부터 붕괴한 것』(姜禎求, 284쪽)이라는 평가는 엉뚱한 비약이다. 농지개혁을 추진하는 간접적인 효과로 인해 소작지가 자발적으로 분배된 것이라는 평가가 적절하다(「農改史」, 1032~1033쪽).
농지보상금은 年 수확량의 15할을 매년 3할씩 5년간 지급하도록 되어 있었다. 현물이 아니라 각 지급 연도의 法定價格(법정가격)으로 환산해 화폐로 지급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시장가격이 아니라 법정가격으로 환산했다는 점이다.
地主들, 『李承晩은 金日成과 똑같은 놈』농지개혁 직후 6·25 전쟁이 발발해 戰時(전시) 인플레를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경우 정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곡물과 같은 생활필수품의 가격을 통제한다. 당시 한국 정부도 곡물의 가격을 통제했다. 그 결과 곡물의 法定(법정)가격이 市場(시장)가격보다 훨씬 낮아지게 되었다. 地主들에게는 치명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농지보상대금에 대해 地價證券(지가증권)이 발행되었는데, 그 발행마저 원활하지 못했다. 1950년 5월31일 이내에 모두 발행해 교부하도록 法定되었으나, 법령의 미비로 발행이 지연되었다. 6·25 전쟁으로 지가증권 발행이 다시 지연되어 1957년경에야 발급이 완료됐다.
전쟁으로 매수 농지대금의 상환이 부진하고, 정부가 인플레를 우려해 방대한 소요자금의 방출을 억제했기 때문에 地主에 대한 보상금 지급도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보상금 지급률은 1952년에는 14.9%, 1954년에 32.5%, 1955년에 겨우 70%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地主들이 지가증권을 헐값에 팔아 버리는 현상이 만연했다. 증권의 가격이 액면가의 40%까지 내려간 적도 있고, 평균적으로는 절반 정도였다고 한다.
그 결과 地主들은 戰時 인플레로 인한 법정 곡물가격과의 격차로 인한 손실과 지가증권의 투매로 인한 손실을 二重으로 입었다. 이로 인해 당시 地主들이 실제 수령한 총 토지보상액은 年 수확량의 30~40%에 불과했다. 심지어 10%에 불과한 사례도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地主들은 『李承晩은 金日成과 똑 같은 놈이다』라고 저주했다고 하니, 「지주들에게 유리한 농지개혁이었다」는 비난은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산업자본의 原始的 축적당초부터 농지개혁은 소작제의 폐지 외에 농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민당이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던 동기도 여기에 있었다. 당시 농업은 과잉취업 상태였고, 농업의 생산성 증가는 한계가 있으므로 다른 산업을 부흥시킬 필요성이 절박했다.
그러나 농지개혁을 통해 地主들이 산업자본가로 전환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위와 같이 보상금의 실제가치가 액면가에 훨씬 못 미치는 바람에 대부분의 地主들은 산업자본가로 전환하지 못했다. 地價증권을 투매하지 않은 사람 역시 경험 없이 벌인 사업에서 망하기 십상이라 대부분의 지주들이 몰락하고 말았다(「農改史」, 1060~1065쪽).
그렇더라도 산업자본의 原始的(원시적) 축적이 이루어진 사실은 흥미롭다. 지가증권이 投賣되자 이를 사 모은 세력이 있고, 이들은 이 증권을 이용해 귀속재산을 拂下(불하)받음으로써 손쉽게 산업자본을 형성했다.
지가증권을 절반 가격에 사서 모은 다음 이를 귀속재산 불하대금으로 납부하면 절반 가격에 귀속재산을 매수하는 셈이 된다. 당시로서는 귀속재산을 불하받는 것 자체가 큰 이득이었으니, 매우 효과적으로 산업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지주의 산업자본가化에는 실패했지만, 산업자본의 축적 자체는 이루어진 것이다(「農改史」, 1062~1065쪽). 이때 축적된 자본은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 고도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다.
남한, 농지개혁으로 인해 공산화 방지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농지개혁은 사회주의 혁명을 하지 않고, 私有재산을 보호하면서 비교적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농지개혁의 결과 자작지율이 95.7%에 이르렀다. 농지개혁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히는 일본의 경우에도 90%에 불과하다.
한국의 농지개혁은 좌파론자들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半봉건적 토지소유를 타파하고 耕者有田(경자유전)의 원칙을 확립시켰다. 再村地主(재촌지주)는 富農(부농)이 되었고, 小作農은 自作農이 되었다. 이 자작농의 자녀들이 1950~1960년대에 牛骨塔(우골탑)으로 불리던 대학을 다녔고, 이들은 1970~1980년대 고도성장의 주역이 되었다. 한국의 고도성장의 밑바탕에는 농지개혁이 있었던 것이다(한길사, 「한국사」, 121쪽).
좌파론자들은 남한의 농지개혁은 『기본적으로 역사의 더 빠른 진보를 가로막은 반동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李承晩 정부가 농지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남한도 공산화되었을 것인데, 기만적인 농지개혁으로 좌절되었다」는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이는 남한의 농지개혁으로 인해 효과적으로 공산화가 방지되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셈이다.
『李박사 덕에 이밥을 먹게 되었다』고 좋아했다는 남한 농민의 얘기, 그리고 한국이 1950년 3월 농지개혁에 착수했다는 소식을 들은 金日成이 술잔을 집어던지면서 화를 냈다는 소문, 그리고 6·25 전쟁 와중에 북한이 남한 점령지에서 대대적인 농지분배를 실시했지만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는 사실은 농지개혁이 우리의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지키는 데에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농지개혁은 세계사적 성공작![]() |
| 2003년 브라질에서는 농지개혁을 주장하는 농민들이 농장을 무단 점거하는 사태가 빈발했다. 사진은 농장을 지키고 있는 무장 사설경비원들. |
南美의 여러 나라들이 그 좋은 농토와 자원을 갖고도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근본 원인에 토지 소유의 편중 현상이 깔려 있다. 그러니 全세계 신생독립국 중 토지개혁에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는 한국과 대만 정도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의 농지개혁은 비록 그 시기와 대상 등에서 아쉬운 면이 없지는 않지만, 私有재산제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地主들의 저항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수행되었고, 후일 고속 경제성장의 주춧돌이 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성공작으로서 자랑할 만한 업적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