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康昭 서양화가
1943년 대구 출생. 서울大 회화과 졸업. 경상大 교수. 美 뉴욕주립大 객원교수·同 객원예술가 역임.
朴熺淑 화가·시인
1943년 대구 출생. 서울大 회화과 졸업. 경상大 교수. 美 뉴욕주립大 객원교수·同 객원예술가 역임.
朴熺淑 화가·시인
李康昭의 작품 세계 속에 담겨 있는 情緖(정서)는 지극히 한국적이다. 그의 그림 속에는 우리 삶 속에 녹아 있는 동양적인 價値觀(가치관)이 잘 나타나 있다.
李康昭는 오리를 많이 그린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그리는 그림의 소재에는 한계가 없다. 그는 디지털 시대에 딱 어울리는 작가다. 어느 한 가지를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창의력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하는 것에 탁월하다.
개인전(10월5~15일)이 열리고 있는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화가 李康昭를 만났다. 150호에서 300호에 이르는 李康昭의 近作(근작)들은 웅대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미술평론가 吳光洙(오광수)씨는 이번 전시회를 이렇게 평했다.
『李康昭의 풍경은 언제나 현실 저 너머의 세계를 지향한다. 오리가 자맥질하는 물가엔 비스듬히 나무들이 줄지어 가고 강 기슭엔 임자 없는 배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고즈넉함이 묻어 나온다. 저 멀리 雲霧(운무) 속에 어슴푸레 떠오르는 집 속엔 가난하지만 여유로운 삶을 사는 노인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현실 속에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念願(염원)이 李康昭 작품이 지니는 이데아일 것이다』
―그림 전체가 회색 톤인데 회색을 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회색은 매우 민감한 색입니다. 어떤 색과도 어울리는 색입니다. 굳이 어떤 색이라고 지정해 주지 않아도 관객이 마음속으로 색을 입히지요. 그림을 보고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드는 색이라서 즐겨 쓰고 있습니다』
―선생님 작품은 풍경화이면서도 풍경은 없고 빈 배만 홀로 있습니다. 캔버스에 그린 서양화가 동양화 느낌을 줍니다. 『西歐(서구) 회화는 인간이 중심이 돼서 세계를 바라보는 遠近法(원근법)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東아시아의 회화는 자연을 지배하거나 자연을 인간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 중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透視圖(투시도)상의 원근법이 아니라, 시선의 움직임에 따라 3차원적으로 그리는 것입니다.
文人畵(문인화)는 묘사하는 그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잘 그리는 그림이 아니고 끊임없이 훈련하고 用筆(용필)을 익히고 정신통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서 一品(일품)이라는 그림이 나옵니다.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훈련을 통해서 우주의 순환을 묘사할 때 좋은 작품이 나옵니다. 文人畵를 보면 색이 들어가지 않아도 색을 연상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대나무 색을 칠하지 않아도 관람객이 대나무를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제 그림은 동양적인 思考(사고)에서 출발한 그림입니다』
―전통 서양화를 배우고 동양화의 산수화처럼 표현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나요.
『무척 어려웠죠(웃음). 어렸을 때부터 전통 서양화를 배웠기 때문에 그것을 부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은 우리나라 미술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는 학교에서 전통 文人畵를 배울 기회조차 주지 않았지요. 서구 근대미술을 무조건적으로 배우고 익히게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 사람입니다. 文人畵의 정신이 내 그림의 뿌리가 되고 있지요. 아무리 西歐 근대미술을 배웠다고 해서 그것이 내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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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angrila-05020, 200×200cm. 2005년 作. |
8남매 중 5명이 미술가
李康昭는 경북 대구에서 아버지 李起仁(이기인)씨와 어머니 李未烈(이미열)씨의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8남매 중 李康昭를 비롯하여 여동생 康子(강자·작고·조각전공의 현대미술작가), 賢珠(현주·在뉴욕작가), 南紅(남홍·在佛작가)씨 등 네 명이 화가다. 順子(순자·미술사 교수)씨는 미술을 전공하고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어머니 李未烈씨도 76세 때 전시회를 열었다.―8남매 중 5명이 예술가이기 쉽지 않은데요.
『아버지가 아마추어 화가이자 서예가셨어요. 書畵(서화)를 수집하는 것이 취미셨지요. 그런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그림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어요』
―화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집안에서 적극적으로 후원을 받았겠네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웃음). 아버님이 무척 반대를 하셨습니다. 당신이 문인적인 취향을 가지고 전통적인 文人畵를 좋아했지만 자식이 그림을 전공한다고 하니까 그것만큼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림은 취미로 하고 좋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그런 직업을 원하셨지요. 「환쟁이를 해서 집안에 염려를 끼친다」고 아주 싫어하셨어요』
―처음에 반대가 심했지만 여동생들도 미술을 전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재능을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평생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식이었습니다. 심리적으로 부모로부터 배척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요』
―아직도 아버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고 계신가요.
『몇 년 전에 아버님이 「이제 내가 너를 인정한다. 너는 이제 단순하게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고 匠人(장인)이다. 네가 갈 길은 이 길밖에 없다」고 하시더군요. 집안에 화가가 많아도 화가로서 아버님이 인정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딸들은 인정하지 않지요』
―교수를 하다가 專業(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서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저는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대학 다닐 때 대학교수로 일하겠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미술대학을 나와 열심히 작업을 하면 자연스럽게 작가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가가 되면 먹고 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꿈꾸는 대로 이루어지는 파라다이스인 줄 알았던 것이지요.
학교 다닐 때 작업한 것을 보면 화사합니다. 청록색의 꿈 같은 색을 많이 썼지요. 그런대 막상 졸업하고 보니까 세상은 꿈꾸는 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생은 맑고 밝은 것이 아니고, 파라다이스라는 것은 없더군요』
―그래서 회색을 많이 쓰시나요.
『그런 점도 없다고 할 수 없지요.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너무나 캄캄했지요. 대학 졸업 후 5년 동안 한약사인 아버님 일을 도우면서 용돈을 받아 썼습니다. 그때는 다양한 실험작들을 그렸는데 돈이 너무 들더군요. 그래서 1970년부터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첫 전시회 때 畵廊에 주막집 옮겨 놔![]() |
| 서울 명동화랑에서 열린 李康昭의 1회 개인전「주막집」. 막걸리집에 있는 탁자와 의자를 그대로 옮겨 놓고 작가와 관람객들이 막걸리를 마시는「퍼포먼스」가 그의 첫 전시회였다. |
―주막집을 작품으로 전시한 것은 술을 좋아해서인가요.
『선배들과 대구 막걸리집에서 술을 한잔 먹으면서 보니까 나무로 된 탁자가 기가 막힌 예술 작품이더군요. 美軍부대에서 나온 박스로 만든 탁자였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자국을 남기고 간 것에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연상되었습니다.
술 한잔 걸치고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와 담배연기 속에 흩날리는 因緣(인연)들이 그대로 녹아 있는 탁자를 그냥 두고 나올 수 없더군요. 그 탁자를 사서 작업실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 다음에 막걸리집에 갔을 때, 그 집에 있는 탁자와 의자를 전부 사 왔습니다. 그것을 첫 번째 개인전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죠』
―관람객에게는 굉장한 쇼크였을 텐데, 그 작품에서 관람객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작가나 동료, 관람객이든 누구나 전시장에서 막걸리 먹고 가는 것이 제 작품의 주제였습니다. 관람객들이 「뭐 이런 작품이 다 있나」 할 수도 있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재미있어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관람객이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이 제 작품의 의도였습니다. 작가는 관람객이 경험할 수 있도록 어떤 환경을 설정해 주고 그 역할이 끝나면 빠져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연극인 吳泰錫(오태석)씨가 그 작품을 보고 「아! 우리 연극 끝났네」라고 하시더군요』
1970년대에는 설치미술에 관심![]() |
| 아내 이정윤씨와 딸 선민. |
―살아 있는 생명체를 가지고 전시하기가 어렵지 않았나요.
『파리 비엔날레에서도 주막집을 만들었지만, 닭의 퍼포먼스를 더 중점적으로 전시하고 싶었습니다. 준비위원회에 자료를 제출하니까 설치 감독이 「이 작품은 전시장 중앙에 설치해야만 작품이 빛을 발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현장에서 닭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아 수소문 끝에 전시회장 수위가 닭을 얻어다 줘서 간신히 전시를 할 수 있었지요』
―그런 실험작들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우리 世代는 미술의 潮流(조류)가 굉장히 급변했던 시기이지요. 과거에는 한 가지 미술 思潮(사조)가 世紀(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우리 世代에서는 해마다 다른 思潮가 나타난다고 할 정도였어요. 당시에는 全세계적으로 設置(설치)미술이 유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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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진명씨와. |
『우리 世代는 미술 情報(정보)가 부족해 많은 화가들이 세계미술 흐름에 대해 갈증을 느꼈습니다. 당시 미술계에서는 그룹 활동이 굉장히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西歐의 樣式(양식)들이 소화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잡다하게 模倣(모방)도 많았지만, 다른 시기보다 변화의 폭이 컸습니다. 지방에서부터 먼저 시작된 그룹 활동이 현대미술운동으로 젊은 작가들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미술계의 新舊 세력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과거에는 각종 공동 전시 기획을 많이 주관하셨죠.
『저마다 개성이 강한 화가들과 함께 전시 기획을 한다는 것이 힘들더군요. 개인 작업할 시간을 많이 빼앗겼습니다. 전시 기획 일을 계속했다가는 「미술 정치인」이 될 것 같아 요즘에는 개인적인 작업만 하고 있습니다』
李康昭는 1970년대 실험기를 거친 후, 다시 平面(평면)회화 작업으로 회귀하게 된다. 그의 회화 작품은 기호와 같이 간결하게 표현된 오리·사슴·빈 배 등이 등장하는 추상적 풍경화다. 外形(외형)을 묘사하는 데 얽매이지 않고 숙련된 몇 개의 선만 가지고도 자연 풍경 앞에서 느낄 수 있는 경외감과 자연과의 일체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老子를 연상시키는 그림![]() |
| 부인과 네팔에서. |
<李康昭의 그림은 인생과 세상의 無想(무상)함을, 끊임없이 움직이며, 늘 변화하는 모습, 모든 것이 상대적임을 상기시킨다. 그의 작품에서, 물에 의한 은유적인 표현은 老子(노자)의 道와 일치한다. 즉 물은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강의 기복을 변경시키려고 애쓰지 않고 그대로 따라 흐른다>
―1970년대에는 설치미술을 하다가, 1980년대에는 회화로 바꾸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1975년 친구 沈文燮(신문섭·중앙大 예술大 조소과 교수)과 함께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했습니다. 파리에 간 김에 거기서 장기간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해보자고 했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유학을 가고 싶었는데, 가지 못했던 것을 대신하고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그해 7월 결혼을 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해 개의치 않았어요.
전시기간이 끝나고 몇 개월을 파리 몽마르트르 여관에서 생활하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방이 아주 커서 침대를 한쪽으로 밀어 놓으면 100호 크기의 작품 정도는 무난하게 작업을 할 수 있는 여관이었지요. 그때 평면에 대해 좀더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세계미술계에서는 설치미술·이벤트·영상 등 현대미술이 확산되면서 평면회화가 약화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한편으로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작가들이 평면회화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껴 평면에 관한 작품들을 많이 발표한 시기였다. 설치나 영상의 확산은 평면 예술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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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선·박서보와 인사동 노화랑에서. |
『서너 달도 못 되어 돌아왔습니다. 막상 파리에 가 보니 굳이 장기 체류하면서 거기서 작품 활동을 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더군요. 新婚(신혼)인데 남편도 없이 혼자 層層侍下(층층시하) 대가족에 둘러싸여 있는 아내가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沈文燮도 아이들이 보고 싶다고 해서 빨리 돌아왔지요』
―아쉬움은 없나요.
『거기에서 계속 머물렀다면 내 작업의 형태가 달라질 수도 있었겠죠. 그렇다고 작품이 좋아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동경은 있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는 게 인생인 것처럼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에서 장기 체류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미술가들이 있지만, 후배들이나 제자들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눈치 보면서 작품을 하게 되면 오히려 작가로서 작품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굳이 외국에 있어야만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가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國際展(국제전)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李康昭의 작업 방식은 먼저 넓은 붓으로 옅은 물감을 전체 화면에 彩色(채색)하고 마르지 않은 畵面(화면)을 거칠게 휩쓴다. 역동적인 劃(획)들과 지우고 겹쳐 그린 흔적은 움직임과 공간감을 자아내고 있으며,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풍경은 완성된 풍경이 아닌 풍경에 대한 暗示(암시)일 뿐이다.
오리를 즐겨 그리는 이유―오리를 즐겨 그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창경원(現 창경궁)에 자주 가는 편이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뭔가 투명한 세계가 있을 것만 같아서요. 어느 날 오전 창경원에 가니 연못에 오리떼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눈이 확 들어왔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생동적이고 찬란해 보이는지 「저것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리를 그리니까 생명력이 느껴졌습니다』
―선생님이 그리는 오리는 그 형태만 그린 것이어서 동양적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림을 자유롭게 그리고 싶었습니다. 觀念(관념)에 매여 그림을 그리지 못할 때 가장 답답한 일이지요. 묘사하는 그림으로서의 그림이 아니라, 뭔가 자유롭게 그릴 때 그림에 생명력이 느껴지지요. 그림을 論理的(논리적)으로 생각하면서부터 아마추어든 전업작가든 민중작가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현실세계보다는 정신세계에 치중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그림을 논리적으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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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A River-99176, 259×194,1999년 作. |
『작품의 완성은 그림을 보는 관람객이 하는 것』―선생님의 작품 중에는 유독 「물」에 관련된 작품이 많습니다. 「오리」라든지 「빈 배」라든지.
『고향 대구가 내륙지방이라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大洋에 대한 憧憬(동경)이 많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한때는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할 생각까지 했었으니까요.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것이 인생 航路(항로)와 같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한 번도 물을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관람객들은 제목을 보고 먼저 그림을 감상하잖아요.
『그것은 보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구름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미지만 줄 뿐입니다. 저한테는 책임이 없습니다. 초기 설치작업과 같은 맥락이지요.
제 작품은 미완성의 그림입니다. 완성은 그림을 보는 관람객이 하는 것입니다. 작가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작품을 보고 마지막으로 느낀 것이 작품의 완성입니다. 물은 보이지 않지만 화면에는 존재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작품을 자유롭게 감상하면 됩니다』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경상大 교수직을 그만두셨나요.
『반항적인 성격이라 교수하기가 힘들었어요. 교수 생활을 하면서는 학교 연구실에서 먹고 자고 학생들과 같이 생활하고 작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활동이 너무 많아 학생들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 그만두었지요』
―전업작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할 텐데요.
『1992년에 막상 학교를 그만둔다고 하니까 아내가 많이 울었습니다. 제가 개인전 경력이 많은데 전시회를 하면 작품이 한두 점이라도 팔리고 그러면 쌀이라도 살 수 있지 않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작업을 했습니다. 계속해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전시회를 하지요.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화가들도 그렇습니다』
미술평론가 李逸(이일)씨는 李康昭를 이렇게 평했다.
『李康昭는 한 우물을 파는 작가는 아니다. 그는 기질적으로 실험의 작가요, 그가 지향하는 예술은 어떤 定義(정의), 기존의 방법, 그 어떤 반복도 거부하는 끊임없이 극복의 예술이다. 아울러 그의 제작 활동 반경도 회화·판화를 비롯하여 입체·비디오 그리고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걸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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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作. 설치작품「갈대」. |
아들을 잃은 슬픔李康昭는 올해 초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APEC 회담을 기념하는 부산시립미술관 특별 기획전이 11월20일까지 부산에서 열린다. 프랑스 니스에 있는 「아시아미술관」에서 사진전시회를 가질 예정이다.
―작품 활동이 많으신 편이죠.
『세계적으로 작업량이 많은 작가 중에 한 사람일 겁니다. 저는 작업하는 시간밖에 없습니다. 금년 뉴욕전이 성공적이었지만 굉장히 힘들어서 조금 쉬어 볼까 했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네요』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적은 언제입니까.
『아들을 사고로 잃었을 때였습니다. 한동안 작업을 하지 못할 정도로 정말 어려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지금도 집에 그 아이의 방이 그대로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생각 나서 술도 많이 먹고, 그 아이가 있는 곳에 자주 갔다 옵니다. 경험하지 않으면 이 슬픔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李康昭는 부인 李貞潤(이정윤)씨 사이에 아들 珍明(진명)씨와 딸 宣旼(선민)씨를 슬하에 두고 있었는데, 서울대생이었던 아들 珍明씨를 몇 년 전에 사고로 잃었다. 딸 宣旼씨는 미국 시카고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