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場취재]「4·29 LA폭동」의 진실을 찾아서

팽창하는 라틴系와의 마찰로 제2의「LA폭동」이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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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400만 인구 중 5%인 韓人들의 피해가 전체의 40%를 차지

李慶願 在美언론인〈KyungWLee@aol.com〉
1928년 개성 출생. 고려大 영문학과 2년 수료. 1949년 渡美. 웨스트 버지니아大 졸업. 일리노이州立大 언론학 석사. 테네시州 킹스포트 타임스 기자, 웨스트 버지니아州 찰스턴 가제트 인권문제 탐사 기자, 캘리포니아州 새크라멘토 유니언 기자, 코리아타운(美洲 한인사회의 최초 英字紙) 발행인 겸 편집인 역임. 4·29 폭동 후 LA 인권위원회로부터 인권보도상 수상(1992), 프리덤 포럼의 언론자유상 수상(1994).

金智賢 자유기고가〈liazic@hotmail.com〉
1972년 서울 출생. 美 오리건大 졸업(스페인어·신문방송학), 現 캘리포니아州立大 석사과정(언어교육학), 캘리포니아州 「사바나 고등학교」 교사훈련과정. 2004년 신동아 논픽션 우수작 당선. 美 외국어교육위원회(ACTFL) 회원.
1992년 4월30일, 두 명의 韓人교포들이 폭도들의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 청과물가게 지붕 위에서 총을 들고 서 있다.
LA(로스앤젤레스) 인근 오렌지카운티에는 「제2의 코리아타운」이 있다. 필자(김지현)는 이곳의 한국순교자성당의 한국어 학교에서 토요일마다 미국에서 태어난 韓人 2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필자는 학생들에게 4·29 LA폭동 다큐멘터리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 주고, 13년 전에 일어난 LA폭동에 대해 느낀 점을 적어 보라고 했다. 韓人 2세 어린이들의 눈에 비친 4·29는 韓人 1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흑인 동네 사람들에게
 
  나는 미국에서 사는 한국 사람입니다. 사-이-구(4·29) 폭동이 일어나게 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로드니 킹 재판의 결정에 대해서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리커 상점에서 흑인 소녀가 죽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우리가 리커 상점에서 일하면서 친절하게 굴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이젠 더 착하게 살겠습니다. 지금은 한국인들과 사이가 좋으세요?〉
 
  이 글을 쓴 이정준 어린이는 4·29 당시 숨진 이재성군의 어머니에게도 글을 썼다.
 
  〈이재성(Eddie Lee) 형이 죽어서 안됐습니다. 한국인들을 도와주려고 간 건데 총을 맞게 돼서 안타깝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세요? 지금도 마음이 많이 아프세요? 이제는 우리 모두 흑인들이랑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윤준혁이란 어린이도 「흑인 동네 사람들」 앞으로 글을 썼다.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해 죄송합니다. 그리고 로드니 킹 아저씨도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재판도 나쁘게 끝이 났고, 경찰도 정당하지 못해서 유감스럽습니다…. 나는 이 비디오를 보고 화가 났습니다. 이제는 우리 서로 도우며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남궁지현이란 어린이는 「베벌리힐스(LA 富村) 주민들에게」라는 글을 썼다.
 
  〈저는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저는 13년 전에 생긴 사건이 「사-이-구(4·29)」 또는 「LA폭동」이라고 배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경찰들은 베벌리힐스에 사는 사람들만 도와주었습니다. 당신들의 커뮤니티가 더 좋아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평등하게 대우를 해야 합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불쌍하다고 느끼지 않으셨나요? 저는 폭동 당시를 직접 목격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래도 매우 슬픕니다〉
 
  올해는 4·29 폭동이 발생한 지 13주년이 되는 해다. 최근 美洲 韓人사회의 1.5세와 2세 단체들은 「왜 폭동에서 유독 韓人사회가 가장 큰 피해를 당하게 되었는지」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진상규명에 나섰다.
 
  지난 4월1일 미국 시애틀市 소재 워싱턴 대학교에서 개최된 「美 全國 韓人대학생지도자회의(KASCON)」에서 「4·29 진상규명을 위한 위원회」라는 분과토론이 마련됐다. 개막식에서 1.5세인 인권변호사 김도형씨는 「징검다리」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이 살던 한국의 고향 마을에서는 징검다리를 통해 다른 마을과 어울렸습니다…. 미국에 온 우리 1세 부모들은 수십 년간 아메리카 땅에서 군림해 온 인종편견의 희생자들입니다. 이제 우리 2세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복지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의 다른 인종들의 복지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비전을 지니고 이 땅에서 새로운 징검다리를 놓아 韓人의 울타리를 벗어나 주위의 다른 인종과 함께 번영을 추구해야 합니다』
 
 
 
 김도형 변호사의 「4·29」
 
1.5세 김도형 변호사가 美 全國 韓人 학생지도자대회(KASCON) 토론회에서 『4·29 사건의 진상규명에 나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김도형 변호사는 1992년 4월29일을 잊지 못한다. 당시 그는 하버드 대학 기숙사 방에서 TV를 통해 불타는 코리아타운을 지켜보았다.
 
  그 1년 전 韓黑 갈등을 막아 보려고 LA 코리아타운과 흑인村을 쫓아다니며 활동했던 일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가는 모습을 그는 보았다.
 
  그는 세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왔다. 그의 가족이 첫 번째 터전을 잡은 곳은 LA 코리아타운 한복판의 월세 100달러짜리 아파트였다. 주위엔 갱들 간에 총격전이 벌어지고, 마약 중독자들이 서성거리고, 빈곤과 실의로 자살 등이 빈번히 발생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金씨는 「가진 것은 없으나 가치 있게 살라」는 부모님의 가정교육에 충실했다. 그리고 동네 흑인 아이들과 라티노 친구들이랑 어울리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그는 韓人들과 흑인들 간에 증오하고 멸시하는 환경을 바꾸어 보려고 흑인學을 전공으로 택했다. 흑인민권단체에 가서 봉사활동을 했으며, 소년원과 교도소의 흑인 재소자들을 돕는 프로그램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지금은 공익 변호사가 되어 韓人사회와 흑인, 그리고 라티노 사회 등을 포함한 多人種 사이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이 어린 시절 주위에서 함께 살아왔던 여러 인종 이웃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해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을 때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체포되어 외딴 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었다. 그들의 자녀들은 미국 시민권자였으나 너무 어려서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그 日人 2, 3세들은 40여 년 만에 정의를 되찾았다. 4·29 때 韓人들의 자녀들도 마찬가지 처지였다. 당시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었던 그들은 4·29라는 폭풍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韓人사회, 4·29 폭동 再조명
 
美 全國 韓人 대학생지도자회의(KASCON) 대회에 모인 韓人학생들이 필자(이경원: 왼쪽에서 세 번째)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 4월26일 시카고 지역의 UIC 대학에서는 韓人이민 역사를 再조명하는 포럼이 열렸다. 이 모임은 4·29 폭동에 대해 알게 돼 자극을 받은 韓人 2세 대학생들이 주축이 됐다.
 
  UIC 대학의 韓人학생회(KAUSE) 데이빗 신 회장은 『우리들이 4·29에 대해 무지했던 사실을 새롭게 깨우쳤다』고 말했다. 그는 『폭동의 진실이 밝혀지도록 웹사이트 개설과 조직을 구성해 활동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데이빗 신 회장과 함께 포럼을 기획한 헬렌 前 UIC大 교수는 『4·29 폭동을 끝난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韓人 젊은 세대들은 他소수민족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포럼의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韓人들이 미국에 이민 와서 나름대로 경제적 성공을 했지만 아직도 미국 主流사회의 무시와 他소수계와의 갈등 속에 있다』며 『韓人의 위치를 재조명하고, 韓人사회가 필요로 하는 전략에 대해 젊은 세대와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뉴욕 지역에서는 지난 4월30일 「韓人유권자센터」(소장 김동석)와 「한뜻열린마당」(회장 허영욱), 그리고 CUNY 법대 「韓人학생법률봉사동아리(KASIA)」 등의 韓人系 시민단체들도 4·29 폭동을 再조명했다.
 
  이들은 흑인 및 라틴系 등 소수민족과의 관계개선, 韓人사회의 정치력 신장 등의 과제를 토론했다.
 
  이들은 LA폭동의 근본적인 이유를 높은 빈곤율 등의 경제적인 요소와 백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차별로 요약했다. 「韓人 커뮤니티의 미약한 정치력과 韓·라틴계의 노사갈등으로 인해 제2의 폭동이 발생할 우려가 크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KASIA의 김광수 회원은 『韓人들이 집요하게 정부를 상대로 법률 투쟁을 벌여야 했다』고 주장했다.
 
  『4·29 폭동 당시 소송을 통해 보상을 받은 韓人들이 거의 없었다. 정부나 보험회사를 상대로 「대법원까지 소송을 밀고 나가는 자세」를 취했다면 미국사회가 韓人들을 수동적이라고 보는 관점이 개선되었을 것이다』
 
  韓人유권자센터 김동석 소장은 『현재 韓人업소에서 일하는 라틴계 노동자들이 韓人 고용주를 상대로 임금, 노동조건 등의 법정소송을 벌이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며, 『일부 지역에서는 韓人상가의 라티노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는 등 제2의 4·29 폭동 발발 가능성이 보인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같은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흑인이나 라틴계 등 多人種 사회와의 관계개선이 중요하다』면서 『韓人 사회의 정치력 신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4·29 폭동의 전모
 
1992년 4월30일 로스앤젤레스의 크렌쇼 앤 제퍼슨 지역에서 약탈자들이 신발을 훔쳐 달아나고 있다.
  LA폭동(1992년 4월29일)은 발생 1년 전인 1991년 3월3일 LA경찰국 소속 백인 경찰관 4명이 흑인인 로드니 킹(27)을 집단 구타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이날 밤 자정께 LA 근교 밸리 지역에서 5∼6대의 경찰차가 과속으로 달리던 한 대의 現代 승용차를 뒤쫓은 끝에 멈춰 세웠다. 백인 경찰관들은 그 차를 운전하던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끌어내려 경찰봉과 주먹, 발길질로 마구 구타했다. 마침 이 장면을 근처 아파트에서 한 시민이 녹화했다. 이 녹화 테이프가 방송을 통해 전국적인 뉴스로 비화됐고, 해당 경찰관들은 기소됐다.
 
  이후 1년여 동안 법정공방이 진행됐다. 백인 지역에서 백인 배심원이 대부분인 법정에서 심의가 벌어졌다. 시미밸리 지방법원의 배심원들은 1992년 4월29일 오후 3시20분 로드니 킹을 직접 구타한 4명 중 3명에게는 무죄를 평결하고, 나머지 1 명에게는 再심사를 결정했다.
 
  배심원은 모두 12명으로 백인이 10명, 히스패닉系과 동양系가 각각 1명이었다. 무죄 평결 소식은 TV와 라디오로 즉각 발표됐다. 당시 흑인系 톰 브래들리 LA시장은 『믿을 수 없는 평결』이라고 했다.
 
  분노한 흑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달리는 트럭에서 백인 운전사를 끌어내려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 장면이 그대로 TV로 방영됐다. 어둠이 내리면서 다운타운 LA경찰 본부 앞에서까지 불길이 올랐다. 폭동은 약탈·파괴·방화로 이어졌다. 韓人들은 로드니 킹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흑인들의 폭동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폭동으로 市 전체 재산피해가 10억 달러에 달했는데 그중 약 4억 달러가 韓人들의 피해였다. LA市의 400만 인구 중 불과 5%도 안 되는 韓人들의 피해가 전체 피해액의 40%나 된 것이다. 특히 폭동 진압 과정에서 미국 경찰들은 흑인들의 분노를 韓人사회로 몰고 가는 듯한 조치를 취해, 「黑白 간의 잠재한 인종갈등을 韓黑 갈등으로 비화시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黑白갈등이 韓黑갈등으로
 
  LA폭동에서 韓人들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당한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왜 코리아타운과 韓人상가들이 흑인 폭도들의 표적이 되었는가? 13년이 지난 오늘에도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4·29 진상규명을 위한 위원회」는 다음 8가지 의문을 집중 추적하고 있다.
 
  첫째, 폭동이 1차 진압된 1992년 5월2일 LA카운티 셰리프(카운티 경찰)의 셔먼 블록 국장(작고)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들은 韓人상인들에게 인권침해적 피해를 준 폭동혐의자들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다』면서, 『이들을 인권법 위반으로 조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 조사는 흐지부지되어 버렸고 지금까지 조사결과에 대한 발표가 없다. 또한 이날 FBI의 LA지부장도 기자회견에서 폭도들을 인권법 위반으로 수사할 방침이라고 밝혔으나 그 수사 역시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폭동 3일 동안 50명이 사망하고, 4000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약 1만2000명이 난동혐의로 체포됐다. 사법 당국은 아무런 해명 없이 폭도들의 인권침해 사항에 대해 수사를 중단했다. 그 배경을 규명하겠다는 것이다.
 
 
 
 LA경찰국, 왜 코리아타운 방어하지 않았나
 
  둘째, LA경찰국(LAPD)은 폭동이 발생한 4월29일과 30일의 초기 2일 동안 왜 코리아타운을 방어하지 않고 철수했는가? 코리아타운은 폭도들에게 無방비 상태였다. 이들 경찰은 왜 약탈과 방화를 당하고 있던 韓人상인들의 구조요청을 묵살했는가?
 
  LA경찰국은 당시 백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웨스트LA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코리아타운 뒤편에 방위선을 설치했다. 결과적으로 코리아타운이 폭도들에게 유린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무슨 이유로 그 같은 방위선을 설정하게 됐는지 밝히려고 한다.
 
  셋째, LA경찰국은 4·29 폭동의 시발점인 「로드니 킹 사건」 재판에서 4명의 경찰관이 무죄평결이 날 경우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폭동) 사태에 대한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조치들은 무엇인가?
 
  넷째, LA경찰국은 폭동 발생 전 이미 「갱 퇴치 특별단속반원」의 정보를 통해서 일부 갱단들이 「나타샤 할린스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코리아타운과 사우스센트럴(흑인집단 거주지역)에 있는 韓人상가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탐지하고 있었다.
 
  당시 시중에 「크립스, 블러즈, 멕시칸 마피아, 18스트릿 갱 등의 갱단들이 韓人상가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이들 갱단이 4·29 폭동 중 방화와 약탈, 그리고 총격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은 미국主流 언론에서도 상세히 보도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2002년 「4·29 폭동 10주년」 특집기사에서 「알리」라는 가명으로 보도된 한 청년이 4·29 당시 갱단들의 지시에 따라 화염병을 만들기 위해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병에 담았다고 보도했다. 그 청년은 「나타샤 할린스 사건」에 대한 응징이라고 실토했다.
 
  「나타샤 할린스 사건」은 폭동이 터지기 1년 전 1991년 3월16일 15세 흑인 소녀 나타샤 할린스가 韓人 상점주의 실수로 살해된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그 운명의 날 두순자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엠파이어 마켓」에서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몰래 가방에 넣는 장면을 목격했다.
 
  두 사람 사이에 말다툼과 손찌검이 오갔고, 결국 난투 끝에 당황한 두순자씨는 고장난 권총 방아쇠를 당겨 할린스를 절명케 했다. 경찰에 의하면 엠파이어 마켓은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18개월 동안 흑인 갱단인 「크립스」 일당의 테러에 시달려 왔다고 한다.
 
 
 
 두순자씨 사건
 
  당시 LA타임스는 「나탸사 할린스 사건」에 대해 26건의 기사를 보도했다. 韓人 변호인단과 韓人사회는 이 기사들이 불필요하게 「1달러 79센트짜리 오렌지 주스 한 병 때문에 소녀를 죽인 韓人상인」을 자꾸만 강조하고 있음에 경악했다. 이 문구가 노리는 바는 분명했다. 韓人들이 흑인의 생명을 「1달러 79센트」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경찰과 소녀의 가족이 모두 『이 사건이 인종차별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증언했다는 사실이나, 재판에서 그러한 증거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LA와 전국의 언론은 두순자씨 가족이 18개월 동안 갱들의 폭력과 협박에 시달려 왔고, 두순자씨가 고장난 권총이라 손가락을 슬쩍 대기만 해도 방아쇠가 당겨진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며, 또한 그녀가 당황한 나머지 권총을 발사하기 전까지 나타샤 할린스로부터 얼굴을 네 대나 맞고 쓰러져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할린스는 15세의 소녀였지만 덩치는 두순자씨보다 훨씬 컸다.
 
  재판 결과 두순자씨는 실형이 면제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흑인사회는 분노했다. 사람을 죽인 사람에게 징역을 선고하지 않은 여판사에게 항의가 밀려 들었다.
 
  韓人상인에 대한 반감도 높아 갔다. 할린스가 등 뒤에서 총격당하는 짧게 편집된 비디오 테이프 장면과 함께 「韓人상점 주인이 1달러 79센트짜리 오렌지 주스 하나로 15세 흑인 소녀를 살해했다」는 메시지가 흑인사회 사람들의 머리에 깊게 각인됐다.
 
  美 언론이 이 사건을 보도할 때마다 韓人상점 앞에는 피켓과 화염병을 든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韓人상인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갔다. 4·29 폭동이 절정에 달할 무렵 ABC 방송과 LA지국인 KABC TV에서는 이런 장면을 로드니 킹 사건만큼이나 지겹도록 틀고 또 틀었다. 시청자들, 특히 흑인들의 가슴에 격노의 감정이 심어졌다.
 
  LA경찰국은 흑인 갱들이 韓人상인들을 표적으로 한다는 정보에 대해 제대로 조치하지 않았다. 지금도 LA경찰국과 FBI는 이와 관련한 보고서를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두순자씨 가족의 계속된 수난
 
全國 韓人 학생지도자대회(KASCON)에서 학생들이「4·29 폭동진상위원회」구성을 논의하고 있다.
  지난해 4월 두순자씨의 딸 「샌디 두」씨는 필자(이경원)가 특강을 했던 UCLA 강의실에 참석했다. 흑인 학생들도 있는 자리에서 샌디는 『죄스러운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재판 후 두순자씨의 가정은 정상 생활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어떻게 알았는지 흑인들이 집까지 찾아와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해 두순자씨는 3년 동안 집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매년 3월16일(사건 발생일)과 11월15일(재판 선고일)에는 두순자씨 집 앞에서 흑인들이 주동이 되어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두순자씨 가족들은 죽은 할린스의 가족들을 만나려 했지만, 흑인단체들의 방해로 만날 수 없었다. 두순자씨가 받은 보험료가 할린스 형제에게 기부됐다는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두순자씨 가족은 韓人사회로부터도 냉대를 받았다. 주위의 韓人들은 대놓고 『당신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라. 여기를 떠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두순자씨 가족은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어떤 때는 밥과 김치로 하루 끼니를 때웠다』고 샌디 두氏는 토로했다.
 
  현재 교사로 재직 중인 샌디 두氏는 『우리 가족이 당한 악몽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서 『지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가능하다면 흑인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이라고 그녀는 학생들에게 얘기했다.
 
  다섯째, LA경찰국은 폭동 당시 자신들의 상점을 방어하기 위해 무장했던 韓人들을 체포하는 데 급급하면서도 韓人상가를 상대로 약탈하고 총질하는 폭도들에 대해서는 방관했다. 또한, 당시 폭도들이 코리아타운으로 향하는 大路(대로)인 웨스턴, 놀만디, 버몬트 쪽으로 몰려가도록 유도해 결과적으로 이 거리에 포진한 韓人상가들과 코리아타운이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여섯째, 韓人 폭동피해자들 중 상당수가 당시 피해보상을 지불할 수 없는 보험회사에 가입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 보험회사는 캘리포니아 州정부 보험국의 감독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이들 보험회사 중 과반수가 캘리포니아州의 허가를 받지 않았다.
 
  말하자면 州보험국이 직무유기했던 것이다. 州보험국은 피해자들이 제기한 불평사항에 대해 조사를 벌였는가? 또한 사기보험 피해자들의 보상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조치를 취했는가?
 
 
 
 폭동 피해 韓人업소 再개업 못 해
 
  일곱째, 폭동 당시 정부 구호기관인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피해자들 사이에서 조롱거리였다. 왜냐하면 아주 소수의 피해자만이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은행의 채무이행 조치로 주택과 상점을 빼앗겼다. FEMA가 행한 조치는 무엇이었는가?
 
  여덟째, 폭동 후 소수의 주유소와 식품점만 市공청회를 통해 再개업을 할 수 있었다. LA市 당국이 再개업을 위한 허가조건을 강화시켰기 때문이다. 再개업을 허가받지 못한 상점들은 무슨 이유로 거부되었는가?
 
  마크 리들리 토머스 캘리포니아州 하원 의원은 4·29 당시 장사를 하다가 폭동 피해를 본 韓人상인들로부터 원망을 받아 온 정치인이다. 그는 폭동 후 韓人들이 영업을 했던 흑인지역에서 다시 再개업을 하려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 市조례를 제정했다. 이 때문에 많은 피해 韓人들은 피땀 흘려 일궈 논 업소를 다시 열지 못하고 쫓겨나야 했다.
 
  토머스 의원은 최근 피해를 당한 韓人들이 흑인지역에서 다시 비즈니스를 개업하지 못한 점에 대해 뒤늦게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1988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소에 보내졌던 일본인들에 대한 배상법에 서명했다.
 
  美 정부는 「진주만 폭격」(1941년 12월7일) 사건 이후 미국에 거주하는 약 12만 명의 일본系들을 「국가안보의 위험한 존재」라며 강제로 수용소에 보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의 승인을 얻어 「행정 명령 9066호」를 발동해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系 2, 3세들까지 부모와 함께 수용소에 억류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 억류는 위법 판결
 
1992년 4월30일, 경찰이 LA폭동 용의자들을 체포하고 있다.
  일본 이민사에서 최대 수난으로 기록되는 이같은 강제 수용소 생활은 나중에 수용소에서 풀려난 2, 3세들이 「왜 우리들이 아무런 혐의도 없이 일본系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보내져야 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됐다.
 
  이 일본系 2, 3세들은 미국 정부의 강제수용소 격리 조치에 강력하게 반대 투쟁을 벌였던 일본인 2세 프레드 고레마쓰, 민 야수이, 고든 히바라시 등을 「민권투쟁」의 표상으로 삼았다. 20代의 프레드 고레마쓰는 일본인 소개령이 내려졌을 때 미군이 지시한 소집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이탈리아系 애인과 도주했다. 유타州에서 은신하고 있던 그는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됐다.
 
  그는 재판정에서 『일본系라는 이유로 강제수용소로 보내지는 것은 수정헌법 14조의 위반』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연방법정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 유타州 수용소로 보냈다.
 
  1944년 12월18일 법정은 고레마쓰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는 계속 법정투쟁을 벌였다. 1983년 11월10일 美 연방지법은 『전쟁 중이라도 기본 인권은 보호되어야 한다』면서 고레마쓰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일본系 2세들이 美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시작한 지 40년 만의 승리였다.
 
  결국 레이건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內 수용소에 억류됐던 일본인들에 대해 16억 달러의 배상액을 결정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 법에 의거 1990년부터 과거 수용소에 보내졌던 일본系 생존자들에게 1인당 2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1986년 캐나다 정부도 제2차 세계대전 때 自國 내에서 일본인들을 부당하게 수용시킨 점을 사과하면서 2억30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미국 정부는 1971년 알래스카 에스키모人들에게 10억 달러를 배상하고 약 4400만 에이커의 땅을 돌려 준 일이 있다.
 
  1980년에는 오리건州에 거주하는 인디언 클래매스(Klamaths)族에게 8100만 달러를 지급했으며, 1985년에는 사우스 다코다州의 인디언 수(Sieux)族에게 1억500만 달러, 위스콘신州의 인디언 치피와스族에게 3100만 달러, 플로리다州의 세미놀수族에게 1200만 달러를 각각 지급했다. 1986년에는 미시간州의 아타와스族에게 3200만 달러를 지급했다.
 
  미국의 흑인 단체들도 지난 수십 년간에 걸쳐 과거 흑인 노예제도에 대한 미국 정부와 기업들의 배상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內 일본인, 인디언들에 대해서는 배상을 하면서 왜 흑인 노예 착취에 대한 배상은 없는가?』라며 투쟁을 하고 있다.
 
 
 
 LA 신임 시장, 韓人피해 인정
 
4·29 폭동 당시 LA경찰국 현장지휘관이었던 韓人 경찰 폴 金씨는『당시 韓人사회가 힘이 없었고, 단결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난 5월17일 실시된 LA시장 결선 투표에서 라티노人 안토니오 비야라이고사(53)가 시장에 당선됐다. 라티노가 LA시장이 되기는 13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비야라이고사 당선자는 지난 7월1일 취임을 앞두고 韓人系 5명을 시장직 인수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만큼 韓人사회를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또한 비야라이고사 당선자는 코리아타운 유세에서 4·29 폭동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韓人사회에 대한 피해배상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난동과 약탈, 방화를 저지른 흑인과 라티노들을 「폭도」로, 「4·29 사태」를 「폭동」이라고 규정했다.
 
  지난 4월30일 LA 코리아타운에서 「전국韓人정치포럼」이 열렸다.
 
  LA경찰국에서 은퇴한 폴 金(Poul Kim)씨가 참석해 『4·29 폭동 피해는 韓人들이 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金씨는 LA경찰국에서 韓人으로는 최고 직위인 서열 3위의 커맨더에 올랐던 인물이다.
 
  지난 3월 경찰 생활 30년을 마감한 그는 누구보다도 LA경찰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4·29 폭동 당시 그는 코리아타운을 관장하는 LA경찰국 윌셔경찰서 형사과장이었다. 코리아타운 폭동현장의 지휘관으로 부하들을 지휘했다. 폭도들이 여기저기서 날뛰고 있을 때 경찰 본부의 투입명령을 기다리면서 계속 지원요청을 했으나 본부에선 아무런 답변이 없었던 상황을 그는 기억한다.
 
  현장 지휘관 책임자로 폭도들과 맞섰으나 이들을 제압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불타고 있는 건물을 보고 韓人상인들은 공포와 탄식의 눈물을 흘렸고, 이를 보는 金씨와 부하 경찰들은 무기력에 빠졌다고 한다.
 
  그는 당시 『韓人상가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한 韓人들과 시민들의 무장을 해제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폭동 중 韓人으로 유일하게 희생된 이재성(당시 18세)군을 오인 사격한 韓人들을 체포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나중에 4·29 진상조사를 위한 청문회에 불려 나가기도 했다.
 
  당시 李군은 동포들을 구하러 친구 세 명과 함께 차를 타고 불길에 휩싸인 코리아타운의 밤길을 달리다 총격세례를 받고 쓰러졌다. 어두컴컴한 밤중에 달려오는 이들을 상가 옥상에 있던 韓人들이 폭도로 오인하고 총격을 가했던 것이다.
 
  金씨는 4·29 폭동 당시 진원지로 알려진 사우스 센트럴의 맨체스터와 플로렌스 인근에서 소요가 발생했을 때 경찰 본부가 강력하게 대처했더라면 큰 폭동으로 발전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당시 톰 브래들리 LA시장과 경찰서장이 비상시국에 대한 인식이 미약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韓人 사회가 무력했고 단결하지 못해 힘이 없었다』고 단정했다.
 
  미국 사회에서의 정치력이 약하고, 韓人사회를 대변할 인맥이 없었으며, 韓人사회 자체 단결력도 미비했다고 한다. 주인의식을 갖고 우리의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하는데, 韓人들끼리 서로 다투는 데 열중해 힘을 기르지 못했다고 한다.
 
  韓人들이 열심히 비즈니스를 운영하면서 정부에 세금을 냈으면, 당연히 정부에 납세자의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데 韓人사회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韓人들은 「마른 모래」가 될 것인가
 
  지난 5월6일 LA폭동 13주년을 맞아 미국의 공영방송인 PBS TV는 「젖은 모래」란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영화는 폭동에서 韓人으로 유일하게 희생된 이재성군의 어머니 이정휘씨의 恨을 전했다.
 
  그녀는 『젖은 모래는 손 안에서 단단하게 쥘 수 있으나, 모래가 마르게 되면 손가락 사이로 떨어져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고 했다. 韓人들이 4·29 폭동 직후에는 젖은 모래처럼 한 덩어리로 단결하였으나, 불과 1년의 세월이 지난 뒤 마른 모래처럼 부서져 4·29 폭동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었다.
 
시카고 지역 UIC 대학의 韓人학생회가「4·29 진상규명연대」를 조직해 他지역 학생들과 교류를 다짐하고 있다.
 
 
 소수민족들 단결해야
 
  4·29 폭동은 韓人·흑인·라티노 등을 포함한 미국사회의 소수 유색인종들이 당한 현대사의 비극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수난을 당한 소수민족들이 「젖은 모래」처럼 단결하여 인종차별과 빈부차별을 극복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한국순교자성당의 한국어 학교에서 4·29 폭동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김유리양은 「모든 사람들에게」라는 제목의 글을 적었다.
 
  〈13년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4·29 폭동을 알고 있나요? 로드니 킹이라는 분을 아시나요? 로드니 킹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들이 차를 몰고 가는 그를 잡아 끌어내려 발길질을 하고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우리는 오늘 4·29 폭동에 대해 배웠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과 흑인들에게 많은 피해가 있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미국 학교에서도 이같은 역사에 대해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4·29 폭동에 대해 배워서, 「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하고 깨닫고 반성한다면, 우리가 어른이 돼서 이런 일은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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