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勳周 미국 네추럴 팜스 LLC社 대표
눈물을 감추느라, 혹은 감동의 여운을 걷어내기가 어려워서…. 지난해 세상을 떠난 미국 솔(soul) 가수 「레이 찰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레이」를 보고 난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영화 全篇(전편)에 이어지는 레이 찰스의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들으면서, 그가 온몸으로 부르는 열정의 콘서트 장면을 보면서, 암울한 시대에 맞선 시각 장애인 예술가의 슬픔과 고뇌가 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필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동북쪽으로 9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플로리다州 「그린빌」은 인구가 1000명이 안 되는 흑인 마을이다. 이곳에서 레이 찰스는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레이는 피아노 조율사였던 피트맨 아저씨 집에서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가지고 놀았다. 그 무렵 그에게 찾아온 녹내장으로 레이는 시각 장애인이 됐다. 1930년대에 흑인으로서, 시각 장애자로서 그가 겪어야 했던 시련이 화면에 잘 담겨 있다.
시력은 잃었지만 그는 바람소리까지 피아노의 선율에 담아내는 음악적 감각을 키워 갔다.
어렸을 때 자신의 부주의로 생명을 잃은 동생 조지에 대한 죄의식은 평생 레이를 괴롭혔다. 레이는 마약과 여자 그리고 자기를 불태우는 음악과 함께 살았다. 레이는 흑인 교육을 위해 2000만 달러(한화 210억원) 이상을 기부했다. 그는 흑인 인권운동의 정신을 함께한 뮤지션이기도 했다.
1960년대는 흑인의 재즈 음악이 「리듬 앤 블루스」에서 「솔」로 변하던 시기였다. 이 변화 속에서 레이 찰스의 음악은 탄생했다. 이 시기는 정확히 흑인 인권운동의 태동기와 일치한다.
사람 대접을 받겠다는 흑인들의 열망은 백인 지배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로 폭발했고, 대도시 빈민가에서는 흑인들의 폭동이 번져 갔다.
솔은 흑인들의 이런 분노와 울분, 代를 걸쳐 내려온 恨을 녹여 내는 용광로였다.
솔 음악의 선구자였던 레이 찰스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재정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흑인 인권운동에 적극 가담했다는 이유로 레이 찰스는 음악활동에 많은 제재를 당했다.
이런 足鎖(족쇄)를 풀어 주는 조지아州 의회의 결의가 영화 「레이」의 마지막 장면이다.
1990년대 초반 박사학위가 끝나갈 무렵 나는 가족과 함께 플로리다州 게인스빌의 탱글우드라는 지역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우리 옆집에 한 흑인 가족이 이사를 왔다. 아버지는 백인이었고, 어머니와 자녀 셋은 흑인이었다. 흑인 남자가 백인 여성과 사는 것은 자주 봤어도, 백인 남자가 흑인 여자와 사는 경우는 흔치 않아 호기심이 일었다.
우리 아파트에는 군데군데 흑인 가족이 살고 있었다. 우리 옆집 흑인 아주머니는 교육열이 대단했고, 아침 일찍 일어나 아파트의 앞마당을 빗자루로 말끔히 청소했다.
300여 세대가 사는 아파트에 세탁장이 두 군데밖에 없어 주말에는 빨래를 하려면 줄을 서 세탁기가 비기를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일하는 아내를 도와야 했던 필자는 개구쟁이 두 아들이 벗어 놓은 옷을 세탁하는 게 큰 일이었다.
사람들이 덜 몰리는 월요일 오후 9시에 세탁장을 찾았다. 세탁하고 건조를 한 빨래를 하나씩 펴고 나면 오후 11시가 넘었다.
세탁장에서 늘 마주친 여성이 우리 옆집에 이사온 흑인 여성 루시였다. 루시는 음성이 대단히 컸다. 그녀는 나를 수다 상대로 삼아 두 시간 이상 이야기를 했다. 하루는 루시한테 제대로 걸려들어서 자정이 넘도록 수다를 들어줬다. 세탁기를 돌리려면 동전이 필요한데 깜박해서 루시에게 신세를 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루시는 『내가 「미국 흑인」이 아니고, 「아프리카 흑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필자로서는 대단히 「희한한」 질문을 했다.
「미국 흑인이나 아프리카 흑인이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나의 냉소적인 반응에 그녀는 열을 올리며 긴 설명을 했다.
루시는 당시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짐바브웨에서 온 土種 아프리카人이었다. 평화 봉사단원으로 짐바브웨에 온 미국인 선생님을 만나서 그와 결혼했다고 한다. 루시는 곧 농학 박사학위를 받는 남편과 짐바브웨로 돌아가는 계획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루시는 4세기 전 아프리카 흑인들이 백인 인간 사냥꾼들에게 잡혀 미국으로 끌려와 노예로 비참하게 살았던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필자는 아프리카 여성인 루시를 통해 미국 흑인들의 슬픈 역사를 배우게 됐다.
노예사업이 전성기였던 1770년대에 영국의 노예무역선 수는 190척이었다고 한다. 100t급의 노예선에 실은 400명 이상의 노예가 항해 중에 6분의 1이 죽었고, 노예로 길들이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흑인의 3분의 1이 죽었다. 300년 동안 노예시장에서 거래된 흑인 수는 15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루시는 「미국 흑인들이 왜 저렇게 게으르고, 생산성이 낮아서 최하층 생활을 면치 못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이런 설명을 했다.
『미국에 끌려온 흑인들은 짐승 같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아프리카에서 누렸던 가족 문화는 말살됐고, 그게 오늘날 미국의 흑인들이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멍에의 근간이 되었다』
루시는 정신이 망가진 「미국 흑인」과 선을 긋고 싶어 했다.
루시의 야간 강의를 들으면서, 주변에 사는 미국 흑인들의 생활에 점차 눈길이 머물게 됐다.
흑인들을 만나서 사귀다 보면 먼저 그들의 순진무구함에 놀라게 된다. 그런 흑인들이 어쩌다 미국 전역의 감옥을 독차지 하다시피 하고, 미국 사회의 파괴자로 홀대받는 일이 벌어졌을까?
흑인 동네에 가보면 부모 없이 할머니와 지내는 아이들이 많다. 10代 흑인 소녀들이 철없는 性관계나 性폭력으로 아이를 출산하고는 그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겨 놓고 가출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아버지 없이 크는 아이들은 또래 흑인 아이들과 몰려다니면서 작은 범죄를 배우고 실습한다. 「아비 없는 자식」이 곧게 크기는 어렵다. 결손 가정에서 자란 흑인 어린이들은 열 살 정도를 넘기면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소녀 시절 강간을 당하는 흑인 여성의 약 40%가 근친상간을 당한다」는 통계는 흑인 청소년들의 열악한 성장기 환경을 보여 준다. 인기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가 『10代 시절 사촌 오빠에게서 강간을 당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중산층 백인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흑인 아이들이 없는 학교로 옮긴다. 능력 있는 부모들은 학군이 좋은 동네로 이사 가거나, 비싼 학비를 내고 사립학교에 보낸다. 『흑인들 때문에 미국의 사립학교들이 먹고 산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돼 있다.
많은 백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흑인들에게 회복이 안 될 정도의 反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해 미안해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들이 「아비 없는」 흑인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도록 할 만큼 마음이 열려 있지는 않다.
노예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미국의 흑인 노예들은 자신들의 이념적인 지향, 문화를 가지지 못했다. 노예해방이 된 후에도 흑인들의 처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넘기는 편의주의가 흑인들의 삶의 방식이었고, 늘 게으름이 함께 따라다녔다.
기독교계의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조상의 잘못을 속죄하는 차원에서 흑인들의 인권에 대해 동정하고 차별을 없애려는 운동이 벌어진다. 흑인 단체와 흑인 학교를 돕는 후원자가 적지 않다. 하지만 흑인을 자신들과 어깨를 같이해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백인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1968년 흉탄에 맞아 숨진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은 신분과 피부색을 초월해 모든 인간이 자유와 평등 속에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었다.
영화 「레이」를 보면서, 킹 목사와 레이 찰스가 함께 했던 그 꿈은 아직도 요원하다는 생각에 젖었다. 레이의 검은 안경 안에 맺혀 있던 눈물은 지금 미국 흑인들이 흘리는 눈물이다. 그래서 40년 前 레이 찰스가 고뇌에 차서 불렀던 노래는 현재진행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