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부 선정 이 달의 文化人物] 張旭鎭

법도와 격식을 뛰어넘은 자유인

  • : 이상흔  hana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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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문화인물에 서양화가 張旭鎭(장욱진ㆍ1917~1990)이 선정됐다. 張旭鎭은 세속을 떠나 자연 속에 살면서 해와 달, 나무와 집, 개와 까치, 아이와 가족 등 친근하고 소박한 이미지를 사용해 향토색 짙은 그림을 그린 화가다.
 
  그는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로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한국적인 삶과 꿈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순수하고, 청아하고, 볼수록 재미있을 뿐 아니라, 동양화적인 수법에 동양적 철학 사상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張旭鎭은 충남 연기군 동면 송용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張旭鎭은 독실한 불교신자이자 詩書畵를 즐겼던 아버지 張基鏞(장기용)에게서 틈틈이 그림과 글을 배웠다. 그는 일곱 살 나던 해 아버지를 여의자 서울에 있는 고모의 도움을 받으며 자랐다.
 
  1924년 그는 경성사범부속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 때는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가 주최한 전국 소학생 미술전에서 일등상을 받는 등 그림에 재능을 나타냈다. 1930년 그는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이때부터 미술반 활동을 하면서 그림에 열중했다. 3학년 때 일본인 역사 교사의 공정치 못한 행동에 항의하다 중퇴를 당했다.
 
  1936년 봄 張旭鎭은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체육 특기생으로 편입했다. 하지만 그는 운동보다는 그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4학년 때 朝鮮日報가 주최한 제2회 全조선 학생 미술 전람회에 「공기놀이」란 작품을 출품하여 최고상을 받았다.
 
  양정고보를 졸업한 張旭鎭은 일본 東京의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훗날 張旭鎭은 『교수들이 내가 그림을 멋대로 그린다고 지적하고, 주위에서는 내 그림에서 일본풍이 보이지 않는다고 싫어했다』며 유학 시절을 회상했다. 유학 시절 張旭鎭은 「나만의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했다.
 
  1943년 張旭鎭은 유학을 끝내고 귀국했으나 이듬해 겨울 일제의 강제 징용에 끌려 갔다. 9개월 뒤 일제가 패망하면서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국립 중앙박물관의 직원으로 취직했다. 그러나 박물관 업무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張旭鎭은 1947년 박물관을 그만두고 金煥基(김환기), 李仲燮(이중섭), 劉永國(유영국) 등 동료 화가들과 모임을 만들어 작품활동에 전념했다.
 
  1954년 張旭鎭은 서울大 미술대학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으나, 1960년 이를 그만두고 경기도 양주 덕소의 한강변에 머물면서 그림에만 전념했다. 덕소에서 12년을 머문 후 그는 충청도 수안보(6년), 경기도 용인 신갈(3년) 등 좀더 조용한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1980년대 이후에는 油彩(유채) 안료를 수묵화처럼 묽게 구현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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