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南美의 巨人 브라질 - 역사와 정치

帝政, 共和政, 군사쿠데타 정변 거쳐 민주화… 농경지가 남한 면적의 10배지만 굶주리는 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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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군사정부 초기, 대규모 海外 차관을 유치, 전례 없는 고도성장을 이뤘다. 1970년대의 국제 석유파동, 외국인 투자감소 등 對外경제 여건의 악화로 1980년대 초에 들어 경제성장 신화를 접어야 했다. 결국 브라질 군부는 약 20년간의 군정을 종식하고 1985년 민간정부에 정권을 이양했다. 민간정부는 1988년 新헌법을 제정했다

金 順 泰 외교통상부 中南美 협력과장〈stkim88@mofat.go.kr〉
1953년 경북 칠곡 출생. 한국외국어大 및 리스본대학원에서 포르투갈語 전공. 駐브라질 대사관 참사관, 駐에콰도르 대사관 1등 서기관, 駐포르투갈 대사관 3등 서기관, 駐상파울루 총영사관 영사 역임.
지난 1월25일 인도를 방문한 브라질 룰라 대통령(왼쪽)이 인도 바지파이 총리와 환담을 나누고 있다. 이날 브라질을 포함한 南美공동시장(MeRCOSUR)과 인도는 자유무역협정의 前 단계로 특혜무역협정을 체결했다.
포르투갈의 「大항해 시대」인 1500년 4월22일 문명인으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의 카브랄 선장이 브라질 해안에 표류했다. 그는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개척한 印度 항로를 따라 인도에 도착, 후추 등 향료 무역을 관장할 통상거점과 식민지 건설을 목적으로 리스본을 떠났다. 인도로 항해 중 大西洋의 풍랑과 航法 착오로 미지의 땅에 다다른 것이다. 카브랄은 자신이 지휘하는 13척으로 구성된 그 당시 최강의 정예 무장 艦隊에서 배 1척을 차출, 브라질 발견 소식을 본국의 돈 마누엘王에게 보고하여 브라질은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 후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발전하다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흡수되자 60년간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포르투갈이 1640년 國權을 회복하자 다시 포르투갈 治下로 들어갔다. 포르투갈은 앙골라·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식민지보다 금·은 등 지하자원과 염료로 쓰이는 파우브라질(pau-brasil) 나무가 풍부한 브라질의 식민지 개발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브라질 국명도 이 나무에서 나왔다.
 
  포르투갈 王家는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本土가 점령당하자, 1808년 브라질로 王家를 옮겼다. 국왕이었던 돈 후안 6세는 리우에서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브라질 북쪽에 위치한 佛領 가이나를 점령통치하면서 브라질의 산업을 부흥시켰다.
 
  돈 후안王은 프랑스 침략군이 물러남에 따라 본국 국민들의 성화에 못 이겨 왕세자 돈 페드로를 브라질에 남겨두고 1821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돈 페드로는 본국 조정이 브라질의 독립을 우려하여 자신의 브라질 통치권한을 대폭 제한하는 등 다시 식민지 상태로 원상 회복하려 하자 1822년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 황제로 등극했다.
 
  전제군주제를 강행, 의회와 심한 갈등을 빚은 돈 페드로 황제가 왕위를 버리자 어린 나이의 돈 페드로 2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농축산업을 장려하고 유럽 이민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는 등 경제발전 기초를 다졌다. 이때 커피는 브라질 경제발전의 기초가 됐다.
 
  돈 페드로 2세는 파라과이와 5년간이나 전쟁을 치렀다. 내륙국인 파라과이는 大西洋 진출을 노려 우루과이를 합병하고 아르헨티나 북부 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뒤 당시 弱體였던 브라질을 1864년 선제공격한다. 이 南美 최대 전쟁에서 브라질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연합해 파라과이에 승리하면서 남미의 大國으로 부상하게 된다. 돈 페드로 2세가 유럽 방문 기간 중인 1888년 황제를 代行했던 이사벨 공주가 노예제도를 폐지함으로써 근대정치제도의 기틀을 다졌다.
 
  노예제도 폐지에 불만을 품고 있던 거대 농장주들은 군부와 손잡고 帝政타도를 기도, 對파라과이 전쟁 영웅인 폰세카 장군의 군사 쿠데타로 1889년 브라질은 공화국이 되지만 이후 여러 정변의 악순환을 겪는다. 브라질은 19세기 말부터 아마존의 마나우스를 중심으로 번성한 천연 고무산업으로 큰 富를 축적했으나 경제발전이 지속되면서 빈부격차 및 舊정권에 대한 불만이 군부를 중심으로 다시 일어났다.
 
  결국 세계 大공황으로 미국이 커피 수입을 중단하자 브라질은 극심한 경제불황에 직면했고, 1930년 大選 결과에 불만을 품은 낙선자 바르가스가 혁명을 일으켜 舊공화국 체제가 무너진다. 바르가스 정부는 헌법을 중단하는 등 근 15년간 독재정치를 폈다.
 
  브라질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과 민주진영인 연합군의 승리는 브라질 국내 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다. 언론의 자유, 정치범 석방, 정당 창설 허용 등 민주화가 다소 이뤄졌으나 독재정치에 식상한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바르가스 정부는 1945년 실각했다. 그 후 정권 교체가 빈번했다.
 
  1960년 취임한 콰드루스 대통령은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에도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브라질産 농산품과 공산품 수출시장 개척을 위해 自主외교를 표방하면서 쿠바와의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또 中南美의 전설적인 공산혁명가 체 게바라에게 최고 훈장을 수여하는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하다 정권 7개월 만에 갑자기 사임했다.
 
 
 
 1960년 수도이전으로 경제에 큰 부담
 
  당시 대통령직을 승계해야 할 고울라르치 부통령이 中國을 방문 중이라 下院의장이 대통령직을 1주일간 대행하면서 졸속으로 의원내각제가 도입됐다. 육·해·공군 長官들의 반대로 간신히 대통령직을 승계한 고울라르치도 전임 대통령의 뒤를 이어 美蘇냉전이 극에 달했던 그 당시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좌경화 정책을 추진, 사회적으로 불안이 고조된 데다 경제불황까지 겹쳐 새로운 쿠데타가 임박하게 됐다. 고울라르치 정권도 결국 1964년 카스텔루 브랑쿠 장군의 쿠데타로 붕괴, 군사정부가 계속된다.
 
  정치적 불안 속에서 경제적으로 성장한 기간도 있었다. 특히 브라질 근대 경제성장의 代父라 할 수 있는 쿠비체크 대통령은 자동차산업 육성, 국가기간시설 확충, 아마존 개발 등을 통한 경제성장 정책을 수립, 『5년 임기 중 50년의 발전을 이룩하자』며 年 7%의 고도성장을 이루는 한편 수도를 리우에서 브라질리아로 옮겨 상파울루 등 중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국가통합발전에 주력했다.
 
  브라질은 과거 살바도르, 리우 등 해안에 위치한 수도의 안전(海賊 침략 대비)과 광대한 국토의 균형 발전을 위해 수도이전론이 1750년부터 있었다. 1822년 정치인 보니파시오가 수도의 내륙 이전과 그 이름을 브라질리아로 할 것을 주장했다.
 
  브라질人들이 숭상하는 성직자 돈 보스코 신부가 19세기 중엽에 『20세기에 중부 고원지방으로 수도를 이전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긴 세월이 지나 1892년 새 수도 이름을 브라질리아로 정하고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중앙고원에 수도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1956년 遷都를 공약으로 내세운 쿠비체크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수도이전사업이 급진전됐다. 1957년 공사에 착공, 불과 1000일 만에 새로운 행정수도가 완공된 뒤 1960년 遷都했다.
 
  遷都가 도시 기능보다 정치적 목적이 두드러진 데다 급조된 것이 문제였다. 「21세기로 비상한다」는 뜻을 담아 비행기 형상을 본뜬 행정수도는 비행기 胴體 부분을 중심으로 거주구역, 상가, 공공시설들이 대칭적으로 개성 없이 설계돼 마치 무시무시한 전체주의 국가의 수도에 와 있는 듯한 섬뜩함을 준다.
 
  대통령宮, 외교부, 법무부, 중앙성당 등 주요 공공건물들의 건축미가 빼어나 현대 건축학도들의 산 교육장이라는 호평도 받고 있다. 브라질리아는 1987년 20세기에 건설된 첫 행정수도라는 이유로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그러나 브라질리아는 외채로 건설돼 취약한 브라질 경제에 큰 부담이 됐다.
 
  遷都 후 40년이 지난 지금도 룰라 대통령을 포함한 연방정부 공무원 중 상당수가 아직도 행정수도에 情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많은 고위직 관리들이 생활이 더 편리하고 정치적 근거지가 있는 상파울루나 리우에 별도 사무실을 갖고 있어 주말에는 도시가 텅 빈다. 게다가 브라질리아는 끝없는 고원에 외딴 섬같이 홀로 건설돼 주변에 생활필수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거의 없어 自足기능을 갖추지 못했다.
 
  상공부의 산업피해국과 같은 일부 정부기관은 리우에 잔류하고 있다. 現 집권당인 노동자당(PT)의 중앙당사 등은 상파울루에 있어 중요한 國事가 상파울루에서 논의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룰라 대통령도 상파울루의 번화가에 위치한 브라질은행에 개인 집무실을 두고 대개 주말은 상파울루에서 보낸다.
 
  이 때문에 상파울루州知事는 연방대통령과 유사한 정치권력을 향유하고 있다. 외국 원수들의 국빈 방문 때 브라질의 정치경제 심장부인 상파울루州 방문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그러나 州知事가 외국원수 영접을 위해 공항에 출영하거나 숙소로 예방하는 의전관례는 있을 수 없다. 외국 원수가 필요시 주지사宮으로 예방을 가야 하기 때문에 의전상 자존심이 강한 영국 총리 등은 상파울루 시내 식물원 시찰일정 등을 일부러 만들어 제3의 장소에서 州知事를 면담하기도 한다.
 
 
 
 카르도주 대통령, 민주주의와 改革 추진
 
  브라질은 1960년대 군사정부 초기에는 前 정부가 닦아 놓은 경제 기초 위에 대규모 해외 차관을 유치, 전례 없는 고도성장을 이뤘다. 1970년대의 국제 석유파동과 외국인 투자 감소 등 對外경제 여건 악화로 브라질은 1980년대 초에 브라질 경제성장 신화를 접어야 했다. 중남미 全域에 팽배한 경제위기, 민주화운동과 이에 따른 정치 개혁 추진으로 브라질 군부는 약 20년간의 군정을 종식하고 1985년 민간정부에 정권을 이양했다. 민간정부는 1988년 新헌법을 제정했다.
 
  新연방헌법은 사회의 모든 계층이 모여 다양한 이익을 반영한 탓인지 부피로 따질 때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헌법이다. 헌법 조항의 상당 부분이 일반 법률적 성격을 띠고 있고, 국민의 의사를 집약한 「국민헌법」이지만 헌법 개정을 위한 협상이 지금도 끝없이 의회에서 진행 중이다.
 
  1989년 「브라질의 케네디」라고 불릴 만큼 젊고 유능한 콜로르가 직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콜로르 대통령은 과거의 국수주의적 정책에서 탈피해 시장개방, 무역확대, 공공기업의 민영화에 힘썼다.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과 南美공동시장(MERCOSUR·메르코수르) 창설을 추진했으나, 자신의 부정축재 및 독직 혐의로 의회의 탄핵결정 직전에 사임, 이타마르 프랑쿠 부통령이 그의 잔여임기를 마쳤다.
 
  1994년 종속이론의 태두인 카르도주 대통령이 선출돼 1995년 MERCOSUR를 출범시키고 2002년까지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면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경제적으로 「헤알(Real)化 정책(브라질 헤알貨와 미국 달러貨를 1:1로 연동 후 환율변동 밴드제 운영)」을 본 궤도에 올려 살인적인 악성 인플레션을 진정시켰다.
 
  그는 對外시장 개방과 함께 석유·천연가스·통신·광산 등에 대한 민영화 정책 추진 등을 통해 성과를 거두었다. 과도한 외채부담으로 금융위기를 자주 맞던 브라질은 경제 기반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아 1999년 다시 금융위기를 당했으나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아 극복하였다.
 
  카르도주 정부는 의회內 지지 기반 취약으로 사회복지제도ㆍ稅制 분야에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하지 못했다. 민영화로 전기·전화 등 공공요금이 폭등하고 경제개발 이익은 일부 계층으로 집중되면서 국민 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욱 악화돼 現 노동자당(PT) 정부가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길을 열었다.
 
 
 
 「중남미의 中國」
 
  2000년 지방선거에서 노동자당은 전국적으로 폭 넓은 지지를 받았다. 빈민 출신으로 초등학교를 간신히 마친 강성 금속노조위원장 출신의 룰라 후보는 大選 네 번 도전 끝에 2002년 10월 국내외의 우려 속에 브라질 역사상 최고인 61%의 지지로 당선됐다. 브라질 역사상 최초의 좌파정당 정권으로, 룰라 대통령은 노동자당, 자유당(PL), 브라질공산당(PCdoB), 브라질의 공산당(PCB), 전국동원당(PMN)의 연립후보로 당선됐다.
 
  취임 후 주요 요직에 집권 노동당 소속이 아닌 민간 실무 전문가를 배치, 능력 위주의 인사배치, 야당 포용정책을 통한 의회內 과반수 확보 등 정치기반 강화, 기아퇴치 프로그램(Fome Zero) 등을 통해 빈곤층에 대한 선거공약 실천을 추진하고 있다.
 
  19세기 말 노예해방 후 王政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들어서 여러 차례의 군사쿠데타, 독재정치가 반복되다 1980년대 말 민주화가 이룩되는 등 브라질 국민들은 다양한 정치를 경험해, 「중남미의 中國」으로 불린다. 이러한 역사의 질곡은 아직도 브라질의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브라질은 공화정 도입 후 現 정부까지 모두 37명의 대통령이 나왔으며, 이 중 18명만이 직선에 의해 선출됐다. 브라질 정치는 일반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으로 인해 엘리트 정치와 군부 정치가 主流를 이루다가 1990년 이후 직선 민선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정치 민주화가 정착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재무장관과 축구감독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브라질은 세계적인 농축산물 수출국으로 2003년 곡물 생산량이 1억3000만t을 넘고, 축산 잠재력이 엄청나 육우 1억7000만 두를 사육하고 있지만, 아직도 국민의 약 30%가 하루 세 끼를 해결하지 못하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과거에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경험했고 월드컵에서 5연승을 한 브라질에서는 『재무장관과 축구대표팀 감독은 누가 맡아도 상관없다』는 농담이 있다. 누가 재무장관이 되더라도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막을 수 없고, 누가 축구대표팀 감독을 맡더라도 지지 않는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브라질은 경제·사회적으로 아직 큰 문제를 안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안정추세에 접어들고 있어 아무나 재무장관을 해도 된다고 거꾸로 해석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기대된다. 현실적으로 미국을 포함해 세계 어느 나라도 브라질에 대하여 이래라 저래라 고압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는 나라가 없다. 나름대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입후보를 추진할 만큼 독자적인 대국주의를 지향하면서 中南美의 대변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국명의 약자) 국가群의 하나로 21세기의 경제대국을 꿈꾸고 있는 브라질人들은 가끔 『브라질이 미국보다 훨씬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지만 미국을 능가하지 못한 것은 신이 축복받은 땅에 브라질人을 내려 주셨기 때문』이라고 자조한다.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영국인들이 브라질에 먼저 정착했다면 현재 미국의 워싱턴과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의 역할은 완전히 뒤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유엔본부도 리우 해변에 있지 않았을까.
 
  한국은 1959년 브라질과 국교를 수립하고 1962년에 상주대사관을 개설했다. 브라질은 전통적으로 한국에 대해 우호정책을 취해 왔으며, 우리 경제발전상에 관심이 많다. 1996년 金泳三 前 대통령이 브라질을 국빈 방문했고, 2001년에는 카르도주 대통령이 答訪했다. 그의 訪韓 당시 경제·通商 등 여러 분야에서 우호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자는 취지에서 21세기 韓·브라질 특별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위해 구성된 「韓·브라질 21세기 위원회」는 1997년부터 2년간 양국에서 번갈아 네 번의 회의를 개최하고 韓·브라질 간 주요 협력 사업분야로 정보통신, 전자전기, 생명공학, 학자교류 등 4개 분야를 도출하고 협력이 추진되고 있다.
 
  鄧小平은 『21세기는 태평양 시대이자 동시에 대서양 및 중남미 시대가 도래하므로 중국·중남미 관계를 南南협력의 본보기로 삼겠다』며 중남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00년대 들어 급진전하고 있는 中國·브라질 관계를 보면 실감할 수 있는 말이다. 중국은 13억 인구의 식량자원 공급기지로, 또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철광·알류미늄·우라늄 등 자원의 안정적 확보를 위하여 브라질의 인프라 분야에 투자할 계획이다.
 
 
 
 대한항공, 서울-상파울루 간 直航 재개해야
 
  1990년대 이후 세계 주요 식량생산국들의 생산능력이 대부분 한계에 도달한 가운데 브라질만 유일하게 추가 경작개발 가능지역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은 세계 경작 면적의 10%를 갖고 있으나, 공업화 진전 등으로 경작지 확대에 한계가 있고, 세계 인구의 20%에 달하는 自國 인구의 식량보급도 급선무다. 미국이 생산 능력에 한계가 드러난 반면, 브라질은 100만km2(남한 면적의 10배) 이상의 국토가 농업경작지로 언제든지 전환 가능하고 인구도 1억8000만 명 수준이어서 수출 여력이 크다.
 
  중국은 금년 중 약 1000만t의 브라질産 콩을 수입할 예정이며, 식량 안보 차원에서 브라질과 자원·농업 분야에서의 협력을 적극 추진 중이다. 한국도 중장기적으로 브라질의 자원 및 식량 확보를 위한 전략 검토가 필요하다.
 
  대한항공은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 세계경제가 호전될 때까지 서울-상파울루 직항선 운항을 잠정 중단했다. 그동안 이 구간에서 국적선 운영은 우리 기업의 南美 진출, 교포사회의 성장발전과 韓·브라질 양국 간의 통상교역 증진에 기여했다고 본다. MERCOSUR 지역 국가에 거주하는 10만여 동포사회와 고국을 이어 주는 「정신적 지주」로서 상징적 의미가 매우 컸다. 곧 브라질에 중국 국적기가 취항할 예정이다.
 
  브라질에는 월드컵 5승을 기록한 나라답게 「남자아이들은 축구공을 발에 달고 태어난다」는 속담이 있다. 2002년 월드컵 전후부터 브라질에 축구 유학생이 증가하여 지금 우리 청소년들 약 300명이 브라질 곳곳에서 축구를 배우고 있다. 이들은 축구 외에도 학교에서 포르투갈語, 영어 등 우리 축구인들의 국제화에 필요한 외국어도 공부하고 있다. 특히 고등학생의 경우 병역 연기 문제와 2~3년의 장기 축구유학에 필요한 비자 취득 문제를 도와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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