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 德 敎 창조사 대표
1927년 대구 출생. 중고생 잡지 「학원」 편집장, 「대백과사전」(학원사판) 편찬주간, 「새나라신문」 주간, 「주부생활」 편집고문, 「출판문화」 편집위원 역임. 편저서 「韓國姓氏大觀」, 「詩의 고향」 등.
1927년 대구 출생. 중고생 잡지 「학원」 편집장, 「대백과사전」(학원사판) 편찬주간, 「새나라신문」 주간, 「주부생활」 편집고문, 「출판문화」 편집위원 역임. 편저서 「韓國姓氏大觀」, 「詩의 고향」 등.
서울 신촌의 한 식당에서 만난 崔德敎(최덕교·77) 창조사 사장은 默言(묵언) 수행을 끝낸 스님처럼 이야기를 숨차게 쏟아냈다. 깔끔한 양복에 쑥색 밀짚모자를 눌러쓴 그는 『언론 인터뷰에 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일간지나 주간지에서 가볍게 다루어지는 것이 싫다』는 게 그 이유였다.
긴 産苦 끝에 내놓은 자신의 책에 대해 그는 강한 자부심을 보였다.
「한국잡지백년」은 출판계에서 한국잡지 연구에 한 획을 그을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1896년부터 1953년까지 발행된 한국잡지 380여 종을 분석했고, 분량은 3권으로 모두 1700쪽이 넘는다.
각 잡지의 발행인·편집인·발행소·인쇄소·판형·편집체제·면수·정가 등 書誌(서지)사항이 소개돼 있고, 창간호를 중심으로 창간 취지 및 목차와 주요 기사 등을 다루었다.
그 시대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희귀한 자료들이 적지 않다.
신문 평론 잡지인 「鐵筆(철필)」 창간호 (1930년)에는 朝鮮日報 기자 시험문제가 수록돼 있다. 70년이 지난 현재의 젊은이들이 기자가 되려고 치르는 작문·상식 시험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나는 왜 신문기자가 되려는가.
▲종로 종각에 불이 났다면 어떻게 무엇을 조사 보도할까.
▲다음 단어를 간단히 해설하라.
데몬스트레이션·趙光祖·린드버그·베르샤유·不服從運動·모라토리엄·正當防衛·리오데자네이로·프리모·리벨라·淸黨運動·完全保障·蔣中正·코스모폴리탄·俄館播遷·綠肥·스팀슨·스탈린>
이 책은 「한국잡지협회」가 1996년 「親睦會會報」 창간 100년을 기념해 우리 잡지 100년을 정리하자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崔사장이 첫 주자로 나서 꼬박 1년간 「잡지뉴스」에 글을 연재했다. 후발 주자를 찾지 못해 崔사장이 끝까지 쓰게 됐다. 그의 나이 70세에 시작해 7년이 걸린 작업이었다.
―7년간 작업을 계속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나는 사람 만나는 것을 참 좋아해요. 이 책을 만들면서 잡지 속의 옛 사람을 만났어요. 편집자·필자, 조판 등을 담당했던 사람을 한 명 한 명 만나는 일이 아주 짜릿했어요』
―주변의 만류는 없었습니까.
『안노인이 많이 말렸어요. 두문불출이지, 자다가 벌떡 일어나 자료 찾아서 왔다갔다 하니까 「저 영감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더군요』
―아쉬움이 있다면.
『너무 늦게 시작했어요. 살아 생전에 마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늘 조급했습니다. 70세에 시작해서 이걸 얻었으니 그럭저럭 만족해요. 젊어서부터 「잡지에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칠십이 넘어서 한 번 더 미칠 수 있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崔사장은 1952년 12월 中高生 잡지 「학원」을 만들면서 잡지계에 발을 디뎠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崔사장은 1953년 5월부터 「학원」 편집장을 맡았고, 당시 8만 부를 발행했다고 한다.
崔씨는 자료를 구하기 위해 전국의 신문사와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다. 『非협조적인 도서관 司書들이 많아 곤란을 겪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司書들과 친해지는 게 제일 힘든 일이었습니다』
오래된 잡지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사진 한 컷에 300만원, 잡지 한 권에 600만원을 달라는 경우도 있었다.
희소 잡지 소장자인 金根洙(김근수) 前 중앙大 교수, 白淳在(백순재) 前 서울고등학교 교사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서울大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조선문잡지 창간호」에 많이 의존했고, 연세大 도서관에서 희귀 잡지 10여 종, 이화女大·서강大·고려大 도서관에서도 자료를 구했다.
崔德敎씨는 컴퓨터를 못한다. 손으로 쓴 원고를 부인이 컴퓨터로 입력해 주었다.
「한국잡지백년」을 편찬하면서 崔씨는 판형과 글자체 등을 일일이 자신이 정했다.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잡지의 표지를 복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렵게 구한 잡지가 걸레처럼 너덜거려 알아보기 힘든 경우가 많았어요. 책에 소개된 잡지 표지의 상당수가 수작업을 통해 복원한 겁니다. 편집자는 목수와 같은 존재예요. 오랫동안 목수 생활을 하면서 느낀 건데, 편집 하나하나에서 독자를 배려해야 합니다. 활자를 고르더라도 「가시력」을 우선시 해야죠. 그런데 요즘 단행본을 보면 모양을 위해서 너무 멋을 부려요』
崔씨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몇 가지 역사의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했다.
「어린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쓴 사람은 小派(소파) 방정환이 아니라 六堂(육당) 최남선이라고 한다. 이수일과 심순애가 등장하는 「長恨夢(장한몽)」의 작자 趙一齊(조일제)씨의 출생연도는 「1863년」이 아니라 「1887년」으로 밝혀 냈다.
소설가 羅稻香(나도향)의 생몰연대는 「1902~1927년」이 아니라 「1902~1926년」이라고 한다.
崔씨는 『최초의 新體詩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아니라, 이보다 10여년 전 李承晩 前 대통령이 쓴 「古木歌」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잡지백년」은 100년 동안 나온 잡지를 모두 다루지는 않았다. 1896년에 나온 「대죠선독립협회회보」부터 1953년까지를 다뤘다. 시대의 하한을 1953년으로 잡은 것은 전쟁 중에 소실된 잡지의 흔적을 찾아 복원하자는 뜻에서였다. 그 이후의 잡지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의무적으로 납본, 보관되고 있다.
―1953년 이후의 잡지史를 개관하는 책을 쓸 계획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여력이 없고, 또 내가 과연 요즈음 잡지들을 가지고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면 회의적이에요. 너무 상업적인 냄새가 강해요. 여성 잡지 하나만 봐도 그래요. 개화기 때 유일선씨가 창간한 여성 잡지를 보면 생각하게 하는 기사들이 많았어요. 요즘 여성 잡지들은 스캔들만 가득하지. 그게 한국 잡지계의 구멍이야. 대학을 졸업한 여성 고급 인력들은 늘어나는데 이 사람들이 읽을 만한 잡지가 없어요 』
―잡지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뭘까요.
『대중 잡지든 종합 잡지든 간에 독자들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죠. TV나 영화가 없던 시절에 잡지는 독자들에게 오락물로서 큰 역할을 했어요. 잡지의 첫째 요건이 재미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
그는 책에서 『잡지 편집이란 늘 곰곰 궁리하는 일이었다. 「홍길동전」과 「코주부 三國志」보다 더 재미나는 것은 없을까?』라고 했다.
이 책에서 崔씨는 한국 최초의 잡지를 1896년 11월 독립협회가 발간한 「대죠선독립협회회보」로 보고 있다. 학계에서는 같은 해 2월에 「대조선인 일본유학생친목회」가 발행한 「親睦會會報」를 최초로 꼽는다. 한국잡지협회는 물론,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 있는 「한국잡지박물관」에서도 「親睦會會報」를 한국 잡지의 효시로 본다.
崔씨는 한국 최초의 잡지로 「대죠선독립협회회보」를 꼽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시기상으로만 본다면 「親睦會會報」가 「대죠선…」보다 9개월 먼저 나왔습니다. 그러나 신문·잡지는 自主性이 중요합니다. 잡지의 발행 장소가 일본 도쿄라는 것, 우리 유학생 잡지 발간에 일본인 유지가 우리보다 더 많은 돈을 냈다는 측면에서 「親睦會會報」를 순수한 우리의 잡지로 보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용으로 보더라도 「대죠선…」을 한국 최초의 잡지로 봐야 마땅합니다』
「親睦會會報」를 발간할 때 조선인은 285원, 일본인이 416원의 贊成金(찬성금)을 냈다. 일본 사상가이자 교육자인 후쿠자와 유기치가 300원을 냈다고 한다.
「한국잡지백년」 첫 페이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서양 선진국의 첫 잡지는 실용 위주로 나왔지마는, 우리나라에서 나온 첫 잡지는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세우고자 자주독립을 외치며 나왔다>
崔씨가 7년 동안 한국 잡지들을 두루 섭렵하고 내린 결론이다.
그의 분석대로 한국 잡지는 19세기 말 외세의 침략으로 國運이 백척간두에 처했을 때 나왔다. 자주독립과 국권 수호를 부르짖는 계몽적인 내용이 압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지석영, 유길준, 박은식, 박영효, 손병희, 이인직, 서재필, 李承晩, 주시경, 신익희, 이광수, 방정환 등 舊韓末 대다수 지식인들이 잡지 제작에 간여했다. 14년 동안 「삼천리」의 발행인을 지낸 金東煥(김동환)씨는 잡지 경영에 대해 이렇게 썼다.
<잡지 경영이란 남아 일대의 快(쾌)사업됨에 부끄럽지 않다.…남들이 돈으로 할 때에 나는 정성으로써 하고, 남들이 재주로 할 때에 나는 노력으로써 하련다. 그래서 100책 중 99책이 아니 팔리고, 100페이지 중 99페이지가 삭제된다 해도 붙잡아 나가려 한다. 나는 우리 처지로 잡지를 보자는 놈도 미친 놈이요, 잡지를 만들겠다는 놈도 미친 놈이요, 잡지에 글 써 달라고 부탁하는 놈도 미친 놈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피자의 自嘲(자조)인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글 써 주는 대신에 침을 뱉어 준대도 나는 달게 받겠고, 잡지가 보잘것 없다고 왼뺨을 치면 오른뺨까지 내어 밀겠다>
당시 「삼천리」에 원고료를 받지 않고 글을 써 준 필자 56명이 소개돼 있다. 김기진, 김동인, 김안서, 박영희, 송영, 송진우, 심훈, 이승만, 임화, 한설야, 한용운, 현진건, 홍명희 등이 그들이다.
초창기 한국 잡지들의 특징 중 하나는 수명이 짧다는 점이다.
재정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원인은 잡지를 통해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내고자 했고, 「잡혀갈 때 잡혀가더라도 할 말은 하자」는 식으로 책을 만들어 창간호로 문을 닫는 잡지들이 많았다고 한다.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인도 등이 식민지 시대를 겪었지만, 이 나라들에서는 우리와 같은 성격의 잡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배자에게 짓밟히면서도 아름다운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잡지를 낸 민족은 우리뿐일 겁니다. 아무리 일본이 우세하다고 해도 우리를 온전히 지배할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그는 「思想界」를 1953년까지 발행된 잡지 가운데 최고의 잡지로 꼽았다. 1953년 창간된 시사잡지 「思想界」는 1960년 4·19 혁명 때 9만7000부를 찍었다. 그때까지 최고의 기록이었다. 그는 「한국잡지백년」에 「思想界」의 성공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상계」가 이처럼 부수 신장에 성공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張俊河가 구성한 편집위원회라 하겠다. 편집위원회는 10명에서 15명 안팎의 고급두뇌로 구성되어, 「특집」으로 다룰 주제를 3개월 전에 기획 결정하는 것이 가장 주된 일이었다. 편집위원들에게는 당시 대학 전임강사의 한 달치에 버금가는 車馬費(거마비·교통비)가 영수증 없이 지급되고, 회의는 月 2회, 한 번은 사상계社 안에서, 또 한 번은 맥주잔이 오가는 음식점에서 열린다.
이 회의 과정은 대단히 치밀하고 엄격했다. 매달 편집계획안을 등사기로 프린트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별로 장시간의 공개토론을 거치게 했다.…이 편집위원회는 1959년부터 1964년 초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한국잡지백년」에는 특이한 각종 잡지의 면면들이 소개돼 있다.
초등학생들을 위한 산수 잡지 「數理界」(1924년 창간), 소외된 고학생을 위한 기관지 「갈돕」(1922년 창간), 기생들이 쓰고 엮은 동인지 「長恨(장한)」(1927년 창간), 백정과 갖바치들의 잡지 「正進(정진)」(1929년 창간)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잡지인 「가뎡잡지(家庭雜誌)」(1906년 창간)에는 당시의 잡지 판매의 관행이 기록돼 있다.
<한 권에 신화 10전 우세(우송료) 5厘(리), 반 년치에 신화 52전 우세가 3전, 1년치에 신화 94전 우세가 6전.―선셈이면 이 정가표대로 시행하나, 만일 그렇지 않으면 한 권에 10전씩 또박또박 받겠소.
▲이 잡지를 보시고자 하거든 이 정가표대로 정가와 우세를 병하여 환(우편환)으로 돈을 보내시오 ▲만약 잡지값을 우표로 대신 보내면 받지 않소 ▲선셈하신 돈이 없어지면, 없어진 달 잡지 피봉에 「선셈 없어졌소」란 도장을 칠 터이니 자세히 보시오>
이미 100년 전에 정가제를 시행했고, 장기 구독자에게 우송료 할인 혜택이 있었고, 잡지값 대신 우표를 대신 보낸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崔德敎씨는 무척 신중했다.
「한 사회에 있어서 잡지의 역할을 무엇일까요」, 「과거의 잡지와 현대의 잡지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한국 잡지의 나아갈 방향은 무엇일까요」라는 물음에 『나는 잡지에 미쳐서 잡지를 모으고 소개한 사람이지 잡지 전문가가 아니다. 역사는 후대가 평가할 것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제下 잡지들의 親日 행적에 대해서 그는 『一刀兩斷식으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책이 후학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더 바랄 게 없다』는 말을 그는 여러 번 되풀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