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학공업 건설의 지휘자 吳源哲, 정보통신산업의 선도자 吳明, 한국엔지니어클럽을 만든 馬景錫, 原電건설 운영의 大家 李宗勳씨 등 개발연대의 최고기술자들이 KEC에 총집합!
馬景錫(마경석·82) 호마기술 회장, 安京模(안경모·86)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고문, 鄭萬永(정만영·77) 이엠씨테크 기술고문, 成樂正(성낙정·76) 前 한화그룹 총괄 부회장, 崔鍾浣(최종완·작고) 前 건설부 장관, 丁明植(정명식·72) 前 포항공대 이사장, 姜晋求(강진구·76) 前 삼성전기(주) 회장, 李宗勳(이종훈·68) (주)Power-Built 컨설팅 대표이사, 吳明(오명·63) 아주大 총장.
이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조국 근대화에 터보 엔진 역할을 한 한국의 대표 엔지니어들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 최초의 순수 엔지니어 친목 단체인 「한국엔지니어클럽(Korea Engineers’ Club·이하 KEC)」의 역대 회장들이라는 점이다. 이 단체에는 웬만한 중소기업인으로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경력이 화려한 엔지니어들이 즐비하다. 국내 대기업을 이끈 전·현직 CEO들은 물론, 교수·장관·국회의원 등 사회 각계 각층에서 인정받고 있는 전문가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역사가 워낙 깊어서 이미 고인이 된 회원도 많은데, 그 중에는 鄭周永(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포함되어 있다.
KEC는 자기 색깔을 잃지 않고 순수 단체로 오랜 세월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정부 위임 사업이라든가 보조 없이 모든 자금을 자체적으로 조달, 운영해 왔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200여 명으로 시작했던 회원이 현재는 1000여 명에 달한다.
『정치권에 휩쓸리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껏 큰 잡음 없이 유지해 올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권력 집단이라기보다는 친목 단체로 남고 싶은 게 저희 회원들의 공통된 소망입니다』
14代에 이어 15代 회장을 연임하고 있는 吳明 총장의 단언이다. 그는 KEC는 어떤 일로도 정치권에 연루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이 모임의 회원 가입 조건은 퍽 까다롭다. 우선 순수 엔지니어 출신이 아니면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조직을 이끄는 리더로서 그 역량이 충분히 검증되어야 가입 자격이 주어진다. 보통 정회원 두 명의 추천이 있어야 하고, 22명의 분과별 이사들로 구성된 이사회의 철저한 심사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회원이 될 수 있다. 출범 당시부터 죽 그래왔다.
『초기 멤버들은 대부분 서울大 공대 출신들이었어요. 제가 알기로는 당시 서울 공대 출신들은 열외 없이 KEC에 가입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교수들까지도요. 그래서 기념사진도 서울大 교정에서 찍은 게 보존되어 오고 있습니다』
서울 강남 대치동 선릉역 부근에 있는 KEC 사무실에 들렀을 때 사무국장인 李相賢(이상현) 국장이 들려준 이야기다. 실제로 사무실 벽에는 동숭동 서울大 캠퍼스에서 찍은 초대 멤버 사진이 걸려 있었다. 입구에는 「祖國 近代化의 旗手」라는 朴正熙 대통령의 친필 휘호도 걸려 있었다. 朴대통령이 이 모임을 적극 후원했다는 證票(증표)였다.

KEC가 결성된 건 1974년. 초대 회장인 馬景錫 現 명예회장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서울大 공대 화공과 출신인 馬회장은 당시 국영기업인 여수석유화학의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1965년 충주비료공장장에 발탁되면서 朴正熙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전국에 비료 공장과 석유화학 공장을 세운 주인공이다.
『지금도 朴대통령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슨 일이든 항상 자기가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기술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뒤 판단을 했다는 것입니다. 비서진들의 극구 반대에도 불구하고 높은 이자를 물며 외자를 도입, 장기적인 안목의 투자를 했지요. 그것이 결국에는 국가 안보에도 도움이 되고, 선진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데도 앞장선 결과를 가져왔어요』
朴대통령의 기술 이전 작업은 해외에 나가 있는 한국 출신의 유수한 과학자들을 영구 귀국하도록 갖가지 배려를 함으로써 정점에 이르렀다. 朴대통령은 당시 귀국한 유치 과학자들에게 현지에서 받던 대우와 똑같은 보수를 지급했고, 후진 양성과 동시에 연구활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KIST (한국과학기술원)를 건립했다.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낸 金基衡(김기형·77), 全學濟(전학제·75), 蔡永福(채영복·66)씨, 포항공대 金英傑(김영걸·73) 교수, 호서大 鄭根模(정근모·64) 총장 등이 그때 귀국했던 과학자들 아니오.
鄭총장의 경우 미국에서도 얼마나 유명했던지 귀국할 때 현지 언론에서 「두뇌 유출」이란 표현을 써서 더욱 주목받았지요. 어쨌든 당시 이 사람들이 받은 보수는 파격적이었어요.
朴正熙 대통령은 경제발전을 위해 과학기술인을 그만큼 융숭하게 대접했어요. 아이들이 이공계 대학 진출을 꺼려할 정도로 푸대접받고 있는 요즘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지요』
馬회장이 모임을 구상한 건 朴대통령이 좀더 많은 과학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在美한국인과학기술자협회 회원 140여 명을 초청, 대대적인 환영 파티를 열었을 때다. 대통령의 속뜻을 국내 과학기술인들에게 열심히 전달하던 馬회장도 이 행사에 참석했다. 관계 부처 장관을 비롯해 교수·박사 등 저명인사 400여 명이 참석한 행사였다. 그 자리에서 馬회장은 在美 과학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在美과학기술인들은 한결같이 고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대견스러워하면서도 귀국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멈칫거렸어요. 한국 기업들이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지위와 대우 조건을 크게 개선하지 않는 한 어렵다는 것이었지요』
과학자들은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망하지 않는다」는 한국 기업 풍토를 개탄, 경영과 자본의 분리가 한국 기업의 선결 과제라고 강조했다. 빈약한 산업 자본과 부족한 자원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여러 가지로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며 최선을 다한 엔지니어가 이유 없이 해고당하는 부조리가 시정되어야 한다는 부분에서 馬회장은 깊이 공감했다.
『모임 결성의 취지는 總則(총칙)에 나와 있는 것처럼 「기술인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권익을 옹호하고 相互間(상호간)의 知的(지적) 교류와 기술 협력으로 국가 공업 기술의 振興(진흥)과 산업 발전 및 全국민의 과학화 施策(시책)에 기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1974년 10월2일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지요. 당시 朴正熙 대통령과 金鍾泌(김종필) 국무총리가 각각 100만원과 50만원의 찬조금을 기부해 주었어요』
찬조금은 이후 崔鍾賢 선경그룹 회장, 具滋暻(구자경) 럭키그룹 회장, 金宇中(김우중) 대우실업 사장, 金錫元 쌍용양회 사장 등 수많은 기업 인사들이 출원해 주었다.
모임은 化工(화공), 土木(토목), 電氣(전기), 機械(기계), 建築(건축), 纖維(섬유), 金屬(금속), 電子(전자), 鑛山(광산), 造船(조선) 등 모두 10개 분과별로 결성되었고, 金正澈(김정철·71) (주)정림건축 명예회장, 崔亨燮(최형섭·83) 前 과학기술부 장관, 高源鎬(고원호·80) (주)대한양행 회장, 姜昌燮(강창섭·84) 삼양사 전무이사, 金承根(김승근·76) 대우기공(주) 사장, 吳源哲(오원철·75) 청와대 경제수석 등 32명이 發起人(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당시 40代에서 50代 초반이었던 이들의 나이도 어느덧 70, 80줄에 접어들었다.
非정치적 단체를 추구하지만 KEC의 잠재된 파워는 회원들의 경력만으로도 막강하다.
14代에 이어 15代 회장을 연임하고 있는 吳明 아주大 총장은 체신부 장관과 교통부·건설교통부 장관을 역임한 데 이어 동아일보 회장을 지냈다. 경기高, 육사, 서울大 전자공학과를 거쳐 뉴욕주립大를 졸업한 그는 대통령 경제과학비서관과 체신부 차관으로 근무하는 등 관계 부처 경험을 충분히 쌓은 후 입각한 보기 드문 경우다. 그 때문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각 제의가 끊이지 않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KEC가 그런 吳총장을 회장으로 추대한 것은 세계 경제 시장이 굴뚝 산업에서 정보화 산업으로 변해 가고 있어서다. 大田엑스포를 성공리에 유치시킨 吳회장인 만큼 회원들은 그가 한국 정보화 산업 발전에 큰 역할을 하리라 기대하고 있다.
변화의 선두에 선 吳회장에게 힘을 실어 줄 고문과 부회장은 모두 11명이다. 6명의 고문들은 모두 前代 회장 출신들이다. 3代 회장이었던 鄭萬永(정만영) 고문은 경남 진주 출신으로 서울大 예과와 일본 오사카大에서 통신공학과를 전공한 후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했고, 과학기술연구소 제2담당 부소장이던 1974년 클럽 창립 멤버로 입회했다. 이후 삼성반도체통신 부사장 및 고문, 동아大 전자과 교수, 통신시스템 연구조합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安京模(안경모) 고문은 황해도 벽성 출신으로 국방연구원과 충남大를 거쳐 교통부 장관, 수자원개발공사장 등을 지냈다. 현재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고문이면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 회원이기도 하다.
成樂正(성낙정) 고문은 충남 예산 출신으로 서울大 공대 전기공학과 졸업 후 한국전력공사 사장, 한국화약그룹 부회장, 한화에너지 회장 등으로 근무했고, 과총 회장, 한국기술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丁明植(정명식) 고문은 서울 출신으로 서울大 공대 토목공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미네소타大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이후 포항종합제철(주) 사장과 회장을 거쳐 포항공대 이사장으로 근무했다.
姜晋求(강진구) 고문은 경북 영주 태생으로 서울大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삼성전자 상무·전무·사장으로 승진하는 동안 이 회사를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이후 삼성전관과 삼성정밀을 거쳐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한국과학기술원 이사,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경력은 A4 용지 서너 장을 채우고도 모자랄 만큼 다양하고 화려하다.
마지막으로 李宗勳(이종훈) 고문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서울大 공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전력공사 부사장, 한국전력기술(주) 대표이사, 한국원자력연구소 이사장 등으로 근무했고, 한국공학 한림원 이사장과 과총 부회장, 기업문화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부회장들의 약력 또한 이에 못지않다. 趙庚穆(조경목·66) 부회장은 경기高와 서울大를 졸업한 후 과학기술처 차관과 제12대, 13대 국회의원을 거쳐 현재 현대건설(주) 고문으로 있고, 朴成得(박성득·65) 부회장은 성균관大와 한양大 산업대학원 졸업 후 체신부 전파관리국 국장과 정보통신부 차관을 거쳐 현재는 전자신문 대표이사로 있다.
그리고 李容璟(이용경·60) 부회장은 서울大 전자공학과와 미국 오클라호마大 대학원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통신 소프트웨어연구소 소장, 한국통신프리텔 대표이사 등을 거쳐 현재 KT 대표이사로 있고, 李潤雨(이윤우·57) 부회장은 서울大 전자공학과 졸업 후 삼성전자(주) 메모리본부 부사장과 반도체 총괄 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삼성전자(주) DS총괄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임원진 중 유일한 여성인 金孝洙(김효수·52) 부회장은 성균관大 이공대 졸업 후 KECL(現 삼성엔지니어링)과 (주)프리차이드코리아(現 대우엔지니어링)를 거쳐 현재 (주)맨파워프로페셔날서비스 대표이사로 있다.
분과별 이사나 일반 회원들 역시 엔지니어로서의 다양한 이론과 풍부한 현장 경험으로 중무장돼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회원 자격이 되는 선배나 후배들을 끊임없이 추천해 왔고, 추천을 받은 엔지니어들은 누구 하나 거절하는 법 없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입회했다고 한다. 친선 도모 단체여서 특별한 혜택이 없음에도 회원이 된다는 것 자체를 모두들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한국 엔지니어들에게 KEC는 「명예의 전당」 같은 곳이 아닌가 싶다.
지난 10월2일로 만 29세가 된 KEC. 우여곡절 끝에 삼청동에 마련되었던 클럽 사무실은 현재 대치동으로 이사, 선릉역과 인접한 한 빌딩에 자리잡고 있다. 사무실은 100평 정도의 공간에 업무실을 비롯해 역사관, 회의실, 휴게실, 홈바 등으로 아늑하게 꾸며져 있다.
『회원 전체 모임은 매월 갖는 조찬 모임과 1년에 한 번씩 하는 총회가 있습니다. 이곳 회의실이라든가 휴게실에서 하고 있지요. 사실 이곳은 회의소라기보다는 만남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 근처에 나올 일이 있거나 지나치는 분들은 언제든 들러서 쉬었다 갈 수 있도록 하고 있지요. 퇴직하신 분들이 특히 많이 오십니다. 여기가 고향처럼 편안하고 좋다고 하더군요』
사무실을 지키며 회원들을 위해 갖가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李相賢(이상현·60) 사무국장의 이야기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고인이 된 회원도 많고, 현직보다는 퇴직한 원로급 회원이 더 많다. 때문에 휴게실은 바둑을 두거나 장기를 두는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戰後(전후) 1960, 1970년대 한국 경제를 가동시킨 화려한 경력의 엔지니어들이었지만 노후는 여느 노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듯하다.
『나름대로 국가 발전에 큰 공헌을 하신 분들인데 뒷모습이 쓸쓸해 보일 때가 많아요. 1960, 1970년대 우리 경제의 동력 역할을 하신 분들이지만 거기에 대한 특별한 보상이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표현은 안 하지만 사회적인 예우에 서러움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친목 단체인지라 선·후배 관계는 끈끈하다. 후배들은 선배들의 각종 경조사는 물론 건강까지도 알뜰하게 챙긴다. 사무실에서는 수시로 인터넷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엔지니어 출신들이라 70, 80代의 老壯(노장)임에도 이해가 빠른 편이라고 한다.
한 달에 한 번씩, 매월 셋째 주 목요일 아침에 갖는 조찬 모임 때는 초청된 외부 인사의 강연을 함께 듣는다. 강사로는 관계 부처 장관이나 대학 교수들이 초청된다. 회원들은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현장에서 느끼는 정책적인 문제라든가 맹점을 지적하곤 한다. 최근 과학기술인들의 위상이 30년 전보다 오히려 나빠진 이유에 대해 거론할 때가 많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이유는 평생 직장을 보장하지 않는 사회 구조적 변화에 1차적 문제가 있지만 그 바탕에는 정부가 과학기술인들을 점점 등용하지 않는 데 있다고 봅니다. 과학기술인들이 정책적으로 소외되면서 미래가 불안해지니까 일찌감치 다른 길을 택하는 거예요. 아시겠지만 과학기술은 오랫동안 파고들어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분야입니다. 그만큼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제대로 된 엔지니어로 거듭난다는 얘기지요.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요즘 기업 세태가 엔지니어들에게까지 적용된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그건 복잡한 문제를 푼 후 겨우 알아낸 정답을 이제 막 답안지에 적으려고 하는데 시험 시간이 끝났다며 시험지를 거두어 가 버리는 거와 다를 바가 없어요』
모임 창립 때부터 함께했다는 한 회원은 이공계의 위상이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건 DJ 정권 때부터라고 꼬집어 말했다. 그에 대해서는 馬景錫 회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모임 결성의 취지였던 과학기술인의 위상 정립은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말일까. 馬회장의 생각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1967년 스페인 대회 때부터 참가하기 시작한 국제기능올림픽대회의 최근 10년 성적을 보니까 1993년 단 한 차례 대만에 자리를 내주었을 뿐 내내 우승을 했더군요. 그리고 최근 미국의 한 기관에서 미국內 외국인 교수 분포 현황을 조사했는데, 일본·프랑스 등은 줄고 있는 반면, 한국은 큰 폭으로 증가했더군요. 이는 두뇌와 기술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의 반증입니다. 지금은 이 좋은 인력을 좀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한 시기예요』
馬회장은 조선, 제철, 자동차, 원자력 발전소 부문에서도 일본과 독일의 아성을 넘보며 지속적으로 발전해 가고 있기 때문에 量産(양산) 체제로 뒤쫓아 오고 있는 중국을 지나치게 견제할 필요는 없다고도 했다.
1960, 1970년대 한국 경제가 戰後 영양실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성장 엔진을 멈추지 않고 가동시킨 馬회장. KEC를 대표하는 그의 엔진은 여전히 꺼지지 않은 채 자신감이라는 이름으로 돌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