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취재] 세기의 대결 - 소니의 생애

「튀어나온 말뚝」정신

  • : 최 흡  pot@chosun.com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 1979년 워크맨에 이어, 음반, 영화 등으로 영역 확대
● 4월, 주가 하락으로 「소니 쇼크」 불러
● 기술력과 신제품 개발의 소니 정신 쇠락, 컨텐츠 사업자로
● 家電 분야에서 위력 상실. 신제품 계속 出市로 위기 극복
소니社가 2002년 3월 선보인 애완용 인간로봇 `SDR-4X`.
일본이 패전의 늪에서 헤매고 있던 1946년, 도쿄통신공업 회사의 이부카 마사루(井深大·당시 38세) 사장은 민간정보교육국에 갔다가 「테이프 레코더」라는 물건을 보게 됐다. 당시는 처음 보는 물건. 그때 도쿄통신공업이 연구하고 있던 쇠줄을 이용한 「와이어 레코더」와는 차원이 달랐다.
 
  돌아오던 이부카 사장의 머릿속에 이미 와이어 레코더는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거야』라고 생각했다.
 
  도쿄통신공업은 이 테이프 레코더를 베껴보기로 했다. 하지만 베끼려고 해도 워낙 비싼 물건이라 구할 돈이 없었다. 음향공학이라는 참고서를 봤더니 『1936년에 독일의 AEG에서 플라스틱에 磁氣(자기) 재료를 바른 테이프 레코더를 발명했다』는 한 줄밖에 없었다.
 
  그 한 줄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다. 자석을 가져와서 한 시간 정도 갈아서 가루를 만들고, 종이에다 밥풀을 발라 붙여봤다. 물론 들리는 것은 소음뿐이었다.
 
  도쿄통신공업의 패기만만한 젊은이들이 시행착오에 착오를 거듭해 일본의 첫 테이프 레코더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50년이었다.
 
  도쿄통신공업은 그후 1958년, 회사명을 「소니」로 바꿨다. 「소니」는 라틴어의 「소리」를 뜻하는 「소누스(sonus)」와 어린아이를 뜻하는 소니(sonny) 를 합쳐서 만든 造語. 현 소니의 출발이다.
 
  소니의 전신인 도쿄통신공업은 원래 기계와 발명을 좋아하던 몇몇 친구들이 만든 이른바 「벤처」 기업에 가까웠다. 이부카는 전쟁 때 잠수함 탐색기술을 개발했고, 열선을 이용한 폭탄을 연구하다 종전을 맞았다. 함께 창업했던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는 이부카와 같은 해운연구소에서 솔라 잠수함 탐색장치를 개발 중이었다.
 
  이들이 처음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은 라디오용 컨버터를 만드는 일. 당시 일본은 戰時(전시) 언론 통제로 주파수가 고정된 라디오밖에 없었다. 이 라디오를 일반 방송도 들을 수 있도록 개조하는 것이 그들의 첫 일이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일어서다
 
 
 
 
  그러나 『가진 것은 머리와 기술밖에 없다』고 자부하던 이들은 차례차례 별난 발명품을 만들었다. 체계적인 연구라기보다는 자석가루를 종이에 밥풀로 붙여보는, 말 그대로 몸으로 부딪치는 연구다. 연구 끝에 상품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 상품을 정해 놓고 연구를 시작했다.
 
  테이프 레코더 시장조사를 하러 미국에 갔다가 트랜지스터를 보고 나서 특허권을 사왔다. 원래 특허권을 가졌던 미국 웨스턴 일렉트릭社는 『현재 수준으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안 되니 트랜지스터 보청기를 만들어보라』고 말했지만, 이부카는 트랜지스터를 개량해 결국 1955년 라디오를 만들어냈다. 원래 소니는 이때 특허사용권만을 빌렸을 뿐, 기술을 제휴한 것은 아니었다. 트랜지스터 제조 공장의 설계도면 한 장 얻지 못했다. 이부카는 3개월 동안 줄곧 웨스턴 일렉트릭 공장에 출근하다시피 해, 공장의 모습을 눈으로 메모했다. 그는 하숙방에서 매일밤 기억을 되살려 설계도면을 작성, 도쿄로 보냈다. 도쿄의 기술팀은 미국에서 보내 온 설계도면을 토대로 공장건설에 성공했다.
 
  1957년 만들어 냈던 당시 1만3800엔짜리 「포케터블 라디오」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라디오였다. 1만3800엔은 당시 일본 노동자들의 한 달 평균 임금으로, 한 레코드社에서는 「1만3800엔」이라는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이 라디오가 불티나게 팔리며 소니는 세계 수준의 기업으로 서게 된다. 이때 소니가 만들어 낸 일본식 영어 「포케터블(pocketable)」은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이란 뜻으로 영어사전에까지 실리는 단어가 됐다.
 
 
 
 모리타 사장, 일본式 경영에 문제 제기
 
  기술력에 모든 것을 걸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이부카 사장의 정신은 현재까지도 소니의 기본정신이다. 기존의 다른 나라 제품이 가지고 있던 단점을 자체적인 기술로 극복해서 더욱 훌륭한 상품으로 만들어 내는 이런 전략은 그 후로도 1959년 트랜지스터 텔레비전, 1961년 트랜지스터 VTR 등으로 이어진다.
 
  이런 소니를 보고 당시 일본 언론들은 『소니는 모르모트』라고 표현했다. 소니가 먼저 기술개발을 해서 장사되는 물건인지를 알아 놓으면 도시바가 대량생산을 해서 이익을 챙긴다는 뜻. 이부카는 몇 년 후 『일본 라디오가 세계적으로 강해진 가장 큰 원인은 여러 가지 종류의 상품을 고안해 내는 모르모트 정신의 승리』라고 자평했고, 사원들은 1960년 그가 정부로부터 褒章(포장)을 받자, 작은 모르모트 상을 만들어 이부카 사장에게 선물했다.
 
  소니가 올 들어 不振의 늪을 헤매고 이런 「소니 쇼크」로 일본 경제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이 되자, 일본 언론들은 일제히 『이부카 스피릿(정신)이여 되살아나라』고 외쳤다.
 
  이후 소니의 역사는 세계화의 역사이기도 하고, 「별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역사이기도 했다. 초창기 이부카가 이끌던 회사는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가 1971년 사장, 1976년 회장이 되면서 본격적인 세계 기업이 됐다. 『큰 것을 작게 만들어서, 회사를 크게 만든다』는 원칙을 확립한 것도 모리타 때부터다. 1979년에 출시한 워크맨이 휴대용 소형 카세트를 부르는 대명사가 될 만큼 大히트했다. 미국式 의사결정 제도를 도입했고, 1989년에는 미국의 콜롬비아 영화사를 매입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이 『미국의 魂(혼)마저도 사려는가』고 비난하자, 『혼을 파는 사람들이 문제가 있는 거지…』라고 대답, 미국의 분통을 터뜨리게 했다.
 
  그러나 모리타 회장이 분통을 터지게 한 것은 미국만이 아니었다. 그는 1990년대 초반에는 「일본형 경영이 위태롭다」는 글을 시사잡지에 게재해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는 버블 붕괴가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됐고, 일본式 경영이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을 일본이 가지고 있던 시절이다.
 
  당시 일본式 경영은 미국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자랑거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모리타 회장은 오히려 일본식 경영에 문제가 있다고 선언한 것. 모리타 회장은 『일본 기업들이 좋은 상품을 다른 나라보다 싸게 만드는 데도 다른 나라들의 비판을 받는 것은 「경쟁의 룰」이 다르다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회사가 株主(주주)에게 이익을 돌려 주지 않고, 기술개발 등 회사 자체에 투자하는 일본式 시스템은 반칙이라는 논리다.
 
  모리타 회장은 당시 『외압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일본 기업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위한 충분한 휴가를 줘야 하고, 이익을 회사에 유보하기보다는 기여한 근로자들에 대한 급여로 돌리고, 株主에게는 歐美와 비슷한 수준의 배당을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금 와서 보면 모두 일본 기업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사실이고, 세계 경영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의 일본 분위기는 찬반이 극심했다. 기존의 틀을 깰 수 있는 경영자와 근로자는 소니의 가장 큰 재산이었다.
 
 
 
 삼성과는 다른 文化的인 컨텐츠가 강점
 
   1982년부터 소니 사장이 됐던 오가 노리오(大賀典雄) 회장은 도쿄 예대 성악과를 졸업한 바리톤 가수였다. 베를린 필하모니의 지휘자 카라얀과는 임종을 지켜볼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원래 부잣집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시절 부모가 소니 증자에 참가할지 여부를 결정할 때 기업 방문을 했을 정도로 기계 마니아였고, 더군다나 소니가 도쿄 예대에 테이프 레코더를 팔러 갔을 때 학교 측 대표로 나와 음악적인 성능을 비평하는 등 인연이 겹치면서 소니에 입사하게 된 사람이다.
 
  29세 때 소니에 입사, 테이프 레코더 제조부장으로 출발한 그는 소니의 영역을 음향기기 사업에서 음반, 엔터테인먼트까지 넓히는 데 일조했다. CBS소니社를 만들어 많은 아이돌 가수를 발굴하기도 했다. 현재 소니는 『삼성이 따라올 수 없는 재주를 소니가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소니가 할리우드發 컨텐츠를 만들 수 있는 문화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물론, 모리타 회장과 함께 콜롬비아社 인수를 한 것도 그의 역량이다.
 
  그의 취미는 제트 비행기 운전이었고, 휴일에는 요트를 즐겼다. 부인은 피아니스트였지만 자식은 없었다. 일벌레 경영자만이 칭송받던 일본에서는 전혀 이질적인 스타일의 경영자였던 셈이다.
 
  오가 회장은 지난 1월 소니의 이사직에서 물러나면서 16억 엔(약 160억원)의 퇴직위로금을 받은 후 전액을 나가노(長野)현의 휴양지인 가루이자와(輕井澤) 음악홀 건립에 기부했다.
 
  『퇴임 후에 非문화적인 일본에서는 절대 살지 않겠다』던 그는 퇴직 후 완전히 일본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음악 공연 등으로 거의 해외에서 살았다. 2001년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던 중 쓰러져 몇 달간 가루이자와에서 요양한 일이 있었는데, 가루이자와는 그 인연으로 음악홀 하나를 받게 됐다.
 
 
 
 「튀어나온 말뚝」 성격의 人材 선호
 
  소니의 사원모집 광고 중 유명한 것이 『「튀어나온 말뚝」을 찾는다』라는 것이다. 「튀어나온 말뚝」이란 말은 일본어 속담 「튀어나온 말뚝은 얻어맞는다」, 즉 우리 속담의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얘기다. 튀어나온 말뚝처럼 개성이 지나치게 강하거나 주위와 융화하지 못하면 원만한 생활을 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그러나 소니는 「모난 말뚝」을 쓰는 게 장점이고, 人材를 모을 때도 모난 말뚝을 찾았다. 소니는 컴퓨터사업을 시작할 때 각 부서에서 결근이 잦고, 윗사람과 잘 다투며,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사람들만으로 팀을 조직했다. 「자존심도 강하고 협조성이 없어 조직에서 소외당하지만, 그럴 수록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다」는 이유 때문이다. 4명으로 이뤄진 이 팀은 6개월도 안되어 새로운 소형 컴퓨터 아이디어를 개발해 냈다.
 
  소니를 떠받치고 있는 게임기 「플레이 스테이션」 신화를 만들어낸 구타라기 겐(久多良木健) 사장은 단독으로 게임기 산업 진출 아이디어를 냈다. 그의 아이디어를 보고 다른 간부들이 『천하의 소니를 장난감 회사로 만들 생각이냐』고 비웃었지만, 오가 당시 사장은 『Do it!』이라며 사업 진출을 결정했다.
 
  구타라기가 4년의 비밀작업 끝에 내놓은 PS제품은 1990년대 말부터 지금에 걸쳐 최고의 히트상품이 됐다. 그는 이후로도 『소니는 치매에 걸려 있다』는 식의 독설을 터뜨리며 화제를 모았고, 『나밖에 사장감이 없다』며 게임기 회사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SCE) 사장 자리를 차고 앉았다. 그가 이제는 본사 부사장. 유력한 다음번 사장 후보로까지 올라와 있다.
 
  물론 소니의 경력에도 실패 사례는 없지 않다. 첫 가정용 VTR(베타막스 방식)을 만들었지만 마쓰시타의 VHS방식에 밀려 결국 白旗를 들었다. 베타방식 VTR의 노하우는 결국은 최강의 캠코더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규격 만들기」에서의 실패는 소니의 뼈아픈 패배 사례다. CD 플레이어에 약간의 데이터를 집어넣은 데이터 디스크맨을 1991년에 개발했으나 외국에는 出市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올 들어 시작된 소니의 위기는 이런 과거의 사례와는 유형도 다르고 그 심각성도 아주 다르다.
 
  지난 4월25일 도쿄 주식시장에서는 닛케이 평균이 7700선 아래로 내려가며 「20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날의 버블후 최저치를 주도한 것은 바로 소니였다. 소니는 28일에도 하한가까지 떨어졌고, 닛케이 평균도 한 번 더 버블 후 최저치를 경신했다. 일본 언론들은 이때의 주가 폭락을 「소니 쇼크」라고 부른다.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4월24일의 전년도 실적발표였다. 이날 소니는 작년 한해(2002년4월~2003년 3월)동안 당기순이익이 1155억 엔으로 전년도의 7.5배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한국 돈으로 1조원이 넘는 이익을 올렸고, 전년도와 비교해 봐도 엄청난 실적 향상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소니는 불과 1월에만 해도 2002년도 영업이익이 2800억 엔 정도 될 것으로 예측했었고, 대부분의 애널리스트들은 2500억 엔 정도를 예측했었다. 문제는 1~3월에 일어났다. 전기부분 판매가 별안간 가라앉으며 3개월 동안에만 1650억 엔의 적자를 봤다. 덤으로 소니는 내년에는 더욱 실적이 악화돼 순이익 규모가 500억 엔 정도로 줄어들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폭락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실적 발표의 내용이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올해의 실적에서 「소니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읽을 수 있었다고 얘기했다.
 
 
 
 휴대폰 실패, 게임기만 제 몫을 하고 있어
 
   1997년까지만 해도 소니는 텔레비전과 비디오가 주력이었다. 1998년 이후의 소니는 게임기와 컴퓨터를 주로 생산하는 디지털 기업이다. 그리고 덤으로 영화·음반·금융 등에 발을 걸쳐 놓고 있다. 매출액을 놓고 보면 전자분야가 60% 정도, 게임기 분야가 12% 정도다. 전자분야는 家電 개념의 컴퓨터 「바이오」, 게임분야는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 2」가 매출의 주종이다.
 
  전자-게임의 두 기둥은 소니가 다른 일본의 전자기업들이 적자를 보는 동안에도 꾸준히 흑자를 보는 원동력이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을 새 기종 「플레이스테이션 2」로 바꾸는 바람에 게임 분야에서 511억 엔의 영업 적자가 났던 2000년에는 전자부분이 「바이오」의 대히트로 2471억 엔의 영업 흑자를 보며 소니를 받쳤다. 전자부문이 구조 조정비용으로 82억 엔의 적자를 봤던 2001년에는 반대로 「플레이스테이션 2」가 시장을 압도하며 829억 엔의 영업흑자를 봤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구도가 소니가 애초부터 원했던 구도가 아닐 뿐 아니라, 소니가 「본업」이라고 생각해 왔던 일반 家電부분에서 예전과 같은 카리스마를 잃었다는 점이었다. 소니는 2000년 3월, 「네 가지의 게이트웨이 전략」을 발표했다. 고속 인터넷과 가정을 연결하는 존재로서 디지털 TV, 컴퓨터 「바이오」, 휴대전화, 「플레이스테이션 2」 등 네 가지 제품을 갈고 닦아, 각각 성장 궤도에 올려놓는다는 계획이었다.
 
  당시의 소니는 일본에서는 선구적으로 고속인터넷 사회에 대응하는 꿈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었다. 3년이 지나도록 디지털 TV와 컴퓨터 바이오는 다소의 개량에 끝났을 뿐 획기적인 제품을 내놓지 못했고, 휴대전화는 독자생존도 하지 못한 채 에릭슨과 합병했다.
 
  결국 제몫을 해낸 것은 게임기 「플레이 스테이션 2」 하나뿐이었다. 全세계적인 IT버블이 꺼진 탓도 있지만 예전의 소니라면, 역시 IT에서도 탁월한 신제품을 만들어내며 IT붐 자체를 지속시킬 힘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소니의 본업인 家電면에서의 부진이 심각하다고 일본 언론들은 지적한다. 일본의 소매점에서는 『텔레비전 「베가」 이후에 소니의 상품에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한때 소니의 주력상품이었던 캠코더의 경우 올 1월에 마쓰시타가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시장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캠코더를 포함한 비디오 사업은 소니의 전자부분에서 유일하게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이 10% 이상인 「캐시 카우」였던 만큼, 다른 업체들의 점유율 확대는 신경쓰이는 부분이다.
 
  PDP(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 등 최근 일본에서 대유행하는 얇은 모니터 TV의 경우도 소니는 대단히 뒤떨어져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소니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삼성전자와 액정사업에서 손을 잡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일본업체들 사이에서는 나돌고 있을 정도다.
 
  현재 돈을 벌고 있는 「플레이스테이션2」와 「바이오」 역시 언제까지 기댈 수는 없는 일이다. 실제로 「바이오」의 경우 올초부터 급속히 판매가 줄어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상황일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컴퓨터 분야는 소니가 세계를 컨트롤할 수 없는 분야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의 동향에 따라 수요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초창기 「모르모트」란 별명을 얻었듯이, 소니는 지금까지 소비자의 상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개념의 제품을 발매하면서 언제나 세계 시장을 리드해 왔었다. 소니는 최첨단의 「이노베이터(혁신자)」였다. 그런 소니에게 새로운 혁신이 없다면, 그 장래도 이제는 불투명하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家電 분야, 超高價 제품으로 再起 선언
 
  닛케이 비즈니스는 소니 내부의 분위기도 다소 문제가 생겼다고 지적한다. 소니는 기술로서 커온 기업인데, 언제부터인가 「문과생」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 지나치게 효율을 생각하다 보니 장인정신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닛케이 비즈니스는 소니 임원을 인용해 『아직까지도 소니에는 1mm의 차이에 집착하는 기술자 근성을 가진 사무라이가 있다. 그러나 평균점에 만족하는 엔지니어가 늘어간다면, 수년 후에는 (그런 사무라이는) 천연기념물이 되고 만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소니 임원은 『새로운 제품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러다가는 (창업자) 이부카의 유전자가 소니에서 사라지고 만다』며 탄식했다. 오가 前 회장은 벌써 수년 전에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現 이데이 노부유키(出井伸之) 회장에게 『소니의 경영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히트상품을 만들어왔다. 모리타 前 회장은 워크맨을, 나는 CD와 MD를, 이데이군은 도대체 뭐가 있나』고 일갈했다.
 
  현재 소니는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이다. 소니는 5월 이후 한 달간 매주 한 가지씩은 신제품이나 투자관련 발표를 이어갔다. 5월 셋째주에는 「PSP」라는 이름의 휴대용 게임기를 발표했다. 넷째주에는 반도체 분야에 3년간 5000억 엔을 투입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다섯째주에는 다기능 게임단말 PSX를 발표했다.
 
  6월 첫째주에는 디지털 카메라 신제품을 발표했다. 그週의 「신제품」은 그다지 주목도가 낮았지만, 대신 오가 노리오 前 회장에게 16억 엔의 퇴직금을 지급한다는 사실이 매스컴을 장식했다.
 
  6월 둘째주에는 38만 엔짜리 립스틱 크기 디지털 카메라 등 初高價 브랜드 「퀄리아(QUALIA-일본 발음으로 쿠오리아)」 상품전략을 발표했다. 하나하나가 모두 향후 몇 년간 소니의 행보를 바꿀 수 있는 전략적인 발표들이다.
 
 
 
 게임기 부분이 먹여 살려
 
   일단 「본업」인 家電부분에서 발표한 「퀄리아」라는 이름의 初高價 브랜드의 경우 38만 엔짜리 디지털카메라, 70만 엔짜리 CD플레이어(스피커는 80만엔), 240만 엔짜리 홈 시어터용 高화질 프로젝터, 130만 엔짜리 高화질 브라운관 TV 등이 그 내용이다. 이 상품들은 모두 지금까지의 同種 상품 중 최고가이다. 안 그래도 물가가 떨어지는 일본에서 오히려 비싼 상품을 내놓은 이유는 역시 「이노베이터」의 이미지를 되찾고자 하는 시도로 평가되고 있다. 매출 자체보다는 소니의 「고급」, 「최첨단」 이미지를 심으려는 전략이라는 것으로, 『다소 오래된 기업의 이미지로 변하고 있다』는 데 대한 공격적인 해답인 셈이다. 소니 측은 『디플레이션과 일선을 긋고 기술을 어필하겠다』고 밝혔다.
 
  퀄리아는 모리타 회장의 워크맨, 오가 회장의 CD에 화답하는 現 이데이 회장의 야심작이기도 하다.
 
  소니가 퀄리아를 발표하자 그때서야 일본 언론 역시 『소니의 살 길은 기술이다』고 맞장구를 쳤다. 네 가지 상품말고도 앞으로도 많은 초고급 「퀄리아」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퀄리아」가 기존제품의 성능을 높인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全세계를 상대로 대량 생산하는 제품으로 소니의 돌파구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의 목소리는 남았다.
 
  다기능 게임단말 PSX의 발표 역시 중요한 사건이다. 소니의 게임기 사업 매출은 그룹 전체의 12% 정도이지만 수익성 면에서는 소니의 기둥이다.
 
 
 
 「홈 네트워크」에 자신감
 
  그동안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 2」 이후의 게임기는 「플레이스테이션」과는 다른 뭔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일본 업체들은 그동안 컴퓨터를 중심으로 하는 「업무 네트워크」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TV를 중심으로 하는 「가정 네트워크」라는 개념을 주창해 왔는데, 사무실은 MS가 장악할지 몰라도 가정은 일본이 장악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오디오, 비디오, 게임, 간단한 홈 오토메이션, 인터넷 등 가정의 엔터테인먼트는 모두 TV를 중심으로, 게임기와 같이 간단한 조작기구를 통해 즐길 수 있도록 통합되리라는 큰 그림이다. 소니의 핵심 인사들은 오랫동안 이런 홈 네트워크의 중심이 「게임기」일 것이라고 했는데, 이번에 발표한 PSX가 바로 그 주장을 현실화시킨, 그야말로 「야심작」이다.
 
  소니는 이 게임기에 집어넣을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반도체 투자를 더욱 늘리기로 했다.
 
  소니는 이 PSX에 TV 튜너를 달았고, 이를 바로 DVD에 녹화할 수 있는 기능을 넣었다. 120기가 바이트의 하드디스크도 달아 여기에 직접 녹화할 수도 있다. 인터넷 온라인기능도 넣어 온라인 對戰게임을 할 수 있도록 했다. TV·DVD 레코더·DVD 플레이어·컴퓨터·게임기를 하나로 묶어 놓은 상품이다. 특히 TV 영상을 그대로 DVD에 녹화할 수 있는 DVD 레코더의 경우 그동안 소니가 경쟁사보다 뒤쳐졌다고 하던 부분이다.
 
  현재 DVD 레코더는 10만 엔이 넘는 고가품인데, 만약 소니가 PSX를 低가격으로 책정한다면 이 시장이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소니는 지난번 「플레이스테이션2」 개발 때도 당시까지 고가품이던 DVD 플레이어 기능을 넣어 단숨에 시장을 뒤흔들었던 전력이 있다. PSX의 발표는 『플레이스테이션 2·바이오 쌍두마차 체제 이후의 비전이 없다』, 『DVD 레코더 등 분야에서 경쟁사에 뒤떨어졌다』는 비판에 대한 답변임과 동시에 일본이 주장해 온 「홈네트워크」의 실현에 다가가는 「사방을 노린 한 수」라는 평가다.
 
  물론 소니가 완전히 예전의 모습을 찾고 화려한 재기를 이룰 수 있을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화려한 1980년대를 기억하는 일본인들은 다시 소니의 「메카(기계) 魂」과 「제조업 일본」에 다시 기대를 걸고 있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