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久는 「千의 얼굴」을 가진 배우다. 브라운관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 같은 老役으로 고정된 이미지를 가진 그도 연극 무대에 서기만 하면 활화산처럼 무대를 휘저으며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천재화가 장승업(「사로잡힌 영혼」)이나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에쿠우스」)가 그랬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는 破格을 즐긴다. 드라마와 연극 무대를 뛰어넘어 영화와 코미디물, 심지어 CF까지 넘나들 만큼 유연하다. 그는 작년 모 패스트푸트 광고에 출연, 『니들이 게맛을 알아!』라는 광고 멘트로 시청자들로부터 「신구 오빠」로 불리기 시작했다
申 久
1936년 서울 출생. 경기中高ㆍ성균관大 국문학과 중퇴,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 1기. 1962년 연극 「소」로 데뷔. 1972년 KBS 드라마 「허생전」으로 탤런트 데뷔. 연극 「민중의 적」ㆍ「파우스트」·「느낌, 극락 같은」, 가극 「눈물의 여왕」, 뮤지컬 「태풍」 등 출연. 現 극단 동랑레퍼터리 단원, 제3ㆍ6ㆍ8회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 제12ㆍ16ㆍ17회 한국 연극ㆍ영화ㆍTV예술상 TV부문 연기상. 제35회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연기상(연극부문).
申 久
1936년 서울 출생. 경기中高ㆍ성균관大 국문학과 중퇴,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 1기. 1962년 연극 「소」로 데뷔. 1972년 KBS 드라마 「허생전」으로 탤런트 데뷔. 연극 「민중의 적」ㆍ「파우스트」·「느낌, 극락 같은」, 가극 「눈물의 여왕」, 뮤지컬 「태풍」 등 출연. 現 극단 동랑레퍼터리 단원, 제3ㆍ6ㆍ8회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 제12ㆍ16ㆍ17회 한국 연극ㆍ영화ㆍTV예술상 TV부문 연기상. 제35회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연기상(연극부문).
그는 「千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배우다. 천재화가 장승업(「사로잡힌 영혼」 1991년)이나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에쿠우스」 1990년)가 그랬다. 브라운관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 같은 老役(노역)으로 고정된 이미지와는 딴판이다.
1997년 11월 「문화 게릴라」 李潤澤(이윤택)이 연출한 「파우스트」에서는 귀여운 악마 메피스토였다. 파우스트 박사로 나선 국립극단 원로배우 張民虎(장민호ㆍ76)와 함께 무대를 휘저으며 파격적인 「파우스트」를 창출했다. 1998년 3월 가극 「눈물의 여왕」에서는 남부군 사령관 李鉉相(이현상)이었다. 5분 남짓 출연한 그는 굉음처럼 우렁찬 대사로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1998년 5월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 올려진 李康白(이강백) 作 「느낌, 극락 같은」에서 佛像(불상) 제작자 함묘진으로 나섰다. 몰락한 예술가 함묘진은, 완벽한 불상을 추구하지만 부처 마음을 담지 못해 방황한다. 지팡이 짚고 휠체어 타는 몸으로 얼굴에 금물을 칠갑하는 狂人(광인) 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는 破格(파격)을 즐긴다. 드라마와 연극 무대를 뛰어넘어 영화와 코미디물, 심지어 CF까지 넘나들 만큼 유연하다. 드라마센터에서 연출가 柳德馨(유덕형ㆍ65), 吳泰錫(오태석ㆍ62)과 작업했고, 「불가불가」에선 蔡允一(채윤일ㆍ56), 「에쿠우스」에선 金亞羅(김아라ㆍ46)와 일했다. 그는 작년 모 패스트푸드 광고에 출연, 『니들이 게맛을 알아!』 한마디로 손주뻘 되는 시청자들로부터 「신구 오빠」로 불리기 시작했다.
KBS 전속 탤런트는 아니지만 그가 출연하는 드라마는 KBS에 몰려 있다. KBS 2TV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에서 가정법원 조정 판사 役으로 출연, 破鏡(파경) 직전의 부부들을 상대로 「인생 상담」 중이다.
申久씨를 지난 6월25일 여의도 KBS 국제방송센터(IBC) 로비에서 만났다. KBS 2TV 「부부 클리닉―사랑과 전쟁」 촬영을 위해 막 방송국에 도착한 그는 감색 티셔츠 차림이었다. 기자를 보자 『얘깃거리도 없는 사람을 뭣 하러 찾아오냐』며 씩 웃었다. 그의 말은 문장으로 치면 短文(단문)이다. 이틀 전 기자가 전화를 했을 때도 그랬다. 어림잡아 연기 생활이 30년은 넘을 것 같다고 하자 『물론!』이라고 딱 두 음절만을 사용했다. 군말을 안 하는 언어습관 때문이다. 드라마에서조차도 그의 간결한 말투가 그대로 드러난다. 『대본은 작가가 쓴 것이니까 내 언어습관과는 별개』라면서도 『써 놓은 대사를 소화하는 과정에서 내 언어습관이 조금은 나타난다』고 했다.
그는 『妻(처)도 나 못지않게 무덤덤하고, 아들 경현(29·회사원)이도 말이 없어 세 사람이 함께 있으면 집이 절간 같다』고 했다.
그래선지 그는 연기에서도 「애드 리브(ad libㆍ각본에 없는 대사를 즉흥적으로 말하는 일-필자 注)」를 배격한다. 그는 애드 리브를 「군소리」라고 했다.
『군소리에 익숙한 연기자들이 있어요. 군소리를 하는 배우는 훈련이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저기」, 「어쩌구」 하며 군소리를 넣어 호흡조절도 하고, 상황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은 드라마의 완성도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않아요. 드라마는 연출자와 작가의 의도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배우는 작가가 쓴 대본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는 시트콤(sitcomㆍ「시추에이션 코미디」의 줄임말로 무대와 등장인물은 같지만 매회 다른 이야기를 다루는 방송 코미디-필자 注)에서 순발력을 위해 애드 리브가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정통 드라마에서는 혼란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의 본명은 申淳基(신순기). 1936년 8월 서울 왕십리에서 申昌福(신창복) 鄭愛(정애)씨의 5남매 중 셋째(외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동명국교를 졸업하고 경기中을 거쳐 경기高에 진학한다. 1956년, 경기高(52회)를 졸업하면서 서울大 상대에 응시했으나 낙방의 쓴잔을 마시고 성균관大 국문학과에 진학한다. 이듬해 서울大 상대에 再도전했다가 또다시 실패한 그는 軍 입대를 택했다. 1957년 가을은 그의 말대로 세상이 온통 회색으로 보였던 시절이었다.
논산훈련소에서 기본교육을 받고 光州에 있는 포병학교에서 훈련을 마친 그는 강원도 양구에 있는 ○군단 직할 105mm 박격포 대대에 배치를 받았다.
『가뜩이나 數理(수리)에 약한 놈이 숫자를 계산하는 보직을 받을 게 뭡니까. 큰 지도를 펴놓고 자(尺)로 거리를 측정해서 탄약병에게 裝藥(장약) 숫자를 일러 주는 일이었어요. 다행히 고참병들에게 매는 안 맞았습니다(웃음)』
제대한 그는 복학을 포기한다. 「국어 선생」 대신 뭔가 나를 표현할 적합한 일이 없을까를 찾는 데 골몰했다. 그는 서울 충무로 태극당 뒤에 있는 모 연극학원을 기웃거렸다. 연극배우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서였다. 강의도 듣고, 먼저 방송국에 진출한 아나운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그의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의 아나운서는 원고만 앵무새처럼 읽는 메신저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진로를 고민하던 1962년 봄, 東郞(동랑) 柳致眞(유치진ㆍ1905~1974) 선생이 주관하는 드라마센터(서울예대 前身)에서 연기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東郞이 극작 연출, 배우를 양성하는 1년 과정인 「연극아카데미」를 만들고 1기생을 선발한 것이었다. 「모집 인원 60명. 학력이나 나이 不問. 드라마센터의 커리큘럼을 완벽하게 이수한 자만이 졸업 가능」이라는 광고였다. 이 까다로운 조건이 그를 사로잡았다. 이 과정만 마치면 연기자로서 「프로」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드라마센터는 1962년 3월, 柳致眞 선생이 서울시 중구 예장동에 美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아 470석 규모의 소극장을 설립한 것이다. 드라마센터 건물은 건축가 金重業(김중업)이 설계한 당시의 名物이었다. 드라마센터는 부설극단과 소극장의 역할을 수행하다 1974년 柳致眞 선생 사망 이후 「동랑 레퍼토리 극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초대 이사장에 취임한 柳致眞 선생은 1962년 4월 개관기념작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李海浪 연출)을 50일간 상연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62년 그는 60명의 동기생과 함께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 1기생으로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全茂松(전무송), 李豪宰(이호재), 閔智煥(민지환), 반효정씨 등이 그의 동기다. 그의 藝名(예명) 「申久」도 당시 드라마센터 소장인 柳致眞 선생으로부터 받았다.
『하루는 제가 「선생님께서 지어 주신 예명을 가지고 一生을 지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어느날 갑자기 사무실로 부르시더니 흰 종이를 하나 내미세요. 「申久」라고 만년필로 쓰셨는데, 어려워서 의미도 제대로 여쭙지 못하고 물러나왔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배우가 되라는 뜻 같기는 한데…』
그는 1974년 초여름, 디자인을 전공한 河正淑(하정숙ㆍ64)씨와 6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한다. 연극에 미쳐 있을 때, 연극 후배가 소개를 해준 것이었다고 한다. 두사람은 서울 중구 퇴계로에 있는 세종호텔에서 원로 연극인인 李海浪(이해랑ㆍ1916~1989) 선생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가 처음 데뷔한 연극 작품은 1962년 드라마센터 무대에서 상연된 柳致眞 선생의 작품 「소」였다. 「소」는 「토막」, 「버드나무 선 동리 풍경」 등과 함께 柳선생의 농촌극 3부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소」는 일본인들의 수탈 과정에서 소를 빼앗기고 저항하는 가난한 소작농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첫 작품 「소」에서 申久는 아버지 역할로 무대에 섰다. 이후 그에게는 할아버지, 아버지 역이 단골 역할이 됐다. 그는 車凡錫(차범석) 선생의 「山河」에서도 객원으로 출연, 파파 할아버지 역할을 했다.
『얼굴 때문에 평생 아버지, 할아버지 역할이에요.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아 근사하게 사랑하고 죽고, 키스하는 연기를 한 번도 못 해봤습니다』
그에게 연출가 李潤澤(이윤택ㆍ서울예대 교수)과의 만남은 연기 변신의 序幕(서막)이었다. 1997년 국립극장에서 상연된 「파우스트」에서 귀여운 악마 役인 메피스토 역할을 맡았던 것. 드라마센터 출신인 李潤澤은 당시 「길 떠나는 가족」, 「문제적 인간 연산」 등의 작품으로 新聞紙上에 한창 이름이 오르내릴 때였다.
1999년 李潤澤은 그에게 뮤지컬 「태풍」(서울예술단)에도 출연해 달라는 제의를 한다. 환갑을 넘어선 그에게 歌手가 되어 달라는 제의를 한 셈이었다. 「태풍」은 희곡 「템페스트(The Tempest)」를 李潤澤이 개작, 연출한 대형 밀레니엄 뮤지컬이다. 왕국의 충신이었던 프로스페로(신구 扮)는 음모로 추방당해 딸 미란다와 함께 무인도에서 산다. 어느 날 풍랑으로 섬에 표류한 왕자 퍼디넌트는 미란다와 사랑에 빠지고, 이들의 사랑은 프로스페로의 분노를 녹인다는 내용이다.
그는 뮤지컬 「태풍」이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어지간히 혼이 난 모양이다. 『드라마센터 후배인 李潤澤을 좋아해서 출연을 허락했다가 혼이 난 거죠. 상식적으로 뮤지컬은 聲樂(성악)을 한 사람이 댄싱과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이잖아요. 「대사를 외듯 하시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기에 멋모르고 했다가 고생했습니다』
「태풍」에서 춤추는 역할은 없어 다행이었지만, 그는 프로스페로 役으로 서너 곡을 3~4분씩 독창해야 했다. 물론, 그는 이전에도 「포기와 베스」, 「우리 여기에 있다」, 「살짜기 옵소예」 등 서너 편의 뮤지컬에 더 출연했던 적이 있었다.
지난 6월26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현대아파트를 찾았다. 1974년에 결혼한 그가 갈현동 4년, 여의도 10년 생활을 청산하고 安住(안주)한 곳이라고 한다. 그는 昨醉未醒(작취미성)이었다. 전날 KBS 2TV 「사랑과 전쟁」 녹화를 끝내고 팀들과 함께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고 한다. 「사랑과 전쟁」은 드라마 특성상 촬영의 대부분은 야외에서 하고, 스튜디오에서는 한 시간 정도 녹화한다고 했다.
―운동은 좀 하십니까.
『1970년 末부터 골프를 쳤는데 늘지를 않아요. 90타 언저리에서 왔다 갔다 할 겁니다. 李順載(이순재)씨와도 같이 치는데, 내기를 하면 제가 거의 잃어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냉면. 감기에 걸려 드러누워 있을 때에도 약 대신 냉면을 먹을 정도다. 그가 수십 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식구들을 이끌고 들르는 곳이 서울 강남 안세병원 뒤에 있는 「평양냉면」 집. 그는 無人島에 딱 하나만 가져가라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냉면을 꼽는다.
이렇듯 냉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왕십리 중앙시장에서 잡화상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평양면옥」의 냉면을 사 먹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느 날, 나는 「평양면옥」 할머니를 만났고, 할머니가 면발을 손으로 돌돌 말아서 적당한 양만큼 똑 떼어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 「덜 되거나 넘치면 맛이 덜하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어요. 아, 인생도 그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안방에서 보자기에 싼 꾸러미 하나를 내왔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사진들이 컬러와 흑백으로 뒤엉켜 있었다. 설악산 국립공원에 위치한 켄싱턴 스타 호텔에서 「스타 회원」 입회용으로 사진의 일부를 추려 갔다고 했다. 그는 지난 7월15일 이 호텔에서 주관한 행사를 위해 朴壽根(박수근) 화백이 선물한 그림, 「퇴계 이황」에 출연할 당시 입었던 의상 및 소품, 연기상 트로피 등을 기증하기도 했다. 현재 켄싱턴 호텔의 스타 회원은 그를 포함해 연극인 柳仁村(유인촌), 영화배우 安聖基(안성기)·韓石圭(한석규)·崔佛岩(최불암)·金惠子(김혜자), 소설가 朴婉緖(박완서) 등 49명이다. 켄싱턴 호텔에는 이들이 기증한 각종 기념품을 룸 내부에 전시한 38개의 스타룸이 있으며, 2000년부터 38개의 스타룸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2%를 유니세프와 소년소녀가장 돕기 등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영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보자기를 풀어 헤치자 빛바랜 사진들, 그 속에서 꿈틀대는 그의 연기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재현되는 듯했다. 『변변한 앨범 하나 없이 이렇게 산다』면서도 그는 자신의 사진을 보며 『새삼스런 것들이 많다』고 했다.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공연한 현대무용 작품 「Twice Born(重生)」, 네덜란드 공연, 동아연극제 수상,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배우 김혜숙씨와 공연한 모습, 극단 무천에서 공연한 「숨은 물」, 1970년 9월 갓 귀국한 柳德馨(유덕형·유치진 선생의 장남)씨가 연출한 해럴드 핀터의 「Birthday Party(생일파티)」….
『총체적 인간 존재의 불안감을 詩的 이미지로 형상화한 「생일파티」에서 주인공 스탠리로 출연했었어요. 참 세월이 많이 흘렀군요』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TV 데뷔는 연극 데뷔 10년 만인 1972년이었다. 국립극단에서 활동하다 KBS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TV 데뷔 이유는 「생계」 때문이었다고 한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길러야 하는데, 연극판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거든. 나 혼자라면 굶고서라도 하겠는데… 영화에서는 안 불러 줬고, 돈을 만질 수 있는 게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출연 정도였어요. 텔레비전으로 오니까 수입이 확 다르더군요』
故 金熙昌(김희창) 선생이 짓고 張民虎(장민호), 林鶴松(임학송), 孫淑(손숙), 李信載(이신재), 金振海(김진해)씨 등이 출연한 「허생전」이 첫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의 스타성을 일깨워 준 작품은 1979년의 「야간 비행」이었다. 그는 실화극장 「야간 비행」에서 간첩 「탁구」 役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른다. 오버 액션을 통해 만든 그로테스크(奇怪)와 패러디, 너털웃음은 드라마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金喜甲(김희갑), 文五長(문오장) 선생 등 나름대로 나보다 먼저 작업을 하던 분들이 많았어요. 제가 「야간 비행」에서 극중 인물을 그로테스크하게 설정하니까, 작가 金東賢(김동현)씨가 2회부터 흐름을 내쪽으로 몰아간 겁니다. 助演이 主演이 된 거지요』
그는 20여 편의 史劇(사극)에도 출연했다. 그가 맡은 역할을 보면 세종대왕, 黃喜(황희), 栗谷 李珥(이이), 高宗(고종), 端宗(단종) 役 등 다양하다. ―史劇을 보면 사극에 맞는 연기자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話法(화법)이 요즘 사람들과 다르잖아요. 마치 연극 대사를 하듯 高低 長短이 분명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시청자들도 그런 것에 익숙해져 있고… 가만 보면 발음도 정확하고 사극 대사를 호흡에 잘 맞추는 연기자들이 있습니다』
그는 드라마 「동심초」에서 영문학 교수, 「소망」에서 의사, 「새벽」에서 李承晩 대통령, 「도둑」에서 신부, 「사로잡힌 영혼」에서 천재화가 張承業, 「에쿠우스」에서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 「눈물의 여왕」에서는 남부군 사령관 李鉉相으로 출연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 냈다. 어떤 역할을 맡든 「물 흐르듯」 자연스런 연기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시청자들이 부담 없이, 거부감 없이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기를 한다』고 했다.
―수많은 역할 중 가장 인상적인 역할은 무엇인가요.
『해럴드 핀터의 「생일파티」에서 주인공 스탠리, 張民虎 선생님과 했던 「파우스트」의 메피스토입니다. 「야간 비행」에서 간첩 탁구로 출연한 것도 빠질 수 없고요』
그는 「햄릿」 役을 꼭 한번 맡고 싶다고 했다. ―왜 아직까지 햄릿 役을 못 했다고 보십니까.
『이미지가 맞지 않아서일 겁니다. 70∼80代 연기자들끼리 공연한다면 햄릿 역이 내게 올지도 모르지요(웃음)』
그는 『태어난 나라와 부모를 바꿀 수 없듯, 배역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게 연기자들의 宿命(숙명)』이라고 했다.
『내 얼굴과 성격에 맞는 역할은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싶어서 PD에게 부탁해서 그 역을 맡았다고 칩시다. 역할 이미지가 그 작품에 맞지 않는다면 그 드라마는 실패합니다』
―연기를 하다 보면 NG도 날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대사를 깜빡 할 때도 있고, 말이 씹힐 때도 있죠. NG가 나면 얼버무려 넘어가기보다 스스로 NG를 선언하고 다시 합니다』
그는 표준어인 방송언어가 시트콤 등 일부 웃음을 앞세우는 프로그램 때문에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상하게 되는 것을 우려했다.
『인터넷이나 PC통신에서 유행하는 온갖 말들이 演技(연기)에 흘러 들어와서 방송언어를 흐리고 있어요. 방송에서는 특히 표준말, 정제된 말들을 선택해 사용함으써 시청자들의 언어 品格(품격)을 先導(선도)해야 합니다』
―KBS 드라마 「새벽」에서 李承晩 대통령으로 나오셨는데,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연기하는 데 부담은 없었습니까.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 수는 없으니까 연기에 부담이 갑니다. 국민들 전체가 李대통령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를 연기하기가 까다로웠죠. 그때도 李대통령의 육성 테이프를 갖다 놓고 목소리를 만들었어요. 성우 具珉(구민)씨가 목소리 연기를 가장 잘했는데, 텔레비전은 목소리에다 인물이 근사해야 하니까 二重苦(이중고)지요』
학창시절, 그는 연극과는 무관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는 경기高 출신 문화 예술계 인사들의 모임인 「화동연우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故 李樂薰(이낙훈ㆍ50회)씨가 경기高 출신들을 규합해 화동연우회란 친목단체를 만들었다. 李樂薰씨에 이어 2代 회장이었다.
연우회 멤버로는 현재 연우회 회장인 李恒(이항ㆍ56회)씨, 학창시절부터 이제껏 연극에 심취해 온 吳英鎬(오영호ㆍ61회)씨, 「아침이슬」의 작곡가 金敏基(김민기ㆍ65회)씨,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장인 金光林(김광림·66회)씨 등이 있다. 연우회는 2000년 모교 100주년 기념행사 때 「나비의 꿈」을 예술의 전당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정치인 중에서는 경기高 동창인 李鍾贊(이종찬)씨와 가깝다.
2000년 들어 그의 극중 신분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시트콤 출연을 계기로 근엄한 아버지 역할에서 천방지축에 사리분별이 안 되는 역할로 변신했던 것이다.
『주위에서는 망가졌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동안 그런 役을 맡을 기회가 없었던 거죠. 누구에게나 가능성은 內在해 있는 겁니다』
그는 2000년 12월 SBS TV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연출 김경욱)에서 철딱서니 없는 소방서 계장(노주현 扮)의 아버지로 출연, 박정수ㆍ이홍렬씨 등과 공연한다. 申久씨는 기자에게 함께 출연했던 개그맨 李洪烈씨가 보낸 카드를 보여 주었다. <아버지를 알게 돼 작품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게 제게 얼마나 큰 기쁨이고 영광이었는지 모릅니다. 곁에서 뵈면서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모릅니다. 신구 아버지 만세!>
사진을 뒤적이다 보니 경기도 가평 양수리에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흡사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문득 작년에 모 패스트푸드 CF(광고영상)로 인기몰이를 했던 생각이 났다. 물론 그는 약품광고에 출연하는 등 CF에 명함을 내민 일이 있었다. 그러나 10代들이 출연하는, 10代들이 대상인 상품에 여러 차례 CF를 찍었던 적은 없었다.
모 패스트푸드 광고는 장중한 배경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시작된다. 조각배에 누워 있는 노인이 커다란 게를 배에 묶고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다. 잠시 후 그 옆으로 어선 한 척이 지나가고, 그 어선의 어부들이 일제히 갑판으로 몰려나와 『와!』 하며 탄성을 지른다. 그때 申久씨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니들이 게맛을 알아!』라는 카피가 튀어나온다. 이 광고 문안은 2002년 장안의 화제였던 「내가 니 시다바리가?」, 「부∼자 되세요」, 「꿈★은 이루어진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내 아를 낳아도」 등 모든 유행어를 일거에 평정하고 만다.
촬영은 2000년 여름, 제주공항에서 2∼3km 떨어진 북제주군 인근 해안에서 진행됐다고 한다. 노인 申久가 탄 조각배를 하나 띄워 놓고, 어부들이 탄 배가 스치는 신(Scene)이었다.
波高(파고)가 2∼3m나 되는 바다 한 가운데서 그는 쏟아지는 땡볕을 그대로 맞으며 갑판에 드러누웠다. 木船(목선)은 動力이 없었기 때문에 큰 선박에 줄을 매달아 끌었다고 한다. 선원들을 태운 큰 배가 지나가면 그 배 위에 설치한 카메라가 파도에 일렁거렸고, 초점이 맞지 않았다.
『감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수없이 찍었어요. 하는 수 없이 「니들이 게맛을 알아!」라는 말은 해안가에 배를 대 놓고 제 얼굴 모습을 클로즈업해서 찍었습니다』
―그 톡 쏘는 연기 때문에 촬영을 하던 스태프들이 웃다가 물에 빠졌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웃으며)그랬다고 들었어요. 아무튼 아이디어, 분장, 의상, 색조, 콘티 등이 잘 어울렸기 때문에 성공했던 CF 같습니다』
―『니들이 게맛을 알아』 하면서 지은 미소를 「살인 미소」라고 한다더군요. 요즘 「오빠」라고 부르는 팬클럽도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제가 컴퓨터를 못 하니까 어디에 팬클럽이 있는지 확인도 못 했어요. 컴퓨터가 쉬워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출연료는 얼마나 받으셨나요.
『그 회사는 신제품이 나올 적마다 작품을 찍기 때문에 출연료는 많지가 않았어요. CF 반응이 좋아 6개월 연장해서 방영했어요. 어쨌든 한목에 목돈이 생기니까 마누라가 좋아하더군요』
그는 1999년 이후, 영화에도 출연했다. 「북경반점」에서 한사장 役, 「반칙왕」에서 송강호 아버지 役,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 아버지 役, 「YMCA야구단」의 송강호 아버지 役 등 영화에서도 변함없이 아버지 役으로 등장했다.
그는 연극, 텔레비전, 영화, CF까지 섭렵한 배우다. 그가 가장 마음에 드는 연기 장르는 연극이라고 한다. TV와 달리 인간적인 재미가 쏠쏠하고, 작품을 마쳤을 때의 보람이 가장 크다는 것이다.
『연극을 하는 후배들이 지금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1970년대에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연극을 사랑하면서도 外道를 했고요. 제 출발점이 연극이어선지 연어가 母川(모천)을 찾아가듯 회귀 본능이 생겨요』
―텔레비전에서도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극배우 출신인 경우가 많습니다.
『연극배우들은 무대에서 기본 훈련이 돼 있으니까, 신인 탤런트들보다는 연기가 나아 보일 수 있죠. 무대 경험이 많은 연극 배우들도 텔레비전과 궁합이 안 맞으면 적응하지 못하고 탈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연극은 객석 가장자리까지 대사가 골고루 전달돼야 하니까 일상보다 목소리 톤도 높아지고 행동도 「과장」하지요. 영화나 텔레비전은 카메라가 인물을 클로즈업해 시청자들이 눈앞에서 보게 하는 것이니까 과장된 연기를 하면 부자연스러워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큰 제스처로 연기하는 것은 자제하라고 하죠』
―새로운 작품의 출연 제의를 받으실 때 심정은 어떻습니까. 『항상 설레요. 부여받은 인물을 어떻게 내용 있고, 색다른 인물로 형상화할까 고민합니다. 대본과 시놉시스(개요)를 받으면 작품의 색깔과 인물의 모양이 나타나잖아요. 그러면 구상을 하죠. 해당인물에 대한 모델이 있으면 모델의 건강이나 성장과정을 인물에 대입시켜 그것에 맞춰 가는 경우도 있고…. 「야간 비행」 때는 잔인하고 악해 보이는 인물을 상상해서 대입시켰습니다』
그는 『연기자란 아무리 상상을 해서 인물의 성격을 만들려고 해도 결국은 연기자 자신이 갖고 있는 人品(인품)이 표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그 배우의 내면이 어떻고,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작품에 그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演技는 人品이라고 했다.
그는 시청자들이 보는 고정 시각도 연기자들에게 이미지 변신할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고 했다. 『어떤 배우가 「분홍색」 역할을 잘하더라는 소문이 나면 PD들은 비슷한 역할만 맡깁니다. PD 입장에서는 제작 준비기간도 짧은 상황에서 전혀 해보지 않았던 역할을 맡겨 모험을 할 이유가 없는 거지요』
그에게 지금껏 출연한 작품 수를 물어보니 어림잡아 연극 40편, TV 드라마는 1년에 단막극 포함 40~50편씩 찍기 때문에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다고 한다.
―연기자들이 나이 들면 대본을 암기하는 일도 보통일이 아니겠습니다.
『물론, 전만 같지 않지요. 예전 같으면 한 시간 정도면 암기할 대사도 지금은 녹화하러 여의도에 나오면서까지 외워야 해요. 그래도 촬영에 들어가면 깜빡깜빡 합니다. 프롬프터가 있던 시절에는 지금보다는 덜 힘들었어요. 연극도 幕後(막후)에서 불러 주었는데, 관객들에게 소리가 들리니까 생동감이 줄어들지요』
―외우는 것에 스트레스는 없나요.
『암기 과정 자체는 힘들지만 연기를 하겠다고 이 길을 택한 이상 즐거움으로 해야 합니다. 기억력은 쇠퇴해 가지만 결사적으로 외워 녹화장에 갑니다』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를 다시 보는, 소위 「復棋(복기)」를 하십니까.
『전 출연했던 제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아요. 물론, 자기의 연기를 되짚어 보고 못마땅한 부분은 다른 작품을 할 때 개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겁니다. 그러나 저는 현장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왜냐하면 다음에 똑같은 역할을 맡게 될 일은 거의 없거든요. 일단 방송이 돼 전파를 타면 그건 제 몫이 아니고 시청자들의 몫입니다. 후회한들 이미 늦은 거지요. 어찌 보면 드라마와 人生은 너무나 닮았어요 』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고도화되면서 연기자들에게도 돈이 至上(지상)인 것처럼 생각되는 풍조가 생겼다고 지적했다. 평생 연기하며 살겠다고 작심했다면, 돈 모으는 데 급급할 필요는 없다는 것.
『착실하게 연기해서 열심히 한 우물을 파고 사는데 사회가 나 몰라라 하겠어요? 사업하는 사람처럼 돈을 벌려고 하면 연기하지 말고 사업해야지요. 나는 연기를 하면서 다른 업종, 흔히들 하는 兼業(겸업)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사업에 성공한 연기자들이 연기에서 頭角을 나타내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해요. 이것이 제 41년 한 우물 연기 인생의 경험치입니다』
申久씨는 요즘 제2의 연기인생을 사는 것 같다고 했다. CF 촬영 전까지는 길거리에서 만나도 사람들이 근엄하고 유머가 없다며 어려워했으나 시트콤, CF 출연 이후부터는 격의 없이 말을 붙이려 한다는 것이다.
『저를 좋아하는 연령층도 다양해지고… 얼마 전 끝난 KBS 월화드라마 「아내」 촬영을 위해 강원도 홍천에 갔는데, 초중고생은 물론이고 노인네들까지 말을 붙이려고 하더군요. 전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