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에 대한 예의와 의리를 잊은 金大中·盧武鉉 정부에 치를 떠는 가족들
● 명단 확인 희망자 중 60% 이상이 가족 이름 못 찾아… 납북자 20만, 피살자 10만 추산돼
● 납북자 가족들의 6·25 민간인 희생자 재조사 요구에 통일부 당국자: 『현재로선 계획 없다』
● 명부 작성자의 증언:『대한민국 정부의 납북자 명부 작성은 휴전협상 제출용이었다』
● 밤새도록 학살현장에서 들려온 비명소리(피살자 아들 白承平씨 증언)
● 동두천 萬馥寺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피살자 6610명을 위한 천도제를 지내고 있다
●『유해라도 송환해 주었으면』(아버지가 납북된 金在寬씨)
●『우리 아버지는 몽둥이에 맞아 죽었습니다』(姜埈씨)
●『그럼 살아 있다는 거예요?』(82세의 임대임씨:피살된 것으로 알았던 남편의 이름이 납북자 명부에서 발견되자)
●『정부는 6·25 납북자·피살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해야』(민주당 宋榮珍 의원)
金 成 東 月刊朝鮮 기자〈ksdhan@chosun.com〉
李 相 欣 月刊朝鮮 기자〈hanal@chosun.com〉
● 명단 확인 희망자 중 60% 이상이 가족 이름 못 찾아… 납북자 20만, 피살자 10만 추산돼
● 납북자 가족들의 6·25 민간인 희생자 재조사 요구에 통일부 당국자: 『현재로선 계획 없다』
● 명부 작성자의 증언:『대한민국 정부의 납북자 명부 작성은 휴전협상 제출용이었다』
● 밤새도록 학살현장에서 들려온 비명소리(피살자 아들 白承平씨 증언)
● 동두천 萬馥寺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피살자 6610명을 위한 천도제를 지내고 있다
●『유해라도 송환해 주었으면』(아버지가 납북된 金在寬씨)
●『우리 아버지는 몽둥이에 맞아 죽었습니다』(姜埈씨)
●『그럼 살아 있다는 거예요?』(82세의 임대임씨:피살된 것으로 알았던 남편의 이름이 납북자 명부에서 발견되자)
●『정부는 6·25 납북자·피살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해야』(민주당 宋榮珍 의원)
金 成 東 月刊朝鮮 기자〈ksdhan@chosun.com〉
李 相 欣 月刊朝鮮 기자〈hanal@chosun.com〉
끊이지 않는 발길… 그들은 잊지 않았다
「6·25 사변 납북자 82959명 명부」, 「6·25 사변 피살자 59994명 명부」 발간 소식이 朝鮮日報 사회면에 보도된 지난 7월15일. 2003년 8월호 마감 막바지였던 그날 月刊朝鮮에는 6·25 납북자·피살자 가족들의 전화가 폭주했다. 15일 하루에만 800여 통에 달하는 문의전화가 걸려와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명부에 등재된 납북·피살자는 14만2953명. 대한민국은 50여 년 전에 그들의 이름을 잊었을지 모르지만 가족들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 名簿(명부)는 1952년에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것으로 月刊朝鮮과 6·25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金聖浩·김성호·74)가 지난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찾아낸 것이다. 金大中 정부는 명부가 발견되기 전까지 명부의 존재를 부정했다. 명부에는 납북자(피살자)의 성명, 성별, 연령, 직업, 납북(피살) 연월일·장소, 본적, 주소 등 8개 항목이 기록돼 있다. 명부 발견 후 月刊朝鮮이 方一榮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1년여에 걸친 작업 끝에 납북자·피살자 명부를 발간함으로써 먼지 속에 묻혀 있던 6·25 전쟁 당시 좌익과 인민군에게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납북·피살자 가족들에게 일일이 전화로 찾고 있는 가족의 이름이 명부에 있는지 없는지를 알려 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月刊朝鮮은 7월15일 오후부터 납북·피살자 가족들이 직접 찾아와서 명부를 확인하도록 했다. 첫날은 명부를 출판한 月刊朝鮮 기획출판부를 명부 확인장소로 제공했지만 이튿날부터는 月刊朝鮮 회의실을 제공했다. 예상보다 많은 가족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7월15일부터 8월2일까지 19일 동안 매일 40∼50여 명의 납북·피살자 가족들이 月刊朝鮮을 방문했다. 그 가운데는 자신의 이름 밝히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6·25가 안겨 준 상흔이 깊고도 깊어 보였다.
아버지의 이름을 확인하고 우는 딸, 남편의 이름을 확인하고 하염없이 서럽게 울던 아내, 형님의 이름을 확인하고 말없이 흐느끼기만 했던 노인… 그 많은 사연들을 납북·피살자 가족들은 月刊朝鮮 회의실에 쏟아 놓고 갔다. 月刊朝鮮 회의실은 한풀이의 場(장)이었고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는 場이기도 했다. 일부 가족들은 납북·피살자 명부 발견·발간 이후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金大中·盧武鉉 정부에 대해 치를 떨기도 했다. 그들은 『정부가 계속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와 의리를 잊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기자는 6·25 전쟁이 50여 년 전 벌어졌던 일이 아니라 2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납북·피살자 가족들 가슴속에서는 현재진행형임을 목도할 수 있었다. 6·25를 「부모님들의 전쟁」으로 여기며 살아온 세대인 기자는 19일 동안 목도한 「죽음의 기록」이자 「야만의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그것은 2003년 7월에서 8월까지 벌어진 또 하나의 6·25 전쟁이었다.
[7월15일:『우리 아버지는 몽둥이에 맞아죽었습니다』]

납북·피살자 가족들 가운데 명부 확인을 위해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사는 姜埈(강준·71)씨다. 그는 납북자 명부에서 내무부 치안국 수사지도과장으로 재직했던 아버지(姜炳鈺·강병옥)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아버지가 6·25 때 인민군에 납치돼 소설가 春園 李光洙(춘원 이광수)와 평양 형무소에 함께 갇혀 있었다는 소식까지 들었다는 그는 『지금도 남들이 노부모를 모시고 다니는 걸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난다』면서, 『아버지의 함자만이라도 명부에서 확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명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하소연하듯 말했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지도 않겠지만 살아 계신다고 해도 100세예요. 제사는 진작부터 모시고 있어요. 어머니 기일에도 모시고 아버지 생신에도 모시고,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르니까. 북한이 아버지 돌아가신 날짜만이라도 가르쳐 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姜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서울 옥인동에 사는 주부 姜銀喜(강은희·44·여)씨가 급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姜씨는 아침에 月刊朝鮮으로 전화를 걸었던 시아버지 대신 찾아왔다고 했다. 姜씨는 6·25 전쟁 당시 예산군청 내무과장이었던 시할아버지(張國鉉·장국현)의 이름을 피살자 명부에서 발견하자 마치 시할아버지가 살아온 것처럼 기뻐하며 시댁으로 「찾았다」는 전화를 걸었다.
羅汪植(나왕식·67)씨는 부친(羅大根·나대근)이 피살당한 경우다. 당시 羅씨의 부친은 우익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 간부로 활동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6·25 때 北의 괴뢰군에 의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전쟁 당시 우리 가족은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에 살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터진 직후였던 1950년 7월경 경기도 화성을 점령했던 괴뢰군은 우리 동네 마을 사람들 중에 李承晩 대통령을 지지한 사람들을 색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괴뢰군은 아버지의 경력을 알고 곧바로 잡아갔습니다. 괴뢰군은 아버지를 포함해 일부 마을 사람들을 「반동분자」로 분류한 후 동네 인근에 있는 지하 방공호에 모조리 잡아다 처넣었습니다. 괴뢰군은 이 「반동분자」들을 한 명씩 불러내어 고문과 구타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아버지도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습니다』
羅씨의 아버지가 「몽둥이에 맞아 죽은」 날은 1950년 7월12일이었다. 가족들은 인민군들이 羅씨 아버지의 시신을 그대로 내버리는 바람에 한동안 시신도 찾지 못했다. 부친의 시신을 찾게 된 것은 할머니의 꿈 덕분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타살된 지 4일 뒤쯤 같이 살고 있었던 할머니가 이상한 꿈을 꿨습니다. 할머니는 꿈속에서 白髮(백발)을 한 할머니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 백발의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에게 다른 말은 일체하지 않고 「나를 따라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따라갔더니 동네 뒷산이었답니다. 꿈에서 깬 할머니는 우리 가족들과 곧장 뒷산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 이상한 곳을 발견했습니다. 그 지점에서는 썩는 냄새가 심하게 났습니다. 골이 썩고, 혀가 이마까지 빠져 나온 아버지의 머리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현장이었습니다』
피살자 명부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찾은 羅씨는 울분을 삭이지 못하며 이렇게 말했다.
『요즘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는다고 다들 난리인데, 진정 국가를 위해 일하다 인민군에 의해 맞아 죽은 「아버지」는 과연 누구한테 보상을 받아야 합니까』
[7월18일:아홉 살 나이에 집단학살의 현장을 목격하다]
다음날인 16일에도, 제헌절로 공휴일인 17일에도 명부를 찾는 납북·피살자 가족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月刊朝鮮 직원들과 6·25납북인사가족협의회 사람들은 그들의 넋두리와 하소연을 끊임없이 들어주어야 했다. 듣는 입장에서는 대동소이한 이야기들일 수도 있지만 6·25 때 가족들이 직접 참상을 당한 납북·피살자 가족들 개개인들로서는 「뼈에 사무친」 이야기들이었다.
납북·피살자 가족들의 명부 확인작업 4일째인 18일, 月刊朝鮮을 방문한 白承平(백승평·62)씨는 긴 시간 동안 기자를 놓아 주지 않았다.
서울 종로구에 살고 있는 白씨는 1950년 9·28 서울 수복 직전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아버지 白泰鉉(백태현)씨를 잃었다. 부친 白씨는 고향인 충남 당진군 송악면에서 우익단체 대동청년단과 당진군 연합소방대 부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白承平씨는 피살자 명부에서 부친의 성명을 확인한 뒤 『참담한 심정이다. 할 얘기가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는 심한 치질에 걸려 피란을 가기 어려운 상태였어요. 인민군이 고향을 점령한 다음 세 번이나 보안서로 연행되었지만, 그들도 아버지가 도주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석방하곤 했어요. 아버지가 피란 갈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불편한 몸을 끌고 집에서 7km 정도 떨어진 큰댁에 숨기도 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인민군들이 들이닥치더랍니다. 피살당하시던 날 밤에도 아버지는 인민군에 의해 연행됐다가 풀려나왔어요』
白씨는 『아직도 「마지막으로 석방됐을 때 아버지가 도망가셨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부친 白泰鉉씨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시장하다며 저녁 식사를 달라고 했다. 白承平씨의 어머니는 한밤중에 남편을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白씨를 비롯한 형제들은 잠에 빠진 뒤였다. 밥상이 차려지기도 전에 인민군들이 다시 몰려왔다.
『인민군들은 아버지를 끌고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동네의 우익인사들 집은 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연행했어요. 20여 명이나 되는 우익인사들이 붉은색 노끈에 한데 묶인 채로 끌려갔습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마을을 벗어나던 일행이 白씨의 집 앞을 지날 때 아버지 白泰鉉씨는 앞으로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생기침을 두세 번 했다고 한다. 남편의 기침 소리인 것을 알아차린 白씨의 어머니가 문을 열고 보니 남편과 동네 사람들이 묶인 채 전후좌우로 인민군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녀는 집을 나와 무작정 그들의 뒤를 따랐다.
『동구 밖을 벗어나서 한참 동안 가더랍니다. 마을에서 2.5km 정도 떨어진 곳에 야산이 있는데, 인민군들은 아버지 일행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면서 어머니를 보고 더 쫓아오지 말라고 위협했답니다. 어머니는 한동안 실랑이를 하다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어머니는 그것이 남편과의 마지막일 줄은 모르고 있었답니다. 밤을 새운 채 새벽이 지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생존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어요』
밤새도록 학살현장에서 들려온 비명소리
동이 터 오기 전, 白承平씨의 모친은 큰아들과 白씨, 사촌형과 함께 아버지를 찾으러 길을 나섰다. 당시 9세였던 白씨는 왠지 겁이 나서 가지 않겠다고 하다가 어머니 손에 붙들려 함께 걸었다.
『어머니는 밤중에 갔던 길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가니 야산 밑에 집 한 채가 보였는데 웬 노파가 살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그 할머니에게 어젯밤 사람들이 끌려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분이 「밤새 저 산 계곡에서 비명소리가 말도 못하게 울렸다」고 해요. 총소리도 두세 번 났다고 하고. 우리는 노파가 가리키는 계곡으로 들어갔어요』
붉은 노끈에 한 줄로 묶인 10여 구의 시체가 커다란 구덩이에 층층이 파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핏자국과 벗겨진 옷, 신발, 찢겨진 살점 등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선혈로 물든 돌덩이와 연장도 널려 있었다.
『얼마나 심하게 반항했는지 신발을 신고 죽은 사람이 없었어요. 포승도 풀지 않은 채 대부분이 맞아 죽었고 총살당한 사람은 몇 명 안 된 것 같았어요. 힘이 세고 반항을 심하게 한 사람을 먼저 쳐 죽인 모양인데, 시신을 일렬로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 위에 포개듯이 파묻었더군요』
동네에서 힘깨나 쓴다는 한 우익인사의 시신은 구덩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정황으로 보아 노끈을 풀고 도망치려 한 듯했다. 그가 도망치자 여러 명이 달려들어 그를 죽인 후 시체를 바위로 눌러 놓았더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시신은 맨 위에 있었습니다. 병이 심해 반항을 할 힘도 없어서 맨 마지막에 변을 당하셨을 겁니다. 부역자로 나가지 않으려고, 술도 잘 못하던 양반이 독한 술을 빚어 드셨어요. 치질이 더 심해져야 환자로 인정받으니까요』
白泰鉉씨는 옆구리와 팔 등에 심한 刺傷(자상)을 입고 숨져 있었다. 당시 나이 42세. 퉁퉁 부은 상처 부위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시신을 구덩이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모시고 가 모래흙을 덮어 가매장했다. 연장도 없어 손으로 땅을 파야 했다.
가족들은 산을 내려온 뒤 이 사실을 비밀리에 동네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 때문에 다른 인사의 가족들도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白씨는 『그들도 무서웠겠지만 목숨을 걸었다』고 했다.
『며칠 뒤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때도 우리에게 들으라는 듯 인민군들의 「따콩총」 소리가 났어요. 위축돼서 묘소도 깊이 팔 수 없었어요. 인민군들이 갑자기 몰려올까 봐 불안했습니다』
56명이 공동묘지에서 학살돼
白씨는 『이날 죽은 20여 명은 대부분 우익인사들』이라며 『경찰관 및 공무원은 당진 공동묘지에서 총살됐다』고 말했다. 白씨의 말을 증명하듯 피살자 명부상에는 당시 충남 당진군의 피살자 255명 중 56명이 당진 공동묘지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48년 10월에 여순 14연대 반란의 여파가 우리 고향에도 미쳤습니다. 좌익들이 송악면 지서를 습격해 불을 지르고 약탈하기도 했어요. 여순반란 사건 때 우리 마을에도 100여 명의 폭도들이 꽹과리와 농기구를 들고 우익인사의 집으로 몰려왔어요. 아버지를 비롯한 네 명이 피신했는데, 그중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한 姜(강)소령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도 함께 변을 당했는데 명부에도 나와 있군요』
아버지를 찾으러 간 그날의 아홉 살 소년은 예순이 넘은 지금도 『주검을 보기가 두렵다』고 말한다. 白씨의 어머니는 지난 해 12월 96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생활은 말도 못합니다. 「독립군 선조를 둔 가족의 가난은 대물림한다」고 하는데 우리도 마찬가지였어요. 배우지도 못하고 못 먹고…. 우리 형제가 7남매였는데 어머니 혼자 그 많은 자식들을 어떻게 키웁니까.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후 종교에 더 의지하셨어요. 당신의 자식과 손자, 손녀를 포함해서 목회자가 9명입니다』
白承平씨는 6·25 당시 인민군에게 피살당한 민간인들을 위해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부가 공산주의자, 부역자, 국군이나 유엔군에게 학살당한 양민들은 밝히려고 하면서 인민군에게 살해되거나 납북당한 우리 국민들에겐 너무 무관심합니다. 국가가 이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바랍니다』
[7월21일:공무원들은 오지 않았다]
명부 확인작업이 시작된 지 7일째다. 토요일(19일), 일요일(20일)에도 月刊朝鮮 회의실에 나와서 납북·피살자 가족들의 명부 확인작업을 돕고 있는 6·25납북인사가족협의회 사람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을 더욱 힘빠지게 한 것은 관련 부처인 통일부의 태도다. 金聖浩 이사장은 며칠 전 통일부 실무자에게 『명단에 가족의 이름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납북·피살자 가족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장에 와서 직접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요지의 전화를 했다. 들려온 그 실무자의 대답은 『그럴 필요까지 있겠는가』였다고 한다.
金이사장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을 月刊朝鮮이 했는데 공무원이라면 당연히 현장에 와 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면서 『공무원들의 이런 태도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6·25 납북·피살자 가족들을 무시하는 태도』라며 분노했다.
金이사장이 통일부 실무자에게 현장에 직접 와서 보라고 한 이유는 명단 확인과정에서 정부 차원의 6·25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명부를 확인하러 온 납북·피살자 가운데 60% 이상이 가족의 명단을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가족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납북·피살 사실이 틀림없는데도 명부에는 등재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月刊朝鮮과 6·25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그 이유를 의용군에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과 戰時下였던 당시의 행정 실수로 누락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분석했다. 유사사례가 반복됐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하면 실제 납북자는 20여만 명, 피살자는 10여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재조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통일부 담당 직원은 명부 확인 현장에 나오지 않았다. 21일 하루에만도 자신의 신분을 밝힌 납북·피살자 가족 38명 가운데 가족을 못 찾은 사람이 26명(68%)에 달했다.
기록에 빠진 납북·피살자 수가 더 많다
삼촌 정사용씨를 찾으러 온 정영희(58·경기도 안양)씨는 납북자 명부, 피살자 명부 어디에서도 삼촌의 이름을 찾지 못하자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정씨는 『할아버지(정춘호·1993년 작고)의 유언이 삼촌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만이라도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면서 『6·25 때 내 나이 다섯 살이었는데 그때 사용 삼촌이 나를 안고 다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며 울먹였다.
정씨가 기억하는 실종 당시 삼촌 사용씨의 나이는 19~20세로 정씨는 삼촌 사용씨가 이른바 의용군에 강제로 끌려갔을 것으로 짐작했다. 인민군 측에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음에도 그 명단이 납북·피살자 명부에 실리지 않은 사람들의 나이는 20세 전후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의용군에 끌려가 전사했든지 납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민군에 강제로 끌려간 후 의용군에 입대했는데도 납북자 명부에 이름이 등재돼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의용군으로 끌려간 작은아버지(이영묵)의 이름을 확인하러 月刊朝鮮을 방문한 이기완(63·여·강남구 일원동)씨는 작은아버지의 이름을 납북자 명부에서 발견하곤 『아버지(이찬묵·85)가 자신 대신에 동생이 의용군에 끌려가셨다며 한평생을 괴로워하며 살고 있다』면서 『이렇게 이름으로라도 삼촌을 확인한 것은 의용군에 끌려가시고 나서 처음』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地名 전체가 명부에서 빠져 이름을 못 찾는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와 형님이 고향인 경기도 광주에서 납북되었다는 신화영(광진구 중곡동)씨는 『광주군 도척면의 경우 납북자들이 많았다』면서 『그런데도 도척면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걸 보면 이 명부가 작성됐다는 1952년 당시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진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형제 중 두 명이 6·25 때 전사하고 맏형이 납북됐다는 김학원(70·경북 안동)씨도 『우리 마을(6·25 당시 주소:안동군 월곡면 석동리)에서도 우리 형님을 비롯해 댓 명이 납북됐는데 명부에는 이름이 모두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金이사장은 『정부는 지금이라도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6·25 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희생자들의 실태 조사를 벌여 이런 6·25 실종자 가족들의 아픔을 달래 주어야 한다』면서 『납북자의 생사 확인과 송환 요구는 이산가족 문제보다 더 시급한데도 정부가 공무원 한 사람도 명단 확인 과정에 참여시키지 않고 있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이다』고 말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8월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도 6·25 민간인 희생자 재조사 문제에 대해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이 당국자는 『앞으로 적십자사 간 접촉이나 남북 회담에서 납북자에 대한 생사확인 등의 합의가 이루어지면 신고를 받는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조사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7월22일: 『그럼 살아 있다는 거예요?』]
7월22일 月刊朝鮮 회의실의 아침은 한 노인의 눈물로 시작됐다.
6·25 전쟁 당시 경찰관이었던 남편 柳昶烈(유창렬)씨가 납북됐는지 피살됐는지 몰라 명부에서 찾으러 왔다는 임대임(82·종로구 옥인동)씨는 남편 柳씨의 이름이 납북자 명부에서 발견되자, 『그럼 살아 있다는 거예요? 죽지는 않고 붙들려 갔다는 거죠?』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직까지 남편의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임씨는 『아이들이 내가 죽으면 함께 남편의 제사도 지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50년 7월 초순께 「개똥모자」를 쓴 좌익들에게 남편이 끌려가는 모습을 직접 봤다는 임씨는 남편이 인민군들에게 끌려가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도 「단장의 미아리 고개」 노래를 들으면 소름이 끼친다』고 울먹였다.
김인선(59·대전시 중구 증촌동)씨는 납북자 명부에 부친의 이름이 등재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피살자 명부에서 부친(金洛龍·김낙용)의 이름이 나오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납북자 명부에 부친의 이름이 없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피살자 명부를 뒤지다가 부친의 이름을 발견했던 것이다.
피살자 명부에는 부친 김낙용씨가 1950년 9월28일 충남 당진군 공동묘지에서 피살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당시 나이 48세. 金씨는 부친의 나이와 본적지를 확인하곤 『아버지가 맞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 말문을 연 金씨는 『아버지는 인민군 치하에서 내내 잘 숨어 계시다가 나중에는 지쳤는지 「나는 아무 죄가 없다」면서 당신 스스로 내무서를 찾아가셨다가 그 후로 행방불명이 돼 지금까지 납북된 걸로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품으로 어머니와 합장을 했다』며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金씨는 기자의 질문에 더 이상 답변을 않겠다며 자리를 떴다. 방금 부친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처럼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납북자 명부에서 아버지 朴基成(박기성)씨의 명단을 확인한 朴씨의 막내딸 朴金石(박금석·56)씨는 『아버지가 30세에 납북된 것을 확인 후 기가 막혔다』고 한다.
『저는 아버지라고 해서 막연히 아버지인 줄 알았죠. 활자에 「나이 30」이란 것을 보고 너무 기가 막혔어요. 이렇게 젊은 나이에 끌려가시다니…』
이날 月刊朝鮮 사무실에는 朴基成씨의 막내딸을 비롯, 큰딸의 아들, 朴씨의 사위와 조카 등 4명이 함께 방문했다. 조카는 대전에서 올라왔다고 한다.
朴基成씨는 6·25 사변 당시 서울 영등포에서 장인이 운영하는 제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朴基成씨와 그의 장인은 직원들과 제재소 지하에 숨어 있었다. 9·28 수복 무렵, 마침 한 무리의 군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망을 보고 있던 朴基成씨의 장인은 「만세」를 부르며 뛰쳐나갔다. 그는 이들이 국군인 줄 알고 기뻐서 환영을 하려고 뛰어나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국군이 아니라 인민군이었다.
朴씨의 장인은 현장에서 사살됐다. 그 후 朴基成씨는 장인의 시신을 공동묘지에 가매장하고 항아리를 덮어 표시해 두었다. 朴基成씨는 『내가 혹시 어떻게 되면 공동묘지에 가서 항아리를 찾으라』고 어머니에게 당부한 후 인민군에 연행됐다.
朴基成씨와 함께 잡혀 온 사람들은 영등포 일대의 허름한 동네 창고를 옮겨 가며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朴씨의 부인은 막내딸(박금석씨)을 업고 남편이 갇혀 있는 창고를 찾아다녔다. 朴씨 부인은 인민군들에게 매달려 『그이를 데리고 가려면 나도 같이 데리고 가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인민군들은 따발총을 들이대며 朴씨 부인을 위협했다.
막내딸 朴金石씨는 『어머니는 눈앞에서 아버지가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그것이 한이 되어 식사 때마다 밥을 떠 놓고 울었다. 우리는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고 말했다.
이날 이름을 밝히기 꺼려한 70代 할머니는 『6·25 사변 때 오빠가 납치됐다. 당시 조카들이 두 살, 세 살이라 당시 상황을 잘 모른다. 집안 내력이라도 알려 주고 싶다』면서 납북자 명부 구입을 전화로 신청하기도 했다.
[7월23일:동두천 萬馥寺에 모셔진 6610명의 피살자 명부]
7월23일 오전. 서울시 강북구 미아동에 사는 김배홍(70)씨는 두툼한 서류뭉치를 들고 月刊朝鮮을 일찌감치 찾아와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들고 온 서류는 6·25 피살자 명부를 일일이 손으로 베껴 적은 것이었다. 月刊朝鮮에 명부 발견 소식이 보도된 후 직접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명부를 복사해다가 하나하나 적은 것이다. 명부가 오래돼 일반인들의 판독이 어렵다고 생각해 자신이 직접 적었다고 했다.
金씨는 먼저 자신과 얽힌 6·25 전쟁 이야기를 꺼냈다. 그 역시 6·25 전쟁 때 어머니(윤자녀)와 형님(배중)을 잃은 피살자 가족이었다. 다음은 金씨가 넋두리하듯 들려준 가족사다.
金씨의 고향은 충남 논산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 당시 형 배중씨는 대한청년단원으로 활동했다. 어머니 윤씨는 金씨의 형이 대한청년단원이라는 이유로 1950년 7월21일(음력) 여성동맹원들에게 끌려가 몽둥이로 학살당했다. 배중씨는 같은 해 7월27일(음력) 면장, 부면장 등과 함께 끌려가 인민재판을 받은 후 몽둥이, 쇠스랑 등으로 학살당했다.
金씨의 형 배중씨의 가족은 이후 滅門之禍(멸문지화)를 당했다. 배중씨의 아내 박원례씨는 전쟁 발발 후 좌익들이 잠시 피신해 있던 남편의 행선지를 자백하라며 가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51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부모를 잃은 배중씨 슬하의 창호, 기호 형제는 제대로 돌보는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1951년에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
가족들의 이야기를 끝낸 金씨는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萬馥寺(만복사)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곳에는 한국 무명용사 영령봉안소가 있는데 매년 현충일이면 6·25 전쟁 때 학살당한 애국영령들의 천도제가 열리고 있다』면서 『우리 어머니와 형님의 위패도 그곳에 모셔져 있어 1997년부터 내가 유족대표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는 7월31일 동두천시 생연동에 있는 萬馥寺를 찾았다. 입구에는 「본 사찰에서는 6·25 동란 때 자유수호를 위해 꽃다운 청년들이 맨주먹 붉은 피로 오직 호국일념으로 전국 각지에서 공산괴뢰도당들과 용전분투하다 산화한 반공투사들인 무명용사 영령을 봉안하여 연례행사로서 6·6 현충일과 10·18 평양 입성일을 기하여 연 2회에 걸쳐 범국민적으로 추모위령제를 엄숙히 거행하고 있음」이라는 안내문이 쓰인 빛바랜 입간판이 서 있다.
사찰 내 별도의 건물로 건립된 한국무명용사 영령봉안소에는 전국 각지에서 6·25 때 학살당한 6610명의 명패가 4평 남짓한 내부 양쪽 면에 가득 적혀 있었다.
1995년부터 萬馥寺 주지를 맡고 있는 심원 법사는 『그분들의 명단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매년 현충일마다 천도제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유족대표 김배홍씨는 『이곳에 모셔진 명단을 확인해 보니까 6·25 피살자 명부에 있는 영령들도 많았다』면서, 『이곳에 위패로 모셔져 있는 우리 어머니와 형님의 명단도 피살자 명부에 있다』고 말했다. 金씨는 또 『내가 알기로는 이곳에 모셔진 영령들의 명단은 이 절을 세운 이순례 보살이 내무부에 명단을 요청해 받은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7월24일:『이제 우리 아버지의 명예는 회복되는 거죠?』]
납북·피살자 명부 확인작업 열흘째. 찾아오는 발길이 뜸해지리라는 생각은 오판이었다. 납북·피살자 가족들은 여전히 月刊朝鮮 회의실을 찾았다. 성명, 나이, 당시 직업, 주소 등 단 한 줄의 정보에 그들은 목말라했다. 명부는 납북·피살자 가족들에게 「認證(인증)」의 역할도 하는 것 같았다. 자진 월북인지 아니면 납치를 당해 끌려간 것인지, 공산당들에게 학살당한 것인지 부역을 하다가 처형당한 것인지 몰라서 숨죽이며 살던 가족들은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말끔하지는 않지만 지난 50여 년간의 심리적 고통을 단 한 줄의 정보가 씻겨 준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아직도 신원 밝히는 것을 꺼려한다는 점이었다.
7월24일에 방문한 康貴子(강귀자·경기도 일산)씨는 1951년생으로 6·25 전쟁 유복자다. 당시 대학생으로 신혼이었던 그녀의 아버지(康漢相·강한상)가 잡혀간 날은 1950년 8월17일. 그날 충남 서산 바닷가에서는 집단학살이 벌어졌는데 康씨의 아버지도 그곳에서 학살당했다. 康씨의 큰아버지도 그 자리에 함께 끌려갔는데 다리에 총상을 입고 죽은 척하고 있다가 살아 돌아와 다락방에서 몇 달간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학살당할 당시 뱃속에 있던 康씨는 작은아버지(강한주) 호적에 長女로 입적됐다. 康씨는 『명부에서 아버지 이름을 찾는다고 해도 그분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거라도 찾아야지요. 나는 그분의 딸이니까』라며 자리를 떴다.
부산 연제구 연산동에서 올라온 郭翰一(곽한일·67)씨는 6·25 당시 황해도 청단 경찰서장이었던 아버지 곽내산씨가 납북된 것으로 그동안 믿고 있다가 피살자 명부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했다.
郭씨는 전쟁 당시 서울 오장동에 있던 집에서 아버지가 내무서원들에게 붙잡혀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郭씨의 부친을 붙잡아 가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는 그들의 말을 지금까지 믿었다고 한다.
『부친께서는 좌익들에게 끌려간 뒤 마포 형무소에 수감됐습니다. 어머니(권기자·90)가 그 소식을 듣고 마포형무소로 달려가 아버지의 모습을 멀찍이서 보았답니다. 직접 면회는 못 하고 멀리서 지나가는 것을 본 거죠. 그게 우리 가족이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생존해 계십니다. 어머니가 생존해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도 생존해 계시리라고 지금까지 믿었던 겁니다. 지금까지 호적정리도 안 하고 있습니다』
郭씨는 1962~1963년쯤 당시 인천에 있던 경기도 경찰국에 우연히 들러 6·25 전쟁 당시 부친의 동료였던 경찰국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경찰국장은 郭씨에게 『연금을 받고 있느냐?』고 물어, 『아무것도 못 받고 있다』고 대답했다. 국장은 아랫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더니 『경찰 기록에는 부친이 자수자(전향자)로 기록돼 있어서 연금을 안 준 것 같다』고 말했다. 郭씨는 『전향서를 썼다면 강요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라면서 기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버님의 피살이 기록된 이 명부는 정부가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 아버님의 명예가 회복되는 거죠?』
[7월25일:『유해라도 송환해 주었으면』]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사는 金在寬(김재관)씨는 부친이 납북된 경우다. 金씨의 부친은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金景道(김경도)씨다. 경남 함양군 출신인 金景道씨는 2代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서울에 잠시 머물다가 납치됐다고 한다.
金在寬씨의 경우는 그래도 다른 납북자나 피살자 가족들보다 행복한 편이다. 부친의 납북된 이후 행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62년 동아일보에는 납북인사의 생활상을 소개한 「죽음의 세월」이란 기사가 연재됐다. 春園 李光洙를 비롯한 유명 납북인사들의 행적을 소개한 이 기사에 金景道씨의 이름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북한연감에도 金씨의 부친은 이른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중앙위원으로 있다가 탄광으로 추방됐다고 적혀 있다.
金씨는 『부친이 올해 우리 나이로 100세라 살아 계시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정부와 국회가 성의를 보인다면 우선 북한에 생존한 것이 확인된 분들만이라도 생사여부 확인과 유해송환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1940년생으로 6·25 전쟁 때 만 열 살이었던 金元英(김원영·중랑구 면목동)씨는 부친 준동씨가 납북된 것이 분명한데도 명단에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그의 손에는 부모님의 결혼식 때 찍은 가족사진과 金씨가 갓난아이였을 때 찍은 가족사진이 들려 있었다.
경북 상주군이 고향인 金씨의 부친 준동씨는 당시 서울 미아리 근처에 살았다고 한다. 6·25가 발발하자 친구들과 함께 집 근처에 숨어 있다가 화장실 가는 길에 붙잡혀 납치돼 돈암국민학교로 압송됐다고 한다. 그곳에서 사돈간인 이해영씨를 만났는데 李씨는 돈암국민학교에서 재동국민학교로 압송하는 도중 탈출에 성공했지만 金씨의 부친은 탈출에 실패했다. 올해 85세인 李씨는 지금도 생존해 있고 金씨 부친이 강제로 납치됐음을 증언하고 있다고 한다.
부친이 재동국민학교로 압송된 후 9월10일에 金씨의 모친(고흥옥·1996년 작고)이 재동국민학교로 찾아가 상면한 것이 金씨 가족이 본 金씨 부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한다.
경기도 파주에서 온 趙完山(조완산·82)옹은 돋보기 안경 너머로 힘겹게 형님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명단에서 형의 이름을 확인하자 趙옹은 돋보기를 벗어 놓으며 『50년 만에 형님의 이름을 처음 확인했다』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의 형 趙銀山(조은산)씨는 납북 당시 42세로 대한청년단 간부로 일하고 있었다. 趙옹은 『형님은 전쟁이 나자 숨어 다녔는데 형수가 형님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와서 파주경찰서에 데리고 갔다가 잡혀갔다』고 말했다.
『형수가 「저쪽(좌익)에서 이제는 괜찮으니 데려오라」고 한 말을 곧이듣고 형님을 호랑이 굴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형수님은 아직도 살아 있는데 「남편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 속에 50년을 살고 있습니다』
趙完山옹은 9·28 수복 후 전투경찰에 지원했다. 전투경찰 101대대에 소속된 趙옹은 형을 찾기 위해 국군을 따라 황해도 사리원까지 갔다 왔지만 형에 대한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趙옹의 형은 아직도 호적상에 살아 있는 것으로 등재돼 있다.
趙完山옹은 형뿐 아니라 바로 아래 동생인 조개산(당시 20세)씨도 전쟁으로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당시 군인이었던 趙옹의 동생 조개산씨는 6·25 전쟁 때 마침 휴가 중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여 부대로 복귀하라는 방송이 나오자 조개산씨는 의정부에 있는 自隊로 복귀했다가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고 한다.
[7월28일:기다리던 아들 끝내 보지 못하고 타계한 어머니]

경기도 성남에 살고 있는 池錫桓(지석환·68)씨는 형 錫柱(석주)씨를 찾기 위해 月刊朝鮮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형이 좌익들에게 잡혀서 지리산으로 끌려 들어 갔는데 그런 경우도 명단을 확인할 수 있느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錫柱씨는 납북 당시 전주 농업중학교 학생이었다. 錫柱씨는 이 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부친과 함께 학교 사택에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 학교는 좌우익의 대립이 심했는데 錫柱씨는 학내에서 좌익운동을 주동한 학생들에 의해 지리산에 끌려 갔다고 한다.
池錫桓씨는 『형님이 행방불명된 후 어머니는 생존해 있다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연락이 올 것이라며 밤낮으로 기다리다 5년 前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朴性泰(박성태·73)씨는 아버지의 이름을 확인하러 왔다. 朴씨의 부친 朴泳和(박영화·당시 55세)씨는 전쟁 때 李始榮(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재직 중이었다고 한다. 朴泳和씨의 이름은 납북자 명부에 있었다.
朴性泰씨는 『아버지는 당시 전쟁이 터졌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대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서울 함락 직전에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부모를 만나러 잠시 집에 들렀다가 다시 관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李始榮 부통령 일행은 서울을 빠져나가고 관사는 비어 있었습니다. 피란을 가지 못한 아버지는 서울 왕십리 부근에 은신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어요』
朴性泰씨는 당시 강원도에 있는 큰누나 집으로 피신을 했다.
『9·28 수복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숨어 있다는 서울 왕십리로 찾아갔으나 아버지는 그곳에 없었어요. 당시 아버지는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은신하면서 지하조직인 구국동지회를 만들어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배신자의 밀고로 체포되었습니다. 누군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보았다고도 하고, 누가 아버지를 들쳐 업고 탈출했다고도 하고 소문만 무성할 뿐 납북되셨는지 여기서 돌아가셨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朴씨는 『아버지가 납북되었을 때 조부모가 다 살아 계셨다』며 『할머님은 외아들인 아버지를 기다린다고 필원동에 있는 집을 팔지 않고 기다리셨다』고 말했다. 朴性泰씨는 아버지가 체포된 그해 12월 군에 입대하여 1977년 중령으로 예편했다.
[7월29일:『대한민국 정부의 납북자 명부 작성은 휴전협상 제출용이었다』]

명부 확인작업 3週째의 첫날인 7월29일. 기자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月刊朝鮮 회의실을 찾는 납북·피살자 가족들을 뒤로 하고 경기도 성남시 분당으로 향했다. 당시 공보처 통계국 소속 공무원으로 납북자 명부 작성에 참여한 李元相(이원상·80) 翁을 만나기 위해 그의 자택으로 가는 길이었다.
李옹은 배재고보를 졸업한 후 1944년 조선총독부 관방조사과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1980년에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서 사무관으로 퇴직할 때까지 36년간 통계분야에서만 종사했다. 관절이 아파 요즘에는 외출이 자유롭지 않다는 李옹은 청력만 약할 뿐 아주 건강해 보였다. 그는 명부 작업에는 통계국장을 포함한 9명이 참여했고 그 가운데 생존자는 자신뿐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李옹과의 일문일답이다.
―6·25 사변 납북자 명부를 작성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휴전협정에 제출할 목적으로 작성했다』
―작성 시기는 언제쯤인지 기억하는가.
『몇 월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휴전협정 이야기가 나오면서 명단 작성작업이 시작됐다. 그전에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시간은 얼마나 걸렸나.
『두 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아홉 명이 밤새도록 작업했다』
―어떤 방법으로 작성했는가.
『피란 당시 수도였던 부산의 경우는 우리가 직접 받았다. 타 지방에서도 부산으로 직접 와서 신고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지방은 납치 일시, 장소, 직업 등을 적도록 한 우리가 만든 양식을 행정계통을 통해 보내 조사하도록 했다. 그때 납북자 가족들은 휴전협정이 체결되면 납북자들이 돌아올 것으로 생각해서 신고하면서 눈물바다를 이뤘다. 심지어 명부가 인쇄돼 나오자 혹시라도 신고한 가족의 이름이 빠져 있을까 봐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통계국 사무실이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명단 확인작업을 하다가 보니까 납북된 게 분명한데도 명부에서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가족들이 신고를 안 한 경우는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에게 직접 찾아와 신고한 경우도 전후 사정을 다 듣고 확인한 후 명단을 작성했다. 월북자는 뺐고 의용군의 경우는 강제든 아니든 제외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피살자 명부 작성 작업에도 참여했는가.
『그렇다. 납북자 명부 작성 작업에 참여했던 우리 9명이 그 작업도 했다』
―납북자 명부와 동시에 진행했는가.
『납북자 명부 작성 후에 했다. 납북자 명부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이 워낙 높자 피살자 명부도 작성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작성 요령은 납북자 명부와 똑같은 방법으로 했다. 피살자 명부는 휴전협정 제출용과는 관련이 없다』
―1952년에 작성한 납북·피살자 명부 외에 작성된 명부는 없는가.
『없다』
―그렇다면 1954년에 작성된 납북자 1만7940명의 명부는 무엇인가.
『나는 그 작업에도 참여했다. 1954년에 작성한 명부는 뒤늦게 신고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강한 차원이지 전면적으로 새롭게 작성한 것은 아니다』
李옹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기자는 전쟁 와중에도 밤을 새워 가며 6·25 사변 납북·피살자들의 명단을 깨알 같은 글씨로 기록했던 1950년대의 공무원과 납북·피살자 가족들의 애끓는 명단 확인 현장을 외면하는 2000년대 공무원의 차이를 생각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기자는 李옹의 『납북자 명부 작성은 휴전협정 제출용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서를 찾을 수 있었다. 1953년 7월27일에 체결된 「한국 정전협정 전문」에서였다. 이 전문 제3조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 59항에는 납북자 문제가 휴전협정에서 논의됐음을 시사하는 다음과 같은 항목이 있다.
「실향민간인귀향협조위원회를 설립한다. (중략) 동 위원회는 군사정전위원회의 전반적인 감독과 지도 밑에 책임지고 상기 민간인의 귀향을 협조하는 데 관계되는 쌍방의 구체적 계획을 조절하며, 또 상기 민간인의 귀향에 관계되는 본 정전협정 중의 모든 규정을 쌍방이 집행하는 것을 감독한다. 동 위원회의 임무는 운수 조치를 포함한 필요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상기 민간인의 이동을 촉진 및 조절하며, 상기 민간인이 군사 분계선을 통과하는 월경 지점(들)을 선정하며, 월경 지점(들)의 안전조치를 취하며, 또 상기 민간인 귀향을 완료하기 위하여 필요한 기타 임무를 집행하는 것이다」
南측으로서는 「실향민간인」이라는 말과 「납북자」라는 말은 동의어에 다름 아니다. 1956년 南北 적십자사가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서로 납북자와 월남자들의 생사확인 작업을 할 때 대한적십자사가 작성한 것이 「失鄕私民(실향사민)」 명단이다. 즉 「실향민간인」 명단인 것이다.
[7월31일:『6·25 납북·피살자를 위한 특별법도 제정하라』]

7월31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국회에 재조사를 통한 납북자에 대한 정확한 신상파악과 납북인사의 명예회복과 그 가족에 대한 지원을 골자로 한 특별법 제정을 청원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국회 청원 등을 통해 납북자 특별법 제정을 요구해 왔으나 번번이 거부됐다.
반면 납북·피살자 명부 발간 소식이 알려지기 하루 전인 7월14일 국가인권委는 「국회의장과 국무총리에 대하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과 관련한 진상규명과 억울한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통합 특별법의 제정」을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국가인권위원회가 말하고 있는 「민간인 희생」이란 국군, 경찰 등 국가 공권력에 의한 희생을 말하는 것으로 6·25 전쟁 납북자나 피살자는 해당되지 않는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金聖浩 이사장은 『국가인권委의 결정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면서 『부역자도 포함돼 있을지도 모를 일에는 특별법 제정을 권유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다 희생당한 6·25 납북·피살자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은 국가인권委가 왜 권유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숫자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7월31일에도 月刊朝鮮을 찾는 납북·피살자 가족들의 발길은 계속됐다.
李丙德씨는 6·25 전쟁 당시 22세로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대한청년단 훈련부장을 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李丙德씨는 인민군에 체포되었고,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고 한다. 그의 동생 李丙學(이병학·72)씨는 『형님과 밤에 자고 있는데 내무서원이라는 사람 두 명이 장총을 메고 와서 형님을 잡아갔다』고 기억했다. 그 후 李씨는 형님이 성동경찰서에 수감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李丙學씨는 국방장관의 이름으로 발급된 형님의 「예비역 육군 소위 임명장」을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펴 놓았다. 1998년 李씨는 형의 생사여부를 국방부에 문의했었다고 한다. 당시 국방부는 「李丙德씨가 행방불명되었는지 사망했는지 근거가 없다」는 답변을 보내왔다고 한다. 李씨는 『당시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명된 형님의 병력이 오늘날 어떤 지위를 가지게 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李씨는 『나라를 위해 일하지 않았으면 형님이 이런 일을 당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형님 같은 분은 아무 곳에서도 신경을 쓰지 않으니 야속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원 李宗聖씨는 북한서 노동자 생활
李宗聖(이종성)씨는 납북 당시 제2代 국회의원이었다. 손자 李昌潤(이창윤·65)씨는 『할아버지는 일제 때 변호사를 하다가 전쟁 직전 경기도 이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셔서 당선됐다』고 말했다.
李宗聖씨는 종로구 인의동(現 종로4가 부근)에 있는 관사에 머무르다가 납북됐다고 한다. 손자 李昌潤씨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의 납북상황은 다음과 같다.
『서울 함락 직전인 6월27일 새벽에 서울 마포경찰서에서 할아버지에게 피신하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서울을 사수한다고 한다는데 무슨 피란」이냐며 경찰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 후 인민군이 들어오자 할아버지는 둘째 딸과 큰딸 집을 옮겨 다니며 숨어 지냈습니다. 9·28 서울 수복 무렵 동대문구 큰딸 집에 숨어 있었는데 모 정치인이 「괜찮다고 나오라」고 해서 따라 나섰다가 그 길로 납북되었습니다』
李昌潤씨는 그 후 할아버지가 트럭에 실려 北으로 가던 중 돈암동에 있던 趙素昻(조소앙)씨의 자택에 잠시 들러 점심을 먹은 후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 트럭에는 趙素昻씨를 비롯, 安在鴻(안재홍)씨 등 거물급 인사들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납북된 李宗聖씨의 소식은 1962년 동아일보에 「죽음의 세월」이란 제목으로 연재된 납북인사 관련 기사에 언급되어 있다. 이 기사는 탈북자 趙徹(조철)씨가 자신이 북한에서 보고 겪은 것을 쓴 것이다.
기사에는 『李宗聖씨는 납북 후 평양 근처 원리 일대의 농가에 수용 중 등화관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비원에게 맞아 늑골이 부러졌으나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아 고열로 신음했다. 1958년 이종성씨는 평북 협동농장에 강제 이주당해 노동자로 전락했다』고 짤막하게 기록돼 있었다.
李昌潤씨는 『납치되던 해의 추석이 할아버지 환갑이었는데 환갑잔치도 못 해 드렸다.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유해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 정부는 北에 생존해 계시던 할아버지 같은 분들의 유해 송환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8월2일:『정부가 할 일을 月刊朝鮮이 해 주어 고맙다』]
명부를 확인하러 오는 납북·피살자 가족들의 발걸음이 잦아들면서 명단 확인 작업을 돕던 6·25납북인사가족협의회 회원들이 月刊朝鮮 회의실을 떠났다. 떠나면서 그들은 『정부가 할 일을 月刊朝鮮이 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그들이 떠나던 날도 통일부 담당 공무원들은 오지 않았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月刊朝鮮 회의실에는 여전히 납북·피살자 명부가 비치돼 있다. 2003년 9월호 기사를 마감하고 있는 8월12일 현재까지도 뒤늦게 명부를 확인하러 오는 납북·피살자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1950년 6월25일 새벽에 시작된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전쟁이었다.●
명부에 등재된 납북·피살자는 14만2953명. 대한민국은 50여 년 전에 그들의 이름을 잊었을지 모르지만 가족들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 名簿(명부)는 1952년에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것으로 月刊朝鮮과 6·25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金聖浩·김성호·74)가 지난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찾아낸 것이다. 金大中 정부는 명부가 발견되기 전까지 명부의 존재를 부정했다. 명부에는 납북자(피살자)의 성명, 성별, 연령, 직업, 납북(피살) 연월일·장소, 본적, 주소 등 8개 항목이 기록돼 있다. 명부 발견 후 月刊朝鮮이 方一榮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1년여에 걸친 작업 끝에 납북자·피살자 명부를 발간함으로써 먼지 속에 묻혀 있던 6·25 전쟁 당시 좌익과 인민군에게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확인하고 우는 딸, 남편의 이름을 확인하고 하염없이 서럽게 울던 아내, 형님의 이름을 확인하고 말없이 흐느끼기만 했던 노인… 그 많은 사연들을 납북·피살자 가족들은 月刊朝鮮 회의실에 쏟아 놓고 갔다. 月刊朝鮮 회의실은 한풀이의 場(장)이었고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는 場이기도 했다. 일부 가족들은 납북·피살자 명부 발견·발간 이후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金大中·盧武鉉 정부에 대해 치를 떨기도 했다. 그들은 『정부가 계속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와 의리를 잊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기자는 6·25 전쟁이 50여 년 전 벌어졌던 일이 아니라 2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납북·피살자 가족들 가슴속에서는 현재진행형임을 목도할 수 있었다. 6·25를 「부모님들의 전쟁」으로 여기며 살아온 세대인 기자는 19일 동안 목도한 「죽음의 기록」이자 「야만의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그것은 2003년 7월에서 8월까지 벌어진 또 하나의 6·25 전쟁이었다.
[7월15일:『우리 아버지는 몽둥이에 맞아죽었습니다』]

납북·피살자 가족들 가운데 명부 확인을 위해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사는 姜埈(강준·71)씨다. 그는 납북자 명부에서 내무부 치안국 수사지도과장으로 재직했던 아버지(姜炳鈺·강병옥)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아버지가 6·25 때 인민군에 납치돼 소설가 春園 李光洙(춘원 이광수)와 평양 형무소에 함께 갇혀 있었다는 소식까지 들었다는 그는 『지금도 남들이 노부모를 모시고 다니는 걸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난다』면서, 『아버지의 함자만이라도 명부에서 확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명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하소연하듯 말했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지도 않겠지만 살아 계신다고 해도 100세예요. 제사는 진작부터 모시고 있어요. 어머니 기일에도 모시고 아버지 생신에도 모시고,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르니까. 북한이 아버지 돌아가신 날짜만이라도 가르쳐 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姜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서울 옥인동에 사는 주부 姜銀喜(강은희·44·여)씨가 급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姜씨는 아침에 月刊朝鮮으로 전화를 걸었던 시아버지 대신 찾아왔다고 했다. 姜씨는 6·25 전쟁 당시 예산군청 내무과장이었던 시할아버지(張國鉉·장국현)의 이름을 피살자 명부에서 발견하자 마치 시할아버지가 살아온 것처럼 기뻐하며 시댁으로 「찾았다」는 전화를 걸었다.
羅汪植(나왕식·67)씨는 부친(羅大根·나대근)이 피살당한 경우다. 당시 羅씨의 부친은 우익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 간부로 활동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6·25 때 北의 괴뢰군에 의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전쟁 당시 우리 가족은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에 살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터진 직후였던 1950년 7월경 경기도 화성을 점령했던 괴뢰군은 우리 동네 마을 사람들 중에 李承晩 대통령을 지지한 사람들을 색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괴뢰군은 아버지의 경력을 알고 곧바로 잡아갔습니다. 괴뢰군은 아버지를 포함해 일부 마을 사람들을 「반동분자」로 분류한 후 동네 인근에 있는 지하 방공호에 모조리 잡아다 처넣었습니다. 괴뢰군은 이 「반동분자」들을 한 명씩 불러내어 고문과 구타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아버지도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습니다』
羅씨의 아버지가 「몽둥이에 맞아 죽은」 날은 1950년 7월12일이었다. 가족들은 인민군들이 羅씨 아버지의 시신을 그대로 내버리는 바람에 한동안 시신도 찾지 못했다. 부친의 시신을 찾게 된 것은 할머니의 꿈 덕분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타살된 지 4일 뒤쯤 같이 살고 있었던 할머니가 이상한 꿈을 꿨습니다. 할머니는 꿈속에서 白髮(백발)을 한 할머니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 백발의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에게 다른 말은 일체하지 않고 「나를 따라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따라갔더니 동네 뒷산이었답니다. 꿈에서 깬 할머니는 우리 가족들과 곧장 뒷산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 이상한 곳을 발견했습니다. 그 지점에서는 썩는 냄새가 심하게 났습니다. 골이 썩고, 혀가 이마까지 빠져 나온 아버지의 머리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현장이었습니다』
피살자 명부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찾은 羅씨는 울분을 삭이지 못하며 이렇게 말했다.
『요즘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는다고 다들 난리인데, 진정 국가를 위해 일하다 인민군에 의해 맞아 죽은 「아버지」는 과연 누구한테 보상을 받아야 합니까』
[7월18일:아홉 살 나이에 집단학살의 현장을 목격하다]

납북·피살자 가족들의 명부 확인작업 4일째인 18일, 月刊朝鮮을 방문한 白承平(백승평·62)씨는 긴 시간 동안 기자를 놓아 주지 않았다.
서울 종로구에 살고 있는 白씨는 1950년 9·28 서울 수복 직전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아버지 白泰鉉(백태현)씨를 잃었다. 부친 白씨는 고향인 충남 당진군 송악면에서 우익단체 대동청년단과 당진군 연합소방대 부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白承平씨는 피살자 명부에서 부친의 성명을 확인한 뒤 『참담한 심정이다. 할 얘기가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는 심한 치질에 걸려 피란을 가기 어려운 상태였어요. 인민군이 고향을 점령한 다음 세 번이나 보안서로 연행되었지만, 그들도 아버지가 도주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석방하곤 했어요. 아버지가 피란 갈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불편한 몸을 끌고 집에서 7km 정도 떨어진 큰댁에 숨기도 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인민군들이 들이닥치더랍니다. 피살당하시던 날 밤에도 아버지는 인민군에 의해 연행됐다가 풀려나왔어요』
白씨는 『아직도 「마지막으로 석방됐을 때 아버지가 도망가셨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부친 白泰鉉씨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시장하다며 저녁 식사를 달라고 했다. 白承平씨의 어머니는 한밤중에 남편을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白씨를 비롯한 형제들은 잠에 빠진 뒤였다. 밥상이 차려지기도 전에 인민군들이 다시 몰려왔다.
『인민군들은 아버지를 끌고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동네의 우익인사들 집은 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연행했어요. 20여 명이나 되는 우익인사들이 붉은색 노끈에 한데 묶인 채로 끌려갔습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마을을 벗어나던 일행이 白씨의 집 앞을 지날 때 아버지 白泰鉉씨는 앞으로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생기침을 두세 번 했다고 한다. 남편의 기침 소리인 것을 알아차린 白씨의 어머니가 문을 열고 보니 남편과 동네 사람들이 묶인 채 전후좌우로 인민군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녀는 집을 나와 무작정 그들의 뒤를 따랐다.
『동구 밖을 벗어나서 한참 동안 가더랍니다. 마을에서 2.5km 정도 떨어진 곳에 야산이 있는데, 인민군들은 아버지 일행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면서 어머니를 보고 더 쫓아오지 말라고 위협했답니다. 어머니는 한동안 실랑이를 하다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어머니는 그것이 남편과의 마지막일 줄은 모르고 있었답니다. 밤을 새운 채 새벽이 지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생존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어요』

동이 터 오기 전, 白承平씨의 모친은 큰아들과 白씨, 사촌형과 함께 아버지를 찾으러 길을 나섰다. 당시 9세였던 白씨는 왠지 겁이 나서 가지 않겠다고 하다가 어머니 손에 붙들려 함께 걸었다.
『어머니는 밤중에 갔던 길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가니 야산 밑에 집 한 채가 보였는데 웬 노파가 살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그 할머니에게 어젯밤 사람들이 끌려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분이 「밤새 저 산 계곡에서 비명소리가 말도 못하게 울렸다」고 해요. 총소리도 두세 번 났다고 하고. 우리는 노파가 가리키는 계곡으로 들어갔어요』
붉은 노끈에 한 줄로 묶인 10여 구의 시체가 커다란 구덩이에 층층이 파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핏자국과 벗겨진 옷, 신발, 찢겨진 살점 등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선혈로 물든 돌덩이와 연장도 널려 있었다.
『얼마나 심하게 반항했는지 신발을 신고 죽은 사람이 없었어요. 포승도 풀지 않은 채 대부분이 맞아 죽었고 총살당한 사람은 몇 명 안 된 것 같았어요. 힘이 세고 반항을 심하게 한 사람을 먼저 쳐 죽인 모양인데, 시신을 일렬로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 위에 포개듯이 파묻었더군요』
동네에서 힘깨나 쓴다는 한 우익인사의 시신은 구덩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정황으로 보아 노끈을 풀고 도망치려 한 듯했다. 그가 도망치자 여러 명이 달려들어 그를 죽인 후 시체를 바위로 눌러 놓았더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시신은 맨 위에 있었습니다. 병이 심해 반항을 할 힘도 없어서 맨 마지막에 변을 당하셨을 겁니다. 부역자로 나가지 않으려고, 술도 잘 못하던 양반이 독한 술을 빚어 드셨어요. 치질이 더 심해져야 환자로 인정받으니까요』
白泰鉉씨는 옆구리와 팔 등에 심한 刺傷(자상)을 입고 숨져 있었다. 당시 나이 42세. 퉁퉁 부은 상처 부위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시신을 구덩이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모시고 가 모래흙을 덮어 가매장했다. 연장도 없어 손으로 땅을 파야 했다.
가족들은 산을 내려온 뒤 이 사실을 비밀리에 동네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 때문에 다른 인사의 가족들도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白씨는 『그들도 무서웠겠지만 목숨을 걸었다』고 했다.
『며칠 뒤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때도 우리에게 들으라는 듯 인민군들의 「따콩총」 소리가 났어요. 위축돼서 묘소도 깊이 팔 수 없었어요. 인민군들이 갑자기 몰려올까 봐 불안했습니다』

白씨는 『이날 죽은 20여 명은 대부분 우익인사들』이라며 『경찰관 및 공무원은 당진 공동묘지에서 총살됐다』고 말했다. 白씨의 말을 증명하듯 피살자 명부상에는 당시 충남 당진군의 피살자 255명 중 56명이 당진 공동묘지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48년 10월에 여순 14연대 반란의 여파가 우리 고향에도 미쳤습니다. 좌익들이 송악면 지서를 습격해 불을 지르고 약탈하기도 했어요. 여순반란 사건 때 우리 마을에도 100여 명의 폭도들이 꽹과리와 농기구를 들고 우익인사의 집으로 몰려왔어요. 아버지를 비롯한 네 명이 피신했는데, 그중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한 姜(강)소령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도 함께 변을 당했는데 명부에도 나와 있군요』
아버지를 찾으러 간 그날의 아홉 살 소년은 예순이 넘은 지금도 『주검을 보기가 두렵다』고 말한다. 白씨의 어머니는 지난 해 12월 96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생활은 말도 못합니다. 「독립군 선조를 둔 가족의 가난은 대물림한다」고 하는데 우리도 마찬가지였어요. 배우지도 못하고 못 먹고…. 우리 형제가 7남매였는데 어머니 혼자 그 많은 자식들을 어떻게 키웁니까.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후 종교에 더 의지하셨어요. 당신의 자식과 손자, 손녀를 포함해서 목회자가 9명입니다』
白承平씨는 6·25 당시 인민군에게 피살당한 민간인들을 위해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부가 공산주의자, 부역자, 국군이나 유엔군에게 학살당한 양민들은 밝히려고 하면서 인민군에게 살해되거나 납북당한 우리 국민들에겐 너무 무관심합니다. 국가가 이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바랍니다』
[7월21일:공무원들은 오지 않았다]
명부 확인작업이 시작된 지 7일째다. 토요일(19일), 일요일(20일)에도 月刊朝鮮 회의실에 나와서 납북·피살자 가족들의 명부 확인작업을 돕고 있는 6·25납북인사가족협의회 사람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을 더욱 힘빠지게 한 것은 관련 부처인 통일부의 태도다. 金聖浩 이사장은 며칠 전 통일부 실무자에게 『명단에 가족의 이름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납북·피살자 가족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장에 와서 직접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요지의 전화를 했다. 들려온 그 실무자의 대답은 『그럴 필요까지 있겠는가』였다고 한다.
金이사장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을 月刊朝鮮이 했는데 공무원이라면 당연히 현장에 와 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면서 『공무원들의 이런 태도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6·25 납북·피살자 가족들을 무시하는 태도』라며 분노했다.
金이사장이 통일부 실무자에게 현장에 직접 와서 보라고 한 이유는 명단 확인과정에서 정부 차원의 6·25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명부를 확인하러 온 납북·피살자 가운데 60% 이상이 가족의 명단을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가족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납북·피살 사실이 틀림없는데도 명부에는 등재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月刊朝鮮과 6·25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그 이유를 의용군에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과 戰時下였던 당시의 행정 실수로 누락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분석했다. 유사사례가 반복됐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하면 실제 납북자는 20여만 명, 피살자는 10여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재조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통일부 담당 직원은 명부 확인 현장에 나오지 않았다. 21일 하루에만도 자신의 신분을 밝힌 납북·피살자 가족 38명 가운데 가족을 못 찾은 사람이 26명(68%)에 달했다.

삼촌 정사용씨를 찾으러 온 정영희(58·경기도 안양)씨는 납북자 명부, 피살자 명부 어디에서도 삼촌의 이름을 찾지 못하자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정씨는 『할아버지(정춘호·1993년 작고)의 유언이 삼촌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만이라도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면서 『6·25 때 내 나이 다섯 살이었는데 그때 사용 삼촌이 나를 안고 다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며 울먹였다.
정씨가 기억하는 실종 당시 삼촌 사용씨의 나이는 19~20세로 정씨는 삼촌 사용씨가 이른바 의용군에 강제로 끌려갔을 것으로 짐작했다. 인민군 측에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음에도 그 명단이 납북·피살자 명부에 실리지 않은 사람들의 나이는 20세 전후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의용군에 끌려가 전사했든지 납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민군에 강제로 끌려간 후 의용군에 입대했는데도 납북자 명부에 이름이 등재돼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의용군으로 끌려간 작은아버지(이영묵)의 이름을 확인하러 月刊朝鮮을 방문한 이기완(63·여·강남구 일원동)씨는 작은아버지의 이름을 납북자 명부에서 발견하곤 『아버지(이찬묵·85)가 자신 대신에 동생이 의용군에 끌려가셨다며 한평생을 괴로워하며 살고 있다』면서 『이렇게 이름으로라도 삼촌을 확인한 것은 의용군에 끌려가시고 나서 처음』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地名 전체가 명부에서 빠져 이름을 못 찾는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와 형님이 고향인 경기도 광주에서 납북되었다는 신화영(광진구 중곡동)씨는 『광주군 도척면의 경우 납북자들이 많았다』면서 『그런데도 도척면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걸 보면 이 명부가 작성됐다는 1952년 당시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진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형제 중 두 명이 6·25 때 전사하고 맏형이 납북됐다는 김학원(70·경북 안동)씨도 『우리 마을(6·25 당시 주소:안동군 월곡면 석동리)에서도 우리 형님을 비롯해 댓 명이 납북됐는데 명부에는 이름이 모두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金이사장은 『정부는 지금이라도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6·25 때 피해를 입은 민간인 희생자들의 실태 조사를 벌여 이런 6·25 실종자 가족들의 아픔을 달래 주어야 한다』면서 『납북자의 생사 확인과 송환 요구는 이산가족 문제보다 더 시급한데도 정부가 공무원 한 사람도 명단 확인 과정에 참여시키지 않고 있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이다』고 말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8월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도 6·25 민간인 희생자 재조사 문제에 대해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이 당국자는 『앞으로 적십자사 간 접촉이나 남북 회담에서 납북자에 대한 생사확인 등의 합의가 이루어지면 신고를 받는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조사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7월22일: 『그럼 살아 있다는 거예요?』]
7월22일 月刊朝鮮 회의실의 아침은 한 노인의 눈물로 시작됐다.
6·25 전쟁 당시 경찰관이었던 남편 柳昶烈(유창렬)씨가 납북됐는지 피살됐는지 몰라 명부에서 찾으러 왔다는 임대임(82·종로구 옥인동)씨는 남편 柳씨의 이름이 납북자 명부에서 발견되자, 『그럼 살아 있다는 거예요? 죽지는 않고 붙들려 갔다는 거죠?』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직까지 남편의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임씨는 『아이들이 내가 죽으면 함께 남편의 제사도 지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50년 7월 초순께 「개똥모자」를 쓴 좌익들에게 남편이 끌려가는 모습을 직접 봤다는 임씨는 남편이 인민군들에게 끌려가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도 「단장의 미아리 고개」 노래를 들으면 소름이 끼친다』고 울먹였다.
김인선(59·대전시 중구 증촌동)씨는 납북자 명부에 부친의 이름이 등재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피살자 명부에서 부친(金洛龍·김낙용)의 이름이 나오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납북자 명부에 부친의 이름이 없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피살자 명부를 뒤지다가 부친의 이름을 발견했던 것이다.
피살자 명부에는 부친 김낙용씨가 1950년 9월28일 충남 당진군 공동묘지에서 피살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당시 나이 48세. 金씨는 부친의 나이와 본적지를 확인하곤 『아버지가 맞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 말문을 연 金씨는 『아버지는 인민군 치하에서 내내 잘 숨어 계시다가 나중에는 지쳤는지 「나는 아무 죄가 없다」면서 당신 스스로 내무서를 찾아가셨다가 그 후로 행방불명이 돼 지금까지 납북된 걸로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품으로 어머니와 합장을 했다』며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金씨는 기자의 질문에 더 이상 답변을 않겠다며 자리를 떴다. 방금 부친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처럼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납북자 명부에서 아버지 朴基成(박기성)씨의 명단을 확인한 朴씨의 막내딸 朴金石(박금석·56)씨는 『아버지가 30세에 납북된 것을 확인 후 기가 막혔다』고 한다.
『저는 아버지라고 해서 막연히 아버지인 줄 알았죠. 활자에 「나이 30」이란 것을 보고 너무 기가 막혔어요. 이렇게 젊은 나이에 끌려가시다니…』
이날 月刊朝鮮 사무실에는 朴基成씨의 막내딸을 비롯, 큰딸의 아들, 朴씨의 사위와 조카 등 4명이 함께 방문했다. 조카는 대전에서 올라왔다고 한다.
朴基成씨는 6·25 사변 당시 서울 영등포에서 장인이 운영하는 제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朴基成씨와 그의 장인은 직원들과 제재소 지하에 숨어 있었다. 9·28 수복 무렵, 마침 한 무리의 군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망을 보고 있던 朴基成씨의 장인은 「만세」를 부르며 뛰쳐나갔다. 그는 이들이 국군인 줄 알고 기뻐서 환영을 하려고 뛰어나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국군이 아니라 인민군이었다.
朴씨의 장인은 현장에서 사살됐다. 그 후 朴基成씨는 장인의 시신을 공동묘지에 가매장하고 항아리를 덮어 표시해 두었다. 朴基成씨는 『내가 혹시 어떻게 되면 공동묘지에 가서 항아리를 찾으라』고 어머니에게 당부한 후 인민군에 연행됐다.
朴基成씨와 함께 잡혀 온 사람들은 영등포 일대의 허름한 동네 창고를 옮겨 가며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朴씨의 부인은 막내딸(박금석씨)을 업고 남편이 갇혀 있는 창고를 찾아다녔다. 朴씨 부인은 인민군들에게 매달려 『그이를 데리고 가려면 나도 같이 데리고 가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인민군들은 따발총을 들이대며 朴씨 부인을 위협했다.
막내딸 朴金石씨는 『어머니는 눈앞에서 아버지가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그것이 한이 되어 식사 때마다 밥을 떠 놓고 울었다. 우리는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고 말했다.
이날 이름을 밝히기 꺼려한 70代 할머니는 『6·25 사변 때 오빠가 납치됐다. 당시 조카들이 두 살, 세 살이라 당시 상황을 잘 모른다. 집안 내력이라도 알려 주고 싶다』면서 납북자 명부 구입을 전화로 신청하기도 했다.
[7월23일:동두천 萬馥寺에 모셔진 6610명의 피살자 명부]

金씨는 먼저 자신과 얽힌 6·25 전쟁 이야기를 꺼냈다. 그 역시 6·25 전쟁 때 어머니(윤자녀)와 형님(배중)을 잃은 피살자 가족이었다. 다음은 金씨가 넋두리하듯 들려준 가족사다.
金씨의 고향은 충남 논산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 당시 형 배중씨는 대한청년단원으로 활동했다. 어머니 윤씨는 金씨의 형이 대한청년단원이라는 이유로 1950년 7월21일(음력) 여성동맹원들에게 끌려가 몽둥이로 학살당했다. 배중씨는 같은 해 7월27일(음력) 면장, 부면장 등과 함께 끌려가 인민재판을 받은 후 몽둥이, 쇠스랑 등으로 학살당했다.
金씨의 형 배중씨의 가족은 이후 滅門之禍(멸문지화)를 당했다. 배중씨의 아내 박원례씨는 전쟁 발발 후 좌익들이 잠시 피신해 있던 남편의 행선지를 자백하라며 가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51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부모를 잃은 배중씨 슬하의 창호, 기호 형제는 제대로 돌보는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1951년에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
가족들의 이야기를 끝낸 金씨는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萬馥寺(만복사)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곳에는 한국 무명용사 영령봉안소가 있는데 매년 현충일이면 6·25 전쟁 때 학살당한 애국영령들의 천도제가 열리고 있다』면서 『우리 어머니와 형님의 위패도 그곳에 모셔져 있어 1997년부터 내가 유족대표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는 7월31일 동두천시 생연동에 있는 萬馥寺를 찾았다. 입구에는 「본 사찰에서는 6·25 동란 때 자유수호를 위해 꽃다운 청년들이 맨주먹 붉은 피로 오직 호국일념으로 전국 각지에서 공산괴뢰도당들과 용전분투하다 산화한 반공투사들인 무명용사 영령을 봉안하여 연례행사로서 6·6 현충일과 10·18 평양 입성일을 기하여 연 2회에 걸쳐 범국민적으로 추모위령제를 엄숙히 거행하고 있음」이라는 안내문이 쓰인 빛바랜 입간판이 서 있다.
사찰 내 별도의 건물로 건립된 한국무명용사 영령봉안소에는 전국 각지에서 6·25 때 학살당한 6610명의 명패가 4평 남짓한 내부 양쪽 면에 가득 적혀 있었다.
1995년부터 萬馥寺 주지를 맡고 있는 심원 법사는 『그분들의 명단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매년 현충일마다 천도제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유족대표 김배홍씨는 『이곳에 모셔진 명단을 확인해 보니까 6·25 피살자 명부에 있는 영령들도 많았다』면서, 『이곳에 위패로 모셔져 있는 우리 어머니와 형님의 명단도 피살자 명부에 있다』고 말했다. 金씨는 또 『내가 알기로는 이곳에 모셔진 영령들의 명단은 이 절을 세운 이순례 보살이 내무부에 명단을 요청해 받은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7월24일:『이제 우리 아버지의 명예는 회복되는 거죠?』]
납북·피살자 명부 확인작업 열흘째. 찾아오는 발길이 뜸해지리라는 생각은 오판이었다. 납북·피살자 가족들은 여전히 月刊朝鮮 회의실을 찾았다. 성명, 나이, 당시 직업, 주소 등 단 한 줄의 정보에 그들은 목말라했다. 명부는 납북·피살자 가족들에게 「認證(인증)」의 역할도 하는 것 같았다. 자진 월북인지 아니면 납치를 당해 끌려간 것인지, 공산당들에게 학살당한 것인지 부역을 하다가 처형당한 것인지 몰라서 숨죽이며 살던 가족들은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말끔하지는 않지만 지난 50여 년간의 심리적 고통을 단 한 줄의 정보가 씻겨 준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아직도 신원 밝히는 것을 꺼려한다는 점이었다.
7월24일에 방문한 康貴子(강귀자·경기도 일산)씨는 1951년생으로 6·25 전쟁 유복자다. 당시 대학생으로 신혼이었던 그녀의 아버지(康漢相·강한상)가 잡혀간 날은 1950년 8월17일. 그날 충남 서산 바닷가에서는 집단학살이 벌어졌는데 康씨의 아버지도 그곳에서 학살당했다. 康씨의 큰아버지도 그 자리에 함께 끌려갔는데 다리에 총상을 입고 죽은 척하고 있다가 살아 돌아와 다락방에서 몇 달간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학살당할 당시 뱃속에 있던 康씨는 작은아버지(강한주) 호적에 長女로 입적됐다. 康씨는 『명부에서 아버지 이름을 찾는다고 해도 그분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거라도 찾아야지요. 나는 그분의 딸이니까』라며 자리를 떴다.
부산 연제구 연산동에서 올라온 郭翰一(곽한일·67)씨는 6·25 당시 황해도 청단 경찰서장이었던 아버지 곽내산씨가 납북된 것으로 그동안 믿고 있다가 피살자 명부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했다.
郭씨는 전쟁 당시 서울 오장동에 있던 집에서 아버지가 내무서원들에게 붙잡혀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郭씨의 부친을 붙잡아 가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는 그들의 말을 지금까지 믿었다고 한다.
『부친께서는 좌익들에게 끌려간 뒤 마포 형무소에 수감됐습니다. 어머니(권기자·90)가 그 소식을 듣고 마포형무소로 달려가 아버지의 모습을 멀찍이서 보았답니다. 직접 면회는 못 하고 멀리서 지나가는 것을 본 거죠. 그게 우리 가족이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생존해 계십니다. 어머니가 생존해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도 생존해 계시리라고 지금까지 믿었던 겁니다. 지금까지 호적정리도 안 하고 있습니다』
郭씨는 1962~1963년쯤 당시 인천에 있던 경기도 경찰국에 우연히 들러 6·25 전쟁 당시 부친의 동료였던 경찰국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경찰국장은 郭씨에게 『연금을 받고 있느냐?』고 물어, 『아무것도 못 받고 있다』고 대답했다. 국장은 아랫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더니 『경찰 기록에는 부친이 자수자(전향자)로 기록돼 있어서 연금을 안 준 것 같다』고 말했다. 郭씨는 『전향서를 썼다면 강요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라면서 기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버님의 피살이 기록된 이 명부는 정부가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 아버님의 명예가 회복되는 거죠?』
[7월25일:『유해라도 송환해 주었으면』]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사는 金在寬(김재관)씨는 부친이 납북된 경우다. 金씨의 부친은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金景道(김경도)씨다. 경남 함양군 출신인 金景道씨는 2代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서울에 잠시 머물다가 납치됐다고 한다.
金在寬씨의 경우는 그래도 다른 납북자나 피살자 가족들보다 행복한 편이다. 부친의 납북된 이후 행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62년 동아일보에는 납북인사의 생활상을 소개한 「죽음의 세월」이란 기사가 연재됐다. 春園 李光洙를 비롯한 유명 납북인사들의 행적을 소개한 이 기사에 金景道씨의 이름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북한연감에도 金씨의 부친은 이른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중앙위원으로 있다가 탄광으로 추방됐다고 적혀 있다.
金씨는 『부친이 올해 우리 나이로 100세라 살아 계시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정부와 국회가 성의를 보인다면 우선 북한에 생존한 것이 확인된 분들만이라도 생사여부 확인과 유해송환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경북 상주군이 고향인 金씨의 부친 준동씨는 당시 서울 미아리 근처에 살았다고 한다. 6·25가 발발하자 친구들과 함께 집 근처에 숨어 있다가 화장실 가는 길에 붙잡혀 납치돼 돈암국민학교로 압송됐다고 한다. 그곳에서 사돈간인 이해영씨를 만났는데 李씨는 돈암국민학교에서 재동국민학교로 압송하는 도중 탈출에 성공했지만 金씨의 부친은 탈출에 실패했다. 올해 85세인 李씨는 지금도 생존해 있고 金씨 부친이 강제로 납치됐음을 증언하고 있다고 한다.
부친이 재동국민학교로 압송된 후 9월10일에 金씨의 모친(고흥옥·1996년 작고)이 재동국민학교로 찾아가 상면한 것이 金씨 가족이 본 金씨 부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한다.
경기도 파주에서 온 趙完山(조완산·82)옹은 돋보기 안경 너머로 힘겹게 형님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명단에서 형의 이름을 확인하자 趙옹은 돋보기를 벗어 놓으며 『50년 만에 형님의 이름을 처음 확인했다』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의 형 趙銀山(조은산)씨는 납북 당시 42세로 대한청년단 간부로 일하고 있었다. 趙옹은 『형님은 전쟁이 나자 숨어 다녔는데 형수가 형님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와서 파주경찰서에 데리고 갔다가 잡혀갔다』고 말했다.
『형수가 「저쪽(좌익)에서 이제는 괜찮으니 데려오라」고 한 말을 곧이듣고 형님을 호랑이 굴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형수님은 아직도 살아 있는데 「남편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 속에 50년을 살고 있습니다』
趙完山옹은 9·28 수복 후 전투경찰에 지원했다. 전투경찰 101대대에 소속된 趙옹은 형을 찾기 위해 국군을 따라 황해도 사리원까지 갔다 왔지만 형에 대한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趙옹의 형은 아직도 호적상에 살아 있는 것으로 등재돼 있다.
趙完山옹은 형뿐 아니라 바로 아래 동생인 조개산(당시 20세)씨도 전쟁으로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당시 군인이었던 趙옹의 동생 조개산씨는 6·25 전쟁 때 마침 휴가 중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여 부대로 복귀하라는 방송이 나오자 조개산씨는 의정부에 있는 自隊로 복귀했다가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고 한다.
[7월28일:기다리던 아들 끝내 보지 못하고 타계한 어머니]

경기도 성남에 살고 있는 池錫桓(지석환·68)씨는 형 錫柱(석주)씨를 찾기 위해 月刊朝鮮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형이 좌익들에게 잡혀서 지리산으로 끌려 들어 갔는데 그런 경우도 명단을 확인할 수 있느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錫柱씨는 납북 당시 전주 농업중학교 학생이었다. 錫柱씨는 이 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부친과 함께 학교 사택에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 학교는 좌우익의 대립이 심했는데 錫柱씨는 학내에서 좌익운동을 주동한 학생들에 의해 지리산에 끌려 갔다고 한다.
池錫桓씨는 『형님이 행방불명된 후 어머니는 생존해 있다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연락이 올 것이라며 밤낮으로 기다리다 5년 前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朴性泰(박성태·73)씨는 아버지의 이름을 확인하러 왔다. 朴씨의 부친 朴泳和(박영화·당시 55세)씨는 전쟁 때 李始榮(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재직 중이었다고 한다. 朴泳和씨의 이름은 납북자 명부에 있었다.
朴性泰씨는 『아버지는 당시 전쟁이 터졌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대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서울 함락 직전에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부모를 만나러 잠시 집에 들렀다가 다시 관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李始榮 부통령 일행은 서울을 빠져나가고 관사는 비어 있었습니다. 피란을 가지 못한 아버지는 서울 왕십리 부근에 은신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어요』
朴性泰씨는 당시 강원도에 있는 큰누나 집으로 피신을 했다.
『9·28 수복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숨어 있다는 서울 왕십리로 찾아갔으나 아버지는 그곳에 없었어요. 당시 아버지는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은신하면서 지하조직인 구국동지회를 만들어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배신자의 밀고로 체포되었습니다. 누군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보았다고도 하고, 누가 아버지를 들쳐 업고 탈출했다고도 하고 소문만 무성할 뿐 납북되셨는지 여기서 돌아가셨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朴씨는 『아버지가 납북되었을 때 조부모가 다 살아 계셨다』며 『할머님은 외아들인 아버지를 기다린다고 필원동에 있는 집을 팔지 않고 기다리셨다』고 말했다. 朴性泰씨는 아버지가 체포된 그해 12월 군에 입대하여 1977년 중령으로 예편했다.
[7월29일:『대한민국 정부의 납북자 명부 작성은 휴전협상 제출용이었다』]

명부 확인작업 3週째의 첫날인 7월29일. 기자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月刊朝鮮 회의실을 찾는 납북·피살자 가족들을 뒤로 하고 경기도 성남시 분당으로 향했다. 당시 공보처 통계국 소속 공무원으로 납북자 명부 작성에 참여한 李元相(이원상·80) 翁을 만나기 위해 그의 자택으로 가는 길이었다.
李옹은 배재고보를 졸업한 후 1944년 조선총독부 관방조사과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1980년에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서 사무관으로 퇴직할 때까지 36년간 통계분야에서만 종사했다. 관절이 아파 요즘에는 외출이 자유롭지 않다는 李옹은 청력만 약할 뿐 아주 건강해 보였다. 그는 명부 작업에는 통계국장을 포함한 9명이 참여했고 그 가운데 생존자는 자신뿐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李옹과의 일문일답이다.
―6·25 사변 납북자 명부를 작성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휴전협정에 제출할 목적으로 작성했다』
―작성 시기는 언제쯤인지 기억하는가.
『몇 월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휴전협정 이야기가 나오면서 명단 작성작업이 시작됐다. 그전에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시간은 얼마나 걸렸나.
『두 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아홉 명이 밤새도록 작업했다』
―어떤 방법으로 작성했는가.
『피란 당시 수도였던 부산의 경우는 우리가 직접 받았다. 타 지방에서도 부산으로 직접 와서 신고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지방은 납치 일시, 장소, 직업 등을 적도록 한 우리가 만든 양식을 행정계통을 통해 보내 조사하도록 했다. 그때 납북자 가족들은 휴전협정이 체결되면 납북자들이 돌아올 것으로 생각해서 신고하면서 눈물바다를 이뤘다. 심지어 명부가 인쇄돼 나오자 혹시라도 신고한 가족의 이름이 빠져 있을까 봐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통계국 사무실이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명단 확인작업을 하다가 보니까 납북된 게 분명한데도 명부에서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가족들이 신고를 안 한 경우는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에게 직접 찾아와 신고한 경우도 전후 사정을 다 듣고 확인한 후 명단을 작성했다. 월북자는 뺐고 의용군의 경우는 강제든 아니든 제외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피살자 명부 작성 작업에도 참여했는가.
『그렇다. 납북자 명부 작성 작업에 참여했던 우리 9명이 그 작업도 했다』
―납북자 명부와 동시에 진행했는가.
『납북자 명부 작성 후에 했다. 납북자 명부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이 워낙 높자 피살자 명부도 작성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작성 요령은 납북자 명부와 똑같은 방법으로 했다. 피살자 명부는 휴전협정 제출용과는 관련이 없다』
―1952년에 작성한 납북·피살자 명부 외에 작성된 명부는 없는가.
『없다』
―그렇다면 1954년에 작성된 납북자 1만7940명의 명부는 무엇인가.
『나는 그 작업에도 참여했다. 1954년에 작성한 명부는 뒤늦게 신고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강한 차원이지 전면적으로 새롭게 작성한 것은 아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기자는 李옹의 『납북자 명부 작성은 휴전협정 제출용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서를 찾을 수 있었다. 1953년 7월27일에 체결된 「한국 정전협정 전문」에서였다. 이 전문 제3조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 59항에는 납북자 문제가 휴전협정에서 논의됐음을 시사하는 다음과 같은 항목이 있다.
「실향민간인귀향협조위원회를 설립한다. (중략) 동 위원회는 군사정전위원회의 전반적인 감독과 지도 밑에 책임지고 상기 민간인의 귀향을 협조하는 데 관계되는 쌍방의 구체적 계획을 조절하며, 또 상기 민간인의 귀향에 관계되는 본 정전협정 중의 모든 규정을 쌍방이 집행하는 것을 감독한다. 동 위원회의 임무는 운수 조치를 포함한 필요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상기 민간인의 이동을 촉진 및 조절하며, 상기 민간인이 군사 분계선을 통과하는 월경 지점(들)을 선정하며, 월경 지점(들)의 안전조치를 취하며, 또 상기 민간인 귀향을 완료하기 위하여 필요한 기타 임무를 집행하는 것이다」
南측으로서는 「실향민간인」이라는 말과 「납북자」라는 말은 동의어에 다름 아니다. 1956년 南北 적십자사가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서로 납북자와 월남자들의 생사확인 작업을 할 때 대한적십자사가 작성한 것이 「失鄕私民(실향사민)」 명단이다. 즉 「실향민간인」 명단인 것이다.
[7월31일:『6·25 납북·피살자를 위한 특별법도 제정하라』]

7월31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국회에 재조사를 통한 납북자에 대한 정확한 신상파악과 납북인사의 명예회복과 그 가족에 대한 지원을 골자로 한 특별법 제정을 청원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국회 청원 등을 통해 납북자 특별법 제정을 요구해 왔으나 번번이 거부됐다.
반면 납북·피살자 명부 발간 소식이 알려지기 하루 전인 7월14일 국가인권委는 「국회의장과 국무총리에 대하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과 관련한 진상규명과 억울한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통합 특별법의 제정」을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국가인권위원회가 말하고 있는 「민간인 희생」이란 국군, 경찰 등 국가 공권력에 의한 희생을 말하는 것으로 6·25 전쟁 납북자나 피살자는 해당되지 않는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金聖浩 이사장은 『국가인권委의 결정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면서 『부역자도 포함돼 있을지도 모를 일에는 특별법 제정을 권유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다 희생당한 6·25 납북·피살자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은 국가인권委가 왜 권유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숫자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7월31일에도 月刊朝鮮을 찾는 납북·피살자 가족들의 발길은 계속됐다.
李丙德씨는 6·25 전쟁 당시 22세로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대한청년단 훈련부장을 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李丙德씨는 인민군에 체포되었고,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고 한다. 그의 동생 李丙學(이병학·72)씨는 『형님과 밤에 자고 있는데 내무서원이라는 사람 두 명이 장총을 메고 와서 형님을 잡아갔다』고 기억했다. 그 후 李씨는 형님이 성동경찰서에 수감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李丙學씨는 국방장관의 이름으로 발급된 형님의 「예비역 육군 소위 임명장」을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펴 놓았다. 1998년 李씨는 형의 생사여부를 국방부에 문의했었다고 한다. 당시 국방부는 「李丙德씨가 행방불명되었는지 사망했는지 근거가 없다」는 답변을 보내왔다고 한다. 李씨는 『당시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명된 형님의 병력이 오늘날 어떤 지위를 가지게 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李씨는 『나라를 위해 일하지 않았으면 형님이 이런 일을 당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형님 같은 분은 아무 곳에서도 신경을 쓰지 않으니 야속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李宗聖(이종성)씨는 납북 당시 제2代 국회의원이었다. 손자 李昌潤(이창윤·65)씨는 『할아버지는 일제 때 변호사를 하다가 전쟁 직전 경기도 이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셔서 당선됐다』고 말했다.
李宗聖씨는 종로구 인의동(現 종로4가 부근)에 있는 관사에 머무르다가 납북됐다고 한다. 손자 李昌潤씨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의 납북상황은 다음과 같다.
『서울 함락 직전인 6월27일 새벽에 서울 마포경찰서에서 할아버지에게 피신하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서울을 사수한다고 한다는데 무슨 피란」이냐며 경찰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 후 인민군이 들어오자 할아버지는 둘째 딸과 큰딸 집을 옮겨 다니며 숨어 지냈습니다. 9·28 서울 수복 무렵 동대문구 큰딸 집에 숨어 있었는데 모 정치인이 「괜찮다고 나오라」고 해서 따라 나섰다가 그 길로 납북되었습니다』
李昌潤씨는 그 후 할아버지가 트럭에 실려 北으로 가던 중 돈암동에 있던 趙素昻(조소앙)씨의 자택에 잠시 들러 점심을 먹은 후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 트럭에는 趙素昻씨를 비롯, 安在鴻(안재홍)씨 등 거물급 인사들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납북된 李宗聖씨의 소식은 1962년 동아일보에 「죽음의 세월」이란 제목으로 연재된 납북인사 관련 기사에 언급되어 있다. 이 기사는 탈북자 趙徹(조철)씨가 자신이 북한에서 보고 겪은 것을 쓴 것이다.
기사에는 『李宗聖씨는 납북 후 평양 근처 원리 일대의 농가에 수용 중 등화관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비원에게 맞아 늑골이 부러졌으나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아 고열로 신음했다. 1958년 이종성씨는 평북 협동농장에 강제 이주당해 노동자로 전락했다』고 짤막하게 기록돼 있었다.
李昌潤씨는 『납치되던 해의 추석이 할아버지 환갑이었는데 환갑잔치도 못 해 드렸다.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유해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 정부는 北에 생존해 계시던 할아버지 같은 분들의 유해 송환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8월2일:『정부가 할 일을 月刊朝鮮이 해 주어 고맙다』]
명부를 확인하러 오는 납북·피살자 가족들의 발걸음이 잦아들면서 명단 확인 작업을 돕던 6·25납북인사가족협의회 회원들이 月刊朝鮮 회의실을 떠났다. 떠나면서 그들은 『정부가 할 일을 月刊朝鮮이 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그들이 떠나던 날도 통일부 담당 공무원들은 오지 않았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月刊朝鮮 회의실에는 여전히 납북·피살자 명부가 비치돼 있다. 2003년 9월호 기사를 마감하고 있는 8월12일 현재까지도 뒤늦게 명부를 확인하러 오는 납북·피살자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1950년 6월25일 새벽에 시작된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