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세값 얻어 서울에서 고양시 탄현으로 이사.출퇴근 시간 아끼려 한 달 중 반은 사무실에서 숙식.
의욕과잉, 독단적, 人和에 문제 있다는 비판도
의욕과잉, 독단적, 人和에 문제 있다는 비판도

- 서울지검 피의자 구타사건으로 구속영장이 집행된 홍경령 검사가 2002년 11월 6일 호송차에 실려 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구속취소 결정방침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서울지검 朴英洙 2차장은 『검찰로서는 치욕스러운 일이고 검찰 조직과 구속된 동료에게 미안하지만 증거법의 원칙상 세 명을 석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피의자 구타 사망사건」은 검찰 조직을 뿌리째 흔들면서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퇴진을 불러 왔고 주임인 洪暻嶺(홍경령·37) 前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와 수사관 세 명을 구속시켰다. 「인권의 보루」로 자처해 온 검찰에게는 「피의자들의 인권을 담보하면서 어떻게 수사 성과를 올릴 것인가」 라는 과제를 남겼다.
서울지검 형사3부 산하에 설치된 전담수사반은 11월13일 강력부가 이미 확보한 용의자의 진술을 모두 배척한 채 원점에서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범행을 자백했던 용의자들이 모두 『가혹행위에 의한 자백』이라며 진술을 뒤집었고, 3~4년 전 범행 현장의 단서가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조씨의 죽음은 검찰에게 險路(험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검찰이 『명예를 걸고 반드시 밝혀내고 말겠다』고 다짐하게 한 두 건의 살인사건은 어떤 사건인가.
1998년 6월25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일산동의 한 연립주택 욕실에서 폭력조직 「파주스포츠파」의 조직원 朴모(32)씨가 왼쪽 손목의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刺傷(자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시체를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숨진 朴씨의 형이었다. 그는 동생 집으로 달려 오기 직전, 동생으로부터 『검찰 마약 수사관들이 조사할 것이 있다고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상하다. 빨리 와 달라』는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를 받았다.
朴씨의 형이 연립주택에 도착했을 때 현관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朴씨 방이 있는 2층의 창문도 두 개 중 하나가 안으로 잠겨 있었다. 현관문을 깨고 들어간 朴씨의 형은 다시 욕실의 문이 안으로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잠시 후 그는 욕실 안에서 동생의 시체를 발견했다. 朴씨의 시체는 폭 1.5m, 길이 4~5m의 좁고 긴 사각형 모양의 욕실 바닥에 큰 大자로 누워 있었다. 얼굴은 천장을 향하고 있었고 곁에는 샤워기가 틀어진 상태로 놓여 있었다. 욕실바닥과 벽에 핏자국이 튄 흔적은 없었다.
당시 경찰은 朴씨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 내렸다. 朴씨 침대 밑에서 1회용 주사기가 발견됐다. 경찰은 朴씨가 그 주사기로 필로폰을 투약한 뒤 환각상태에서 자살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유족들의 반대로 朴씨 사체에 대한 부검도 이뤄지지 않았다.
1년4개월 뒤인 1999년 10월17일 새벽, 서울 마포구 주택가의 인적 드문 골목길에서 李모(35)씨가 온 몸을 흉기에 열다섯 군데 찔린 채 발견됐다. 李씨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옮겨졌으나 다음날 새벽 5시40분쯤 사망했다.
경찰이 살인 현장에서 발견한 것은 혈흔이 묻은 검은색 플라스틱 안경테와 손목시계. 다른 증거물은 확보하지 못했다. 현장 감식작업을 벌이던 경찰 감식반이 현장 주변을 맴돌다가 사라지는 흰색 프린스 승용차를 발견했지만 「경기45」라는 번호판 앞자리만 적어 뒀을 뿐이다.
경찰은 피살된 李씨가 난자당해 숨져 있다는 점에서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으로 보고 李씨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수사를 벌였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李씨의 죽음은 결국 未濟(미제)사건으로 처리됐다.
아무런 관련성도 없어 보이는 두 살인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혀 낸 것은 서울지검 강력부 洪暻嶺 검사였다. 洪검사는 1999년 12월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근무 당시 두 살인사건에 대한 첩보를 입수했다. 당시 그는 경기도경찰청에 내사지휘를 하면서 실체에 접근하려 했지만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했다. 洪검사의 내사는 그가 2000년 7월 서울지검 강력부로 옮겨 온 이후에도 계속됐다. 묻힐 뻔한 강력사건, 이른바 暗葬(암장) 사건을 파헤쳐 진상을 밝히는 것을 강력부 검사들은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洪검사는 2001년 2월에도 묻힐 뻔한 장안동파 살해사건의 범인을 추적 끝에 검거, 전국 강력·마약검사 세미나에서 모범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장안동파 살해사건은 1996년 장안동파 조직원이 상대 조직원 한 명을 살해하고 네 명을 폭행한 사건이었다. 경찰은 장안동파의 진술에 의존, 두 명을 구속기소하는 데 그쳤지만 洪검사는 다른 조직원들도 가담한 사실을 밝혀 내고 세 명을 추가로 구속기소하는 성과를 올렸다.
2001년 7월, 洪검사는 형사부로 발령났지만 두 사건에 대한 내사는 서울지검 강력부 차원에서 계속됐다. 2001년 8월, 서울지검 강력부는 법의학자들에게 자살로 결론이 난 1998년의 朴씨 살인사건 현장사진에 대해 감정을 의뢰했다. 당시 감정결과는 「자살로 볼 수 없는 명백한 살인」으로 나왔다. 법의학자들은 ▲朴씨의 왼손 상처에서 흔히 자살자에게 보이는 주저흔이 없다는 점 ▲동·정맥이 절단됐으면 목욕탕 벽과 바닥이 핏자국으로 낭자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검찰은 숨진 朴씨가 왼손잡이라는 점도 확인했다. 왼손잡이가 오른손을 사용해 왼쪽 손목의 동맥을 절단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타살의 방증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왼쪽 손목의 상처가 몸 안쪽에서 바깥쪽 방향으로 형성돼 있다는 점이다. 죽은 사람이 손목을 그어 자살했다면 통상 흉기를 몸 안쪽 방향으로 사용하고 상처도 그 방향으로 난다고 한다.
2002년 8월, 강력부로 컴백한 洪검사는 곧바로 두 사건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3년간에 걸친 洪검사의 집요한 추적은 지난 10월23일 두 번째 살인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던 용의자 張모씨를 검거, 범행 일체를 자백 받음으로써 실체에 접근하는 듯 했다.
1999년 李씨 살인사건에서 숨진 李씨를 살해현장으로 유인한 혐의를 받고 있던 權모(29), 鄭모(30)씨와, 두 건의 살인사건에 모두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던 崔모(29)씨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검찰은 이들 4명의 용의자로부터 확보한 자백을 통해 두 건의 살인사건의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들의 최초 자백에 따르면, 1998년 첫번째 살인사건(朴씨 살해사건)은 당시 안양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파주 스포츠파」 두목 신모씨가 교도소 밖으로 밀반출했던 「密紙(밀지)」 지시로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숨진 朴씨는 두목 신씨와 조직內 주도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있었다. 검찰 조사 도중 구타로 숨진 조모(30)씨, 서울지검 특조실에서 도주했다가 11월12일 검찰에 자진출두한 崔씨, 검찰 수사 과정에 물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한 朴모(29)씨 외에 성명불상자 1명 등 4명이 가담한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조씨와 朴씨는 이같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고 한다.
두 번째 살인사건은 숨진 李씨가 1998년 살인사건 폭로를 미끼로 조씨와 崔씨, 그 주변인물들을 찾아다니며 3000만원을 요구하는 바람에 벌어진 것으로 파악됐다. 李씨는 안양교도소에 수감됐을 당시 「파주 스포츠파」의 두목 신씨가 「密紙」를 반출, 살인을 지시했다는 사실을 입수했던 것이다.
검거된 6명의 용의자들 중 4명이 혐의를 인정하는 상황이었지만 조씨의 죽음으로 전세는 한 순간에 역전됐다. 10월26일 새벽 서울지검 특조실. 강력부 직원 세 명은 자백을 거부하는 조씨를 상대로 지속적인 구타를 가했다. 바로 전날 오후 9시, 조씨가 특조실에 도착하기 직전, 자술서를 쓰던 崔씨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가장 결정적인 용의자에다 자백까지 했던 崔씨의 도주는 수사관들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대검 감찰부 조사에 따르면, 당시 조씨를 수사하던 강력부 8급 수사관 蔡모(40), 崔모(36)씨와 파견 경찰관 洪모(36) 경장 등 세 명은 10월26일 오전 8시까지 조씨의 무릎 뒷부분을 차 바닥에 넘어 뜨리고, 허벅지를 차거나 밟는 등 가혹행위를 가했다.
조씨는 26일 새벽 잠시 취침한 뒤 그날 낮 12시 점심식사를 위해 일어났다가 숨을 몰아 쉬며 쓰러졌다. 이어 30분 뒤 강남성모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이날 오후 7시30분 사망하고 말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조씨가 외부 충격에 의한 뇌출혈(지주막하출혈)과 허벅지 등의 광범위한 피하출혈에 의한 속발성 쇼크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사망했다고 최종 부검결과를 발표했다.
조씨의 죽음은 그 이전의 모든 수사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혐의를 인정했던 용의자들은 모두 『가혹행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고 진술을 뒤집었으며, 혐의를 부인했던 용의자들은 더욱 완강해졌다.
주임이었던 洪暻嶺 검사는 11월6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독직폭행치사 혐의로 구속됐다. 수사관들의 폭행을 묵인·방조했다는 혐의였다. 洪검사에 대한 구속영장에는, 그가 內査(내사)가 미진해 조씨의 진술에 의존해 수사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검찰 직원들과 역할분담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조씨를 「진정시킨다」는 명목하에 무술 경관 등을 동원, 물리력을 행사해 심리적·육체적으로 제압하고 나면 그 뒤 洪검사가 조서를 작성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洪검사는 직원들의 「1차 제압」이 끝난 10월26일 오전 1~2시쯤 조씨를 조사했으나 여전히 부인하자, 다시 직원들에게 조씨를 넘겼고, 崔모씨 등 구속된 세 명의 직원들이 오전 8시까지 차례로 조씨를 폭행한 것으로 적혀 있다. 구속영장은 또 조씨가 무릎을 꿇고 있던 오전 6~7시 洪검사가 조사실에 들러 이를 목격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11월6일 밤, 洪검사는 구속수감됐다. 그가 잡아 넣었던 수많은 조폭들이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다는 점을 고려, 수감 장소는 성동구치소로 결정됐다. 洪검사의 가슴에는 서울지검 청사 출입증 대신 「112번」이라는 囚人(수인) 번호표가 달렸다.
반면 구속됐던 5명의 용의자들 가운데 鄭모·權모·朴모씨가 구속기간 만료일인 11월13일과 14일 각각 석방됐다. 구속자들 가운데 張씨가 이에 앞서 12일 기소됐지만 다른 사건인 강간치상 혐의였다. 특조실에서 달아났다 자수한 崔모씨에 대해서도 살인혐의가 아닌 사기도박 및 도주 혐의로 13일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피의자 구타 사망사건은 서울지검 검사실에 찬바람이 돌게 했다. 특히, 특수·강력·마약부 등 認知(인지) 수사부서는 더했다. 마약부는 조씨 사망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10월27일밤, 외근 중이던 수사관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마약 사범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십중팔구 뒤따르게 되는 몸싸움 과정에서 또 구타시비가 벌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마약부 수사관실의 한 수사관은 『이제 누가 현장에 나가서 마약 중독자들과 치고 박고 하겠느냐. 나는 못 하겠다』고 말했다.
10월28일 특수1·2·3부의 부장 검사들은 휘하의 검사들을 소집, 피의자를 심문할 때 절대 강압적이라고 오해받을 만한 행동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수뢰혐의를 받던 고위 공직자의 주변 인물을 수사 중이던 특수부의 한 검사는 『뇌물을 준 것으로 조사된 모 증권사 간부를 불러서 조사했는데 혐의를 부인해도 다그칠 수가 없었다』며 『수사기법상 자백을 유도하기 위해 모욕적인 언사로 피의자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엄두가 안 났다』고 털어놨다.
가장 위축된 곳은 당사자라 할 수 있는 강력부였다. 세 명의 직원이 구속되고 나머지 직원들이 사법처리되는 재난을 맞은 강력부는 사실상 기능정지 상태로 들어갔다. 강력부의 수사관들은 『이제 당분간 조폭 수사는 물 건너 갔다. 점잖게 해서 입을 열겠느냐』고 우려했다. 이들이 自認(자인)하는 조사실에서의 가혹행위는 머리를 땅바닥에 박게 하는 등 이른바 「얼차려」 수준이다. 그나마 불가능해진다면 수사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조폭들의 기를 꺾고 정신적으로 제압할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피의자 구타사망사건」 소식은 서울구치소에도 급속히 퍼져 검찰로 출정해 조사를 받는 피의자들의 진술태도도 바꿔 놓았다고 한다. 한 마약투약 혐의자는 上線(상선)을 불라고 추궁하자, 진술을 거부하면서 『어디 한번 때려 보라.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라며 되레 협박했다고 한다.
여파는 객관적인 수치에서도 나타났다. 서울지법과 서울지검에 따르면, 지난 11월1일부터 10일까지 경찰에서 올라온 것이 아닌 서울지검이 직접 청구한 영장(직수영장)은 32건으로 지난달 같은 기간 62건의 절반 수준이었다.
검사 수가 150여명으로 전국 검찰 중 가장 많은 서울지검이 일요일을 제외하고 8일간 청구한 영장은 하루 평균 4건에 불과했다. 적게는 2건, 하루 최고는 6건 이었다. 반면 10월 같은 기간 동안에 청구된 영장은 하루 평균 7건 이상으로 22건이 청구된 날도 있었다.
서울지검 직수영장의 80%를 차지하는 특수·강력·마약부 등 認知 수사부서의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폭력검사」의 오명을 뒤집어 쓴 洪검사는 어떤 인물인가. 洪검사는 대구 출신으로 대구 영남高를 졸업했다. 서울大 법대 84학번으로 1989년 31회 사범시험에 합격, 1992년 대전지검으로 초임 발령을 받았다. 1994년 대전지검 홍성지청, 1995년 대구지검, 1997년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을 거쳐 2000년 7월 서울지검에 入城했다.
서울지검 일선 검사와 일반 직원들의 洪검사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었으며,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서울지검의 한 수사관은 『洪검사의 별명이 「안 돼요」였다』고 말했다. 사건과 관련해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올 때마다 洪검사가 『안 돼요』라고 대답해 붙은 별명이라는 것이다.
마약부의 한 검사는 洪검사가 처리한 한 사건과 관련, 『여기 저기서 (청탁) 전화를 많이 받았을 사건인 것 같았는데 끝끝내 기소하더라. 기소 후 공판부에 맡길 줄 알았는데 바쁜 와중에 직접 재판까지 관여하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 싶었다』고 말했다.
洪검사와 대학 동기인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그에 대해 『검사로 임용된 지 10년 동안 외국 연수 1년을 빼고 9년을 꽉꽉 채워 野戰(야전)으로만 돌았다. 법무부 등에서 기획만 하는 검사 세 명이 한 일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일했다. 그런데 한 번의 실수로 저렇게 망가지다니 운명이 원망스럽다』고 아쉬워했다.
뛰어버린 전세값을 감당하지 못해 최근 서울 신림동의 27평짜리 전세 아파트에서 경기도 고양시 탄현지구로 이사했다는 얘기와, 출퇴근 시간을 아끼려고 한 달 중 절반 정도는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에 매달렸다는 얘기도 나왔다. 구속되는 洪검사의 모습을 TV로 지켜본 서울지검 인근 목욕탕의 직원은 『집에 안 들어가는 날이 많아서 새벽에 우리 집에 들르곤 했다. 열심히 일하다가 빚어진 일인데 안됐다』고 말했다.
조씨의 사인이 구타에 의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조용히 사그라들기는 했지만, 강력부를 거친 검사들을 중심으로 변호사 비용 등을 지원하기 위해 모금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시동기 29명이 공동변호인단을 구성, 무료변론을 자처했다.
의정부지청 강력부에 파견돼 洪검사와 1년간 근무했던 경기도 파주경찰서의 한 경찰관은 洪검사가 구속되기 직전인 11월4일 대검찰청을 찾아가 탄원서를 냈다.
<겨우 1년을 근무했으나 근무한 지 얼마 안 돼서 洪검사님을 존경하게 된 계기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근무 중 새벽 1~2시경에 전화해서 어디냐고 묻길래, 원당에서 안마시술소 업주를 상대로 폭력배 동향을 탐문수사한다고 하니, 직접 나와서 확인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형사가 일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려나 보다. 사람을 못 믿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밤에 집에도 안 들어가고 배당된 사건을 수사한다」고 미안해 하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한 번은 파견 1개월이 지난 후 수사비를 봉투에 넣어 주며 「10만원밖에 안 돼 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10만원이 들었다는 봉투를 건네 받을 때 참으로 씁쓸했습니다. 기름값도 안 돼 미안하다고 하는 말이 곧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검사님도 전세 아파트에 살면서 월급으로만 생활하는 월급쟁이에 불과했습니다. 1년간 그렇게 근무해 본 결과, 어떤 사람들에게도 청탁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느 날 폭력배를 검거하고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고 소주 한잔 하자며 직원들과 함께 청사 앞 갈비집에서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소주를 한 잔씩 마시며 대화 중에 출퇴근 때 들고 다니던 가방을 뒤적였습니다. 그런데 가방에서 국산 양주를 한병 꺼내는 것입니다. 하시는 말씀이 『단란주점은 갈 형편이 안 되니 이것으로 단란주점 양주 마시는 셈 치자』며 소주잔에 양주를 따라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밤새 몇날 며칠을 돌아다니며 수사하고 폭력배를 잡아 법정에 세우느라 정말 고생이 많다』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어느 검사님이 자기 출퇴근용 가방에 식당주인 몰래 양주를 가져와서 검사의 체면을 무릅쓰고 수사관들을 위로해 주겠습니까.
▲수년간 쌓아 올린 눈물겨운 봉사를 한순간의 지휘책임을 물어 가차없이 내친다면 누가 정의로운 검사가 되려고 하겠습니까. 아무리 유능한 지휘관이라도 사람이 사람을 통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진급이나 개인의 영달을 위해 수사를 했던 검사로 제 눈에 비쳤다면 제가 감히 이런 글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한번의 실수가 있을진대 사회나 조직이 그 한 번의 실수의 代價로 인생을 담보로 원한다면 아무도 이 세상에서 떳떳이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제 넘지만 이렇게 탄원을 드립니다. 대검찰청 총장님 귀하>
그렇지만 洪검사의 지나친 집념과 외곬 성격이 비극을 자초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한 검찰 간부는 『의욕이 지나쳐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까 늘 조마조마했다』고 말했다. 또다른 간부는 『성격이 직선적이고 독단적이라 인화에 문제가 있었다』는 평도 내놨다.
洪검사가 강력부에 있다가 2001년 7월 형사부로 자리를 옮긴 것도 사사건건 상사와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2002년 8월 당시 魯相均(노상균) 강력부장이 취임하면서 洪검사가 다시 강력부로 돌아왔을 때 일부 간부들이 『인화에 문제가 있다』며 반대했다는 후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