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개를 기르는 사람들 이야기 - 月刊朝鮮 인터넷 사이트 응모 당선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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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注] 月刊朝鮮은 작년에 인터넷 月刊朝鮮(http://monthly.chosun.com)을 통해 개와 관련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받았다. 총 99편의 글이 올려졌고 月刊朝鮮은 이 가운데 11편의 글을 엄선해 싣는다. 게재된 글은 문법에 맞게 약간의 수정을 거쳤고 내용이 중복되거나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는 부분은 요약하거나 생략했다. 사진 속의 개는 글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을 밝혀둔다.
당뇨병 앓던 「가람이」를 떠나보내고
 
  반영학
 
 
  우리 집에서는 애완용으로 개 한 마리(요크셔테리어)를 길렀다. 성은 견(犬), 이름은 「가람」, 그러니까 「견가람」이다.
 
  가람이는 세상에 태어난 지 7년, 우리집에 온 지 5년째이던 2001년 6월16일, 당뇨병으로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가람이가 세상을 떠난 날은 아내도 울고, 두 딸들도 울었다. 너무너무 불쌍하다는 것이었다. 애완용 개 한 마리의 죽음을 놓고 이렇게 가족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의 사치라고 나무랐지만 나도 가슴이 찡 해오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가람이의 주검을 아파트 베란다에 안치(?)해 놓은 후에도 가족들은 밤 늦게까지 가람이 곁을 떠나지 못하였다. 다음날 죽은 가람이를 아파트 인근 양지 바른 곳에 묻겠다는 가족들의 의견을 묵살한 채 어느 야산의 양지 바른 곳에 고이 묻어 주었다. 좋은 집안에서 호강하며 살지 못하고, 구박을 받는 등 고생이 많았다고 명복을 빌면서….
 
  우리 집은 삶의 전성기를 다 보낸 나와 아내, 그리고 세 아이 중 출가한 둘을 제외한 나머지 딸, 이렇게 세 식구가 지내다 보니 자연히 가정 분위기가 늘 적요했고 대화는 풍성하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가람이가 새 식구로 들어온 후로는 가람이는 말 그대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가람이는 3.5kg으로 비만인 편이었다. 그러나 애교스런 작은 체구에다 동그란 눈망울이 아름다워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어쩌다 외출이라도 하는 날이면 이웃의 사랑까지도 독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가람이는 겁이 많고 스트레스에 약한 편이었다. 지난해 4월 말 우리 부부는 열흘 간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딸아이가 아침에 출근하여 밤 늦게 퇴근할 때까지 가람이는 그 적막한 집을 혼자 지켜야 했다. 가람이가 두려움과 외로움에 얼마나 떨었을까 생각하니 참으로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족들이 잠시만 집을 비워도 그에 대한 반발 심리의 표현으로 아무 데나 실례를 해놓던 가람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부부가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부터 가람이는 우리 가족들에 대한 애정 표현이 더욱 강렬해졌고 식욕도 왕성했다.
 
  그런 가람이가 죽기 한 달 전부터는 왠지 의기소침해지고 체중이 3kg으로 떨어지는 등 좋지 않은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는 가람이가 비만이라 체중을 떨어뜨리기 위해 최근 절식을 시킨 것이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라며 좋아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죽기 얼마 전부터는 물을 한없이 먹어 혹시나 사람이 앓는 당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가람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을 찾았고, 수의사의 지시에 따라 무려 40가지에 달하는 종합검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당뇨와 그로 인한 합병증이 왔다며 수의사는 입원 치료를 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 가족은 이틀 동안에 걸친 고민과 갈등 끝에 이별을 고하기로 결심했다.
 
  집사람과 딸이 고뇌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수의사가 우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가람이는 결코 주인을 잘못 만난 것이 아닙니다. 가람이에게 40가지의 검사를 해주고 하루 동안 입원시키며 링거 주사를 맞춰 주는 정성스런 주인을 둔 가람이는 결코 불행한 개가 아니예요』
 
  가람이를 보내고 나서 아직도 집사람은 밖에 나갔다 돌아올 때 가람이가 반기는 모습을 영원히 볼 수 없다며 애처로워한다. 때때로 아내가 『가람아! 가람아!』 하며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한낱 애완견이 우리 가족들에게 끼친 영향이 이리 깊고 애잔한 것인지, 情이란 것이 사람과 동물 간에 맺어진 것일지라도 그렇게 깊이를 간직할 수 있는 것인지 놀랄 때가 있다.
 
 
  「짱구」의 눈물
 
  박민서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 식구들, 특히 어머니는 동물을 좋아해서 여러 동물들을 키웠다. 개를 한꺼번에 세 마리나 키운 적도 있고, 고양이, 새, 다람쥐도 키웠다. 여러 동물들 가운데 가장 추억에 남는 동물은 역시 개이다.
 
  개의 이름은 「짱구」였고, 고양이의 이름은 「나비」였다. 짱구가 우리 집에 온 것은 갓 태어나 겨우 눈을 떴을 때였다. 어머니께서 아는 사람의 집에서 얻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짱구는 우유를 줘도 먹지 않고, 밥을 끓여 줘도 먹지 않았다. 『이러다가 괜한 강아지만 죽이겠다』 하시며 어머니는 강아지 얻어온 것을 후회하셨다. 이틀이 지나도록 짱구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정말 그러다가 그냥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죽어가던 짱구를 살린 것은 나였다. 그 때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핫도그를 좋아했다. 용돈만 생기면 핫도그를 사 먹곤 했었는데 그날도 핫도그를 하나 손에 들고 학교에서 돌아왔다. 나는 그 먹고 싶고 아까운 핫도그를 짱구에게 조금 떼어 주었다. 그러나 짱구는 역시 먹지 않았다.
 
  나는 핫도그 속에 있는 가장 맛있는 부분인 소시지를 입으로 곱게 씹어 짱구에게 주었다. 개는 고기를 좋아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짱구는 눈을 꼭 감은 채 혀를 할짝대면서 먹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신기하고 대견하던지 아직도 그 때의 기분이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그 핫도그에 있는 소시지 대부분을 짱구를 줬다. 배가 고팠던지 짱구는 잘 먹었다. 그리곤 쪼그려 앉은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 들어와 곤하게 잠을 자는 것이었다. 나는 짱구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리가 저리도록 한동안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런 깊은 정을 맺어서인지 짱구는 식구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머리도 영리해서 우리 집 식구들이 귀가할 때는 대문 밖 20m 정도부터 알아차리고 좋아서 펄쩍펄쩍 뛰면서 짖기 시작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고마움에 감격해 하는 그 표정이란.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우리 식구와 짱구는 인간끼리 이상의 애정을 서로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짱구는 우리 식구들에게 혼이 날 사고를 치고 말았다. 짱구는 조금 자라자 이빨이 근질거렸는지 하룻밤 사이에 댓돌에 벗어놓은 신발 세 켤레를 물어뜯었던 것이다. 졸지에 신발을 잃게 된 신발 주인들은 물론이고, 온 식구들이 저마다 돌아가며 짱구를 때리려고 했다.
 
  그런데 차마 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짱구의 앙증맞은 행동이었다. 짱구는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아는지 두 귀를 아래로 착 붙이고 꼬리를 뒷다리 사이로 말아 넣고는 낮은 자세를 취했다. 그래도 식구들의 『왜 이랬어?』 하는 엄포가 계속되면 짱구는 낑낑거리며 뒤로 발랑 누운 채 갖은 아양을 떠는 것이었다. 때론 자신의 몸에 매섭게 떨어질지도 모르는 치켜든 손을 핥아가면서. 욕을 먹고 맞아가면서도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동물, 그것이 개다. 짱구는 그랬다.
 
  10여 년을 같이 살던 짱구가 우리 곁을 떠나게 되었다. 「짐승을 너무 오래 키우면 좋지 않다」는 어른들의 의견 때문이었다. 여동생과 누나들은 울기까지 했다. 짱구도 헤어지는 것을 아는지 눈물을 흘리며 개장수에게 억지로 끌려갔다. 눈 양쪽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 털이 다 젖었다. 기르던 짐승과 헤어지는 그 때의 아픔이 너무 커서인지 그 때부터 우리 집은 동물을 기르지 않는다.
 
 
  「까미」와의 눈 맞춤
 
  소시민
 
 
  까미는 아홉 살 난 수캐이다. 어릴 땐 몸 전체가 칠흑같이 검더니 요즘엔 많이 퇴색하여 흰털이 꽤 많아진, 앞다리가 길쭉하고 튼실한 오리사냥용 검정 푸들이다.
 
  우리 식구가 된 지도 어느새 일곱 해가 넘었다. 이젠 나이가 들어 어디에고 앳된 티는 찾아볼 수 없지만, 검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예전 그대로여서 총명한 인상은 여전하기만 하다. 녀석에게 변하지 않은 것이 또 있다. 아무 때나 짖지 않고 사람을 잘 따르는 점인데, 그래서 과묵하고 점잖다는 말을 듣는다.
 
  까미는 웬만한 말귀는 알아듣는다. 녀석이 침 범벅을 만들어 놓은 곰 인형을 가족 누구라도 가져오라고 시키면 온 집안을 다 뒤져서라도 기어이 물고 오곤 한다. 그리고 「산책」, 「여행」 또는 「고기」 등 녀석이 좋아하는 말을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귀를 쫑긋 세우는 등 매우 진지한 표정을 짓곤 한다. 곧 말귀를 알아듣기에 하는 모양일 게다. 녀석이 처음 왔을 때 나는 주로 말로 교육을 했다.
 
  『인기척이 나면 짖어라, 변기의 물은 먹지 말아라, 아무 데나 실례하지 말아라, 식탁 위에 올라가지 말아라』 등이 그 내용인데, 일방적인 명령 탓이었던지 학습효과는 거의 없었다. 방법을 바꿔 동작을 가르치고 따라하게 하는 실습 위주로 가르쳐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특기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내 눈을 녀석의 눈에 고정시키고 반갑다는 뜻으로 깜박거렸더니 따라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해보았더니 또 따라했다.
 
  나는 가족들에게 까미가 윙크를 할 줄 안다고 공표했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증거를 원했다. 온 가족이 보는 앞에서 녀석은 능청스럽게 實演(실연)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까미는 바깥출입을 매우 좋아한다. 내가 외출하려고 하면 녀석은 어느새 내 곁에 바싹 다가와 먼저 바지의 냄새를 맡는다. 출근이나 교회에 가는 「공식 외출」인지 그저 산책이나 운동하러 가는 「非공식 외출」인지를 간파하기 위한 행동이다.
 
  차에 태우면 녀석의 고정석은 내 뒷자리이다. 거기서 녀석은 차창으로 얼굴을 내놓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바람에 날리는 큰 귀와 조붓한 얼굴은 힘차게 나부끼는 무슨 깃발인 듯하여 미소를 짓게 하고, 주변 차에 타고 있는 승객들과도 마음을 여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여 나와 남의 여행길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까미는 내 영혼의 거울이다. 딸애가 어디서 들었는지 『동물은 사람 눈을 보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람에게는 죄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처음에 나는 까미의 눈을 한 번도 마주 보지 못했다. 아마 녀석이 피했던가 보다.
 
  그런데 요즘은 자주 눈이 마주친다. 서로 뚫어져라 눈싸움을 하기도 한다. 나의 영혼이 그만큼 정결해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녀석의 눈을 마주보기 위한 노력은 늘 염두에 두고 행해왔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함께 있을 때면 어디라도 살을 대고 있어야만 안도의 긴 숨을 내 쉬는 녀석은, 나의 삶에 동행하며 오늘은 또 어떤 삶을 영위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참으로 귀한 내 영혼의 교사가 되었다. 어언 개로서는 노년에 접어들어 기력은 전만 못하고 치아도 흠이 갔지만, 나의 가장 살가운 친구가 되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괴짜 犬公
 
  최형종
 
 
  나는 어렸을 때 이웃집 사냥개 포인터에 물린 후 개를 몹시 무서워하였다. 그런 내가 지금은 수의사가 되어 개를 많이 접하게 된 것을 보면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낄 때도 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내려온 부산 할아버님 댁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가 있었는데 누군가가 고양이하고 같이 키우라며 강아지 한 마리를 가져다 주어 마지못해 개를 키우게 되었다. 나는 고양이도 개도 다 싫었지만 할머니가 고양이와 개를 「나비야, 진이야」 하며 거두어 먹이길래 그냥 길렀다.
 
  할머니는 강아지를 「진」이라고 불렀으나 내가 수염이 멋있다고 이름을 「수염털」이라고 부르자 이웃 모두가 수염털로 부르게 되었다. 수염털은 잡종 누렁이로 별로 크지가 않아 기른 지 6개월이 넘어도 6㎏ 정도밖에 나가지 않는 작은 개였다. 나는 개를 고양이와 함께 기르면서 둘 다 묶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키웠는데 그 자유로운 활동이 수염털로 하여금 특이한 습성을 가지게 하였다.
 
  나는 전에 용변을 항상 수세식 변기에 보고 이빨로 변기 줄을 잡아당겨 자기가 본 용변이 물로 세척되게 하고 밑을 걸레에 닦아대는 습관을 가진 치와와를 본 적이 있는데 수염털은 이보다 더 특이한 개였다.
 
  수염털도 용변은 반드시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하였다. 그 당시 내가 살던 집은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그래서 수염털은 집의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고 대변은 꾹 참고 있다가 매일 아침 대문을 열어 주면 벼락같이 뛰어나갔다. 큰길가 하수도 맨홀 틈새로 정조준(?)하여 볼일을 본 것이다. 수염털은 자신의 분비물을 하수도에 흘러가게 하였고 소변은 집안 수챗구멍 앞에서 보아 허드렛물에 씻겨 나가게 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대변을 보고 집에 와서는 슬그머니 고양이 옆에 붙어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로 밑을 닦아대기 일쑤였고, 고양이가 높은 곳으로 피해 버리면 마루에 있는 걸레를 슬쩍 물어다가 걸레에 밑을 닦곤 했다.
 
  수염털은 또한 「거지 개」였고 「도둑 개」였다. 녀석은 푸줏간 주인과 갈비식당 주인 말에 의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거의 매일같이 아침에는 푸줏간으로 출근하였다. 녀석은 푸줏간 앞에 떡 버티고 앉아서 고기 부스러기를 던져 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다 주인이 고기 부스러기를 던져 주면 고개를 까딱하고 눈은 사람을 흘깃 쳐다보면서 발로 고기 부스러기를 끌어당겨 입에 문 다음에는 슬금슬금 자리를 뜬다는 것이다. 저녁에는 갈비집 앞에 앉아 있다가 손님이 먹다 버린 갈비를 던져 주면 고맙게 물고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수염털의 가장 특이한 습관은 일요일이면 반드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오는 점이었다. 그 당시 나는 감리교회에 다녔는데 「주일」을 자주 어기는 엉터리 신자였다. 그러나 수염털은 주인과는 다르게 개성 있게 장로교회를 다녔다.
 
  하루는 우리 집에 자주 출입하시던 어른께서 말씀하시기를 『저 수염털 참 이상한 놈이야』 하시길래, 『왜요?』라고 하였더니 『저 놈이 주일마다 우리 교회에 나와. 아주 열심이야』 하셨다. 그 어른 말씀에 의하면 수염털은 우리 집 근처에 있는 교회를 마다하고 자기가 다니는 장로교회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요일 낮 예배에 꼭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예배가 시작되면 교회 층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신자들이 『아멘』 하면 따라서 『멍멍』 짖기도 하고 예배가 끝나면 만족한 듯이 층계에서 일어나 꼬리를 흔들며 교회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당시 교회에서는 주일마다 종을 쳤는데 아마 그 교회 종소리가 특별나서 수염털을 교회로 부른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러나 수염털도 주일 낮예배만 보았지 새벽 기도회나 수요 예배, 금요 예배에 다니지는 않았으니(종소리가 없으니) 아주 열성적인 신심은 아닌 듯하였다.
 
  「수세식 용변」을 보고 갈비식당에 출근하고 동네 개들과 열심히 사교활동을 하고 예배당에 부지런히 다니던 수염털도 결국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수염털 나이 20개월쯤 되었던 어느 겨울 아침 이놈은 밖에 나가 용변 보고 무엇을 먹었는지 몹시 흥분하고 괴로워하면서 마루 밑에 들어가 나오지를 않았다.
 
  밖에 나가 쥐약이 묻은 음식물을 먹은 모양이었다.
 
  나는 곧 가축병원에서 해독제를 얻어다 주사했으나 결국 죽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이 『아, 자네가 수의사면서 자기 개를 못 고쳐?』 하는 바람에 창피하였으나, 속으로는 「뭐 어때. 학교 다닐 때 보니까 수의학 박사인 세균학 교수도 자기 집 강아지가 연탄가스에 중독되니 가축병원 달려가고, 의학 박사인 의역사학 교수도 맹장 수술 하나 못 하던데…」 하며 자위하였다.
 
 
  끝내 지켜 주지 못했던 나의 「누렁이」
 
  김종성
 
 
  내가 어렸을 때는 보릿고개가 있었고, 대개는 못 먹어서 얼굴이 누렇게 떠있던 시절이었다.
 
  충남 온양온천에서 30여 리를 더 들어간 시골에서 국민학교(그땐 그렇게 불렀다) 4학년쯤에 다닐 때였다.
 
  우리 집에는 「누렁이」라고 이름 지어 준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누렁이가 보통 다른 개들보다 무척 영리하고 몸집도 컸다. 동네 개들 중에서 대장노릇을 하였으며, 내가 멀리서도 휘파람을 불면 아무리 제 동료들끼리 놀다가도 어김없이 달려왔다.
 
  누렁이는 「잡종」 수준에서는 무척 영리한 개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누렁이를 찾으니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예감에 냇가로 갔더니 아뿔싸, 거기에 우리 누렁이가 있고, 어떤 아저씨가 지게 막대를 이용해 누렁이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누렁아』 하고 소리쳤다. 목이 조여오는 순간에도 누렁이는 나를 보고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정신 없이 뛰어가 개 목을 조르던 동네 아저씨의 손에서 우리 누렁이 줄을 잡아 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 보니, 「국민학교」 선생님들께서 잡수시겠다고 하여 그리되었다고 하신다. 나는 무척 화가 나 있었고 그때까지 천진하기만 하여 선생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로(위인전에 나온 사람 외에) 알았던 것을 후회하였다.
 
  시골 학교라서 선생님도 몇 분 안 되었지만 교장선생님 이하 모든 선생님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 선생님은 화장실도 안 가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날 온종일 누렁이의 목을 주물러 주며 너를 지켜 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하룻밤이 지나 다음날 어머니에게 단단히 약속을 받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득 안은 채 등교를 하였다.
 
  시간은 왜 그리 안 가는지…. 공부를 어떻게 하였는지도 모르고 수업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죽어라 하고 달려갔다
 
  『누렁아』 『누렁아』
 
  그러나 어디서도 누렁이는 달려나오지 않았다. 냇가로 달렸다.
 
  『아! 누렁아』
 
  누렁이는 벌써 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혀를 내밀고 죽어 있었다. 어머니도 밉고, 특히 선생님들이 더 미웠다. 꼬리를 흔들던 누렁이의 모습이 떠오르고, 또 죽어가며 나를 기다렸을 누렁이를 생각하며 무척이나 울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여러 날을 우울하게 보냈으며, 성인이 될 때까지(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 초창기) 보신탕을 안 먹었다. 보신탕을 앞에 두면 꼬리를 흔들던 누렁이의 모습이 생각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는데, 직장생활에서는 상사의 위압에 어쩔 수 없이 입에 대게 되었다.
 
  군대에서도 버텼는데 사회에서는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인지 내가 진 것이다.
 
  지금도 내가 먼저 보신탕을 찾지는 않지만 가끔 어쩔 수 없을 경우에는 음식으로 생각하고 먹는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많이 퇴색되었지만, 아직도 가끔은 그때 그 누렁이가 생각나는 걸 보면 나에게는 무척이나 인상 깊었던 일이었나 보다.
 
 
  「헌 참고서」때문에 「니마」를 잃다
 
  정용만
 
 
  중학교 1학년 때였던 1971년 무렵에는 아침마다 파자마 바람에 러닝셔츠 차림의 아저씨들이 큰 개 한 마리를 끼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자주 보곤 했다. 그때는 그게 아마 상당한 富의 상징이었으며 나름대로 엄청난 멋을 자랑하는 것이었나 보다.
 
  멋이라면 빠지지 않으시는 아버지께서 그즈음 셰퍼드 한 마리를 사오셨다. 족보도 있었던 그 개의 이름은 「니마」였다.
 
  처음엔 나도 예뻐했고 니마도 나를 잘 따랐다. 그러나 불행은 일찌감치 찾아왔다. 당시 대부분이 어렵게 살았던 것처럼 어려운 살림의 우리 집도 참고서 한 권 마음대로 살 형편이 아니었다. 아버지께서는 『옛날에는 교과서도 없이 공부해도 1등을 했는데 무슨 참고서냐』고 해서 나는 선배들이 쓰던 헌 참고서로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니마」의 훈련비용으로 아버지께서 참고서 30권 값을 지불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니마를 내 인생의 主敵(주적)으로 간주하여 아버지가 안 계시면 엄청난 구타를 하곤 했다. 아마 내가 개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을 했나 보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니마는 나를 보면 피하게 되었고 나와 니마가 마주치게 되면 무차별 구타가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께 기초영문법 한 권 사게 1000원만 달라고 했다가 엄청나게 혼이 났다.
 
  나는 너무도 분하고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식이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당시에는 고등학교를 시험쳐서 들어가던 시절인데 너무 한다 싶어서 집을 나가기로 했다. 짐을 싸고 나가다 나는 니마와 마주쳤고 니마는 내가 또 때릴까 봐 으르렁 대면서 겁을 먹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나는 구타를 시작했고 개집 안으로 도망간 니마를 개집까지 부순 뒤 몽둥이로 패고 거의 기절할 때까지 또 패고 집을 나왔다. 나는 어머니와 둘이 사는 우리 반 반장 집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며칠 후 어머니가 책을 사줄 테니 오라고 해서 못 이기는 척하고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니마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누워 계시다가 『참고서가 얼마냐』 하시면서 처음으로 내게 약한 모습을 보이셨다. 그래서 내가 『니마는 어디 갔느냐』고 여쭤 보았더니 아버지께서는 『보신탕집에 팔았다』고 하셨다.
 
  니마는 내게 맞아서 뒷다리가 부러졌고 더 이상 아버지와 멋있는 폼으로 함께 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아버지는 내가 그 개를 패서 그리됐다는 말에 충격이 크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30년 전 그 개의 이름을 잊지 못한다. 사춘기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말 못 하는 개에게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대신 했다는 미안함이 항상 내 맘속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는 니마에 대한 죄스러움을 지울 수 없다. 니마, 정말 미안하다.
 
 
  개장수의 철망 속으로 사라진 「동근이」와 나의 幼年
 
  홍형근
 
 
  「동근이」는 정말이지 덩치가 대단한 친구였다.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동근이만 있으면 무서운 게 없었다. 물론 동근이는 고모님께서 일하시던 병원에서 마당을 지키던 아주 무시무시한 개가 낳은 새끼 강아지였다.
 
  난 그 조그만 강아지가 그렇게 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동근이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드리자, 아버지께선 내 동생이니까 돌림자 근을 붙여 동근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하셨다. 동근이란 이름은 1대 동근이로부터 지금 우리 집에 함께 있는 작은 「미니핀」에게도 붙여진다.
 
  젖을 뗀 후부터 우리 집 조그만 마당을 차지한 동근이는 갈색 털을 가진 나만의 친구였다. 학교 파할 때면 조바심부터 났다. 어떻게든 집에 빨리 가려고 했던 것 같다. 집에 도착하면 동근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목줄을 풀어달라고 했다. 우리는 집 뒤에 있는 아파트 공사장으로 달려갔다. 공사가 중단되어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건물이었다. 어떤 유치한 장난을 해도 동근이는 나만의 유일한 충성스런 심복이었다.
 
  그런 동근이에게 아버지 몰래 소시지 하나씩 입에 물려 주곤 했다. 개 입맛은 개다워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께선 정말이지 동근이에겐 밥다운 밥을 주시지 않으셨다. 용돈이 없던 그때, 반찬으로 나온 소시지며 햄 종류를 마구 모아두었던 기억이 난다. 또 우리 집 바로 앞에서 분식집을 하던 친구네 가게에서 튀김 부스러기며 팔다 남은 식어버린 순대를 얻어 밤이 되기만을 기다린 적도 있다.
 
  밤이면 나는 내 방문을 슬며시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이때 동근이는 여느 때처럼 반갑다고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 동근이와 나는 비밀스런 눈빛을 주고받으며 마당에서 낮 동안에 있었던 내 노력의 성과들을 함께 먹기도 했다. 밥을 많이 먹던 동근이가 처음엔 조그만 그릇을 사용하다가 결국 세숫대야를 차지하고 말았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내 키보다 훌쩍 커버린 동근이를 볼 수 있었다. 밤엔 동근이의 목줄을 풀고 함께 있는 게 참 좋았다. 그땐 나는 집에서 잘못을 하면 항상 발가벗겨져 길거리로 쫓겨나곤 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나는 일이다. 발가벗겨져 길거리에 나가면 우리 집 커다란 철문이 그렇게도 서러웠다. 그럴 때면 철문 안으로 『동근아!』 하고 불러 보았다. 어김없이 내 친구 동근이는 엄마가 내려 주신 벌을 같이 받아 주곤 했다. 비를 맞으며 그렇게 우린 「쓱」 하고 웃기도 했다. 지금도 개를 한 식구로 생각하면서 느끼는 건데 개는 사람의 성격변화에 무척이나 빠르게 반응한다. 정말이지 감탄할 때가 많다.
 
  한때는 동근이가 며칠씩 집에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다. 이미 많이 커버렸고 집에서도 귀염을 받지 못하던 동근이는 한 달씩 들어오지 않은 적도 있어 내 속을 태웠다. 너무 더웠던 여름날 끼익, 하고 철문을 머리로 밀치며 들어온 동근이는 그때도 웃었던 것 같다. 나는 너무나 괘씸한 나머지 나보다 덩치가 큰 친구를 막 때렸다. 그때 동근이의 웃는 듯한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초등학생이 걸어가도 몇 분 걸리지 않았다. 동근이가 무척이나 나이가 먹었을 무렵 난 학교가 파하면 집으로 곧장 오지 않고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에 있는 큰아버지 댁에 거의 매일같이 들렀다가 밤이 돼서야 집에 오곤 했다. 큰아버지 댁에선 유선방송이 나왔던 것이다. 그땐 친구들이랑 그렇게 비디오 보는 게 좋아서 동근이랑 차츰 멀어져 갔다.
 
  집에 일찍 들어오는 날도 개집이 비어 있으면 또 나갔나 보다 했지만 그게 다였다. 어느 날 이상하게도 그냥 동근이 걱정이 되어서 집으로 마구 뛰어갔다. 동근이는 없었다. 며칠 계속 움직이지 않고 자기 집에 누워 있던 동근이는 그 시절 흔하디 흔한 개장수의 자전거에 실려 가버렸던 것이다.
 
  물론 내가 조금이나마 눈치를 챘어야 했지만 난 너무 어렸다. 아버지 어머니의 그런 은밀한 눈빛을 미리 알았더라면 동근이와 가출이라도 했을 텐데…. 동근이가 팔려간 날 나는 슬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같이 할 시간이 있었으면 예전처럼 공사장이며 시장통을 쏘다니며 재미있게 놀았을 텐데…. 이젠 하루 200원씩 용돈 받는 걸로 맛있는 것도 사 줄 수가 있었을 텐데.
 
  어머니께선 지금도 그때 동근이가 가던 날 이야기를 자주 하신다. 개는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듯 며칠 동안 밥도 먹지 않고 개장수가 와도 짖지 않고 조용히 자전거에 올랐단다. 내가 집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 동근이는 떠났고 난 동근이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자전거 뒷자리에 얹힌 철망 안에 갇혀 그렇게 가버리던 날, 내 幼年(유년)의 한 시절도 갇혀버린 것 같다. 지금 내 무릎에 앉아 자는 또 다른 「동근이」와 놀이터에라도 가야겠다. 아파트에 맞게끔 아주 「소형화」된 지금의 동근이는 겁이 많고 별나서 사람 무서워하고 밖에 나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래서 나는 더욱 더 나를 친구같이 여기던 우리 집 앞마당의 누런 동근이를 생각하곤 한다. 그 옛날 나를 위해 함께 있어 주었던 동근이에게 마지막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을 보상할 수만 있다면….
 
 
  「링」의 세 차례 死鬪
 
  김병규
 
 
  녀석의 이름은 「링」이었다. 복서들이 혈투를 벌이는 바로 그 사각의 「링」을 의미하는 이름이었다. 녀석은 이름 그대로 사납고 전투적이었으며 無敵(무적)이었다. 그의 고향은 전남 진도였으며,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니까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에 우리 집과 인연을 맺었다. 그 녀석이 우리 집에 오게 된 경위는 이렇다.
 
  아버님이 장교이셨는데 고향이 진도인 부하 사병 한 사람이 휴가를 갔다오면서 선물로 가져온 것이었다. 그 당시에 진돗개는 반출이 금지되었기에 녀석은 술에 곯아떨어져 조그만 손가방 속에 담겨져 우리 집으로 왔다. 녀석은 온 가족의 사랑 속에 무럭무럭 성장해 갔다. 커갈수록 녀석은 진돗개의 위용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쫑긋한 귀와 삼각형의 까만 눈, 떡 벌어진 가슴, 그리고 누런 황금빛 털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그때 우리집 뒤에는 무척이나 넓은 파밭이 있었는데 그 밭의 주인은 동네에서 「늑대영감」이라 불렸다. 그 파밭의 도둑을 지키기 위해 정말 늑대같이 크고 사나운 셰퍼드를 키우고 있었기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어느 날 아침 산책길에 우연히 링과 그 셰퍼드가 마주치는 일이 생겼다. 덩치가 링보다 거의 두 배가 넘어 보였다. 늑대 영감의 입가에는 조롱이 담긴 미소가 슬며시 번져갔다. 두 녀석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짖어댔다. 주변 사람들도 박수를 치며 두 녀석의 싸움을 부추겼다.
 
  물러날 여지는 없었다. 나와 늑대영감은 서로의 묶고 있던 목줄을 풀어 주었고, 싸움은 의외로 싱겁게 끝이 났다. 링이 셰퍼드의 코를 일격에 물어버린 것이다. 나와 사람들이 달려들어 두 개를 떼어냄으로써 싸움은 일단락되었다. 늑대영감은 붉으락푸르락 안색이 변했고 분을 참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일 이후로 늑대영감과 그 개는 아침 산책길에서는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녀석의 그 사나움과 배타성이 우리 가족과 이별을 앞당길 줄이야…. 사건이 터진 것은 녀석이 우리 집에 온 이듬해 여름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동사무소 직원이 公務(공무)로 집을 방문했는데 그때 아마도 대문이 열려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직원은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고 당연히 링은 그 직원을 향해 달려들며 사납게 짖어댔다. 식구들이 나가 볼 틈도 없이 순간적으로 녀석을 묶고 있었던 줄이 끊어져버린 것이다. 그 직원과 링은 뒤엉켰고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우리는 그 광경을 보고 너무 놀랐고 내가 녀석의 배를 걷어차서야 겨우 떼놓을 수 있었다. 동사무소 직원의 모습은 처참했다. 양복은 군데군데 찢어졌고 다리와 손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식구들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양복값과 치료비를 배상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을 끌고 인근 가축병원으로 가서 광견병 검사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었다.
 
  퇴근 후에 이 사실을 아신 아버지께서는 대단히 분노하셨고 이를 빌미로 우리 형제들 몰래 녀석을 팔아버리기로 하셨던 모양이다. 그 일이 있고 사나흘쯤 지나서,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당연히 꼬리치며 나를 맞았을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주인 잃은 녀석의 쓸쓸한 빈 집만이 나를 반겨 주고 있었다. 우리 형제들은 울며불며 녀석을 찾았지만 어머니께서는 녀석이 집을 나가버렸다고만 하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녀석을 개장수에게 팔아버린 것이었다. 그날 나는 밥도 먹지 않고 녀석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녀석은 이틀 만에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날 내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골목어귀에 낯익은 개 한 마리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설마 하는 마음으로 『링』 하고 나지막하게 불러보았다. 녀석의 귀가 쫑긋하더니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달려왔다. 녀석과 나는 뜨겁게 포옹했다. 지금도 나는 내 품에 달려들던 녀석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녀석의 목 언저리에는 핏자국이 엉겨 있었다. 아마도 필사의 탈출을 위한 몸부림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할 수 없이 다음날 찾아온 개장수에게 개값을 되돌려 주었고, 개장수는 한 마디를 남기고 갔다.
 
  『도대체 어떻게 그 목줄을 풀고 도망을 갔는지 모르겠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녀석은 무려 20km가 넘는 길을 되짚어 왔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녀석은 다시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녀석이 죽고 나서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 개를 키우지 않는다. 개와의 情을 끊기가 너무 힘들다는 경험을 했기 때문일까?
 
 
  쥐를 잡다 코를 물린 진돗개「제동이」
 
  윤성욱
 
 
  우리 집에는 이제 3년 정도 된 아주 당돌한 녀석(?) 「제동이」라는 암컷 진돗개가 있다. 우리 집은 길가에 자리잡고 있는데 근처 사시는 분들은 거의 개를 도둑맞은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 집만은 아직까지 그런 일이 없다.
 
  제동이는 우리 집 차 엔진 소리까지 알고 있다. 내가 생각해 봐도 너무나 신기하고, 예쁘기만 하다. 물론 사람은 당연히 알아본다.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오시는 작은아버지도 알아볼 정도다.
 
  우리 집은 단독주택인데 예전에는 꽃밭에 쥐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쥐를 볼 수가 없다. 가끔 새벽에 나가서 보면 제동이는 꽃밭만 계속 주시하곤 한다. 내가 나가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집중력과 순발력이 매우 강하다. 가끔씩 참새도 잡곤 하는데 베란다에 있다가 꽃밭에 새가 앉으면 아래로 뛰어내리면서 앞발로 때린 후에 입으로….
 
  그런데 얼마 전에 이 녀석에게 황당한 일이 생겼다. 제동이가 쥐를 잡다가 그만 쥐에게 코를 물려버린 것이다. 일단 잡기는 잡았는데 코부분이 완전히 뜯겨 나간 것이다. 그래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일단은 약을 발라 주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계속 혀로 핥아서 나중에는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동네 창피하게(?) 진돗개가 쥐를 잡다가 쥐에게 코를 물려 코피가 났다면 과연 누가 믿어 줄까. 이제는 어디 가서 말도 할 수 없다. 우리 제동이가 쥐를 잘 잡는다고 말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이 녀석은 갈비뼈가 부러졌다. 갑자기 일주일 정도 들어오지 않아서 우리 식구가 많이 걱정했다. 개이긴 하지만 이젠 우리 식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 식구 특히 부모님께서는 잠도 못 주무시고 매일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셨다. 그러기를 일주일. 우리 식구들은 제동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새벽에 누군가가 대문을 긁는 소리가 났다. 우리 식구는 모두 밖에 나갔는데 제동이가 그만…. 발을 절뚝거리고 갈비뼈가 부러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온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금세 눈물을 글썽글썽하셨다. 우리 제동이도 너무 힘이 들었는지 쓰러지고 말았다.
 
  제동이는 분명 개다. 하지만 우리 식구는 제동이를 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녀석도 분명 우리 집안 식구이자 부모님과 나의 친구이다. 제동이가 우리 집에서 아주 오래오래 같이 잘 지냈으면 좋겠다.
 
 
  수캐 「만석이」의 애틋한 사랑
 
  도영화
 
 
  「도만석」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키우던 발발이의 이름이다. 만석이는 1990년 봄 우리 집이 대구에서 세차장을 막 시작했을 때 막내삼촌이 가져다 준 수컷 강아지였는데, 흰색 바탕의 갈색 점박이로 특히 눈이 맑았다. 영리하고 아버지와 식구들을 잘 따라 세차장의 마스코트 역할을 했다.
 
  그런 만석이를 아버지는 특히 좋아해서 사람들을 만나면 자식이 2남1녀라고 말을 했고, 그 중 한 녀석이 이놈이라면서 만석이를 가리키면 사람들이 많이 웃곤 했다.
 
  그러던 만석이가 1991년 봄 어느 날, 갑자기 세차장을 나가 일주일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오후께, 일을 하고 있는데 만석이가 조금 푸석해진 얼굴과 슬픈 표정을 한 채 터벅터벅 걸으며 세차장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만석이를 아버지는 다시 나갈까 봐 세차장 마당에 있는 쇠기둥에 묶어두고는 참치며 고기 같은 것을 밥그릇에 담아 주었는데, 평소 같으면 꼬리를 치며 정신없이 먹을 녀석이 힐끗 쳐다보기만 하고는 땅바닥에 힘없이 엎드려서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옆에서 일을 하던 나는 만석이에게 신경이 쓰여 계속 힐끗힐끗 쳐다보았는데 녀석이 갑자기 나를 쳐다보면서 할 얘기가 있다는 듯이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할 말이 있구나?』라며 말을 건네면서 녀석에게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녀석의 눈동자가 슬픈 표정과 깊은 상념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해 봐. 무슨 말을 하고 싶어?』
 
  녀석은 『끄응』 하고 소리만 낼 뿐이었다. 잠시 뒤 나는 나도 모르게 녀석의 목에 걸린 끈을 풀어 주었고, 녀석은 저만치 뛰어가더니 나를 따라오라는 듯 뒤를 돌아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녀석에 이끌려 나도 녀석의 뒤를 따라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다, 어느 양옥집 앞에 도착했는데 녀석이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더니 곧장 그 집 마당에 있는 지하실로 냅다 뛰어 들어갔다.
 
  「뭐가 있길래 저리 들어가지?」라고 생각을 하면서 들어간 지하실에는 보기에도 요염하고, 날씬한 암캐 발발이 한 마리가 얌전하게 앉아 있었는데, 녀석은 곧장 그 개의 옆에 앉아 『형, 얘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간 거야』라고 말하는 듯 나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나는 한편으로 웃기기도 하고 말 못 하는 만석이의 애틋한 사랑이 내 마음을 잔잔히 울리는 것 같아서 그 자리에서 잠시 서서 웃고만 있었는데, 잠시 뒤 밖이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엄마, 그 개 또 왔어』라는 아이의 목소리와 아이들의 소란한 소리, 어느 아줌마의 짜증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집주인이자, 그 암캐의 주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지하실로 내려와서는 나를 보고 『암만 쫓아내도 집 문 앞에 앉아 있고, 문만 열면 들어오고, 못 들어오게 하는 아이 팔을 물어서 병원 치료를 받게 만들었다』며 화를 내고 짜증 섞인 말을 쏟아냈다. 나는 그 일주일 동안 만석이가 이 암캐를 만나기 위해 얼마나 갖은 고초를 겪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의 치료비만큼의 돈을 아주머니에게 주면서 죄송하다고 말을 하고는 만석이를 달래서 다시 세차장으로 돌아왔다.
 
  나에게 알려 주어 마음은 편안해졌겠지만 그 애틋한 미련만큼은 어쩔 수 없었는지 내 뒤를 따라오면서 만석이는 계속 그 집 방향을 수도 없이 쳐다보았다. 힘없이 걷는 만석이와 함께 세차장으로 돌아오니 아버지는 『또 어디 갔다오느냐』며 만석이를 다그쳤다.
 
  하지만 녀석이 그간의 일들을 나에게 알게 해준 만큼, 나는 일주일 간 암캐 주인인 아주머니와 그 집 꼬마와 동네 아이들의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위해 역경을 헤쳐나간 「우리의 청년 만석이」에 대해 상세히 변론을 하니 아버지도 마음이 풀어지셨는지 만석이를 껴안고는 달래 주셨다.
 
  녀석도 조금은 힘이 났는지 참치며 고기들을 급하지 않게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그후 며칠 동안 가끔 집을 나갔다가 들어왔지만 매일 꼬박꼬박 집에는 들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생기를 찾아 예전처럼 힘이 넘치고 영리함이 가득한 눈빛을 가진 예전의 만석이가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암캐의 새끼들은 모두 분양이 된 뒤라 만석이의 새끼를 갖다 키울 수는 없었다.
 
  얼마 뒤 나는 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휴가를 나올 때마다 만석이는 저만치 세차장 바닥에 누워 있다가도 나를 보면 바람같이 달려와 품에 안기곤 했다. 그렇게 휴가 때마다 보던 만석이를 1994년 겨울 제대를 하면서 다시 매일같이 보게 되었는데, 녀석은 언제나 변함없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가족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세차장의 형편은 내가 군에 가기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당시 자동 세차기를 갖춘 주유소 때문에 손 세차를 하는 세차장들은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더군다나 땅주인이 부도가 나면서 몰래 그 땅을 처분하는 바람에 우리 집은 곧 쫓겨날 형편이 되었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드셨고, 어머니는 몰래 눈물을 훔치시는 아픈 시련의 시간이 시작되면서 만석이의 재롱도 한 귀퉁이로 밀려나고 있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세차장을 비워 주었고, 그 땅이 공사에 들어가면서 만석이는 공사장의 인부들과 빈 사무실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만석이가 같이 타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는데, 아버지와 나는 그런 만석이를 억지로 떼어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공사중인 세차장에 나간 우리는 만석이가 어디로 가고 없음을 알게 되었다. 또 예전처럼 어디로 나간 것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만석이는 하루, 이틀이 가고 일주일, 한 달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버지와 가족들은 그날 무던히도 나와 아버지를 따라오고자 했던 만석이가 마음에 걸렸다. 우연히 세차장 동네 술집에서 술을 드시던 아버지의 귀에 세차장 공사에 일하던 인부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 발발이 맛있게 먹었어』라는 말이 들렸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아버지는 만석이를 잃은 지 5년이 지난 지금도 만석이와 닮은 개를 보면 『만석이 같다』라며 애전의 만석이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신다.
 
 
  「산」(山)과 「내」(川)와 함께했던 幼年의 추억
 
  양아인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으니까 아마 1974년도쯤인가 보다. 시골 시댁에 다녀오신 어머니께서 강아지 두 마리를 얻어 오셨다. 고생하는 며느리에게 달리 줄 건 없고 강아지나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라고 할머니께서 보내 주신 강아지였다. 토실토실하게 살이 찌고 정말 예쁘고 건강했다.
 
  우리 철없는 남매들은 집에서 강아지를 기르자고 졸라댔다. 무슨 마음에서인지 어머니도 허락하셨고, 우리들은 뛸 듯이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던 큰누나가 수놈에게는 「산」(山)이라고 이름짓고 암놈에게는 「내」(川)라고 짓는 게 어떠냐고 해서 우리 남매는 모두 찬성했고 그렇게 두 강아지는 산과 내가 되었다.
 
  그때부터 두 마리 강아지를 키우기 위한 우리들의 피눈물 나는(?) 고행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우리들 밥을 조금씩 덜어내면 가능했지만, 무럭무럭 자라나는 두 마리 개의 식성을 당해내기에는 우리 집의 사정이 너무도 궁핍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안의 둘째이며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형이 나서서, 집 근처 곰탕집에 부탁해서 음식 찌꺼기를 걷어 오기 시작했다. 때마침 사춘기를 겪던 형으로서는 방과후 매일 식당에 가서 냄새 나는 음식 찌꺼기를 자전거에 실어 나르는 것이 아마 무척이나 창피한 일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하지만 형이 정말로 창피하게 여겼던 것은 냄새 나는 잔반을 실어 나르는 것보다, 생전 입에 대보지도 못하는 기름진 음식 냄새를 날마다 맡으면서 느꼈던 자존심의 상처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되기도 한다.
 
  여하튼 형 덕분에 개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다. 원래 체질적으로 건강한데다 형 덕분에 우리들보다 훨씬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우람하게 자라난 것 같았다. 특히 수놈인 산은 어찌나 크고 힘이 세던지 1년쯤 후엔 나보다 두 살 어린 여동생을 등에 태울 정도였다.
 
  산과 내는 우리 남매들의 깊은 사랑을 받았고, 개들도 우리들을 볼 때마다 펄쩍펄쩍 뛰었다. 별다른 놀이가 없던 시절에 산과 내는 우리의 친구요, 놀잇감이요, 생활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개를 키운 지 2년쯤 될 때, 암컷인 「내」가 예쁜 새끼를 여섯 마리나 낳았다. 우리는 당시 새끼의 「아빠」가 산이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믿고만 있었는데, 올해 일흔을 맞으시는 어머니께서 사실을 말씀해 주셨다. 당시 우리 집과 멀리 떨어진 건축 공사장에 커다란 수캐가 한 마리 묶여 있었는데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밤에 몰래 「내」를 끌고 갔더니 자기들끼리 교접을 했다는 것이다(어머니의 말씀으로 우리 남매는 다시 한 번 산과 내에 대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강아지가 태어난 지 두 달쯤 되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먼저 집에 온 동생이 울고 있었고, 개들이 한 마리도 남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어디 갔냐고 물어도 어머니는 아무 대답이 없으셨다. 우리 남매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고 저녁에는 늦게 온 누나, 형까지 합세해 온 동네를 뒤졌다.
 
  우리들 학비와 생활비를 위해 정들었던 산과 내와 강아지까지 팔았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먼 훗날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아무런 사정을 모르는 어린 남매들은 몇날 며칠을 눈물 속에서 밥도 잘 안 먹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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