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가이드 북] 나는 軍大에서 무엇을 배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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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장군의 아들로 월남戰 참전
 
 
  「11867065」. 이 번호는 나의 자랑스런 군번이다. 1968년 2월26일. 오랜 세월이 흘러갔으나 이 군번을 받은 날짜는 잊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거쳐 가야 하는 것이고 나 또한 그곳을 거치면서 軍 생활로 인하여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
 
  당시 軍 입대를 앞두고 우리나라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1ㆍ21 사태이다. 북한의 무장공비가 「朴正熙 대통령 암살」이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南派(남파)된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훈련소에서부터 다리에 모래주머니 달고 뛰는 등 혹독한 훈련으로 고된 하루하루를 보냈다. 더욱이 軍 복무 기간이 33개월로 연장까지 되는 등 군대는 늘 긴장된 분위기였다.
 
  세월이 지나 당시 무장공비의 일원이었고,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는 金新朝(김신조) 장로를 만났을 때 『그 때 장로님 때문에 엄청나게 고생했습니다』라며 웃으며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당시 같이 훈련을 받았던 훈련병들은 카투사, 육군본부 등 소위 후방으로 발령을 받았고, 아버지가 당시 현역 장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다섯 명만이 「전방 101보충대 하사관 학교」로 통지가 떨어졌다. 그 때의 조교는 「빽 없는」 우리들을 위로하는 것이라면서 담배 한 개비를 건네 주었다.
 
  나는 백마부대원으로 월남으로 가기 전 어머님과 부산 3부두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참전군인들은 대부분 손가락에 銀반지를 끼고 있었다. 이유는 정글에서 물을 마실 때 은반지를 넣어서 물에 독이 들어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어머니 역시 『물 마실 때 꼭 사용하여라!』고 말씀하시면서 은반지를 내 손에 끼워 주시며 당부하셨다.
 
  나는 병참부대 소속으로 비교적 베트콩이 나타나지 않는 지역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매복작전에 나갔다가 기습공격을 당하여 쓰러진 동료들, 갑자기 식당에서 터진 폭탄 등으로 죽어가는 戰友를 보며 비로소 눈이 번쩍 뜨였다.
 
  나의 젊은 시절은 그렇게 반듯하지는 않았다. 나는 욕구불만 상태였고, 돌파구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그런 시절 우연하게 野球를 통해 견뎌냈으며, 軍 입대를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물론 내 직업이 되었지만 野球와 軍이라는 집단에 고마움을 느낀다.
 
 
  ◈李相璧 방송인
 
 
  ROTC장교 복무 경험이 사회생활 도움 돼
 
 
  사실 육군 소위 계급장을 붙인다는 게 생각처럼 간단치만은 않다. 남들이 산으로 바다로 놀러가는 여름방학을, 적어도 대학 3~4학년에 걸쳐 몽땅 군사 훈련으로 대신해야 한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물론 학교 생활 동안에도 일단 후보생 제복을 입은 이상 엄격한 규율이 뒤따라야 하고, 학점 따는 일도 결코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졸업과 동시에 병과학교에 들어가 혹독한 단련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소대장 복무를 命받게 된다.
 
  그 모든 걸 감수해 가면서 굳이 ROTC를 지망하기까지는 아버님의 당부 말씀이 크게 작용했다. 무엇보다 장남으로서의 소임을 수행하기 위한 현실적이고도 운명적인 필요, 더구나 실향민 2세인 나로서는 횡적 연대의 필요도 무시할 수 없는 덕목이었다. 지금이야 제법 발품 깨나 파는 편이지만 도대체 숫기라곤 없던 소년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런 측면에서도 아버님의 노파심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무튼 경북 安東(안동)에 위치한 모 예비 사단에 말단 소대장으로 배속을 받았고, 당연히 定員만큼의 병력도 떠안았다. 재미있는 건 소대원 대부분이 나보다 나이들이 위라는 점이었다. 원래 일곱 살도 안 돼 일찌감치 학교엘 들어간 탓에 어딜 가도 연소자 취급이었지만, 군대 생활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꼴에 이런 말로 일장 훈시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일단 군복을 입은 이상, 지금부터는 오로지 계급이다. 너희들이 충실하게 軍 복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진다. 따라서 만에 하나 똑소리가 안 나면 곡소리가 날 줄 알라. 알았나!』
 
  지금 생각해 보면, 이만 저만 엄포가 아니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복창 소리는 그야말로 똑소리 나는 『옛!』이었다.
 
  바로 그 점인 것이다. 비록 일정 기간이나마 지휘자로서의 의연함이랄까 당당함이랄까 분명 중위 계급장을 갈아 붙일 즈음엔 이전의 내가 아님을 실감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후 제대를 하고 나서 기자 생활을 할 때나 지금의 방송 생활에서도 책임감이나 사명감 측면에서 장교 생활 동안의 순기능 덕을 적잖이 보고 있는 셈이다.
 
  언젠가 제주도에서 프로그램을 끝내고 막 스튜디오를 나서는데, 누군가 『이상벽씨도 알고 보니 우리 친척이데요…』 하길래 『어디 李씨예요?』 했더니 『아니, 같은 ROTC 친척이라구요…』란다.
 
  가슴이 뭉클했다. 그래, 난 더 이상 외로운 실향민이 아니었다. 적어도 15만 명에 육박하는 ROTC 친척이 있는 것이다. 그 중엔 차인태 아나운서도 있고, 탤런트 주현씨, 뽀빠이 이상용씨, 배우 안성기 아우님도 있지 않은가.
 
 
  ◈尹茂夫 조류학자ㆍ경희대학교 생물학과 교수
 
 
  대학원 졸업자로서 늦깎이 軍 복무
 
 
  나는 대학원까지 공부를 하다 보니 軍 입대는 고향 친구들보다 2~3년이 늦었다. 영장은 대학원을 졸업하던 1967년 5월24일 나왔다. 동생 친구들과 입대해서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산과 들, 바다를 다니면서 동물 중 가장 빠른 날짐승 새를 쫓아다니다 보니 1년 365일 걷기와 뛰기를 하는 셈이어서 입대 영장을 받고도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면 그것은 키 문제였다.
 
  당시 육군 신체검사 입대 기준이 신장 160cm 이상이었다. 키가 158cm이었던 나는 남자라면 軍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신체검사에서 떨어지면 어떡하나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궁리 끝에 신체검사를 받던 날, 검사관의 눈을 피해 살짝 「까치발」을 떼어 160cm를 훌쩍 넘겼다.
 
  나는 입대 8개월 전부터 새를 쫓아다니는 습관대로 매일 새벽 4시에 기상, 약 1시간40분 동안 집 근처인 서울 남산 頂上 팔각정까지 올라갔다가 뛰어서 내려오곤 하였다. 이런 습관은 건강한 체력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
 
  1967년 5월, 경남 창원 39사단에 입대해 보니 나보다 2~3년 후배인 고향 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군대서 하는 훈련이야 뻔하지 않은가. 정훈교육, 행군, 구보, 사격이기 때문에 훈련 조교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고, 우리 선배들도 모두 겪은 훈련을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전국의 산과 들로 새를 쫓아다니면서 연구하던 생활보다는 軍 생활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하루 하루가 빨리 지나갔다. 옛 어른들 말씀대로 「어딜 가도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군대에서도 똑같이 적용됐다.
 
  내게 곤혹스러웠던 일은 당시 대학이나 대학원 졸업 입대자가 드물던 시기라 인사 기록부에 「대학원 졸업」이라는 기록 때문에 대구 軍醫(군의)학교, 101보충대 때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이었다. 시간만 나면 대학원생 좀 보자고 했고, 신고식도 많이 받았다.
 
  대학원 졸업 덕분에 軍 생활이 편한 것도 있었다. 대구 군의학교 교장이 103보충대에서 내가 가고 싶은 101보충대를 보내 주었다. 101보충대에서도 그 당시 모대위가 『어떤 부대로 가고 싶으냐』고 내가 가고 싶은 부대를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나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는 경기도 광릉의 크낙새 서식지에서 軍 생활을 하는 특전을 누렸다.
 
 
  入隊 전 체력단련하여 자신감 가져야
 
 
  軍 생활을 쉽게 하려고 선임하사, 상사, 중대장 집에 찾아다니면서 적당히 요령을 부린 사람들 중에서 지금 잘 사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나라와 부모와 자신을 위해 열심히 軍 생활한 사람들은 사회에서도 성공한다는 것을 주위에서 흔히 본다. 軍에 입대할 예비 군인과 현재 軍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군인들은 다음 필자의 제안을 참고하기 바란다.
 
  첫째, 입대 전 열심히 체력단련을 하여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둘째, 항상 내일 훈련과 내일 할일이 무엇인지 매일 한 번씩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 셋째, 생태계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는 새와 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갖자. 넷째, 부지런한 군인이 되자. 다섯째 軍에서 맡겨진 일이 무엇이든 업무에 충실한 습관을 기르자.
 
 
  ◈高元政 소설가
 
 
  이등병 때도 「필사적」으로 新春文藝 응모
 
 
  1980년 10월, 육군 화랑부대의 말단대대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송충이」 하나짜리 이병인 나의 지상과제는 어떻게 신춘문예에 작품을 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대학원까지 수료하고 스물다섯 살의 늦은 나이에 입대하기까지 나는 해마다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문학청년이었기 때문이다.
 
  군대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음은 물론 그 결과물로써 해마다 응모하는 일도 빼먹지 않겠다는 게 나의 각오요,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눈만 뜨면 교육훈련에 월동준비에 걸핏하면 이런저런 집합에…. 저녁식사 후의 자유시간에도 내무반을 정리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고, 취침점호가 끝나면 고참들 사이에 끼어 머리를 눕혀야만 했다. 마감일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거의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던가, 나는 결국 방법을 찾아냈다. 취침시간 중간에 일어나서 글을 쓴다는 것이었다. 우선 PX에서 군용 랜턴을 하나 샀다. 그리고 내 불침번 근무가 끝난 다음에 다음 근무자에게 모른 척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관물대 안에 랜턴을 매달았다. 그 불빛 아래 머리를 들이밀고선 원고지를 메워갔던 것이다.
 
  눈치를 챈 몇몇 고참들은 다행히 모른 척 해주었다. 하지만 결국 문제가 생겼다. 야간 순시를 하던 당직사관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그 당직사관은 내게 군장을 꾸리게 하고는 한밤중에 연병장을 돌게 했다. 영하로 떨어진 11월의 연병장을 뛰면서도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원고를 쓸 수 없게 됐다는 사실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그 이후로는 내무반의 고참들 중 나를 감싸 주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 그들의 비호(?) 아래 나는 끝내 단편 하나를 완성해서 신춘문예에 응모할 수 있었다. 다시 낙선이었지만 이 사건은 내게 자신감을 주었다. 제대할 때까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으리라는.
 
 
  대하소설 「氷壁」의 자료도 軍 생활 중의 메모
 
 
  일병이 되고 상병이 되자 여건이 점점 나아졌다. 참모부에 책상도 생기고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요령도 생겨났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 우리 부대에서는 「상황근무」라고 해서 야간에 참모부 요원들이 전화대기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밤 10시에서 아침 6시까지를 네 명이 나눠서 두 시간씩 전화기 앞에 대기하는 것인데, 대개의 경우 상황 근무병들은 모포를 챙겨들고 나가서 잠을 자곤 했다.
 
  나는 바로 그 시간을 활용했다. 우선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곱배기 근무를 자청했다. 취침나팔이 울리면 두 시간 눈을 붙였다가 참모부로 나간다. 그러면 텅 비어 있는 사무실 안에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상급부대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하룻밤에 한두 통쯤 걸려올까 말까였다. 그러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나는 혼자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 집중도를 생각해 보라. 그렇게 하다 새벽 4시가 되면 다음 상황병이 들어온다. 교대를 하고 나는 내무반으로 가기 위해 참모부를 나선다.
 
  겨울 찬바람이 몰아쳐도 좋았다. 눈이 하얗게 쌓여 있어도 좋았다. 어느새 동편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하는 여름날이면 더더욱 좋았다. 연병장으로 나서면서 나는 목청껏 외치고만 싶었다.
 
  「나는 살아 있다! 내가 여기 살아 있다! 살아서 글을 쓰고 있다!」
 
  그렇게 나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마찰 없이 나만의 세계를 지켜낼 수 있었다. 복무기간에 나는 두 편의 장편과 한 편의 중편, 그리고 여러 편의 단편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쌓인 수많은 메모들은 후일 내 출세작이 된 대하소설 「氷壁(빙벽)」의 훌륭한 자료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살아가는 동안 어떤 어려운 상황에 놓이더라도 문학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었다.
 
  지금도 나는 처해 있는 현실이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그 시절의 연병장을 떠올린다. 그 뜨겁던 열정과 고집을 되찾으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나는 입대하는 젊은이들에게 늘 이렇게 충고하곤 한다. 군대는 결코 인생의 블랙홀이 아니다. 군대도 사회라는 점을 명심하라, 그 짧지 않은 시간을 결코 스스로 포기하지 말라고.
 
 
  ◈李季振 「TV내무반 신고합니다!」 MC
 
 
  적극적으로 복무해야 「국방부 시계」 빨리 돌아간다
 
 
  살아가는 동안에 두 갈래 길로 고민할 경우가 많지만 「軍」에 관한 한 나는 내가 분명히 가야 할 길로 접어들었다가 억울하게 저지를 당하고, 다른 길로 밀려나는 비운을 당했다. 「장교」가 生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예를 들면 장남이었던 관계로 군대도 봉급을 받으며 복무해야 동생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에― 대학 생활의 중요한 2년을 ROTC훈련으로 보냈다. 그러나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임관」의 순간에 「사병」의 길로 떠밀려 軍 복무를 했어야 했다.
 
  ROTC는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고, 사병 복무는 의무였으나 강제적이었고 他意였다. 결국 나는 장교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교육받고도 억울함을 억누르고 다시 사병의 길을 남과 똑같이 걸어야 했다. 동기생이었던 교관의 지휘를 받으며 신병훈련을 받을 때의 느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나는 내게 주어진 3년의 새로운 의무를 멋지고 아름답게 해냈다. 그것은 정말 내 삶에 풍부한 자양분이 돼 주었던 「나를 누를 수 있는 힘」의 덕분이었다.
 
  그 힘은 어렵게 어렵게도 젊은 날에 배운 삶의 지혜였다. 나는 내게 주어지는 모든 일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유행어가 있다는데, 나는 그 의미를 스스로 알았다.
 
  나이 어린 고참(지금은 선임병이라고 함)이 콘크리트 바닥에 주먹 쥐고 엎드려 뻗치라면, 주먹에 피가 나도록 엎드려서 인내했다. 學力 콤플렉스가 있는 고참이 주는 기합은 견디기 힘겨웠지만, 장교일 뻔했던 내게는 더 큰 인내가 필요했다.
 
  사역병을 차출하면 나는 제일 먼저 나섰다. 행정반에서 사무를 보거나 내무반에 누워 있기보다는 야전삽을 들고 땀을 흘리는 편이 「국방부 시계」를 빨리 돌아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월남戰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부대에서는 할당된 지원자를 모집했다. 모두가 주저할 때 나는 부모님의 가짜 동의서를 만들어서 派越(파월)을 자청했다. 결국 나를 아껴주시던 인사계님의 만류로 派越되지 못했지만 나는 전쟁도 겪어보고 싶었다. 삶과 죽음이 운명일 거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軍에서 배운 것은 「인내」와 「육체 노동」의 신성함, 그리고 극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 없음」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흐르는 시간과 함께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또한 나는 軍에서 여러 가지 인간형에 대한 경험을 통해 「對人 대증요법」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라면 피할 수도 있는 인간형이지만 軍에서는 피할 수 없는 上下관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확실한 對人 실습을 한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軍 생활을 통해 느낀 자유의 소중함을 일생 잊지 않고 살고 있다. 내게는 남는 시간이라든지 무료하다든지 따분한 시간이 없다. 젊은 날, 철조망의 테두리 안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휴가와 외출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잊지 않는다. 그래서 자유의 시간은 언제나 소중하며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다.
 
  「TV내무반, 신고합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지도 벌써 3년의 세월이 지났다. 34개월을 복무했으니까 TV 프로그램 진행기간과 거의 동일하다.
 
  軍 복무 34개월의 시작은 선택의 길을 빼앗긴 채 시작했지만 떠밀려 들어선 갈래길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 동일한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장교의 길이 아름다웠을지, 사병의 길이 아름다웠을지는 나로서는 모르겠다. 하지만 장교의 思考와 능력을 가지고 달렸던 사병의 길이 내 인생에 그다지 마이너스는 아니었던 것 같다.
 
 
  ◈朴容琥 민주당 국회의원
 
 
  KBS 아나운서로 근무하다 입대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마다 軍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내 경우는 한술 더 떠 파란만장했다. 나는 국군 59후송병원에서 軍 생활을 했다.
 
  1971년 대학 4학년 때 KBS 아나운서로 입사해 2년 3개월 근무한 시점에 일이 터졌다. 당시 KBS 아나운서들은 대개 군대에 가지 않았다. 국방부 홍보요원으로 「국군의 방송」에 근무하는 것으로 軍 생활을 대체했었다. 그러나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국정쇄신과 개혁차원에서 공무원 중 병역 기피자를 색출해 一罰百戒(일벌백계)로 공직에서 쫓아내는 특별조치법을 발표한 것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軍에 입대했다. 휴직 후 복직하면 되는 문제였고, 일단 軍 면제자는 免職(면직)시키니까 2주일 후 신체검사를 받고 軍에 입대한 것이다.
 
  수색 ○○사단에서 신병 훈련을 받고 행정병 주특기 「70」을 받았다. 나는 그 순간에도 「현역 아나운서가 軍에 갔는데…」라는 생각에 훈련받고 KBS 옆 건물에 있는 「국군의 방송」으로 간다는 확신이 있었다. 「국군의 방송」 실장과 인연이 닿아 국군의 방송으로 옮기게 됐을 때, 어느 날 연락이 왔다. 결재를 받으러 계단을 오르던 실장이 고혈압으로 쓰러져 사망했다는 것이다. 失機(실기). 이때부터 군번 「61023459」인 박용호의 33개월 13일 졸병생활은 갖은 辛苦(신고)를 겪게 된다.
 
  議政府(의정부)에서의 대기기간은 지옥이었다. 밥 먹고 아침에 진지작업을 나가면 「1000삽 뜨고 한 번 허리펴기 운동」을 해야 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은인인 행정과장 임모 소령이 점호시간에 내가 전직 아나운서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임소령은 『이제부터 작업 나가지 말고 행정업무를 보라』고 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드디어 自隊배치 시점이 다가왔다. 예하 26개 부대 중 『가고 싶은 부대에 보내주겠다』고 임소령이 말했다. 나는 병원 근무가 아무래도 쉬울 것이라는 생각에 59청평 병원을 골랐다. 내 소원대로 청평 제2군수지원사령부 59후송병원에 배치가 됐다. 쉬운 근무지라 생각했는데, 軍병원 軍紀(군기)는 「핀셋 軍紀」로 군기가 매섭기로 소문나 있었다.
 
 
  군대 안 간 「마마보이」는 사회성 약하다
 
 
  청평의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그 중 영안실 보초근무가 가장 공포스러웠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촛불이 꺼지면서 영안실 문이 쾅 닫히고, 간호장교 막사에서는 고양이가 괴상하게 울어댔다. 이른바 「병원괴담」의 시절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적응력이라는 게….
 
  한 번은 식당 배식구에 食器(식기)를 내밀었더니 취사병이 食器를 나꿔채 갔다. 식기를 찾으려고 취사반에 들어가니 나와 계급이 같은 이등병(취사반장)이 어디서 들었는지 『너, 사회에서 아나운서했다면서? 어디 한 번 해봐』라고 했다. 아니꼬왔지만 분위기가 험악해 『朴正熙 대통령은 오늘 오전 청와대에서…』라고 했더니 『아니, 이 놈 진짜 아나운서인가 보네』라고 했다.
 
  이번에는 야구 중계방송을 해보라고 했다. 『동산고 3번타자, 쳤습니다. 숏 땅볼. 1루에 송구, 아~웃…』 했더니 취사반장이 『얘들아, 이 친구에게 닭 한 마리 가져다 주라』고 했다. 나는 취사반 한 구석에서 눈물을 흘려가면서 정신 없이 닭 한 마리를 먹어치웠다.
 
  나는 행정병으로 근무하다 정훈병으로도 근무했다. 좋은 영화를 환자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국방홍보실서 민간영화 중 야한 것을 자르고 편집해 상영했다. 신성일, 엄앵란이 출연하는 영화를 상영하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나의 인기는 상종가였다. 상영이 제일 두려운 곳은 물론 정신병동이었다.
 
  軍 병원에 있으면 헌혈도 원없이 한다. 헌혈은 늘 기간 병사들 차지다. O형인 나는 아마 서너 차례 헌혈을 한 것 같다.
 
  軍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軍에서 건강하게 복무를 마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피부로 느꼈다.
 
  요즘 軍 생활이 예전에 비할 데 없이 좋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을 끝냈을 때의 뿌듯함, 「인간의 자존심」, 「국가에 봉사」한다는 것은 귀한 것이다. 나는 큰 아들을 해군 졸병으로 軍에 보내 얼마 전 제대해 돌아왔다.
 
  남자로서 거쳐야 할 고난을 이겨내야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다. 요즘 軍에 안 간 수없는 「마마보이」들은 사회 적응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유 없이 맞고, 나이에 관계없이 고참에게 선배 대접을 해야 하는 굴욕적인 것을 참는 인내심도 이때 배우는 것이다.
 
 
  ◈任雄均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성악과 교수
 
 
  軍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軍에 있으면서 배운 것은 「너는 누구인가」이다. 1979년 5월 입대해서 1981년 8월 제대하기까지, 나는 전남 光州보병학교에서 교육병으로 軍 생활을 했다. 4.2인치 박격포 조교를 할 때 포 소리가 어찌나 큰지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고참들은 군인들은 늠름해야 한다며 「쫄따구」들에게 귀를 막지 못하게 엄포를 놓고 자신들은 귀를 담배 꽁초로 틀어막았다.
 
  군대는 八道 사람들이 다 모인 곳이다. 그곳 사람들의 사투리가 나의 발성에 많은 도움이 됐다. 특히 호남 사람들의 사투리는 라틴語, 이탈리아語의 언어 구조와 비슷해서 멜로디가 있다. 그래서 호남이 唱(창)의 본고장이긴 하지만. 하여간 교과서에 없는 경험을 軍에서 했다.
 
  내가 軍에서 배운 것은 이것 말고도 비록 독수리 타법이긴 하지만 打字 치는 법, 문서기획하는 것 등이다. 내가 군대를 안 갔다고 생각해 보라. 문서기획은 성악가들이 평생 접하지 못하는 것이다. 난 이때 배운 기획력으로 음악회를 기획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그리고 나는 軍에서 보병학교史를 편찬했다. 1979~1981년 간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보병학교 역사를 3개월 간 고생해서 만들었다. 타자로 친 것이었는데, 사진 밑에 글씨로 쓴 것이 얼마 전 「TV내무반」촬영을 하기 위해 광주에 갔더니 나의 필체가 그대로 있었다. 보병학교史를 만들면서 隨筆(수필) 쓰는 법을 배웠다.
 
  軍에서 배운 위계질서는 나와 같은 성악가들에게는 좋은 인생공부였다. 성악가는 위계질서를 모른다. 오케스트라 단원이라면 조금 낫겠지만, 기껏해야 선배나 알 정도다. 나는 부대 특성상 장교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 윗사람과 대화하는 법, 아랫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터득했다.
 
  軍에서는 편식 습관도 고친다. 동계 야영 훈련을 하면서 이틀 간 진흙밭에서 자봐라. 결벽증이 있는 친구들도 체념하게 될 것이다. 입대 전에 나는 고등어만 먹으면 두드러기가 나서 알레르기 체질로 알았다. 그러나 군대에 가서 고등어를 먹었더니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알레르기 체질이 아니었던 것이다.
 
 
  보초 서면서 한 번도 졸아본 적 없어
 
 
  軍에서 나는 신앙 체험을 했다. 내가 신병 시절 4.2인치 박격포 조교를 할 때, 성악가에게는 목소리 다음으로 중요한 귀가 안 좋아져 내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100일기도를 했다.
 
  100일 이상 기도했을 때 들어 주시는 神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보직을 옮긴 후 정보, 작전, 교육, 정훈, 비밀서기병, 보안사병 등 여러 가지 보직을 맡았다.
 
  나는 내가 웅변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軍에서 알았다. 보병학교 웅변대회에 고참이 자꾸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나가서 3회나 우승했다. 나는 軍 생활 동안 보초를 서면서 한 번도 졸아본 적이 없다. 내가 무너지면 부대가 뚫리고 부대가 뚫리면 나라가 망한다는 순진한 생각(?) 때문이었다.
 
  군대는 남자라면 가야 한다. 나는 남자는 국민보호의 의무(국방)가 있고, 여자는 국민 생산의 의무가 있다고 항상 이야기 한다. 합당한 이유 없이 軍에 안 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고교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원래는 陸士에 진학해 별을 달아보고 싶었다. 그 정도로 나는 軍에 대해 애착이 있다. 지금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군대 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학생들도 내방에 들어오면 사관학교 학생처럼 不動자세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다고 학생과의 대화까지 딱딱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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