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페인 두 병이 꽂힌 장미꽃바구니
자정이 조금 넘은 서울 장충동 호텔 신라 주차장. 人跡(인적)이 끊어진 그 시각, 텅 빈 주차장에 국내 최고급 승용차 그랜저 두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서울 1바7100」으로 시작하는 청와대 번호판을 단 舊型(구형) 그랜저와 「서울 1코8800」 뉴그랜저 V6였다. 짙은 어둠 속에 주위는 고요했다.
운전석 의자를 뒤로 젖히고 편하게 쉬고 있던 두 승용차의 운전사들은 밤 12시20분쯤, 호텔 출입문 앞에 차를 대기시키라는 호출을 동시에 받았다. 호텔 출입문 앞에는 두 남자가 나와 있었다. 한 남자는 6共 實勢로 통했던 朴哲彦(박철언) 청와대 정책담당보좌관이었고, 다른 남자는 당시 제1 야당인 평민당 金大中 총재의 「자금 관리책」 林春元(임춘원) 의원이었다.
자기 승용차 앞으로 다가간 朴哲彦 보좌관은 운전사에게 뒤트렁크를 열라고 지시했다. 트렁크 안에는 두 병의 샴페인이 탐스러운 장미꽃 다발속에 비스듬히 엇갈린 채로 꽂혀 있는 꽃바구니가 실려 있었다. 이 꽃바구니를 朴보좌관 운전사가 트렁크 속에서 꺼내 林의원 승용차의 운전석 옆자리에 실었다.
꽃바구니가 차에 실리자 朴보좌관은 林 의원 승용차 뒷 좌석 오른편에 올랐고, 林의원은 朴보좌관 왼편에 앉았다. 두 사람의 모습은 선팅에 가려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호텔 신라를 빠져 나온 승용차는 북서쪽으로 향했다. 승용차가 도착한 곳은 서울 동교동, 金大中 평민당 총재의 자택이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꽃바구니를 들고 金총재 집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30분쯤 후, 두 사람은 金大中 총재의 전송을 받으며 동교동에서 나왔다. 이들은 동교동에 올 때처럼 林의원 승용차를 타고 朴보좌관의 차가 주차중인 호텔 신라로 되돌아갔다. 5共 청산과 光州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야당과 재야세력의 정치적 공세로 盧泰愚(노태우) 정부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89년 3월 초,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위의 상황묘사는 朴, 林씨 등 목격자의 진술을 종합한 것이다)
金大中 총재의 뜻밖의 제의
그 1주일쯤 후인 1989년 3월10일, 金大中 평민당 총재는 청와대에 들어가 盧泰愚 대통령과 단독으로 與野(여야) 영수 회담을 갖고, 그 당시 정치권의 최대 쟁점이었던 중간평가와 관련해 대통령의 신임과 연계시키지 않고 단순 정책평가로 실시해야 한다고 제의하는 의외의 일이 발생했다.
金大中 총재의 이 제의는 뜻밖이었다. 중간평가를 대통령의 신임 여부와 연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金大中 총재였기 때문이다. 중간평가는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3金씨(金大中ㆍ金泳三ㆍ金鍾泌)와 맞붙은 민정당 盧泰愚 후보가 선거 막판에 내놓은 전술적인 승부수였다.
100만 인파가 모였다는 서울 여의도 유세(1987년 12월12일)에서 盧泰愚 후보는 『서울 올림픽을 치른 후, 6·29 선언과 그동안의 모든 선거공약 이행 여부에 대해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中間평가를 받겠다』고 공약했다. 盧후보는 중간평가 방법과 관련하여 『국민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할 경우,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범주에는 대통령직 사퇴도 포함된다』고 발표, 背水陣(배수진)을 쳤다.
아무튼 1987년 大選에서 盧泰愚 후보는 36.6%란 저조한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민 3분의 1의 지지 속에 출범한 盧泰愚 정부는 5共 청산과 光州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야당과 在野(재야)의 거센 요구에 시달렸다. 이런 가운데 1988년 4·26 총선이 다가오자 중간평가는 드디어 정치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이를 제일 먼저 거론한 사람이 金大中 평민당 총재다.
金大中 총재는 1988년 4월22일, 총선 지원 유세에서 盧泰愚 대통령이 중간평가 공약을 어기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반드시 재신임 투표를 실시해 내년(1989년) 봄에 새로 대통령을 뽑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盧泰愚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의 國政 수행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중간평가라는 국민투표를 통해 심판하자는 주장이었다.
4·26 총선에서 평민당은 제 1야당이 되었다. 국회는 평민·민주·공화 3黨이 주도하는 與小野大(여소야대)가 되었다. 野 3黨은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을 부결시켰다. 수적으로 열세인 민정당은 야당의 협조 없이는 법안 하나를 통과시킬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1989년 새해가 시작되자 盧泰愚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1월17일)에서 『지금 당장이라도 중간평가를 받을 용의가 있으나 사람에 따라 중간평가에 대한 시각이 혼재해 있다. 시기와 방법은 정치권의 與野는 물론, 우리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바를 내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憲政 질서를 혼란케 하고, 국력을 낭비케 하거나 국민화합, 민주주의 및 나라발전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與野 협상에 따라 중간평가 문제를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을 野 3黨 총재는 일축했다.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野 3黨 총재는 총재회담을 통해 「중간평가는 정치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중간평가는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며 盧대통령은 구체적 내용과 시기, 방법 등을 밝혀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金大中 총재도 1월28일에 가진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간평가는 약속대로 대통령에 대한 신임투표여야 한다』는 입장을 재 천명했다. 이렇게 되자 盧대통령은 2월23일 청와대에서 黨·政회의를 갖고 『黨과 정부는 언제라도 중간평가를 실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하라』고 지시했다. 이 무렵 재야 세력은 全民聯(전민련)을 중심으로 「盧泰愚 정권 퇴진 공동투쟁본부」(위원장 李富榮 전민련 의장)를 결성, 학생·노동자들과 연계한 가두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盧泰愚 대통령과 金大中 총재 간의 與野 영수회담이 열린 1989년 3월10일은 중간평가가 초읽기에 들어간 무렵이었다. 이 회담에서 金大中 총재는 『중간평가를 대통령에 대한 신임과 연계시키지 않고 단순 정책평가로 실시해야 한다』는 뜻밖의 제의를 한 것이다.
결정적 순간의 뒤안길
金大中 총재의 이 제의는 그 당시 정국의 흐름을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이 제의에 힘입어 盧泰愚 대통령은 1989년 3월20일, 특별담화를 통해 중간평가 무기 연기를 발표할 수 있었으며, 그 후 3黨 통합을 추진, 與小野大를 일거에 극복하고 정국을 리드했다.
만약 그 당시, 金大中 총재가 그런 제의를 하지 않았더라면 盧泰愚 대통령의 신임을 묻는 중간평가가 실시되었을 것이며, 그 결과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치평론가는 『金大中 총재의 제의는 결과적으로 중간평가 유보에 합의해 준 셈이 되었다』며 『金大中 총재가 그런 제의를 하지 않았더라면 3黨 통합이 과연 가능했는지 의문이며 1992년 大選 결과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盧泰愚 대통령의 정치담당 특보였던 盧在鳳(노재봉) 前 총리는 『여당이 중간평가에 실패했을 경우, 당시 막강했던 軍部에 의해 쿠데타 가능성도 있었다』고 말했다.
盧대통령이 이때 중간평가를 실시하는 正攻法을 택했더라면 이겼을 것이고 政局의 주도권을 장악, 3黨 合黨 없이도 국정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중간평가 유보는 그런 점에서 한국 現代史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金大中 총재는 왜 당초의 입장을 바꾸었을까. 金大中 총재가 野 3黨 총재 간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태도를 바꾸자 평민당에 대한 시중의 여론은 좋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金大中 총재는 부천 시국연설회(1989년 3월18일)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번 청와대 회담은 5共·光州 핵심 인사 처리와 全斗煥, 崔圭夏 前 대통령의 증언 문제, 그리고 地自制 실시 등 정국 현안에 대해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의미가 있다. 중간평가를 위한 최선책은 5共 척결과 민주화를 이룩한 금년 말이나 내년 초에 하는 것이지, 대통령의 신임을 건 국민투표를 지금 하는 것은 최악이다. 현실적인 차선책에서 정책평가를 주장했다.
지금은 안정 속에서 차근차근 민주화를 진행시켜야 할 때이므로 死生결단하는 국민투표를 통해 3金씨 중 하나를 대통령시키는 것은 급한 문제가 아니다. 나라가 파국으로 가는 것을 묵과하느니 차라리 내 정치생명을 내놓겠다. 나는 일시적인 인기에 영합하지 않겠다>
나라의 파국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金大中 총재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중간평가 연기 특별담화 발표 직후, 政街에서는 盧대통령과 金大中 총재 간에 盧대통령 이후의 정국 구도에 관해 심도 있는 의견교환이 있었다는 「密約說(밀약설)」이 끊이지 않았다.
金大中 대통령이 盧泰愚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정치자금과 관련해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는 것이 「20억 플러스 알파」說이다. 이 說은 1995년 10월27일, 중국을 방문중인 국민회의 金大中 총재가 「1992년 대통령 선거 무렵 盧泰愚 대통령이 보낸 비서관으로부터 위로금 명목으로 2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최초 시인하면서 비롯됐다.
金大中 총재측이 이런 사실을 시인하게 된 것은 비자금 수사로 궁지에 몰린 盧泰愚 前 대통령측에서 對국민 사과성명을 통해 재임 기간중 거둔 비자금의 전모를 밝히겠다고 공언한 데 따른 것이다.
金大中 총재측이 20억원 수수 사실을 시인하자 政街에서는 「20억원만 받았겠느냐. 더 있을 것」이라며 「플러스 알파」說이 제기됐었다.
鄭亨根 의원은 1997년 10월14일 大檢(대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국민회의 金大中 총재가 평민당 총재 시절인 1989년 중간평가 유보를 수용하는 代價로 盧泰愚 대통령으로부터 200억원을 받았다. 그 돈은 당시 여권 실세인 朴哲彦씨를 통해 건네졌다』고 폭로했으나 증거를 대지 못했다.
林春元 증언
중간평가 연기와 관련된 密約說의 실체에 대해 미국 워싱턴에 거주중인 前 평민당 의원 林春元(63)씨가 처음 입을 열었다. 林씨는 盧泰愚 대통령과 金大中 총재간의 청와대 영수회담이 열리기 1주일 前, 밤 12시가 넘은 시각에 朴哲彦 청와대 정책담당보좌관을 자기 차에 태우고 동교동의 金大中 총재 집을 찾아갔던 사람이다.
3選 의원 출신인 林씨는 金大中 대통령이 야당 총재로 있을 때, 그의 「자금 관리책」이자 측근 참모였다.
기자는 미국 워싱턴에서, 8시간에 걸쳐 林 前 의원의 증언을 들었다. 감리교 장로인 林 前 의원이 올해 초 기자에게 「21세기 새 천년을 시작하는 신미년 새해 아침에 나의 조국 한반도와 8000만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드립니다」라는 기도문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 기도문에서 그는 「한국의 경제 문제는 정부의 잘못된 간섭 때문에 회생하기 어렵게 되었고, 지역감정 문제는 편향된 인사정책과 맞물려 골이 더욱 깊어졌으며, 통일 문제 역시 金大中 대통령 혼자서 각본 쓰고 감독하며 주연 배우하느라 아주 잘못되고 있다」면서 金大中 대통령이 국민들을 위해 꼭 해야 할 일 열 가지와 해서는 안 되는 일 열 가지를 적었다.
그는 또 기도문에 자기와 친분이 있던 與野 국회의원 100여 명, 역대 정권의 실세 20여 명, 종교계 지도자 수명의 實名(실명)을 적시하며, 이들에게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 것을 촉구하고, 「金大中 총재가 어려울 때 도운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金大中 정권에 의하여 인권유린을 당하는 참혹한 현실에 배신감을 느끼며 많은 생각에 잠겨 있다」고 밝혔다.
워싱턴에서 만난 林씨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국내에 있을 때 肝(간)이 나빠 거무튀튀했던 얼굴색이 뽀얗게 바뀌어 있었다. 肝이 나쁘면 쉽게 피로를 느낄 법한데 8시간의 인터뷰 동안 그는 쉼 없이 얘기했고 식사 때는 반주도 곁들였다.
『제가 미국에서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알면 가슴이 뜨끔할 사람이 많을 겁니다』하며 그는 웃었다. 나이를 물어보자 『호적에는 1938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론 소띠(1937년생) 섣달생』이라고 말했다. 올해 예순 넷이란 얘기다. 자녀는 2남1녀인데, 큰 아들은 미국 감리교 목사고, 둘째 아들은 워싱턴 D.C.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으며, 딸은 공인회계사로서 역시 워싱턴 D.C.에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돌아올 수 없는 몸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사기 혐의로 고소당했는데 검찰 조사에 응하지 않는 바람에 수배자가 되었다고 했다.
林 前 의원은 『변호사들은 검찰에 나가 진술만 하면 사기사건에 대해 무혐의 결정이 떨어질 것이라고 조언하지만 대통령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기는 저를 검찰에서 가만히 둘 리가 없다는 판단에서 조사에 응하지 않고 있다』며 『金大中 정부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에는 한국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林 前 의원은 『대통령의 신상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제가 입을 열 것에 대비해 제 말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저를 파렴치범인 사기꾼으로 몰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朴哲彦 보좌관과의 수차례 접촉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중간평가 연기와 관련된 秘話를 털어놓았다.
『1989년 1월경의 일입니다. 설 쇠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朴哲彦 보좌관으로부터 호텔 신라에서 단 둘이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 자리에서 朴보좌관이 「盧泰愚 대통령께서 林의원을 청와대에서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했습니다. 용건이 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것은 말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야당 의원이 특별한 이유 없이 청와대에 들어가면 사쿠라로 오해받을 수 있다고 했더니 朴보좌관은 「그렇다면 다시 만나자」며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다음에 만났더니 朴보좌관은 「요점은 중간평가 문제」라며 솔직하게 털어놓았어요. 저는 「그 문제는 金大中 총재와 직접 얘기할 사안이지 내가 섣불리 대답할 수 없다. 나도 총재의 지침을 받아야 하니까 오늘은 헤어지고 다시 만나자」고 했어요. 저는 동교동에 들어가 金총재에게 「盧대통령이 중간평가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朴哲彦 보좌관을 통해 우리측과 만나기를 원한다」고 보고했습니다. 金大中 총재는 「잘 됐다」하면서 매우 반색을 했습니다.
그후 朴哲彦 보좌관을 만나 「金大中 총재가 당신을 만나자고 하니 직접 만나서 얘기하라」고 알려 주었어요. 그랬더니 朴보좌관은 「위에 보고해서 지침을 받아야 한다. 지금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준비가 된 후 연락을 주겠다고 해서 金大中 총재에게도 그렇게 보고했습니다. 며칠 후 준비가 다 되었다는 朴보좌관의 연락을 받고 호텔 신라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朴보좌관과 함께 동교동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3월 초순입니다.
朴哲彦 보좌관이 타고 온 승용차는 호텔 신라에 주차해 놓고 그는 내 승용차에 올랐습니다. 朴보좌관 운전사가 승용차 뒤트렁크에 실려 있던 꽃바구니를 내 차에 옮겨 실었습니다. 朴보좌관이 준비할 게 있다고 말한 것이 꽃바구니였습니다.
동교동 도착 후 저와 朴보좌관은 金총재의 안내를 받아 지하서재로 내려 갔습니다. 지하서재는 金총재가 중요 인사와 밀담을 나누는 곳입니다. 지하서재에 金 총재, 朴보좌관, 그리고 저, 세 사람이 같이 앉았습니다.
朴哲彦 보좌관은 「盧泰愚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왔다」며 「중간평가 유보에 동의해 줄 것」을 부탁하고, 「金大中 총재가 다음 대통령 선거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습니다.
대화가 거의 끝날 때쯤 저는 朴哲彦 보좌관에게 「전달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한 뒤 그 자리를 떴습니다. 저가 일어나고 10분쯤 지나 두 사람이 지하서재에서 올라왔습니다. 金大中 총재는 朴哲彦 보좌관에게 「고맙다. 이번에 朴보좌관이 참 큰 일을 했다」고 격려했습니다. 기분 좋은 얼굴이었습니다.
이 만남이 있고 나서 1주일 후, 盧泰愚 대통령과 金大中 총재 간의 영수회담이 청와대에서 열렸고 金大中 총재는 중간평가 실시와 관련해 대폭 양보하게 되었습니다. 동교동 지하서재에서의 심야 밀담이 金大中 총재의 심경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동교동 지하서재에서의 심야 밀담에서 朴哲彦 보좌관이 金大中 총재에게 돈을 주었습니까.
『현장을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金총재를 바로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는데도 朴보좌관은 준비가 필요하다며 다음으로 미뤘습니다. 준비라는 게 뭘 의미하겠습니까』
金潤煥 증언
林春元 前 의원의 이 증언에 대해 중간평가 연기 당시 민정당 원내총무였던 金潤煥(김윤환·現 민국당 대표)씨는 『평민당과의 정책제휴 차원에서 朴哲彦 보좌관이 林春元 의원을 접촉 창구로 삼아 金大中 총재를 만난 것은 사실일 것』이라고 말하고, 200억원을 건네 주었다는 1997년의 폭로 부분에 대해서는 『200억원은 너무나 큰 액수여서 믿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중간평가 무렵 여권의 분위기를 金潤煥씨는 이렇게 말했다.
『1989년 1월9일로 기억합니다. 盧대통령이 저를 安家로 불렀습니다. 與小野大 정국으로 정국 운영이 매우 힘들 때였습니다. 국회가 뒷받침을 안 해 주니까 6·29 선언도 실천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盧대통령은 정계개편과 관련된 세 가지 복안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제1야당인 평민당과의 정책제휴였습니다. 이 방안은 朴浚圭 민정당 대표와 朴哲彦 보좌관이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두 번째는 金鍾泌 총재의 공화당과 합당하여 국회 과반수를 넘기자는 방안인데, 공화당의 32석을 합치면 과반수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朴俊炳(박준병), 具滋春(구자춘) 의원 등 충청도에 지지기반을 둔 軍 출신들이 이를 주장했습니다.
세 번째가 정통 보수 야당인 金泳三 총재의 통일민주당과의 제휴였습니다. 보수 대연합이란 명분 아래 제가 추진했죠. 민주당이 응하면 공화당은 자연히 따라 올 것으로 보았습니다. 盧대통령은 저에게는 보수 대연합을 추진하라고 지시하고, 朴哲彦 보좌관에게는 평민당과의 정책제휴를 추진토록 했습니다. 朴보좌관이 林春元 의원을 접촉창구로 삼았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저는 민주당과의 보수 대연합을 성사시키기 위해 1989년 1월22일께 金泳三 총재의 둘째아들 賢哲씨 집에서 은밀하게 金泳三 총재를 만났고, 그 이후 계속 접촉을 가졌습니다』
―林春元 前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朴 보좌관은 金大中 총재에게 차기 대통령으로 밀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데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입니까.
『평민당과 정책제휴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다음 대통령 자리를 거론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金泳三 총재에게 「보수 대연합을 해야 金총재가 다음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하며 설득했으니까요』
『중간평가를 했더라면 여당이 이겼을 것』
―중간평가 문제에 대해 민정당은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盧대통령이 제주도에서 휴가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온 날(1989년 3월19일로 중간평가 연기 특별담화문이 발표되기 바로 전날) 저녁에 저와 朴哲彦 보좌관을 청와대로 불렀습니다. 들어갔더니 盧대통령이 朴보좌관에게 중간평가와 관련해 보고하도록 지시했습니다. 朴보좌관은 각종 여론조사를 토대로 중간평가를 하면 안 된다고 보고했습니다. 세 야당 중 한 곳의 지지를 확실하게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朴보좌관의 보고가 끝나자 盧대통령은 「朴보좌관이 보고한 대로 중간평가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의 신임을 건 중간평가를 한다는 것이 민정당의 대세였는데 대통령이 중간평가를 안 하겠다고 하니까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李鍾贊(이종찬) 사무총장 주도로 실시중인 중간평가에 대비한 당원 교육도 부랴부랴 중단되었습니다』
―당시 안기부는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朴世直(박세직) 안기부장은 중간평가를 하면 여권이 불리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朴世直 부장은 5共 청산작업을 준비하다 물러났기 때문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중간평가를 했더라면 결과는 어떻게 나왔겠습니까.
『제가 金泳三 민주당 총재에게 보수 대연합을 제의했을 때 金총재는 정계개편 필요성에 찬성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계개편 前에 5共 청산을 하라. 5共 청산을 위해서는 全斗煥 前 대통령을 국회 증언대에 세우고, 李源祚(이원조), 鄭鎬溶(정호용) 의원을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중간평가를 하면 여당이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金총재의 5共 청산 주장에 동의했습니다. 5共 청산을 하고나서 중간평가를 했더라면 아마 민주당의 도움을 받아 여당이 이겼을 것입니다』
6共의 초대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崔秉烈(최병렬) 한나라당 부총재는 林春元 前 의원의 증언에 대해 『金大中 총재와 朴哲彦 보좌관 간에 있었던 密約 내용은 모르지만 중간평가 유보 발표는 의외의 일이었다』고 말했다. 崔부총재에게 중간평가 공약이 나오게 된 과정을 물어보았다.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데 지방 유세를 마치고 밤에 연희동 집으로 귀가한 盧후보가 저를 2층 서재로 불러 중간평가를 공약으로 내거는 문제를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누구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다음 날, 安武赫(안무혁) 안기부장, 李春九(이춘구) 사무총장 등 몇 사람과 그 문제를 논의했더니 모두가 반대했습니다. 「이대로 가도 이기는데 그걸 내세우면 오히려 약점만 보이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검토 결과가 부정적이어서 보고를 하지 않았는데 盧후보의 입장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여론조사에서 리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안심할 수준이 아니다. 하는 것이 좋겠다」고 盧후보가 말해, 제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崔秉烈 증언:『盧-DJ 물밑 협상 몰랐다』
―중간평가 문제에 대해 盧대통령은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盧후보 당선 후 與小野大 정국이 되면서 정부가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국회에 제출한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이 야당의 반대로 부결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1989년 새해가 시작되면서 李春九, 玄鴻柱(현홍주), 金學俊(김학준), 金鍾仁(김종인) 씨 등 정권인수위 멤버들이 盧대통령에게 「이 난국을 극복하는 길은 중간평가를 통한 정면 돌파」라고 건의해 대통령의 결심을 얻었습니다. 盧대통령도 처음엔 하자는 쪽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서울 삼청동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 맞은 편에 있던 청와대 경호원 숙소에 중간평가 준비작업을 위한 본부가 마련되었습니다. 李春九 사무총장이 책임자였고, 崔昌潤(최창윤) 당시 정무수석이 실무 간사였습니다. 저는 공보처 장관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회의가 열릴 때마다 崔昌潤 정무수석이 중간평가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안 하자는 것도 아닌 애매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정무수석이 그렇게 하니까 대책회의가 맥이 빠졌습니다. 정무수석은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실무팀은 盧대통령이 金大中 총재와 물밑 협상을 하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중간평가 연기라는 뜻밖의 발표를 들었습니다』
『동교동 비서들은 보이지 않았다』
한나라당 기조위원장 金榮馹(김영일) 의원은 중간평가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司正비서관이었다. 현직 검사로서 청와대에 파견근무했던 그는 司正 외의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朴哲彦 보좌관이 중간평가 유보를 위해 金大中 총재와 물밑접촉을 가졌다는 내용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金의원은 『朴哲彦 보좌관을 비롯한 盧泰愚 대통령의 친인척과 측근들은 중간평가에서 패배할까 봐 아주 조심스런 입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朴보좌관이 林春元 前 의원을 창구로 金大中 총재와 접촉한 것은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金의원은 『林春元 前 의원이 1970년대 말,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입건되었을 때 주임 검사가 서울지검 공안부에 근무했던 朴哲彦 검사였다』며 『두 사람은 그때부터 가까이 지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盧대통령의 정치담당 특보였던 盧在鳳씨는 중간평가를 실시하자는 입장이었다. 盧在鳳 특보는 그 무렵 金大中, 金泳三 총재측 사람들을 만나, 야당의 입장을 타진했다고 한다. 盧특보의 말이다.
『金大中씨측 인사로는 朴權相(박권상ㆍ現 KBS 사장), 李桓儀(이환의)씨를 만났고, 金泳三씨측은 辛相佑(신상우), 金德龍(김덕룡), 金東英(김동영)씨를 만났습니다. 이들에게 「중간평가에서 지면 盧대통령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다. 나도 청와대를 떠난다. 하지만 여당이 중간평가에 패배한다고 해서 정권이 金大中씨나 金泳三씨에게 넘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軍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중간평가에 질 경우, 쿠데타 가능성이 있다고 盧대통령에게도 이야기했다. 이제는 야당의 선택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얘기에 그들은 반론을 펴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盧泰愚 대통령은 자기가 제의한 중간평가 공약이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되자 黨과 정부에는 중간평가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와 별도로 그와 이종간인 朴哲彦 정책보좌관을 시켜 막후에서 金大中 평민당 총재와 중간평가 연기를 위한 「密約」을 시도한 것으로 보여진다.
朴哲彦-林春元 두 사람을 호텔 신라에서 동교동까지 태우고 간 林春元 前 의원의 운전사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12년 前에 있었던 그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까.
『여당의 實勢인 朴哲彦 보좌관이 야심한 시각에 장미꽃 바구니와 샴페인 두 병을 싣고 동교동 金大中 총재 댁을 방문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일을 상의하기 위해 갔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지난 번 대통령 선거 무렵, 金大中 후보 진영에서 일한다는 ○○○ 교수가 저를 찾아와 그때 일을 정확히 알고 싶다고 말해, 호텔 신라에서 출발해서 동교동에 도착할 때까지의 全과정을 시간대별로 적어 주었습니다. A4 용지로 서너 장쯤 됩니다』
―장미꽃 바구니는 무거웠습니까.
『통상적인 꽃바구니 무게라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그 장미꽃 바구니를 승용차 뒤트렁크에 싣지 않고 운전석 옆자리에 실은 것은….
『운전석 옆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거기 놓은 것으로 기억됩니다』
―동교동에 도착했을 때 權魯甲(권노갑)씨나 金玉斗(김옥두)씨 등 비서들이 마중을 나왔습니까.
『자정이 넘은 시각이어서 그런지 아주 조용했습니다. 차에서 대기할 때도 비서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동교동으로 가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눴습니까.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워낙 작은 목소리여서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동교동에서 나온 후 두 사람의 표정은 어떠했습니까.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林春元 前 의원의 증언에 의하면 朴哲彦 보좌관은 金大中 총재에게서 중간평가 유보를 위한 密約을 위해 동교동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상당히 중요한 방문이었는데 그런 분위기를 느꼈습니까.
『시기적으로 미묘한 때에 방문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林의원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朴哲彦 증언:『林春元씨는 대화 내용을 모른다』
朴哲彦씨는 美 하버드 대학에 연수중이었다. 기자는 미국 보스턴에 체류중인 朴씨와 국제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중간평가 유보 발표 며칠 전에 林春元 前 의원과 함께 金大中 총재의 동교동 집을 찾아갔다면서요.
『그 당시 제가 林春元 前 의원과 같이 동교동 지하서재에서 金大中 총재를 만난 것은 사실입니다』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습니까.
『남북문제와 통일 문제 등 통상적인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런 문제라면 굳이 深夜에 찾아갈 필요가 있습니까.
『나눈 얘기는 그게 전부입니다』
―金大中 총재를 만날 때 林 前 의원이 배석을 했다는데요.
『현직 대통령의 의사를 야당 총재에게 전달하는 자리에 제3者가 배석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의사라는 게 『다음 대통령은 金大中 총재 당신이오』라는 것이었다고 林春元 前 의원이 증언했습니다.
『내가 金大中 총재와 이야기할 때는 林 前 의원이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는 저를 지하서재로 안내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동교동에서 나온 뒤 林 前 의원과 같이 林 前 의원의 승용차를 타고 호텔 신라까지 같이 갔다고 하는데요.
『林 前 의원은 대화 내용을 몰라요』
―중간평가에 대해 朴보좌관께서는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그 당시 나라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중간평가를 한다고 해서 야당도 득 볼 게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권의 死活이 걸린 선거라면 여당은 모든 관변단체를 동원하기 때문에 여당이 진 예가 없습니다. 저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保革(보혁) 구도 속의 3黨 통합을 추진했고, 이를 위해 막후에서 3黨 총재와 빈번하게 대화했습니다』
―동교동 방문시 장미꽃 바구니와 샴페인 두 병을 들고 갔다는데 深夜 방문에 그런 것이 필요합니까.
『金大中 총재나 金泳三 총재 댁을 방문할 때는 꽃다발 혹은 다과 등 간단한 선물을 들고 갔습니다』
―林 前 의원 승용차에 동승해 동교동에 간 것은 용건이 중요하기 때문에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보안 문제도 있고, 동교동 가는 길은 林 前 의원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朴 前 의원은 중간평가유보와 관련된 거액 전달설에 대해서는 『터무니 없는 얘기다』고 말했다.
한때 한국 최고의 「현금王」
林春元씨는 전북 群山 출신이다. 그는 군산상고를 졸업한 열여덟 살에 上京해 스물넷 되던 1962년, 서울에서 상아탑 학원을 차려 돈을 벌었다.
『제 고향은 전북 群山이오. 물려받을 재산이라곤 십원 한 장도 없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저는 먹고 살기 위해 上京했어요. 신문배달을 오래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학원에 수학 강사로 나가던 동생의 권유로 대학입시 전문인 서울학원을 당시 돈 37만5000원에 인수했는데 그게 상아탑 학원입니다.
학원 재산은 간판하고, 칠판, 책ㆍ걸상이 전부였습니다. 건물은 임대니까 인수 대금이 크게 들지 않았아요. 인수 후 1년쯤 지나자 수강생들이 다 떨어져 나가 학원을 그만두려고 하는데 학생들이 물밀듯이 밀려왔어요. 제 처지를 불쌍하게 여긴 학원 강사들이 여름방학 특강 때 강사료도 안 받고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친 덕분입니다.
사립대학의 재학생 수가 7000명 내지 8000명 하던 시절에 상아탑 학원 수강생이 8000명에서 1만명이었습니다. 낮에는 재수생들이 수강하고, 밤에는 경기高, 경복高, 서울高 경기女高 등 서울의 명문 고교 학생들이 배웠습니다. 학원은 수업료를 미리 받기 때문에 현금 장사로는 최고였어요. 돈을 억수로 벌었습니다. 그때 돈으로 1년에 80억원을 벌었으니까요.
번 돈으로 학원 건물을 인수해 그 자리에 8층 건물을 지었습니다. 상아탑 학원은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 뒤에 있었는데, 화신백화점이 6층일 때 우리 학원은 8층이었어요. 1962년부터 1973년까지 11년 간 상아탑 학원을 운영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어요. 그 당시 전국에서 예금 랭킹 1위가 저였고, 제 돈 꾸어쓰지 않은 기업인이 없었어요. 현대그룹 鄭周永 회장도 제 돈 빌려 썼고, 大宇그룹 金宇中(김우중) 회장은 돈 빌리러 다니던 시절이었소』
張俊河씨와의 인연
엄청나게 돈을 벌고 있던 무렵, 「思想界」 발행인 張俊河씨와 의형제처럼 지낸다는 사람이 세칭 「문방구 어음」을 갖고와 그에게 割引(할인)을 부탁했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 영향력을 끼친 思想界는 광고와 판매 부진으로 경영이 어려웠다.
張俊河씨의 사회적 명성과 思想界의 역할을 잘 아는 林春元씨는 『좋은 일 한다』면서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문방구 어음」을 수표로 바꿔 주었고, 思想界의 정상적 간행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張俊河씨가 몸소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 만남이 학원 원장 林春元씨가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張俊河씨 주도로 「민주회복 국민의 黨」이 탄생했어요. 尹潽善(윤보선), 趙漢栢(조한백)씨 등 야당 원로들이 가담했습니다. 黨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전직 대통령이 黨의장을 맡았어요. 黨은 만들었지만 야당 출신들이 돈이 있어야지요. 30代 초반에 불과한 저를 정무위원에 앉힙디다. 돈을 대라는 거지요. 저는 정치할 생각이 없었고, 육영사업을 크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張俊河씨만 조금씩 도와 주었습니다』
정당 언저리에서 맴돌던 그는 정치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 계기를 만난다. 그것은 막내 아들의 불행이었다.
『하루는 집에서 자고 있는데 청와대 경호실에서 나왔다면서 가택수색을 하는 거예요. 당시 집사람은 막내 아들을 임신중이었습니다. 집 사람이 강제 수색에 항의하자 군홧발로 임신중인 배를 차는 겁니다. 집사람은 그 자리에 쓰러졌어요. 병원으로 옮긴 집사람은 제왕절개 수술을 하고 애를 낳았는데, 이 애가 태어날 때부터 가슴이 앞뒤가 붙어 있었습니다. 가슴협착이란 진단을 받은 직후 저는 상아탑 학원 간판을 떼고 朴正熙 정권과 본격적으로 한판 붙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 애의 불행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디게 한 계기였습니다.
그 애는 서울 신촌의 세브란스 병원에서 여러 번 수술을 받아 생명은 건졌지만 그때의 충격으로 지금도 체구가 작아요. 온 가족이 미국으로 가게 된 것도 그 애 건강 때문입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어요』
金大中 부부가 林春元씨 집으로 옮긴 사연
1975년 8월17일, 등산길의 張俊河씨가 변을 당한 후 林春元씨는 政界를 떠났다. 그는 1977년 동교기업을 설립했다. 동교기업은 독립문 메리야스를 생산하던 회사를 인수한 것이다. 수출과 내수 시장을 넓히며 동교기업을 크게 키우고 있던 무렵, 그는 형제처럼 지내던 동아대 총장 鄭樹鳳(정수봉)씨로부터 재단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동아대 재단이사가 되었다.
그는 동아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부산 하단캠퍼스 조성에 힘을 쏟았다. 땅 구입에서부터 단과대학 신축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1979년 10·26을 그는 부산에서 맞았다. 1980년 5·17 직후 동교기업 사장 겸 동아대 재단이사로 일하던 그에게 보안사 소령이란 사람이 찾아왔다. 이 사람은 그를 서울 내자호텔로 데려가더니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실에서 일 할 것을 강요했다. 야당 출신인 그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동교기업을 경영할 때 李圭昇(이규승·예비역 대령)이란 사람과 동업한 일이 있어요. 그 사람은 침입자가 들어오면 경보음을 내는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이 李圭昇씨가 全斗煥 대통령의 장인 李圭東(이규동)씨의 바로 밑 동생입니다. 李圭昇씨 아래가 李圭光(이규광ㆍ예비역 준장)씨인데 李圭光씨가 5·16 직후, 反혁명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李圭東씨 집안은 도와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李圭昇씨와 동업한 게 全斗煥씨 집안과 인연이 되었어요.
또 全斗煥씨에게 고모가 한 분 있는데 그 남편이 동아대 교수였어요. 이 분이 교수 시절 부산 앞바다에서 보물을 찾다가 돌아갔어요. 남편이 죽은 후, 살기가 막막한 全斗煥씨 고모를 동교기업 서울 주재 이사로 발령내고 매월 연탄 200장과 쌀 두 가마를 대 주었어요.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니까 저를 청와대에 근무시키려고 했나 봐요. 하루는 全斗煥씨 장인 李圭東씨가 저를 보자고 했습니다. 서울 강남구 신반포에 있던 아파트에 가니 金宇中 대우그룹 회장이 먼저 와서 앉아 있어요. 조금 후 李圭東씨가 나오더니 金宇中 회장은 앉혀 놓고 저를 방으로 데려가더니 「당신도 정치를 아니까 全斗煥씨를 도와 주라」고 하는 겁니다. 全斗煥씨가 제일 싫어하는 「張俊河 사람」이 어떻게 도와 줄 수 있느냐며 거절하고 나왔지요. 그 후 보안사에서 사람을 보내 저를 내자호텔로 데려간 겁니다. 그 당시 정치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몰라 거절한 겁니다』
金泳三씨의 상도동계와 金大中씨의 동교동계가 민추협을 만들던 1984년, 서울에 올라온 林春元씨는 동교동계 2인자로 통했던 金相賢(김상현)씨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金大中씨는 미국에 머물고 있었고 동교동계는 돈이 없어 고전하고 있었다. 金相賢씨는 그에게 金大中 총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林씨는 민추협 공동의장 金大中씨의 특별보좌역이란 직책으로 동교동계의 이른바 「자금줄」이 되었다고 한다.
1985년 12代 총선에서 민추협을 모태로 탄생한 新民黨(신민당)은 야당 돌풍을 일으킨다. 이 돌풍 덕분에 林씨는 신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처음 금배지를 달았다. 12代 총선이 끝난 1985년 4월, 金大中씨가 미국에서 돌아왔다. 귀국 첫 날, 동교동 안방에서 잠을 자던 李姬鎬 여사가 연탄가스에 중독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몇년째 주인이 없던 빈 집에 갑자기 연탄을 때다 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깨어난 李姬鎬 여사는 집을 수리하기 전까지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며 「동교동」에서 길 하나 건너편에 있는 林春元씨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金大中씨도 따라 들어왔다. 그날 밤, 경찰은 林春元씨가 살던 집과 바로 그 앞에 있던 林春元씨 소유 빌딩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골목에 8개의 감시초소가 설치됐다. 경찰이 이 일대의 출입자를 통제하자 빌딩 1층에 세들었던 은행지점은 다른 데로 이사갔다.
『정치자금부분은 공개하기 힘들지만…』
林春元 의원 집에 들어온 金大中씨는 연금상태여서 밖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金泳三씨가 金大中씨를 만나러 매일 세림장학회 사무실로 출근, 林의원 집은 자연스럽게 야당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林의원은 金大中씨가 신임하는 측근이 되었다고 한다.
『저는 동교동계가 아니고 「張俊河 사람」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金大中씨와 친하지 않았지만, 밖에 나가지 못하는 金大中씨를 대신해 그의 비밀스런 심부름을 맡고 정치자금을 조달하다 보니 신임을 얻은 겁니다. 제가 金大中씨와 단 둘이 얘기할 때는 權魯甲(권노갑), 韓和甲(한화갑)씨는 자리를 비켜야 했지요』
林春元씨에게 곁에서 지켜본 金大中 대통령의 인간적 면모를 물어보았다.
―金大中 대통령은 비서들을 어떤 식으로 대했습니까.
『자기 의사를 전달하고 실행하도록 하지 비서들의 얘기를 잘 듣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서들의 말을 듣는 金泳三씨와는 아주 대조적인 스타일이죠. 金大中씨 앞에서 「안 됩니다」 라고 말한 유일한 사람이 접니다. 그러면 金大中씨는 「자네 왜 안 된다고 그래」 라고 물어요. 안 되는 이유를 죽 설명하면 납득해요. 이렇게 되니까 제 얘기에 무게가 실렸죠. 반면에 嫉視(질시)도 많이 받았죠』
―일 처리면에서 金大中 대통령과 金泳三 前 대통령의 차이라면 어떤 게 있습니까.
『DJ가 YS를 못 당하는 이유가 딱 하나 있어요. YS는 한번 결정하면 죽는 줄 알면서도 무자비하게 그 길로 갑니다. 그러나 金大中씨는 죽는 줄 아는 길이면 절대 안 가요. 두 사람이 맞붙으면 꼭 DJ가 져요』
정치자금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자금은 준 사람이 있고, 받은 사람이 있고, 전달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살아 있으니까 제가 먼저 공개하기가 곤란해요. 준 사람이 주었다고 먼저 입을 열면 제가 사실을 확인해 줄 수는 있어요. 예를 들어 망해 버린 대우그룹 金宇中 회장이나 신동아그룹 崔淳永(최순영) 회장이 돈을 주었다는 얘기를 꺼내면 제가 확인해 줄 수 있다는 것이죠』
1993년 말, 林春元 의원은 肝癌(간암)에 따른 5년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1990년 5월 서울대 병원에서 처음 간암(경동맥 잔색전술;간암에 영양을 공급하는 간 동맥이 폐쇄된 것) 진단을 받고, 1993년 8월까지 13차례 치료를 받았으나 상태는 악화됐다. 일본과 미국의 유명 병원에서 『다른 사람의 肝을 통채로 이식받기 전에는 5년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14代 국회의 임기가 만료된 1996년, 건강이 악화된 그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