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인 연구 - 스포츠紙의 귀재 李祥雨

『스포츠紙의 생명은 첫째도 둘째도 「재미」, 교양을 보태려면 만년 2등. 내 人生의 주인이 되고 싶어 새 신문 창간했다』

  • : 이홍  h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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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게 월급쟁이들의 生理다. 上司(상사)의 구박에 스트레스 쌓이고, 자존심 꺾이고, 승진에 누락되고, 부하에 치이고… 그렇지만 사표쓰는 일도 쉽지 않다.
 
  머리 속을 맴도는 갖가지 상념에 빠져있다가 아내와 자식에 생각이 미치면 사직서를 앞에 놓고 펜을 굳게 잡았던 손에 힘이 서서히 떨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저녁에는 직장 동료들과 소주잔을 돌리며 하루를 무사히 「살아남은」 자신의 처지를 반추해 본다.
 
  월급쟁이들에게 神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하루 하루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上司와 회사의 오너(소유주)가 神이다. 최종적으론 오너가 절대자다. 요즘처럼 불경기로 직원 자르기가 茶飯事(다반사)인 시기에는 오너의 존재는 더 빛을 발한다.
 
  기원을 해도 神의 응답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상사와 오너의 목소리는 순간 순간마다 강하게 전달돼 온다. 내 운명의 결정자가 神보다는 오너라는 것을 절감할 때쯤이 되면 인생은 서글퍼진다.
 
  그러기에 더 늦기 전에 새 삶에 도전하라는 소리가 많이 나온다. 「내 운명의 주인은 나」라는 것을 느낄 방법은 자신이 오너가 되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꿈」으로 끝난다.
 
 
  벤처형 신문사의 출현
 
 
  경향미디어그룹 李祥雨(이상우·63) 회장의 인생 편력은 월급쟁이의 투쟁사를 연상시킨다. 그는 1959년부터 42년 간 신문사 기자로서, 편집국장으로서, 사장으로서 길고 긴 세월을 월급쟁이로 보냈다. 그러나 환갑을 지내고 이제 인생을 마감할 즈음에 신문사 오너로서 새로운 도전의 길에 나섰다. 오는 9월20일쯤을 목표로 새로운 스포츠전문지인 「굿데이」의 창간에 한참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굿데이」는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 나오는 스포츠 전문지다. 가뜩이나 작은 시장에 「또」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 신문은 독특한 구조로 주목을 끌고 있다. 李祥雨 회장을 비롯 몇몇 엔젤들이 투자한 「벤처형 신문사」다. 기존의 스포츠전문지가 母기업인 신문사의 지원 속에 만들어진 데 비해 「굿데이」는 출발점을 달리하고 있다.
 
  신문사 만드는 데는 수백억원대의 만만찮은 자본이 필요하다. 더구나 요즘이 경기의 하강 국면으로 광고시장이 극히 어려운 상황이라 새 신문의 생존과 성공여부는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李祥雨 회장은 스포츠 서울, 스포츠 투데이의 창간을 주도하고 일간 스포츠의 사장으로 일하면서 그때마다 이 업계의 판도를 뒤집어 놓은 인물로 유명하다.
 
  그의 창업의 변은 간단하다.
 
  『어느 날 종이 한 장에 운명이 갈리는 삶이 싫었다』
 
  그 표현에는 월급쟁이의 悲哀(비애)가 절절이 묻어 있다. 그는 신문사 사장까지 올라 월급쟁이로선 대단히 성공한 인물이었음에도 마음 한 구석에 항상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7월31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사옥 3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이사하느라 여기저기 짐이 널려 있고 짐꾼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또 회장 사무실 앞에는 「D-51」이란 구호가 붙어 있어 창간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알 수 있었다.
 
  1m80㎝의 듬직한 체구에 느린 듯하면서도 정확하게 구사하는 말투에서 그는 상당히 신중한 인물이란 인상을 줬다. 반면 안경 너머의 눈빛은 날카롭게 느껴졌다. 우선 신문사 창업에 관한 얘기를 들어봤다.
 
  ―창간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9월20일 창간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무리 없이 작업이 완료될 것으로 봅니다. 그 시기가 프로야구 시즌 막판으로 시장성이 있는 때이고 街頭(가두)판매에서 雨期(우기)를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선택한 거예요.
 
  110명의 기자 중 부장급 이상은 이미 기용했고 기자도 70% 정도 충원한 상태입니다. 우린 이번에 인터넷을 통한 신입 기자 채용이란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공고를 내고 원서를 접수하는 수준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시험까지 보고 평가하는 겁니다.
 
  나이 제한은 있어도 학력 제한은 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특이한 채용방식 때문인지 엄청나게 많은 인원이 몰리고 있어 이들 중 선발하는 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위기가 곧 기회다』
 
 
  ―스포츠紙 창간은 엄청나게 돈이 많이 들고 모험적인 작업이란 평가가 있는데.
 
  『원래는 경향신문이 스포츠紙를 만들겠으니 그것을 맡아 달라는 게 이번 창간의 출발이었어요.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니 이미 여러 차례 창간 작업을 해왔는데 또 피고용인으로 간다는 게 마음에 걸리더군요.
 
  그래서 「펀딩(자금조달)은 내가 하겠으니 대신 경영의 全權을 달라」는 제안을 했어요. 경향신문측이 의외로 이 제안을 수락하더군요. 이후 386세대지만 나와 친밀하게 지내는 벤처기업가 등에게 이런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니 며칠 만에 150억원 가량의 돈이 모이더군요.
 
  그들은 주식에 대한 권한 행사나 경영 간섭을 일체 하지 않을 테니 내 마음대로 경영해 보라는 거예요. 대신 성공적인 운영으로 코스닥에 상장되면 그걸로 본전과 이득을 회수하겠다는 겁니다. 순전히 내 개인에 대한 신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경향신문과의 관계는 어떤 겁니까.
 
  『사업 추진의 출발도 경향신문이고 우리도 그 그늘을 이용한다는 데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경영은 완전히 분리돼 있습니다. 경향신문은 사무실 제공이나 인쇄 등 실물투자 형식으로 60억원을 투자해 25%의 지분을 갖고 있는 대주주일 뿐입니다. 「굿데이」를 만드는 모든 권한은 내가 갖고 있어요. 내 지분은 10%이고 나머지 투자자들은 10% 미만의 지분으로 분리된 상태예요.
 
  전제 투자 규모가 200억원을 조금 넘는데 이 정도면 피크타임 운영자금 100억원을 고려하더라도 충분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새 매체의 포커스를 어디다 두고 계십니까.
 
  『스포츠 전문지의 요체는 재미입니다. 재미에다 교양까지 덧붙이려고 하면 항상 2등이에요. 첫째도 둘째도 재미있게 만들어야 하고 교양은 부속물일 뿐입니다. 그리고 핵심 고객인 젊은층의 욕구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이번 매체에선 IT(Information Technology) 분야를 특화할 겁니다. 젊은 층들의 IT에 대한 욕구가 강한 데다가 수준이 높기 때문에 단순히 이 분야 지면을 할애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수준을 선도할 정도가 돼야 합니다』
 
  ―요즘 시점이 신문을 창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은데.
 
  『맞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위기가 곧 기회인 경우가 많아요. 1985년에 스포츠 서울, 1998년에 스포츠 투데이 창간할 당시도 모두 어려웠어요. 요즘도 신문사들이 경기침체의 여파로 고전하고 있는 시기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대신 이런 시기에는 비용을 줄일 여지가 커요. 일하겠다는 사람이 많으니 인건비 줄일 수 있고 싸게 인쇄해 주겠다는 신문사가 널렸으니 비용이 크게 줄어듭니다. 문제는 독자들의 기호를 얼마나 감지하고 그것을 지면에 반영하느냐는 것이지 주변 여건은 큰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먹물이 되지 마라』
 
 
  李祥雨 회장의 인생 편력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여러 면에서 특이한 존재라는 것이 눈에 띈다.
 
  그리고 두 단어가 머리에 강하게 들어온다. 「파격」과 「도전」.
 
  기자로 출발해 신문사 오너가 된 것도 그렇고 추리소설이란 분야서 확고한 입지를 굳히고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것도 그의 존재를 다시 음미해 보게 하는 일면이다. 그는 스포츠紙의 전문가지만 체육기자를 단 하루도 지낸 적이 없고 젊은 시절 운동을 해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그 방면 최고라는 소리를 듣는다.
 
  李회장은 1938년 경남 산청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부친 李鍾英(이종영·작고)씨는 건설업을 해 지방 유지 대접을 받았고 그의 어린 시절은 유복한 편이었다. 그러나 광복 후 그의 집안은 몰락의 길에 접어든다. 日帝 하에서 사업을 했다는 이유로 기피인물이 된 그의 부친은 야반도주하듯 고향을 등지고 대구에 새 삶을 틀었다. 이후 10여 년 간의 성장기를 이곳에서 보낸 李회장으로선 대구가 고향이라 할 만하다.
 
  대구의 해방 정국은 험했다. 좌우익의 대립이 극심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념의 깃발 아래 죽어나갔다. 1946년 일어난 대구 좌익 폭동도 그 당시 분위기를 보여 주는 사건 중의 하나다.
 
  6·25 동란은 이미 기울어 가던 李회장의 家勢에 결정타를 안겼다. 전쟁터에 나간 그의 형님이 戰死한 것. 이후 그의 부친은 모든 것에 뜻을 잃었다. 술이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부친은 그에게 엄명을 내렸다.
 
  『먹물이 되지 마라』
 
  교육은 우리 사회를 일으킨 근본이다. 「소 팔고 집 팔아 자식 공부시키는 것은 의무」라는 게 우리 부모들의 고정관념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일본 유학까지 시킨 맏아들의 허망한 죽음과 이념 대결 속에 젊은이들이 좌절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공부는 곧 무덤」이란 관념에 빠져든다.
 
  「공부하지 말라」는 부친과 「공부하고 싶다」는 아들과의 「보이지 않는 전쟁」은 그때부터 본격화한다. 그리고 술 속에 사는 부친 대신 그는 중학생이 될 즈음 실질적인 家長이 된다.
 
  『돌아가신 형님 외에 위로 죽 누님들만 있어 생활비를 내가 벌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당시 어린애들이 할 일이란 게 뻔하지 않습니까. 신문팔이와 구두닦이가 주업이지요. 마침 셋집 주인이 영남일보 윤전부 직원이었어요. 그는 매일 퇴근할 때 신문 20여 부를 가져와 나보고 팔라는 거예요. 그 신문을 다 팔고 나면 그는 내게 3할의 배당금을 주더군요.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린 나이라 대들지도 못했어요. 내가 영남일보에 입사한 후 그를 다시 만났는데 과거의 일이 쑥스러웠던지 며칠 만에 회사를 그만두더군요』
 
  李회장은 내세울 만한 변변한 학력이 별로 없다. 그는 대구상고와 현재 영남대 前身(전신)인 청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돼 있다. 대학 졸업장은 그의 사회적 공헌을 높게 평가해 지난해에 학교를 떠난 지 40여 년 만에 母校에서 준 것이다.
 
  『학교 다니는 것이 아주 힘들었어요. 초등학교를 마친 후 돈이 없으니 정상적인 중학교를 갈 수 없었고 대신 YMCA가 운영하는 공민학교 같은 곳을 다녔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주야간을 넘나드는 희한한 공부였지요.
 
  당시 공민학교도 교복을 입었는데 아버님 때문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두통에 교복을 넣고는 「구두닦고 오겠다」고 말하고는 학교 가서 교복으로 갈아 입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무심코 교모를 쓰고 집에 들어섰다가 아버님과 마주쳤어요. 아버님은 엄청 화를 내시면서 모자를 갈기갈기 찢으시더군요』
 
  그가 여기저기를 돌며 곡예 공부를 하는 와중에 부친은 1954년 火病 겸 술병으로 命을 달리한다. 그리고 1955년 그는 오성중학교에서 졸업장을 받고 대구상고에 입학한다.
 
 
  대학 2학년 때 영남일보 공채 합격
 
 
  대구상고에 들어간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야간반이 있어서였고, 둘째는 당시 최고 직업인 은행원이 될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의 晝耕夜讀(주경야독)은 계속된다. 낮에는 신문팔이와 구두닦이를 하고 저녁에는 학교에서 공부에 대한 욕구를 채워나간다. 목표가 확실하기에 힘든 줄도 몰랐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에 대한 열정은 점점 더 거세져갔다.
 
  『빠듯한 하루 일과 속에서도 나는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소위 문학소년이었지요. 그 과정에서 점점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움트더군요. 암만 생각해 봐도 은행서 주판 튕기는 직업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어요. 그래서 대학 갈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일단 대학 문을 두드렸습니다』
 
  청구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직후 그가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일거리였다. 당시 국문과에는 李殷相(이은상), 具常(구상), 申瞳集(신동집) 등 쟁쟁한 교수들이 있었는데 그는 교수들을 설득해 조교 자리를 얻어냈다. 조교 자리는 원래 대학원생이 맡는 게 常例(상례)지만 그의 간곡한 호소에 자리를 내준 것. 또 대학 신문에 기자로 들어가 학자금 지원도 따낸다. 결국 대학 생활도 돈 벌며 하는 특이한 행보를 하게 되는 것이다.
 
  대학 2년 때 그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 영남일보 기자 공채시험에 도전한 것이다. 당시 그는 재학생으로 응시 자격이 안됐다. 그럼에도 필기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했다. 회사측은 난감했다. 『학교 졸업 후 다시 오라』고 권유를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기자생활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으니 꼭 뽑아달라』는 그의 고집에 회사측이 물러섰다.
 
  막상 고집 부리며 입사한 영남일보에서 그는 정식발령을 받은 다음날 사표를 내는 진기록을 세운다.
 
  『발령 첫날 경찰서 순회를 하라더군요. 선배를 따라 종일 경찰서를 돌다 보니 교수님들 얘기가 맞더라구요. 선배들이 경찰서장 서랍을 막 뒤지고 형사들과 옥신각신하는 모습에 질려 버렸어요.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음날 바로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사표를 받은 당시 편집국장께선 이러시더군요. 「신문사에는 외근기자만 있는 게 아니라 내근을 하는 편집기자도 있으니 한 번 버텨보라」고요』
 
 
  경무대는 개들이 노는 무대?
 
 
  기자의 本領(본령)은 쓰는 것이다. 반면 편집기자는 쓰는 것 대신에 일반기자의 글을 독자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 좋은 제목을 달고 포장하는 역할을 한다. 비록 기사를 쓰지는 않지만 제3자的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는 아주 유리한 입장이 될 수 있다. 李祥雨씨의 신문에 대한 노하우 쌓기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직장과 대학을 오가는 그의 행보는 계속 이어졌다. 몇 개월을 보내던 중 어느 날 전혀 예상치 않았던 사건이 터졌다. 「경무대(現 청와대)」를 「개무대」라고 제목을 붙인 기사가 독자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당시는 李承晩 정권 말기로 서슬이 퍼럴 때였다, 당연히 그는 사찰계 형사에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그건 순전히 실수였어요. 당시 기사 내용은 「국산 시계 1호가 제작돼 경무대에 10개가 전달됐다」는 것이어서 나는 「국산 시계 10개 경무대 전달」이라고 제목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10개의 개」와 「경무대의 경」이 뒤바뀐 겁니다. 魔(마)가 끼었는지 여러 번 대장(활자로 된 신문 원판을 복사한 것)을 봤는데도 그걸 못 찾아냈어요. 난리가 났지요. 그렇지만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이 확인돼 며칠 만에 풀려났습니다. 당시는 그래도 사람의 情이 통하는 시기였지요』
 
  비록 실수로 저질러진 일이지만 그는 대구 신문계에서 일약 유명해진다. 대통령의 거처를 「개무대」로 표현한 것은 당시 李承晩 정권의 독재로 심한 자괴감에 빠져 있던 기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이 됐던 것이다. 아울러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하루는 당시 영남일보와 라이벌 관계인 대구일보 편집국장이 보자고 하더군요. 그래 만났더니 느닷없이 종이를 주며 받아쓰라는 거예요. 「나는 일신상의 이유로 회사를 사직하오니 양해해 주십시오」라고요. 또 영남일보서 받은 월급이 9000환이었는데 3만5000환으로 올려 주겠다는 겁니다. 보따리를 싸지도 못한 채 그 날로 신문사를 옮겼어요.
 
  그런데 며칠 후 점심식사 때 영남일보 편집국장과 정통으로 마주쳤습니다. 그 분께 처음으로 「미안하다」고 말씀드리니 「알아, 일 열심히 해」 하시면서 「이번이 처음이지만 자네는 앞으로도 수십 번 직장을 옮길 걸세」라고 뼈있는 한 마디를 하더군요. 사실 그분 말대로 지금까지 10여 번 직장을 옮겼어요』
 
 
  「이방지대」 제목으로 군사재판 회부
 
 
  그가 대구일보로 직장을 옮긴 1959년 9월 이후 대한민국은 격변의 시대에 접어든다. 1960년 4·19와 1961년 5·16 등 현대사의 대사건들이 속속 터져나왔다. 激變(격변)의 시기에 신문사는 동요하게 마련이다. 권력과의 긴장관계가 야기되고 생존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5·16 군사혁명 이후 그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 소설을 쓰겠다는 그의 어릴 적 욕망이 본격화하는 것이다. 그는 洪命熹(홍명희)의 「임꺽정」을 읽고 엉뚱한 생각을 한다.
 
  『내가 쓰면 이거보다는 더 재미있게 쓸 수 있겠다』
 
  그는 회사 간부들을 설득해 진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新임꺽정傳」이 바로 그 것이다.
 
  『그 이전에 나는 중앙에 등단은 안했지만 지방지에 소설을 쓰곤 했습니다. 新임꺽정傳은 時空을 넘나드는 自由奔放(자유분방)한 스타일로 쓰여졌는데 나는 당시 사회상을 비유적으로 비판하고 했어요. 예를 들어 꺽정이가 별 두 개 단 장군을 혼내주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러니 군사정부에선 서서히 나를 주목하기 시작하더군요』
 
  1962년 중반쯤 그는 筆禍(필화)사건에 말려든다. 당시 화폐개혁으로 인한 후유증이 여러 면에서 나타났는데 그런 현상을 쓴 기사에 그가 잡은 「私지폐 활보하는 이방지대」라는 제목이 문제가 됐다.
 
  『당시 화폐개혁을 하면서 소액권을 확보하지 않아 갖가지 문제가 나타났어요. 감포에 사는 학 초등학생이 학교 공납금을 냈는데 학교서 거스름돈이 없으니 잔돈으로 가져오라고 한 겁니다. 그 학생이 문방구에 가서 물건을 사고 돈을 내니 주인 역시 잔돈이 없다며 「현금 보관증」을 써줬습니다. 학생이 돈 대신 「현금보관증」을 학교에 내자 학교측이 그걸 받아들인 게 그 기사의 내용이에요. 요즘 생각하면 얼마나 웃기는 얘깁니까.
 
  신문이 나간 다음날 헌병들이 편집국에 들어서더니 영장을 내보이며 나를 끌고 가는 거예요. 죄가 뭐냐고 하니까 「특정범죄」 운운하며 「너는 사형감」이라는 겁니다. 군사정권의 실체가 뭔지를 순간 알겠더군요.
 
  軍 수사관들의 취조를 받는 동안 나는 그동안 新임꺽정傳을 쓰면서 군사정부에 미움을 샀고 나를 「작살」내기로 작정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제목 중의 이방지대란 以北을 지칭하는 거 아니냐」면서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웁디다. 그러면서 사형 운운할 때는 진짜 소름이 끼치더군요』
 
 
  감방 속의 이야기꾼
 
 
  그는 군사법정에 서야 하지만 별도의 교도소가 없기 때문에 잡범들과 함께 대구 교도소에 수감된다. 폭염 속에 21명이 세 평의 감방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에 그는 전율한다. 감방장과 좌상-좌하-집사로 이어지는 살벌한 감방에서 「먹물」인 그는 견디기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다. 구타는 기본이고 구역질 나는 뼁끼통(대소변용 통)을 끼고 살아야 하는 게 정말 고역이었다. 그는 그때 살아날 궁리를 한다.
 
  『당시 감방에는 전과 7범으로 살인범인 감방장과 강도, 도둑, 강간범 등 온갖 잡범들이 모여 있더군요. 하루 종일 멍하니 좁은 방에 갇혀 있자니 답답하고 그 답답함을 풀기 위해 신참을 괴롭히는 거예요. 옷 벗어, 입어, 무릎 꿇어, 일어나 등 온갖 짓을 다 시키고 그것도 재미없으면 쥐어 박는 겁니다.
 
  가만히 보니 그들을 심심치 않게 해주면 지내기가 나을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제안을 했지요. 내가 재미있는 얘기를 하겠다고. 당연히 오케이지요. 그날부터 나는 학창 시절에 읽었던 「괴도 루팡」, 「셜록 홈즈」, 「아가사 크리스티 시리즈」, 김래성의 「검은별 이야기」 등 온갖 추리 소설을 떠들기 시작했어요. 거짓말도 적당히 섞어가면서 말입니다.
 
  죄수들은 잡범인 데다가 단순해 도둑이나 범인 잡는 추리물을 굉장히 좋아하더군요. 그 일을 한 지 사흘 만에 나는 졸지에 감방장 다음 서열인 좌상으로 승격됐습니다. 어디서건 필요한 놈은 대접받는 거지요.
 
  감방 안은 무지하게 더우니까 「졸병」은 옷을 벗어 「높은 분」들을 위해 연신 부채질을 해 줘야 합니다. 나도 부채질을 받는 신분이 됐어요. 또 당시는 감방서 담배도 피우던 시절인데 감방장이 피던 담배를 두 번째로 얻어 피우게 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추리 소설이란 게 몇 권 됩니까. 한 일주일 지나니까 얘깃거리가 바닥이 났고 분위기가 삽시간에 반전되더군요. 괄시가 시작된 겁니다. 감방장이 갑자기 발로 내 가슴팍을 내지르더라구요. 내가 「왜 그러냐」고 항변했더니 「망가진 라디오는 때려야 소리가 난다」는 겁니다.
 
  그날 밤부터 저는 잠을 못 잤습니다. 내일도 살아 남기 위해선 뭔가 얘깃거리가 필요했고 읽은 것은 거덜이 났으니 만들기 시작한 거지요. 밤마다 나는 세 가지 정도 얘기를 만들어냈어요. 추리물은 구성도 재미있어야 하지만 반드시 反轉(반전)과 二重구조 등 특이한 요소가 필요해요. 그러니 얘깃거리를 만드는 게 쉽지는 않지요. 그러나 필요하니까 만들어지더라구요.
 
  그때 생존을 위해 머리를 쥐어짜냈던 것이 대충 100개 정도 되고 이게 추리작가가 된 밑거름입니다』
 
 
  만삭 아내와의 1초 간 再會
 
 
  「窮則通(궁즉통)」이라고 했다. 「궁하면 통한다」는 이 말은 위기에 처해도 活路(활로)는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窮則通을 생활 속에서 體得(체득)한 인물이다.
 
  家勢가 기우니 어린 나이에도 스스로 먹거리를 찾아 나선 일이라든지, 대학도 돈 벌어가며 다닌 것, 자격도 없이 기자시험에 도전해 뜻을 관철한 것, 감방이란 死地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터득한 것 등은 모두 그의 뛰어난 생존능력을 보여 주는 일면들이다. 오히려 그는 위기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며 새로운 영역을 넓혔다.
 
  감방에서 그는 가끔 軍 수사관의 호출을 받아 외부 구경을 했다. 사상범이라며 면회마저 금지된 그로선 유일한 세상과의 통로였다. 스리쿼터 트럭에 실려 교도소를 처음으로 나섰을 때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사람과 눈빛이 마주친다. 만삭의 아내였다. 아내는 그가 감방에 간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도소 정문 앞을 서성이며 남편과의 再會를 고대해 왔던 것이다.
 
  『불과 1, 2초 눈빛이 마주쳤어요. 땡볕에 그을린 얼굴에 핼쑥해진 모습이 순간 스쳐가더군요. 눈물이 쏟아지데요. 차 속에서 내내 울었습니다.
 
  당시 수사관들은 사형감이라고 했지만 내가 생각해봐도 죽이진 않겠다는 판단이 서더군요. 그렇지만 군사정권이 시범적으로 뭔가 보여 줄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자신이 없어집디다.
 
  그러니 결혼 한 지 1년밖에 안 된 아내와 뱃속의 아이가 한없이 불쌍해지는 거예요. 수십년이 지난 후 아내가 암 투병을 할 때 내 머리 속에선 항상 그때 아내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밤. 『2715호 짐싸고 나와』라는 간수의 목소리가 울렸다. 순간 감방장이 그의 어깨를 탁 쳤다.
 
  『야, 석방이야』
 
  그의 감방 생활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간에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범죄자의 심리나 행동양태 등은 앞으로 그가 추리작가로 도약하는 든든한 밑천이 됐다. 또 삶은 운영하기 나름이란 생존방식도 터득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직장 동료 선후배들의 따뜻한 환영 속에 교소도문을 나선다.
 
  1966년, 그는 서울행 기차를 탄다. 朴正熙 정권이 안정을 찾으며 경제발전이 가속화하자 중앙지들이 增面(증면)하며 지방 人材들을 속속 서울로 스카우트해 간 것이다. 대구일보 선배인 李禹世(이우세·서울신문 사장 역임)씨는 조선일보로 향했고 그는 한국일보를 택했다.
 
 
  『나의 선생님은 張基榮 회장』
 
 
  한국일보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돼 李禹世씨가 그를 찾았다. 『나와 함께 조선일보서 일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완곡히 거절했다. 옮긴 지 얼마 안 돼 또 자리를 뜨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다만 이 한 마디를 던졌다.
 
  『선배님께서 다음에 일을 같이 하자고 하신다면 그때는 반드시 만사 제쳐놓고 가겠습니다』
 
  20년 후 이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일보서 그는 평범한 편집기자로 일하며 1969년 편집부장으로 승진한다. 당시 한국일보 社主인 張基榮씨는 신문에 대한 집착이 대단해 기자들에게 엄청 많은 것을 요구했고 특히 편집부장은 그의 밥이었다.
 
  『張基榮 회장은 욕심도 많고 신문내는 아이디어도 많은 분입니다. 나의 경영 노하우 선생님은 張회장이에요. 그러나 부하로서 견디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역대 편집부장들은 社主에게 혼나면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일이 맘에 안 들면 「너 이놈시키, 조선일보 스파이지」라고 막 화를 냅니다. 나도 여러 차례 사표를 냈어요.
 
  그럴 때 그분은 「니가 맘대로 사표를 내, 니가 그동안 끼친 손해가 수천만원어치는 될 텐데 그거 다 갚고 나가」라며 소리칩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개인적으로 불러요. 그분은 슬그머니 봉투를 내밀면서 「이 사람아 그건 해본 소린데 머리에 남겨두나, 가서 술이나 한잔 해」라고 합니다. 참 사람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더군요.
 
  그리고 독자의 마음을 잘 읽어요. 하루는 부르길래 가봤더니 「李부장, 解夢(해몽)을 앞으로 시리즈로 내봐」 그러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신문에 그런 미신을 싣느냐」고 반대했더니, 「당신이 독자 마음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라며 강행시키더라구요. 실지로 그 시리즈의 반향이 엄청났습니다.
 
  張회장의 독자 마음을 읽는 능력, 그것을 현실화하는 추진력, 반짝반짝하는 아이디어는 한국일보가 급성장하는 배경이었어요. 요즘 나도 편집이나 경영할 때 그 분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는 반문을 많이 해봅니다』
 
  그는 그후 10여 년 간 한국일보에서 꾸준히 일한다. 종합편집부장, 부국장, 국차장, 편집위원, 전산편집운영국장 등 편집기자 출신으로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자리를 거친다. 「화분 살인 사건」 등 추리소설을 열심히 쓰는 것 외에는 별 특징 없는 시간이었다.
 
 
  스포츠 모르는 스포츠紙 편집국장
 
 
  1985년은 그에게 전환점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 세대교체가 빠른 신문사의 생리로 볼 때 이제는 退物(퇴물)로 경영진의 눈치를 열심히 살필 때였다. 운명은 항상 예고 없이 노크한다. 그해 초 당시 서울신문 사장을 하던 李禹世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네 언젠가 내가 부르면 온다고 했지. 지금이 그때야. 우리가 스포츠 신문을 창간하는데 당신이 편집국장을 맡아 줘야겠어』
 
  의외의 제안이었다. 그는 스포츠 관련 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스포츠 기자는 물론 스포츠면 편집자도 안 해봤다. 다만 그는 여러 차례의 訓手(훈수)로 일간스포츠의 발전에 기여해왔을 뿐이다.
 
  만화가 高羽榮(고우영)씨를 데뷔시켜 성인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연 것이나 추리작가 金聖鍾씨를 등장시켜 「여명의 눈동자」 등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당시로선 파격이지만 이제는 스포츠 전문지에 보편화된 여러 방식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러기에 그는 한때 일간 스포츠 편집국장을 自請(자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경영진에 의해 무참하게 무너진다. 그는 쓰린 속을, 추리소설을 일곱 군데나 연재하는 강행군으로 달랬다. 바로 이 시점에 제안이 온 것이다.
 
  『나도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李禹世 사장은 내가 일간 스포츠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것을 들은 모양입니다. 수락했지요. 내 꿈을 펼칠 계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새 신문인 만큼 얼마든지 나의 아이디어와 방식이 통할 것이란 게 큰 매력이었습니다』
 
  서울신문 쪽에서의 저항도 거셌다. 『본지에도 人材가 많은데 왜 외부에서 들어오느냐』, 『스포츠 경력도 없는데 어떻게 스포츠紙를 운영하느냐』, 『도대체 李祥雨가 누구냐』 등 주변에서 들끓는 비판의 소리를 그는 수없이 들었다.
 
  그러나 성공할 자신은 있었다. 일을 하다 잘 풀리려면 「뭔가가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 뭔가가 보인 것이다.
 
  『당시 스포츠紙는 일간 스포츠 하나만 제작돼 경쟁이 없는 체제였어요. 이 때문에 기사나 구성이 상당히 무기력했습니다. 적은 변화만 줘도 승산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목표는 확고한 1위였습니다. 때문에 변화가 아니라 변혁을 시도했지요. 나는 당시 40代 후반이었지만 스포츠紙 독자층인 20代 전후 세대의 욕구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면 무조건 이기는 거지요.
 
  나의 변혁의 줄거리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우선 1면은 물론 대부분의 지면을 컬러화하는 겁니다. 다행히 나는 1985년 초 한국일보 전산운영국장으로 호주에서 신문 전산화 과정을 철저히 배웠고 이것을 스포츠 서울에 적용할 기회가 생긴 겁니다. 당시 컬러면은 보통 5시간 이상 걸렸는데 나는 1시간으로 줄이는 기법을 적용하게 된 겁니다.
 
  둘째는 젊은 층의 구미에 맞게 題號(제호ㆍ신문명을 쓴 것)부터 컬러화된 도안체로 쓰고 신문의 모든 기사를 가로쓰기로 전환한 겁니다. 스포츠 서울이 국내선 처음으로 全지면 가로쓰기를 한 신문이에요.
 
  셋째는 기사 스타일을 일신했어요. 종전 스포츠 기사는 6하원칙에 맞춰 쓰는 것이었는데 나는 기사 작성을 주관화시켰습니다. 스코어는 나중에 간략하게 쓰면 되고 사람에 초점을 맞춰 쓰게 한 거지요.
 
  예를 들어 宣銅烈(선동렬)의 투구내용이 신통치 않았을 경우 단순히 그 현상을 쓰는 게 아니라 어제 밤에 술을 먹었는지 아니면 딴 짓을 했는지 그 뒷얘기를 풀어서 쓰라는 거지요.
 
  이를 위해 나는 기자들에게 일간 스포츠를 절대로 보지 말라는 지시까지 했어요. 기존 스타일을 모델로 하다보면 결국 똑같아지고 2등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지요』
 
 
  「돌팔이」가 터뜨린 잭팟
 
 
  그는 스포츠 서울 편집국장 초창기에 「돌팔이」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기존의 틀을 깬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법이다. 특히 고참 기자들의 반발은 대단했다. 그러나 그 「돌팔이」의 무모하다 싶은 도전이 잭팟을 터뜨렸다.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스포츠 서울이 일간스포츠 판매부수를 넘어서는 異變(이변)을 연출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서울신문 같은 親與 매체에는 상당히 불리한 여건이었기에 스포츠 서울의 성공적 데뷔는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는 6월 항쟁 등 민주화 물결이 휩쓸고 있어 서울신문 같은 매체는 위기감이 고조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게다가 스포츠紙의 主고객이 대학생들이고 이들 정서의 주류가 反정부적이란 점을 고려하면 스포츠 서울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었어요.
 
  그러나 나는 스포츠紙는 종합 일간지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종합일간지는 역시 긴 연조에 의한 正統性(정통성)과 正論(정론)에서 나오는 무게가 신문의 聲價(성가)를 좌우합니다. 반면 스포츠紙는 파격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해요. 신문은 매일 나오지만 편집도 이리저리 다양하게 해 볼 필요가 있어요. 또 독자들이 「아 이런 것도 있었나」 하는 호기심에 자극을 줄 기사도 필요합니다. 기존의 틀로 보면 기사가 아닌 것도 스포츠紙에선 과감히 시도해 볼 수 있는 겁니다. 게다가 만화나 연예기사의 비중을 크게 높여 젊은층의 기호를 최대한 지면에 활용했던 게 적중한 거지요』
 
 
  9년에 걸친 아내 간병
 
 
  李禹世 서울신문 사장은 李祥雨씨 기용으로 한동안 곤혹을 치렀다. 엉뚱한 인사라는 주변의 비판은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러나 막상 스포츠 서울이 발간되고 성공적이란 평가가 나자 그는 졸지에 名馬(명마)를 알아본 「伯樂(백락)」으로 탈바꿈한다. 스포츠 서울은 서울신문에 부담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이제 본지의 적자를 보전해 주는 孝子가 된 것이다.
 
  李祥雨씨의 화려한 변신은 이후 출세 가도의 발판이 된다. 그는 이후 4년여 간 편집국장으로 장기 집권하고 상무, 전무를 거치며 최고경영진으로 가는 수습과정을 걷는다.
 
  스포츠 서울 창간을 즈음한 시기는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자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기자로서의 꿈을 이루고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에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사는 참 복잡하다. 그가 행복을 만끽하던 그 시점인 1986년 아내 洪英玉씨가 不治의 병에 걸린 것이다. 치아 밑부분에 생긴 암이 폐까지 전이돼 1년여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가 내려진 것이다.
 
  『기자란 게 성실한 家長이 되기는 힘든 직종이죠. 나 역시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내에게 별 신경도 쓰지 못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의사를 통해 아내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통고를 받았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군요.
 
  나는 직장을 그만두려고 했어요. 직장 생활을 할 만큼 했고 아내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에 사표를 내려한 겁니다. 그런데 아내가 적극 반대하더군요. 「남자는 뭔가 하고 있을 때가 행복하다」면서 끝내 말리더군요. 사표는 내지 않았지만 그후 회사에서 퇴근하면 일찍 집으로 돌아가 아내 간병하는 것이 일과가 돼버렸습니다』
 
  사그러져 가는 아내의 삶을 연장시키는 그의 투쟁은 그후 9년 간 계속된다. 洋醫(양의)들이 1년여밖에 남지 않았다고 진단했기 때문에 그는 다른 곳에서 代案을 찾기 시작한다. 쉬는 날이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민간요법을 전수받았고 좋다는 약은 얼마든지 돈을 들여 샀다. 그리고 집안에는 병원에 못지않은 시스템을 갖추고 그가 주사도 놓고 간병을 도맡아 해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암 걸린 사람을 살려낼 순 없더군요. 대신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있다는 것은 알았어요. 나는 요즘도 암에 걸린 사람들을 만나면 「욕심을 갖지 말고 대신 생명 연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권고합니다. 나의 경험으로 보면 대부분의 암환자들은 상당 기간 생명 연장이 가능해요』
 
  아내는 1994년 그의 곁을 떠났다. 경상도 사내답게 무뚝뚝한 일면이 강한 그는 당시의 감정을 전하진 않았다. 다만 1998년 그의 華甲(화갑)기념으로 낸 작은 책자에서 둘째 아들이 쓴 글이 그 편린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 아버지를 하염없이 바라보셨지요. 한없는 신뢰와 사랑이 담겨 있던 어머니의 마지막 눈길을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아버지만을 의지하고 사셨습니다. 「느이 아버지 같은 사람이 또 있을 줄 아느냐」는 평소의 말씀이 절로 되살아났습니다>
 
  직장생활에는 기복이 있게 마련이다. 잘 나가는 것 같던 서울신문 근무 때도 그는 엉뚱한 口舌數(구설수)에 말려 고전하기도 했다. 盧泰愚(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0년대 초반 그는 당시 황태자로 불리며 大權에 야심을 보였던 朴哲彦(박철언)씨의 私組織(사조직)인 월계수회 멤버라는 소문에 곤혹을 치렀다.
 
  『나는 사석에서 朴哲彦씨를 만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신문사 간부로 공식석상에서 악수만 몇 차례 한 적 있어요. 그런데 모 주간지가 나를 월계수회 멤버라고 보도했고 그 소문이 쫙 퍼졌어요.
 
  기사의 근거는 내가 대구 출신이란 점입니다. 나는 그 주간지를 상대로 고소를 해 승소했어요. 그러나 그 후유증이 결국 발목을 잡더군요』
 
  1993년 金泳三 정권이 들어서자 서울신문은 한동안 동요한다. 당시 서울신문 사장을 노리는 모 인사는 『李祥雨는 朴哲彦 계열이라 몰아내야 한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고 그의 입지는 상당히 위축된다. 결국 그는 일일이 대꾸하기도 싫고 아내의 병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는 생각에 사표를 던져 버리고 말았다.
 
 
  「악녀 두 번 살다」는 40만 부 팔려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한국 추리작가협회 회장직을 계속 맡고 있다. 한국일보 시절 뜸했던 그의 추리소설 쓰는 일은 서울신문으로 옮겨온 후 가속화된다.
 
  「화조 밤에 죽다」, 「안개도시」, 「악녀 두번 살다」, 「여자는 눈으로 승부한다」 등 추리소설 10여 편이 속속 간행된 것이다. 「안개도시」는 영화화됐고 「악녀 두 번 살다」는 무려 40만 부 이상 팔려나가 그에게 적지않은 돈을 안겨 주기도 했다.
 
  그 시절이 신문사 간부로서, 아내의 간병인으로서 할 일도 많고 걱정도 많은 시기였음에도 그런 多作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천생적인 부지런함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 새벽 4시면 일어납니다. 세상이 조용한 그 시간에 책도 읽고 글도 쓰고 텔레비전 녹화해 놓은 것 보고 영화도 봅니다. 특히 원고가 밀린 상태라면 아침 시간 3시간여 동안에 200자 원고지로 50장 이상 쓰곤 해요. 스포츠紙 관계자로 세상 젊은이들의 마음을 읽기 위해 영상매체를 많이 접하는 편입니다』
 
  서울신문을 물러난 후 그는 2년 가까운 세월을 쉰다. 그러나 아내의 투병 말기이고 보면 쉰다기보다는 하루 종일 긴장감이 도는 시절이었다. 1995년 초 그의 친정인 한국일보에서 호출이 왔다.
 
  『한국일보를 떠난 후 일간 스포츠를 박살낸 주역인 내게 일간 스포츠 부사장 자리를 제안했을 때 참 곤혹스럽더군요. 내부 반발이 있을 것도 우려됐고요. 그러나 다행히 여러분이 환영해 줘서 고맙게 생각했어요.
 
  일간 스포츠로 돌아가서 나는 題號 바꾸는 작업부터 강행했습니다. 그동안 일간 스포츠의 「일간」이란 부분을 한자로 해왔는데 그걸 한글로 바꾸자고 한 거지요. 창업자가 만든 제호를 어떻게 바꾸느냐는 반발이 있었지만 가두조사 통계를 근거로 실천했습니다.
 
  또 제목의 컷을 활자로 바꾸고 PC 통신을 적극 활용하는 방법을 기자들에게 강제로 시켰습니다. 일단 젊은 신문으로 탈바꿈하자 일간 스포츠가 다시 정상으로 올라서는 역전 현상이 나오더군요』
 
  이즈음 스포츠紙는 春秋戰國 시대에 접어든다. 일간 스포츠, 스포츠 서울, 스포츠 조선 등이 엎치락 뒤치락 혼전을 벌이고 하루 하루에 一喜一悲가 엇갈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가두판매가 승부처인 스포츠紙의 특성상 그날 메뉴 하나하나로 승패가 뒤바뀌는 대접전이 이어진 것이다. 그는 일간 스포츠를 회생시킨 덕분에 한국일보 부사장, 일간 스포츠 사장 등으로 차근차근 승진한다.
 
 
  폭탄선언으로 잘리다
 
 
  모난 돌은 깨지기 쉽다. 그는 성격 자체는 모난 사람이 아니나 사고와 발상이 파격적이라 잘 부딪쳤다. 특히 그런 발상이 시대를 훨씬 앞설 경우 기피인물이 되기 쉽다. 1997년 말 그는 임원회의 석상에서 폭탄 발언을 했다.
 
  『한국일보는 빚이 많으니 만일 위기가 닥치면 치명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지금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일간 스포츠와 서울경제를 팔면 빚의 상당부분을 가릴 수 있을 것이고 나머지 빚은 외채를 빌려와 갚으면 은행 금리 부담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아울러 합리적인 수준으로 감원도 해야 한다』
 
  그의 이 발언은 IMF 사태가 터지기 전에 한 것이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그는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代案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시기가 너무 빨랐다. 또 한국일보 경영진에는 큰 충격을 줬다. 창업주의 유산인 일간 스포츠 등을 팔라니 감정을 거스린 것이다. 그리고 그에겐 「혁명가」라는 비아냥 섞인 닉네임이 붙었다. 다음해 2월 실시된 임원 선임에서 「당연히」 탈락했다.
 
  7개월 후 한국일보 경영진은 그를 다시 찾는다. IMF 사태의 진전 속에 고전하다 보니 李祥雨씨의 예전 주장이 모범답안이었음이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한 발 늦어 있었다. 그때는 이미 넥스트 미디어 그룹이 창간할 예정인 스포츠 투데이 사장으로 내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넥스트 미디어의 趙希埈(조희준) 회장과는 몇 달 전부터 만나며 상의해온 사이입니다. 그러다가 1998년 10월쯤 스포츠 투데이로 가기로 결정하고 趙회장에게 승락했어요. 그런데 바로 다음날 한국일보 경영진이 나의 컴백을 제안하는 겁니다. 先約을 무시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며 사양했지요』
 
  당시 네 번째로 등장한 스포츠 투데이에서 그는 또 변신한다. 신문을 올컬러화하고 지하철에서 쉽게 볼 수 있도록 신문의 폭을 줄이면서 대신 가운데를 붙이는 시도를 한다. 이것 역시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다. 또 독자층이 노령화하며 기존 스포츠紙가 덩달아 늙어가고 있다고 판단해 10代를 집중적으로 파고들 메뉴를 승부처로 삼는다. 그의 예상은 잘 맞아떨어졌다. 스포츠 투데이는 후발주자면서도 순식간에 판도를 바꿔놓은 위력을 발휘했다.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신문은 스포츠조선뿐이다. 스포츠 서울은 편집국장으로, 일간 스포츠와 스포츠 투데이는 사장으로 그의 입김을 불어넣었고 이번에 창간되는 굿데이는 오너 겸 회장으로 활약하게 된다. 스포츠신문 경영 철학에 대한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졌다.
 
 
  스포츠紙의 요체는 재미
 
 
  ―스포츠란 게 뭡니까.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입니다』
 
  그는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이 없었다. 엔터테인먼트는 오락, 여흥 등 보고 놀고 즐기는 것을 말한다. 그에게 스포츠는 올림피즘도 아니고 기록을 위해 뛰는 선수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도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스포츠를 보고 즐기는 多衆만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바로 그 점이 그의 약점이자 강점이다.
 
  ―李회장께선 스포츠紙의 활성화에 결정적 역활을 했지만 반면 性의 상품화라는 부정적 역활도 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옷 벗기기 경쟁은 내가 선도한 것도 아닙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적나라한 포르노를 볼 수 있는 상황인데 신문에 자극적인 것 실어봐야 눈길을 못 끌어요』
 
  ―스포츠紙의 본질은 뭡니까.
 
  『독자들에게 재미있는 것을 전달하는 겁니다. 스포츠, 연예, 만화 등이 주축이 되긴 하겠지만 재미를 전달하는 방식은 그외에도 많습니다』
 
  ―그럼 재미의 본질은 뭡니까.
 
  『재미란 同感(동감)을 자아내는 데서 생깁니다. 기사를 보면서 독자가 「맞아 그래」라는 공감을 가져오면 그 기사는 성공입니다. 또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재미의 요소입니다. 「아 그게 아닌데」라면서도 「음 그럴 수도 있겠군」 하는 발상의 전환을 야기하는 것이지요. 또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는 일도 재미의 요소입니다』
 
  그의 「재미론」은 좀 형이상학적이다. 만화나 연예 가십 같은 기사 자체의 재미보다는 재미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설명하고 있다. 역시 상당한 연구가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이다.
 
  ―스포츠紙의 이상적인 구성과 배합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독자를 분석해 보면 스포츠에 관심이 있지만 신문구매를 결정하는 것은 연예기사입니다. 스포츠는 상황 파악에, 연예는 재미에 기여하는 거지요. 여기다 알려 줌으로써 재미를 느끼는 것도 필요한데 그게 바로 IT 같은 분야입니다』
 
 
  『이제 내 인생을 찾았다』
 
 
  ―우리 스포츠紙에 대해 평가해 주시지요.
 
  『일본은 10여 개의 스포츠紙가 있고 미국엔 눈에 띄는 종합적인 스포츠紙가 없는 상황입니다. 스포츠紙에 관한 한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합니다. 面數(면수)라든지, 그 내용 등에서 일본은 우리를 못 따라와요. 일본 스포츠紙는 대개 20면 전후이고 내용도 엉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40면 가까이 내고 엔터테인먼트의 모든 것을 보여 주고 있어요』
 
  ―성공 비결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주변에선 내가 성공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내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놈이 무슨 성공입니까. 다만 앞서 얘기했듯이 스포츠紙 분야서 우리 것을 세계 정상 수준에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운이 좋았어요』
 
  ―추리작가라는 점이 스포츠紙 운영에 도움이 됐습니까.
 
  『추리소설은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고 反轉을 통해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필요한데 이런 작업이 스포츠紙와 비슷해요. 나름대로 변신을 수시로 한 것도 아마 그런 훈련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제 오너로서 새 길을 가는데.
 
  『얼마 전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을 만났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지금 나이에 왜 또 고생을 하려고 하십니까」라고요. 사실 신문 창간은 엄청 고통이 따르는 작업입니다. 초창기엔 거의 1년 간 집에 못 들어가요.
 
  나는 그동안 운이 좋아서 하는 일마다 잘 되긴 했지만 그 성공의 이면에는 항상 허무감이 배어 있었습니다. 성공해봐야 어느 날 종이 한 장 붙이면 끝이라는 한계를 지울 수 없었어요. 그래서 진짜 내 작품을 만들어보겠다는 다짐을 항상 해왔고 지금 기회가 온 겁니다. 그동안 세 번에 걸쳐 스포츠紙 연습을 해봤고 이제야 진짜 實戰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인생을 비로소 찾은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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