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俊吉의 글로벌 문화 기행] 그레고리 헨더슨 - 그 빛과 그림자

  • : 김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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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俊吉
1940년 출생. 경기고·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서울신문·조선일보 기자, 駐프랑스·스웨덴 대사관 공보관, 駐美 대사관 공보공사 역임. 著書로 「서양문화 뒤집어 보기」가 있다.
1990년 6월 뉴욕 총영사관 문화원장으로 발령을 받아 나이 50에 비로소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무엇보다도 아쉬웠던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미국에 가면 꼭 만나보고 싶었던 그레고리 헨더슨씨가 이미 1988년에 작고했다는 사실이었다. 은퇴 후 작고하기까지 그가 살았던 맨해튼 북부 허드슨 강변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11번지 아파트로 찾아가 한국 역사에 대한 그의 시각을 중심으로 토론을 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레고리 헨더슨―1950年代와 60年代에 걸쳐 駐韓(주한) 미국대사관 문정관, 정무 참사관을 지낸 노련한 한국 통으로 그의 저서 「한국:소용돌이 정치(Korea:The Politics of the Vortex)」는 한국을 취재하러 오는 외신 기자들의 고전적인 교과서였다. 이를테면 도쿄 외신기자 클럽 도서실에서 지금까지 가장 많이 열람된 책으로 알려진다.
 
  신문기자들뿐만 아니다. 한국에 부임하는 외교관들, 미국과 유럽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누구나 이 책을 읽는다. 영어로 씌어진 한국 현대 역사책으로서 이 책만큼 풍부한 정보를 깊이 있게 다룬 예가 드물기 때문이다.
 
  특히 1960~70년대 평화 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찾아온 미국의 젊은이들은 이 책을 읽고 한국의 정치 현실에 접근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미국의 한국학계를 주도하는 평화봉사단 출신 한국학 학자들,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나 하버드 대학의 카터 에커트 교수도 이 책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내 학계에서도 현대 한국 정치를 논하는 데 그레고리 헨더슨의 시각이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나로서는 사실 해외공보관에서 일을 하다가 이 책과 만났다. 그러다 보니 1968년 하버드 대학에서 출판된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부끄럽게도 1980年代 후반이었다. 이 책의 문제는 한 마디로 현대 한국이 왜 민주적 근대화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로 압축된다. 저자는 한국이 민주적 근대화에 실패한 이유를 한국 역사의 지정학적 한계, 한국 사회의 동질성, 중앙에 집중된 권력구조, 중간 집단이 없는 제도화가 덜 된 「덩어리 사회(mass society)」 등 역사 문화적 특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해박한 정치철학적 분석 틀에 의한 독특한 시각이다.
 
  그레고리 헨더슨의 책을 읽으면 한편으로는 저자의 한국 역사·문화에 관한 풍부한 지식에 놀라면서도 학문적인 객관성보다는 미국 외교관으로서의 편견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나는 그의 시각에 많은 부문 동의할 수 없었다.
 
  뉴욕에 근무하는 동안 그곳 신문기자, 학자, 문화인들과 한국 문제를 얘기할 때마다 나의 論旨(논지)는 언제나 그레고리 헨더슨 비판을 중심으로 전개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헨더슨 視覺(시각)은 한국 문제 토론을 위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일종의 테제였다.
 
  미국에서 뉴욕총영사관 문화원장으로 또 그후 워싱턴 駐美 대사관 공보공사로 일하면서 그레고리 헨더슨은 줄곧 나의 정신적 극복 대상이었다. 한국이 아직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서울의 미국 대사관은 한국의 학자, 언론인, 문화인 등 많은 지식인들의 재정적인 스폰서였다. 대사관 문정관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장학금과 교환교수 프로그램 및 여러 가지 연구비 지원을 결정하는 위치인 만큼 당시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서울의 문화 권력이었다. 그레고리 헨더슨은 이런 지위를 나름대로 활용하여 개인적인 知的(지적) 지평을 넓힌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르네상스 맨의 한국 문화 딜레탕티즘
 
  과연 그레고리 헨더슨은 르네상스 맨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서에도 알 수 있지만 한국이라는 특수한 역사를 私的(사적)인 경험을 자료로 기술하면서도 윌리엄 콘하우저의 「덩어리 사회」 개념과 같은 1950年代 정치학 이론 틀에 맞추어 보편적 학설을 전개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文化史(문화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오랜 한국 근무를 통하여 도자기 등 한국 전통 문화재 수집가로도 알려졌다. 광복 이후 한국에 근무한 미국 외교관과 군인들 중에는 한국 전통 문화재를 수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 하버드 대학 「아서 새클러 미술관」에 소장된 「그레고리 헨더슨 컬렉션」처럼 문화사적인 의식을 가진 수집가는 흔치 않다.
 
  1993년 初 하버드 대학 아서 새클러 미술관 1층과 2층에서 그레고리 헨더슨의 한국 도자기 컬렉션 특별전을 가졌다. 헨더슨 컬렉션은 구석기 시대의 토기부터 삼국 시대의 신라 토기, 고려 자기, 조선 자기에 이르는 한국 도자기 역사를 연대별로 체계화한 개인 소장품들이다.
 
  한국 도자기 개인 소장품으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의 「브런디지 컬렉션」과 그 양과 질에서 비교할 수 없는 아마추어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한국 도자기 개인 컬렉션으로 세계 최고라고 알려진 일본 오사카 박물관 「아다카(安宅) 컬렉션」의 유려한 명품 수준에 미치는 물건은 없다.
 
  사실 외교관이라는 봉급쟁이 신분의 그레고리 헨더슨으로서는 세계적인 귀족계급에 속하는 브런디지 IOC 위원장처럼 값비싼 진품들을 사 모을 능력이 안 되었다.
 
  신라 토기나 구석기 유물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1950~1960年代에는 마음만 먹으면 거저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고려 청자나 조선 자기들은 제법 값이 나갔다. 그러나 헨더슨 컬렉션의 고려 청자와 조선 백자들은 하나같이 온전한 물건이 없었다. 명품이지만 한번 깨진 조각을 붙인 것들이다.
 
  그래서 헨더슨은 값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 깨진 조각을 땜질한 고려 청자와 조선 백자를 보면 누구나 헨더슨의 예술애호 정신(dilettantism)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문화재 도둑이라는 누명
 
  한국 문화재 수집가로서 그레고리 헨더슨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은 일반적으로 좋지 않다. 미국 대사관의 「문화 권력」을 남용하여 우리 문화재를 헐값에, 때로는 거저 수집했다는 비난. 뿐만 아니라 더 결정적인 것은 그가 한국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은퇴할 때 많은 문화재들을 불법적으로 반출해 나갔다는 고발이다. 그러나 지금 그가 남긴 헨더슨 컬렉션의 대표적인 수집품들을 보면 그런 비난과 고발이 지나친 오해라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문화재 불법 반출이라는 고발은 적어도 헨더슨 컬렉션을 관람한 사람이라면 터무니없는 비방이라는 사실을 대번 알 수 있다. 깨진 청자와 백자가 무슨 문화재라는 말인가. 엄청난 불법 도굴과 문화재 밀거래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는 우리가 한 르네상스 맨의 한국 문화사 딜레탕티즘(예술·학원 등을 취미로 즐기는 태도나 경향)을 음해하는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아시아 학예부장을 오래 지낸 프린스턴 대학의 웬퐁(Wen Fong)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헨더슨은 생전에 자신의 한국 도자기 컬렉션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팔려고 했다. 당시 메트(MET)는 일본과 다른 아시아 나라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빈약한 한국 미술품 구입을 고려하고 있었다. 헨더슨은 자신의 컬렉션 값으로 100만 달러를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메트가 이 컬렉션을 구입할 경우 자신을 한국 미술 담당 큐레이터로 고용하라는 것.
 
  웬퐁 교수에 의하면 당시 메트는 헨더슨 컬렉션 구입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물론 컬렉션 鑑定(감정)은 웬퐁이 맡았다. 전문가의 계산으로 헨더슨 컬렉션은 100만 달러 가치가 없었다. 또 미술사 학위도 없는 아마추어 애호가를 전문 큐레이터로 채용하는 문제도 메트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것. 그러나 헨더슨은 끝까지 100만 달러를 양보하지 않아서 결국 이 거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헨더슨은 왜 100만 달러를 고집했을까. 일부 알려진 것처럼 과연 돈에 대한 집착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돈보다는 그의 딜레탕티즘 자존심의 발로라고 본다. 그것은 死後(사후) 그의 미망인이 성사시킨 하버드 대학과의 거래로서 증명된 셈이다.
 
  하버드 대학에는 부속 미술관이 세 개 있는데 그중 아서 새클러 미술관은 아시아 미술을 전문적으로 수장하고 있다. 제약 회사로 큰 돈을 번 아서 새클러는 뉴욕 메트, 워싱턴 스미소니언 등 미국 굴지의 미술관에 많은 기부금을 내어 어디 가나 그의 이름이 붙은 갤러리들을 만난다.
 
  명문 하버드 역시 예외가 아니다. 헨더슨 자신은 물론 死後 미망인 역시 남편의 모교 하버드에 강한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헨더슨 컬렉션이 하버드로 정착한 것은 모교에 대한 헨더슨 자신의 자부심을 배려한 미망인 덕분인 것 같다.
 
 
 
 한국 문화사 미니 교육 재료 가치
 
  하버드 대학 아서 새클러 미술관 로버트 모우리 박사는 중국·한국 담당 큐레이터로 지금까지 하버드의 미술사 교수로 일하고 있다. 원래 중국 미술을 전공했으나 1970年代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한국에 파견된 인연으로 한국 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관심을 키워오던 중 헨더슨 컬렉션 구입 추진에 관여하게 된다.
 
  모우리 박사에게 들은 얘기로는 하버드 대학은 공식적으로 헨더슨 컬렉션을 100만 달러에 구입한 것으로 알려진다. 미망인은 그중 50만 달러를 하버드에 기증하는 형식을 취했다. 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節稅(절세)를 위한 매매 방식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헨더슨 컬렉션은 하버드에 50만 달러에 팔린 셈. 헨더슨이 생전에 고집한 100만 달러 명분은 살리고, 구입하는 대학측에서는 실리를 취한 것이다.
 
  하버드 대학은 그레고리 헨더슨 컬렉션 구입을 계기로 한국 도자기 미술사 강좌를 새로 개설했다. 강사는 로버트 모우리 박사. 헨더슨 컬렉션은 일단 한국 文化史(문화사) 미니 교육재료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한국 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일을 하는 입장에서 나는 헨더슨 컬렉션이 이런 뜻밖의 공헌을 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한국 국제교류재단이 하버드 대학에 문학 석좌교수(현재 데이비드 맥캔 교수)를 설치하기 위하여 250만 달러의 매칭 펀드를 제공한 것이라든지, 그보다 앞서 1970年代 우리나라 産學재단이 하버드 대학에 한국 경제사 석좌교수(현재 카터 에커트 교수) 기금으로 당시 100만 달러를 기증한 걸 생각하면 비록 도자기 미술사 한 강좌에 국한된 기여라고 하더라도 대견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몰려든다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1998년 봄 겨우 2000평방 피트짜리 한국관을 하나 여는 데 10년 걸려서 약 500만 달러가 들었다. 이런 것이 문화홍보 비용이다. 하버드 대학 미술관과 뉴욕 메트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헨더슨 컬렉션의 문화 홍보 가치는 비용으로 따져도 우리로서는 밑질 것이 없는 장사였다고 하겠다.
 
 
 
 도자기를 수집하는 審美眼
 
  미술관의 개념은 웬퐁 교수의 말처럼 첫째 컬렉션, 둘째 스페이스, 셋째 큐레이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첫 개념 컬렉션은 먼저 눈이 있어야 한다. 눈은 수집과 함께 길러진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瓷器(자기)를 만들어 사용해 왔다. 만드는 사람이나 사용하는 사람이나 보다 더 아름다운 자기를 지향한 審美眼(심미안)을 키웠을 것이다. 그것은 고려 청자나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이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문제는 그 아름다운 자기를 그냥 容器(용기)로만 쓰고 버렸느냐, 아니면 그것들을 수집하고 아껴왔는가를 따져야 한다.
 
  일본열도 사람들은 수십 세기 동안 좋은 자기를 만들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만든 도자기들은 일본열도에서는 바다 건너온 舶來品(박래품)으로 귀하게 취급되었다. 한반도의 아름다운 도자기들은 천년 동안 倭寇(왜구)들의 약탈 대상 1호였다. 일본열도의 영주들은 귀한 물건에 비싼 값을 쳐주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영주들은 도자기 수집가가 되어 있었다. 물건을 보는 눈, 나름대로의 審美眼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자기를 용기로만 사용해온 한반도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그 審美眼이 무뎌졌던 것은 아닐까.
 
  1992년 가을 메트(MET)에서 특별 전시된 「아다카 컬렉션」을 보면서 나는 한반도 도자기 문화의 가장 아름다운 명품들을 모아놓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떻게 일본의 개인 수집가가 한국 도자기의 명품들을 그렇게 모을 수 있었을까. 더구나 이 컬렉션은 식민지 시절이 아닌, 광복 이후의 수집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은 더 컸다. 이에 비하면 그레고리 헨더슨 컬렉션은 차라리 감동이었다. 요즘 새로 단장된 인사동 골목을 걸을 때마다 나는 미래의 아다카나 그레고리 헨더슨과 마주치는 幻影(환영)에 스스로 놀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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