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풍 사건 항소심 판결문 요약

「총풍 사건」은 「허풍 사건」으로 끝나는가

  • : 김성동  ksd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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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中 대통령이 수사 도중에 나서서 「용서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했던 소위 총격 요청 사건이 2심 재판부에 의해 「그런 모의는 없었다」로 판단되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검찰에 「엄정 수사」를 당부하고, 여권이 「國基(국기) 문란 사건」으로까지 규정했던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의 피고인들에 대한 항소심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이른바 「총풍」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의 핵심 기소사실은 韓成基(한성기), 張錫重(장석중), 吳靜恩(오정은) 3인이 1992년 大選에서 한나라당 李會昌(이회창)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북측 인사를 만나 판문점 총격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이 사건의 조사가 진행중이던 1998년 11월3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국 검사장 회의에서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은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검찰이 수고했지만 국가기강과 안보를 위해 밝혀달라고 강력히 요구한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金대통령은 李會昌 한나라당 총재를 겨냥, 『세 사람이 朝夕(조석)으로 출입하고, 그런 사람을 상대해서 믿고 정보를 받고 여기저기를 함께 방문했다면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여권은 세 사람에 대해 「國事犯(국사범)」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그 배후로 야당과 야당 총재를 지목하기도 했었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2월 열린 선거공판에서 『배후는 알 수 없지만 무력시위 요청의 실체가 있었다』는 요지의 판결을 내렸다. 판문점 총격 요청을 위한 사전 모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4월10일 열린 항소심 선거공판에서 재판부는 세 피고인들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무력시위 요청의 사전 모의는 없었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또 『무력시위 요청은 한성기 피고인의 돌출행동에서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해 이 사건이 「실체 없는 해프닝」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李會昌 후보의 대선 승리를 위해 세 사람이 북한측에 판문점에서의 총격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韓씨가 李후보에게 잘 보이기 위한 「돌출 행동」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대통령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던 「國基 문란 사건」이 항소심에서는 단순한 「해프닝성 사건」으로 뒤바뀐 것이다.
 
  「사건의 배후」에 대해 1심과 정반대의 판결을 내린 항소심 판결문을 요약, 게재한다.
 
 
 
 항소심 판결문 요약
 
  <피고인들이 과연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인 북측 인사에게 휴전선에서의 무력시위를 요청하기로 모의하였는지 여부에 관하여 본다.
 
  피고인들이 북한의 남한 대선과 관련한 동향을 살펴보는 정도를 넘어서 북한에 무력시위를 요청하기로 모의하였다는 취지의 자백은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은 사정에 비추어 선뜻 믿을 수 없다 할 것이다.
 
  ㄱ)피고인 오정은과 장석중이 이 사건 범행으로 인하여 얻는 이익 및 대가 관계가 불분명하다:북한에 대한 무력시위 요청이라는 위험하고도 중대한 모의를 주도적으로 기획하였다는 오정은은 이회창 후보에게 10여 회의 대선 전략 보고서를 전달하였을 뿐 다른 배후가 있다거나 (무력시위 요청을 위한) 북경행 준비상황을 이후보측으로부터 지시받거나 보고하려 한 증거가 없다. 반면 한성기는 북경을 방문하기 전날인 1997년 12월9일 새벽 오정은에게 알리지 않은 채 직접 「특단카드 협상 보고서」라는 문건을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 이름으로 작성한 다음, 이회창 후보의 구포 유세장에 내려가 이후보 측에 전달하려고 시도했던 점이 엿보인다. 1993년경부터 통일부의 승인을 받고 북한과 경제교류를 하는 사업체인 「대호차이나」를 경영해오면서 안기부 등에 대북 관련 정보를 제공해오던 장석중이 다른 대가나 배후 없이 북한의 대선 관련 동향을 살펴보는 정도를 넘어서 북한에 무력시위를 요청하기로 모의하였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ㄴ)피고인들간의 모의 장소 및 북경행 준비과정이 무력시위 요청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허술하다:피고인들이 모의했다는 다방이나 호텔 커피숍 등은 공개된 장소이고 특히 하비비 다방은 청와대와 감사원이 인접해 있어 공무원이나 관공서에 볼 일이 있는 일반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다. 테이블 간격이 좁아 북한에 무력 시위를 요청한다는 내용의 중요한 밀담을 나누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장소다. 서로 알게 된 지 불과 20여일밖에 되지 않은 한성기와 장석중이 무력시위 요청을 모의하고 북경에 갔다는 것은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는다. 경비도 다른 경로로 조달된 증거가 없고 한성기가 자신의 카드로 결제했을 뿐만 아니라 경비를 마련하지 못해 북경행이 늦춰지기도 했다. 경비도 300만원에 미치지 못한다.
 
  ㄷ)피고인 장석중, 한성기가 함께 북경에 가게 된 것은 다른 사업상의 이유가 있었다
 
  ㄹ)피고인들이 1997년 12월9일 만나 최종 모의한 사실 자체가 없음에도 수사기관에서 일사불란하게 일치된 진술을 한 것으로 조서가 작성되어 공소제기되었다:피고인들이 북경에 가기 전 각자 역할을 분담하고 모의내용에 따른 전반적인 사항을 최종적으로 점검한 일시가 1997년 12월9일이라고 공소제기됐다. 그러나 한성기는 그날 비행기로 김해에 도착, 이회창 후보의 유세에 참석하였고 오정은도 같은 달 8일 서울을 떠났다가 이틀 후인 10일 11시경 김해를 출발해 서울로 돌아왔다.
 
  ㅁ)피고인 오정은에게 무력시위를 요청하기 위하여 실행 행위를 분담하였다고 볼만한 역할 수행의 흔적이 미약하다
 
  ㅂ)피고인 오정은과 장석중이 자백에 이르게 된 경위에 비추어 무력시위를 하기로 모의하였다는 점에 대한 자백은 믿기 어렵다: 장석중의 경우 한성기가 북경에서 귀국하자마자 즉시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연행돼 1박2일 간 한성기의 북경에서의 행적에 대해 조사를 받고 나왔다. 1998년에도 4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다시 조사를 받은 바 있음에도 사건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선 이후 김순권 박사와 함께 방북하는 등 대북사업을 더욱 활발히 하였다. 1998년 9월5일부터 같은 달 7일까지 안기부에 연행돼 이 사건에 대해 집중 조사를 받고 진술조서 외에 피의자신문조서까지 작성하였으나 석방되었다. 그로부터 열흘 후인 9월17일에 구속됐다.
 
  ㅅ)한성기의 진술은 자백의 내용이 일관되지 아니하여 신빙성이 없다:피고인 한성기의 진술은 다른 피고인들과의 모의관계는 비교적 일관되게 진술하는 반면 안기부, 검찰, 원심 및 당심에서 그 내용이 수시로 바뀌고 자신이 북한측 박충에게 한 발언 부분에 대해서서도 말을 바꾸고 있다. 처음에는 휴전선 또는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에서의 무력시위를 요청했다고 했으나 나중에는 북한측 대성리 마을의 민간인 2∼3명의 탈출을 요청한 것으로 변경, 축소하여 진술하고 있다. 나머지 진술도 그 진술에 일관성이 없으므로 위 피고인의 진술을, 피고인들간에 무력시위 요청의 모의가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자료로 삼기에는 부족하다고 할 것이다(편집자 注:이 사건의 가장 큰 증거는 한성기를 비롯한 피고인들의 자백이었다).
 
 
 
 소결론
 
  따라서 피고인들이 무력시위 요청을 하기로 모의하였다는 점은 이를 인정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할 것임에도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 원심은 채증법칙 위배 및 심리 미진, 사실오인의 위법이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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