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신용평가사들이 100년의 역사 속에서 시장의 검증과 신뢰를 바탕으로 성장한 것과 달리, 한국의 신용평가사들은 태생 자체가 정부주도하에 정책적인 지원을 받으며 출발했다. IMF 이전엔 제 구실을 못하던 신용평가기관들이 시장의 변화로 선진화하는 노력을 보여오다 현대그룹 신용 등급 무더기 하향조정 사태로 그 신뢰성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신용평가기관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신용평가회사가 다시 世間(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현대건설 유동성 문제를 놓고 정부와 현대그룹이 힘 겨루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한국기업평가(韓企評) 등 신용평가 회사들이 현대 계열사의 신용등급을 무더기로 하향조정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이 발행한 채권은 투기등급(BB)으로 떨어졌다. 신용평가회사의 등급조정은 발행기업인 현대는 물론 은행·투신 등 기관투자가와 정부, 證市(증시)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파문을 몰고 왔다. 주식시장에서는 신용등급이 하락한 현대 계열사의 株價가 떨어졌고, 은행 등 기관투자가들은 추가적인 담보제공 없이 현대계열사 채권을 만기연장해주는 것이 곤란하다는 입장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신용평가회사가 4大그룹이 발행한 채권을 선제적으로 하향조정한 것으로 그동안 類例(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자산규모로만 보면 국내 1위의 재벌인 현대그룹 계열사가 당장 부도가 난 것도 아닌데 신용평가회사가 「채권회수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현대건설은 이같은 신용평가회사의 「기습공격」에 당황하며, 항의단을 두 차례에 걸쳐 韓企評에 파견했다. 현대그룹 안팎에서는 신용평가회사의 등급조정을 신뢰할 수 없다고 공공연히 불만을 터뜨렸고, 정부가 신용평가회사를 동원해 현대그룹을 압박하는 것이라는 「음모론」마저 제기됐다.
과연 신용평가회사가 현대그룹 계열사의 등급을 떨어뜨린 것은 정당한 것인가? 또 신용평가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신용평가회사들은 왜 이전과 달리 대표 재벌그룹의 채권 등급을 먼저 떨어뜨리는 「모험」을 강행한 것일까? 이 문제는 한국 신용평가회사의 부실한 과거 역사와 현존하는 위기 의식, 이에 따른 변신 노력 등이 집합적으로 나타난 상징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시장의 신뢰도 상실이 강등 원인』
현대 계열사에 대한 신용등급 하락이 발생한 것은 지난 7월24일이다. 韓企評은 현대건설과 고려산업개발의 회사채 신용등급을 투자등급인 BBB―에서 투기등급인 BB+로, 기업어음(CP) 등급을 A3―(투자등급)에서 B+(투기등급)로 각각 한 단계씩 내리는 등 8개 현대 계열사의 신용등급을 대거 하향조정했다.
같은 날 다른 주요 신용평가기관인 한국신용평가(韓信評)와 한국신용정보(韓信情)도 현대 계열사 채권에 대한 降等(강등) 조치를 내렸다. 韓信評은 현대상선 회사채를 A에서 BBB로 세 단계나 내렸으며, 인천제철 회사채는 BBB+에서 BBB로 한 단계 내렸다. 韓信情은 현대석유화학 회사채 등급을 BBB―에서 BB+ 투기등급으로 내렸고, 현대상선 회사채 등급을 A에서 BBB+로 내렸다.
이틀 뒤인 26일에도 韓信評과 韓信情은 현대중공업의 회사채 등급을 두 단계 내리는 등 3개 현대 계열사 신용등급을 추가로 하향조치했다.
마치 융단폭격을 연상시키는 연쇄적인 신용등급 강등이유를 신용평가사들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현대그룹이 구조조정을 약속한 뒤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바람에 시장의 신뢰도를 잃었고, 이에 따라 신용등급 조정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는 이같은 신용평가회사의 설명을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을 거듭 피력했다. 현대를 포함한 4大그룹의 재무구조가 1998년 말보다 다같이 좋아졌는데도 다른 그룹은 등급을 유지하거나 올린 반면 현대의 등급만 떨어뜨리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계열분리 등은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와 직접 관련이 없는데도 이 문제까지 들어서 신용등급을 떨어뜨린 것은 정부의 의지가 작용한 것』이라는 「음모론」도 현대그룹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신용평가기관들은 현대의 반발에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자신들이 내린 결정이 정당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먼저 기업의 실적이 좋아졌다 해도 이것이 즉각 등급향상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지난해 말 실적이 갑자기 좋아진 것은 前期(전기)의 실적이 상대적으로 부진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상승폭이 큰 것이고, 영업상의 수익창출과는 무관하게 장부상 혹은 순수히 재무적인 변동에 따라 실적개선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 영업상 수익성이 높아져 실적이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등급간 간극을 뛰어넘을 정도로 높지 않을 경우에는 등급조정으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그룹 등급하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보다도 적대적인 자금시장 환경 때문이라고 신용평가사들은 지적하고 있다. 즉 현대의 현금창출력이 떨어졌거나, 부담해야 하는 채무수준이 급격히 올라갔기 때문에 현대의 부도가능성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 기존 채무의 滿期延長(만기연장ㆍRollover)이 원활히 안 되는 상황을 반영했다는 설명이다. 사실 한국 기업의 신용도는 해당 기업의 미래 현금상태에 의해 판단되기보다는 앞으로 금융기관이 기존의 차입금을 연장해 주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현대그룹은 시장의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정부의 현대 强攻 시기와 맞물린 신용강등
일부에서는 왜 정부가 현대그룹을 옥죄는 시기에 신용평가사들이 일제히 신용등급을 떨어뜨렸는지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현대 문제는 지난 3월부터 이른바 「왕자의 난」을 통해서 후계구도 분쟁을 드러냈고, 현대投身 부실 문제가 터지면서 시장의 걱정거리로 등장한 게 오래 전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정부가 현대그룹에 강공 드라이브를 거는 시점에 맞춰 신용평가사들이 행동을 개시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지금도 어느 정도 정부의 영향력 밑에 있는 신용평가사들이 정부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은 것이라는 비약된 추측마저 꼬리를 물고 등장했다.
이에 대해 신용평가사들은 기본적으로 신용평가기관의 등급결정 과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韓企評 관계자는 신용등급 하락이 비교적 늦게 결정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현대는 우리나라 제1의 기업으로 어떻게 보면 국가의 운명과 함께 한다고 볼 수도 있다. 현대 사태가 벌어진 것은 4~5개월 되었지만, 정작 현대그룹이 어떤 방향으로 처리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정부가 최근 들어 분명한 처리입장을 밝혔고, 이에 대한 현대의 대응이 늦어져 시장에서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터뜨린 것이다』
신용평가 주요 3社가 현대그룹 계열사의 신용등급을 떨어뜨린 시기에도 다소간의 차이는 있다. 무더기 등급 하향조치가 내려진 것은 지난 7월24일이지만, 韓信評은 이보다 보름 전인 7월7일에 현대종합상사의 회사채를 A-에서 BBB로 떨어뜨리는 조치를 취했다. 당시 韓信評은 현대종합상사의 등급을 떨어뜨리면서 『현대건설 등 주요 계열사 일부가 국내경기 침체에 따라 경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그룹내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알력이 있고, 현대투신 부실문제가 대두되면서 對外 신인도가 낮아졌다』고 평가 이유를 밝혔다.
시장의 요구 받아들인 「강등」
사실 신용평가회사가 선제적으로 현대그룹 일부 계열사에 대한 신용등급 하향조치를 내린 것처럼 보이지만, 시장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현대그룹을 불신해왔다. 현대건설의 신규 채권은 올해 초부터 소화되지 않고 있었고, 기존 채권의 만기도 어렵게 연장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용평가사들이 계속해서 현대그룹 일부 계열사 채권을 투자등급으로 유지하자, 오히려 시장에서는 불신의 소리가 높았다.
정부와 신용평가회사 간 음모설이 제기되자, 李憲宰(이헌재) 당시 재경부 장관이 『신용평가사들이 책임을 피하기 위해 내린 조치일 것』이라고 해석한 것은 이같은 시장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용평가회사들이 현대그룹에 대해 취한 조치는 IMF 쇼크 이후 달라진 시장과 업계의 환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덩치가 큰 그룹이라도 不信요인이 발생하면 시장은 철저히 이를 가격에 반영했고, 대우그룹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신용평가회사들도 시장의 강한 요구를 받아들여 등급을 먼저 떨어뜨리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물론 이 근저에는 대우그룹을 워크아웃에 집어넣는 선택을 한 정부의 과감한 先例(선례)가 밑바탕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일반인들은 막연히 신용평가회사를 불신하는 경우가 많고, 기관투자가, 정부당국자, 발행기업들 가운데 일부도 신용평가회사의 신용을 의심하고 있다.
최근 금융감독원의 한 간부는 『프라이머리 CBO(collateralized bond obligation·채권담보부 증권;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채권을 따로 모아 이를 담보로 발행하는 채권이다)를 발행하면서 신용평가기관에 신용등급을 의뢰한 결과 AA등급이 나왔는데도 은행에서 인수를 주저하더라』고 전했다. 이 간부는 결국 은행들에게 『국내 신용평가기관을 믿을 수 없다면 외국 신용평가기관에 의뢰해서 등급을 받아도 좋다』고 설득했다고 말했다.
물론 프라이머리 CBO에 대한 불신은 단순히 신용평가사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발행기업과 정부정책의 일관성에 대한 의심이 복합된 것이기는 하지만, 신용평가사의 위치를 드러내주는 단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왜 국내 신용평가회사들은 아직 시장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을까?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IMF 위기를 맞으면서 露呈(노정)된 신용평가사의 과거사가 여전히 부담을 주고 있다고 분석한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미국계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와 S&P 등이 우리나라의 국가 신용등급과 국내 금융기관의 신용등급을 급격히 떨어뜨리면서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자금조달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당시 이를 지켜본 일반인들과 국내 투자자들은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신용평가기관이 있었다면 이런 사태를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조(自嘲)했었다. 분명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의 총체적인 문제점이 폭발한 것이지만, 금융 인프라의 한 축을 담당하는 신용평가기관의 역할 不在에 대해 책임론이 제기됐던 것이다.
신용평가사들은 『이미 무의미해진 과거의 통계』라고 들여다보고 싶어하지도 않지만, IMF 쇼크 이전 신용평가사들의 성적은 극히 저조했다. 흔히 인용되는 통계로 신용평가기관 3社의 IMF 이전 무보증 회사채 등급별 부도율을 보면 투자등급으로 평가한 채권의 부도율이 韓企評 9.66%, 韓信評 6.63%, 韓信情 6.47%에 이른다.
또 韓信評을 제외하곤 이른바 투자적격으로 분류되는 BBB등급 채권의 부도율이 투자부적격으로 통칭되는 BB등급보다 높았다. 신용평가회사들은 무보증 회사채의 경우 1997년 6월까지 BB 이하 등급은 규정에 따라 발행 자체가 안 되었기 때문에 통계에 왜곡이 발생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용평가회사들은 실제로 발행에 제한이 없었던 기업어음(CP)의 경우 투자등급과 투기등급 간에 확연한 부도율 차이를 보이면서 유의미한 통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신용평가회사의 태생적 한계
하지만 이같은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1997년 하반기에 신용평가 3社가 투자적격등급을 부여한 진로, 기아, 한보 등의 발행 회사채가 연쇄 부도가 나면서 신용평가 3社가 모두 영업정지를 당한 현실에 대해서는 신용평가사들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IMF 쇼크 이전에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신용평가회사의 태생 자체가 정부주도하에 정책적인 지원을 받으며 출발했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이는 미국의 신용평가사들이 100년의 역사 속에 시장의 검증과 신뢰를 바탕으로 성장한 것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지난 1909년 J 무디스가 당시 호황을 누렸던 철도회사에 대한 신용도분석에 Aaa에서부터 C에 이르는 등급을 도입했다. 그후 무디스를 따라 철도회사에 대한 등급을 매기는 회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하지만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면서 채권발행액의 35%이상이 부도가 나면서, 신용등급의 신뢰성을 입증한 무디스와 S&P가 寡占(과점) 체제를 형성했다.
이후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은 1970년대 금리가 크게 상승하고, 금리변동 위험 프리미엄이 늘어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했고,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미국 정크본드 시장의 발달과 본격적인 세계시장 진출 등으로 시장규모가 급속히 커졌다. 이같은 역사를 거치는 동안 미국의 신용평가회사들은 철저히 시장의 평가를 받으면서 신뢰를 구축해왔다. 미국에서는 신용평가를 받도록 강제하는 규정은 없지만, 신용평가를 받지 않으면 회사채 공모가 어려운 자발적인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1980년대 들어 정부가 금융시장을 발전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신용평가회사를 설립했다. 1970년대까지 은행을 위주로 한 간접금융시장만 발달, 채권시장 발전이 지연되고 있는 것을 개선하기 위해 무담보 기업어음(CP)과 금융기관 보증 회사채 등 장단기 직접금융 시장을 키우는 방향으로 정부의 경제운용방식이 바뀌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1985년부터 잇달아 신용평가 3社를 설립토록 한 뒤 초창기에는 유가증권 발행요건으로 신용평가사로부터 등급을 받도록 했다. 1985년에는 기업금융정보센터에서 한국신용평가로 이름을 바꾼 韓信評이 국내 첫 신용평가 전문기관으로 탄생했고, 1986년에는 31개 은행이 출자해 만든 韓信情이 출범했다.
1983년 한국경영컨설팅으로 출발한 韓企評도 1987년부터 현재의 이름으로 회사명을 바꾸고 신용평가업무를 시작했다. 이렇게 설립된 신용평가 3社는 1994년 중반부터 기업어음 및 회사채를 발행할 경우 반드시 2개 신용평가기관으로부터 평가를 받도록 하는 복수평가제가 도입되면서 서로 경쟁하며 시장규모를 키워왔다.
하지만 기업어음의 경우 금리 및 금융시장의 자율화가 진전되지 않은 상태여서 신용등급과 무관하게 금리가 결정됐고, 회사채도 금융기관이 보증한 보증부 회사채가 대부분이어서 신용평가가 금리를 차등화시키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IMF 이후 달라진 신용평가기관
이렇게 시장보다는 정부 정책에 따라 업무를 확대해 온 한국의 신용평가회사에 있어 발행기업의 채권에 등급을 매기고 이들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수익구조는 독립성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 채권을 발행하는 회사들이 신용평가사들을 돌아다니며 『A신용평가사는 어떤 등급을 주었는데 이쪽 신용평가사에는 얼마를 줄 수 있느냐』고 협상하는 이른바 「등급쇼핑」(rating shopping)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또 채권을 발행하는 기업들이 평가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고, 신용평가회사들이 좀처럼 경영진을 만나기조차 어려웠다. 여기에 부실한 회계장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평가절차상의 한계가 겹치면서 IMF 쇼크를 맞게 된 것이다.
IMF 쇼크는 한국 신용평가회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신용평가회사들은 그동안 등한시했던 시장의 평가에 촉각을 곤두 세우게 됐고, 무엇보다 신용평가 시장의 환경이 급변했다. 기업도산이 급증해 금융기관의 부실화가 가속되었고, 투자자들의 위험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신용등급에 관심이 모아졌다. 또 금융기관과 보증기관이 동반 부실해짐에 따라 보증채 시장이 급속히 줄어드는 대신 무보증채 시장 위주로 판도가 재편됐다. 발행기업의 자체 신용만으로 원리금을 상환하는 무보증채 시장에서는 신용평가가 더욱 중요해졌고, 자산유동화증권(ABS) 등 다양한 금융파생상품으로 평가시장도 확대됐다.
이같은 신용평가시장의 변화에 따라 신용평가기관도 변신의 노력을 하고 있다. 신용등급을 선진국의 사례에 따라 엄격하게 적용하고, 신용등급을 매기는 절차에도 이중·삼중의 단계를 두어 등급결정에 외부의 입김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신용평가기관 3개社의 IMF 쇼크 이후 성적을 「무보증회사채 등급별 부도율」로만 놓고 보면 완벽하다. 韓企評과 韓信評의 투자등급 부도율은 0%이고, 韓信情도 0.68%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통계를 액면 그대로 믿기는 곤란하다. 왜냐하면1998년부터 워크아웃 제도가 도입되면서 유동성 위기나 채무 불이행 위험에 처한 기업을 부도처리하기보다는 워크아웃에 넣어 回生(회생)작업을 벌였다.
워크아웃 기업이 발행한 채권에 대한 통계는 부도율 계산에서 빠져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확한 평가는 워크아웃 채권을 포함시켜 비교한 이후에야 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 IMF 쇼크 이전에 비해서는 신용평가사들의 성적이 대폭 좋아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의 신용평가회사들은 선진국 수준에 올라선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신용평가회사 스스로도 『이제 진짜로 걷는 연습을 시작했을 뿐』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일부 신용평가사는 IMF 쇼크 이전과 같지는 않지만, 신용등급이 다시 厚(후)해지는 경향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韓信評 관계자는 『IMF 쇼크 이후 앞장서서 인플레된 신용등급을 정상화하는 조치를 취하자,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등급을 후하게 주는 다른 신용평가사로 옮겨갔다』고 주장했다. 이 영향으로 1997년 36.4%에 달했던 韓信評의 시장점유율이 지난 7월15일 현재 25.1%까지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채권 발행 기업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등급을 더 좋게 주는 쪽으로 옮겨가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평가기관 난립에 따른 문제점
이같은 韓信評의 주장에 대해 다른 2개社는 반론을 펴고 있다. IMF 쇼크 이후 신용등급을 세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시장점유율의 변화는 마케팅 능력의 차이에 따른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1997년 30.8%였던 시장점유율이 올해 40.4%까지 오른 韓企評은 『시장 점유율이 늘어난 것은 ABS 시장을 발빠르게 선점했기 때문』이라며 『ABS 시장을 뺄 경우 무보증회사채와 기업어음 부문에서 늘어난 시장점유율 상승분은 3~4%포인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韓企評은 시장점유율이 늘어난 부분은 기업컨설팅 능력을 시장에서 인정한 때문이라고 自評했다.
등급 인플레에 대한 우려는 기존 신용평가 3社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신설 신용평가사에 대한 논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지난 1월12일 서울신용평가정보가 신규 평가기관으로 지정되고, 3월10일에는 한국톰슨뱅크워치가 예비허가를 받은 데 이어 D, S社 등이 연이어 신용평가시장에 뛰어들 움직임을 보이자, 기존 3社는 업체난립에 따른 등급쇼핑이 재현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기존 신용평가 3社는 서울신용평가가 기업어음에 대한 평가업무를 시작한 뒤, 기존 업체에 비해 등급을 최소한 같거나 한 단계 후하게 주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서울신용평가는 동양창투, 매일유업, 중앙일보 등에 대한 기업어음평가에서 기존 3社보다 한 단계 높은 등급을 주었고, 신용평가를 맡은 나머지 12개업체(현대석유화학 제외)에 대해서도 최소한 등급이 같거나 높은 신용을 매겼다.
이에 대해 서울신용평가 안종영 이사는 『신규 업체가 신용인플레를 유발하고 있다는 것은 기존 3社의 모략』이라며 『철저히 자체 신용평가 기준에 따라 등급을 주고 있다』고 항변했다. 安이사는 『어차피 신용평가사의 생명은 투자자의 판단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라며 『투자자들이 외면하는 엉터리 등급을 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고 등급쇼핑 가능성을 일축했다.
하지만 기존 신용평가 3社는 자본금 10억원에 평가분석 요원 10인, 株主분산요건만 갖추면 되는 현재의 신용평가 지정요건은 절대적인 시장 규모를 무시한 조치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시장 규모 年 247억원
1999년 말 현재 신용평가시장 규모는 약 247억원. 1996년 87억원에 비해서는 괄목한 만한 성장을 이뤘지만, 세계 최대규모인 미국 시장에 비해서는 절대적으로 영세한 시장이라는 것. 미국 시장도 2강3약의 5社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일본도 3개社에 불과한데 한국의 신용평가회사는 시장규모에 비해 너무 많아지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아무리 선수들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공정한 관리만 이뤄지면 시장의 힘에 의해 자연스럽게 신용평가기관의 생존이 결정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韓企評 장사호 홍보팀장은 『이제는 투자자 시장으로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시장이 심판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국의 신용평가사에 남겨진 또 다른 과제는 채권 발행기업이 신용평가를 의뢰하지 않아도 신용평가사가 임의로 등급을 매길 수 있는 임의평가 실시. 아직도 우리나라 상장기업 중 60% 이상이 신용평가를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용평가 등급이 가져야 할 지표로서의 유효성이 상당히 제약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신용평가가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미국처럼 임의평가를 실시하는 게 불가피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임의평가가 자리잡기에는 국내 신용평가사의 인력과 데이터베이스 부족, 회계자료의 신뢰성 등 산적한 난제들이 많아 쉽게 돌파구를 찾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韓信評 김선대 이사는 『자본금 30억원짜리 신용평가사가 국내 대기업의 회사채를 임의평가했다가 소송이라도 당하면 회사 자체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에 실시를 진지하게 검토했다가 보류했다』고 말했다.
신용평가회사들은 제대로 된 신용평가기관이 배출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관투자가를 위시한 투자자들이 신용평가회사를 엄정히 평가한 뒤 제대로 하는 신용평가회사에는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