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포브스 選定 「세계 최고 제철소」浦鐵의 劉常夫회장

  • : 최보식  congchi@chosun.com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단순히 기업의 이익추구를 위해서 해고하는 것은 경영자의 수치.무위도식하는 직원에게 일거리를 만들어주는 것도 경영자의 책무』

●『손오공이 날뛰는 걸 나무라서는 안된다. 부처님 손바닥이 그걸 수용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1991년 북측의 요청으로 북한의 김책제철소를 극비 방문…기술자문』
●日本 망명중의 朴泰俊:『YS 같은 인간의 選代위원장을 거절한 것은 나의 탁월한 선택』
劉常夫(유상부·58) 浦鐵 회장은 경상도 방언으로 거침없이 말하고 있다. 아른한 햇살, 몰래 눈감고 들으면 저잣거리의 지혜로운 匹夫(필부)를 마주한 느낌이 든다.
 
  설날 연휴가 시작되는 아침 그와 만났는데, 날이 저물도록 같이 보냈다. 인터뷰는 대상에 따라 상대적이다. 그를 향해 질문의 날(刃)을 세우기보다, 그에게 열심히 듣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면 그는 절로 신이 나 縣河之辯(현하지변)을 쏟아냈다. 기자는 편했고 그는 에너지 소비가 많았다.
 
  그가 처음 기자를 誘引(유인)한 것은 어느 책자에 실린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이었다.
 
  ―업무 중 가장 싫어하는 일.
 
  『종업원을 해고하는 것』
 
  실제 그의 의지가 작용한 것인지, 浦鐵은 대량해고 바람이 거세게 불던 시절에도 밖으로 내보낸 직원이 거의 없었다. 그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일까.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기업수술(던랩 지음)」도 경영의 묘수로 냉정한 인원 감축을 찬양하고 있다. 한국의 지도급 인사를 감명시킨 잭 웰치 GE 회장은 10만명을 잘랐던 경영의 귀재였다.
 
  『잭 웰치 회장을 케이스 스터디한 적 있었습니다. 10만명을 잘랐으니 거의 중성자탄級(급)입니다. 그건 미국 사회의 안전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요. 또 해고와 離職(이직), 재취업이 생활화되어 있어요. 우리는 다릅니다. 노동자 의식도, 노동시장의 유연성도 달라요.
 
  전문경영인의 덕목은 기업에 이익과 고용 안정을 가져다주는 겁니다. 데리고 있던 직원을 내보낸다는 것은 자신의 경영 능력에 문제가 있죠. 불가피한 경우가 있지만, 단순히 기업의 이익 추구를 위해 해고하는 것은 경영자로서 수치라고 할 수 있죠. 무위도식하는 직원이 있다면 일거리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것도 경영자의 책무지요.
 
  얼마 전까지 우리는 「평생직장」 「종신고용」의 개념으로 살아왔어요. 실컷 부려먹다가 외부 환경이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자르면 안됩니다. 포철에는 분명히 1천1백명의 잉여인력이 있어요. 논리적으로는 이들을 내보내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아시아적 가치는 달라요. 어려울 때 같이 살았고 오늘의 성취를 이룩하는 데 기여했던 직원입니다. 기업의 자동화·전산화 등으로 인해 직원 숫자가 남은 것이지 이들의 잘못은 아닙니다. 기업 경영이 심각하다면 손을 대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잘라서는 안되지요』
 
  작년 한해 국정감사와 감사원 감사에서 연달아 잉여 인력의 감축 지시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바위처럼 버틴 채 말을 듣지 않고 있다. 한 번은 『이런 식의 감사는 과연 浦鐵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浦鐵의 라이벌 기업을 위한 것인가』라고 발언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그들의 정당한 업무에 대해 시비를 걸었던 셈입니다. 사실 기업에 대한 외부감사는 필요합니다. 그것은 일주일 한 번씩 집안 청소를 하는 것과 같지요. 집안이 청결해질 뿐 아니라 간혹 사라진 신분증도 나오고 동전도 줍는 횡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감사가 기업 경영의 본질을 왜곡시켜서는 안돼요』
 
  기자가 『재계에서는 내심 정부의 간섭에 대해 불만이 많다. 공기업은 더 많이 느끼지 않을까』라고 묻자, 그는 『간섭하고 받는 것은 양쪽 다 문제가 있다. 간섭받지 않을 만큼 훌륭하게 경영하면 간섭 안한다. 간섭받을 짓을 하기 때문에 간섭받는 것이다. 가끔 간섭하는 쪽에서는 관성이 생겨 계속 간섭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간섭을 기득권으로 착각한다』라고 말했다.
 
  『여하튼 浦鐵은 인원 구조조정 문제로 3월경 다시 감사원 감사를 받게 됐어요. 정부의 평가가 어떻게 나오든, 회사 내부 사정은 최고경영자가 가장 잘 아는 법입니다. 구조조정이란 기업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해소해 경쟁력을 提高하는 것이지요. 문제가 잉여 인력에 있다면 인원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사업에 문제가 있다면 사업에, 재무구조에 문제가 있다면 재무에, 조직이 잘못됐다면 조직에, 투자가 잘못됐다면 투자에 손을 대야 합니다.
 
  제가 5년 만에 浦鐵에 되돌아와 돈이 새나가는 쪽을 조사해보니 유통구조였어요. 먼저 유통구조에 손을 댔습니다. 그 다음에는 투자 분야였어요. 또 무수익 자산을 처분했고 在庫도 줄였어요. 이런 것들만 손대도 직원까지 해고할 필요가 없어요. 경영 평가가 해고자 숫자에 있다면, 저는 빵점이지요. 하지만 지난 2년간 최악의 외부 환경(IMF)에서 浦鐵은 창사 이래 최대의 경영성과를 냈어요』
 
 
  『일등은 포철이다』
 
 
  작년 초 국내의 한 연구원이 新日鐵(신일철)을 방문해, 이마이 다카시(今井敬) 회장에게 일등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이마이 회장은 『일본까지 올 필요가 없었는데, 일등은 신일철이 아니라 포철이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기자가 이런 사례를 꺼내자, 그는 『일본인의 겸손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지요. 세련된 신사도입니다』라고 말했다.
 
  『기업의 우열을 가리는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新日鐵은 기술력에서 우리보다 강합니다. 경쟁력에서는 가장 이익을 많이 남긴 우리가 1위죠. 중국, 미국시장에서 新日鐵과 같이 경쟁해 똑같은 양을 팔고도 이익은 우리가 많이 남았어요. 재무구조면에서도 우리가 낫습니다』
 
  新日鐵은 초창기 포철의 모델이었다. 新日鐵을 비롯한 일본 제철소의 기술과 노하우를 빌려와 포철을 세웠던 것이다.
 
  ―新日鐵이 포철에 뒤떨어진 이유가 있습니까.
 
  『포철만큼 최소의 비용으로 이처럼 거대 규모의 제철소를 지은 전례가 없습니다. 朴泰俊씨를 「철강왕」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는 거죠. 초창기 얘기를 하면 끝이 없어요. 그리고 朴正熙 대통령이 「포철에서는 정치자금을 일체 못 받도록 한다」라는 내용의 친서를 朴泰俊 회장에게 써줬어요. 이로인해 정치자금에 시달리지 않았습니다. 또 포항과 광양제철소가 상호보완적인 생산 체제가 됐습니다. 후발 주자의 이점을 살려 일본보다 철광석을 값싼 가격으로 수입하게 된 것도 경쟁 우위를 얻게 했지요』
 
  그런 뒤 그는 자신의 경영 전략을 이야기했다.
 
  『1998년 국내 철강경기가 바닥이라 수요가 4천만t에서 2천6백만t으로 떨어졌습니다. 국내에서 팔 데가 없고 게다가 원화가 약세여서 수출드라이브를 걸었어요. 全세계를 상대로 수출망을 뚫었습니다. 그해 순이익 1조1천1백억원 중 78%가 수출, 22%가 내수였어요. 기동력 있는 판매전략이 주효했던 겁니다.
 
  그때까지 「최대생산 최대판매」 전략을 「적정생산 최대이익」으로 바꿨어요. 高부가 제품에 생산 공정을 집중했습니다. 高부가 철강재의 비율을 32%에서 39%까지 올렸어요. 내부적으로는 1조3천억원에 달하는 在庫를 줄여 금융비용을 낮췄습니다. 그리고 기술개발로 제품가의 52%를 차지하던 원재료비를 줄였어요』
 
  일각에서는 국내 독점기업인 浦鐵은 가만히 내버려둬도 돈벌게끔 되어 있다고들 한다. 浦鐵의 성취에는 경영 능력이 별로 작용할 여지가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가 浦鐵 회장에 취임한 뒤 맞닥뜨린 IMF 상황에서, 浦鐵은 국내 대기업으로서는 드물게 매출 11조1천억, 순이익 1조1천억원(1998년)을 올렸다.
 
  올초 포브스誌는 「세계 4백大 기업 중 금속·광업부문 1위」로 浦鐵을 꼽았다. 선정사유는 「浦鐵이 보유한 광양과 포항제철소는 세계 1, 2위 규모의 제철소이며 최고의 원가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경쟁사인 브라질이나 러시아의 일부 제철소들은 더 싼 제품을 생산할 수 있으나 품질면에서 매우 뒤떨어졌고, 일본의 철강사들은 생산제품의 종류나 품질은 浦鐵과 비슷하면서도 적자를 내고 있다」라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작년 3월 세계적인 컨설팅회사인 「모건 스탠리」는 浦鐵을 「철강기업 중 생존능력 1위」로, 작년 10월 포천誌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철강기업 중 1위」로 평가했다.
 
 
  『사람을 많이 경유할수록 사실과는 멀어진다』
 
 
  부채더미의 YTN을 흑자로 돌려놓은 장명국 전 YTN 사장은 한 경제지에서 <유상부 회장과의 첫 만남에서 「우리나라도 이제 제대로 되겠구나」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내가 만나본 경영인 가운데 몇 안되는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
 
  기자의 개인 소견을 밝힌다면, 그처럼 저잣거리의 匹夫처럼 말하면서 개성과 주관과 자신감이 모두 넘치는 기업인을 만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浦鐵이라는 방대한 공기업의 운영에도 그는 자신의 성향이 드러나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로 인해 浦鐵은 다른 대기업과의 차별성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하다.
 
  가령, 그는 해외근무 경험이 있는 과장·차장급 직원 30여명으로 「영보드(Young Board): 청년 이사회」를 구성했다. 석 달마다 한 차례씩 회사의 현안을 놓고 불꽃 튀는 논쟁을 벌여 보고서를 내고 있다. 물론 이 보고서는 浦鐵 경영에 반영된다.
 
  임원회의에서 주고 받는 발언 내용이 정리돼 e메일로 모든 직원들 앞으로 전달되도록 한 것도 그의 결정이었다. 또 그는 畵像(화상)으로 포항과 광양에 있는 과장급이상 임직원들이 모두 참석하는 월례 운용회의를 社內 TV로 생중계시켰다. 생중계이기 때문에 그도 간혹 실수할 때가 종종 생긴다.
 
  『외부를 향해 투명하기에 앞서 내부적으로 투명해져야 합니다. 직원들이 경영진의 생각을 알 필요가 있어요. 정보의 전달 과정이 많으면 낭비가 많고 시간이 길고 왜곡이 발생합니다. 그 과정에서 용두사미가 되거나 침소봉대가 되거나, 사슴이 말(馬)이 됩니다. 생중계 회의를 하면 위엄이 있어야 할 회장이 우습게 실수하는 점까지 노출돼요. 하지만 정보가 잘못 전달돼 회사에 불이익을 끼치는 것보다 제가 실수하는 게 낫습니다. 실수 좀 하면 어떻습니까』
 
  그의 자신감과 관련된 또다른 사례가 있다. 1998년경 浦鐵의 제2냉연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나자, 홍보실에서는 「포항 제2 냉연공장 가스 누출, 경미한 사고」라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작성했다. 그는 결재를 받으러온 직원에게 「누출」을 「폭발」로 수정하라고 했다. 고객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줘서 그들의 영업활동에 손해를 끼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재계 순위 6위(자산규모), 16개 계열사, 해외지점 47개, 임직원 2만여명의 浦鐵을 운영하는 그가 비서실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도 흥미롭다.
 
  『어떤 사실을 판단할 때 사람을 경유하면 경유하는 숫자만큼 사실과 더욱 멀어진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사업을 중단하거나 다른 사업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빠른 판단을 하려면 직접 당사자들을 만나야 합니다. 피곤하고 힘들지만 왜곡된 정보에 의한 판단 오류는 범하지 않는 거죠.
 
  어느 조직이나 톱(Top) 근처에 있는 이들은 사자의 탈을 쓰는 여우가 될 수 있어요. 제가 하지 않은 말을 하거나 제가 한 말의 뜻을 다르게 전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전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달합니다. 톱은 그걸 다 확인할 수 없어요. 비서실에 의지하지 않으면 그런 오판이나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빨리 현안을 파악할 수 있지요』
 
 
  李健熙 회장에게 던진 질문
 
 
  비서실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1993년 金泳三 정권 출범 초 司正(사정) 태풍이 불자, 大選 당시 YS와 충돌했던 朴泰俊씨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일본으로 훌쩍 날아갔다. 대신 그를 포함해 「朴泰俊 사단」의 浦鐵 임원 4명이 검찰에 불려갔다.
 
  이들의 개인 통장에서 朴泰俊씨에게 전달될 비자금이 확인됐다. 1심에서 그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수뢰)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았고(1995년 헌법재판소는 그에 대한 수뢰혐의 적용은 위헌이라고 판결-注), 6개월을 복역한 뒤 풀려났다. 곧바로 그는 삼성중공업에 대표이사 사장으로 스카우트됐다.
 
  『삼성이 왜 나를 스카우트했는지 모르지만, 당시 李健熙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라고 발언이 나왔을 때였습니다. 뭔가 바꾸려면 삼성의 純血(순혈)주의로만은 곤란하다고 판단해 저같은 雜種(잡종)을 들여놓은 게 아닐까요. 잡종 강세의 법칙이 있으니까요. 당시 법적으로 저는 전과자 신분이었습니다. 삼성은 제 스카우트 문제를 놓고 청와대의 고위층과 상의를 마쳤다고 들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에게 대표이사 사장을 시킨 것은 삼성에서 전례가 없었어요』
 
  그가 삼성에 들어가서 몇달 안됐을 때 비서실과 관련된 문제의 사건이 발생한다. 李健熙 회장이 전무급 이상 6백여명 임원과 대화하는 자리에서였다.
 
  『그런 자리의 질문이란 회장이 답변할 수 있는 수준을 고려하는 게 부하된 도리지요. 질문자가 정해져 있고 가끔 사전에 질문 내용을 알고 답변 준비를 합니다. 당시 모임은 예정시간보다 빨리 끝났어요. 그런데 현명관 비서실장이 「새로 오신 유상부 사장께서 혹 질문이 있으면 하라」는 겁니다.
 
  저는 불쑥 「삼성에 와보니 노동조합이 없다. 회장께서는 왜 노동조합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언제까지 노동조합 없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라고 질문했어요. 순간 임원들이 숨을 못 쉬었어요. 저는 의식하지 않은 채 「두번째 질문은…」이라며, 「삼성에서는 의사결정을 하는 데 온통 비서실만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큰 조직이 기동성이 없다면 문제가 아니겠느냐」라고 계속 했습니다.
 
  노조 문제는 삼성에서 터부시된 것이었어요. 신성불가침한 비서실도 마찬가지였어요. 제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무지의 용기인지…, 아마 浦鐵에서 朴泰俊 회장에게 하던 식으로 말이 튀어나왔을 겁니다. 저는 회사에 도움된다고 판단되면 카리스마인 朴회장과도 서슴없이 언쟁을 벌였으니까요.
 
  여하튼 회의가 끝난 뒤 삼성 임원들이 저를 걱정했습니다. 「삼성에 대해 너무 모르고 왔다. 수명이 길지 않을 것…」이라고. 대부분 규격화된 조직에서 튀면 집중포화를 받지요. 그러니 아무도 앞서려고 하지 않지요. 앞서면 뒤통수를 저격당하니까요.
 
  하지만 그 룰에 해당되지 않는 돌연변이가 우성인자가 되고, 조직파괴가 개선의 결과를 갖고 오는 거죠. 李健熙 회장의 큰 그릇이 저를 받아주신 겁니다. 저는 실례를 저지르고도 용서받고 대접받았던 드문 경우였어요』
 
 
  『우리는 오누이처럼 같이 자랐다』
 
 
  李健熙 회장은 그를 신선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그때까지 삼성에서 금기시된 질문에 李회장은 답변했다고 한다. 삼성 오너가 직접 털어놓은, 삼성에서 노동조합을 용인하지 않았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나는 경남 의령 출신이다. 그곳에 나를 키운 유모에게는 딸이 있었다. 우리는 오누이처럼 같이 자랐다. 나중에 유모에게 땅을 사주고 생활을 보장해주었다. 그 딸은 제일모직에 취직시켰다. 그런데 그딸이 노동조합을 세워 선대회장(이병철)에 대한 축출운동을 벌였다. 너무도 뜻밖의 현실에 직면해 충격을 받았다. 노동운동에도 룰과 윤리가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노동운동의 룰부터 습득해야 한다. 그것없이는 혼란과 파괴밖에 없다. 그래서 아직은 노동조합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삼성에 들어가기로 결정난 뒤 처음으로 李健熙 회장과 인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삼성중공업 사장에 취임한 지 열흘 만에 한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삼성중공업의 한 직원이 경쟁사인 한국중공업에 들어가 컨테이너 크레인을 몰래 촬영하다 들켰다. 소위 기업 기밀을 훔친 것이다.
 
  『평소 친분 있는 한국중공업 사장을 찾아가 수습했어요. 과거 시절 외국 기술을 전수받는 과정에서 반드시 代價에 해당하는 로열티를 줬다기보다 훔친 경우도 있었거든요. 그때는 애국으로 통했고, 칭찬의 대상이었지요. 한국중공업 사장은 이해했어요. 그런데 모 일간지가 이를 취재해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난리가 났지요.
 
  삼성 사장단회의에서 저는 「사건이 이렇게 확대될 줄 몰라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만약 보고했다면 언론 보도를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부하가 한 짓이다. 삼성은 이번 사건으로 명예에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다. 사표를 내겠다. 삼성이 결과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명예를 만회하기를 바란다」라고 신상발언을 했습니다. 사표를 쓴 뒤 그날 오후 짐을 정리해 나왔어요.
 
  이런 행동이 또 삼성에 충격을 줬던 것같습니다. 삼성에서는 위에서 그만두라고 해야 그만두지, 먼저 그만두겠다는 것은 非禮(비례)였어요. 李健熙 회장이 비디오 테이프로 사장단회의 광경을 봤던 모양입니다. 이분은 오히려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사표 수리를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삼성에 계속 근무할 수 있었지요』
 
  그는 『손오공이 날뛰는 걸 나무라서는 안된다. 부처님 손바닥이 그걸 수용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三星에서 배운 것 浦鐵에 응용
 
 
  화제는 李健熙 회장 쪽으로 흘러갔다.
 
  『삼성재팬(일본에 있는 삼성 계열지사들의 통합법인) 사장으로 있을 때 李회장과 많은 토론을 했어요. 가끔 일본에 오셨으니까요. 그분은 눌변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번 말문이 열리면 브레이크를 걸 줄 몰라요. 그분은 집착이 강하다고 할까, 집중력이 강하다고 할까. 하나의 사물에 대해 자신이 납득할 때까지 철저하게 알려고 합니다. 가령 영화를 보면, 배경과 등장인물을 욀 정도로 되풀이해 봅니다. 삼성의 質(질)경영이 거기서 나온 것 같아요.
 
  어떤 때는 그분과 5시간씩 토론을 벌이기도 했어요. 서로 의견이 부딪친 적도 적지 않았지만, 「이런 각도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구나」라고 각성하기도 했어요. 한번은 「정경유착」에 대해 토론했어요. 그때까지 저는 재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지요.
 
  그분은 「정경유착이란, 기업인이 자기 이익을 위해 정치인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더 큰 혜택을 보는 걸로 알려져 있다. 꼭 그렇지 않다. 정치인들은 돈이 필요하니 기업인들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돈 받은 사람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손바닥(정경유착)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그런데 재벌에게만 비난을 가한다」는 것이었어요』
 
  기자가 『삼성 근무로 객관적 거리를 두고 浦鐵을 바라볼 수 있었겠군요』라고 하자, 그는 『삼성에 근무할 기회가 없었다면 전문경영인이라고 자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浦鐵은 정부출자기관이라 모든 행정이 정부와 똑 같아요. 감사원 감사를 받고 국정감사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업무가 방어적이고 책임을 피하거나 분산시키고, 책임을 면하기 위해 근거를 남기는 기술이 대단히 발달되어 있어요. 하나의 의사결정을 두세 번만 거치면 되는데 몇몇 부서를 거친 것은, 「나만 아니라 너도 다 같이 걸어놓아 죽이려면 다같이 죽여라」는 행정이지요. 효율을 추구하는 민간기업과는 다르지요.
 
  같은 제조업이라도 공기업은 생산자 중심의 사고이지만, 민간기업은 고객 중심입니다. 모든 공기업의 행정이라는 게 고객 중심으로 할 경우 「고객과 짜고 얼마나 해먹었느냐」며 감사의 대상이 돼요. 그런 직원은 아마 몇년을 못 견뎌 옷 벗게 됩니다.
 
  디지털 경영도 삼성에서 배운 것입니다. 1995년 삼성은 임원들에게 카이스트(KAIST)의 정보기능코스를 수료하게 했어요. 그 덕에 저는 인터넷 활용법 등을 배웠고, 浦鐵에 와서 임직원들에게 컴퓨터와 영어 교육을 강조했어요. 이는 직장을 떠나서 인생을 사는 데 꼭 필요하다는 거죠. 보직 승진에 영향을 주겠다면서 임원들에게까지 컴퓨터 시험을 치게 했어요. 세상은 이제 컴퓨터라는 문명의 이기를 활용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눠지고, 이른바 「디지털 갭(Digital Gap)」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납니다』
 
 
  『안전벨트를 매라』
 
 
  浦鐵 회장 취임 초 그는 간부들에게 「버클 업(안전벨트를 매라)」이라고 주문했다.
 
  달리는 세상의 속도에 안전하게 올라타려면 안전벨트를 매라는 뜻 같은데, 그 안전벨트는 어떤 것일까.
 
  『지금 경영 환경으로는 의사 결정이 스피디하지 않으면 링에 올라가보지도 못하고 게임이 끝나버립니다. 정보가 光速(광속)으로 달리고 있고 그 정보를 동시간帶로 공유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없는 선택이지요. 우리의 의사나 희망과 상관없이 빨리빨리 변신해야만 한다는 거죠. 옛날에는 걸어다녔어요. 낙오자가 생기면 함께 데려갈 수 있었어요. 지금은 순식간에 낙오자를 스쳐 지나가버립니다』
 
  ―변치 않는 경영 원칙은 없는가요. 외부 환경에 따라 늘 변화해야 합니까.
 
  『사람과 자본과 기술을 투입해 재화를 창출한다는 경영의 기본 원칙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인터넷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그런 원칙을 지키는 게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는 거죠. 전통적인 제조업에도 이런 개념은 적용됩니다. 요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32비트(bit)까지 빠릅니다. 우리로서는 혀가 못 따라가요. 앞으로 그런 아이들이 시대를 지배합니다. 정보량은 1초에 2기가바이트(G)로 흐릅니다. 2기가바이트는 朝鮮日報 일년치 기사량에 해당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피디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지요』
 
  重厚長大(중후장대)한 장치산업인 제철업의 회장이 날렵한 스피드만 강조한다는 것은 여전히 낯설다. 기자는 『새로운 사업을 결정할 때 그렇게 빠른 것만 좋아할 것인가』라고 묻자, 그는 『사업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런 경우에도 시간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라고 답변했다.
 
  『모든 사업의 결정이란 위험과 기회가 반반씩 있는 법입니다. 절반의 위험으로 그만 둘 것이냐, 절반의 기회로 시도할 것이냐. 새로운 사업의 타당성을 결정한다고 시장성, 향후 전망 등 경제학적 지식을 늘어놓아도 어디 그대로 됩니까. 관건은 「하느냐 안하느냐, 내가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어요. 더 중요한 것은 결정한 다음 성공시킬 수 있는 방법에 몰두하는 겁니다. 신중하게 결정했으므로 그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어느 경우나 반반의 위험과 기회가 있는 법이지요』
 
 
  金策제철소 극비 방문
 
 
  이쯤 해서, 그가 1991년 북측의 요청으로 북한의 金策제철소를 방문한 비화를 들어보자. 당시 북한의 김달현 부총리가 요로를 통해 제철소 전문인력의 訪北을 부탁해왔다고 한다. 그는 『남북간 비밀채널이 있었다. 안기부(현 국정원)에서 朴泰俊 회장에게 「북한의 金策제철소가 가동이 안된다. 북한에 전문가 한명을 보내달라고 한다」고 통지해왔다. 그래서 내가 선발됐다』라고 말했다.
 
  『일제시대에는 북한의 제철업 수준이 훨씬 높았어요. 金策제철소가 있는 청진에는 일본의 니혼스틸 지사가 있었어요. 반면 남한에는 대장간이 고작이었어요. 그런데 남북간에 철강재 생산이 역전된 게 1978년경 浦鐵의 생산량이 550만t이 되면서였어요. 제철업은 국방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북한이 불안하니까 소련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해 청진에 일관 공정시스템을 갖춘 金策제철소를 지은 거죠.
 
  그런데 자동차용 강판을 만드는 냉연공장이 가동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중국 등에 전문가를 초청했다가, 우리에게까지 온 겁니다. 극비방문이었습니다. 안기부에서 「어떤 사고가 나더라도 한국 정부의 책임이 아니고 본인의 과실이다」라고 서약한뒤, 북한여권과 공무여권으로 들어갔어요.
 
  제가 공산권의 제철기술에 대해 처음 접한 게 1980년대 초 파키스탄의 카라치제철소에서였어요. 소련의 기술로 지은 것이었어요. 당시 파키스탄이 소련과 외교관계가 나빠지자, 소련의 제철소 기술자 9백여명이 출국해버린 겁니다. 파키스탄이 IBRD(현 세계은행)를 통해 우리쪽에 도움을 요청해왔어요. 공산권 제철소는 한번 설비한 걸 재탕삼탕합니다. 시장이나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기능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러니 金策제철소는 카라치제철소와 설비구조가 똑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숱한 질문을 받았어요. 설비 용어가 서로 달라 照見表(조견표)를 만들어 비교하면서 대화했습니다. 가령 「핫코일(Hot Coil)」이 그쪽에서는 두루마리처럼 감겨 있다고 「퉁그리 강판」으로 부르는 식이에요. 또 공장 안에 「속도전」 「섬멸전」이라는 구호가 붙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당신들은 누굴 때려잡겠다고 공장에까지 이렇게 붙여 놓느냐」라고 항의하니까, 「속도전은 공정단축, 섬멸전은 무결함운동」이라는 겁니다』
 
 
  『형제국가에게 손해 본다고 따지느냐』
 
 
  ―金策제철소가 정상가동 됐나요.
 
  『복합적인 문제였어요. 저 혼자서 모든 부문에 대해 처방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귀국한 뒤 제가 보고온 내용을 브리핑한 뒤 浦鐵의 스태프들과 토의했고, 리포트를 작성했어요. 다시 북경에서 김달현 부총리를 만나 리포트를 전해주면서 다섯 시간 동안 설명해줬습니다. 그분은 공대 출신이고 1년반 동안 金策제철소의 운영을 맡은 적이 있어 제 말뜻을 다 알아들었어요. 그후로 金策제철소의 냉연공장이 정상 가동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시 金策제철소에서 또 하나의 해프닝이 있었다. 그에게 북한産 핫코일 50만t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북한은 핫코일 50만t을 러시아에 주고 대신 원유를 받는 求償(구상)무역을 해왔다. 그해부터 러시아가 求償무역을 하지 않겠다고 나오자, 핫코일이 在庫로 쌓인 것이다.
 
  『문제의 핫코일을 보니까 기가 막혀요. 고객이 원하면 소수점 둘째자리까지 철판의 두께를 맞춰주는 게 자본주의 시장입니다. 3.2mm 두께의 강판이 필요하다면 북한에서는 3.5mm를 써야 해요. 0.3mm의 낭비가 발생할 뿐만 아니라 무거워집니다.
 
  浦鐵에 그런 제품을 50만t 사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도 쇠장수다. 쇠장수에게 쇠를 사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는가」라고 하자, 「당신들은 쇠를 많이 파는데 이걸 못 사주느냐. 형제국가에게 손해 좀 본다고 그걸 따지느냐」는 겁니다. 설왕설래하다가 결국 5만t만 사줬어요. 이걸 되파는데 t당 7천원 손해봤어요』
 
  그러면서도 북한에 대한 그의 기억은 애잔한 쪽이다.
 
  『金日成 수령이 묵었다는 로열 스위트룸을 썼어요. 객실이 넓었지만 가구는 형편없었습니다. 일제 TV를 켜면 화면이 늘어났다 좁혀졌다 해요. 전압이 불규칙하면 그렇게 됩니다. 물질적 기반이 얼마나 열악한지 알 수 있는 거지요.
 
  하지만 이들이 우리보다 무조건 불행하다고만 생각하면 안돼요. 가난한 사람의 프라이드가 더 강할 때가 있어요. 우리는 배금사상이나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인간의 향기를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북한에서 식사할 때 저는 생배추가 고소해 자주 손이 갔는데, 이들은 함흥의 게요리나 돼지고기를 제쪽으로 밀어주며 「귀한 음식을 안들고 배추만 먹는다」며 진심으로 안타까워 해요. 그런 마음 씀씀이를 대하면 찡해집니다. 한번은 아침 식사로 뭘 들겠느냐고 묻길래, 「계란 프라이를 해달라」고 했지요. 저는 으레 두개를 생각했는데 스무개 정도를 큰 접시에 가득 담아왔어요』
 
  기자는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인생 진로가 그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많이 영향받았는지를 알게 됐다. 중요한 고비마다 그를 아끼는 주변사람의 권유로 그는 원래 계획에 없었던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틀어갔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
 
 
  고교 시절 그는 수재였다. 당시 풍조대로 법대에 진학하려고 했다. 하지만 존경하던 교장 선생님이 『정말 인재가 필요한 분야는 법과 정치보다 과학 기술』이라고 권유하자, 그는 입학시험을 불과 한달 앞두고 진로를 수정했다. 서울工大 토목과에 진학은 했지만 솔직히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
 
  『전공보다 다른 쪽에 호기심이 많았어요. 음악, 문학, 천문학을 좋아했어요. 음향기기에도 빠졌어요. 대학 1학년 때는 당구에 미쳐서, 시험도 안 치고 당구장에 사는 바람에 재시험을 5개나 봤어요. 한 번은 포커에 열중해 등록금을 홀랑 날린 적도 있었습니다. 마작도 했지요.
 
  도중에 전공을 바꾸려고 했어요. 졸업할 무렵에는 친구가 권하는 바람에 신문기자 시험을 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과학부 기자밖에 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포기했어요. 외국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했고…. 그러다가 ROTC 장교로 군에 들어갔어요』
 
  그의 첫 직장은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였다. 당시 金鍾泌씨의 아이디어로 국토개발을 위해 만든 정부투자기관이었다. 그는 군복차림으로 면접을 받고 1등으로 합격했다. 여기서 그는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유학을 떠나, 고속도로와 고가도로 설계를 공부했다. 일본어를 다시 익히는 기회도 됐다(그는 일본에서 출생해 7세 때 건너왔음-注).
 
  6개월 뒤 귀국했을 때 경인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진행중이었다. 설계는 다 된 상태였으나 재원 부족으로 아시아개발은행(ADB)의 借款(차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6백80만 달러 차관을 쓰게 되면 컨설턴트의 감리를 받게 됩니다. 기술적 타당성을 평가하는 이들이 전부 일본인이었어요. 제가 일본어를 구사하고 고속도로를 공부했다는 이유로 한국측 컨설턴트 대표가 됐어요. 건설부가 시행하는 사업의 감독관이 된 셈이지요. 그게 개인적으로 행운이었어요』
 
  이어 그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도 참여했다. 서울-대전 구간의 노선 설계는 그의 작품이었다. 건설비, 건설기간, 유지관리비의 최소화는 물론이고, 고속도로가 생김으로써 유발되는 산업 효과, 자동차의 스피드가 인간의 자율신경계에 미치는 변화까지 계산한 설계였다고 한다. 또 부당한 토지거래를 막기 위해 엉뚱한 노선을 흘리는 「연막 작전」을 펴기도 했다.
 
  『대학시절 강사였던 정명식씨가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사장으로 왔어요. 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프로젝트 매니저가 됐습니다. 젊은 나이에 고속도로 건설 분야에서는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지요. 보유한 자료도 많았고 일본인 전문가들의 인맥도 두터웠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정명식씨가 「포항제철로 옮기려는데 자네도 같이 가자」는 겁니다. 제가 「그게 뭐하는 곳이냐」고 묻자, 「쇠를 만드는 곳」이라고 해요. 방황 끝에 토목회사에 들어와 권위자가 된 마당이라, 망설임이 많았어요.
 
  결국 제가 그분을 좋아했기 때문에 따라갔죠. 저를 위해서 제의한 것이지 나쁘게 하려는 게 아닐 거라는 믿음이 있었죠. 그때가 1970년이었습니다. 浦鐵은 1968년 4월에 서류상 창립됐는데, 제가 갔을 때도 모래벌판에 천막 몇동 쳐 있는 게 전부였어요. 그 천막으로 친 건설본부를 사하라 사막에 주둔한 독일의 전차사단을 따서 「롬멜 하우스」라고 불렀지요』
 
 
  광양제철소 건설 책임자
 
 
  당시 浦鐵은 재원만 확보된 상태였다. 對日청구권 5억 달러 중 1억1천9백 달러가 浦鐵을 세운 것이다. 그는 일본의 컨설턴트로부터 받은 리포트를 번역해나가면서, 「제철소는 이렇게 만드는구나」를 알게 됐다고 한다. 전혀 새로운 용어가 나오는 분야는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호주나 브라질에서 수억년 동안 잠자고 있던 철광석을 캐어내, 배에 싣고 와서 용광로에 녹여 선철을 만들고, 카본을 첨가해 강철을 만들고, 또 성형 처리하고….너무 신기했어요. 당시 창립 멤버 39명 중에 용광로를 봤다는 이는 불과 3명이었으니까요.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에 덤벼들었지만, 의욕과 애국심만 펄펄 끓었어요.
 
  철강업은 장치산업입니다. 장치가 잘되느냐에 기업의 장래가 달려 있어요. 변수가 물동량입니다. 1t의 철강을 만들기 위해서는 총 5.3t의 재료가 필요해요. 철광석이라는 게 39%는 돌입니다.
 
  배에 철광석을 싣고 와서 야적하고 생산공정에서 보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동량이 엄청나요. 철광석을 한번 들었다가 놓는 게 다 돈이에요. 물동량을 줄이고 공정거리를 짧게 만드는 게 철강업의 경쟁력을 좌우합니다. 당시 대학 어느 곳에서도 이런 걸 가르치는 데가 없었어요. 제철소를 짓다보니 토목공학만 아니고, 전자·건축공학·耐火物(내화물) 소재의 투입과 산출의 경영학까지 알게 됐어요. 2주일간 집에 못 들어가기 십상이었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 세대에서는 다 그렇게 바빴을 겁니다』
 
  이같은 악전고투의 경험은 10년 뒤 그로 하여금 단위제철소로는 세계 제일 규모인 광양제철소를 짓게 했다. 광양제철소의 부지 선정과 건설 과정 역시 한편의 大河드라마다. 제철사업권을 둘러싸고 現代와의 접전이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됐고, 그의 판단과 집념이 당초 정부에서 제철소 부지로 발표한 아산에서 광양으로 변경시키고, 그로 인해 안기부에 끌려가 밤샘조사를 받기도 했다.
 
  현장 총책임자였던 그는 최단기간에 최소 비용으로, 모래펄의 연약 지반에 모래를 담은 관을 박아서 다진 「모래관 공법」으로 광양제철소를 건설했다. 물동량을 줄이기 위해 생산공정을 일직선으로 단축배열시킨 설계는 독보적이다. 포항제철소가 朴泰俊씨의 카리스마적 지휘에 힘입어 건설됐다면, 광양제철소에는 劉常夫의 체취가 더 묻어 있다.
 
  그는 『우리 장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고속도로와 浦鐵을 다 만든 줄 알고 있었어요. 행복하게 돌아가신 거죠』라고 겸연쩍게 웃다가, 『사실 저는 이러한 국가적 프로젝트의 말단 부분에서 일했을 뿐입니다. 朴正熙 대통령은 1971년 4월1일 浦鐵이 착공한 뒤로 14번이나 현장에 들르셨어요. 성공하겠다는 집념을 내보인 것이죠』라고 정색했다.
 
  『국가가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한 사업은 정형화됩니다. 우선 농사를 증산해 국민의 배고픔을 해결합니다. 그 다음 공업으로 들어가면 제철업이 기본입니다. 산업의 쌀(米)이니까요. 그뒤 자동차나 조선부문으로 들어가는 게 순서입니다. 朴대통령의 浦鐵에 대한 집념도 이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도를 했던 나라가 많았지만 모두 성공한 게 아닙니다. 1960년대 우리의 국민소득은 1백 달러가 안됐어요. 필리핀, 파키스탄, 인도는 1백20달러선이었어요. 우리보다 축적이 많았고 출발도 빨랐습니다. 관대한 식민지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경영 능력도 뛰어났습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터키가 경제 발전에 제동이 걸린 것은 국영제철소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제철업의 실패는 국가 경제를 흔들어놓지요』
 
 
  군사문화의 효율성과 저돌성
 
 
  ―철강업은 이제 사양산업이 된 것인가요.
 
  『철강업은 인류가 지구상에 존속하는 한 필요합니다. 다만 시대와 공간적으로 한 지역에서의 盛衰(성쇠)가 있는 거죠. 철강의 지배권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이제 주무대가 일본 한국 중국으로 모아졌습니다. 철강업의 사이클로 인해 점점 후진국으로 옮겨가고 있지요. 컨설턴트 업체인 「스탠리 모건」에 따르면 한국에서 경쟁력을 지속할 수 있는 기간은 향후 15년 남았어요. 경쟁력을 유지하는 시간에서 제약이 있다는 거죠』
 
  ―高부가 산업은 아니지요.
 
  『浦鐵의 부가가치는 37%입니다. 반도체나 영화, 약품 등에 비하면 형편없으나 이만큼 부가가치를 못 내는 업종도 많지요』
 
  ―제가 포항에서 軍생활을 할 때 浦鐵 공장이 마치 군부대처럼 보였던 적이 있습니다. 실제 해병대 출신이 浦鐵에 많이 들어갔지요.
 
  『우리는 누런 유니폼과 워카를 신었다고 「黃軍(황군)」이라고 했지요. 규율과 위계질서가 있었습니다. 군사문화의 효율성은 어떤 타깃이 정해졌을 때 가장 적은 투입으로 과학적으로 탈취합니다. 浦鐵을 짓는 과정에서 93명의 동료가 숨졌어요. 전쟁이 아닌 건설을 하면서 이렇게 희생자가 많은 경우는 드물 겁니다. 국가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에 정신적 충족감이 대단했지요. 1970년 中東 경기로 친구들이 빠른 승진과 치부를 할 때 저는 자전거 타고 출근했지만, 이러한 자긍심이 저를 지탱했어요. 지금의 잣대로 1970년대 상황을 바라보면 유치할지 모르나 당시는 진지했습니다』
 
  1993년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浦鐵 인생은 위축된 적 없었다. 오히려 승승장구했다고 말해야 옳다. 그는 『浦鐵의 회장에 오른다는 것은 전혀 생각해본 적 없지만 내가 죽어 浦鐵의 공동묘지에 묻힐 것이라는 데는 의심치 않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바로 그해 浦鐵 부사장이었던 그는 보스인 朴泰俊씨로 인해 구속됐다. 이 사건은 개인적으로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6개월의 수감생활 동안 무엇을 느꼈습니까.
 
  『감옥에서는 잃는 것도 얻는 것도 있어요. 직장과 명예는 잃었죠. 하지만 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얻은 쪽이죠. 제 생애는 비교적 밝은 쪽이었어요. 자신감에 넘쳐 오만했을 정도였지요.
 
  스스로는 자신이 논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편견일 수도 있다는 걸 감옥에서 깨달았어요. 대개 성공의 길을 걸은 사람들 중에는 남의 생각을 귀담아 듣지 않아요. 오히려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하지요. 공격적이지요. 감옥에서 이런 반성을 했음에도, 요즘에는 다시 남을 설득하려는 버릇이 재발했어요』
 
 
  朴泰俊의 실토:『내가 어떻게 YS 같은 인간의 選代위원장을 맡나?』
 
 
  기자는 『인생에서 어떤 가치를 가장 귀하게 여겼는가』라고 묻자, 그는 『성경에도 나오지만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다. 신이 아니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없지만 그게 소중하다는 생각은 갖고 있다』라고 답변했다.
 
  ―오히려 인간적 의리를 더 가치 있게 여긴 게 아닙니까. 정명식씨나 朴泰俊씨와의 관계에서 보듯이.
 
  『제 자신을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외람스럽습니다. 「천냥 빚도 말로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저는 오히려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쪽이었어요. 면전에서 상사들에게 성질을 부리기도 했어요. 목이 날아가도 몇 번 날아가는 불칙한 행동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저는 상사들의 사랑을 받았어요. 그분들이 저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모르지만, 회사가 어려운 난관에 직면해 돌파해야 할 상황이면 저를 많이 발탁했어요』
 
  ―朴泰俊씨와는 성향이나 경영 스타일이 다르죠.
 
  『제 나이가 이만큼 됐으니 기업경영에 대한 나름대로 시각은 있지요. 또 과거 기업 경영과 오늘날 경영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게, 변화의 폭과 속도가 큰 까닭입니다. 朴泰俊씨는 용인술이 뛰어났어요. 사람에게는 저마다 개성과 소양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걸 아는 분이었기에 저를 안았던 겁니다.
 
  저는 일에 관한 한 견해가 틀리면 틀린다고 이야기해야 직성이 풀리는 체질입니다. 제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옷 벗고 나가면 어디 가서 밥 못 먹겠느냐는 오기도 있었지요. 자연히 충돌이 날 수밖에 없죠. 朴泰俊씨가 저를 내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로 밤새 고민한 적도 있었다고 뒷날 들었어요』
 
  그에게 『이제 회장이 된 마당에, 상사에게 대드는 부하 직원을 어떻게 보는가』라고 묻자, 『내 자신이 그렇게 성장했다. 原罪(원죄)가 있는 사람이다. 이에 대해 저항을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하가 대들기 전에 좀더 공부하고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浦鐵의 社內통신망에 「토크 프리」라는 토론방을 만들어, 결코 발언자를 검색하는 일은 없을 테니 마음껏 자기 아이디어를 밝히라고 했어요. 간혹 저에 대한 비난성 발언도 나옵니다. 저도 평범한 인간인데, 이 순간 갈등이 생깁니다. 하지만 「내가 무엇 때문에 회장이라는 말을 듣고 남보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월급을 받느냐. 이런 비난까지 다 포함돼 있다」라며 잊어버려요』
 
  ―삼성재팬 사장으로 있던 시절, 일본에 망명중이던 朴泰俊씨의 뒤를 돌봐줬다고 하더군요.
 
  『물질적으로 도움이 된 게 없어요. 일주일에 한 번쯤 식사 대접한 것밖에 없어요. 老부부가 13평짜리 아파트에 기거했죠. 나카소네 등 일본의 지도급 인사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어떤 분은 자신의 퇴직금 일부를 건네주고 갔어요. 눈물겨운 일이 많아요. 이런 얘기를 모두 하면 한국에 너무나 많은 배신자를 만들게 됩니다.
 
  이분이 외롭고 어려운 처지여서 제가 곁에 있어 약간의 위로는 됐겠죠. 간혹 제가 「조금만 타협했으면 이런 꼴 안 봤을 텐데」라며 부아를 터뜨리기도 했죠. 그러면 이분이 「무슨 소리, 내가 선택한 것 중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어. 내가 어떻게 YS 같은 인간을 위해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을 수 있나」라며 한발짝도 양보 안해요.
 
  그분이 저에게 위로가 된 부분도 참 많아요. 자기가 읽어본 책 중 경영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밑줄 쳐서 제게 보내주곤 했어요. 저는 삼성에 근무하면서 浦鐵을 잊었는데, 이분은 일본에 계시면서도 浦鐵을 잊지 못했어요. 浦鐵의 투자가 잘못됐다던가, 포항工大가 잘못 운영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혼자 가슴을 쳐요. 국제전화를 걸기도 했어요. 정치권이나 언론에서는 이분의 浦鐵 경영 관여를 이권 개입으로 봤는데 그건 아닙니다. 인생의 소중한 세월을 모두 거기에 쏟아부었기 때문에 부모로서의 애정 같은 것이었죠』
 
  ―朴泰俊씨가 이처럼 정치 전면에 다시 나설 것으로 당시에는 예상했습니까.
 
  『이분의 명예가 회복돼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명예회복의 형태가 어떤 식으로 될지는 몰랐어요. 당시 국내 인사들이 여러 가지 정치적 제안을 해왔어요.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이분이 응하지 않았어요. 명예회복도 자신의 손으로 하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모두 말렸던 포항 보궐선거에 나가 명예 회복을 했어요』
 
 
  『제철업은 너무 성숙된 업종』
 
 
  ―朴泰俊씨처럼 철강왕이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봅니까. 劉회장은 그런 쪽으로 관심은 없나요.
 
  『노태우 정권시절 이분은 마지못해 정치판에 들어갔어요. 정치권의 거듭된 종용을 물리치지 못한 것이었죠. 浦鐵을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정치를 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이분의 큰뜻을 다 읽을 수는 없을 겁니다. 언젠가 이분께 「명예에 흠집이 나기 전에 적절하게 물러나시라」고 말씀드린 적 있는데, 이분이 웃으시더군요. 저는 결코 정치 근처에도 가지 않을 겁니다.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서 살아 생전 존경받았던 이를 본 적 있습니까』
 
  ―제가 취재한 바로는, 浦鐵 산하 「포스코경영연구소」가 자민련의 정책연구소 역할을 해왔더군요.
 
  『포스코경영연구소에서는 철강 경기와 관련해 산업 전반에 대해 연구를 합니다. 이런 연구보고서는 국책을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 朴총재께서 이를 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른 민간경제연구소는 재벌과 관련돼 있어요. 물론 국책연구소도 있지만. 이런 점에서 포스코경영연구소는 중립적 성격이지요. 그러나 자민련의 산하 정책연구소라는 말은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정부의 발표대로라면 벌써 浦鐵은 민간기업이 되어 있어야 옳다. 작년 말 정부는 浦鐵의 산업은행 지분(9.84%)에 대해 매각 절차를 밟았으나 매각이 성사되지 못했다. 최소 1만 주 단위로 매각하는 방식을 내세워 일반투자자는 물론 대기업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浦鐵을 민영화시키는 게 정부의 진심이 아닐 것이라는 세간의 의혹도 제기됐다. 그는 『정부가 약속을 못지켰다』고 코멘트했다.
 
  ―몇년 전 포스코경영연구소에서는 국가 기간산업인 浦鐵은 공기업으로 존속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내부 보고서를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劉회장은 민영화를 찬성하는 쪽입니까.
 
  『공기업이냐 민영화냐 논의를 떠나, 과거에는 우리나라 울타리 안에서 기업활동을 했습니다. 동네 축구의 룰로도 가능했지요. 이제는 글로벌 룰에 따라 세계 시장에서 경쟁해야 합니다. 감사에 대비해 展示(전시) 업무를 하는 시스템이란 것은 세계의 철강업체와 경쟁하면서 마치 무거운 짐을 다리에 매달고 뛰는 격이지요』
 
  ―浦鐵에는 외국 지분이 43%를 차지합니다. 국가 기간산업이 외국투기꾼의 손에 넘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요.
 
  『한국의 재벌이 浦鐵 경영권을 확보할 경우 경쟁업체에는 철강재를 공급해주지 않는 배타적 경영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외국의 투자가 입장에서는 浦鐵이 그렇게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제철업은 너무나 성숙된 산업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M&A(기업의 인수합병)란 대상 기업의 경영상 몇 가지 결함을 해소하기만 하면 주가를 올려 되팔 수 있다는 계산에서 시작됩니다. 경영상 개선의 여지가 남아 株價를 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 매력이 없는 M&A는 오히려 부담만 커집니다.
 
  영국 정부는 제철소를 민영화시키면서 특정기업이 배타적 지배를 위해 최고경영자나 정관을 바꾸려 할 때 법적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골든 쉐어(Golden Share)」 주식 한 장을 보유했어요. 불란서에서는 전력업체 등 友好(우호)주주를 만들어 두었어요. 우리는 작년 주총에서 최고경영자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지분의 25%까지 주식을 발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지분을 友好주주에게 주면 배타적 경영권 지배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집사람과 이야기하면 편해진다』
 
 
  그는 4시 반쯤 기상한다. 어떨 때는 抄(초)도 안 틀리고 3시20분에 깬 때도 많다. 먼저 기도하고 복식 심호흡을 한 뒤 부인과 함께 15분쯤 예배를 본다. 그는 술 마시는 걸 싫어하고 일찍 歸家(귀가)하는 쪽이다.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느냐는 질문에는 『집사람과 이야기하면 편해진다』라고 답변한다. TV연속극도 보고…, 그는 평범한 중년 남자다. 스스로도 『평범한 인간이 저지르는 오류를 다 범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구를 해고시킬 때 내 손으로 자르지 않고 부하를 시키지는 않는다. 그건 부하에게 미안하고 부하에게 약점이 잡히고, 나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킨다는 것은 내가 못난 것이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惡役이라도 내가 할 일이면 내가 해치운다』라고 말할 때면 그는 더 이상 평범해보이지 않는다.
 
  지난 겨울 신세기통신과 SK텔레콤의 전략적 제휴도 그러한 예다. 浦鐵은 신세기통신의 대주주였고 경영권을 가지고 있었다. 浦鐵에게 그러한 전략적 제휴는 경영권을 포기하고 SK텔레콤의 주식 배당을 받는다는 걸 의미했다. 경영권이란 기업인이 거꾸러져도 결국 놓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기업을 하면 누구나 경영권에 집착해왔다. 하지만 M&A가 대세가 된 요즘 경영권을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경영권을 장악하는 게 경영이 아니다. 경영을 더 잘하는 쪽에서 경영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나보다 더 내 자산을 키워줄 수 있는 이에게 맡기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경영이다』라고 말한다.
 
  ―요즘 벤처기업 및 코스닥 상장사들이 단번에 수십억 수백억원을 챙기는 걸 보면서 상대적으로 울적해지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통적인 제조업인 浦鐵도 섭섭한 기분이 있겠지요.
 
  『재능 있는 사람이나 위험 부담을 안고 덤벼드는 사람은 상응한 대가를 받아야지요. 우리나라에서는 富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어요. 코스닥 시장에서 돈을 벌었든 간에 불법적인 행위가 아니라면 인정해줘야 합니다. 신세기 통신이 전략적 제휴를 하면서 2만5천원이던 주가가 12만원까지 올랐어요. 당시 신세기 통신 직원들은 우리 社株(사주)로 1인당 평균 1만 주 이상 갖고 있어요. 순식간에 십억원을 번 거지요.
 
  浦鐵 직원들이 「20년, 30년 뜨거운 쇳물 앞에서 땀흘려가면서 일했지만 퇴직금 얼마 안된다. 신세기 통신의 우리 社株는 불공평하다」며 항의를 해왔어요. 신세기 통신을 인수했을 때 浦鐵 직원에게 지원자를 받았으나 다 안 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충원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주저하면서 할 수 없이 신세기통신으로 간 직원에게 인생의 기회가 온 거죠. 선택하지 못한 사람은 선택한 사람에게 박수를 쳐야 하는 거죠. 모두 자기 선택입니다』
 
 
  남에게 신세지기 싫어하니 청탁 받기도 싫어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저는 남한테 신세지기를 싫어합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10원 한푼 외상을 진 적이 없어요. 약간의 결벽성일 수도 있지요. 사회 질서의 기본은 남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데 있다고 봅니다. 내가 능력 있어 남을 돕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제가 신세를 안 지려고 하기 때문에 제게 신세를 지려는 행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아요. 浦鐵을 경영하다보면 외부에서 이권청탁이나 물질적 도움을 바라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라면 내 자존심으로는 결코 손 벌리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어요.
 
  거절할 때는 단호합니다. 이 때문에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건 상대방의 손실을 줄여주기 위해서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계속 기대를 버리지 않아요.
 
  그럼에도 저는 능력이 닿으면 베풀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베푸는 데서 오는 기쁨은 크지요. 성경에도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욕심으로 쉽지가 않죠』
 
  작별하면서, 그는 기자가 차마 묻지 않았던 질문에 답을 주었다.
 
  『회장이라면 카리스마를 갖고 점잖게 몇마디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하는 법인데, 저는 말도 빠르고 게다가 경상도 액센트까지 쓰니…』
 
  상대방의 심중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