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연구] 「모닥불」 「아 대한민국」 「잊혀진 계절」의 작사가 朴健浩의 노랫말 이야기

『노래는 人生이고 歌詞는 예술이다』

  • : 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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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여 곡의 노랫말을 작사하고 수백 곡을 히트시켰던 朴健浩씨는 「노랫말은 3분 드라마」라고 말한다. 객관적인 눈으로 자신을 볼 줄 알고, 他人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면 감동적인 말들이 절로 나온다고 했다. 대중가요 속에 「대한민국」이라는 단어를 집어 넣은 것도 그였다. 그는 말했다. 『건전가요가 뭐가 나쁩니까? 저항하는 노래도 있고, 애국하는 노래도 있을 수 있지요』라고.
1999년 말 대중매체들의 단골 메뉴는 단연 「20세기 베스트」 에 관한 갖가지 조사 결과였다. 무하마드 알리, 테레사 수녀, 아돌프 히틀러 등과 함께 가장 많이 거론되었던 이름 「비틀즈」. 그들은 지난 한세기는 물론이고 지난 천년을 망라하는 최고의 음악가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바흐와 모차르트보다도 비틀즈는 위대했다?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멜로디는 그들에 의해 거의 다 시도되었다는 말까지도 있지만, 삶과 사랑과 인간에 대한 寸鐵殺人(촌철살인) 적인 노랫말이 아니었더라도 비틀즈의 음악이 반세기 동안 이어져 왔을지는 의문이다. 「예스터데이(Yesterday)」의 서정성, 「렛잇비(Let it be)」의 철학적 통찰, 「컴 투게더(Come Together)」의 사회지향성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노랫말은 멜로디와 분리해 놓아도 한 편의 훌륭한 詩가 된다.
 
  평범한 일상어를 구사하는 가운데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창의성과 통찰력이 있고, 특별한 기교부림 없이 솔직 담백한 표현 속에 全(전)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정서가 흐르는 것, 노랫말의 韻律(운율)과 곡의 旋律(선율)이 충돌 없이 결합하여 애초부터 하나인 것처럼 흐르는 것. 팝이든 가요든 우리는 이러한 노래들을 「名曲(명곡)」이라 부른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가을이 절정에 다다르는 시월 말이면 채널마다 흘러나오는 이 노래 「잊혀진 계절」. 과연 이 노래가 「시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구절이 없었대도 이십년을 이어올 수 있었을까.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했던 장면이란 누구나 간직하고 있음직한 추억이고, 그것이 「시월의 마지막 밤」으로 인해 보편, 추상을 벗어나 구체성을 띠면서 차츰 절절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작사가 朴健浩(박건호). 그는 지난 세기 우리 가요사를 정리하는 데 빠져서는 안될 작사가의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비록 最多(최다) 작사가 반야월 선생 다음 칸에 이름이 올랐으나, 대부분의 가요계 종사자들이 그들 同時代(동시대) 최고의 작사가로 朴健浩란 이름을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미 완성된 멜로디를 조금도 변형시키거나 거스르지 않으면서, 평범한 일상 언어들을 가지고 주제를 새롭게 소화해내는 鬼才(귀재)라고 평가되는 朴健浩씨. 그가 노랫말을 붙인 곡이 3천 곡이고 아직도 인구에 膾炙(회자)되는 소위 히트곡만 해도 수백 편이다.
 
  유행가란 당대의 추억과 더불어 끈질긴 생명력을 갖는 법이다. 「이산가족 찾기」 화면 위로 흐르던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 그 사연들에 함께 울고 웃던 시간, 여름날 해변의 캠프파이어에서 박인희의 「모닥불」을 부르며 대책 없는 낭만으로 빠져들던 기억, 쓰레기차의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던 「아 대한민국」에 잠을 깨던 새벽, 이들 기억 중 하나쯤 지니고 있다면 당신은 朴健浩란 사람의 磁場(자장)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號는 土偶
 
 
  필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 아~ 우리 조국, 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대목에서 다함께 원을 만들며 매스게임의 대단원을 이루던 학창시절, 「단발머리」 를 열창하는 젊은 조용필과 「그녀에게 전해주오」를 덤블링하며 외치던 세 명의 오빠들을 향해 소리지르는 것이 그 답답한 학창시절의 유일한 출구였던 날들, 「내인생은 나의 것」을 따라부르는 것으로 그나마 반항의 제스처를 취했고, 「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를 들으며 풋사랑에 잠을 설치던 밤….
 
  필자는 이를테면 이런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세대로서, 작사가 朴健浩를 만나기 위해 북악산 기슭까지 가는 동안 알 수 없는 민망함에 휩싸여 있었다. 그를 마주하게 되면 왜소하고 유치한 내 지난 모습들을 속속들이 들킨 듯한 기분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것은 민망함인 동시에 친밀감이었고 경외심 비슷한 감정이기도 했다.
 
  개량 한복을 입고 커피를 거푸 석 잔째 마시고 있는 朴健浩씨를 맞닥뜨렸을 때 필자는 적잖이 당황했다. 오랜 투병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얼굴, 오십의 나이가 버거워 보이는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나의 실망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혹은 그쯤은 익숙하다는 듯,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뭣 때문에 나를 취재하지요?』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 싶을까/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반짝이는 눈망울이 내마음에 되살아나네>
 
  그는 확실히 서정적 노랫말에서 유추되는 바의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의 雅號(아호)가 「土偶(토우)」라는 것만 알았더라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송수권 시인이 지어준 이 號는 말 그대로 「불가마에서 막 구워낸 土偶」처럼 생겼다는 의미다. 그 밖에도 사람들이 그를 표현하는 말로 고구마, 두꺼비, 시루떡, 먹도둑놈, 금방 캐낸 감자덩어리 등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는 그런 자신을 너무도 잘 안다는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는, 그래서 「土偶」를 자신의 이름 앞에 즐겁게 내세울 줄도 아는 그의 당당함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 10년 간 뇌졸중과 신부전증을 맞아 싸우는 동안 그도 어쩔 수 없이 많이 지쳐 있었다.
 
 
  文學靑年에서 作詞家로 변신
 
 
  朴健浩씨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름의 명성과는 다른 삶을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30년 전 겨울, 강원도로부터 대책없이 上京(상경)한 그는 외투 한 벌 없이 가난했다.
 
  『돈 때문입니다. 먹고 살려고 작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작사란 저에게 있어서 예술도 아니고 행복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본래 문학청년이었다. 누구나 통과의례로 거치는 그런 문학청년 말고, 弱冠(약관)의 나이에 첫 시집을 낸 진짜 시인이었다. 강원도 원주의 고향집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들썩한 집안의 장남이었지만, 부친의 죽음과 함께 家勢(가세)가 기울어 불행한 소년기를 맞이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확신없는 글재주밖에 없었다.
 
  글을 쓰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찾아다니다가, 가수 지망생이던 친구를 통해 노랫말 쓰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작사가란 일이 하나의 직업으로서 인정받지도 못하던 시절이었고 그걸 직업으로 삼을 생각도 결코 없던 그였다. 가수라고는 李美子(이미자) 정도나 알까, 종로 1가 르네상스 음악 감상실에서 베토벤을 청해 듣던 문학청년에게 가요계 입문이란 치욕적인 일이었다.
 
  함께 글을 쓰던 한 선배는 그를 다시 안보겠다는 말까지 했다. 딱 한 두해만 하다가 다시 문학으로 되돌아가리라고 다짐했다. 릴케와 문학편지를 주고 받던 가프스가 작사가가 되었고 사르트르도 샹송 가사를 썼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고서야 그는 작사 일에 뛰어들 수 있었다. 친구 둘과 손을 잡고 친구 아버지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작사와 작곡을 전문으로 하는 조촐한 사무실을 낸 것이 작사가로서의 출발이었다.
 
  「뽕짝」이 主流를 이루던 당대의 가요계는 학생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었으며 학생들은 세미클래식 혹은 통기타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한 흐름을 읽은 朴健浩씨는 세미클래식적인 분위기의, 학생들이 소풍가서 친근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노래 몇 개를 만들어가지고 당시 동아방송 DJ를 하고 있던 가수 박인희를 찾아갔다. 박인희씨는 난데없이 불쑥 찾아와 노랫말을 내미는 치기 어린 젊은이에게서 기성작가에게선 볼 수 없는 진솔함을 보았다. 그리고 가사를 읽어내려 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멜로디가 읊조려지는 것을 느꼈다.
 
  경험부족이었던 그들은 평균보다 두세배나 되는 돈을 퍼부으며 열심히 앨범을 만들었지만, 가요계의 선배는 「애들 장난 같다」는 혹평을 내렸다. 이 말을 들은 친구의 아버지는 돈줄을 끊어버렸고 그들은 첫 앨범을 다른 음반회사에 10분의 1 가격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PR 하나 없이 시중에 나온 박인희 앨범은 1년쯤 지나면서 들불처럼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모닥불」이란 노래였다. 박인희의 청아한 음성과 신선한 멜로디, 그리고 기존에 볼 수 없던 간결하고도 서정성 넘치는 노랫말이 있었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朴健浩씨의 꿈대로 「모닥불」은 학생들의 야유회마다 빠지지 않는 노래가 되었지만, 모닥불의 작사가라는 칭호가 그에게 가져다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작사가라는 명함을 내밀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작사가에 대한 투자와 처우가 형편없었고 전문 작사가가 발디딜 수 없는 것이 가요계의 풍토였다.
 
 
  최초의 專屬 작사가
 
 
  갈 곳 없이 떠돌던 그는 우연찮게 신인가수 방주연의 「기다리게 해놓고」를 작사하게 되었다. 이 노래의 호응이 좋아, 오아시스 레코드의 사장이 그에게 관심을 갖고 가사 몇 편 써서 가져와 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부랴부랴 써간, 곡도 붙여지지 않은 노랫말들을 즉석에서 현찰로 사주었다. 그런 대접이 前無後無(전무후무)한 일이란 사실엔 관심도 없었고, 우선은 돈을 손에 쥐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기만 했다.
 
  다음으로 「내곁에 있어주」가 빅히트하자, 지구레코드사에서 월급을 보장해 주겠다며 전속을 제의했다. 일개 작사가에게 레코드사 專屬(전속)이란 최초이자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朴健浩 이전에는 작사만 해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얘기다. 남진의 「무엇하러 왔니」, 박인희의 「끝이 없는 길」, 정종석의 「새끼손가락」, 허림의 「인어이야기」 등이 속속 좋은 반응을 얻었고, 작사가 朴健浩는 음반 기획자로까지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도 작사가란 내게 돈벌이 이상은 아니었죠. 나는 여전히 문학으로부터 유배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975년도 「내곁에 있어주」가 MBC 최고인기가요로 선정되어 시상식에 나가게 됐는데, 나는 양복이 없다는 이유로 불참했지요. 사실 진짜 이유는 딴 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 날 알아보면 어쩌나. 나는 시인이 될 사람이고 곧 여길 탈출할 사람인데 누군가 알아보고 비웃으면 어쩌나…』
 
  누구나 가요를 따라 부르면서도, 가요 종사자들을 딴따라라고 천대하던 문화 귀족주의의 시대가 그를 은둔자로 살게 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그는 자신의 천부적인 자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경제적으로도 크게 나아진 것은 없었고, 그는 무언가에 정신없이 떠밀려가는 느낌으로 살았다.
 
  지구레코드를 나와 프리랜서로 일하려던 중에 작곡가 이범희씨를 만났다. 편곡자로 일하던 그에게 朴健浩씨가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권했고, 두 사람은 장은아의 「작은 나비」 등을 시작으로 훗날 많은 작업을 함께 하게 된다. 그 무렵 신장염이 도져 앓아누워 있다가 나와보니, 예전에 노랫말을 붙여뒀던 「잊혀진 계절」이란 노래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레코드社에서 보너스는 물론 거액의 전속금을 안겨줬고, 그 돈으로 집도 사고 결혼도 했다. 먹고 살 만해지자 그제야 「이거 직업이구나, 내가 작사가구나」 하는 감이 조금은 왔다.
 
  그에게 발라드의 시대 1980년대가 화려하게 열리고 있었다. 「잊혀진 계절」이 붙여준 가속도에 힘입어 그는 유명세와 돈벌이와 망각의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한 두해만 하고 그만두리라던 다짐 같은 건 잊고 싶었고 잊혀져 갔다. 자신이 고속도로를 타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겠지만, 한 번 탄 고속도로를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급기야는 기계에 탈이 나고야 만 1989년까지 그의 질주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이렇게 우린 은혜로운 이땅을 위해 이렇게 우린 이 강산을 노래부르네/아 우리 대한민국 아 우리 조국 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잊혀진 계절」에 이어 「아 대한민국」이 히트하면서 빅히트 뒤엔 빅히트 없다는 징크스조차 그에 의해 깨졌다. 정수라, 민해경, 소방차, 나미 같은 스타들이 탄생하는 데 그의 이름이 빠질 때가 없었고, 예전과 달라진 그는 시상식 무대에 오르는 데도 익숙해졌다. 열 편 이상 청탁이 쇄도하는 날도 있었고, 『어 내가 히트했나』 하고 좋아할 새도 없이 바로 다음 작업에 착수해야 할 정도였다. 앉은 자리에서 줄줄 써내려가는 건 물론, 수화기에 대고 생각나는 대로 불러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노랫말은 聽覺的 언어
 
 
  『가사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입으로 퉁겨져 나올 때 제3의 살아 있는 생명을 갖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꽃」은 그 이미지와는 달리 말로 튀어나오면 화살을 「꽂」는 느낌이 되어버리지요. 詩는 생각할 시간을 주지만 노래는 휙휙 지나가는 가운데 느낌을 남겨야 하기 때문에, 시각적 언어가 아닌 청각적 언어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노랫말은 3분 드라마」 라고 말했다. 몇줄 안에서도 엄연히 스토리가 전개되어야 하고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끼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설명해서는 안된다. 객관적인 눈으로 자신을 볼 줄 알게 되고 他人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면 감동적인 말들이 저절로 나온다. 관념적, 추상적인 표현은 피하고, 「시월의 마지막 밤」, 「명동성당 근처에서 쓸쓸히 헤어졌네」 「토요일은 밤이 좋아」처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멜로디를 떠나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녕」, 「사랑해」 같은 흔해빠진 말도 어떤 멜로디와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감흥으로 느껴지게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작사가 朴健浩의 스타일이자 히트의 비결이 아닐까.
 
  『어떻게 하면 히트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네요. 물론 한때는 히트의 맛을 알게 되면서 유행하는 언어, 감각적인 언어에 집착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감정이 살아나지 않았고 언어 유희 속에 내 자신이 지쳐가는 느낌이었지요』
 
  「언어를 아예 잊어버리자」고 생각한 그는 부탁받은 대로 적당히 가사를 써주고 적당히 삶을 즐겼다. 사랑을 하면 사랑에 대해 썼고 외로워지면 외로움에 관하여 썼다. 병을 앓으면서는 定型律(정형률)의 구속조차 벗어버렸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면서 차츰 깨달았다.
 
  『있는 건 있다 하고 없는 건 없다고 하는 것, 아는 건 안다 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게 바로 大衆性(대중성)인 것 같습니다. 저는 작곡가와 가수가 가사에 이의를 제기하면 어지간한 건 받아들였습니다. 작사를 예술로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작곡가부터 이해하지 못한다면 대중들도 이해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베토벤도 제 9교향곡의 前奏(전주)를 청중 한 사람의 요청에 의해 바꾼 적이 있다지요』
 
 
  『저항가요가 있으면 애국가요도 있어야』
 
 
  어찌 보면 그는 색깔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법도 하다. 그는 예컨대, 「아 대한민국」과 「토요일은 밤이 좋아」를 동시에 써낼 수 있는 사람이요, 「잃어버린 30년」과 「빙글빙글」을 함께 히트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용의주도함이라기보다는 그게 그의 체질이다.
 
  「아 대한민국」이 히트칠 당시, 세간의 평가는 엇갈렸다. 정권에 대한 거부감으로 예민해 있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 라는 노랫말은 상당한 反感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아부를 목적으로 한 적도 없고 국가와 정권을 혼동한 적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 대한민국이 이렇게 멋진 나라라면 하는 진심어린 소망으로 흥분하며 이 노래를 썼다는 것이다. 대중가요에 「대한민국」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은 것도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 대한민국」은 저작권에 무지한 관료들에 의해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노래로 지정되었고, 제2의 애국가처럼 고리타분해졌다. 그래도 그는 계속해서 88올림픽 노래, 엑스포 노래, 아시안게임 노래 등을 써 왔다.
 
  『건전가요가 뭐가 나쁩니까? 건전가요라는 명칭이 문제지…. 저속하면 저속하다고 야단이고 건전하면 건전하다고 타박하나요. 저항하는 노래도 있고 애국하는 노래도 있을 수 있지요』
 
  88 올림픽이 끝나고,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첫 번째 뇌졸중으로 手足마비와 언어장애가 덮쳤고 두 번째 뇌졸중으로 視(시)신경까지 고장났다. 뇌졸중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만성신부전 말기 진단이 내렸다. 다행히 1989년부터 저작권 문제가 해결되어 상당한 액수의 저작료가 지급되는 덕에 먹고 사는 문제에서는 해방될 수 있었다. 정신없이 살아온 날들이 다 헛되이 느껴진 그는 잊었던 꿈을 떠올렸다. 병상에서 그는 열심히 詩를 썼다. 신장이식수술을 받아가면서도 열심히 썼다.
 
  『왜 詩를 쓰십니까』
 
  『작사가라고 詩를 쓰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요』
 
  들리지 않는 귀로 마지막 교향곡을 작곡한 베토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실락원」을 쓴 밀턴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때로 가혹해보이는 운명은 예술가에게 오히려 필연적인 것일 수가 있다. 태생적으로 병약한 육체는 끊임없이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어 주었다. 그의 말대로 「건강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純拙美」의 詩人
 
 
 
  ▲ 1999년 강원도 원주에서 열린 출판기념 콘서트에서 손님을 맞는 박건호씨.
 
  중학교 1학년 때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다. 장남이었지만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哭(곡)을 하지 않아 불효자란 소리도 들었다. 억지로 哭소리를 짜낼 수 없었던 대신, 그의 가슴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본래 약한 몸을 타고나긴 했지만, 그 후로 점점 몸이 쇠하여 1년 휴학까지 했다. 병상에서 그는 미처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그동안의 생각들을 되는 대로 끄적여나갔다. 그게 왠지 모르게 詩라는 형식으로 표출되었다. 그의 습작들을 본 학교 선생님이 「詩에 소질없다」는 가혹한 말을 던졌을 때, 그는 진짜 詩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얻었다. 국내외 名詩란 名詩는 모조리 외웠고 문학에 달뜬 친구들과 서클을 만들어 열심히 詩를 주고 받았다.
 
  까까머리 학생 신분으로 첫 시집을 낼 적에는 당돌하게도 未堂 徐廷柱(미당 서정주)를 찾아가 서문을 부탁하기도 했다. 未堂은 그를 이렇게 회고한다.
 
  『하루는 어느 애송이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시집을 내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 서문을 지어주시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하고 원고뭉치를 내미는데 얼떨결에 한 번 읽어보겠노라고 대답하고 돌려보낸 뒤 그의 작품을 몇 개 살펴보니 상당한 수준이어서 막걸리라도 한 잔 먹여 보내려고 탕발인 채 급히 쫓아 나가보니 애송이 녀석은 이미 온데간데 없더라』(시집 「고독은 하나의 사치였다」 중에서)
 
  하지만 그는 작사가가 되었다. 「노래는 인생이고 詩는 예술」이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그 두 길이 전혀 제각각의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작사가의 길로 나아간 것은 그가 우기는 것처럼 「생활」의 문제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근본이 詩歌(시가)의 형태이고 詩歌의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詩의 운명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의 노랫말과 詩들을 비교해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굴렁쇠를 굴리면/네가 감기어서 굴르고/네가 고무줄을 뛰면/내가 묻어서 뛰고>-「헛바퀴만 돈다」 중에서
 
  <아직도/ 제가 가진 것은 시뿐이라/ 죄송합니다>-「무제」 중에서
 
  <윗주머니/아랫주머니/겉주머니/속주머니/ 다 뒤져도 줄 것이 없어/ 가슴을 꺼내준다>-「선물」 중에서
 
  작가 馬光洙(마광수)는 그의 시에 대고 「純拙美(순졸미)」라는 말을 했다. 시적 手工(수공)의 흔적이나 의도적 作意(작의)가 보이지 않는 점, 억지로 변조되고 날조된 감상이 아니라 티없이 순수하고 치기 어린 감상이 그대로 태연스럽게 노출되어 있는 점, 이런 점들은 秋史 金正喜(추사 김정희)의 치졸해 보이는 글씨가 완벽한 筆法(필법)을 구사하는 한석봉의 글씨보다 한 수 위에 드는 것과 통한다는 것이다. 그의 詩는 사람과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똑같아서 소박하고도 투명하다. 詩를 사치로 아는 댄디즘(Dandyism)류가 아닌가 오해받을 소지가 크지만, 그는 절대로 「멋부린」 시를 못 쓴다. 문학 이론, 思潮, 문단의 관행 등에 대해서도 그는 관심이 없다. 단지 詩를 쓰고 詩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
 
 
  주홍글씨처럼
 
 
  『크게 앓고 나서는 진짜 시인이 되고 싶어서 시화전, 시낭송회도 열심히 쫓아다녔고 문인협회에도 가입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작사가라고 부르더군요』
 
  일곱 권의 시집과 세 권의 수필집을 냈지만 문단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멜로디를 탈출한 그의 언어들은 힘이 없었고, 작사가란 꼬리표는 주홍글씨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글쟁이들의 따뜻한 「동네」를 꿈꾸던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비슷한 처지끼리 명분을 만들어 패거리를 형성하고 권위 있는 자가 군림하는 풍경, 문예지별로 등단 시인들끼리 만들어놓은 배타적인 질서일 뿐이었다. 盧天命(노천명)의 시 「남사당」을 읽고 그녀를 알지도 못하는 시인 몇몇이 모여 축배를 들었던 新文學期(신문학기)의 낭만을 기대한 것은 그의 시대착오였다. 어느 문학인 모임에 갔다가 「문학에 대한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현실과 타협한 인간」이라는 질타를 받으면서 그는 생각했다.
 
  『나는 현실과 타협한 적이 없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일을 했을 뿐이다. 어쩌면, 내가 썼던 가사들이 진짜 詩였던 것은 아닐까』
 
 
  신세대 노래는 파괴가 아니라 창조
 
 
  <얼마나 세월이 흘러야 저 바다가 산이 되려나/또 저 산들이 바다가 되면 그 모두가 행복하려나/이제 얼마나 더 바보인 척 하고 있어야 속인 자는 자신을 알까>
 
  -밥 딜런의 「블로잉 인 더 윈드(바람 속을 떠돌면서)」 중에서.
 
  미국의 팝 아티스트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올랐다는 사실은 그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한국이라는 현실에서 그는 절망했다. 그는 다시 문단의 異邦人(이방인)이 되어 가요계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의 삶에서 정작 本論(본론)은 작사하는 삶이었고 그때가 행복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 사이 10년이 흘러버렸다. 세대 교체의 바람에 뿌리째 흔들린 가요계에서 의지와는 무관하게 많은 가요 작가들이 도태되어 갔다. 작사가 朴健浩도 그들 중 한 명으로 잊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공백기의 길이만으로 그가 도태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마치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짐을 푸는 사람처럼 『다시 작사를 할 겁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익숙한 노래 한 곡을 들려주었다. 테크노 리듬으로 편곡된 「아 대한민국」이었다. 그의 작품들을 새롭게 편곡해 모은 「히트곡 100선」 앨범을 제작 중인데 거기 들어갈 노래 중 하나라고 한다. 시대 감각에 맞게 편곡된 「아 대한민국」은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물론 나는 발라드 세대이지만, 요즘은 랩도 테크노 음악도 듣습니다. 테크노 바에도 가봤지요. 테크노란 그리 새로운 게 아니거든요. 옛날엔 노래란 처음, 중간, 끝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강해서 멜로디나 리듬을 계속 반복하는 게 불가능했지요. 듣기 좋은 멜로디나 리듬을 반복적으로 연주하려는 시도는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그게 발전한 형태가 요즘 테크노라는 거 아닙니까.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신세대의 자유로움이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1백명 중에 20~30명이 스테이지에 나와 춤을 췄던 것이 우리 세대라면, 1백명이면 1백명 스테이지 구분없이 다 나와 춤을 추는 것이 요즘 세대지요. 자기 표현에 적극적인 모습은 참 보기 좋습니다』
 
  세대 간의 괴리가 어느 때보다 커져버린 가요계 실상에 대해 그는 조금도 우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신세대 가요의 가벼운 가사와 언어 파괴적 경향에 대해서도 그는 너그러움을 보였다.
 
  『정해진 길을 만들어놓고 가라고 하면 누구나 옆길로 새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 특히 젊은 세대가 남들이 안쓰는 말을 쓰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욕구지요. 離脫(이탈)욕구라고 할까요. 우리 기성세대는 그걸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로써 인정해줘야 합니다. 언어는 약속이지만 바뀔 수도 있는 약속입니다. 「요즘 노래는 노래 같지도 않다」 하는 말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습니다. 「모닥불」 같은 착한 노래도 그런 소리를 들었던 때가 있었으니까요. 가요란 그런 식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음악의 템포는 사람의 맥박 수를 따른다는 말이 있다. 나이 많은 사람은 세월이 빨리 가는 게 아쉬워 되도록 느린 음악을 선호하지만 젊은 세대는 세월이 답답해 빠른 음악을 찾는다는 말도 있다. 舊세대가 랩이나 테크노를 감정적으로 좋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할 수 있지만 부정해서도 안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신세대들도 舊세대의 취향을 무시해선 안되는 것이다.
 
  『특히 요즘 세대들은 멜로디의 아름다움을 잊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멜로디에만 집착하는 것도 문제지만 非(비)멜로디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 또한 똑같이 문제라고 봅니다. 아름다운 선율은 구태의연한 낭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따뜻한 본성을 일깨워주고 순수하게 만들어 줍니다. 진정한 새로움이란 과거의 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것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요. 구세대가 한때는 자신도 신세대였다는 걸 기억하고, 신세대 역시 자신도 언젠가는 늙는다는 걸 새겨 듣는다면 세대 간의 소통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텐데요』
 
  朴健浩씨는 올 봄부터 다시 활동을 시작할 생각이다. 모든 세대를 망라하는 全天候(전천후) 취향의 가요를 만들겠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노랫말도 바뀌어야죠』
 
 
  『결국엔 사랑밖에 없지요…』
 
 
  <나 오직 그대를 사랑해 그 사랑 변하지 마오/우린 비밀이 없어요 꿈과 사랑을 나누어요/그대는 나의 인생 아직은 아쉬움도 있지만/그대는 나의 인생 우리는 선택했어요> (「그대는 나의 인생」).
 
  朴健浩, 그의 노랫말의 테마는 시종일관 「사랑」이었다. 사람들은 유행가 가사의 사랑 타령이 지겹다고들 말한다. 그러다 사랑에 빠지면 유행가를 주절거리고 失戀(실연)이라도 하면 유행가에 우는 게 사람들이다. 어쨌거나 사랑은 시대를 초월하는 테마이고 朴健浩씨의 작품들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 라고 주저없이 쓱 말해버리기도 하고 「나는 그대 잔 속에서 찰랑대는 술이 되리라」고 끈적끈적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사랑의 설레임과 기쁨, 고통과 회한, 사랑의 깊고 얕은 면들을 한 손에 쥐고 주무르는 그이지만, 실상은 연애 경험도 별로 없고 숫기도 없는 남자였다고 한다. 결혼도 서른 다섯이 돼서야, 석 달 연애 끝에 부랴부랴 해치운 멋없는 사내다.
 
  『삶에서 사랑 말고 달리 빠질 길이 있나요. 한 때는 사랑, 이별, 눈물 같은 것들이 너무 시시해 철학적이고 비판적인 가사를 소화되지도 않은 채로 쏟아내기도 했지만, 그건 나혼자만의 독백일 뿐이었지요. 결국은 사랑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시대
 
 
  사랑을 소재로 했다고 해서 시대나 사회세태와 무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관계부처로부터 저속한 내용이나 悲嘆調(비탄조)의 노래는 만들지 말라는 행정지시가 내려져 한동안 「고향」 노래만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던 시절도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데도 얼마나 많은 억압이 있었고 얼마나 많은 극복이 있어 왔는가. 朴健浩씨도 예외는 아니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정도의 가사를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로 바꿔쓰면서, 그도 심의에 대한 노이로제에 시달리면서 작사를 했다. 표현의 자유로움에 대한 갈구는 「나는 네가 좋아서 순한 양이 되었지. 풀밭 같은 너의 가슴에 내 마음은 뛰어놀았지」(「내 곁에 있어주」 중에서) 같은 은유적 표현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사랑이란 그 본질이 이기적인 것이라고 그는 여겼다. 「잊혀진 계절」은 이별의 아픔이라기보다 과거의 연인에게 그럴 듯한 추억으로 남고 싶은 이기심을 담은 노래이고, 「그대는 나의 인생」이란 노래는 「꼭 사랑해서 결혼하는 건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출발해 쓴 것이다.
 
  『내가 과연 진짜 사랑을 알았던가요. 결국은 모조리 내가 나를 사랑한 얘기들 아니었나 싶네요. 그래도 그 시절엔 진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노래가 있었는데, 요즘은 사랑 노래라고 하는 것들이 그저 性的(성적)인 관심 아니면 이성에 대한 호기심 정도에 머무르는 것 같습니다』
 
  「몰라, 왜 내가 흔들리는지 그대가 싫어진 것도 아닌데」,「사랑했으니 책임져」하는 노래들이 이 시대의 戀歌(연가)라고 한다면, 아무리 신세대와 步幅(보폭)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그이지만 불만이 있을 법도 하다. 그는 노래가 아쉬운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신장이식수술 후 「큰 사랑」에 눈 떠
 
 
  5년 전 그는 비로소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랑을 넘어선 큰 사랑을 발견했다. 아니, 그 사랑으로 인해 다시 태어났다. 만성 신부전 말기로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생판 모르는 한 청년으로부터 장기기증을 받고 回生(회생)했던 것이다. 「사랑의 장기기증 본부」를 통해 자신의 신장을 내놓은 스물다섯 살 박정환이라는 청년이었다. 수술 직전 그는 두려움 없는 눈으로 『건강을 찾으시고 좋은 일 많이 하세요』라고 말했다.
 
  그가 붙여준 콩팥의 무게 때문에, 朴健浩씨는 날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며 살게 되었다. 그의 권유대로 교회에도 나가고 가스펠도 작사했다. 자신의 가사가 성경 구절과 똑같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당하면서도 노력했다. 하지만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기에는 그는 삶의 너무 많은 이면을 알아버렸고 너무 자유로웠고 자신에게 너무 솔직했다. 비록 독실한 신자는 되지 못했지만 더 큰 사랑을 발견한 것으로 그는 행복하다.
 
  비틀즈가 「네 손을 잡고 싶어(I want to hold your hand)」하는 발랄한 사랑으로부터 「삶 속에서 너희들을 더욱 사랑할거야 (In my life)」 하는 多義的(다의적) 사랑으로 나아갔듯이, 그의 다음 戀歌는 어떤 사랑을 보여줄지 몹시 기다려진다.
 
  고교시절 흥사단원이기도 했던 그는 여전히 島山 安昌浩(도산 안창호)를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다. 安昌浩의 지식은 치열한 삶 그 자체에서 얻은 지식의 원판, 살아 있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 역시 살아 있는 언어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일깨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저승 입구까지 보고 온 그가 삶으로부터 추출해낸 살아 있는 언어들을 곧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시든 노래든, 발라드든 테크노든, 그 형식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쓴 것들을 다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노랫말을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걸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朴健浩란 이름을 버리는 겁니다. 사람들은 저에게서 옛날 노래들을 떠올릴 뿐이니까요』
 
  자리를 뜨기 전에 그가 크게 소리내어 웃는 것을 들었다. 차분한 어조와는 달리 어린아이처럼 씩씩하고 꾸밈없는 웃음이었다. 웃음소리 하나만으로도 자신을 다 드러내 보여주는 사람, 朴健浩는 그렇게 자신을 텅 비워놓고 산다. 시간이 지나도 늘 그 자리에 있고 누구든 쉬어 갈 수 있고 무더기로 앉아도 버틸 수 있는 「빈 의자」 같은 사람이다.
 
  <서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의자 당신의 자리가 돼 드리리다/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의자 당신을 편히 쉬게 하리다/두 사람이 와도 괜찮소 세 사람이 와도 괜찮소/외로움에 지친 사람들 무더기로 와도 괜찮소> (「빈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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