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서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으로 예보된 날 盧泰愚 전 대통령의 육성회고록 마지막회분 인터뷰를 위해 서울 연희동을 찾았다. 심상치 않은 비바람이 거리를 난타하고 있었다.
건강한 얼굴로 취재진을 맞은 盧 전 대통령은 『제발 큰 피해가 나지 말아야 할텐데』라고 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중에도 많은 비가 쏟아졌다.
盧 전 대통령 육성증언의 마지막 주제는 6共 시절의 사회, 경제, 문화, 스포츠, 복지 관련 정책이었다. 인터뷰에는 孫柱煥 전 공보처장관, 金鍾仁 전 청와대 경제수석(보사부 장관 역임), 林仁圭 전 청와대 정책조사보좌관(現 동화출판사 회장)이 배석하여 관계업무에 대한 배경설명을 도왔다.
먼저 盧 전 대통령은 사회기강확립 차원에서 시행된 「범죄와의 전쟁」에 대한 육성증언으로 화두를 풀어갔다.
<6共 당시 대표적으로 문제가 됐던 社會惡(사회악)은 가정 파괴범이었다. 도둑이 돈만 훔쳐 가는 게 아니라 그 집의 부녀자들을 폭행해 사회적인 분노가 심각할 정도였다. 「범죄와의 전쟁」은 이래서 입안됐다. 이 계획에 따라 나와 청와대 참모들은 사회 기강을 다잡기 위한 몇 가지 구체적인 조치들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상적인 방법만으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권한 범위 안에서 가장 강력한 대책을 강구해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래서 내놓은 것이 바로 이 「범죄와의 전쟁」과 1990년 5월7일에 내놓은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문」(5·7 특별 담화)이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챙기다 보니 그 성과는 과거 정권들이 벌인 캠페인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이 범죄와의 전쟁에 의해 두목을 잃은 조직폭력배들이 은둔하는 바람에 수년간 조직폭력배들에 의한 강력 사건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됐다.
우리는 「범죄와의 전쟁」 과정에서 경찰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인원과 장비를 대폭 강화했다. 몇 차례 순시를 통해 파악해 보니 파출소에 있는 경찰 1인당 5백~6백 명의 주민을 담당하고 있었다. 나는 일본이나 미국에서는 1백~2백 명 수준인데 비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경찰관들이 얼마나 혹사당하는가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경찰 인원과 장비·예산을 대폭 지원하는 등 경찰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했다. 경찰력을 늘려 일선 중심으로 중점 배치하고 기동력 강화를 위해 순찰차, 총기 등의 지급을 늘렸다. 그 결과 「이 정도면 치안 상태가 선진국 수준에 올라섰다」는 평가를 세계적으로 받았다. 범인 검거율이 대폭 높아지는 한편으로 범죄발생 증가율은 둔화됐다. 나중에는 경찰관 1인당 주민수가 4백 명 선으로 내려온 것으로 알고 있다.
경찰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지나간 일화를 하나 덧붙이고 싶다. 내가 경찰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82년 4월 경남 의령에서 발생한 우순경 총기난사 사건으로 내가 수습책임을 맡아 내무장관에 임명되고부터였다. 당시는 경찰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깊었다. 교통 순경이 택시 기사들에게 뺨을 얻어맞는 일이 일어나는 등 경찰들의 氣(기)가 죽어 있었다. 나는 이들의 사기를 어떻게 되살려 치안을 유지해나갈까 하고 걱정했다.
마약 통제의 세계적 성공사례
어느 날 「盧泰愚 내무장관이 경찰관 수당과 봉급을 올려주기로 했다」는 기사가 일간지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신임 내무장관이 경찰의 사기진작책을 생각하고 있다고 하니까 누군가가 언론 플레이를 한 것인데, 「사람 죽여 놓고 월급이나 올리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 기사를 본 全斗煥 대통령도 『당신이 내무장관으로 갔으면 경찰 기강을 세워야지 봉급을 올려준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고 말했다.
그러나 실상을 파악해 보니 경찰의 처우 개선은 시급한 과제였다. 당시 동회 동장 기밀비가 10만원인가 20만원인가 했는데 파출소장 기밀비는 1만원이었다. 이것을 내가 10만원으로 높이자 경찰들이 무척 좋아했고 사기가 올라간 것은 물론이다. 또 義警(의경)을 모집했는데 교육 장소가 없어서 교육을 못하게 됐다. 그래서 軍에 요청해 3사관학교를 반으로 갈라 義警들을 교육시켰다.
安應模(안응모) 당시 치안본부장은 치안본부 독립청사를 지어달라고 강력하게 건의해 왔다. 그래서 全대통령에게 건의해 서울시 미근동에 독립청사를 지어주었고, 내가 대통령에 취임해 경찰청으로 독립시켰다. 이 모두가 경찰의 지위향상과 사기진작을 위한 일이었다.
마약에 관한 한 6共은 유엔으로부터 「최고의 나라」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유엔에서는 마약 통제에 가장 성공한 나라로 우리나라를 선정하고 鄭銶永(정구영) 검찰총장을 초청해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특히 유엔 마약위원회는 1992년을 「마약의 해」로 선포하고 세계적인 음악가인 鄭明和(정명화)·鄭京和(정경화)·鄭明勳(정명훈)씨 등 鄭트리오 3남매를 유엔 마약통제 본부(UNDCP)의 초대 대사로 임명했다. 마약대사로는 한국사람을 선정하자고 하는 의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鄭트리오가 외교관 여권을 갖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마약을 막는 홍보활동을 벌였다. 유엔 마약 위원회는 또 1994년 4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제37차 회의에서 한국을 의장국으로 선출했다>
배석했던 孫柱煥(손주환) 전 공보처장관이 다음과 같이 보충설명했다.
『당시 경찰력 증강에 대해 일부에서는「모험을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경찰력 증강의 효과가 제대로 날 것인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盧대통령께서 과감하게 경찰력을 증강하기로 결단을 내린 결과 경찰, 특히 일선 파출소에서 신바람이 났습니다. 인원이 강화됐고, 서울의 경우 각 파출소마다 순찰차 한 대씩 지급됐기 때문에 5분 출동 등 아이디어들이 나와서 경찰이 신명나게 범죄단속에 나섰다고 봅니다』
―「범죄와의 전쟁」은 표현이 좀 과격했다는 비판도 있었는데 이 말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이 질문에 배석했던 林仁圭(임인규) 前 대통령정책조사보좌관이 답했다.
『그 표현은 제가 건의를 했습니다. 범죄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국민에게 안심을 주고, 범죄자들에게는 경각심을 주는 획기적인 표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범죄와의 전쟁」이란 정책을 건의한 것이죠』
―경찰과 검찰은 사회기강 확립 차원에서 수고를 하고 있는데,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두 조직 중 어느 조직에 더 정이 갑니까.
『검찰은 경찰의 수사 지휘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민간과 떨어져 있는데 반해 경찰은 항상 민간과 호흡을 같이 하며 활동하는 조직입니다 』
대학총장 직선제의 진통
이어 盧 전 대통령은 6共의 교육정책과 관련한 육성증언을 이어갔다.
<내가 재임한 6共에서의 교육은 6·29 선언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 교육을 강화해 다양한 능력과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 건전한 가치관과 도덕성을 함양하는 민주시민 교육을 구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후세들의 교육을 담당한 敎員(교원)들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조치들을 잇따라 취했다. 특히 과거 정권에서 학원문제 등으로 시달림을 많이 받아온 대학에 자율권을 부여해 국·공립대 총학장 후보자 선출권과 교수 임용권 등을 대학에 위임하고 사립대 총장 임용 및 승인에 개입하지 말도록 했다. 등록금, 입시제도 등에 대한 대학의 자율권도 확대했다. 이는 「대학의 자율화 및 교육자치제를 조속히 실현한다」는 6·29 선언의 정신에 따른 것이다.
취임한 지 며칠 안된 1988년 3월4일 문교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목포대 등 4개 대학 후임 학장 임명안이 올라왔다. 나는 『국공립대 총학장은 해당 대학에서 추천한 인사를 제청하라』며 반려했다. 과거처럼 정부가 대학 책임자 인사에까지 간여해서는 안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문교부 관계자들은 전에 없던 일이라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에 따라 1988년부터 대학 총장 직선제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학교 자율로 하라』고 했지 꼭 직선제를 하자는 뜻은 아니었는데 대학들이 너무 앞서가서 마치 직선제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됐다. 대학 인사권이 확보된 것은 좋지만 너무 빠르게 발전하다보니 학내 파벌을 조성하고 교수·학생 간에 갈등을 빚는 등 직선제의 부작용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안타까운 심정이 되곤 한다.
나는 5·16 이후 중단됐던 지방교육자치제도 30년만에 부활시켰는데 이런 노력들에 힘입어 대학 본연의 면학분위기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무르익어 갔다고 자부한다.
全敎組는 노동운동이 아니라 사상운동
교육의 틀을 다지면서 내게는 난관이 있었다. 하나는 1989년 5월28일 일부 교원들이 「全敎組」(전국교직원노동조합)를 결성했을 때였다. 나는 가르치는 것이 노동이라는 주장에 대해 예나 지금이나 의문을 갖고 있다. 나는 평소 서양문명이 한계에 이르렀으므로 동양문명에서 인류의 미래를 찾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동양사상으로 보면 師父一體(사부일체)란 말이 있듯이 스승이란 어버이와 마찬가지 아닌가. 게다가 제도적으로 위법일 뿐 아니라 당시의 교사들 중에서도 全敎組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결국 교육계 인사들이 나서서 설득하고, 심지어 학부모와 동문들이 탈퇴를 종용하는 등 나라 전체가 떠들썩하는 소동을 겪은 후에 1만2천 명이던 가입자는 1천5백 여명으로 줄었다. 끝내 잔류를 고집한 교원들이 징계 해직 당하는 결과를 빚고 말아 두고두고 가슴이 아팠다. 지금도 많은 국민들은 앞으로 나라의 棟梁(동량)이 될 아이들을 가르치고 육성하는 선생님들이 노동조합을 하는 것이 국가 百年大計를 위해 옳은 것인지 의문을 갖고 있다.
이제는 全敎組가 합법화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全敎組 결성을 저지하고 와해시켜야만 교육을 정상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생각은 정권이 바뀌어 복수의 교원 노조가 활동하고 있는 지금에도 변함이 없다>
배석했던 孫柱煥 전 장관이 보충설명을 했다.
『교육자치제를 30년 만에 부활시켰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 일인데 지방자치제에 가려서인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당시 全敎組 주동세력은 교육현장에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사상을 주입시키려는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우리가 반대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全敎組는 노동운동이 아니라 사상운동이라고 파악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합법성의 문제였습니다. 일본에도 교원노조가 있습니다만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일본 교원노조인 「일본교직원조합」(日敎組)이 현실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합법단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현 정부가 全敎組를 합법화시켰는데, 일본과 비교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학생운동은 6共 때 두 번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1989년 동의대에서 戰警(전경) 5명이 불에 타 죽었을 때, 그리고 1991년 鄭元植(정원식) 총리에게 가해진 밀가루 테러 사건 때입니다. 이런 사건이 나면 그 동안 잠잠하던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들이 표면에 나섬으로써 궤도를 이탈한 학생운동의 위축을 불러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좋게 생각하면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침묵하는 다수」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불의를 저지르는 상황을 보면서도 평소에는 얘기를 안 하고 숨어버리다가 동의대 사태 같이 끔찍스럽고 가슴 아픈 희생자가 생겨야만 나섭니다. 이런 것들이 대통령 입장에서는 외롭고 안타까웠습니다』
檀紀 버린 게 아쉽다
이어서 盧 전 대통령은 문화분야에 대한 육성증언을 이어갔다.
<서울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나는 국제 스포츠계의 리더들을 많이 만났다. 대화 과정에서 그들이 우리 고유문화를 일본이나 중국 문화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고 나는 한편으로 슬픔을 느끼면서 나름대로 강한 욕심을 갖게 됐다. 그들에게 우리의 5천년 고유 문화를 인식시키고 우리 민족 문화를 세계 문화와 접목시키는 계기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올림픽 개최국에서 여는 학술대회는 통상 2~3개 정도였는데 우리는 10여개를 개최했다. 학술대회뿐만 아니라 문화행사를 통해서도 우리의 고유 문화를 소개하려고 애를 썼다.
나는 민족문화의 전승을 흐리게 만든 제일 큰 원인중의 하나가 檀紀(단기)를 없애 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檀紀를 그대로 유지했으면 누가 봐도 「저 나라는 뿌리가 깊은 나라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종교계나 일부 학자들은 반대했겠지만 나는 민족문화의 전승이라는 차원에서 檀紀를 기념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나는 특히 문화 분야에 대해서만은 정치적인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1990년 1월 文公部에서 문화부를 분리, 신설한 것도 그같은 취지에서였다. 文公部는 공보 기능이 중요하기 때문에 문화 행정이 밀려 있었다. 문화부 독립은 정부 조직의 기능 재조정이란 뜻도 있었으나 경제에만 매달려온 지금까지의 정책을 문화 쪽에도 균형을 갖추도록 하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초대 장관으로는 李御寧(이어령) 교수를 임명했는데 李장관은 참신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놓았다. 특히 1990년 6월에는 「문화발전 10개년 계획」을 발표했는데 문화부문에서 처음으로 마련한 장기 계획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컸다.
민주화 추진 과정에서 나는 언론·출판·문화 분야에 대해서는 과거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자유를 보장했다. 나아가 북한에 있는 洪命熹(홍명희), 鄭芝溶(정지용), 金起林(김기림) 등 越北(월북)작가들의 작품도 거의 모두 해금시켰다. 민족문화의 전통과 유산을 되살리는 데는 남북한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옛 중앙청 철거 문제
―盧 전 대통령 재임시절 문화와 관련된 중요한 논의의 하나가 중앙청 철거 문제였습니다. 李御寧 문화부장관이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중앙청 철거 문제가 거론됐다가 입장 정리가 안되고 金泳三 정부로 넘어와 철거됐습니다. 盧 전 대통령께서는 이 문제에 어떤 의견이었습니까.
『나는 중앙청이 역사적 건물이기 때문에 철거해서는 안되고, 이전이 가능하다면 이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빛나는 업적이 담긴 건물이든, 피를 토하는 불행을 가져온 잔재든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은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내가 청와대를 새로 지은 후 역대 대통령들이 살던 본관 건물을 처음에는 헐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건물 자체가 문화적 가치가 없었으니까요. 그 건물은 일제시대에 총독이 살기 위해 지었던 것인데 여기에 우리 대통령들이 살게 되면서 필요에 따라 조금씩 늘리다 보니 어떤 때는 천장에 쥐가 다닐 때도 있고 비가 샐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건물을 없앴으면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역사의 한 책임자라는 입장에서 도저히 없앨 수가 없더군요. 바로 그 건물에서 우리나라의 대통령 여섯 분이 집무하고 생활한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건물 자체는 문화적 가치가 없지만 역대 대통령들이 살았던 공간이라는 것만으로도 보존해야 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죠』
林仁圭:『당시 국회에서도 중앙청 철거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안들은 여야가 입장을 달리했지만 이 문제는 여와 야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철학과 안목에 의해 의견이 갈렸습니다. 철거냐 보존이냐 하는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바람에 6共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넘어갔지요』
―새 박물관을 짓기도 전에 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중앙청 건물을 철거했기 때문에 지금은 우리 국보와 문화재를 임시 박물관에 궁색하게 임시 전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先철거 後건설이라는 金泳三 전 대통령의 조치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건 내가 얘기할 필요도 없이 벌써 다 밝혀졌잖습니까.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漢字 써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한글전용과 한자혼용이 문화적으로 큰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주민등록증을 바꾸는 과정에서 이름을 한글전용으로 하려는 것을 金鍾泌 국무총리가 브레이크를 걸어 한자를 병기하도록 했습니다. 盧 전 대통령 재직시에 문자정책이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까.
『이슈가 된 적은 없지만 내 생각으론 한자는 써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한자문명권이기 때문이죠. 한자문명권에 있는 나라는 한자를 쓰는 것이 개방화나 국제화, 세계화에 부응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어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전에 내가 서울올림픽위원장 시절에 스위스에 자주 갔는데, 내가 타던 차의 운전기사가 5개국어에 능통한 사람이었어요. 손님들이 얼마나 편리합니까. 국제적으로 대접을 받으려면 국제어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신문을 보면 한자가 거의 없어요. 내가 「이거 안되는데」 하고 걱정을 합니다』
金鍾仁 전 장관은 『요즘 정부가 추진하는 교육개혁을 보면 우리나라가 잘될 것 같지가 않다』고 걱정했다. 20년 동안 교육개혁하는 나라에서 교육이 잘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盧 전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내가 한 가지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 盧在鳳(노재봉) 총리의 수명을 너무 짧게 끝낸 것입니다. 2년 정도 총리 시켰다면 우리나라 교육을 상당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분은 교육 분야에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아쉬움이 큽니다』
「서울평화상」에 대한 해명
이어 盧 전 대통령은 스포츠 분야에 대한 육성증언을 시작했다.
<우리 나라 스포츠 역사에 있어 6共은 金字塔(금자탑)을 세워 놓았다 해도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1990년 아시안게임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렸으며, 분단사상 처음으로 남북 단일팀을 구성해 남북한 체육교류에 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나는 국민체육진흥법과 체육시설 설치 이용에 관한 법률 등을 제정하고 각 행정조직에 생활체육과 체육청소년계를 신설해 국민체육진흥에 관심을 쏟았다. 또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고 후대에 길이 전승하기 위해 서울올림픽 기념행사를 마련했다. 바로 세계한민족체전과 서울평화상이 그것이다.
북방정책 전개와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체육 분야에서도 남북한간에 교류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1988년 12월 북한 올림픽위원회의 김유순 위원장이 金宗河(김종하) 대한올림픽위원장에게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에 남북한 단일팀을 구성, 출전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판문점에서 회담을 갖자』고 제안해 왔다는 보고를 받고 나는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는 지침을 하달했다.
우여곡절 끝에 북경대회 단일팀은 무산됐으나 남북체육회담의 불씨가 꺼지지 않은 덕에 남북한 선수 공동 응원의 계기가 마련됐고,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남북 단일팀을 구성해 참가하는 결실을 보았다. 남북한 선수들이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유니폼을 입고 「아리랑」을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서울올림픽 때처럼 가슴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이 세계한민족 체육제전이다. 올림픽 과정에서 在外(재외)동포들이 제안한 사항이었는데, 나는 취임하자마자 개최를 추진하도록 조치했다. 그 결과 서울올림픽 개최 1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1989년 9월26일 제1회 세계한민족체전이 열려 50여개국에서 1천3백여 명의 在外동포 선수가 참가했다. 당초에는 한 번 하고 마는 것으로 계획이 잡혀 있었는데 참가 동포들이 이 행사의 정례화를 요청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나는 이 제전을 민속경기에 중점을 두고 문화 및 학술회의를 추가해 한민족 모두의 종합축제로 발전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한민족체전이 체육·청소년·문화·학술 등으로 확대돼 격년마다 열리게 된 것이다.
1989년 9월17일 열린 서울올림픽 1주년 기념행사에서 나는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기념하고 화합과 전진·평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서울평화상」을 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서울평화상에 대해서는 일부 반대의견이 없지 않았으나 나는 서울 올림픽이 東西 냉전의 벽을 넘어 화합과 전진을 다지고 국가·이념·종교를 초월해 인류 화합과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 점을 들어 제정하기로 했다. 1990년 제1회 수상자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을 결정했다.
그 후 몇몇 사람은 이 상이 나 개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냐며 없애려고 했다. 실제 2년마다 주게 되어 있는 것을 한때 폐지하겠다는 방침을 세우는 바람에 1994년에는 건너뛰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관계된 누구에겐가 강하게 뜻을 밝혔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에게 상을 준 데 대해 말들이 있다는데, 서울올림픽을 통해 東西 화해를 이루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당연히 주어야 할 상이었다. 2회 수상자인 슐츠 美 국무장관도 나와 친하다 해서 준 것이 아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북한이 테러를 가하겠다고 위협할 때 바쁜 와중에도 서울에 달려와 서울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에 서서 全세계 텔레비전 카메라에 모습을 비춤으로써 서울올림픽에 대한 어떤 방해라도 막겠다는 미국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슐츠 장관은 또 인터폴 조직을 직접 체크해 가며 관계국들의 협력을 구했고, 소련의 세바르드나제 외무장관에게도 서울올림픽의 안전 개최를 수차 강조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상을 준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이 상을 없앤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나라다』>
청와대를 새로 지은 이유
―盧 전 대통령께서는 불교 신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와대에서 행사를 한다든지 손님을 청한다든지 할 때 종교적인 배려를 많이 하셨습니까.
『대통령이 특정 종교에 집착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습니다. 나는 軍 지휘관 시절에도 종교에 편견을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단장 시절에는 교회와 불당을 같이 지어준 일이 있어요』
배석했던 孫柱煥 전 장관이 『盧대통령 재임 중에 청와대에 불상을 모시고 있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돈 적이 있다』고 하자 盧 전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청와대 관저 뒷산 쪽으로 산책길이 나 있는데 그 중턱에 신라 때 만들어진 불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전부터 보존되어 온 문화재죠. 상당히 가파른 길이었는데도 이따금씩 열렬한 불교신자인 우리 어머님이 그 불상 있는 곳에 올라가 참배하시곤 해서 나도 가끔 찾은 적이 있어요』
―처음에 청와대 가셨을 때 역대 대통령들이 거쳐간 방을 쓰셨을 텐데 감회가 어떻던가요.
『그 집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남에게 들었습니다. 그러면 좀 꺼림칙한 느낌을 갖기 쉬운데 나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다만 여름에 날씨가 가물어 국민이 비를 기다릴 때 비가 오나 안 오나 하고 침실에서 창문을 열며 바깥을 내다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면 「아 옛날의 대통령들도 심정이 이랬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청와대 본관 건물 주변에 목련이 많았습니다. 陸英修(육영수) 여사가 목련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목련화가 필 때면 陸여사 생각이 나기도 했지요.
내가 청와대 건물을 새로 지은 것은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대통령은 그 나라의 문화를 상징하는 존재인데 대통령 사는 집이 일본 집도 아니고 한국 집도 아닌 어정쩡한 건물에서 세계의 지도자와 학자를 맞이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국 문화의 상징을 건설하는 이 일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적임자가 바로 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말썽이나 거부감이 적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청와대 건물을 어떤 식으로 지으라는 지침을 직접 주셨습니까.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건물이어야 한다는 그랜드 디자인의 틀은 내가 했습니다. 그 후 건축과 관계된 세부사항은 전문가들이 위원회를 구성해 그들에게 일임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커튼 고리, 매듭 하나에 이르기까지 토론을 벌였고, 심지어 벽화를 설치할 때는 전문가들끼리 몇 달간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제2장 영사문제.재벌문제 등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절제력
盧 전 대통령은 이어서 분배문제, 농어촌 구조개선사업 등을 주제로 대화를 이어갔다.
―1987년에 노사분규가 3천 건이 일어난 후 1988~89년까지 피크를 이루다가 1990년부터 서서히 줄어듭니다. 이것은 임금 인상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중산층화했고, 자가용도 굴리고, 주택문제가 해결되어 전세값이 안정되었으며, 자기 집을 가지게 되어 심리적인 안정을 찾은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보십니까.
『전문가들이 하는 말이 1인당 국민소득 5천~1만 달러 사이일 때가 국민들의 욕구가 가장 왕성하며, 이에 따른 불만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이건 어느 나라도 예외가 없다고 해요. 아무리 국민 모두에게 경제발전의 혜택이 돌아가게 정책을 시행해도 전체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고 봐요. 이것이 6共과 내가 처한 역사적 현실이 아닌가 하여 때론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金鍾仁(김종인) 전 장관은 『사회정의가 실현되려면 가진 자들이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 점에서 아쉬움이 많았다』고 회고한다.
『6共 시절 재벌들의 강력한 반발을 무릅쓰고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재벌 회장들에게 이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납니다.
「당신들이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협조하지 않으면 근로자들 임금을 자제시킬 수가 없다. 부동산 고삐가 풀려 주택가격, 전세가격이 폭등하면 근로자들이 월급 올려달라고 아우성 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가 보니까 노동자들도 맹목적으로 월급 올려달라고 떼 쓰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노동자 수준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높고 절제력이 있다는 점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생활에 필요한 것보다 임금이 적으니까 참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런 절박한 상황을 공권력으로 억눌러 놓으면 언젠가는 폭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회가 불안해지고, 기업들도 망할 수밖에 없어요. 노동자가 없는 기업이 어떻게 존재하겠습니까』
―서구 사회의 발전과정을 보면 복지문제 때문에 국가 財政이 망가져서 고통을 겪는 사례가 목격됩니다. 그런데 6共은 분배정책을 추진하면서도 건전재정을 유지했습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金鍾仁:『선진국의 경우 복지예산이 국민총생산의 30% 정도를 차지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엔 5%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회복지 시스템이 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았던 겁니다. 또 한 가지는 6共 시절에 경제가 평균 7% 이상 성장했기 때문에 복지가 경제에 주는 충격을 소화할 수 있었던 셈이지요』
盧 전 대통령은 6共 시절의 복지정책은 「파이를 키워가면서 나누자」는 철학이었다고 설명했다.
『내가 5共 시절 黨(당)에 있을 때 金鍾仁 수석을 비롯해 여러 사람과 복지정책에 대한 의견을 나눈 적이 있어요. 지금 당장 배가 고프니까 가지고 있는 작은 파이를 조금씩이나마 나눠 가질 것이냐, 아니면 파이를 크게 키운 후에 나눌 것이냐 하는 주제였지요. 당시 결론이 「파이를 키워가면서 나누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6共 복지정책의 기본이었지요』
농어촌 구조개선사업은 낭비인가?
盧 전 대통령 재임시절 긴급 현안문제로 대두된 것이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었다.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을 들어본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것이 우루과이 라운드(UR)였다.
우루과이 라운드는 이미 1986년에 시작되어 국제사회에선 활발히 진행되고 있던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우 1990년 7월에 이르러서야 각 부처가 우루과이 라운드에 대비해 점검하고 있는 정도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우루과이 라운드에 대해 별로 심각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우루과이 라운드가 우리의 당면 문제로 본격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쌀을 비롯한 농산물 개방이 시급한 해결과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결국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가 심각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소위 농어촌 구조개혁에 42조원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농어촌 문제와 관련하여 金鍾仁 전 장관의 보충설명을 들어본다.
『농촌 문제는 추곡수매가가 農家(농가)소득 향상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6共에 들어와서는 與小野大의 결과 추곡수매가를 국회에서 결정하게 되었지요. 아무래도 경제논리보다 정치적 환경이 작용하게 되다 보니 종전보다 수매가가 인상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됐습니다. 덕분에 農家소득은 향상된 셈입니다』
청와대 회식 사건의 진실
―6共 시절에 농어촌 구조개선에 42조원을 투입키로 한 계획이 金泳三 정부에 들어와 확대되어 50조원 정도가 집행됐습니다. 이것이 큰 낭비라 해서 말이 많습니다.
경쟁력 없는 농업분야에 계속 투자하는 것은 일종의 낭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은 어떤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6共 시절 농촌인구가 全 인구의 16% 정도였습니다. 나의 경제참모들은 우리 농업이 산업으로서 국제 경쟁력을 가지려면 농업 인구를 全인구의 2% 이하로 줄여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나머지 14%나 되는 농촌 인구를 당장 다른 산업으로 배치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따라서 농촌 인구를 점차 줄여가면서, 그 동안이라도 농업 종사자들의 삶이 보장될 수 있도록 정부가 대책을 세워야 했습니다. 이런 계획을 총체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계획이 농어촌 구조개혁이었어요』
―최근에 진행중인 재벌 구조조정과 관련하여 재벌 총수들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비자금 재판자료를 보니까 모 재벌그룹 회장이 청와대 회식 자리에서 발언 실수를 했는데 盧대통령께서 화가 나서 나가버린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 후 그 회장이 겁이 나서 몸무게가 7kg이나 줄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당시 상황이 어떻게 된 겁니까.
金鍾仁:『그게 아마 청와대 대통령 관저를 신축해서 이사한 후의 일일 겁니다(편집자 注:재판기록에 의하면 1990년 11월). 제가 건의해서 식사 자리를 만들었어요. 그 시절에 재벌 총수들이 부동산 자진매각이니 주력업종 선정이니 해서 정부와 감정이 좋지 않을 때니까 위로 겸 저녁식사 한 번 대접을 해주십시오 해서 재계에서 열다섯 분인가 참석을 했습니다. 식사 하면서 飯酒(반주)로 술을 한 잔씩 했는데, 한진의 趙重勳(조중훈) 회장이 제주도 목장 건 때문에 기분이 상해 저를 비판하는 거예요. 사람들 앞에서 나이든 분에게 뭐라 하기도 그렇고 해서 꾹 참았지요.
식사가 끝난 후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실 때였습니다. 그 무렵 회사가 사원주택을 지어 근로자에게 분양하면 정부에서 低利(저리)로 융자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10대 그룹은 융자 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문제의 발언을 한 회장이 이 문제를 들고 나와 「우리한테는 왜 低利 융자를 안해 주는가. 이런 일은 독재정권하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러는 겁니다. 옆 자리에 현대의 鄭周永 회장도 앉아 있었는데 다들 안색이 변했습니다. 제가 그 회장에게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시면 곤란합니다」 하고 주의를 환기시킨 뒤 돌려 보냈지요. 이렇게 되니까 자기 스스로 심적 고통을 받았던 거죠』
당시 상황에 대해 盧 전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그 일이 구체적으로는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그 회장의 삼촌 되는 분이 나와 전부터 친한 사이였어요. 함께 테니스도 치는 그런 사이였지요. 그런데 문제의 회장이 말 실수 사건 때문에 입장이 거북하니까 자기 삼촌을 보내 해명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鄭周永 회장과 세무조사
―재벌 총수 입장에서 보면 재벌 회장이 겁내는 사람은 대통령 한 분뿐인 것 같군요.
金鍾仁:『그 사람들은 대통령도 겁을 안내요. 한번은 鄭周永 회장이 관훈토론회 나가서 「한국에는 믿을 만한 지도자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鄭회장을 만나 「도대체 鄭회장은 정치인입니까, 아니면 기업인입니까」 하고 따진 적이 있어요. 그래서 몇 번 좋지 않은 이야기가 오간 적이 있습니다. 미국같이 기업이 거대한 나라도 정부에 대고 말을 함부로 하는 기업가는 없어요』
―재벌 개혁은 복잡한 과정을 거칠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재벌 회장을 장악해서 겁을 주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 효과적이겠군요.
『그것도 일장일단이 있지요. 그렇지 않아도 독재라는 말이 나오는데, 강압적으로 처리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질 않아요.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유도해야지요』
―현대의 鄭周永 명예회장이 정치 참여를 선언한 후 국세청이 상속세 관계로 1천3백억 원인가 세금을 추징한 것은 정부에서 의도적으로 제재를 가한 것입니까.
金鍾仁:『정부가 의도적인 목적에서 상속세를 추징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처음에 국세청에서 현대 계열회사의 정규 법인세를 조사하다가 가수금 몇백억원인가가 발견됐어요. 회사 규모로 볼 때 액수가 너무 커서 추적하다 보니 이 자금이 鄭회장 가족의 주식 이전에 사용된 꼬리가 잡혔습니다. 鄭周永 회장이 자꾸 항의하니까 국세청에서 「이것만은 정확하게 밝히겠다」 해서 매우 엄정하게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8백억원, 후에 1천3백억원 이렇게 늘어난 겁니다』
―6共 시절에 사회간접자본 건설 관계로 정부가 대형공사 발주를 많이 했습니다. 이 때 공사를 어떤 식으로 분배했습니까.
金鍾仁:『공사 입찰관계는 주무부서 소관이기 때문에 청와대에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발주가 있다는 사실만 알 뿐이지 절차에 대해서는 간여할 수 없는 겁니다』
―몇천억짜리 공사를 여당이나 청와대에서 모르고 발주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재임 시절에 기억나는 것은 리비아 大水路(대수로) 공사(편집자 注:리비아 대수로 공사 제2차 사업자 선정을 말함)가 있어요. 국제적으로 몇십억 달러짜리 대단한 규모의 공사였는데 수주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어요. 현대, 대우, 동아건설이 단독으로는 버거우니까 일단 수주하면 「나눠먹자」 이렇게 약속을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리비아 정부는 동아건설이 경험이 있기 때문에 기득권을 인정해서 동아건설에 단독 발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전에 약속대로 현대와 대우가 함께 해야 한다고 나선 겁니다.
리비아측에서는 「이 회사 저 회사에 나눠줄 바에야 차라리 한국 기업은 참여시키지 않겠다」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래서 내가 건설부장관을 현지에 보내 실상을 알아보니까 동아건설이 단독으로 하지 않으면 발주권을 외국에 빼앗길 우려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國益 차원에서 조정한 일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경제정책 입안자 입장에서 볼 때 재벌 기업인들은 國益보다는 私益(사익)을 먼저 생각한다고 보십니까.
金鍾仁:『말로는 국가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역시 개인 돈벌이를 위주로 하는 거죠. 저는 재벌 총수들에게 「국가를 위해서 기업 한다는 사람들은 다 거짓말」이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들은 이윤추구가 목적이지요. 진정으로 국가를 생각한다면 오늘처럼 무한정 사업을 벌여서 국가경제를 낭패로 몰고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언론의 자극적 표현 유감
―盧 전 대통령께서는 재임 시절 국가 운영의 핵심인 정치, 경제, 안보문제 중에서 어느 분야에 시간과 관심의 배분을 가장 많이 하셨습니까.
『국가 지도자로서 무엇보다 우선하는 관심은 국가 안보입니다. 그렇지만 시간 배분의 양으로만 따지면 경제가 가장 관심이 크지요. 한 나라를 책임진 국가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富國强兵(부국강병)이니까요.』
―IMF 상황이 되니까 고용문제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6共 시절엔 우리나라에서 고용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래 실업률이 가장 낮았습니다.
『6共 시절엔 경제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에 일자리가 크게 늘었습니다. 오히려 인재 구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내가 재임 시절 청와대를 신축했는데, 청와대 건설인부 확보하는 데도 애를 먹었어요. 기술자들이 얼마나 배짱이 센지 용마루 올리는 사람이 사보타주하면 작업이 올 스톱이 되곤 했지요』
金 전 장관이 답변을 거들었다.
『사람이 모자라니까 해외 노동인력 수입 문제가 논란이 됐습니다. 기업들은 외국 근로자를 수입해야 한다고 집요하게 요청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이 어떻게 구조조정을 하겠습니까. 해고를 안하는 것이 유능한 기업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에 말입니다』
―金泳三 대통령이 92년 大選에서 내건 슬로건이 「신한국 건설」, 「한국병의 치유」였습니다. 여당 대통령 후보가, 영국병처럼 우리 경제가 몹쓸 병에 걸렸으니 신한국 건설로 경제를 살린다는 뜻이죠. 중요한 것은 그 시절 유권자들이 『정말로 우리 경제가 망가졌구나』 하면서 그런 정치적 구호에 설득당했다는 점입니다.
金鍾仁:『당시 金泳三 후보 캠프에서 일하던 참모들이 자극적인 용어를 찾다가 「한국병」이란 말을 만든 겁니다. 사실 6共 경제를 운영하면서 언론 보도를 보니까 증권시장에서 주가가 조금 떨어져도 「증시 붕괴」 이렇게 씁니다. 그때 주식이 4백70포인트까지 떨어졌는데, 대한민국 증권시장 구조는 4백선 아래로 떨어져도 붕괴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언론사 경제부장들에게 「당신들이 이해를 못해서 그런 식으로 보도하는 거냐」 하고 물으면 「언론 생리가 그러니까 이해해 달라」 이러는 겁니다』
―1993년 2월13일 盧 전 대통령께서 퇴임 직전의 한국 갤럽 여론조사에 의하면 盧대통령 직무수행 중 경제를 「잘했다」가 7.8%, 「잘못했다」가 68.9%로 집계됐습니다. 반면에 외교 국방에서는 「잘했다」가 50.4%, 「잘못했다」가 13.9%로 나옵니다. 외교와 국방의 구체적인 성과는 국민이 인정했지만 경제분야는 괴리감이 컸던 것입니다.
『6共의 실제 경제정책의 성과는 경제 지표에서 잘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경제성장률과 국민 소득이 2배로 늘었고, 실업이 없었으며 주택도 2백만호 이상 공급하지 않았습까. 그런데도 그런 여론조사가 나왔다면 그 책임은 1백% 언론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는데도 언론은 「곧 망한다」 「큰일났다」 「견디질 못한다」 이런 표현을 사용했어요. 권력이 언론을 통제할 때는 언론도 조심해서 썼지만, 6共 정부와 나에 대한 것은 마음대로 쓰더군요. 언론에 관한 한 내가 제일 큰 희생자인 셈이지요』
「총체적 난국」이란 표현이 나온 이유
―그 시절 신문 스크랩을 보니까 가장 자주 사용된 단어가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金鍾仁:『그 말이 왜 나왔느냐 하면 새로 임명 받은 한 경제 부총리가 취임한 후 과천에서 공무원들 모아놓고 강연하는 자리에서 「토털 크라이시스」(Total Crisis)라는 표현을 갑자기 썼어요. 그 후부터 「총체적 난국」이란 말이 유행한 겁니다.
6共 경제의 결과는 매우 건전했지만 평가가 매우 낮게 나온 이유는 언론에서 연일 신도시 건설로 인한 물자파동, 부실공사, 임금 인상으로 인해 물가가 올랐고, 그 결과 국가 경쟁력이 바닥을 쳤다고 보도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국제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니까 그 근본적 이유는 생각지도 않고 「5共이 벌어 놓은 것을 6共이 다 까먹었다」고 자리 매김을 했으니 부정적 의견이 머리에 박히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盧 전 대통령은 언론에 대한 섭섭함을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구치소 있을 때 느낀 건데, 말단 교도관들까지 다 자동차를 가지고 있더군요. 휴가 때 가족들 태우고 동해안 일주를 하는데 길이 막혀 서너 시간이면 갈 거리를 하루 종일 걸려서 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마이카 시대를 연 고마움은 다 잊고 노사분규로 치고 박고, 화염병 던지고 盧대통령은 저런 것 하나 수습을 못하고 뭐 하느냐. 이런 불만이 쌓인 데다 언론이 자꾸 부채질하니까 제일 인기 없는 정권,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되어 버린 것이죠』
―일부 시민단체들이 盧 전 대통령 퇴임 직후 6共 기간중의 비리의혹 사건이라 해서 몇 가지 발표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내용을 보면 수서 택지 특혜분양사건, 한양이 관계되었던 민자당 가락동 연수원 매각 사건, 건영 특혜의혹, 제일생명이 관련된 정보사땅 사기사건, 청주공항을 놔 두고 왜 영종도에 신공항을 중복 건설했느냐 하는 문제, 삼성의 상용차 허가 문제 등이었습니다.
『재임중에 이미 밝혀진 겁니다만 수서 사건 문제는 서울시장이 일관성이 없어서 제기된 문제지요』
―그때 盧 전 대통령께서 서울시장에게 할 건 하고 안 할 건 하지 말라고 구체적으로 지시를 하셨습니까.
『하고 말고 대통령이 지시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서울시가 알아서 택지개발하는 사업인데』
―시민단체들이 문제를 제기한 게 골프장 허가를 많이 내주었다는 겁니다. 기록을 보니까 6共 시절에 1백35건의 골프장 허가가 났더군요.
『과거 정권에서는 골프장 허가가 교통부 소관이었는데 6共 때는 왜 교통부가 골프장 허가를 하느냐 해서 市道지사에게 위임했습니다. 때문에 청와대 업무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삼성車 허가의 내막
―삼성그룹의 상용차 생산 허가는 어떤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겁니까.
『내 기억에 삼성 상용차 문제는 대구 경북 지역의 숙원사업이었다고 기억됩니다』
金鍾仁 전 장관이 답변을 거들었다.
『삼성은 사업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기업입니다. 정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으니까 대구 상공회의소를 동원해 「대구 경북의 숙원사업」이라며 지역 여론을 동원했습니다. 그래서 1992년 7월에 상용차 생산허가가 났는데, 당시 상공부에서 「앞으로 승용차에는 절대 참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金泳三 정권이 되자 이번에는 부산 상공회의소를 동원해 부산 경남 지역 발전논리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盧 전 대통령 재임시절 교육통계를 보니까 실업계 고교 졸업자가 37%, 공업계가 8.6%, 인문계가 50% 이상 되었는데 실업계를 많이 보강했더군요. 1995년 목표가 실업계·공업계와 인문계 비율을 50대 50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더군요.
『실업계와 공업계 육성을 위해 정부가 관심을 많이 기울였죠』
金鍾仁:『대학 인가도 주로 이공계통만 해주었어요.예를 들면 그때 서울시와 수도권 대학 定員(정원)을 동결했는데, 전자산업이나 기계산업 분야 인력이 모자란다는 거예요. 최소한 학력고사 2백80점 이상인 우수인력이 와야 연구개발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까 삼성이니 LG니 하는 전자회사에서 서울대 전자공학과 학생들에게 2학년 때부터 장학금 주고 해서 하나 둘 겨우 확보한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연구개발이 불가능하니 일류대학 인력을 좀 더 늘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도권에 있는 공과대학 정원을 두 배로 늘렸습니다. 朴대통령 시절부터 묶어놓았던 정원 동결 원칙을 깨버린 것이죠.
그런데 工大의 특성은 학생 수만 늘려준다 해서 공부가 되는 게 아닙니다. 실험 실습시설이 있어야죠. 이때 기업들이 「우리도 공학 발전에 기여하겠다」 해서 産學(산학)협동 장학금 1천억원을 대학에 기증한 겁니다. 서울工大의 경우 정원이 배로 늘어나면서 4백억원의 기금이 갔습니다』
盧 전 대통령은 기업이 대학에 내놓은 1천억원의 産學협동 장학금에 얽힌 사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비자금 관계로 부끄러운 일이 생겨서 이런 얘기를 일체 하지 않았는데…. 그때 선거가 있어서 기업들이 돕겠다는 의사를 비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분들에게 「뜻은 고맙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차라리 대학, 특히 이공계 대학 발전을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이 좋겠다」 해서 1천억 원이 지원된 겁니다. 그래서 이공계 대학들이 실습용 기자재도 사고 건물도 짓고 한 겁니다』
金泳三 때 경제정책의 연속성 끊어져
―金鍾仁 전 장관께서는 경제수석 시절 月刊朝鮮과 인터뷰에서 『5共 시절에 사회간접자본 투자 시기를 놓쳤다, 또 기술개발이나 생산성 합리화 부분에서 투자의 適期(적기)를 놓쳤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6共이 경제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시행을 못해 아쉬움이 남는 정책은 무엇입니까.
金鍾仁:『그때 재벌 구조조정을 좀 더 강도 높게, 확실하게 밀어붙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단임이란 한계 때문에 시간에 쫓긴 것 아닙니까.
金鍾仁:『단임과는 관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정권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합리적 판단을 내려 前任 정권의 정책을 지속했어야 하는데, 金泳三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온 천사들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모든 정책이 중단되는 현상이 야기된 겁니다. 저는 「신한국」 「신경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부터 경제가 잘못되어 간 것으로 봅니다』
―최근 발생한 대우 문제 처리과정에 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특정 기업이 생존할 수 없는 상태라면 시장경제 논리에 의해 존폐문제를 결정하면 좋은데 일부에서 현정부의 재벌해체론 등 경제 외적인 논리에 의해 대기업 문제를 처리하려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교과서적으로 말하자면 경제논리로 풀어 가는 것이 맞는데, 우리 재벌구조가 그렇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최소의 희생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우 문제는 개인의 문제를 떠나 정부와 국가와도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에 관련 있는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해결의 지혜를 짜내야죠』
―재임시에도 재벌들이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까.
『내 재임시에도 대우조선 때문에 골치를 앓았는데, 훗날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도와줌으로써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그렇게 지원을 했는데도 대우조선이 망가졌다면 동기가 아무리 좋았다 해도 나쁜 선택이 됐을 겁니다』
―재벌 회장들과 접촉하면서 재벌 회장들이 외형을 키우고 규모를 늘린다는 생각이 앞서 있기 때문에 이익이냐 손해냐를 따지는 손익개념에 약한 것 같은 느낌은 없었습니까.
『재벌 기업인들은 이윤 추구가 목적입니다. 때문에 규모를 키울 경우 손해를 본다면 어느 누가 규모를 키우려 하겠습니까. 과거에는 「규모를 확대하는 것이 이득이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규모를 키웠던 겁니다. 재벌이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어 돈을 버는 경우는 얼마 안되고 주로 부동산으로 돈을 벌다가 한계에 직면한 겁니다. 재벌들에게 그 한계를 안겨준 것이 내 재임시절이었어요. 그래서 업종별 전문화를 시키고 상호보증을 제한하여 재벌 구조조정을 유도한 것입니다』
―민심을 읽어야 하는 대통령 입장에서 두 가지의 흐름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는 언론에 보도되는 여론이고, 다른 하나는 침묵하는 다수의 여론입니다. 그런데 언론도 국민들의 생각을 대표하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의 여론을 전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책전문가들이 볼 때 「언론에 보도된 것이 국민 여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통령도 사람인 이상 그 두 가지를 정확하게 구별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여타 기구가 언론의 단점을 보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언론의 주장을 중요시하지만 그것을 1백%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제3장 정보기관과 검찰
정치권에 대한 동태 파악
―재임 시절 안기부장과는 어느 정도 만나셨습니까.
『매주 한 번 꼴로 독대해서 보고를 받았습니다. 안기부장 보고내용의 핵심은 국가안보, 북한 동향, 그리고 북한과 관계되는 나라와 인물에 대한 것이었고 다음이 정치적 사안이었습니다. 안기부의 정치관련 활동을 정치사찰이라며 반대하는 사람이 많은데, 안기부의 기본임무가 국가 안위의 보장입니다. 국가의 안위를 해치는 요소는 外患(외환)과 내부 전복을 들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중 外患이 더 두렵지만 발생빈도는 내부 전복이 더 많습니다. 내부 위험요소가 가장 많은 곳이 정치적 상황입니다. 때문에 정치권에 대한 동태파악은 이런 위험 요소를 사전 파악하고 예방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뜻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현재의 국가정보원법이 이를 금한다고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국가정보원의 기본임무와 사명은 과거나 미래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불가피하게 라이벌 정치인이나 야당 중요인사들의 개인적인 약점을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 적이 있습니까.
『나는 그런 약점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보자는 생각을 전혀 가져보지 못했어요』
―우리나라에는 안기부, 기무사, 경찰 등의 정보기관이 있습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이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정보소통에 중요한 과제라고 봅니다. 재임 시절 盧 전 대통령께서는 어떤 관점에서 정보기관들을 운영했습니까.
『안기부는 과거에 國基(국기)를 뒤흔드는 사건에 연루된 일도 있었기 때문에 내 재임시대에는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나라에 위태로움을 끼치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기부는 다른 정보기관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기 때문에 과거 이것을 남용하여 검찰권을 독립적으로 행사할 수 없게 관여하곤 했습니다. 내 시대에는 검찰권을 독립적으로 행사하게 했고, 안기부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역할을 하게 함으로써 권력의 남용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검찰권에 대해서는 독립을 시켜야 한다는 의견, 또 하나는 검찰권이 독립하면 정부 위의 정부가 되기 때문에 검찰권을 견제할 수 있도록 대통령의 통치권 하에서 검찰권이 행사되어야 한다는 의견으로 엇갈려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검찰권 독립을 시키되 대통령의 지휘 감독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대통령의 통치권 밖에 검찰권을 둔다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검찰권을 행사하는 방법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서 「조직범죄를 단속하라」는 지침을 내려주는 방식이 있고, 구체적인 사건에 개입해 「누군 풀어주고, 누군 구속하라」는 식으로 수사에 관여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盧 전 대통령께서는 주로 어느 쪽이었습니까.
『재임 중 수사에 직접 관여한 일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재임시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학교 동기가 구속돼 형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이 부탁하면 결과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나는 수사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대통령에게는 사면권이 있으니까 부득이한 것은 사면권으로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徐東權(서동권) 당시 안기부장은 자신의 집무실에 북한과 통화할 수 있는 핫 라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金泳三 정부나 金大中 정부에서는 북한과 핫 라인을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볼 때 요즘은 핫 라인이 가동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남북간에 직통 연락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해나 오판으로 인한 위기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게 없다는 것은 그만큼 불안한 것이고 안타까운 거죠』
혁명적 개혁은 불행자초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의식구조의 개혁보다는 제도의 개혁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제도의 개혁 중 제일 중요한 게 정치인데, 우리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 필요한 정치개혁, 또는 정치제도 개혁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현실을 도외시하고 이상만을 목표로 껑충 뛰어오르려는 계획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혁명적인 발전은 불행을 더 안겨줍니다. 하나하나 고치며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아가면 자율성이 붙게 마련입니다. 타율로 칼을 빼서 하는 개혁은 절대 성공하기 힘듭니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것이 내각제인데, 내각제를 한다고 해서 우리 정치가 한꺼번에 부조리를 제거하고 모든 국민들이 「이 제도가 최고다」 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언론도 정치인들이나 책임 있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요구를 하지 말고 진행과정이 다소 불만스럽고 미흡하더라도 차근차근 발전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불행을 더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관용을 가지고 너그러워야 정치가 순리로 흐르고 야당도 억지나 선동으로 안 나갈 것 같은데요.
『권력 뿐만 아니라 모든 게 다 그래요. 힘 있는 자는 너그러운 가슴으로 힘 없는 사람들을 안아 주어야 합니다』
―朴正熙 대통령 전기를 쓰기 위해 1960년대 신문을 보니까 요즘 벌어지는 정치판이 주인공 이름만 달라졌지 야당은 선동으로 나가고, 권력 쪽에서는 무리수를 두는 원리는 똑같더군요.
『내가 재임 시절에는 야당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나면 여야가 따로 없습니다. 전부 다 내가 끌어안아야 할 사람들이니까요. 지금도 나는 그런 시대가 계속되기를 희망합니다』
『중국도 駐韓미군 용인할 것』
―6共의 對北정책의 기본은 1988~89년 동구권이 변하고 있을 때 세워졌습니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에서 남북관계를 보면 북한이 급속도로 붕괴하고 있다는 변수가 새롭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상황에 맞는 통일정책이 세워져야 할 시점인 데도 불구하고 金大中 정부는 10년 전의 對北정책을 따라가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와 역사의 변화에 맞지 않는 것 아닙니까.
『북한 붕괴라는 상황을 내가 재임 때 몰랐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나리오에 이런 상황이 다 고려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안기부를 중심으로 하여 매년 을지연습 하듯 북한에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준비하라는 지침을 내렸던 겁니다. 그 시나리오에는 굶어죽고,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피난 내려오는 상황까지 다 포함돼 있었습니다. 지금의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이 당시 상황을 상세히 알고 있기 때문에 같은 기저의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對北정책은 평화정착이라든가 교류협력에 중점을 두어왔는데, 1995년 이후 북한이 붕괴쪽으로 기울고 있는 상태에서는 오히려 『지금이 통일의 결정적인 찬스다』 하고 통일지향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상황에 대한 시나리오가 내 對北정책 속에 다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당사자 원칙을 우리가 갖지 못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통일을 해야 하는데 잘못하면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보호하에 통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 말 들어야 하고 북한도 다른 나라 말 들어야 하는 신탁통치 형태가 되기 쉽다는 뜻이죠. 어떤 일이 있어도 이런 상황을 피하려면 결국 당사자 원칙이 회복이 돼야 합니다』
―月刊朝鮮 8월호에 일본의 전략가인 오카자키 히사히코와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그는 『아시아에서 평화의 기본은 미국과 일본의 새로운 동맹관계인데, 만약 중국이 한국을 미·일편이라고 생각하면 좀처럼 북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 통일 한국은 중국과 적대하지 않는다는 점을 끊임없이 주지시켜야 하는 것 아닐까요.
『중국도 기본적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고, 남북통일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통일된 한국이 反(반)중국이 아닌 親(친)중국이 되기를 바랄 겁니다. 그건 우리가 중국 입장이 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도 여기에 합치되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어느 정권이든 외교의 기본입니다』
평민당 사무총장 앞으로 간 6억원의 정체
―그러려면 주한미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변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통일 이후에는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주둔을 안한다든지, 주둔하더라도 제한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중국 입장에서도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것이 自國의 이익에 합치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중국이 과거 일본에게 당했던 교훈을 되새겨서 생각 한다면 미군이라는 말뚝이 한반도에 꽂혀 있어서 東北亞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자기들에게 손해는 커녕 오히려 이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미군 철수를 그토록 외치는 북한마저도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는 것이 자기들 생존을 확보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孫柱煥 전 장관에게 여쭙겠습니다. 金大中 비자금 수사 때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孫 전 장관께서 1991년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재직 시절 청와대에서 평민당 사무총장 구좌로 1월에 한 번, 5월에 한 번 3억원 씩을 입금시킨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성격의 돈입니까.
孫柱煥:『청와대에서 그런 거금을 입금시킨 적도, 야당에 건네준 관행도 없었다고 제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청와대에서는 그런 돈이 간 적도 없고, 또 갈 수도 없습니다. 다만 매달 한 번씩 당 총재이신 대통령이 집권당 사무총장에게 정무수석이 배석한 자리에서 당의 월별 운영자금을 수표로 전달했다는 사실은 밝힐 수 있습니다』
―액수가 3억원씩으로 같다 보니까 분기별로, 정기적으로 야당을 도와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孫柱煥:『한 번도 야당에 당 운영 자금을 준 기억은 없다고 봅니다』
―盧 전 대통령께 여쭙겠습니다. 1992년 12월3일에 李賢雨(이현우) 경호실장이 『양도성 예금증서(CD)를 바꿔 3백억원을 만들어 가지고 盧대통령께 드렸다』고 진술했습니다. 그걸 어디에 쓰셨느냐고 검찰이 물었을 때 盧 전 대통령께서 답변을 안했습니다. 그때가 大選 보름 전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金泳三 후보 지원금으로 간 것 아니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답변하기 곤란한 사안이군요』
―전직 대통령이 정치 재개하는 것은 반대하십니까.
『언론들이 잘 평가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 문제로 언론들이 흥미 위주로 국민을 자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4장 에피소드들
기억에 남는 세계의 지도자들
―盧 전 대통령께서는 부시, 레이건, 고르바초프 등 해외 정상들과 정상외교를 펼쳤는데 그 외에 정상외교를 하시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외국 지도자들이 있다면 소개를 해주십시오.
『다케시타 전 수상, 나카소네 전 수상, 그리고 내가 재임 때 총리를 했던 가이후 수상, 미야자와 수상 등 일본 정계 지도자들과 뜻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천안문 사태 직후 방문한 영국의 대처 수상과 중국 문제를 주제로 대화를 나눈 것이 인상 깊습니다. 다음으로는 독일의 콜 수상,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수상, 그리고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싱가포르의 李光耀(이광요) 전 수상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정상간의 만남에서 무엇이 제일 중요한가를 알게 된 것이 큰 소득이라고 봅니다. 첫째로 중요한 것은 상호간의 믿음이었습니다. 둘째는 그 믿음을 바탕으로 친밀함을 갖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친밀감을 토대로 국가간에 상치되는 이해관계를 조정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맺어질 경우 정상간에 동지적이면서 진실한 동맹관계가 맺어지고, 이것이 「피를 함께 나눌 수 있다」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외교에서 그 이상 좋은 게 없는 것입니다』
盧 전 대통령은 재임중 많은 세계 정상급 인사, 국가원수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부시 미국 대통령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자 盧 전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용산 미군기지 반환문제로 부시 대통령과도 협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에게 과장된 표현으로 「미국은 우리를 많이 도와주는 입장인데 만약 미8군 사령부에 학생들 화염병이 날아오면 양국 정부 입장이 곤란하지 않겠소. 그런 일이 나기 전에 조용한 지역으로 옮깁시다」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어려웠던 문제를 다 물리치고 용산 미군기지를 반환 받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부시 대통령과의 친분관계가 없었다면 추진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엘리자베스 女王과의 인연
盧 전 대통령은 독일의 겐셔 外相(외상)과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회고했다.
『독일의 겐셔 外相 같은 분은 성공한 외교관이라고 평이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국가원수 입장에서 보면 불편한 관계도 없지 않았어요. 1981년에 내가 대통령 特使(특사)로 독일을 방문하여 겐셔 外相을 만났는데, 당시 내란음모 사건으로 재판중인 金大中씨 문제를 거론하더군요. 그때 내가 이렇게 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독일의 유명인사들이 金大中씨에 대해 관심을 표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독일 全국민이 金大中씨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그 분을 더 많이 사랑합니다」
내가 대통령 취임한 후 서울에서 겐셔 外相을 다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겐셔 外相은 EU(歐洲연합체)에 대해 많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래서 내가 「21세기가 되면 EU도 세계 총생산의 3분의 2가 나오는 東아시아의 활력을 무시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받아준 기억이 납니다』
盧 전 대통령은 올 봄에 訪韓(방한)했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의 일화를 화제로 꺼냈다.
『내가 5·16 후에 방첩대(국군기무사령부의 前身) 근무 시절(편집자 注:盧 전 대통령은 5·16 후 방첩부대의 최고회의 연락장교로 근무했다) 초대 암행어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 때 혁명정부가 보릿고개를 극복했다고 발표하자 언론이 「보릿고개는 아직도 존재한다」고 상반된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당황한 朴正熙 최고회의 의장이 나를 불러서 「전국 8도를 다니며 확인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혁명정부 암행어사 1호가 되어 1962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정 시찰을 했습니다.
그때 감악산 설마리 부근에 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한 (외국인) 여성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차를 세워서 보니까 골짜기에서 부인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사연을 물어보니 10년여 전에 한국전에 參戰(참전)했던 남편이 이곳에서 戰死(전사)했다는 겁니다. 영국군이 6·25 때 감악산 설마리 계곡 전투에서 큰 희생을 당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도 남편을 잊지 못하는 부인이 영국에서 여기까지 날아와 남편의 넋을 달래는 그 모습은 詩的(시적)인 감동이 있더군요.
내가 재임중이던 1989년에 영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그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랬더니 女王의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 오르면서 「꼭 한국에 가겠다」고, 「내 재임기간에 못 가면 황태자라도 보내겠다」고 약속했어요. 후에 여왕 대신 찰스 황태자가 다이애너妃(비)와 함께 서울을 방문한 겁니다』
―1964년 6·3 사태 당시의 신문을 읽다가 이런 점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民政 출범 후에 朴대통령은 민주적으로 해보려고 했는데 尹潽善(윤보선)씨나 야당 쪽에서 선수를 쳐서 선동하고, 거짓 폭로전을 벌이니까 이런 것들이 朴正熙 대통령으로 하여금 독재의 길로 가도록 부추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내가 朴대통령과 가까운 사람에게 직접 들은 얘긴데, 朴대통령이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일해도 국민이 알아주질 않아 배신감을 느낀 거예요. 朴대통령이 유신으로 나간 것도 그런 동기가 깔려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민주주의라는 교과서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朴대통령을 독재라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수준이 이 만큼 높아진 상태에서 나라의 책임을 맡은 나도 민주주의 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하물며 그보다 훨씬 못한 시절에 야당 주장대로 민주주의식으로 했다면 나라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金鍾泌씨의 책임회피 보고 군부는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기대 버렸다』
12·12 사건과 그 이후에 全斗煥 전 대통령이 국정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됐던 과정도 오늘의 시각에서 달리 단정됐지만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어쩔 수 없었던 겁니다』
―서울의 봄 당시 5·16에 이어 또 다시 「軍의 현실정치 참여」라는 선례를 남겼는데, 軍의 현실참여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고 보십니까.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광주에서 시위대와 계엄군 충돌사건이 벌어졌는데도 崔圭夏(최규하) 대통령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대통령으로서 결심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 때 周永福(주영복) 국방부장관이 3軍 참모총장과 함께 청와대에 가서 몇 시간 동안 「결심을 해주십시오」 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崔圭夏 대통령을 모시고 광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 때 우리 사회 일각에 「시대가 이렇게 혼란해서는 안되겠다. 국가적 혼란을 잠재우고 질서를 잡아주는 지도자가 있어야겠다」 하는 시대적 요구가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1979년 朴正熙 대통령 시해사건 후 朴대통령의 뜻을 정치적으로 이어받은 세력은 물리력으로는 정규 陸士 출신이고, 정치적으로는 공화당의 金鍾泌씨 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 「서울의 봄」 상황이 펼쳐지자 金鍾泌 공화당 총재는 민주화 세력으로 자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金鍾泌씨가 유신에 대한 책임을 지고 혼란을 수습하는 길로 나갔다면 군부는 그 분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책임을 벗어 던지고 「나는 유신을 반대했던 사람이다」 이렇게 나오니까 군부는 기성 정치인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버린 것이라고 봅니다』
─金鍾泌씨는 1963년 공화당을 창당하면서 패러다임이 민간 정치인으로 바뀌었다고 봅니다. 그 분은 1980년 봄에 軍部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린 것이 아닐까요.
『우리나라의 정치 수준과 현실로 볼 때 그것이 국가를 위해 꼭 필요한 길이 아니라 해도 정치적 동지의식이랄까 리더십이 요구됩니다. 아직까지는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 피를 나누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적 유대가 필요하다는 뜻이죠. JP의 경우 이 점이 좀 아쉬웠습니다.
내가 1987년 大選(대선)이 끝난 후 金鍾泌씨에게 「1980년 서울의 봄 당시에 여건이 그렇게 좋았는데, 왜 軍에서 金선배(편집자 注:金鍾泌 총리는 盧 전 대통령의 육사 선배)를 지지하는 동지가 없었습니까」 하고 질문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나는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이렇게 답하더군요. 말하자면 朴正熙 대통령 치하에서 2인자로서 24시간 감시를 당했기 때문에 군부에 어떤 인맥을 만들 상황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고 봅니다』
全斗煥과의 우정
─全斗煥 전 대통령은 중간에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盧 전 대통령을 처음부터 2인자로 정하고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잖습니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고 볼 수 있겠죠. 만약 내가 2인자로 행동하고 싶은 거동을 비쳤다면 절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2인자라는 사실을 내색하지 않는 상태에서 국가를 위해 뭔가 이바지하려 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느냐 생각돼요』
배석했던 孫柱煥 전 장관은 2인자의 미묘한 입장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全 전 대통령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겉으로 나타난 현상은 역시 盧대통령도 많은 견제를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軍의 장성 인사 때 보면 그때까지 선두를 달려왔던 親(친)盧泰愚 계열이 2~3순위로 밀려났습니다. 盧대통령께서 군복을 빨리 벗은 것도 이런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흔히 盧 전 대통령이 軍 시절 근무했던 특전사 9여단과 보병 9사단에서 함께 일했던 분들이 나중에 軍의 요직에 등용됐다 해서 「9·9 인맥」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이런 軍內 인맥이 불가피했다고 생각하십니까.
『9·9 인맥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만들어 내면 있는 것이지요. 安秉浩(안병호), 구창회, 이필섭씨 같은 사람들이 9사단에서 함께 근무했고 특전사 9여단에서 같이 근무했던 李鎭三(이진삼)씨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인맥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것을 과하게 앞세우다보면 남의 눈총을 받을 위험이 있어요. 대신 인맥을 통해 무엇을 누리려기 보다는 명예를 위해 앞장서자는 차원에서 보면 순기능도 있어요』
―盧 전 대통령 재임 시절 軍에서 화제의 초점이 됐던 사람이 金振永 장군이었습니다. 盧 전 대통령께서 취임하신 후에 교육사령관으로 갔다가 임기 후반인 1991년에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습니다. 金振永 장군은 全대통령을 세 번 모셨고, 盧대통령도 세 번 모신 입장이기 때문에 누구와도 좋은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는 全대통령 인맥으로 평가했다고 하더군요.
『金振永 장군은 처음에는 全대통령이 가까이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바깥(閑職)에 있다가, 全대통령 퇴임 무렵에 수경사령관으로 썼습니다. 金振永 장군은 사단장 시절 부대에서 凍傷(동상) 환자가 많이 생겨 말썽이 난 적이 있어요. 보통 사람 같으면 문제가 됐을 텐데 우수한 인재인 데다가 나와 全대통령도 아끼는 후배라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金振永 장군이 수경사령관에 있으니까 언론에서 자꾸 金장군을 「全대통령 계열」로 분류를 하더군요. 이러다 아까운 사람 희생되겠다 싶어 교육사령관으로 임명했다가 후에 육군참모총장에 발탁한 겁니다』
『全대통령과는 성격상 상호보완 관계』
이 대목에서 盧 전 대통령은 全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이렇게 회고했다.
『全대통령 성격은 일이 벌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가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뛰어가다보면 기회도 많지만 자칫 잘못하면 남과 충돌할 수도 있고, 고립될 수도 있고, 운이 좋지 않으면 쓰러지는 경우도 있지 않겠어요? 그걸 쓰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고 봅니다. 이런 인연이 계속되다보니 全대통령과 내가 軍에서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등 주요 보직을 세 차례나 인수인계 했습니다. 물론 이런 보직은 임명권자의 의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 뜻대로 될 수는 없었지만 상호간에 노력이 있었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두 사람 성격이 비슷했으면 이렇게 될 수가 없어요. 묘하게 상호보완적이었지요. 이것도 운명이었다고 봅니다』
―자료실에서 사진을 뒤지다 보니 盧 전 대통령께서 처음 공수낙하하실 때 全斗煥 대통령이 함께 점프한 사진이 남아 있더군요.
『당시 全斗煥 대통령이 1공수여단장이었는데 외국에서 VIP들이 특전사를 방문하면 공수여단장 인솔하에 시범낙하를 자주 했습니다. 덕분에 全대통령은 낙하의 베테랑이었지요. 나는 젊을 때부터 공수단에 근무했지만 공수교육을 받을 기회를 놓쳤어요. 결국 장군이 되어 여단 창설할 때 젊은 친구들과 함께 교육을 받느라 혼이 났습니다.
처음 비행기에서 점프하는 날 全斗煥 대통령이 함께 낙하를 해주었습니다. 그 때 첫 점프라 해서 가족들이 구경을 왔지요. 인접 여단장의 얘기인데 그는 첫 점프를 할 때 착지 과정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답니다. 이 장면을 보고 부인이 대접을 아주 잘해주기 시작했답니다. 나는 사뿐히 내려앉으니까 집사람과 딸이 「재미있네요」 하더군요. 나도 그 여단장처럼 퍽 쓰러졌으면 대접을 잘 받았을 텐데 말이야』
청년장교들의 기백과 정의감
―5·16 이후 陸士 11기 출신들이 反혁명 모의를 했다 해서 당시 방첩대장 鄭昇和(정승화) 장군에게 조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수사자료를 보니까 盧 전 대통령이 중심이 되어 계획을 꾸민 것처럼 되어 있던데요.
『그 당시 내가 陸士 동창회인 북극성회 회장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젊은 장교들의 불만을 내가 대표해서 건의도 하고, 또 모임이 있으면 내가 주최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주동자 비슷하게 됐습니다. 사실 중앙정보부가 이 사건을 反혁명으로 몰려고 했는데 鄭昇和 장군이 「그게 아니다. 조사를 나에게 맡겨달라」 이렇게 건의해서 중앙정보부가 방첩대에 수사를 양보한 겁니다.
그 무렵 육사 출신의 젊은 장교들은 혁명정부가 현실정치에 참여하면 軍의 순수성을 해친다 해서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내가 陸士 강당에서 총동창회를 주최했어요. 또 하나 회의 주제는 軍에서 파벌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국군이 창설되어 軍을 주도했던 세력은 함경도와 평안도 인맥이었는데, 5·16을 기점으로 以北勢(이북세)가 밀려나고 以南勢(이남세)가 득세했습니다. 以南勢의 주류는 경상도 출신이 될 수밖에 없어요. 장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니까요. 이렇게 되니까 이북 출신들이 파벌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이날 동창회에서 격론을 벌인 끝에 청년 장교집단이 軍政(군정)에 협조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란 점을 내가 이해 시켰습니다. 둘째로 파벌문제에 대해서는 「파벌을 나쁜 쪽으로만 해석하려는 태도가 바로 파벌이다. 같은 학교, 같은 고향 출신들끼리 서로 도우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설득을 하니까 모두들 수긍을 하더군요』
―그때 젊은 장교들이 회합을 가졌을 때 육사 8기생들을 제거한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행동계획이 있었습니까.
『그런 건 없었고 당시에 문제가 됐던 증권파동, 새나라 자동차, 워커힐 등 4대 의혹사건이 혁명 공약이나 軍의 순수성에 어긋나니 고쳐야 한다, 또 현실정치 참여는 「혁명과업이 완수되면 軍으로 복귀하겠다」는 조항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겁니다. 朴대통령이 우리의 단체행동에 대한 내용을 보고 받고 「청년 장교들이 그런 기백과 정의감이 없으면 軍의 장래가 암담하지 않겠나. 저들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이렇게 지시했어요. 그때 육군참모총장이 閔耭植(민기식) 장군이었는데 閔장군에게 「주동자를 불러서 타이르고 없던 일로 하시오」 이렇게 되어 무마된 것입니다』
朴대통령, 육사11기 총애했다
―盧 전 대통령도 閔耭植 장군에게 불려갔습니까.
『내가 동창회 간부 10명과 함께 閔장군에게 불려갔는데 閔장군이 「책임자가 누구야」 그래서 「盧아무개입니다」 하니까 「이놈들 말이야. 앞으로 잘 해」 이러고는 사건을 종결하더군요』
―그 당시 방첩대에 불려가서 정식으로 조사를 받았습니까.
『나는 조사를 안 받았지만 불려가서 조사 받은 사람이 더러 있어요. 鄭鎬溶(정호용·뒤에 육군참모총장-국방장관 역임)씨도 조사를 받았지요. 우리는 병력을 동원한다든가 하는 뜻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최고회의에는 「소장파 장교들이 몇월 며칠에 쿠데타를 한다」고 와전되어 최고위원 몇몇이 도망갔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때 D-데이가 7월6일이라 해서 76인가 이런 말이 돌기도 했어요』
─盧 전 대통령께서는 현역 군인 시절 朴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서 식사를 같이 하는 등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는데, 그런 사례는 요즘 시각으로 볼 때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朴대통령이 일찍부터 陸士 11기를 특별히 보살폈다고 봐야 합니까.
『내 기억으로는 5·16 혁명이 나고 1~2년 후 어떤 외국 언론에 「陸士 11기가 중심이 된 군부가 미래의 한국을 책임질 것」이라고 예언하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朴대통령은 육사 11기 출신 장교들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은 사실입니다』
─朴대통령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자신의 이념을 이어갈 후계세력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었습니다. 그런데 陸士 11기, 혹은 하나회 조직을 軍에 만들어 놓음으로써 그 분 死後(사후) 12년간 全斗煥, 盧泰愚 대통령 두 분이 朴대통령 이념을 이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10·26 이후 軍 지휘관으로서 사회혼란을 직접 겪으며 느낀 사실입니다만, 1980년 봄에 「군부가 정권을 잡아서는 안된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전국 도처에서 들고 일어나 혼란을 야기시키는 학생들에게 「이러다간 나라 망한다. 군인들이 나서기 전에 내가 책임질 테니 나를 밀어다오」 이렇게 나서는 민간 정치인이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몸을 바쳐 희생하겠다는 각오를 보이질 않았던 겁니다. 朴대통령 死後에 권력의 진공상태가 일어나지 않고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민간 엘리트들이 집권했을지도 모릅니다. 권력공백 상황에서 민간 정치인들이 위기극복을 못한 것이 군부 집권을 야기한 원인이라고 봅니다』
―지난번 12·12, 5·18 재판 수사과정에서 權正達씨(권정달: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와 周永福(주영복:당시 국방부장관)씨가 신군부측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언들을 해서 신군부 인사들이 유죄판결을 받는 계기가 됐습니다. 두 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權正達씨는 5共 출범 때 민정당을 창당한 실무자입니다. 그런데 6共 들어설 무렵 군부에서는 권위주의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내가 대통령에 출마해서 당선되기 전후로 기억됩니다만 軍에서 「全대통령을 권위주의적으로 보필함으로써 5共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람들은 6共에 참여시키지 마십시오. 이것을 조건으로 우리가 6共에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하는 강력한 건의를 해 왔어요. 6共에 들어와 4·26 총선 공천과정 등에서 어려움을 겪은 분들은 이런 건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봅니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러는가」 하고 섭섭한 감정이 없지 않겠지만 국가 전체를 봐야하는 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1980년 당시 국무총리였던 申鉉碻(신현확)씨와는 자주 만나셨습니까.
『가끔 만났는데, 그 분도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고 여론의 피해를 많이 보았지요』
―申鉉碻 당시 국무총리는 『군부의 재집권은 절대 안된다, 헌법을 개정하여 민간정부를 구성한 후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국정을 운영했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1980년 봄에 全斗煥 당시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을 반대했다는 겁니다.
『반대를 하면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그 당시에는 뚜렷한 대안이 없었다고 봅니다』
지도자는 1백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전쟁을 준비해야
─경제와 국가안보 양쪽에 다 관련이 있는 분야가 방위산업입니다. 방위산업은 국가차원에서 필요불가결하면서도, 비용 대 효과 측면에서 보면 효율성 면에서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과연 그 접점을 어느 선에서 유지시켜야 한다고 보십니까.
『국가안보는 유사시 우리를 지원해 주는 友邦(우방)이 하나도 없다는 최악의 선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를 돕는 나라가 하나도 없는 가운데서도 국가를 지킬 수 있는 무기체계를 갖추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렇다면 미군의 도움없이 북한과 1대1로 싸우는 상황을 준비해야 하는 겁니까.
『그런 생각이 기본이지요. 이 준비를 위해서는 비록 효율이 떨어지고, 경제에 부담이 된다 해도 비용을 최대한 절약해 가면서 갖출 것은 갖춰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잠수함 기술이 없어 외국 기술 들여다 생산했지만 이제 독자기술이 생겼습니다. 전투기도 그 동안 기술이 없어 F─16을 도입했지만, 앞으로는 우리 기술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개발할 것은 개발하고, 만들 것은 만들어 가며 1백년에 한 번 날까 말까한 전쟁을 완벽하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 고금을 통해 나라를 책임진 사람의 진리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북한을 평가할 때 북한의 방위산업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 경제가 무너져도 방위산업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는 북한의 방위산업도 경제와 맞물려 무너지고 있다는 판단이 듭니다.
『방위산업이 경제와 독립되어 움직인다는 것은 한시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경제가 계속 악화되면 견딜 수가 없지요. 북한의 방위산업은 韓蘇 수교 이후 소련의 지원이 끊긴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自國의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분야도 있지만 그 한계를 벗어난 부분이 더 많기 때문이죠. 그간 對蘇 經協차관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는데, 방위산업 문제까지 감안한다면 우리는 경협 차관 제공으로 큰 이득을 봤고, 지금도 보고 있는 중입니다』
─동구권 붕괴 후 CIA 같은 서방 정보기관이 소련이나 동구권 국가의 GNP를 실제보다 3~4배 과대평가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실제보다 과장되게 보이도록 해야 자기들 군비증강에 도움이 되니까 이런 결과가 야기된 것 아닌가 하는데요.
이 질문에 金鍾仁(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답했다.
『최근에 미국의 재정이 흑자로 돌아선 가장 큰 요인이 국방비 감소 때문입니다. 소련이 존재하던 당시에는 연간 對蘇(대소) 첩보비용이 1천8백억 달러가 들었는데, 이런 부분이 줄어든 것이죠. 우리가 군비를 강화하면 북한도 우리에 대항하기 위해 무리를 하기 때문에 경제가 빨리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미국이 레이건 행정부 때 이 정책으로 소련을 망하게 한 것 아닙니까. 경제가 무너지면 국방도 무너질 수밖에 없어요』
─우리도 통일이 되면 과거를 돌아보면서 평가해야 할 부분입니다만, 북한과의 군비경쟁을 우리가 선도해서 북한이 저 모양이 된 것 아닐까요.
『1970년대 말까지는 우리가 군사력 면에서 월등히 뒤진 상황이었습니다. 우리의 전력증강 사업인 율곡사업은 열세였던 우리 군사력을 향상시켜 전쟁억지력을 갖자는 것이지 군사력면에서 북을 앞지르겠다는 것이 아니었어요. 군사력 우위 확보를 위한 북과의 군비경쟁을 하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군비경쟁으로 북의 경제를 파탄시키자는 의도는 없었지요』
末年의 朴正熙
盧 전 대통령은 朴正熙 대통령이 선포한 10월유신을 軍에서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평가했다고 말했다.
『일반 사회에서는 10월유신을 정치적으로 해석했지만 軍에서는 10월유신을 자주국방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했습니다. 미국이 우리의 전력증강을 억제하니까 「이제 우리 방식대로 나가보자」는 사고방식이었죠. 그전까지는 軍에서 사용하는 각종 교범(FM:Field Manual)도 미군의 것을 그대로 번역해서 썼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지형과 여건에 잘 맞지 않았어요. 10월유신 후에는 「우리 식」으로 개발하자 해서 교범이나 매뉴얼을 우리 지형과 여건과 민족적 특성에 맞게 새로 만든 겁니다. 따라서 정치적 유신과 군사적 유신은 그 내용이 많이 달라요』
─우리나라로 보거나 朴대통령 입장에서 볼 때 朴대통령이 드라마틱하게 돌아가신 것이 어떻게 보면 삶을 깨끗하게 정리한 것 아닐까요.
『朴대통령이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했다면 진짜 불행한 사태가 생겼을지도 모르지요. 또 그 무렵엔 갈 때까지 갔다고 봅니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자기절제를 할 수 있었는데, 陸英修 여사가 돌아가시고 난 후엔 용인술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車智澈씨와 金載圭씨 같은 사람을 쓴 것 보면 말입니다』
역사의 무게
―이번 인터뷰가 육성회고록의 마지막 회인데 月刊朝鮮 독자들에게 德談(덕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앞서 말한 것의 되풀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저 사람은 못 믿겠다, 저 사람은 나쁘다」는 부정적 생각을 너무 많이 해왔다고 봅니다. 바라건대 우선 형제, 친인척, 친구 등 자기와 가까이 연관되는 사람부터 믿음을 베풀기를 바랍니다. 어두운 측면보다는 밝은 측면을 바라봄으로써 감사의 반응이 다시 기쁨과 감사로 돌아오게 하는 사회를 만들어갔으면 합니다.
폭우로 수해를 입은 국민들이 많습니다. 나는 수재민을 돕기 위해 열심히 ARS전화 버튼을 눌러서 텔레비전 화면 한 귀퉁이의 숫자를 쉼 없이 올리는 국민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읽습니다. 아무쪼록 이 어려운 수해를 잘 극복해서 IMF의 어려움도 이제 더 이상 우리 주위에서 맴돌지 않게, 그런 어려움 정도는 뛰어 넘는다는 희망과 의욕을 갖기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盧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기간에 대한 회고를 하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고, 때론 회한의 표정을 짓기도 했다. 또 對北관계나 북방정책을 설명할 때는 강한 신념과 의지가 비쳐지기도 했다.
이제는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돌아간 전직 대통령.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존경이나 감사의 마음보다는 감정의 앙금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盧泰愚 전 대통령의 육성 회고록이 6共시대를 돌아보는 史料(사료)이자 한 시대의 역사를 조망하는 렌즈 역할로 작용할 것이고, 감정의 앙금이 가시지 않은 독자들에겐 일종의 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盧泰愚 대통령 재임 5년간이 한국 현대사에서 절정기였다는 사실은 수치상으로나 통계상으로나 對北정책 측면에서 많은 자료들이 증거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 5년의 세월은 盧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으로 인해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다. 이 불안정한 논리구조가 언제쯤 정상적인 구조로 치환될 것인가는 우리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문제다.
기자는 5개월에 걸친 육성회고록을 연재하며 전직 대통령 盧泰愚가 아닌 인간 盧泰愚를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盧泰愚 전 대통령은 5개월에 걸친 인터뷰 내내 「역사의 무게」를 실감케 했다. 그 누가 대통령의 두 어깨에 얹혀져 있는 국가의 운명, 나라의 발전에 대한 중압감보다 더 무거운 짐을 져본 적이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