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時 작전지휘권 환수로 자주국방을 완성할 수 있었다
●북한이 남북기본합의서까지 체결한 것은 남북간의 힘의 우열이 판가름났기 때문
●미국의 6者 회담 제의도 거부, 남북문제는 우리가 주도권을 쥐었다
●용산지역에 성조기가 아니라 태극기가 휘날리고, 외국군 군화 소리가 아니라 우리 어린이들 노는 소리를…
●F-16 결정은 국방부와 공군 건의 받아 결정한 것. 리베이트 운운은 一考의 가치도 없는 낭설
●북한은 뭐하나 고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사회가 고장나 있다
민족자존을 위한 국방정책●북한이 남북기본합의서까지 체결한 것은 남북간의 힘의 우열이 판가름났기 때문
●미국의 6者 회담 제의도 거부, 남북문제는 우리가 주도권을 쥐었다
●용산지역에 성조기가 아니라 태극기가 휘날리고, 외국군 군화 소리가 아니라 우리 어린이들 노는 소리를…
●F-16 결정은 국방부와 공군 건의 받아 결정한 것. 리베이트 운운은 一考의 가치도 없는 낭설
●북한은 뭐하나 고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사회가 고장나 있다
美軍에 대한 의존에서 탈퇴
盧泰愚 전 대통령 육성증언의 이번 달 주제는 「富國强兵과 民族自尊(민족자존)」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연희동을 찾았을 때 盧 전 대통령 私邸(사저)의 별관 보수공사가 마무리되어 말끔히 단장되어 있었다.
盧 전 대통령은 새로 단장된 별관 응접실에서 취재진을 맞았다. 얼굴과 팔이 구릿빛이었다. 뙤약볕이 퍼붓던 날 테니스를 치다보니 피부가 많이 그을었다고 한다.
盧 전 대통령은 국방정책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위시해서 軍部(군부)와의 관계, 작전지휘권 환수문제와 8·18 계획이라 불리는 軍(군) 구조 개편문제, 韓美간의 안보협력관계, 율곡사업 등 「부국강병과 민족자존」에 대한 자신의 소신과 정책을 설명해 갔다. 국방분야 인터뷰에는 金宗輝(김종휘) 6共 당시 외교안보수석비서관과 孫柱煥(손주환) 전 공보처장관이 배석했다.
<나는 취임 첫 해인 1988년 5월9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라는 공약을 실천하기 위한 4대 국정지표를 제시했다. 민족자존, 민주화합, 균형 발전, 통일 번영이 그것이었다.
나는 이 지표들을 설명하면서 『통일 번영은 겨레의 염원이자 역사의 소명이다. 통일된 조국은 우리 民族史(민족사)가 오늘을 사는 우리 세대에게 이룩할 것을 명한 과업이다. 남북을 가르는 벽을 트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해 가는 일을 우리의 자주적 역량으로 성취하자』고 강조했다.
나는 최고 통수권자로서 국방문제에 대해 임기 내내 이같은 자세를 견지했다. 즉 남북관계 개선을 추진하면서 전쟁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사자 해결원칙」에 맞춰 자주국방을 통한 民族自尊(민족자존)도 추구했다.
나는 軍에 몸 담고 있을 때부터 한반도의 地政學的(지정학적), 역사적 의미와 특징을 국방문제와 연결시켜 짚어보곤 했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大陸勢(대륙세)와 海洋勢(해양세)가 상충되는 지역이어서 강대국의 세력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6·25 전쟁은 세계 양극 체제의 첨단이 충돌한 비참한 전쟁이었는데, 그 비극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엄청난 희생과 피를 흘렸고,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의 도움을 받아 생존을 확보할 수 있었다. 휴전 이후 한동안 우리 단독의 힘만으로는 국가안보를 지켜나갈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이 우리를 돕는 역할을 해온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6共에 들어와 큰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으로 主權(주권)을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중심이 되어 행사할 수 있는 자주외교의 환경과 여건을 확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韓美간의 군사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나 우리 자주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됐다.
과거에는 미군들 뜻에 일방적으로 끌려가곤 했는데, 이 때부터 우리가 중심이 되어 軍 구조를 조정하고, 軍備(군비)를 갖추는 것이 가능해졌다. 미국은 주도자 입장이 아니라 협력자와 동반자의 자세로 바뀐 것이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국방문제를 세 가지 차원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했다.
첫째 우리 군사력을 확실하게, 계속 증강시키는 것이었다. 둘째 과거에 껄끄러운 측면이 없지 않았던 韓美 안보관계를 더없이 튼튼히 하는 것이었다. 과거엔 주한미군 철수 논의가 있고, 인권문제로 韓美관계에 마찰이 있기도 했지만, 이제는 민주화를 실현함으로써 진정한 동반자 관계, 특히 안보면에서 협력관계를 의심이나 오해하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다.>
「南北관계의 당사자 해결 원칙」 강조하다
<셋째는 북한에 대한 지원 차단, 즉 소련·중국의 북한에 대한 지원과 소련으로부터의 현대 무기 공급을 중단시키는 것이었다. 朴正熙 대통령 시절부터 「소련과 중국은 金日成(김일성)이 남침하는 것을 원치 않을지 모르지만, 일단 전쟁이 나면 북한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란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그 근거까지도 없애고자 했다.
이처럼 세 가지 기둥을 세워 안보를 튼튼히 한 후에 북한을 포용하자는 것이 나의 국방에 대한 철학이었으며, 이를 실천하는 기본 구상이었다.
불행하게도 金泳三(김영삼) 정부 이후에 이 원칙이 무너졌다. 建國(건국) 이래 우리가 줄곧 지켜 왔던 정책은 남북한 문제는 남북한이 해결한다는 「당사자 해결 원칙」이었다. 나는 美·日을 비롯한 외국 정상들을 만날 때마다 『남북관계, 통일문제는 우리가 해결한다. 미국과 일본은 남북대화에 유리한 여건 조성에 협조해 달라』고 누누이 당부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북한과 직접 대화를 갖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내가 취임한 이후 어느 나라, 어느 누구도 우리를 제쳐놓고 북한과 접촉하지 않았다. 북한이 남북한과 미국이 참여하는 3者회담을 제의했지만 성사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북한으로서는 우리가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일본은 자신들과 관계를 맺지 않으려 하고, 자신들을 지지하던 소련·중국마저 거리를 두면서 한국과 가까워짐에 따라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됐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가슴을 활짝 열고 대화하겠다」고 하니까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이 美·日과 대화할 수 있고,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면 우리와 대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와 蘇·中과의 관계개선으로 이들과 북한과의 군사협력이 차단됨으로써 북한의 전력증강을 막았다. 여기에 힘입어 내 재임 중 국방비가 전체 GN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취임 전 해인 1987년 5.55%에서 임기 말인 1992년에는 3.72%로 낮출 수 있었다. 물론 경제 발전과 GNP 증가에 힘입어 절대 액수는 꾸준히 늘었다. 북한의 전력증강과 蘇·中의 對북한 군사지원을 막지 못했다면 국방비 비중은 과거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국방비 비중이 1.83%나 낮아진 데 도움받아 과거 경제적 여건의 제약으로 미흡했던 복지자금과 경제·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자금 등을 지원할 수 있는 여력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6共이 추구한 국방정책 가운데 중요한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平時(평시) 작전지휘권 환수로, 이를 통해 자주국방을 완성할 수 있었다. 둘째 현대전에 걸맞은 軍 구조 개편을 단행하고 合同軍(합동군) 체제를 갖춘 것이다. 셋째 「율곡사업」의 추진으로 한국군 전력증강을 이룩한 점을 들 수 있다.
우리는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북한이 군사력을 증강하지 못하게 하여 우리의 방위력과 억지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추구했다. 북방외교를 통해 중국과 소련을 우리 대화 파트너로 만들고, 소련의 對北 무기공급을 중단시킴으로써 북한의 군사력 증강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이 북방외교가 안겨준 안보에 대한 지대한 공헌이다. 내가 취임 당시 북한에는 미그기가 7백40대, 폭격기가 80대나 됐다. 그런데 북방정책 성공으로 그 후 북한에는 미그기가 단 1대도 들어가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