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사남〉 1100만 관객 돌파… 영월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 단종 어소·망향탑·노산대·관풍헌·관음송·자규루·장릉·‘통곡의 길’ 등
⊙ “영화를 본 이후에야 조상이 한 일을 알 수 있게 됐다”(장릉에서 만난 한명회 후손)
⊙ 장릉도 관광객 배로 증가… 엄흥도 묘는 외진 곳에 위치해 잘 알려지지 않아
⊙ “영월에서 나는 음식들로 단종 밥상 차리고 싶었다”(영화 속 밥상 차린 박금순씨)
⊙ 단종 어소·망향탑·노산대·관풍헌·관음송·자규루·장릉·‘통곡의 길’ 등
⊙ “영화를 본 이후에야 조상이 한 일을 알 수 있게 됐다”(장릉에서 만난 한명회 후손)
⊙ 장릉도 관광객 배로 증가… 엄흥도 묘는 외진 곳에 위치해 잘 알려지지 않아
⊙ “영월에서 나는 음식들로 단종 밥상 차리고 싶었다”(영화 속 밥상 차린 박금순씨)

- 3월 5일, 평일임에도 단종 유배지인 청령포 앞에는 배를 타려는 관광객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이하 사진=고기정 기자
강원 영월군 광천리(廣川里) 청령포(淸泠浦) 앞. 평일 낮인데도 단종의 유배지로 들어가려는 관광객들의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영화 속 장면보다 더 을씨년스러운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왕과 사는 남자〉 영화 공식 포스터. 사진=(주)쇼박스영화 〈왕과 사는 남자〉(감독 장항준·2026년 2월 개봉)의 흥행세가 뜨겁다. 전국이 ‘단종’ 이야기로 들썩이고 있다. 역대 천만 관객 영화 34편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린 영화는 3월 8일 누적 관객 1100만 명까지 돌파했다.
〈왕과 사는 남자〉는 조선 제6대 국왕 단종과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1404~1474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창작 사극이다. 그동안 단종은 세조의 역사에 가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어린 군주로 짧게 언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세조의 권력 장악 과정을 설명하는 장치로 잠시 등장하는 데 그쳤다. 영화 〈관상〉(감독 한재림·2013년 개봉)에서도 단종은 숙부를 두려워하는 어린 군주 정도로 그려졌다.
영화 흥행으로 일약 관심을 받게 된 곳이 바로 강원도 영월이다. 영월군에 따르면 올해 1월 1일부터 3월 7일 오후 2시까지 청령포와 장릉(莊陵)의 누적 관광객 수는 합계 10만2143명으로 집계됐다. 지난해에는 6월이 되어서야 10만 명을 넘겼지만, 올해는 두 달여 만에 같은 수치를 돌파한 것이다.
영월군 관광객 증가세도 뚜렷하다. 지난 1월 9033명이던 순 방문객 수는 영화 개봉 이후 한 달 동안 6만4801명으로 급증했다. 영화의 여운을 느끼고자 촬영지를 탐방해 감동을 더하려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영월을 찾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슬픔을 간직한 땅, 영월을 찾아보았다.
‘창살 없는 감옥’ 청령포
〈왕과 사는 남자〉 영화 흥행으로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계유정난(1453년) 2년 뒤 숙부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다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단종은 한양에서 영월까지 약 280km의 길을 이동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여정에는 7일이 걸렸다. 산과 강을 거듭 넘어야 하는 험한 길이었다.
영화 흥행을 증명하듯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에는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빼곡히 탑승해 있었다. 차가 산길에서 속도를 줄일 때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면 단종이 걸어갔던 유배길의 멀고 험한 여정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첩첩이 쌓인 산세를 헤쳐 나가다 보면 어린 왕이 느꼈을 막막함과 고단함이 어렴풋이 짐작된다.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는 동·남·북 삼면을 물이 감싸고 서쪽은 육육봉 암벽이 막아선 지형이다. 서강이 휘돌아 흐르며 섬처럼 고립된 공간을 만들어 낸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나룻배가 아니면 드나들 수 없다. ‘창살 없는 감옥’이 따로 없다.
청령포로 들어가려는 관광객들의 줄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청령포와 건너편을 오가는 배는 한 번에 30명 남짓을 태운다. 이 때문에 평일에도 약 20분가량 기다려야 했다. 앞서 공휴일인 3월 1일에는 방문객이 몰려 3시간 이상 기다릴 정도였다고 한다.
고작 3분 남짓한 뱃길이 물살을 가르며 이어졌다. 강물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았지만 한눈에도 깊어 보였다. 영화에서 단종은 이 강을 뗏목으로 건넌다. 구중궁궐에서 자라나 세상 어려운 줄 모르고 자랐을 소년이 어떤 심정으로 이 물길을 건넜을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강원도 영월 청령포 산길 초입에 위치한 단종 어소. 주위 소나무들이 어소를 향해 마치 절하듯 굽어 있다.청령포에 내리면 영화 속 장면처럼 곧바로 유배지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5분가량 더 걸어야 단종 어소(御所)에 닿는다. 어소로 향하는 길에는 돌이 빼곡히 깔려 있어 걷기가 쉽지 않다. 어소 가까이에 다다르면 울창한 소나무 군락이 모습을 드러낸다. 따뜻한 봄 날씨에도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들 때문에 주변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어소 주변의 소나무들은 기묘한 형태를 하고 있다. 대부분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는 소나무와 달리, 이곳의 나무들은 어소 쪽으로 몸을 굽힌 듯한 모습이다. 한 그루는 거의 누운 상태에 가까워 지지대로 받쳤다. 마치 왕 앞에서 신하들이 고개를 숙인 모습처럼 보였다.
청령포의 입지는 말 그대로 ‘배산임수(背山臨水)’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맑은 강물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 고요한 풍경은 오히려 이곳에 남아 있는 비극의 기억을 더 또렷하게 드러내는 듯했다.
단종의 생애
조선 제6대 국왕인 단종은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휘는 홍위(弘暐). 조선 역사에서 단종은 유일하게 ‘적장자 왕세자의 장남’ 즉 적장손으로 태어난 국왕이다. 원손(1441~1448년)으로 태어나 세손(1448~1450년), 세자(1450~1452년), 국왕(1452~1455년)의 단계를 모두 거친 유일한 국왕이다.
단종은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잇따른 죽음을 겪었다. 단종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현덕왕후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도 그가 어렸을 때 승하했다. 부왕 문종마저 지병인 등창이 재발해 세상을 떠나자, 단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어린 국왕을 대신해 김종서(金宗瑞) 등 원로 고명(顧命)대신들이 정사를 보좌했다.
즉위 1년 만인 1453년 10월 10일,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고명대신 등 반대파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단종은 실권을 빼앗기고 2년 뒤 상왕(上王)으로 물러나야 했다. 다시 1년 뒤인 1456년 7월 4일에는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한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이듬해인 1457년 7월 12일, 세조는 상왕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降封)해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바로 이 유배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유배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상도 순흥부(현 경북 영주시 순흥읍)에 유배 중이던 세종 6남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발각됐다. 결국 단종은 1457년 12월 24일, 영월 관아인 관풍헌에서 사약(賜藥)을 받고 1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단종의 최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장인과 숙부의 죽음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 자결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반면 《숙종실록》과 야사에 의하면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차마 전하지 못하고 울고 있자 단종 옆에서 시중 들던 공생(과거 시험 준비생)이 활줄로 그의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그 노비의 역할을 영화에서는 엄흥도(유해진 분)가 수행한다.
단종은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잇따른 죽음을 겪었다. 단종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현덕왕후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도 그가 어렸을 때 승하했다. 부왕 문종마저 지병인 등창이 재발해 세상을 떠나자, 단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어린 국왕을 대신해 김종서(金宗瑞) 등 원로 고명(顧命)대신들이 정사를 보좌했다.
즉위 1년 만인 1453년 10월 10일,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고명대신 등 반대파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단종은 실권을 빼앗기고 2년 뒤 상왕(上王)으로 물러나야 했다. 다시 1년 뒤인 1456년 7월 4일에는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한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이듬해인 1457년 7월 12일, 세조는 상왕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降封)해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바로 이 유배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유배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상도 순흥부(현 경북 영주시 순흥읍)에 유배 중이던 세종 6남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발각됐다. 결국 단종은 1457년 12월 24일, 영월 관아인 관풍헌에서 사약(賜藥)을 받고 1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단종의 최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장인과 숙부의 죽음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 자결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반면 《숙종실록》과 야사에 의하면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차마 전하지 못하고 울고 있자 단종 옆에서 시중 들던 공생(과거 시험 준비생)이 활줄로 그의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그 노비의 역할을 영화에서는 엄흥도(유해진 분)가 수행한다.
“역사의 이면 알게 된 것 같아 기뻐”
충청북도 제천에서 영월을 찾았다는 송정식(77)·장순례(70)씨 부부는 “영화를 보며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며 “직접 보니 완전히 고립된 섬 같은 지형이라 더욱 착잡하다”고 말했다.
― 원래 단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나요?
“잘 몰랐습니다. 역사 책에는 짧게만 언급되고, 세조에 대한 내용이 주가 되었으니까요. 한마디로 ‘비운의 왕’ 그뿐이었습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이번 〈왕과 사는 남자〉 영화를 통해 그동안 몰랐던 역사의 이면을 알게 된 것 같아 기쁩니다. 이런 게 미디어의 순기능 아닐까요.”
― 이번 영화로 엄흥도라는 인물도 새롭게 알려졌습니다.
“그 시대 기준으로 보면 엄흥도는 역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단종에게는 완전히 충신이었죠. 세조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3대를 멸한다고 했을 때, 유일하게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 엄흥도 아닙니까? 목숨을 걸고 충성을 한 셈이죠. 그런 점은 현대인들이 본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경기도 이천에서 청령포를 찾은 이순이(49)씨 역시 영화를 보고 영월을 찾았다고 했다.
― 직접 청령포를 찾으니 기분이 어떤가요?
“영화만 보는 것보다 직접 현장을 보고 싶어서 왔는데, 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단종에 대해 잘 몰랐는데, 영화를 보고 너무 슬퍼서 역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 청령포에 사람이 참 많은데요.
“제가 2년 전 수상 래프팅을 하러 영월에 왔을 때만 해도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사람이 많아졌네요. 이 기회에 영화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영월이라는 좋은 곳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관광객 74배 증가한 장릉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한양을 그리워하며 쌓았다는 망향탑.가운데가 갈라진 줄기에 걸터앉아 단종이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관음송(觀音松)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망향탑(望鄕塔)이 나온다. 단종이 한양을 그리워하며 직접 쌓았다고 전해지는 탑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영화에서 단종이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려 하고, 금성대군에게 전할 편지를 활시위로 쏘아 맞추는 장면이 등장하는 노산대(魯山臺)가 모습을 드러낸다. 단종은 해 질 무렵이면 이곳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해진다. 태어나고 자란 한양은 영월에서 아득히 멀다. 단종은 높은 곳에 올라 하염없이 그곳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단종은 숙부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가 묻힌 곳이 바로 장릉이다. 단종은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다. 세조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3대를 멸할 것이라고 엄명을 내린 바람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영월의 호장(戶長·영화에서는 촌장) 엄흥도가 위험을 무릅쓰고 세 아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혹한 속에서 장지를 찾아 헤매던 중 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 그를 인도했고, 그 사슴이 멈춰 선 자리가 지금의 장릉 자리였다고 한다. 2009년에는 영월 장릉을 포함한 조선 왕릉 40기가 능원 공간의 조형 형식 변화와 산릉 제례를 오늘날까지 이어 온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장릉 역시 관광객들로 붐볐다. 유래에 등장하는 흰 사슴 동상도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관계자에 따르면 영화 개봉 전 장릉의 하루 평균 방문객은 50~70명 수준이었지만 영화 개봉 후 2월 28일에는 약 4500명, 3월 1일에는 약 5200명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장릉은 숙종 때인 1698년 단종이 복위되면서 조성된 능으로,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강원도에 자리한 능이기도 하다. 햇볕이 잘 드는 따뜻한 자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봉분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단릉(單陵) 형식의 왕릉이다.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도 두르지 않았고 석물도 소박하고 간결한 편이다. 절제된 형식은 단종의 삶을 상징하는 듯하면서도 그의 쓸쓸한 생애를 떠올리게 했다.
이곳에서 수양대군의 측근이자 단종과 적대적 관계였던 한명회(韓明澮·1415~1487년)의 후손이라는 한모씨(익명 요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집안에서 이런 역사 교육을 시킨 적 없었다”며 “영화를 본 이후에야 조상이 한 일을 알 수 있게 됐다. 과거에는 옳은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이어 “제가 알기로는 조상은 과거(科擧)에 한 번도 붙지 못했다”며 “과거에 붙은 적 없는데 권력욕이 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장릉에는 다른 왕릉과 달리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 신하들을 신원(伸寃)하고 충신으로 기리는 시설이 딸려 있다. 장판옥(藏版屋)과 배식단(配食壇)이 268인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다. 1726년에는 영조의 명으로,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를 기리는 정려각을 세웠다. 그 밖에 서슬 퍼렇던 1541년에 노산묘를 찾은 영월군수 박충원을 기리는 박충원 낙촌비각이 있다.
소년왕의 마지막을 함께한 관풍헌
조선 제6대 왕 단종은 1457년 12월 24일 영월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았다. 당시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전달했으며, 교살당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관풍헌(觀風軒)으로 걸음을 옮겼다. 영월부(府) 관아였던 이곳은 청령포에 유배돼 있던 단종이 같은 해 발생한 홍수를 피해 잠시 거처했던 곳이자, 복위운동을 구실로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은 장소이기도 하다.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 자리한 관풍헌은 그 자체로 초라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양의 궁에서 살던 왕의 마지막 거처라고 생각하니, 어린 임금을 담기에는 지나치게 작은 공간처럼 느껴졌다. 낯선 땅에서 홀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해야 했던 왕의 처지를 떠올리자 문득 마음이 무거워졌다.
울적한 감정은 자규루(子規樓)로 걸음을 옮기자 더욱 짙어졌다. 단종은 이곳에서 한양을 그리워하며 자주 시를 읊었다고 전한다.
〈一自寃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窮恨年年恨不窮 궁한연년한불궁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血流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何奈愁人耳獨聰 하내수인이독청
원통한 새 한 마리 왕궁을 나와
외로운 몸 홑그림자로 푸른 산속에 있네
밤마다 잠 청하나 잠들지 못하고
해마다 맺히는 한 다할 길 없어라
새벽 봉우리는 적막하여 흰 새벽 달뿐
봄 골짜기엔 피 흘러 붉은 꽃 지네
하늘도 귀가 먹었나 하소연 듣지 않는데
어찌타 서러운 몸 귀만 홀로 밝은가.〉
자규루의 본래 이름은 매죽루(梅竹樓)였다. 그러나 단종이 이곳에 올라 자신의 한을 담은 ‘자규시(子規詩)’를 지은 뒤부터 자규루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밤마다 들려오는 애절한 두견새(자규) 울음소리에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한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엄홍도 묘’는 전국에 여러 곳 있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는 이후 단종이 입고 있던 옷을 들고 계룡산의 동학사(東鶴寺)로 가 생육신 가운데 한 명인 김시습(金時習)과 함께 단종의 제사를 지낸 뒤 종적을 감췄다고 전해진다. 다만 분명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숨어든 곳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엄흥도 일가의 행방을 수사하러 온 관가 사람들에게 아무도 이를 알리지 않아 끝내 붙잡히지 않았다고도 전한다.
엄흥도의 묘로 알려진 곳 역시 전국 여러 지역에 남아 있다. 세조의 탄압을 피해 은거한 장소에 대해서는 영월, 경북 문경(예천), 대구 군위, 울산 울주 등지에 서로 다른 전승이 내려온다. 후손들의 집성촌(集姓村) 또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다. 대표적인 엄흥도 묘로 대구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와 영월군 영월읍 팔괴리에 있는 묘가 거론된다. 대구 지역에서는 엄흥도의 묘소가 있는 곳의 이름을 ‘가지골’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은거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거짓 ‘가(假)’자를 사용한 지명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살아온 고향을 떠나 평생을 숨어 지낼 만큼 단종에 대한 충절이 깊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한곳에 모여 있으면 가문 전체가 화를 입을 수 있었기에, 후손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진 것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팔괴리에 있는 엄흥도의 묘를 찾았다. 장릉에서 꽤 떨어진 외진 곳에 자리한 데다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장소가 아니어서 이곳을 찾은 이는 기자뿐이었다. 산길을 따라 경사진 계단을 오르자 비교적 잘 관리된 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엄흥도의 충절은 세조 정권 아래에서는 탄압의 대상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단계적으로 재평가되며 국가 차원에서 명예가 회복됐다. 그럼에도 영월에 있는 묘는 여전히 외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평생을 숨어 살며 불안 속에 지냈을 그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었다. 잘 정비된 묘소를 바라보며, 후손들이 이제라도 그의 마음을 위로하려 애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통곡의 길’
어소 뒤쪽 산을 오르면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듯한 높은 절벽이 나타난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는 단종이 사사된 후 그를 모시던 궁녀가 극단적 선택을 한 곳이다.영월을 찾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지역 주민 대부분이 단종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민들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을 반기면서도, 단종의 슬픈 역사가 일시적인 관심으로 소비되고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한 택시기사는 “단종 유배길을 보고 싶다”는 기자의 말에 흔히 ‘통곡의 길’로 불리는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솔치재에서 영월군 청령포에 이르는 길을 직접 안내해 주었다. 이동하는 내내 그는 유배길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실제 장소들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과거에는 영월로 들어오려면 꼭 올라야만 했던 소나기재에 도착하자 공교롭게도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단종은 이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영월로 향했을 것이다. 그 착잡한 마음이 눈물이 되어 비로 내리는 듯했다.
영월 사람들은 모두가 역사 해설가와도 같았다. 〈왕과 사는 남자〉를 연출한 장항준 감독도 영월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한 주민은 “처음 장 감독과 유해진 배우가 영월 시내를 돌아다닐 때는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면서 “하지만 나중에는 마을 주민처럼 동네를 자주 돌아다니다 보니 오히려 아무도 아는 체를 하지 않게 됐다. 그 정도로 영월을 자주 찾으며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다녔다”고 말했다.
“단종의 밥상을 차리고 싶었다”
영화에 나오는 음식들을 손수 만들어낸 박금순씨와 단종에게 올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반찬들.영화 속 단종의 밥상을 실제 차린 사람 역시 영월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박금순씨다. 서강에서 쉽게 잡을 수 있어 영월 사람들에게 친숙한 식재료인 올갱이(다슬기)로 만든 올갱이국을 비롯해 고사리무침, 장아찌, 삼계탕 등 영화에 등장하는 음식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됐다. 박씨는 “영월에서 나는 음식들로 단종의 밥상을 차리고 싶었다”며 “이번 영화에는 영월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그동안 잘 몰랐던 영월을 더 많이 알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2026년 단종문화제 공식 포스터. 사진=영월군청〈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에 힘입어 올해 4월 24~26일 3일간 영월 일대에서 열리는 단종문화제에도 관심이 모이고 있다. 단종문화제는 1967년 ‘단종제’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1990년 제24회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어 이어지고 있는 지역 대표 축제다. 단종의 장례 행렬을 재현한 단종 국장을 비롯해 단종 제향, 정순왕후 선발대회, 칡줄다리기 등 다양한 체험·참여 프로그램이 마련될 예정이다. 영화 흥행으로 단종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번 축제에도 예년보다 많은 관광객이 찾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