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증으로 건강 상한 후 도우미로 들였던 여인 사이에서 딸 낳아
⊙ 소실은 석교리 과수댁 또는 주막집 노파의 과부 딸이라는 등 전언 분분
⊙ 다산, 해배 후 “수절하게 하는 게 옳지 않다고 여겨 편지마저 끊어”
⊙ “결국 원한을 품고 다른 길을 택하게 해”… 소실 옥천은 극단적 선택 한 듯
⊙ 소실과 사이에 난 딸은 상경케 해 서제(庶弟) 정약횡 집에 맡겨 달라고 당부
정민
1961년생. 한양대 국문과 졸업, 동 문학박사 / 한양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학자, 한국고전번역원 이사,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 문헌과해석사 사장 역임 / 저서 《다산선생지식경영법》 《한시미학산책》 《다산의 재발견》 《18세기 한중지식인의 문예공화국》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다산 증언첩》 《파란: 정민의 다산독본》 《다산과 강진 용혈》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다산의 일기장》 등. 지훈국학상(2012년), 월봉학술상(2015년), 백남석학상(2020년), 한국가톨릭번역상(2021년), 롯데출판문화대상(2022년), 서울국제도서전 선정 ‘한국의 가장 지혜로운 책’ 대상(2025년)
⊙ 소실은 석교리 과수댁 또는 주막집 노파의 과부 딸이라는 등 전언 분분
⊙ 다산, 해배 후 “수절하게 하는 게 옳지 않다고 여겨 편지마저 끊어”
⊙ “결국 원한을 품고 다른 길을 택하게 해”… 소실 옥천은 극단적 선택 한 듯
⊙ 소실과 사이에 난 딸은 상경케 해 서제(庶弟) 정약횡 집에 맡겨 달라고 당부
정민
1961년생. 한양대 국문과 졸업, 동 문학박사 / 한양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학자, 한국고전번역원 이사,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 문헌과해석사 사장 역임 / 저서 《다산선생지식경영법》 《한시미학산책》 《다산의 재발견》 《18세기 한중지식인의 문예공화국》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다산 증언첩》 《파란: 정민의 다산독본》 《다산과 강진 용혈》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다산의 일기장》 등. 지훈국학상(2012년), 월봉학술상(2015년), 백남석학상(2020년), 한국가톨릭번역상(2021년), 롯데출판문화대상(2022년), 서울국제도서전 선정 ‘한국의 가장 지혜로운 책’ 대상(2025년)

- 이호신, 다산초당 복원 선면도.
내가 다산(茶山)의 소실(小室) 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였던 김구용 선생의 《구용 일기》 중 1966년 1월 11일 일기를 통해서였다.
벌써 60년 전의 일이다. 학과 학생들과 함께 밤늦게 강진 귤동 윤재은 옹(翁)의 집으로 찾아든 그가 다산에 대해 얘기하던 중 불쑥 물었다.
“다산 선생이 초암에서 10년을 계시는 동안 전혀 소실을 두지 않았던가요?”
그러자 윤재은 옹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있었지요. 선생이 고향에 돌아가셔서 이곳 해남 윤씨에게 부탁 편지를 보낸 것이 있는데, 그 후 그것은 다른 사람의 소장이 됐습니다. 내가 연전(年前)에 그 편지를 사려고 사람을 보냈더니 그 가졌던 사람은 죽고 편지도 없더랍니다. 그 편지를 보면 정(鄭)씨 여자라는 것과 소생으로 딸 하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내용은 내(다산)가 그들 모녀를 거둘 처지가 못 되니 잘 보살펴 주라는 것을 우리 윤씨 문중에 부탁한 것이었지요.”(일기 내용은 김구용, 《김구용문학전집》 5 《구용일기》, 솔, 2000, 468~469면에 나온다.)
이것이 초당 소실 모녀에 관한 이야기가 처음 수면 위로 떠오른 순간의 장면이다. 모녀의 후일담을 묻자 “알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모녀가 서울서 살았다드먼”
김구용(1922~2001년). 시인·전 성균관대 교수.〈하루는 밥상이 들어오는데 입맛이 걸어. 평생 주인은 그대로인디…. 웬일인가 혔겄제. 보니께 그 집에 과수가 된 딸이 있어. 그 딸이 솜씨가 걸어. 한집에 사니 생면이 없겄어? 향오지심이 생기드란 말시. 객지 나와 오래 사니께 서로 친숙하게 지냈겄제. 게서 홍임(弘任)이란 딸아가 생겼어. 선생이 유배가 풀려서 서울로 가면서 고조(윤종삼)한테 편지를 혔어. 홍임 모녀가 있으니 잘 간수해 달라. 헌디 그 편지를 잃어부렀어. 그 후 내 하도 궁금해 수소문을 해서 확인해 보니 모녀가 서울서 살았다드먼.〉(13면, ‘한길 애오라지 다산을 바라보며-한학자 윤재찬옹’에 나온다.)
여기서는 그녀가 정씨가 아닌 ‘사의재 주막의 과부가 된 딸’로 바뀌었다. 홍임이란 이름도 이 글에서 처음 나왔다. 성씨는 따로 밝히지 않았다. 윤재찬은 1994년에 간행된 김대성의 《차문화유적답사기》(불교영상, 1994)에도 비슷한 증언을 남겼다.
도배하다 발견한 다산의 편지
〈윤재찬씨는 10년 전인가 방의 벽을 도배하다 뜻밖의 다산의 편지를 한 장 발견했다. 다산이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딸 하나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전부터 석교리(石橋里)에 살고 있는 과수댁과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전해 내려오긴 했으나 이 편지를 보고야 윤씨도 빙긋 웃었다. 가장자리 깨끗한 종이를 바르기 전 두 겹 세 겹 바르는 안쪽에 도배가 되어 있는 것을 새로 도배하기 위해 뜯다가 발견했다. 제자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딸 이름이 홍임으로 되어 있고, 홍임 모녀의 안부를 묻고는 그가 강진에 와 있는 동안 홍임 모녀를 알게 된 내용과 함께 제자들이 다산 대신 홍임 모녀를 잘 돌봐 달라는 부탁을 쓰고 있었다고 했다.〉(《차문화유적답사기》 중권 204면)
같은 사람의 증언인데도 서사가 조금 달라졌다. 주막집 딸이 다시 ‘석교리에 사는 과수댁’으로 바뀌고, 편지가 벽지 속에 초벌 도배지로 붙어 있었다고 했다. 딸의 이름이 홍임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전언은 그대로다.
정리하면 이렇다. 윤재은씨는 소실의 성이 정씨라 했고, 윤재찬씨는 석교리의 과수댁 혹은 사의재 주막 노파의 과부가 된 딸이라 했다. 홍임이라는 딸의 이름은 윤재찬의 증언에만 등장한다. 알아보니 모녀가 서울서 살았더라는 뒷말도 따로 근거는 없다. 해남 대흥사에는 소실이 뒤에 해남 대흥사 청신암의 비구니가 되었고, 딸도 승려가 되었다는 소문이 전해 온다(이는 2025년 8월 29일 범각 전 대흥사 주지 스님에게 필자가 직접 들은 전언이다).
이 밖에 강진의 전승에서 그녀의 성씨는 표(表)씨로도 나온다. 어느 것 하나 종잡을 수 없는 말이어서 믿기가 어렵다. 이 무성한 소문에서 진실은 ‘다산이 소실과 그 소생의 딸을 두었다’는 사실뿐이다.
7. 다산이 소실을 들인 사정
다산이 강진에서 얻은 딸 이야기는 전하는 말이 서로 다른 데다, 다산의 인격에 큰 흠결이 되는 것으로 여겨 말 꺼내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무엇보다 맥락 없는 전언 외에 구체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소실과 그 딸의 행방에 관한 이야기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가 지난번 《월간조선》 2월호에서 소개한 3통의 편지로 그 실체가 비로소 구체화되었다. 이 글에서는 다산이 유배 11년 차에 들면서 소실을 들이게 된 전후 사정을 먼저 살펴보겠다.
1801년 겨울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사의재 주막집 골방에서 죽은 듯이 지내다가 이듬해인 1802년부터 서당을 열어 생도를 받았다. 손병조(孫秉藻)·황상(黃裳)·황경(黃褧)·황지초(黃之楚)·이정(李)·김재정(金載靖) 등 이른바 읍내 제생이 그들이다. 이후 1805년 겨울을 고성사에서 나고, 남당포 어귀에 있던 제자 이정의 집 묵재(墨齋)로 거처를 옮겼다가, 1808년 봄에야 마침내 귤동 다산초당(茶山草堂)에 정착하였다.
“꿈에 어여쁜 여인이 장난을 걸어 와”
다산이 유배 시절 생활하던 다산 동암.처음 정착 당시 초당은 말 그대로 겨우 잠이나 잘 정도의 산정(山亭)이어서 밥을 지어 먹을 부엌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1808년 봄에 지은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의 제3수에 “대숲 속 임시 부엌 스님 하나 힘입으니, 수염 터럭 나날이 텁수룩함 가련쿠나. 승려의 계율쯤은 지금에 다 깨고서, 생선을 맡아다가 직접 손수 요리하네(竹裏行廚仗一僧, 憐渠鬚髮日鬅鬅. 如今盡破頭陀律, 管取鮮魚首自蒸)”라 한 데서 보듯, 초창기엔 초당 곁에 임시 부엌[行廚]을 마련해 두고 인근 백련사 주지 아암 혜장이 보낸 제자 수룡 색성이 상주하며 공부도 할 겸 다산의 식사 수발을 들었다.
1809년 11월 6일에 지은 시에는 다산 동암 청재(淸齋)에서 혼자 잘 때 꿈에 한 어여쁜 여인이 장난을 걸어 와 마음이 살짝 움직였지만 잠시 후 사절하여 보내고 쓴 시가 있다. 다산은 이때 47세의 중년이었으니, 여성에 대한 연정의 자락이 꿈에서 무의식적으로 얼핏 비쳤던 모양이다. 다산은 그녀의 유혹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꿈에서도 이내 마음을 다잡아 “이 마음은 어느새 금강철이 되었거니, 설령 풍로 있다 한들 네가 나를 어이하리(此心已作金剛鐵, 縱有風爐奈汝何)”라고 노래했던 것이다. 이때 다산의 독신 생활은 어느새 햇수로 9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남자 하인 들였다가 불성실해 쫓아내
수행에 힘써야 할 승려를 부엌데기로 마냥 붙들어 둘 수는 없었다. 얼마 뒤 수룡은 스승 아암을 따라 대둔사로 복귀했다. 다산은 어쩔 수 없이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정원 가꾸는 일을 맡길 남자 하인 하나를 고용했다. 당시 초당에는 학생 여럿이 상주하다시피 하며 공부하고 있었기에 식사와 빨래를 비롯해 할 일이 많았다. 계약 조건은 그에게 토지를 주어 일의 여가에 농사를 짓게 하고, 거기서 나는 소출을 전부 그가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인을 초당에 들인 시점은 1808년 말이나 1809년 초로 여겨진다.
하지만 하인이 처음 약속과 달리 아침밥만 겨우 해 놓고는 딴 데로 돌아다니며 집안 관리를 엉망으로 하고 게으르고 방탕한 행동을 일삼았다. 참다 못한 다산이 마침내 〈출동문(黜僮文)〉, 즉 하인을 쫓아내는 글을 지어 그를 해고하기에 이르렀다. 문집에 긴 글이 실려 있다. 글을 지은 시점은 앞뒤 순서로 보아 아마도 1810년이었을 것이다.
다산이 이곳에 거주한 지 2년째인 1809년부터 초당의 공부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다산의 저술 작업은 날개를 단 상태였다. 오래 끌어 오던 《상례사전(喪禮四箋)》과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를 이해에 마무리 지었고, 《시경강의(詩經講義)》의 정리를 마쳤으며, 《춘추고징(春秋考徵)》과 《역학서언(易學緖言)》의 새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1810년에도 《가례작의(嘉禮酌儀)》 《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 《상서고훈수략(尙書古訓蒐略)》 《매씨서평(梅氏書平)》 《소학주관(小學珠串)》 《춘추고징》 《역학서언》 등의 작업을 의욕적으로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이 같은 무리한 작업으로 인해 다산의 건강에 경고등이 켜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실 다산초당은 그늘지고 습기가 많아 사람이 오래 거처하기에 적합한 공간은 아니었다. 다산은 1810년 봄부터 풍증으로 안면과 수족에 가벼운 마비 증세가 왔다. 《시경강의보유》 서문에 “1810년 봄 내가 다산에 있을 때 (중략) 풍비(風痺)로 힘이 들어 정신과 머리가 맑지 않았다”라 한 데서 확인된다.(정약용, 〈詩經講義補遺序〉. “庚午春, 余在茶山, 圃子告歸, 唯李在側. 山靜日長, 無所寓心, 時說詩經遺義, 令筆受. 時余風痺沈困, 神識不淸, 然猶不輟者, 本欲於先聖先王之道, 鞠躬盡瘁, 死而後已.”)
풍병에 걸리다
한동안 머물며 아버지의 저술 작업을 돕던 둘째 학유가 1810년 2월 초에 돌아갔고, 당시 다산은 풍비로 정신이 맑지 않은 중에도 제자 이정에게 구술을 받아적게 하는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해서 《시경강의보유》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후 9월 21일 큰아들 학연이 격쟁(擊錚)하여, 유배를 풀고 살던 곳으로 쫓아내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다산은 해배(解配)의 명령이 머잖아 내려올 줄로 믿고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거듭된 왕명에도 해배의 명령은 교리 홍명주(洪命周) 등의 농간으로 시행되지 않았고, 귀환의 희망도 차츰 꺾였다.
당시 다산의 병증은 1811년 겨울 중형(仲兄) 정약전(丁若銓)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물며 풍병은 뿌리가 이미 깊어 입가에 늘 맑은 침이 흐르고 왼쪽 다리는 항상 마비 증세를 느낍니다. 머리 위로는 늘 두미협 얼음 위에서 잉어 낚는 늙은이들이 쓰는 솜 모자를 쓰며 지내지요. 근자에는 또 혀가 뻣뻣해져 말까지 헛나옵니다(況風病根已深, 口角常流淸涎, 左脚常覺不仁. 頭上常戴斗尾氷上釣鯉翁之絮帽. 近又舌彊語錯)”라고 쓴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편지를 받은 정약전은 “중풍이 점차 심해진다면서 수양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네가 보잘것없는 몸뚱이 하나를 가지고 천지간의 일을 모조리 궁구하려 드니 또한 어리석지 않은가?(風病有漸, 而不思修養, 子以眇然一身, 欲盡窮天地間事, 不亦惑歟?)”라고 답장했다.
소실을 들이다
다산은 구안와사(안면신경마비)가 와서 입가로 침이 흐르고, 왼쪽 다리가 뻣뻣해져서 보행에 지장을 느꼈다. 혀도 뻣뻣해져서 말이 헛나와 그대로 방치하면 큰 병으로 번질 상황이었다. 다산은 칠혈(七穴)에 연신 뜸을 뜨며 아슬아슬하게 버텨 나가고 있었다[1835년 5월 6일 귤동에 보낸 편지(개인 소장). “풍비로 마비가 오는 증상은 침과 뜸만 한 것이 없습니다. (중략) 풍을 다스리는 것은 칠혈에 뜸을 뜨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내가 다산에 있을 때 하던 것을 어찌 보지 못했단 말입니까?(風痺不仁之症, 莫如針炙. … 治風七穴炙之極善, 吾在茶山時所爲, 豈不見之耶?)”].
남자 하인을 쫓아낸 뒤 풍병까지 와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마비까지 오자 다산은 어쩔 수 없이 집안 살림을 돌보면서 수발을 들게 할 여자를 구해 들이게 되었던 듯하다. 그 시점은 아마도 1811년 겨울이었을 것이다. 앞서 〈출동문〉의 끝에 집주인인 윤자(尹子)가 하인을 엄하게 꾸짖는 것을 보면, 이 여인 또한 중풍으로 편마비가 온 다산을 보다 못한 초당 주인 윤규로가 주선해서 들였을 것이다. 처음부터 소실로 들인 것은 아니었고, 살림을 도와줄 도우미 정도의 역할이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다산은 1813년 늦봄 무렵 딸 하나를 얻었던 듯하다. 정확한 출생 시점은 분명치 않지만, 1813년 8월 19일에 그 딸을 위해 그려 준 한 폭의 매조도(梅鳥圖)가 남아 있다[다산이 소실에게서 얻은 딸을 위해 그려 준 매조도에 대해서는 정민, 〈다산이 딸을 위해 그린 ‘매조도’ 두 폭〉, 《다산의 재발견》(휴머니스트, 2011), 475~493면에서 자세히 살핀 바 있다].
다산은 아내 홍씨가 보내 온 낡은 치마를 잘라 《하피첩(霞帔帖)》을 완성한 뒤, 1813년 7월 14일에 쓰고 남은 천 조각에 윤서유의 아들 윤창모에게 시집간 정실 딸에게 줄 〈매조도〉 한 폭을 그려 주었다. 35일 뒤인 8월 19일에는 다시 남은 천 조각에 소실에게서 얻은 딸을 위해 한 폭의 〈매조도〉를 더 그렸다. 시집간 딸에게는 새 두 마리를, 어린 딸에게는 한 마리만 그려 주었다. 그린 시점이 딸의 백일이나 돌 때였을 것이다. 돌이었다면 딸의 생년은 1812년 8월일 것이고, 백일이었다면 1813년 초여름쯤 태어났을 것이다.
다산은 소실의 극진한 보살핌 덕에 건강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홀로 지내 온 유배 12년 만에 처음으로 안온한 가정의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서 딸을 얻게 되면서 초당에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때쯤 해서 다산의 건강도 차츰 회복되었다.
8. 해배 후 귤동에 보낸 편지 속 ‘치녀(稚女)’ 이야기
다산이 해배되던 1818년 겨울, 소실 딸의 나이는 대여섯 살이었다. 앞선 글에서 살폈듯 딸은 아버지의 해배 길에 동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직후 모녀가 따로 상경했을 때 두 사람은 두릉에서 내쳐져서 초당으로 되돌아왔다. 이후 그녀에게는 소식을 끊고 딸조차 데려가지 않는 다산에 대한 원망이 소복이 쌓였다.
2019년 10월, K옥션 도록에 나란히 실린 다산의 친필 편지 두 통을 보고 눈이 번쩍 떠졌다. 바로 달려가 실물을 확인했다. 1821년 1월 24일에 쓴 편지였다. 하나는 귤동 윤규로에게, 다른 하나는 제자인 윤종심과 윤종진에게 보낸 것이었다. 편지의 내용에 나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먼저 읽을 글은 윤규로에게 보낸 편지인 〈문거 인형의 시궤에(文擧仁兄侍几前)〉이다.
“나는 무정한 사람이 아니지만…”
다산이 윤규로에게 딸의 상경 주선을 부탁한 편지.〈상원(上元) 이튿날인 1월 16일 갑자기 보내온 편지를 받았는데, 이것은 복(服)을 마친 뒤로 첫 소식입니다. 부모님 모시는 것이 편안하다시니 이 먼 곳에서 드는 그리움에 위안이 됩니다. 하지만 생각이 정세(情勢)에 미쳐 하나하나 눈에 그려 보면 사람을 참담하고 측은하게 만드는군요.
옥천(玉泉)의 죽음은 더욱이 기이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 또한 형의 집안에 남아 있던 재앙입니다. 그 사람은 취할 만한 점이 매우 많았고, 나는 무정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가 젊다 생각하고 나 자신은 늙었다 여겼으니, 그로 하여금 수절(守節)하게 하는 게 옳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는 것조차 끊고 전혀 소통하지 않았는데, 결국 원한을 품고 다른 길을 택하게 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가슴 아프고 참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한 어쩌겠습니까? 이미 끝난 일입니다.
어린 딸은 데려오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박 포의(朴布衣)가 봄 사이에 북쪽으로 돌아올 듯하니, 목노(牧奴·말 모는 종) 또한 혹 오래잖아 올라온다면 모름지기 김인권과 군보와 더불어 서로 상의해서 종이 업고서 박 포의가 데리고 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봄 과거 시험 때 군보가 비록 오지 않더라도 공목이 한번 와도 무방합니다. 목노 한 사람만 빌려서 업고 오거나, 공목을 시켜서 데려오게 해도 좋겠습니다.
요컨대 곧장 상경해서 사창동에 사는 사제(舍弟)의 집에 맡겨 두면 좋겠습니다. 그 비용은 인권에게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박 포의와 군보와도 함께 상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손에 한 푼도 없으니 어찌 해볼 수가 없군요. 이미 원래 쓴 편지가 있고, 손님이 와서 번거로운지라 이만 줄입니다. 잠시 글의 예의를 갖추지 못합니다.
신사년(1821) 1월 24일 먼 친척이 이름을 쓰지 않고 보냅니다.〉
(上元翌日忽承惠書, 此服制後初信也. 侍履姑安, 慰此遠念, 然想到情勢, 細細在目, 令人慘惻.
玉泉之死, 尤是怪事, 此亦兄家之餘厄也. 厥人有可取者頗多, 吾非無情, 而念渠年少, 自視衰老, 不宜使渠堅守. 故並與書札, 而絶不相通, 使之含怨而改路矣. 到今思之, 慘惻深矣. 亦復奈何. 已矣已矣.
稚女不可不率來, 而朴布衣似於春間北還, 牧奴亦或匪久上來, 須與仁權及羣甫相議, 奴負而朴領之爲好. 不然則春科時羣甫雖不來, 公牧一來無妨, 借一牧奴而負來. 令公牧領來亦好.
要之, 直上京, 置之於司倉洞舍弟之家, 爲得耳. 其所費不得不借力於仁權. 又與朴布衣羣甫相議爲佳耳. 我則手無一文, 無可奈何耳. 旣有原幅, 且値客煩, 姑不備書禮.
辛巳正月卄四日, 戚末不名頓.)
‘옥천댁’의 극단적 선택?
편지의 두 번째 단락에서 눈길이 얼어붙었다. 처음엔 ‘옥천(玉泉)의 죽음’ 운운한 대목이 다른 사람 이야기인 줄 알았다. 따져 읽으니 옥천은 소실을 지칭한 이름이었다. 그녀는 ‘함원개로(含怨改路)’ 즉 다산에 대한 원망을 품은 채 이때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옥천댁이란 택호로 불렸던 듯하다. 옥천은 강진에서 고개 하나만 넘으면 나오는 해남군 옥천면일 테니, 그렇다면 〈남당사(南塘詞)〉에서 “남당의 물가가 바로 저의 집인데(南塘江上是儂家)”라 했던 언급과 부딪친다. 자세한 사정은 이제 와서 알 길이 없다.
다산은 그녀의 죽음이 괴이하다고 했고, 그녀가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썼다. 그런데도 자신이 그녀와 연락을 끊은 것은 그녀의 나이가 아직 젊고 자신은 이미 환갑의 노인이어서 만나지도 못할 자신을 위해 수절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이 무정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위한 결정이었는데, 이를 오해한 그녀가 서운한 마음에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소식을 처음 듣고 받았을 다산의 깊은 충격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참측(慘惻)’ 즉 참담하고 측은하다는 말로, 미치지 못하는 후회의 마음을 피력했다. 편지에서 ‘형 집안의 남아 있던 재앙’이라 하고 괴이한 일 운운한 것으로 미루어 혹 그녀가 초당에 와서 목숨을 끊었던 것인가 싶기도 하다.
‘사창동 아우’ 정약횡
다산에게는 어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홀로 남아 혼란스러울 어린 딸의 처리 문제가 발등의 불이 되었다. 편지 속의 박 포의는 〈남당사〉에 등장하는 양근 박생(朴生)과 동일 인물로 보인다. 봄 어간에 그가 상경할 테고, 목노 즉 말 부리는 하인도 함께 올라올 테니 그때 그에게 업혀서 박 포의 편에 딸을 올려 보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게 마땅찮을 경우, 과거 보러 올라올 공목 윤종심 편에라도 하인 하나를 사서 업고 와 줄 것을 부탁했다.
그다음 어린 딸을 남대문 사창동(司倉洞)에 사는 사제(舍第)의 집에 맡겨 달라고 부탁한 대목에서 나는 한 번 더 감전한 듯 놀랐다. 다산이 딸을 마재의 자기 집이 아닌 사창동 아우 집에 맡겨 달라고 당부했기 때문이었다.
사창동 아우란 정약횡(丁若鐄·1785~1829년)이니, 서모(庶母) 김씨 소생으로 의술에 뛰어나 감영 비장 노릇을 했던 인물이다. 그의 아내 한(韓)씨는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처음 조선에 들어왔을 때 이미 신부의 측근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천주교 핵심부에 속한 여성이었다. 한때 열심한 신자였던 그녀의 오라비 한영익(韓永益·1767~1800년)이 주문모 신부를 의금부에 고변(告變)한 장본인이고, 다산은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켜 그의 밀고에서 신부를 극적으로 구출하는 역할을 했다. 창과 방패로 엇갈렸던 두 사람이 몇 해 뒤 무슨 연유로 사돈을 맺게 되었는지는 따져 볼 지점이 많다.
천주교 핵심에 있었던 그녀가 여전히 신앙을 지켜 갔다고 볼 때, 다산이 어린 딸을 그의 집으로 보내게 한 것이 내 마음을 길게 끌어당겼다. 어린 딸이 상경해서 마재로 못 가고 정약횡의 집에서 거두어 길러졌다면, 그녀 또한 천주교 신자로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써서 업고 오란 당부
다산이 윤종심과 윤종진에게 딸의 상경에 대해 보낸 편지.두 번째 편지는 같은 날짜로 윤규로의 조카인 윤종심과 막내아들 윤종진에게 보낸 〈공목과 원례에게(示公牧禮甫)〉란 글이다. 윤규로에게 당부를 한 뒤, 노파심에 제자들에게 한 번 더 다짐을 받고자 했다. 앞쪽 편지에서 말한 ‘원래 쓴 편지[原幅]’에 해당한다.
〈편지를 받아 보고 조부님과 부모님 모시고 잘 지내고, 원례 또한 잘 지내는 줄을 알아 구슬픈 마음에 깊이 위로가 되었다. 나는 근래 병은 없지만 마음의 쓸쓸함과 처지의 초라함이 더욱 심해지니 탄식할 따름이다.
어린 딸이 어미를 잃었다니 슬퍼할 만하다. 참담하고 측은해서 뉘우쳐 한탄하나 어찌 해볼 수가 없구나. 딸을 데려오는 방법은 당주(堂主)께 보낸 편지에 자세하니 곁에서 읽어 보는 것이 어떠하냐? 공목이는 다시 다녀가는 것이 좋겠다. 3월의 경과(慶科)는 강서(講書) 없이 바로 창방(唱榜)하는 시험이니, 이때에 맞춰 올라오도록 해라. 나주에 도착해서 성통(聖通)을 데리고 함께 오는 것 또한 괜찮겠다.
이번 걸음에 어린 딸을 데리고 같이 오면 좋겠구나. 만약 사람을 고용해서 업고 온다면 그 고용 삯은 김인권으로 하여금 조금 돕게 하고, 혹 군암[羣菴·윤시유(尹詩有·1780~1833년)]에게 상의하는 것도 약간 도움 될 길이 있을 성싶다. 군암이 무슨 말인지 알 게다. 반드시 직접 처리해서 두루 변통하는 것이 좋겠다.
서울에 들어온 뒤에는 책임지고 보낼 곳이 없고, 나 역시 돈 한 푼이 없다네. 이쪽 형편과 저쪽 사정을 고려할 때, 과거 시험을 보러 올 때 데려오는 게 좋겠다. 서울에 온 뒤 자네와 성통이 여름을 지내는 데 필요한 양식을 변통할 방도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여름을 보내고, 이어 가을 과거까지 본 뒤 돌아가는 게 좋겠다. 이렇게 계획을 세워 오도록 하여라. 이만 줄인다.
신사년(1821) 1월 24일, 먼 친척이 쓴다.
이 편지를 군암에게 보여 주어 서로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이 수사(李水使)의 소상(小祥)은 이미 지났겠구나.〉
(得書知重侍安勝, 禮亦支存, 深慰悲念之懷. 戚記近來無疾, 而寂落益甚, 可歎.
稚女失哺, 可悲也. 慘惻悔懊, 不可奈何. 其率來之方, 並詳上堂主書, 旁覽如何. 公牧再游爲好. 三月慶科, 旣是無講卽唱之科, 趁此上來. 到羅州帶聖通, 同來亦好.
此行領稚女同來爲佳. 若雇人負來, 則其雇價, 令仁權小助, 或議於羣菴, 則亦似有小助之道. 羣菴可以默會, 必自其處, 周變爲佳.
入京後無責出之處, 吾亦無一文錢耳. 以此以彼, 科行之時, 領來甚好. 旣來之後, 君與聖通, 或不無過夏糧變通之方. 過夏於此間, 仍觀秋科而歸爲好. 以此排置而來也. 不具.
辛巳正月卄四日, 戚記頓.
此書示羣菴, 而相議爲好. 李水使小祥已過耳.)
모녀, 허물어져 가던 다산을 살려 냈지만…
치녀(稚女) 즉 어린 딸이 실포(失哺)한 것을 슬퍼했다. 실포란 어미를 잃었다는 뜻이다. ‘참측회오(慘惻悔懊)’라 하여 그 어미의 죽음이 참혹 측은하고, 자신의 마음은 후회와 괴로움뿐이라고 썼다.
당시 다산은 경제적으로 파산 직전이었다.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 하물며 딸을 상경시키는 데 드는 비용조차 한 푼도 보탤 수 없을 만큼 절박했다. 임시변통할 방도까지 구구하게 설명했다. 비용은 댈 수 없지만, 서울서 여름을 지낼 양식은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으니 꼭 올라와 달라고 당부했다.
그 어린 딸은 다산의 당부대로 1821년 봄에 상경할 수 있었을까? 편지에서 저렇게까지 말했으니 아마도 그리 되었을 것이다. 상경한 딸은 이후 어찌 되었던가? 소실 옥천댁의 죽음은 자살이었을까? 중간에 묻힌 사연이 많았겠기에, 뒷사람이 이에 대해 쉽게 논단하기는 어렵다.
중풍으로 허물어져 가던 다산을 살려 낸 것은 옥천댁과 그 사이에서 얻은 어린 딸의 힘이었다. 그 어린 것이 고물고물 자라날 때 다산은 모든 시름을 잊었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대여섯 살짜리를 두고 돌아섰으니 다산의 발길인들 떨어졌겠는가. 딸의 목 뒤에 난 종기 소식에도 마음이 철썩 내려앉았던 다산이 소실 옥천댁을 원망과 원한 속에 죽도록 방치한 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