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의 편지

내년 총선에서 어느 쪽이 이길까?

  • 글 : 배진영 월간조선 편집장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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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1월 6일 독일(바이마르공화국)에서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습니다. 나치는 전체 584석 가운데 196석을 획득, 제1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나치에는 커다란 패배였습니다. 나치는 그해 7월 총선에서는 37.4%를 득표, 230석을 얻었었는데, 불과 4개월 만에 34석이나 잃었기 때문입니다.
 
  유권자들이 나치로부터 등을 돌린 가장 큰 이유는 한마디로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7월 총선에서 나치가 제1당이 되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히틀러에게 부총리 자리를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총리 자리를 고집하자 힌덴부르크는 이를 거부했고, 히틀러에게 표를 던졌던 사람들이 떠나갔던 것입니다.
 
 
  벼랑 끝에 몰린 나치
 
  11월 총선 후 나치에는 미래가 없어 보였습니다. 이 틈을 타서 당시 총리였던 쿠르트 슈라이허는 나치 분열 공작을 벌였습니다. 나치당 내에서 히틀러의 정적(政敵)이었던 그레고르 슈트라서를 포섭하려 한 것이었죠. 슈트라서는 자기를 따르는 당원들을 이끌고 슈라이허 정부에 합류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슈트라서가 히틀러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내오자 격분한 히틀러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만일 당이 부서지게 되면 나는 권총 한 방으로 단 3분 동안에 모든 걸 청산해버릴 거야!”
 
  12월 초 튀빙겐주 지방선거에서 나치는 또다시 패배했습니다. 득표율이 40%나 떨어진 것입니다. 그해 12월 말 나치 본거지인 뮌헨의 정치경찰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날마다 사표를 내는 사람이 속출하고, 회비는 비정기적으로 들어오며, 회비가 밀려 제명당하는 일이 갈수록 잦아진다.… 당의 모든 부분이 무너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듬해 1월에 접어들어서는 갈색 제복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거리를 행진하며 반대 세력들에 폭력을 일삼던 돌격대원들이 깡통을 흔들며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히틀러의 집권 가능성을 걱정하던 세력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차이퉁》은 새해 사설에서 “마침내 민주국가에 대한 나치의 공격을 물리쳤다”고 했습니다. 사회민주당 기관지 《전진》은 ‘히틀러의 부상(浮上)과 침몰’이라는 사설을 크게 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들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달이 가기 전에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있었던 작은 지방선거 얘기를 하나 하고자 합니다.
 
 
  나치를 기사회생시킨 지방선거
 
  1933년 1월 15일 독일의 리페라는 작은 주(州)에서 지방선거가 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중앙 정치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을 선거였지만, 히틀러는 이 선거에 올인했습니다. 다른 지역 나치당원들까지 조직적으로 동원해가면서 열정적인 선거운동을 벌였죠. 반면에 사회민주당 등 기성 정당들은 이 선거에 심드렁했습니다. 그들에게 리페 선거는 숱하게 있는 지방선거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까요.
 
  결국 10만 명 미만의 유권자가 참여한 선거에서 나치는 3만9000여 표를 얻어 ‘승리’했습니다. 전년 11월 총선에 비해서는 5000표 정도 더 얻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총선에 참여하는 독일 유권자들이 보통 3500여만 명이었으니, 여기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민망한 일이었습니다. 어찌 됐건 나치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겼다’고 주장할 수 있는 선전거리였습니다. 괴벨스는 “전선(戰線)의 이 한 귀퉁이에서 ‘공화제’ 체제에 대한 공격이 재개(再開)되었다”면서 “리페 선거는 (슈트라서 등) 당내 패배주의자들에게 쓰라린 교훈을 안겨주었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이후 나치당 내에서 히틀러의 리더십에 도전하는 세력은 꼬리를 감추었습니다. 히틀러는 이 기세를 타고 기성 우파 정치 세력들 사이를 오가면서 정치적 흥정을 벌였습니다. 그해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결국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그 결과가 독일 국민들에게, 그리고 인류에게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히틀러는 어떻게 해서 기사회생(起死回生)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독일 기성 정치 세력들의 무기력함과 비겁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인 특파원 윌리엄 L. 샤이러는 바이마르공화국을 창건한 정당이었던 사회민주당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1930년대의 여명을 맞이하며 그들은 지쳐버려서 패배주의의 당이 되었다. 낡아빠진 선의는 있으나, 대개는 범용(凡庸)한 인물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도 서툴렀고, 겁이 많아서 큰 모험을 시도해볼 배짱이 없었다.”
 
  히틀러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사악했지만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간절함, 즉 ‘권력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헨리 애슈비 터너 2세의 말입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정말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은, 자신의 목적에 도움이 되면 언제든지 틀에 박힌 관습이나 전통을 존중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그 광적(狂的)인 극단성을 감출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것이 이익이 된다 싶으면 아주 예의 바르고 공손하며 심지어는 아주 겸손한 듯이 꾸밀 수 있었다. 자신의 극단적인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해야 할 때는 본심을 숨겼다.”
 
 
  간절한 쪽이 이긴다
 
  10·11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를 지켜보는 내내 리페 선거를 생각했습니다.
 
  민주당 후보 유세 현장은 현역 국회의원들과 당원들로 북적거렸고, 열기도 뜨거웠다고 합니다.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던 강서구에서 열리는 이번 선거를 계기로 정국의 물굽이를 바꾸어보려는 의지가 역력했다는 겁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선거에서 패하면 이재명 대표 책임론이 나올 것이고, 당은 쪼개지고, 이 대표는 몰락한 후 형사처벌을 받게 될 수도 있는 판이었으니까요.
 
  반면에 국민의힘 후보 유세장은 그 반대였다고 들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당력을 집중한다고 했지만 후보 공천에서부터 선거운동에 이르기까지 국민의힘은 안이한 모습만 보여줬습니다. ‘그깟 구청장 선거, 설사 진다고 해도 대세에 지장을 주겠어?’ 하는 듯한 태도였다고 할까요? 심지어는 선거에 패배한 후, 패배를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데 있어서도 미적거리기만 하고 있습니다.
 
  국민의힘에, 아니 그 이전에 한나라당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보수(保守) 정당에는 도대체 ‘간절함’이란 게 없습니다. ‘지면 우리는 다 죽어야 한다’는 식의 간절함 말입니다. 보수 정당이라면 응당 대한민국의 운명을 책임지고, 대한민국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결기가 있어야 할 터인데,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나라가 망하든 당이 망하든, 내 금배지만 지키면 된다’는 생각들인 것 같습니다.
 

  정치를 관찰하는 많은 이들이 내년 총선에서는 더 먼저, 더 과감하게 변화하는 쪽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얼마 전 만났던 국민의힘 고위 당직자는 ‘변화? 그런 게 왜 필요해? 이재명 리스크에만 묻어가면 만사 오케이인데…’ 하는 듯한 태도였습니다.
 
  며칠 전 밤에, 평소 알고 지내는 젊은 ‘흙수저’ 작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기자님, 이거 어떻게 되어 가는 겁니까? 저쪽은 점점 더 기세가 살아나는 것 같은데, 이쪽은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이러다가 다시 좌파에게 나라가 넘어가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찾은 나라인데…”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습니다. 정부·여당의 높은 분들은 이런 걱정에 잠 못 이루어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종종 제게 “내년 총선에서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으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더 간절한 쪽이 이깁니다. 그게 뺏으려는 쪽이건, 지키려는 쪽이건 간에 말입니다.
 
  (이 글은 정치 상황에 임하는 정치인의 자세를 이야기하려는 것이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나치에 비유하려는 것은 아님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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