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45년 해방 직후 월남민 피란열차. 개성을 출발한 이 열차는 대구가 종착지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한반도는 일제(日帝)의 식민(植民)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독립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더욱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소련군, 남쪽은 미군이 점령하게 됐다.
해방의 기쁨에 도취됐으나 누구도 38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38선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동시에 소멸될 것으로 막연히 기대했지만, 한반도는 해방 이후 80년 동안 분단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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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무렵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입구 언덕길에서 본 아현동 일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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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당시의 마포나루터. 한강의 대표적인 포구였던 마포는 물류가 활발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으며 새우젓 등 서해에서 나는 각종 해산물의 집산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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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군정 시절 1945년경 시장에 나온 미제 물건들. |
1945년 10월 20일 서울 중앙청에서 연합군 진주 환영식이 열렸다. 앞서 9월 10일 미 제7사단 32연대 병력이 일본군을 무장해제시켰고, 미군의 부산 입항 공식 행사가 9월 23일경에 열렸다.
해방 직후 정치적 탄압을 피해, 그리고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찾아 수많은 피란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했다. 1945~48년 3년 동안 40만 명 이상의 북한 주민들이 월남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 수립 때까지 미 군정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남한에 정착시키려 했고, 소련 군정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를 북한에 심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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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전후 남대문 천막시장(남대문로5가 일대)에서 피란민, 실향민, 지방 상인들이 천막을 치고 장사를 시작했다. 일본인 소유 점포들이 비워지면서 자생적으로 생긴 시장은 ‘천막시장’ ‘38따라지’ ‘아바이시장’ 등으로 불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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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직후 창경원(현 창경궁)은 시민들의 휴식처였다. 창경원 내 노천극장에서는 다양한 야외 공연과 문화 행사가 열렸다. 사진은 당시 연극 배우들로 보인다. |
남한은 단독 총선거를 거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북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남북이 불과 25일 간격으로 각각의 정부 수립을 선언하며 분단이 현실화됐다.
해방 직후 미군정 시절을 담은 컬러사진들은 하와이에 거주하던 동포 정남영씨가 찍은 것으로 1988년 《월간조선》을 통해 처음 공개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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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 해방 3주년이자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된 날이다. 오세창 선생의 선창으로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하고 오후 1시30분경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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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정부 수립을 전후해서 서울역 쪽에서 본 남대문 모습. 왼쪽 자동차는 미국 크라이슬러 계열의 자동차 브랜드 플리머스(Plymouth) P8 딜럭스 1938년 모델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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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직후 1945년 10월 11일 무렵 인천 송도에 도착한 소련군(오른쪽)이 미군 장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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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9월의 부산 시가지 모습. 미군의 부산 입항을 환영하러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9월 16일 미군 선발대가 부산에 진주하여 행정·치안 업무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미군의 부산 입항 공식 행사는 9월 23일경 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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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경주 한 마을의 광복 경축 행사에서 풍물대가 흥을 돋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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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20일 서울 중앙청에서 대대적으로 베풀어진 연합군 진주 환영식. 태극기와 연합국 국기가 청사 외벽에 게양된 가운데 이승만 박사, 조병옥 박사, 오세창·권동진 선생 등 생존 3·1운동 33인 대표와 존 하지 중장, 아널드 군정장관을 비롯한 한미 요인들이 참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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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9일 아침 열차편으로 서울역에 도착해 시내로 들어오고 있는 미 7사단 32보병연대. 이들은 인천으로 도착해 서울로 이동했고, 일본군의 권한을 이양받고 무장을 해제했다. 철수 전인 일본 경찰들이 주요 거리에 배치되어 환호하는 군중이나 가두행진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