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기가 한산도대첩이 벌어진 곳이다. 일본수군이 수장된 바다다.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한산대첩 전적지(戰跡地)는 분명 통쾌해야 할 텐데 볼수록 안타까운 증거들만 나왔다. 한산도 높은 곳에서 통영을 바라보는 곳에 세운 제승당(制勝堂)의 행정명은 두억리다. 왜군 머리(頭)를 경상도 식으로 말하자면, ‘억수로 많이 잘라’ 두억리로 붙여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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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 바다에는 거북선 세 척이 전시돼 있다. 동틀 무렵 햇살을 받은 거북선은 비록 모형일지언정 당당해 보인다. |
통영 앞바다 맞은편이 거제도다. 그쪽에서 왜군이 밀려와 이순신 장군은 저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을 펴 왜군을 수장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왜군 400명이 도망친 곳이 하필이면 조선 수군 총사령부인 한산도다. 그들의 머리 역시 수없이 가라앉은 자기 전우(戰友)들의 곁으로 돌아가 물고기 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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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 세병관에 부속된 수항루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은 수군병사들을 왜군처럼 변장시켜 매년 항복절차를 밟는 행사를 여기서 열었다. 항복을 받는다고 해 수항루다. |
제승당이 중건된 것이 그로부터 140여 년 뒤인 영조 15년(1739년)이다. 지금 제승당 안에 보관돼 있는 ‘제승당’이라는 현판은 가운데가 뚝 잘린 것을 붙인 것이다. 역사를 모르는 인부가 불쏘시개로 쓰려고 그런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역사에 무지(無知)한 민족이 살아남았다는 역사를 우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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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남관은 여수에 있는 국보다. 전라좌수영의 본진이었던 이 건물은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세병관, 서울의 경회루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대형 건축물이다. |
특이하게 세병관만 살아남은 것은 이곳이 옛 통영국민학교로 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깃발〉의 시인 청마 유치환,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 등이 공부했다. 세병관 기둥에는 군데군데 시멘트로 구멍을 메운 자국이 있는데 이 넓은 공간을 교실로 사용하기 위해 막대기를 꽂아 놓은 흔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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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대교 밑에 설치된 해남 전라우수영 관광지에는 성곽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다. 진도대교 밑이 명량대첩의 전적지인 울돌목이다. |
‘죽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건곤일척의 일전(一戰)이었다. 제주도와 추자도를 잇던 벽파진은 지금 한적한 해변으로 변했다. 장군은 자기 목숨을 바칠 장소를 울돌목(명량)으로 정했다. 물결 울부짖는 소리가 수십 리까지 들린다는 곳이다. 그 소리는 장군의 몸속에서 나온 비명(悲鳴)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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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진도 벽파진은 배중손 장군이 삼별초를 이끌고 강화도에서 도착한 장소이자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남은 배 열두 척을 모아 왜군과의 결전을 준비하던 장소다. |
한산도를 지금처럼 꾸민 사람이 고 박정희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이곳을 보수하라고 지시한 지 3년 뒤 다시 대대적인 정비를 지시했다. 박 대통령이 한산도를 돌아본 시점은 김일성이 침략의 발톱을 턱밑까지 드러낸 시점이다. 대통령은 한산도에서 이순신 장군이 느낀 고독을 맛보며 결단을 준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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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 울돌목 근처에 마련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다. 고독하게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
이순신과 넬슨의 최후는 흡사하다. 1805년 10월 21일 나폴레옹함대가 발사한 탄환이 호레이쇼 넬슨(1758~1805)의 가슴을 관통했다. 제독은 말했다. “저놈들이 끝내 나를 해치웠군.” 이미 오른쪽 눈과 오른쪽 팔을 잃은 제독이 죽기 직전 물었다. “적선이 몇 척이나 투항했는가.” 13척 혹은 14척이라고 하자 그는 말했다. “잘했네. 하지만 나는 여왕께 스무 척을 약속했는데 ….” 나는 그 장면을 한산도의 해풍 속에서 곱씹어 보았다. 이순신 장군과 그를 되살린 박정희 대통령, 넬슨 제독 …. 위대하니 제독(提督)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