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깊은 상호작용’에서 가치 창출된다는 것 이해 못 하면 수십조원 AI 투자가 ‘죽음의 함정’ 될 수도
⊙ 삼성 갤럭시를 1년 쓴 사람이 처음 개봉했을 때보다 더 깊은 가치를 경험하고 있는가?
⊙ 카카오·네이버, 한국인 대부분이 쓰는 플랫폼 만들었으나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어
⊙ 약 18억 명이 생성형 AI 사용… 월 20달러 이상 유료 사용자는 3~5%에 불과
⊙ 학습·네트워크·맥락화 통해 한계효용 체증 가능
유영진
1966년생. 서울대 경영학 학사 및 석사, 미국 메릴랜드대 경영정보학 박사 / 미국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 교수, 템플대 교수, 클리블랜드 유니버시티 호스피털(University Hospitals) 최고혁신설계책임자(Chief Innovation Architect) 역임. 現 런던정경대(LSE) 경영학과 교수, LSE 평생교육 디지털 프로그램 학술책임자, 굿이어타이어(Goodyear Tire)·펜스키(Penske)·셔윈 윌리엄스(Sherwin Williams)·프로그레시브 보험(Progressive Insurance)·키뱅크(Key Bank) 등 미국 기업 디지털 전략 자문, 삼성전자 디자인센터·삼성경제연구소 자문
⊙ 삼성 갤럭시를 1년 쓴 사람이 처음 개봉했을 때보다 더 깊은 가치를 경험하고 있는가?
⊙ 카카오·네이버, 한국인 대부분이 쓰는 플랫폼 만들었으나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어
⊙ 약 18억 명이 생성형 AI 사용… 월 20달러 이상 유료 사용자는 3~5%에 불과
⊙ 학습·네트워크·맥락화 통해 한계효용 체증 가능
유영진
1966년생. 서울대 경영학 학사 및 석사, 미국 메릴랜드대 경영정보학 박사 / 미국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 교수, 템플대 교수, 클리블랜드 유니버시티 호스피털(University Hospitals) 최고혁신설계책임자(Chief Innovation Architect) 역임. 現 런던정경대(LSE) 경영학과 교수, LSE 평생교육 디지털 프로그램 학술책임자, 굿이어타이어(Goodyear Tire)·펜스키(Penske)·셔윈 윌리엄스(Sherwin Williams)·프로그레시브 보험(Progressive Insurance)·키뱅크(Key Bank) 등 미국 기업 디지털 전략 자문, 삼성전자 디자인센터·삼성경제연구소 자문

- 이재용(왼쪽)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오른쪽) SK그룹 회장이 2025년 8월 25일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 리셉션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은 이 논리의 모범생이었다. GDP 대비 R&D 투자 세계 2위. 삼성전자의 2025년 연간 R&D 지출은 37조7000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현대자동차도, LG도, SK도 마찬가지다. 한국 기업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돈을 연구소와 기술 개발에 쏟아붓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졌다. 왜 이 천문학적인 투자에도 경제성장률은 점점 저하되는가? 이 모든 이론이 공유하는 가정(假定)인 한계효용 체감(遞減)의 법칙, 즉 ‘같은 재화를 반복 소비하면 만족이 줄어든다’는 전제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 영역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넷플릭스는 볼수록 빠져들고, 테슬라는 탈수록 좋아지고, 생성형 AI는 쓸수록 유용해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치의 전환: 공급에서 네트워크로
공급 측면의 한계를 처음으로 돌파한 것은 네트워크 경제학이었다. 1985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마이클 카츠(Michael Katz)와 칼 샤피로(Carl Shapiro) 교수가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전화기의 가치는 전화기의 성능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전화기를 가진 사람들의 숫자가 가치의 핵심적인 원천이 된다. 전화기가 세상에 한 대뿐이면 쓸모없지만 열 대면 쓸모가 생기고, 100만 대면 필수품이 되는 것이다. 사용자가 늘수록 각 사용자가 얻는 가치가 올라간다. 이것을 ‘네트워크 외부성(network externality)’이라 부른다.
이것은 가치 창출 논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전까지 경제·경영 이론은 공급 측면에서 가치를 찾았다. 더 효율적인 생산, 더 많은 지식, 더 높은 진입 장벽이 기업이 가치를 창출하는 데 핵심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카츠와 샤피로는 반대로 수요 측면에서 가치가 창출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제품을 더 잘 만들어서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쓰기 때문에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이 논리 위에서 2000년대 이후 플랫폼 혁명이 일어났다. 페이스북(Facebook)은 더 많은 사용자가 모일수록 각 사용자에게 더 가치 있었다. 아이폰(iPhone)의 앱스토어(App Store)는 더 많은 개발자와 사용자가 모일수록 양쪽 모두에게 더 가치 있었다. 카카오톡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쓰니까 안 쓸 수가 없었다.
이것이 공급 측면의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를 대체한 수요 측면의 ‘네트워크의 경제(economies of network)’다. 공장을 크게 지어서 단가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 네트워크를 키워서 가치를 높이는 전략이다. 카카오의 성공, 네이버의 지배, 쿠팡의 부상이 모두 네트워크 효과의 산물이다.
그러나 생성형 AI가 플랫폼을 잡아먹는 현시점에서, 네트워크 경제로 충분한가?
네트워크의 한계: 왜 플랫폼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누구나 영상을 올릴 수 있는 유튜브, 앱을 올릴 수 있는 앱스토어의 등장은 공급 측면에서 혁명을 일으켰다.네트워크 외부성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네트워크 외부성은 가입자 수의 문제이지, 개인의 반복 사용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카카오톡 가입자가 5000만 명이 되면, 내가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의 범위는 넓어진다. 전화를 가진 사람이 많아지면 전화의 잠재적 가치는 올라간다. 이것이 네트워크 외부성의 핵심이다. 하지만 당신이 카카오톡을 100번째 쓸 때 첫 번째 쓸 때보다 더 만족하는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100번째 통화가 열 번째 통화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네트워크는 커졌지만, 당신의 반복된 사용 경험은 여전히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따른다.
그리고 여기에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네트워크 외부성의 논리에서 사용자는 교환 가능한 존재다. 카카오톡에서 당신이 누구인지, 지금 어떤 맥락에 처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네트워크에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그저 5000만 명 중 한 명일 뿐이다. 네트워크 경제학은 사용자의 수를 세지, 사용자 자체를 보지 않는다. 이것이 네트워크 경제학의 사각(死角)지대다. 네트워크 외부성은 더 많은 사용자가 시장의 가치를 높이는 것을 설명하지만, 한 개인의 매 사용에서 가치가 달라지는 현상은 설명하지 못한다.
네트워크 외부성이 개인의 반복 사용에서 가치를 증가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은, 공급 측면의 변화와 결합하면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 네트워크와 플랫폼의 논리는 공급 측면에도 혁명을 일으켰다. 유튜브(YouTube)에 누구나 영상을 올릴 수 있고, 앱스토어에 누구나 앱을 출시할 수 있다. 진입 장벽이 사라졌다. 보스턴대 마셜 밴앨스틴(Marshall Van Alstyne)과 다트머스대 제프리 파커(Geoffrey Parker)는 이것을 두고 “기업의 안과 밖이 뒤집혔다”고 했다(the inversion of the firm). 기업은 더 이상 자신들만의 자산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모든 개인들의 창조성을 이용해서 혁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전통 기업이 당면했던 규모 경제의 한계를 결정적으로 극복했다는 주장이다.
결과는 디지털 공급의 폭발이다. 앱스토어에는 수백만 개의 앱이 있고, 유튜브에는 매분 500시간 분량의 영상이 올라온다. 당신의 이메일 수신함에는 읽지 않은 뉴스레터가 쌓여 간다. 생성형 AI가 콘텐츠를 자동으로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이 과잉생산은 더 심각해지고 있다. 그런데 수요 측면에서 이 폭발하는 공급을 흡수할 메커니즘이 없다. 네트워크 외부성은 사용자를 모으는 데는 성공했지만, 모인 사용자 각각에게 점점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소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생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AI 죽음의 함정
2025년 2월 4일 카카오는 챗GPT 개발사 오픈AI와 전략적 제휴를 발표했다. 오른쪽이 샘 올트먼 오픈AI CEO. 사진=조선DB기업의 입장에서 보자. AI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디지털 혁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자본 투자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한번 하고 몇 년 후에 다시 하는 과거 식의 자본 투자가 아니라, 천문학적인 투자를 지속적으로 계속 해야 한다. 그런데 기대하는 수요가 보이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약 18억 명이 생성형 AI를 사용하지만, 이 중 월(月) 20달러 이상의 사용료를 내는 유료 사용자는 3~5%에 불과하다. 인류의 대다수가 아직 돈을 낼 만한 효용가치를 생성형 AI에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AI 죽음의 함정(AI Death Trap)’이라고 부른다. AI의 공급 능력은 도입했지만 수요 창출 능력을 키우지 못할 때 빠지는 함정이다.
삼성이 37조원을 R&D에 쏟으면서 “2026년은 AI의 해”라고 선언하고, 800만 대의 기기에 AI 기능을 탑재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그 AI 기능이 사용자 개개인에게 쓸수록 더 가치 있는 경험을 만들어 주는가, 아니면 그저 더 많은 기능을 더한 것인가? 사용자들이 AI의 사용가치에 대해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것은 기업 입장에서 울며 겨자 먹기 식의 투자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네트워크의 경제학은 ‘더 많은 사용자’가 답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 사용자는 이미 충분히 확보했다. 문제는 그 사용자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가치를 끊임없이 만들어주는가 하는 것이다.
한계효용 체증의 조건-진짜 가치를 만드는 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개인에게 쓸수록 더 가치 있는 경험을 만들 수 있는가? 출발점은 가치가 창출되는 시점(時點)의 전환에 있다. 전통 경제에서 가치는 생산 시점에 결정되었다. 공장에서 완제품을 찍어 내고, 소비자는 이미 만들어진 것을 선택할 뿐이었다. 하지만 생성형 AI의 대답은 당신이 질문하는 그 순간에 생성된다. 넷플릭스의 추천은 당신이 접속하는 그 순간에 구성된다. 테슬라의 자율주행은 당신이 운전하는 그 순간에 판단을 내린다. 필자는 이것을 실행 시점(runtime)의 가치 창출이라고 부른다. 단순히 연산(computing)이 가치 창출에 관여한다는 말이 아니다. 연산이 일어나는 바로 그 시점에 가치 자체가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은 ‘동일한 재화(財貨)’를 전제한다. 피자 첫 조각과 다섯 번째 조각이 같은 피자일 때 성립한다. 하지만 매번 상호작용할 때마다 시스템이 당신을 더 잘 이해하고, 당신의 맥락에 맞게 변형된다면, 당신이 경험하는 것은 매번 ‘다른 재화’다. 물론 당신도 엄밀한 의미에서 어제의 당신과 다른 존재다. 우리는 똑같은 경험을 두 번 다시 할 수 없다.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당신에게 맞춰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재화라면, 한계효용 체감이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에게 더 정확한 가치를 전달하므로, 효용이 올라갈 수 있다.
학습, 네트워크, 맥락화
이것이 가능하려면 세 가지 메커니즘이 작동해야 한다.
첫째, 학습이다. 시스템이 사용할수록 당신을 더 잘 이해해야 한다. 스포티파이의 1000번째 시간이 첫 번째 시간보다 가치 있는 것은 단순히 당신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이 변화하는 당신의 취향을 학습했고 계속 맞춰 주기 때문이다. 아침에 듣는 음악, 조깅을 하면서 듣는 음악, 자기 전에 듣는 음악이 다르다. 스포티파이는 그걸 계속해서 배워 가고 있다. 재화 자체가 변한다. 이것은 기존 경제학이 전제하는 ‘동질적 재화’의 가정을 정면으로 깬다.
둘째, 네트워크다. 하지만 이것은 카츠-샤피로가 말한 정적인 네트워크 효과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통적 네트워크에서 가치는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사용자 수에서 나온다. 사용자는 교환 가능한 동질적 존재이고, 연결의 수가 늘어나면 가치가 올라간다. 생성적 시스템의 네트워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참여자 각각이 시스템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하고, 그 변화가 새로운 콘텐츠, 새로운 조합,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스포티파이에서 당신의 청취 행위는 단순한 소비가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에 새로운 데이터를 제공하고, 다른 사용자의 추천을 변형하고, 이전에 존재하지 않은 플레이리스트를 탄생시킨다. 참여자가 네트워크를 바꾸고, 바뀐 네트워크가 참여자를 바꾼다. 가치는 연결의 수가 아니라, 상호작용이 만들어 내는 변형과 생성에서 나온다.
셋째, 맥락화다. 시스템이 당신이 처한 바로 그 순간의 상황에 맞춰 반응한다. 구글 지도가 당신의 평소 출퇴근 경로에서 사고가 났다는 것을 감지하고, 당신이 묻기도 전에 10분 일찍 출발하라고 알려 준다. 최근 출장으로 시차 때문에 어젯밤 숙면을 취하지 못한 것을 알았다면, 아침에 무리한 운동을 추천하기보다 오랜만에 나온 해를 보면서 걸어서 출근하기를 추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런 정보를 ‘유통 기한이 있는 통찰(perishable insight)’이라고 부른다. 그 순간에만 가치가 있고, 맥락이 지나면 사라지는 정보다. 저장된 추천이나 고정된 프로필로는 만들 수 없다. ‘지금 여기’의 순간적 신호들이 동시에 모여야만 만들어지는 가치다.
‘생성적 외부성’
이 세 메커니즘은 각각 독립적으로 한계효용 체증(遞增)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셋이 결합하면 질적으로 다른 것이 생긴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한국의 한 대기업이 최근 고급 오디오 회사를 인수해서 어떻게 새로운 혁신 제품을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해 왔다. 물론 인수한 브랜드가 전 세계에 알려진 하이엔드 오디오 브랜드이고, 그것으로 얼마든지 제품의 희소성과 가치를 올릴 수 있다. 훌륭한 공급 측면의 혁신이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디지털 시대의 가치는 다른 곳에 있다. 아침에 당신을 깨우는 알람, 조깅할 때 흐르는 음악, 샤워 중 스마트 스피커에서 나오는 그날의 뉴스, 출근길에 이어폰으로 들려주는 오늘 회의에 필요한 문서 브리핑, 퇴근 후 거실에 흐르는 편안한 음악, 잠들기 전의 고요한 사운드. 하루 종일, 당신의 상황에 맞춰, 가장 필요한 소리를 당신의 귀에 전달하는 서비스다. 이것은 좋은 오디오 부품을 만드는 것과 다르고, 기기에 AI 기능을 싣는 것과도 다르고, 사용자가 많은 플랫폼을 만드는 것과도 다르다. 시스템이 당신의 하루를 학습하고, 수많은 사용자의 패턴에서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고,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실시간으로 구성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아무도 설계하지 않았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으며, 사전에 만들어 둘 수 없었던 가치다. 필자는 이것을 ‘생성적 외부성(generative externality)’이라고 부른다. 학습과 네트워크와 맥락화가 결합하여 실행 시점에 예측 불가능한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 네트워크 외부성이 ‘더 많은 사용자’에서 가치가 나오는 것이라면, 생성적 외부성은 ‘더 깊은 상호작용’에서 가치가 나오는 것이다.
한국 기업의 위기: 아무도 답을 찾지 못했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한국은 여전히 제조업 강국이지만, 이를 넘어서는 것이 필요할 때다. 사진=조선DB솔직하게 말해 보자. 필자가 보기에 현재 한국의 주요 기업 중 생성적 외부성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곳은 없다. 삼성과 LG, 현대차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기업이다. 하드웨어 품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이들의 전략은 여전히 포터의 가치 사슬 논리 위에 서 있다. 더 좋은 칩, 더 얇은 화면, 더 효율적인 배터리. 공급 측면의 혁신이다. 삼성 갤럭시를 1년 쓴 사람이 처음 개봉했을 때보다 더 깊은 가치를 경험하고 있는가? 현대 아이오닉을 3년 탄 사람에게 그 차가 자신의 운전 습관을 학습해서 처음보다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하고 있는가?
카카오와 네이버는 네트워크 외부성의 승자였다. 한국인 대부분이 쓰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카카오톡을 100번 쓴 사용자의 경험이 열 번 쓴 사용자보다 근본적으로 나은가? 네이버 검색이 당신이 오래 쓸수록 당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당신만을 위한 답을 제공하는가? 그보다는 더 많은 광고, 더 많은 서비스, 더 많은 탭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기존의 제품과 서비스에 단순히 AI 기능을 추가하고 있다고 해서 생성적 외부성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AI 기능 탑재’와 ‘사용할수록 개인에게 더 가치 있어지는 시스템’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전자(前者)는 공급 측면에 AI를 붙인 것이고, 후자(後者)는 수요 측면에서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수십조원의 AI 투자가 AI 죽음의 함정으로 빠진다. 그리고 그 죽음의 함정에 빠지면, 나오기가 힘들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 눈앞에
정리하자. 이제까지 한국경제를 만든 혁신 이론에는 두 가지 논리가 있었다. 하나는 공급의 논리다. 산업화 시대에는 솔로의 자본 축적, 로머의 지식경제, 포터의 경쟁 전략.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더 희소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다른 하나는 수요의 논리다. 디지털 플랫폼의 시대에 들어가면서, 카츠-샤피로의 네트워크 경제학. 더 많은 사용자를 모으는 것이 핵심이었다. 한국은 두 논리 모두에서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생성형 AI 시대의 혁신은 다른 차원의 도전이다. 더 많이, 더 싸게, 더 빨리, 그리고 더 잘 만드는 것도, 혹은 더 많은 사용자를 모으는 것도 아니다. 개인과의 상호작용에서 진짜 가치를 창출하는 것. 실행 시점에 학습하고 맥락화하여, 쓸수록 더 가치 있는 경험을 만드는 것이다.
한국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반도체를 만들고, 세계 최고의 스마트폰을 만들고, 세계 최고 수준으로 R&D에 투자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공급 측면의 우위다. 수요 측면에서 개인에게 진정한 한계효용 체증을 만들어 내는 기업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도 아직 없다. 실리콘밸리의 선두 기업들조차 아직 완전한 생성적 외부성을 실현하지 못했다.
필자는 이것이 오히려 기회라고 본다. 한국은 지금까지 남들이 만든 길을 따라가는 데 탁월했다. 솔로의 이론이 나오면 자본을 축적했고, 로머의 이론이 나오면 R&D에 투자했고, 네트워크 경제학이 나오면 플랫폼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따라갈 길이 아직 없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이다. 먼저 답을 찾는 자가 다음 시대를 정의할 것이다.
지난호에서 필자는 “낡은 지도로는 새로운 영토를 탐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새 지도의 핵심은 이것이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싸게, 더 잘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매번 더 나은 경험을 만드는 것이다. 단순히 더 많은 사용자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각 사용자에게 더 깊은 가치를 주는 것. 그 전환을 이루는 기업과 국가가 다음 시대의 승자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