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사기》 읽기 ⑩

《사기(史記)》 속 최고의 책사(策士)는 누구인가 (1)

뜻을 이루고 제때에 물러난 범여가 일급 책사

  •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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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안을 제시했지만 때를 몰라 죽임을 당한 ‘꾀주머니’ 조조
⊙ 유방에게 경포의 난을 진압할 계책 올린 설공
⊙ 한신에게 유방·항우와 천하를 나누어가지라고 권한 괴통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범여
예부터 임금에게는 세 부류의 신하가 있기 마련이었다. 스승과 같은 신하, 벗과 같은 신하, 그리고 노예와 같은 신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임금은 신하들에게 노예 같은 역할을 주문했고 스승이나 벗과 같은 신하는 부담스러워했다. 이는 지금도 국가 조직뿐만 아니라 기업 조직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런 리더의 조직은 성공할 수가 없다.
 
  반대로 스승과 벗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신하들을 위한 공간을 열어주는 주군을 일러 “사우(師友)의 도리를 아는 임금”이라고 불렀다. 그중에서도 곁에 스승과 같은 신하[師臣]를 둘 줄 아는 임금이야말로 진실로 겸손한 임금이기에 좋은 인재들이 자연스럽게 몰려들었다.
 
  이 사신(師臣)이 다름 아닌 책사(策士)다. 우리는 이를 술가(術家)라고도 부르고 모사(謀士)라고도 부른다. 지위는 신하지만 생각하는 머리는 임금 위에 있어야 했다. 또한 정도(正道)보다는 임기응변, 즉 권도(權道)를 따랐다. 그래서 때때로 정도를 고수하는 신하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모사나 책사라고 할 때 부정적 뉘앙스가 따라오는 것은 이 때문인지 모른다. 모신(謀臣)이라고도 했고 제갈량처럼 군사(軍師)라고도 했는데 모두 책사에 속한다.
 
  그래서 최고 지도자는 예나 지금이나 정도를 기반으로 하되 상황에 따라, 즉 때에 따라 권도를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가 말한 시중(時中)이 그것이다.
 
 
  ‘꾀주머니’ 저리자
 
  가장 낮은 단계의 책사는 의자(議者)다. 고대 중국 역사서를 보면 논자(論者)와 의자(議者)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논(論)은 지나간 일을 말하는 것이고 의(議)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이다. 따라서 논자의 전형은 간관(諫官)이고 의자는 조선식으로 말하자면 의정부에서 정사에 관한 의견을 낼 때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책(策)은 그래서 매우 중요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시국 타개와 관련해 냈던 시험문제가 책문(策問)이고 이에 대한 답이 대책(對策)이었다. 이는 조선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책(策)에는 당시 임금의 현안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마천은 《사기》 〈열전〉에서 딱 두 사람에 대해 지낭(智囊), 즉 ‘꾀주머니’라는 별칭을 붙였다. 지낭은 의자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이고 국가 차원의 책사, 즉 술가보다는 낮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은 저리자(樗里子)고 또 한 사람은 조조(鼂錯)다. 먼저 저리자부터 알아보자.
 
  “저리자는 이름이 질(疾)이고 진(秦)나라 혜왕(惠王)의 동생인데 혜왕과는 어머니가 다르다. 어머니는 한(韓)나라 여자다. 저리자는 말재간이 뛰어나고[滑稽] 꾀[智]가 많아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꾀주머니[智囊]라고 불렀다.”
 

  이를 보면 지낭이라는 말은 사마천이 만든 용어가 아니라 원래부터 있던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저리자 열전〉에는 저리자의 군사적 승리만을 기록하였을 뿐 ‘꾀주머니’로서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대목은 나오지 않는다.
 
  이번에는 또 다른 한 사람 조조를 알아볼 차례다. 조조는 한(漢)나라 문제와 경제(景帝) 때 사람이다. 〈조조 열전〉이다.
 
 
  ‘사람됨이 준엄하고 곧으며 각박함이 심했다’
 
조조
  〈조(錯)는 사람됨이 준엄하고 곧으며 각박함이 심하였다. 효문제(孝文帝) 때 천하에 《상서(尙書)》를 제대로 연구한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제남(濟南)에 복생(伏生)이란 사람이 있어 진(秦)나라 박사(博士) 출신으로 《상서》에 조예가 깊었으나 나이가 90여 살로 너무 연로하여 조정에 부를 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서 마침내 태상에게 조서를 내려 사람을 보내 전수받아 오게 하였다. 태상은 조조에게 복생이 있는 곳으로 가서 《상서》를 전수받도록 하였다. 마치고 돌아와 글을 올려 정사에 필요한 것들을 그 배운 바를 바탕으로 설명하였다. 조서를 내려 그를 태자 사인(舍人), 문대부(門大夫), 가령(家令)으로 삼았다. 조조는 뛰어난 언변으로 태자에게 총애를 얻었으며 태자 가(家) 사람들은 그를 ‘꾀주머니[智囊]’라고 불렀다.〉
 
  조조는 경제가 태자로 있을 때부터 문제에게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제후들(의 봉지)을 마땅히 깎아야 한다는 것과 법령 중에서 개정해야 할 것들에 관해 건의했다. 올린 글이 수십 편이었는데 문제는 비록 그의 말을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재주를 높이 여겨 승진시켜 중대부(中大夫)로 삼았다. 문제는 조조가 다른 대신들은 안중에 두지 않고 오직 문제(효문제)와 경제의 총애를 얻는 데만 전념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당시 승상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그의 처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는 책사로서 일류라고 하기 어려운 모습이기도 하다. 다시 〈조조 열전〉을 보자.
 
 
  時中을 몰랐던 모사 조조
 
  〈조조는 승진하여 어사대부가 되자 제후들 중에 죄나 허물이 있는 자는 그 봉토를 줄이고 변방에 있는 군(郡)들은 몰수할 것을 주청하였다. 상주문이 올라가자 상은 공경(公卿), 열후(列侯), 종실들로 하여금 모여서 의견을 내게 하니 감히 누구도 반대하지 못하였고 오직 두영(竇嬰)만이 조조와 다투었는데 이로 인해 두영과 조조 사이에 틈이 생겨났다.
 
  이 사안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조조의 아버지가 알아차렸다. 조조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듣고서 영천(潁川)에서 올라와 조조에게 일러 말했다.
 
  “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네가 정권을 장악해 제후들(의 봉지)을 깎아내고 남들의 혈육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들끓듯이 너를 원망하는데 어째서 그리 하느냐?”
 
  조조가 말했다.
 
  “정말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천자는 존귀해질 수 없고 종묘는 불안하게 됩니다.”
 
  조조의 아버지가 말했다.
 
  “유씨는 편안해지겠지만 조씨는 위태로워질 것이니 나는 너를 떠나 (흙으로) 돌아가야겠다!”
 
  드디어 약을 먹고 죽으면서 말했다.
 
  “나는 차마 재앙이 내 몸에까지 미치는 것을 볼 수가 없도다.”
 
  조조의 아버지가 자살한 지 10여 일 후에 오초(吳楚) 7개국이 함께 반란을 일으키면서 조조의 주살을 명분으로 삼았다. 두영과 원앙이 나아와 유세하니 상은 조조에게 조복을 입히고 동쪽 시장에서 그의 목을 베게 하였다.〉

 
  조조의 계책 자체는 방향이 옳았다. 훗날 이 문제는 무제 때 주보언(主父偃)의 건의를 받아들여 추은령(推恩令)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된다. 시간을 갖고서 제후왕들에게 자제들에게 분할 상속을 하게 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제후국들의 힘을 약화시킨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조는 ‘때’를 몰랐으니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 비명횡사한 경우라 하겠다. 시중을 몰랐던 모사였다고 할 수 있다.
 
 
  설공(薛公)의 삼계(三計)
 
경포
  고대 중국의 책사들은 자기 계책을 올릴 때 흔히 상중하 삼계(三計) 혹은 삼책(三策)을 말하곤 하였다. 먼저 대국(大局)을 읽고 상대의 역량을 정확히 평가한 뒤에 이쪽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 세 가지를 제시하는 방식이다. 〈경포 열전〉에는 설공(薛公)이 유방에게 반란을 일으킨 경포(黥布)에 대처하는 세 가지 계책을 제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형적인 책사의 유세 방식이라 할 것이다.
 
  〈상이 여러 장수를 불러서 물었다.
 
  “포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모두 말했다.
 
  “군대를 일으켜 그 애송이 따위를 구덩이에 파묻으면 될 뿐입니다. 달리 무엇을 하겠습니까?”
 
  여음후(汝陰侯) 등공(滕公)이 자신의 객(客)으로 있는 옛 초(楚)나라 영윤(令尹·재상)을 불러 물어보니, 그가 말했다.
 
  “포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참으로 당연합니다.”
 
  등공이 말했다.
 
  “상께서는 땅을 떼어 그를 봉해주었고 작위를 주어 그를 귀하게 해주었으며 왕으로 삼아 만승의 군주가 되게 해주었는데, 그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어째서인가?”
 
  영윤이 말했다.
 
  “(한나라는) 지난해에 팽월을 죽였고 그 전해에는 또 한신을 죽였는데, 그 세 사람은 모두 공로가 똑같아서 한 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포는) 스스로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의심했을 터이니, 그래서 반란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등공은 이 말을 듣고서 상에게 가서 말했다.
 
  “신의 객 중에 옛날에 초나라 영윤이던 설공이 있는데, 그 사람은 계책을 가진 자이니 그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상은 이에 설공을 만나 보고서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포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만일 포가 최고의 계책[上計]을 쓰게 되면 산동은 한나라 소유가 아니게 될 것이고, 중간의 계책[中計]을 쓰게 되면 승부는 헤아리기가 힘들 것이며, 하급의 계책[下計]을 쓰게 되면 폐하께서는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서 누워계셔도 될 것입니다.”
 
  상이 말했다.
 
  “최상의 계책이란 무엇인가?”
 
  영윤이 대답했다.
 
  “(만약에 포가) 동쪽으로 오(吳)나라를 차지하고서 서쪽으로 초나라를 차지한 다음에 제(齊)나라를 삼키고 노(魯)나라를 차지하고서는 연(燕)나라와 조(趙)나라에 격문을 돌려서 그곳들을 굳게 지킨다면, 산동은 한(漢)나라의 소유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중간의 계책이란 무엇인가?”
 
  “동쪽으로 오나라를 차지하고 서쪽으로 초나라를 차지한 다음에 한(韓)나라를 삼키고 위(魏)나라를 차지하고서는 오창(敖倉)의 식량을 점거하고 성고(成皐)의 험지를 막는다면, 승패가 어찌 될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급의 계책이란 무엇인가?”
 
  “동쪽으로 오나라를 차지하고 서쪽으로 하채(下蔡)를 차지한 다음에 군수품을 월(越)나라에 두고 자신은 장사(長沙)로 돌아간다면, 폐하께서는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서 누워계실 수 있고 한나라에는 아무런 일도 없을 것입니다.”
 
  상이 말했다.
 
  “그는 어떤 계책을 쓸 것 같은가?”
 
  영윤이 말했다.
 
  “하급의 계책을 쓸 것입니다.”
 
  상이 말했다.
 
  “어찌하여 최상의 계책을 버리고 하급의 계책을 쓴단 말인가?”
 
  영윤이 말했다.
 
  “포는 옛날 여산(驪山)의 무리로 만승(萬乘)의 군주가 되었지만, 이는 다 자기 한 몸을 위해서였지 훗날을 생각하며 백성과 만세(萬世)를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급의 계책을 쓸 것입니다.”
 
  상이 말했다.
 
  “좋도다.”
 
  설공을 1000호에 봉해주고 황자(皇子) 유장(劉長)을 회남왕으로 삼았다. 상이 드디어 군대를 동원하여 스스로 병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포를 쳤다.〉

 
 
  한신의 책사 괴통
 
한신
  괴통(蒯通) 또한 계책이 풍부한 책사였다. 진승(陳勝)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武臣)을 보내 조지(趙地)를 차지하자 괴통이 나아가 창양령(蒼陽令)을 설득해 항복하게 하는 한편 무신을 설득해 맞이하게 했다. 무신은 그 계책을 받아들여 싸우지 않고도 연조(燕趙)의 30여 개 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후 한신을 찾아온 괴통은 한신을 설득하여 제나라를 무력으로 점령할 것을 건의하여 관철시켰다. 이러곤 천하 삼분지계(三分之計)로 유방, 항우와 함께 천하를 쇠솥의 발처럼 나눠서 왕으로 설 것을 유세하였다. 유명한 글이다. 〈회음후 열전〉이다.
 
  〈“천하가 처음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영웅과 호걸들이 스스로 제후나 왕이라고 칭하고 한 번 크게 소리치자 천하의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물고기 비늘처럼 서로 겹칠 정도였으며 불길이나 바람처럼 일어났습니다. 이런 때를 맞아 근심거리라고는 오직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劉·유방)와 항(項·항우)이 서로 갈라져 다투게 되자 사람들의 간과 쓸개가 땅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백성들 중에) 아버지와 아들의 해골이 들판에 나뒹구는 일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초나라 사람 항왕은 팽성(彭城)에서 일어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싸우고 달아나는 적을 쫓아 형양(滎陽)에 이르렀으며 승세를 타고 자리를 말아 올리듯 여러 곳을 차지하니 그 위엄이 천하를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군대가 경(京)과 색(索) 사이에서 곤경에 빠지고 서산(西山)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지가 지금까지 3년이나 됩니다.
 
  한나라 왕은 수십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공(鞏)과 낙(洛)에서 험준한 산하를 방패로 삼아 하루에도 여러 차례 싸웠지만 한 자 한 치의 공로도 세우지 못하였고 패배하여 달아나도 구원하여 주는 사람이 없어 형양에서 패하고 성고에서 가슴을 다쳐 드디어 군대를 돌려 원(宛)과 섭(葉) 사이로 달아났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지혜로운 자와 용감한 자[智勇·지용]가 다 함께 괴로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무릇 날카로운 기세는 험준한 요새에서 꺾이고 양식은 창고에서 바닥나고 백성들은 지칠 대로 지쳐 의지할 곳조차 없습니다.
 
  신이 헤아려볼 때 그 형세상 천하의 빼어나고 뛰어난 이가 아니고서는 참으로 천하의 재앙을 그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때를 맞아 두 임금의 운명은 족하께 달려 있습니다. 족하께서 한나라를 위하면 한이 이길 것이요 초나라와 함께하면 초가 이길 것입니다.
 
  신이 바라건대 속마음을 다 터놓고 간과 쓸개를 드러내고 어리석은 계책을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족하께서 그것을 제대로 쓸 수 없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족하를 위한 계책으로는 양쪽을 다 이롭게 하면서 두 임금을 모두 존속시켜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큰 쇠솥의 발[鼎足]처럼 서 있게 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 되면 그 형세상으로 누구도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한신이 말했다.
 
  “한나라 왕이 나를 대우해 주는 것이 두터워 자기 수레로 나를 태워주고 자기 옷을 나에게 입혀주며 자기가 먹을 것을 나에게 먹여주었습니다. 내가 듣건대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남의 근심을 제 몸에 지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남의 걱정을 제 마음에 품으며 남의 음식을 먹는 자는 그의 일을 위하여 죽는다고 하였는데 내 어찌 이익을 바라고서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소?”〉

 

  괴통은 토사구팽(兔死狗烹)까지 언급하며 한신을 압박했지만 한신은 유비에 대한 의리를 고수하며 괴통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괴통은 미친 사람처럼 행세하며 숨어 지냈다. 한신이 죽임을 당한 뒤 반란을 사주했다고 하여 체포당했지만 다행히 풀려났다. 이후 조참(曹參)이 제상(齊相)이 되었을 때 객(客)으로 불렀다.
 
 
  토사구팽을 면한 범여
 
구천
  범여(范蠡)는 초(楚)나라 완(宛) 사람인데 완령(宛令) 문종(文種)의 친구로 그를 따라 월나라로 와 월왕 윤상(允常)을 섬겼다. 구천(句踐)이 이어 등극하자 그의 모신이 되었다. 월나라가 오나라에 패배하자 문종은 나라를 지키고 그는 오나라에 화해를 요청하여 구천을 따라 3년 동안 오나라에서 신복(臣僕)으로 있었다. 귀국해서는 문종과 함께 부국강병에 최선을 다했다.
 
  애초에 구천이 서둘러 오나라에 보복 공격을 하려 하자 범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만류하였다.
 
  “안 됩니다. 신이 듣건대 군대는 흉기이며 전쟁은 다움을 거스르는 일[逆德·역덕]이니 싸움이란 일 중에서 맨 말단입니다. 음모로 다움을 거스르고 흉기를 즐겨 사용하여 자기 몸을 말단에다 들이대는 것[試·시]은 상제께서 금하는 것으로 실행에 옮긴다 한들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월왕이 말했다.
 
  “나는 이미 결심이 섰다.”
 
  그러나 월왕은 대패하여 군사 5000을 거느리고 회계산으로 들어가 숨어 지냈다. 먼 훗날 월왕은 범여와 문종의 보필을 받아 패자(霸者)에 이른다. 이때 범여는 뛰어난 처신을 보인다. 흔히 일급 책사들이 보여주는 공수신퇴(功遂身退), 공로를 이루었으면 깨끗이 물러나는 처신을 보인 것이다. 〈월왕 구천 세가〉다.
 
  〈범여는 드디어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서 문종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나는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은 창고에 들어가고 교활한 토끼가 다 잡히면 사냥개는 삶아지는 법이오[兔死狗烹 ·토사구팽]. 월왕이라는 사람은 목은 길고 입은 새처럼 뾰족하여 근심과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할 수 없소. 그대는 어찌하여 (월나라를) 떠나지 않소?”
 
  문종은 편지를 읽고서 병을 핑계로 조회하지 않았다. 사람들 중에 누가 문종이 장차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참소하니 월나라 왕은 마침내 문종에게 검을 내리며 말했다.
 
  “그대는 과인에게 오나라를 칠 수 있는 일곱 가지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과인은 그중 세 가지만 써서 오나라를 물리쳤다. 나머지 넷은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선왕을 따라가서 그것을 시험하도록 하라.”
 
  문종은 드디어 자살하였다.
 
  범여는 큰 명성 아래서는 오래 머물기 어렵다고 생각하였고 또 구천은 사람됨이 환난은 함께할 수 있어도 편안함은 함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서 구천에게 사직하겠다는 글을 썼다.
 
  “신이 듣건대 군주가 근심이 있으면 신하는 수고로움을 떠맡고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군왕께서 회계에서 치욕을 당하셨는데도 신이 죽지 않은 것은 이 복수를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설욕하였으니 신은 회계에서 치욕을 당한 죄를 청합니다.”
 
  구천이 말했다.
 
  “고(孤·제후의 자칭)는 장차 그대와 나라를 나누어 가지려 한다. 받지 않으면 장차 그대를 주벌할 것이다.”
 
  범여가 말했다.
 
  “군주는 명령을 행하고 신하는 자기 뜻을 행합니다.”
 
  마침내 값싼 보물과 구슬 등을 꾸려 가까운 자기 무리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구천은 회계산을 범여의 봉읍(奉邑)으로 삼겠다고 공표하였다.〉

 
  구천을 떠난 범여는 〈화식 열전〉에서 언급될 만큼 놀라운 재산 증식의 비법을 실천해 보였다. 세상의 이치와 형세를 미리 알지 않고서는 이루기 어려운 업적을 다 이루어낸 일급 책사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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