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주장을 앞세우기보다 상대방 이야기 진지하게 듣는 사람’ 평가 받아
⊙ 2차 세계대전 당시 무기대여법 호주 담당 책임자로 공직에 발 들여놓아
⊙ 스테티니어스 국무장관 추천으로 주중 경제공사로 부임, 대리대사 지내
⊙ 마셜 특사 보좌… 동굴에서 마오쩌둥과 숙식 같이 하면서 설득했으나 실패
⊙ 美 의회 증언에서 트루먼 민주당 정권의 對中 정책 실패 비판
愼鏞碩
1941년생. 서울대 농생명대 화학과 졸업, 서울대 신문대학원 수료,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사 과정 수료 / 《조선일보》 파리특파원·국제부장·사회부장·논설위원, 한국인권재단 초대 이사장, 인천 아시안게임 유치위원장, 現 월터 S. 로버트슨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국민훈장 동백장, 체육훈장 맹호장,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 《특권이 통하지 않는 사회》 《현장에서 본 프랑스 교육》 《영국사》(역서), 《미국사》(역서), 《프랑스사》(역서)
[편집자 주]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1954년 11월 18일 발효)은 지난 72년간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주한미군이 주둔한 덕분에 가난한 나라 한국은 안보에 대한 부담을 덜고 경제발전에 매진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아니었다면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선진국 반열에 오르는 기적은 없었을 것이다. 휴전을 앞두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미국으로부터 상호방위조약을 받아내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에 대해서는 고(故)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전 《문화일보》 사장)의 《한미동맹의 탄생 비화》(2020년)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졌다. 《월간조선》도 이와 관련해 많은 보도를 했다.
하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 당시 미국 측 파트너였던 월터 S. 로버트슨(1893~1970년) 국무부 극동차관보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고, 주중(駐中)공사로 중국 공산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공산주의자들의 실체와 위협을 체험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을 거듭하면서 신생 조국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의 애국심과 인품, 식견에 공감했다. 로버트슨 차관보가 아니었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없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한미동맹의 산파역’이었음에도 로버트슨 차관보가 잊히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신용석(愼鏞碩·84) 전 한국인권재단 이사장(전 《조선일보》 파리특파원)은 2023년 ‘월터 S. 로버트슨 기념사업회’(이사장 신승일)를 발족해 로버트슨 차관보 기념사업에 나섰다. 기념사업회는 2024년 8월 한서영 연구원을 로버트슨 차관보의 고향인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로 보내, 관련 사료(史料)들을 발굴해 왔다. 신용석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이를 바탕으로 로버트슨 차관보의 생애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을 다룬 200자 원고지 200매 분량의 글을 《월간조선》에 보내왔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미 동맹의 기틀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2주년을 맞아 《월간조선》은 이 글을 2회로 나누어 게재한다. 특히 로버트슨 차관보의 생애에 대한 부분은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 2차 세계대전 당시 무기대여법 호주 담당 책임자로 공직에 발 들여놓아
⊙ 스테티니어스 국무장관 추천으로 주중 경제공사로 부임, 대리대사 지내
⊙ 마셜 특사 보좌… 동굴에서 마오쩌둥과 숙식 같이 하면서 설득했으나 실패
⊙ 美 의회 증언에서 트루먼 민주당 정권의 對中 정책 실패 비판
愼鏞碩
1941년생. 서울대 농생명대 화학과 졸업, 서울대 신문대학원 수료,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사 과정 수료 / 《조선일보》 파리특파원·국제부장·사회부장·논설위원, 한국인권재단 초대 이사장, 인천 아시안게임 유치위원장, 現 월터 S. 로버트슨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국민훈장 동백장, 체육훈장 맹호장,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 《특권이 통하지 않는 사회》 《현장에서 본 프랑스 교육》 《영국사》(역서), 《미국사》(역서), 《프랑스사》(역서)
[편집자 주]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1954년 11월 18일 발효)은 지난 72년간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주한미군이 주둔한 덕분에 가난한 나라 한국은 안보에 대한 부담을 덜고 경제발전에 매진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아니었다면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선진국 반열에 오르는 기적은 없었을 것이다. 휴전을 앞두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미국으로부터 상호방위조약을 받아내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에 대해서는 고(故)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전 《문화일보》 사장)의 《한미동맹의 탄생 비화》(2020년)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졌다. 《월간조선》도 이와 관련해 많은 보도를 했다.
하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 당시 미국 측 파트너였던 월터 S. 로버트슨(1893~1970년) 국무부 극동차관보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고, 주중(駐中)공사로 중국 공산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공산주의자들의 실체와 위협을 체험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을 거듭하면서 신생 조국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의 애국심과 인품, 식견에 공감했다. 로버트슨 차관보가 아니었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없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한미동맹의 산파역’이었음에도 로버트슨 차관보가 잊히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신용석(愼鏞碩·84) 전 한국인권재단 이사장(전 《조선일보》 파리특파원)은 2023년 ‘월터 S. 로버트슨 기념사업회’(이사장 신승일)를 발족해 로버트슨 차관보 기념사업에 나섰다. 기념사업회는 2024년 8월 한서영 연구원을 로버트슨 차관보의 고향인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로 보내, 관련 사료(史料)들을 발굴해 왔다. 신용석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이를 바탕으로 로버트슨 차관보의 생애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을 다룬 200자 원고지 200매 분량의 글을 《월간조선》에 보내왔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미 동맹의 기틀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2주년을 맞아 《월간조선》은 이 글을 2회로 나누어 게재한다. 특히 로버트슨 차관보의 생애에 대한 부분은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1865년 4월 9일 버지니아의 애퍼매톡스 법원 청사에서 남군의 로버트 리 장군이 북군의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함으로써 4년간에 걸친 전쟁이 끝났다. 북군의 그랜트 장군은 항복한 남군 병사들에게 식량을 긴급 제공하고 장교들에게는 군마(軍馬)와 보조 무기를 소지하고 귀향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승자의 관용을 보여주었다.
초대(初代)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이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먼로, 윌리엄 해리슨 등 버지니아 출신이 연달아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미국에서는 ‘버지니아 왕조’라는 말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따라서 1607년 런던회사가 신대륙에 버지니아 식민지를 건립하여 영국인들을 정착시키고 1619년에 버지니아 의회가 신대륙 최초의 입법기관이 되었다. 이렇듯 광대한 신대륙에 분열 위기의 신생 국가를 통합의 길로 인도한 버지니아인들의 자부심과 사명감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버지니아 명문 집안에서 출생
![]() |
| 지난 9월 2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월터 S. 로버트슨 학술대회’가 열렸다. 사진=배진영 |
신대륙에 처음 정착한 로버트슨의 조상은 1693년 영국 런던의 성공회 주교에 의해 버지니아 브리스톨 파리시 지역의 교구 목사로 임명된 조지 로버트슨 목사였다. 1739년 별세할 때까지 버지니아에서 사목(司牧) 활동에 전념한 로버트슨 목사의 자손들 중에는 버지니아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 많다. 그의 증손자이며 유명한 의사였던 윌리엄 로버트슨은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필르먼 홀컴브 소령의 딸 마사 마리아 홀컴브와 결혼해 독립전쟁 영웅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로버트슨 가문의 족보에 필르먼 홀컴브는 버지니아의 유서 깊은 햄든-시드니대학을 중퇴하고 독립전쟁 말기에 기병대에 입대하여 길퍼드 법원 전투에서 용맹스럽게 싸워 당시 버지니아 주지사였던 토머스 제퍼슨의 훈장을 받고 1781년 10월 요크타운의 영국군이 항복하는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30여 년의 복무 기간 동안 프랑스 라파예트 장군을 위시하여 유수한 장성들과 교분을 두터이 했다. 예편 후에는 버지니아 기병대 사령관으로 봉사하면서 1824년 라파예트 장군이 리치먼드를 방문했을 때 장중하고 화려한 무도회를 주최하여 미국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준 은덕을 추앙했다.
양친 잃은 후 학업 중단
버지니아의 명문 집안에 당시로서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양친의 셋째 아들로 19세기 말인 1893년에 태어난 월터 로버트슨의 유년기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웠다. 전통적으로 현금 수입 농작물의 대표 격인 담뱃잎 재배가 버지니아의 주산물이었으므로 로버트슨 일가의 농원에서도 담뱃잎을 위시하여 여러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당시는 미국에서 제2차 산업혁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을 때였다. 농업경제가 주축을 이뤘던 미국에서 제조업과 교통수단,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 발전이 획기적으로 진척된 제2차 산업혁명 시기를 학자들은 1870년부터 1914년 사이로 보는데, 월터 로버트슨은 제2차 산업혁명의 전성기에 탄생한 셈이다.
전형적인 농촌에도 증기기관이 도입되고 전보가 오가며 면화에서 솜과 씨를 구분해 주는 조면기(繰綿機)가 등장했다. 각지에 공장이 들어서 대량 생산이 시작되고 전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때에 유소년기를 보낸 로버트슨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은 고향 블랙스톤에서 이수했다. 호지 군사사관학교에서 대학 준비 과정을 보내고 있을 때 로버트슨의 부친이 향년 53세로 타계(他界)했다. 15세의 소년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로버트슨은 버지니아의 옛 수도인 윌리엄스버그에 위치한 명문 윌리엄 앤 메리 대학에 입학했다. 1693년 개교한 미국에서는 두 번째, 영어 사용권 국가에서는 아홉 번째로 오래된 역사를 지닌 대학에서 학업에 정진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이어서 세상을 떠났다. 1910년 어머니까지 타계했을 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2년 사이에 양친을 모두 잃은 청년 로버트슨은 윌리엄 앤 메리 대학을 떠나 향리 블랙스톤으로 귀향했다. 그는 조실부모한 상황에서 급변하는 제2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응하면서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했다. 당시 상황과 남아 있는 개인자료, 그리고 그가 최종적으로 택한 진로를 보면 청년 로버트슨의 고뇌와 번민, 그리고 필연일 수밖에 없었던 결단을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 결단까지 그가 느꼈을 허망과 좌절, 그리고 기대와 희망이 교차하는 과정을 청년 월터 로버트슨은 힘들게 극복했고 다행히 행운의 여신은 그의 옆을 지켜주고 있었다.
삶의 지침이 된 삼촌의 편지
블랙스톤에서 로버트슨은 가까운 인척들과 친지들에게 자문과 도움을 청했다. 일단 2년 남은 대학 과정은 포기하고 직업 전선에 나가 자수성가를 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한 후 봉착한 첫 번째 난관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는 원천적인 것이었다. 이 시점에 1912년 6월 5일 노퍽에서 로버트슨비료회사를 경영하고 있던 삼촌에게서 받은 서신은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다소 장문(長文)의 서신을 가감 없이 전문(全文)을 소개하는 이유는 로버트슨 가문의 품격, 당시 교양 있는 미국 시민들의 인생관과 가치관, 방황할 수도 있는 조카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하는 월터에게.
너를 처음 본 순간, 그리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너에 대해 줄곧 많이 생각해 왔다. 지금 나는 내 입장을 너에게 공정하게 밝히는 편지를 쓰려 한다. 이것이 최선이고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너에게 도움이 될 편지를 쓰고 싶고 네가 이해할 수만 있다면 내가 너에게 하는 모든 일, 그리고 너와 관련해서 내가 했던 모든 말,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모든 말은 너를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제 너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닌 나이가 되었다. 나이로 보아도 어른이고 키를 보아도 어른이니까 실제로 어른이 되어야 한다. 인생의 모든 것이 네 앞에 펼쳐져 있고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 너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충족해야 할 조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조건들이 충족되면 목표는 네 손안에 있다. 이제 네가 무엇을 이룰지를 진지하게 생각할 때다.
학업을 계속하여 교육을 받는 것이 너의 생각이라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 일을 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래야 대학에 다시 돌아갔을 때 녹슬거나 전공과 동떨어진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며, 교사로 취업하면 한 달에 50달러에서 75달러까지 벌 수 있고, 돈을 모으면 몇 년 안에 대학에 다시 돌아가 전공을 완전히 이수할 수 있다. 교육을 받고 싶고 내면에 남자다운 면이 있다면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겠지만 교육을 받았지만 남자다운 면이 없다면 교육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전적으로 스스로 최선의 결정을 해야 할 시점이다. 다른 청년들도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고 너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더 이상 너를 도울 수 없고, 너는 2년 동안 대학을 다녔으니까 학업을 계속하든가 사업을 하든가 이제는 결단을 해야 된다고 믿는다. 내가 그동안 너에게 많은 것을 해주지는 못했지만, 내가 해온 모든 일과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너를 위한 것이라는 것은 말하고 싶다.
만약 네가 사업을 하기로 결정한다면 리치먼드로 갔으면 좋겠고 아니면 댄빌이나 린치버그로 가라고 조언하고 싶다. 노퍽은 너에게 적합한 곳이 아니고, 너의 형 에드워드가 와 있기 때문에 이곳에 오는 것은 너를 위해서도 반대한다. 너는 리치먼드로 갈 수 있고, 네가 지닌 정신으로 임무를 다 한다면 네가 소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월터야. 네가 먼저 선하고 강직하고 정직하고 올바른 기독교도임을 보고 싶다. 그렇게 되면 다른 모든 것이 네 앞에 놓이게 되고 네가 상황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을 대할 때는 솔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정직하게 행동하고 절대로 변명을 해서는 안 된다. 변명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하는 사람은 실패자들이다.
네 앞에는 네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갈 수 있는 인생이 펼쳐져 있다. 세상에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보다 더 진실된 말은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라. 모든 사람에게 정직하고 솔직하고 진실하게 대한다면 세상도 너를 똑같이 대할 것이다. 그러나 지름길을 택하고 속임수를 쓰고 진실을 덮어두면 인생 여정의 모든 전환점에서 미로에 갇히게 된다. 프리먼 삼촌 댁에서 2주 정도 지내고 그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모든 소년은 ‘자기 밭을 일궈야’ 하고 너도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리치먼드에서 직장을 구해보는 데 나도 노력하겠지만 트레비스&딜라드(Travis and Dillard)에 편지를 써서 직장 관계를 물어보고 네가 직장을 얻게 되면 그 자리를 맡는 데 필요한 비용을 보내주겠다. 이것이 내가 앞으로 너에게 약속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남자답게 살아라. 남자답게 삶의 짐을 짊어져라. 그리스도께 나아가 네 고민을 털어놓아라.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어려움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극복하고 피하지 말아라. 산에 오르되 우회하려 하지 마라.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피하지 마라. 이렇게 하면 너는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너를 자랑스러워할 것이고 너는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너를 창조하시고 너에게 밝은 정신과 예의 바른 태도, 그리고 튼튼한 몸을 주신 사명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 너를 사랑하는 삼촌으로부터.〉
1912년 6월 5일 노퍽 우체국 접수일 부인이 찍힌 삼촌으로부터 받은 장문의 편지를 청년 로버트슨은 읽고 또 읽었을 것이다. 현재 버지니아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월터 로버트슨 자료 중 유독 이 서신만이 당시 우편 봉투와 함께 세 장의 노퍽 비료회사 서한지에 타자기로 쓰인 원문 그대로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버지니아 명문 집안의 후예로 담배농장을 소유했던 부모가 일찍 타계하자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느냐, 직업 전선으로 나서느냐의 갈림길에 있던 월터는 리치먼드로 가서 취업하기로 결단한다.
금융인이 되다
1912년은 미국에서 1870년대부터 시작된 제2차 산업혁명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해에 버지니아 출신 우드로 월슨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일본의 도쿄(東京)시장은 수도 워싱턴DC에 벚나무 묘목 3000그루를 선사해 우정을 표시했다. 세계 최대의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대서양에서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하는 비극도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청(淸)나라가 종막을 고하고 중화민국이 세워졌다. 젊은 로버트슨은 제2차 산업혁명의 절정기에 리치먼드 같은 도시에서 금융인으로서의 경력을 차분하게 밟기 시작했다.
리치먼드는 버지니아주의 수도라는 상징성이 있으며 연방수도 워싱턴DC와도 비교적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종 금융기관이 성업 중이었다. 로버트슨은 1912년 후반기에 이 도시에 도착했다. 삼촌이 서신에서 언급했던 직업 소개회사 트레비스&딜라드를 통한 것인지, 아니면 삼촌이 개인적으로 소개한 회사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금융 관계 회사에 취업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리치먼드 정착 초기에 미국은행기구(American Institute of Banking)라는 기관에서 연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금융기관의 신입사원으로 은행업에 대한 기초교육을 연수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만 20세에 금융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취업한 월터는 성실히 근무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폭넓게 독서했다. 직장일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후 10년도 안된 시기인 29세 때 리치먼드의 유수한 금융회사의 간부가 된 것만 보아도 능력과 인품이 특출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금융인으로서의 능력과 사회인으로의 인품은 남다른 배움의 자세와 성실한 독서를 통해서 연마되었을 것이다. 워싱턴에서 공직을 맡은 후의 대화나 연설문을 살펴보면 평상시 흔히 쓰지 않는 어휘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면서 고전(古典)과 역사를 적시에 인용하는데, 리치먼드에서 20대 때 한 다방면의 독서가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비행학교에서 복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대량 생산의 산업국가로 성장한 미국도 유럽에서 확대되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충돌에서 초연할 수 없었다. 윌슨 대통령은 전쟁 초기 고립주의를 택했으나 1915년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독일 해군의 어뢰에 침몰당하자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며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1917년 4월 6일 윌슨 대통령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전국적으로 징병이 시작되었다.
24세의 청년 로버트슨은 1917년 12월 21일 리치먼드에서 일등병으로 입대했다. 이어 1918년 3월 15일부터 6월 1일까지 프린스턴대에서 부설된 육군항공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후 6월 4일부터 12월 19일까지 앨라배마주 테일러 비행학교에서 복무했다. 이해 11월 11일 전쟁이 끝나자 로버트슨은 소위로 예편한 후 입대 전에 근무하던 스콧&스트링펠로(Scott&Stringfellow)투자은행으로 복귀했다.
1차 세계대전은 신구 대륙의 세력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세계대전 중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은 전쟁 물자를 미국에 의존했고, 전비(戰費)를 마련하기 위해 전쟁 채권까지 발행했다. 물론 미국은 이를 대부분 매입하였다. 미국의 GDP는 이미 영국·프랑스를 합친 것보다 훨씬 웃돌았고, 고도성장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 중 발행한 전쟁 채권을 이후 100년에 걸쳐 상환했다는 기록을 보면 세계대전을 통해 막대한 자본이 대서양을 거쳐 미국으로 유입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흔히 광란의 시대, 재즈 시대, 자동차 시대, 영화 시대, 라디오 시대로 불리는 1920년대는 미국이 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력이 급속도로 신장하던 시기였다.
1922년 29세의 로버트슨은 리치먼드의 유수한 금융회사인 스테이트&시티(State&City)은행·신탁회사의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금융회사 입사 단 10년 만에 이룩한 비약적인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당시 미국 산업혁명의 상징은 자동차 산업이었다. 포드 자동차에서는 컨베이어 벨트에 의한 조립라인을 통해 모델 T로 불리는 승용차를 24초에 한 대씩 만들어냈다. 1927년까지 1500만 대 이상이 판매된 자동차가 마이카 시대를 개막했고 전 국토에 도로가 깔리고 석유 산업이 발전했으며 거대한 신대륙에 유통 혁명이 도래했다. 자동차의 대량 생산으로 자연히 관련 제조업이 발전하면서 철강·기계·고무산업 또한 호황을 누렸다. 공산품의 생산량과 생산효율이 증대되면서 대규모 고용 창출이 이루어지고 중산층의 확대가 이어졌다. 이는 자연히 주식 시장의 활성화와 금융 산업의 발전으로 연결되었다. 이런 상황은 이제는 리치먼드의 중견 금융계 인사가 된 로버트슨의 역할을 보다 넓고 깊게 만들어주었다.
로버트슨은 1925년 스테이트&시티은행·신탁회사의 부사장직을 사임하고 투자회사 스콧&스트링펠로의 동업자가 되었다. 광란의 시대인 1920년대의 중간 시기인 1925년은 로버트슨에게 또 다른 중요한 해였다. 그해 11월 4일 로버트슨은 리치먼드 생폴 성공회 교회에서 평생 반려자로 삼 남매를 낳아 키운 6년 연하인 매리 테일러와 결혼식을 올렸다.
로버트슨 부부는 이후 4월 12일 파리에서 시작해 5월 4일 런던에서 끝나는 23일간의 유럽 기차여행을 떠났다. 주요 신혼여행 코스는 모나코(몬테 카르로)를 거쳐서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를 각기 3~4일씩 순방하는 일정이었다. 당시 세계적인 조직으로 각국의 고급 침대열차를 운영했던 런던의 토머스 쿡 여행사가 기획한 여행일정표를 보면 상류층의 유럽여행, 특히 이탈리아 주요 관광 도시들을 탐방하는 품격 있는 여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이 본 금융인 로버트슨
![]() |
| 1920년대의 리치먼드 거리. 사진=버지니아역사문화박물관 |
로버트슨과 함께 적십자사와 지역사회기금 모금운동을 했던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많은 사람이 그와 일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모금운동이 항상 다른 도시들보다 빨리 마감됐다고 한다. 금융기관에서 로버트슨과 함께 근무했던 인사들은 “월터는 자기주장을 앞세우기보다 상대방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모습이 특징이었다”고 말했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육군항공부대에서 함께 복무했던 한 친구는 “월터는 위험한 일임에도 항상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이 여전히 인상 깊게 남아 있다”고 했다.
30대 중반 금융계 인사인 로버트슨의 직업인으로서의 전문성과 함께 그가 지닌 인품과 원칙, 그리고 인간적인 매력을 감지할 수 있다.
대공황 시기에도 승승장구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뉴욕 증권 시장에서 시작된 주가(株價) 폭락(暴落) 사태는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 경제 공황의 시발이었다. 1920년대 후반 호황(好況) 시절 은행 금리(金利)가 낮아지자 투자가들은 주식 시장으로 몰려들었고 과잉 생산과 소비 둔화로 수익성이 낮아진 기업들의 주식까지 ‘묻지 마’ 식으로 눈감고 사들였다. 과도한 낙관주의와 투기 심리가 결제 불균형을 초래했으나 투기 열풍으로 주식 시장은 비정상적으로 급성장했다. 투자가들은 주식 담보 대출로 주식 투자를 계속하며 거품경제를 더욱 확대시켰다. ‘검은 목요일’로 불리는 공황 사태 3년 후인 1932년 미국 주식 시장의 시가 90%가 증발해 버렸다. 부실 대출과 투자 실패로 수많은 금융기관이 파산하고 기업이 도산하여 경제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40대 중년으로 접어든 금융인이자 투자 전문인이었던 로버트슨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그가 1925년부터 동업자로 일하고 있던 스콧&스트링펠로투자은행과 로버트슨은 건재했다. 미국 전역의 금융기관과 주식 시장을 초토화시킨 공황 상태에서 개인과 기업이 건재하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더 나아가 로버트슨은 1930년 리치먼드 주식거래소 회장과 미국주식거래소 및 투자은행연합회 이사로 취임했다. 대공황의 역사적 격변기에 로버트슨은 버지니아주 수도 리치먼드 금융계의 지도자로도 부상했고, 험난한 시대에 중책을 맡아 불황 극복에 묵묵히 앞장섰다. 지역사회의 각종 봉사단체와 문화단체의 대표로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미국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버지니아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다. 버지니아미술관 회장, 버지니아역사학회 이사, 제임스타운공사 감사, 리치먼드역사재단 회장, 리치먼드기념병원 회장 등을 맡고 여러 대학의 이사직을 맡아 동분서주했다. 이 과정에서 로버트슨은 각계각층의 많은 새로운 인사를 알게 되었는데, 이는 후일 그가 워싱턴DC의 연방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무기대여법 호주 담당자로
![]() |
|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 전 미국 국무장관. 사진=퍼블릭도메인 |
이 같은 중차대한 무기대여법의 총책임자는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1900~1949년)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및 해리 트루먼 대통령 아래서 48대 국무장관을 지낸 그는 시카고 태생의 기업인이었지만, 버지니아와 인연이 돈독해진 ‘버지니아 사람’이었다. 1923년 버지니아대를 졸업하고 1926년에는 버지니아의 유복한 가문의 규수와 결혼하며 성공회 교회 등을 통해 자선활동을 하면서 로버트슨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스테티니어스와 로버트슨은 스코틀랜드 계통 성공회 신도로서 신뢰가 돈독해졌을 것이다.
1939년 스테티니어스가 무기대여법 기구 총책임자로 임명되었을 때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앞두고 있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고, 남태평양 일대를 점령하자 미국은 호주에 무기 대여를 적극 검토하게 되었다. 이때 무기대여법 호주 담당자로 임명된 이가 바로 로버트슨이었다.
스테티니어스가 1943년 1월 정식으로 호주 담당 무기 대여 책임자 직책을 제의했을 때 50세가 된 로버트슨은 “미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세계 평화를 위해 참전한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후일 술회했다. 국가를 위해 전쟁터에 나갈 수 있는 나이가 아니지만, ‘참전’한다는 정신으로 스테티니어스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로버트슨은 1944년 10월까지 호주에서 무기 대여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함정과 항공기 등 미국산 전쟁 무기를 대량으로 호주에 공급애 일본의 남태평양 일대 침공을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주중공사가 되다
스테티니어스는 1944년 11월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48대 국무장관에 임명된다. 그는 호주에서 돌아와 리치먼드에서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한 지 6개월도 채 안 되는 로버트슨을 중국 주재 미국대사관의 경제 담당 공사로 임명한다. 로버트슨은 친구 스테티니어스 국무장관의 간청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참전한다는 정신으로 수행했던 공직을 거부할 스스로의 명분도 없었을 것이다. 로버트슨은 스테티니어스 장관에게 “전쟁이 끝나면 사임하고 즉시 귀국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스테티니어스 국무장관은 1945년 4월 25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국제기구 회의에 로버트슨 공사와 함께 참석했다. 중국 현지에 부임하기 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한 중국대표단을 비롯해 아시아 여러 나라의 지도자들을 만나게 하려는 배려였다. 로버트슨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중국대표단과의 대화를 통해 현지 사정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무기대여법 관계로 알게 된 호주대표단과의 오찬 모임에서는 미국대표단 고문이었던 존 포스터 덜레스(1888~1959년)를 처음 만났다. 8년 후 덜레스는 아이젠하워 정부의 국무장관이 되면서 로버트슨을 극동 담당 차관보로 발탁한다.
로버트슨은 당초 중국에 경제 담당 공사로 부임했지만, 점차 정치 문제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전직 장성 출신 패트릭 헐리(1883~1963년) 대사가 사퇴하자 존 레이턴 스튜어트(1876~1962년)가 후임 대사로 부임할 때까지 10개월간 대리대사로 근무했다.
로버트슨이 중화민국 임시 수도였던 충칭(重慶)에 부임한 지 4개월 후 일본이 항복했다. 그는 즉각 국무부에 사퇴서를 보냈다. 대리대사직을 맡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전쟁이 끝나면 즉시 귀향한다는 조건을 전제로 취임했기 때문이었다. 국무부 장관으로부터 “대기하라”는 회신을 받은 후 그해 11월이 되어서도 워싱턴으로부터 소식이 없자 그는 또다시 보다 강경한 어조로 두 번째 사퇴서를 국무장관에게 보냈다. 그가 받은 것은 12월에 조지 마셜 장군이 충칭에 특파(特派)될 때 협의하게 될 것이라는 답신이었다.
마셜, “당신은 떠나지 못합니다”
로버트슨이 공직에서 물러난 후인 1967년 컬럼비아 대학·《뉴욕타임스》와 가진 대담에는 마셜 장군과의 대화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상하이(上海)에서 마셜 장군을 만난 대리대사 로버트슨은 그를 충칭까지 안내한 다음 날 사임 문제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로버트슨은 “전쟁이 끝나고 두 번에 걸쳐 워싱턴 국무부 장관에게 사퇴서를 보냈지만 ‘대기하라’는 회신만 받았다”면서 “종전(終戰)이 되면 고향 리치먼드로 돌아가겠다는 전제하에 취임한 것인데 정부와의 약속이 지연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 말을 들은 마셜 장군은 “나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육군참모총장 4년 임기를 끝내고 버지니아 리스버그 집으로 들어섰는데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왔다”면서 자신이 중국까지 급히 오게 된 사연을 소상히 설명했다. 마셜 장군은 그에게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헐리 전 주중대사가 퇴임한 후 정부를 계속 비판하고 있는데, 급히 중국에 가서 현지 사정을 취합하여 보고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후, 그날 저녁 아내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채 있다가 다음 날 워싱턴으로 되돌아왔다”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처칠 영국 총리로부터 ‘승리의 조직가’라는 칭송을 받은 오성(五星)장군 마셜은 로버트슨 대리대사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나도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은 떠나지 못합니다”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로버트슨은 “워싱턴에는 내 직책을 기꺼이 맡을 사람이 많다. 나는 전쟁이 시작된 후 3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내왔고, 특히 삼 남매들은 내가 필요한 시기이며, 정부와도 전쟁이 끝나면 퇴임한다는 약속이 있었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 말을 듣던 마셜 장군은 “가족을 이곳으로 오도록 합시다”라며 주머니에서 통신 용지를 꺼냈다. 그는 그 종이에 제임스 번스 국무장관 앞으로 “월터 로버트슨이 대화를 통해 이곳에 계속 머물기로 했으니, 가족들을 신속히 이곳으로 보내달라”고 써서 로버트슨에게 보여준 후, 비서를 불러 워싱턴으로 긴급 연락도록 했다. 1945년 12월 마지막 주에 마셜 장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로버트슨의 부인과 자녀들은 10여 일 만에 중국 충칭에 도착했다.
마오쩌둥과 동굴에서 숙식 같이하기도
![]() |
| 마셜 장군(가운데)은 국공내전 종식을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왼쪽은 국민당 대표 장췬(張群), 오른쪽은 공산당 대표 저우언라이(周恩來). 사진=퍼블릭 도메인 |
여하튼 본국 정부 입장에서 시시각각 현지 사정을 보고하면서 정세에 대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업무였을 것이다. 상대국 정부 요인들이나 대사관 직원들, 그리고 중국에서 일하던 교육자나 종교계 인사들까지 하나같이 로버트슨과 만나 대화하고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국무부에서는 물론 정보기관에서까지 과거 어느 대사가 있던 때보다 로버트슨 대리대사가 있던 때가 현지 상황 분석과 대응 방안에 있어 긍정적이었다 평가하는 기록도 보인다.
1946년도 초 국무부와 마셜 특사는 로버트슨을 베이징에서 시작된 휴전위원회 대표로 임명했다. 장제스(蔣介石·1887~1975년)와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년) 대표가 베이징(北京)과 난징(南京)에서 연달아 만나 공동정부 수립 협상을 벌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로버트슨 미국 대표는 옌안(延安)에 있던 마오쩌둥을 만나 담판을 벌이고 그가 기거하고 있던 동굴에서 숙식을 함께하기도 했다. 그 당시 마오쩌둥과 만나 대화하고 협상을 했던 미국 정부 관료는 로버트슨이 유일했다. 마셜 특사는 자신의 임무가 성과를 보지 못하고 공산군들의 공세가 더욱 강화되자 임무를 중단했다. 로버트슨도 1946년 10월, 4년간에 걸친 국무부 근무를 마무리했다.
트루먼의 대중 정책 비판
로버트슨은 체제 혼란기 내전(內戰)으로 접어든 중국에서 근무하면서 다양한 현장 경험을 통해 공산주의의 실체를 목격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당시 극동 지역보다는 유럽 쪽에 편중된 지원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아쉬워했다. 특히 그는 마오쩌둥이 철저한 국제공산주의 세력의 핵심 분자로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위해 소련에 밀착되어 충성하고 있는데, 워싱턴의 정책 입안자들은 마오쩌둥이 민주적인 농지개혁 운동가라 착각하고 있다고 강하게 지적했다. 또한 미국이 유럽에다 소련을 저지하기 위해 마셜 계획에 따라 130억 달러를 투입하면서도 장제스 정권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던 5억 달러 차관(借款)은 외면한 것도 비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호주로 무기대여법 책임자로 부임한 이래 4년 만에 다시 리치먼드 땅을 밟은 로버트슨은 그를 기다리고 있던 스콧&스트링펠로의 공동대표 자리를 다시 맡았다. 리치먼드의 금융계와 지역사회는 오랫동안 조국을 위해 봉사하다가 돌아온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이 무렵 미국은 극심했던 경제 공황에서 벗어나 전쟁 특수(特需)를 통해 생산이 증대되고 금융기관들도 재정비되어 호황기를 구가(謳歌)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가 공동대표로 있는 스콧&스트링펠로도 업무가 넘쳐났다. 로버트슨은 봉사단체를 비롯한 각종 사회단체에도 다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로버트슨은 의회의 청문회에 출석하고 여러 언론 매체에 기고나 강연을 통해 중국 사태를 경고했다. 1948년 월터 로버트슨은 미국 하원 외교분과위원회에 출석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정부가 중국의 혼란스러운 내전 상황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대처에도 미온적이었다고 조목조목 지적했다.
로버트슨이 하원 청문회에서 증언한 직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군이 중국 대륙을 평정하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공화당 소속 의원들은 그동안 트루먼 대통령의 민주당 정부의 중국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맹비난했다. 로버트슨이 의회 증언에서 한 민주당 정권의 대중(對中) 정책에 대한 비판은 정확했으며, 이는 후일 아이젠하워 정권 출범 후 그가 다시 국무부의 주요 직책을 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