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면시간 줄고, ‘잠 못 이룸’ 행위자와 혼밥 늘어(2024년 생활시간 조사)
⊙ 정규직·대기업·조직화된 노조원들만 ‘저녁 있는 삶’ 누려
⊙ 노동시간·노동조건의 질적 차이 무시한 노동시간 감축 정책은 노동자 집단 내 불평등 확대와 자살률 급등으로 이어져
⊙ 배달 기사·대리운전 기사 등이 숏폼 즐겨 보는 것은 일-휴식 경계가 붕괴된 전형적 ‘행위 중독’
⊙ 귀족노조, 기득권 내려놓기보다 ‘노란봉투법’ 같은 우회로 선택
박한슬
1991년생. 차의과학대 약학과 졸업, 연세대 통계·데이터사이언스 석사 / 《중앙일보》 《주간조선》 칼럼니스트, 서울시 청년정책자문단 / 저서 《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 《숫자 한국》 외 다수
⊙ 정규직·대기업·조직화된 노조원들만 ‘저녁 있는 삶’ 누려
⊙ 노동시간·노동조건의 질적 차이 무시한 노동시간 감축 정책은 노동자 집단 내 불평등 확대와 자살률 급등으로 이어져
⊙ 배달 기사·대리운전 기사 등이 숏폼 즐겨 보는 것은 일-휴식 경계가 붕괴된 전형적 ‘행위 중독’
⊙ 귀족노조, 기득권 내려놓기보다 ‘노란봉투법’ 같은 우회로 선택
박한슬
1991년생. 차의과학대 약학과 졸업, 연세대 통계·데이터사이언스 석사 / 《중앙일보》 《주간조선》 칼럼니스트, 서울시 청년정책자문단 / 저서 《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 《숫자 한국》 외 다수

- 2022년 1월 24일 서울 참여연대에서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 사회적 합의의 올바른 이행을 위한 종교·시민단체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조선DB
이런 보도준칙이 나오게 된 건, 1974년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David Phillips)가 유명인 자살 사건 이후 발생하는 자살률 상승 현상을 분석한 데서 기인한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간되자 유럽에서 베르테르를 모방한 자살이 늘었듯, 유명인의 자살 보도를 접하면 실제로 자살이 늘어나더라는 것이다. 소위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다. 이런 부정적 영향을 줄이고자 자살 보도의 빈도(頻度)를 줄이라는 국제적 권고가 국내에선 ‘극단적 선택’이란 완곡어법 사용 권고로 와전(訛傳)됐다. 완곡어 사용이 모방자살 예방이나 방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아무런 연구가 없는데도, 엉뚱한 대책이 자리 잡은 것이다.
이를 단순히 언론계의 실패로 볼 수도 있으나, 실은 우리 사회가 자살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 자체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용어를 바꾸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낭만적인 접근과 유사하게, 자살을 유발하는 나쁜 구조는 덮어 두고 변죽만 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재명 대통령이 주문한 ‘범정부 자살대책 추진기구’도 유사하다. 대통령실은 “인공지능(AI) 기술을 적극 활용해 온라인 게시글 등에서 확인되는 자살 위험 징후를 신속하게 탐지해 대처하겠다”며 적극적 자살률 관리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좋은 취지와 별개로 실효성은 낮을 수밖에 없다. 자살 빈발 지대라며 마포대교를 순시(巡視)한 지난 영부인보단 나으니 다행일까. 애초에 온라인에 자살을 암시하는 게시글을 남길 정도로 삶이 내몰리지 않게 막는 일이 우선이지, 지엽(枝葉)적 탐지 대책으로 20년 넘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수위권을 지키는 자살률을 꺾을 순 없기 때문이다.
국민 생활의 정량화, ‘생활시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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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국민 생활시간 중 성인 남녀의 1일 생활시간. |
근대(modernity)의 본질은 계량화(計量化)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규정한 근대의 핵심인 합리화(rationalization)는 수치적 계량 없이는 작동할 수 없으며,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비판한 통치성(governmentality) 또한 국민의 삶을 정량화하는 통계 기술(記述)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개별 국민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를 세밀하게 기록하고 파악하려는 시도야말로 근대적 통치 구조가 뿌리를 내리는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세계 패권국 경험을 지닌 국가들은 근대성에 일찍 눈을 뜬 덕분에 공식적인 통계 작성이 일렀음은 물론, 국민을 대상으로 한 시간 사용 조사도 20세기 초부터 시행했다. 1920년 미국을 시작으로 1924년 소련, 1938년엔 영국까지 나서 자국민이 하루 시간을 어떻게 분배하여 사용하는지를 조사한 것이다. 국민의 24시간의 사용 방식을 파악하면 가용 노동시간의 규모를 추산하고, 사회 변화를 감지하며, 나아가 여가와 삶의 질까지 다각도로 분석할 수 있다는 걸 알아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공교롭게도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근대적 권력은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이 이끈 신(新)군부다. 통치적 정당성의 관점에서야 유신(維新) 정권과 마찬가지의 결점이 있으나, 낡아 보이는 반공(反共)이 아닌 자율(自律)을 새로운 기치(旗幟)로 삼아 국가 개조를 진행하겠다는 게 신군부가 주창(主唱)한 그네들의 정당성이다. 발전국가(發展國家)의 통치자로서 정당성을 획득하고 시민들의 ‘민주화 조바심’을 질타하기 위해선 ‘근거’가 필요했다. 단순히 표현하면 민주화란 결국 국정 운영을 강권 통치자가 아닌 국민의 자율에 맡긴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미 국민의 자율에만 맡겨진 일상생활의 시간 배분을 살펴보면 시민이 성숙한 주체로서 스스로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 첫걸음이 1981년 진행된 ‘국민생활 조사’다.
통금 해제 후 수면시간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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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1월 5일 통금 해제 후 처음 맞는 주말 1월 9일 밤, 서울 야경 모습을 관광하려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사진=조선DB |
실제로 한국학 연구자 김학선 박사가 《24시간 시대의 탄생》(2020)에서 주장했듯, 대량의 컬러 TV 보급과 함께 벌어진 방송시간 확대는 국민 ‘생활시간’을 재편하겠다는 정권의 강력한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방송사를 일컫는 방송‘국(局)’이라는 입말이 공보부(公報部) 산하의 국으로 존재하던 시기에 자리 잡은 것이듯, TV 편성의 변화 역시 국가정책의 일환일 수밖에 없었다. KBS가 주관한 국민 생활시간 조사도 국가의 통치 보조 수단으로서 시행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한 이유다.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조사된 우리나라 국민들의 하루는 어땠을까?
1981년 첫 조사 기준, 당시 성인 남성은 평일 기준 7시간 40분을 잤고, 일하는 데 6시간 정도를, 가사(家事)에 36분 정도를 썼다. 아직 외벌이가 보편적이던 시대 남성의 전형적 일과(日課)다. 성인 여성의 경우 평일 기준 7시간 33분을 잤고, 일하는 데 3시간 30분 정도를, 가사에는 4시간 40분 정도를 썼다. 일과 가사를 한데 묶어 노동이라고 한다면, 성인 남성은 평일에 6시간 40분 정도를 노동에 쓰고 성인 여성은 평일에 8시간 10분 정도를 노동에 썼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2년,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했다. 당시에도 통금 해제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정작 1983년 조사에선 별다른 특이점이 나타나지 않았다. 야간 통행 제한이 사라진 덕분에 수면시간이 대폭 줄었을 것 같다고 예상될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되레 수면시간이 늘었다. 성인 남성은 수면시간이 7분 늘었고, 성인 여성도 4분 늘었다. 야간을 활용한 업무가 늘었을 것 같으나, 노동시간 역시 남녀 모두 감소했다. 평일 기준 남성은 42분, 여성 역시 45분 감소했다.
근로시간 단축됐지만 자살률은 급증
그렇게 줄어든 노동시간은 모두 친교를 위해 사람을 만나는 교제(交際)와 휴양(休養), 그리고 무엇보다 텔레비전 시청으로 옮겨 갔다. 야간 통행이 자율화되었음에도 수면이 줄거나 노동량이 늘긴커녕 집에서 보내는 여가만 늘어난 것이다.
이를 1980년대 초반에만 발생한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신군부 집권기이던 1980년대는 물론 민주화를 거친 후 조사 주체가 통계청으로 바뀐 1999년 이후에도 이런 경향은 꾸준히 관찰된다.
통계청의 생활시간 조사를 보자. 최초 조사 연도인 1999년의 전 국민 수면시간은 7시간 47분, 가사를 포함한 노동시간은 5시간 40분이었다. 그런데 2024년의 전 국민 수면시간은 8시간 4분, 노동시간은 4시간 59분이다. 조사 간 방법이 달라 엄밀한 비교는 어렵겠지만, 1981년의 첫 조사와 비교하면 40년간 우리 국민의 수면시간은 꾸준히 늘었고 반대로 노동시간은 감소했다. 시간을 양적(量的)으로만 파악하자면, 우리 국민의 삶이 꾸준히 나아지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상(理想)에 미치지 못할지는 몰라도, 진보 좌파 진영에서 꾸준히 주장해 온 ‘저녁이 있는 삶’에 근접하는 과정이 1981년 이후 꾸준히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같은 기간, 전혀 엉뚱한 변화가 관찰된다. 양적인 지표가 좋아지는 것에 반해 자살률이 급증한 것이다.
노동시간의 총량이 줄고 수면시간의 총량이 늘어나는 동안 어째서 사회의 정신건강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을까?
‘시간계급’의 등장
여기에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의 진보 담론을 지배해 온 ‘근로시간 단축’ 어젠다의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그간 좌파 진영의 노동투쟁은 ‘발전주의 체제가 낳은 가장 가시적인 폐해’인 장시간 노동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했지만,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었던 발전주의와 암묵적으로 공모(共謀)하는 관계에 있었다.
발전주의 체제에서 시간은 오직 생산성 향상을 위한 ‘자원’으로 취급된다. 노동 이외의 시간은 더 효율적인 노동을 위한 ‘재충전(再充塡)’의 수단일 뿐, 그 자체로 독립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그렇기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저녁 시간과 일터에서 보내는 낮 시간은 정량적으로 교환 가능한 동등한 시간이 된다. 주관적 가치를 걷어 낸 차가운 계량화다.
진보 좌파 진영에서 근로시간 단축을 말하기는 했으나, 그네들 역시 도구적 시간관(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과도하게 생산에 투입된 시간을 개인의 휴식과 소비를 위해 재분배하면 삶의 질이 자연스레 향상될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노동시간이라는 양적(量的) 지표를 줄이는 것으로 ‘저녁이 있는 삶’이란 표현이 품은 함의(含意)가 실현되진 않는다. 실제로 중요했던 건 그렇게 확보된 시간을 어떻게, 그리고 누가 통제하며 채울 것인가라는 질적(質的) 차원의 성찰(省察)이었다. 그런데 그런 필수적 성찰 없이 양적인 근로시간 단축만 추진하다 보니,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고질적 병폐인 이중구조라는 왜곡을 거쳐 시간을 둘러싼 새로운 계급적 분할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요컨대 ‘시간계급(時間階級)’이 만들어진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정책적 성과를 내긴 했지만, 그 과실(果實)이 노동시장 내 모든 구성원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노동시장의 이중화(dualization) 이론을 적용하면, 한국 사회는 ‘안정적인 내부자’와 ‘불안정한 외부자’ 사이에 시간의 질적 경험이 극단적으로 분리되는 사회로 재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부자는 주로 정규직, 대기업, 그리고 조직화된 노동조합에 속한 이들이다. 이들은 주 52시간 상한제, 선택적·시차근로제, 보장된 유급휴가, 예측 가능한 근무 스케줄 등 제도적 보호 아래 ‘질 좋은 시간’을 선점(先占)했다. 이들에게 확보된 여가란 내일의 출근을 걱정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예측 가능성과 통제권이 보장된 시간이다. 이들의 ‘저녁 있는 삶’은 실재하며, 생활시간 조사에서 확인된 긍정적 지표는 주로 이들의 경험을 반영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주변부 노동자’들의 잃어버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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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손학규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는 ‘저녁이 있는 삶’을 들고 나왔다. 사진=조선DB |
얄궂게도 내부자 집단이 확보한 ‘예측 가능한 휴식’이라는 희소한 사회적 자원은 그 비용을 외부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내부자의 고용 안정성과 ‘질 좋은 시간’은 외부자의 고용 불안정성과 ‘질 나쁜 시간’이라는 대가 위에서만 가능해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외부자는 단순히 소득이 적은 계층이 아니라,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인해 각종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건강 고위험군이 된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원로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이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2020)에서 서술한 ‘절망의 죽음(deaths of despair)’에 압도적으로 더 많이 노출되는 것이다.
노동자 집단 내 불평등 확대와 자살률 급등
디턴이 미국 백인 노동계급에서 발견한 이 절망을 한국 상황에 맞게 변주(變奏)하면, 병인은 바로 노동시장 내부자와 외부자를 가르는 견고한 성벽, 그리고 그 성벽을 지키는 ‘귀족노조’의 존재다. 비정규 노동자들이 겪는 절망의 반대급부로 유·무형의 이익을 누리는 내부자들이다. 일각에서는 노동하는 귀족이 어딨느냐며 손사래를 치지만, 2017년 기아자동차의 갈등 사례에서 보듯, 사실상 같은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과도 높다란 담을 쌓고 비정규직은 자신들의 노조에 받아들이지도 않는 이들이 실재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의 분석에 따르면, 사회적 연대(連帶)의 약화와 규범의 부재(不在), 즉 아노미(anomie)는 자살률 증가의 핵심적인 원인이다. 같은 작업장에서 같은 노동을 하는데도 저런 극심한 차별을 감내해야 하고 심지어 휴식시간의 질마저도 차이를 보인다면, 노동자란 이름의 연대를 말하긴 어려운 상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단순한 소득 불평등의 기제를 넘어, 자살과도 연관되는 사회적 건강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노동시간과 노동조건의 질적 차이를 무시하고 노동시간 감축 정책만 편 결과가 노동자 집단 내 불평등 확대와 그로 인한 자살률 급등이니, 예비 자살자를 빠르게 색출하겠다는 주장이 얼마나 공허한지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상 자살률 감소를 위한 시늉만 하겠단 거다.
숏폼 시청이 늘어나는 이유
실제로 상황은 더 심각해지고 있다. 2024년 생활시간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5년 전인 2019년에 비해 평균 수면시간이 감소한 게 확인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징후는 ‘잠 못 이룸’ 행위자 비율의 급증이다. 2019년 전체 인구의 7.3%였던 이 비율은 5년만에 11.9%로 폭증했으며, 이는 모든 연령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단순히 잠자는 시간의 총량이 줄어든 것을 넘어, 수면의 질 자체가 심각하게 저하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외부자 집단이 겪는 예측 불가능한 노동시간과 만성적 고용 불안은 정상적인 수면 리듬을 파괴하기 쉬워, 주변부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은 이런 위험을 더 크게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일과 휴식시간이 일정치 않은 탓에, 불안함을 달래 주는 대인관계는 감소할 수밖에 없다.
평일 기준 아침·점심·저녁 세 끼 모두 혼자 식사하는 사람, 즉 ‘혼밥’ 하는 비율은 5년 전보다 일제히 상승했다. 전 연령대에 걸쳐 혼밥 비율이 증가했다는 사실은 대면 만남의 축소와 사회적 지지 체계가 옅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빈칸을 채우는 게 미디어다. 2024년 여가시간은 5년 전보다 21분 늘어난 5시간 8분을 기록했지만, 그 증가분의 대부분인 17분은 미디어 이용, 특히 휴대전화와 같은 전자통신기기 사용 시간이었다. 질 낮은 시간의 공백을 채울 사회적 인프라가 부재한 상황에서, 미디어 이용의 급증은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한 일종의 도피적 행위다. 소위 숏폼(short-form) 영상이라 불리는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같이 짧은 영상을 무의미하게 계속 보는 병리적(病理的) 현상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동네를 다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배달 기사 혹은 콜을 잡기 위해 대기 중인 대리운전 기사 같은 이들을 보면 하나같이 숏폼 영상을 보고 있다. 노동 과정에서 비는 짧은 틈은 학술적으로나 여가시간이지, 실제로는 노동 대기 시간이라 사실상 업무시간이라 봐야 한다. 그러니 제대로 된 휴식보단 숏폼 콘텐츠가 주는 빠른 쾌락에만 빠질 수밖에 없다. 일과 휴식의 경계가 붕괴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전형적 ‘행위 중독’ 패턴이다.
귀족노조, 기득권 내려놓아야
이러한 병리적 현상의 근원을 방치한 채, 자살 징후를 탐지하거나 완곡어법을 사용하는 등 지엽적 대책에만 매달리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다. 숏폼 콘텐츠에 몰입하는 외부 노동자의 모습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닌, 시간 주권을 박탈당한 계층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률이라는 참혹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한 유일하고 근본적인 해법은 노동시장 개혁, 특히 경직된 이중구조를 해소하는 데 있다.
첫째, 노동 유연성(柔軟性)의 개념을 재정립해야 한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 ‘유연성’은 사용자가 필요에 따라 노동력을 손쉽게 동원하고 해고할 자유, 즉 외부 노동자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키는 논리로만 작동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유연성은 노동자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는 노동자가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예측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시간 통제권을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고 없이 근무 일정을 변경하거나, 호출 대기라는 명목으로 무급노동을 강요하는 관행은 엄격히 규제되어야 한다. 스케줄 변경에 페널티를 부과하고, 근무시간 외에는 업무 지시로부터 단절될 권리(right to disconnect)를 법제화하는 것은 외부 노동자의 시간을 파편화로부터 보호하고 최소한의 질을 확보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연스럽게 현재 귀족노조가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일부 허물어 내야만 한다. 정규직이 질 높은 여가시간을 보내는 대신 그 공백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내부자 집단, 특히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조합은 스스로의 성벽 안에 갇혀 외부자의 고통을 외면해 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들의 고용 안정과 복지가 동일한 산업생태계 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외부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서 유지된다는 구조적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노란봉투법’은 우회로에 불과
둘째, 국가는 보편적 사회안전망을 통해 시간의 질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
실업과 질병, 노령이라는 위험에 직면했을 때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 부재한 사회에서, 노동자는 질 낮은 시간을 감내하는 불안정 노동을 거부할 힘을 갖지 못한다. 고용보험의 적용 범위를 특수고용직과 플랫폼 노동자 등 모든 취업자로 전면 확대하고, 실업급여의 수준과 기간을 현실화하며, 상병(傷病)수당을 도입하는 것은 단순히 복지정책을 넘어, 모든 국민이 최소한의 ‘예측 가능한 시간’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핵심적인 노동 정책이다. 그런데 이런 근본적인 노동시장 개혁이 자신들의 핵심 지지층인 귀족노조의 이익에 반하니, 기득권을 허무는 정공법(正攻法) 대신 하청 노동자가 원청(原請)을 상대로 노동쟁의를 수행케 한다는 ‘노란봉투법’ 같은 우회로만 만드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기업에서 임금 목적으로 지급할 수 있는 금액엔 불가피한 한계가 있는데, 원청의 정규직 노동자들 몫을 줄이지 않고 하청에 추가로 돈을 내려 줄 방법이 뭘까?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연구개발이나 시설재투자 금액까지 헐어 내지 않는다면, 돈이 나올 곳은 없다. 이듬해에 파종할 볍씨까지 밥솥에 넣을 순 없다. 자본과 산업 유치를 둘러싼 글로벌 경쟁이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근래와 같이 관세(關稅)전쟁이 벌어지는 탈(脫) 자유시장 환경에선 정규직의 기득권 내려놓기가 사실상 유일한 답이다.
살펴봤듯, 오늘날의 높은 자살률은 단지 개인의 ‘극단적 선택’이나 정신질환 같은 요인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모두에게 24시간이 제공되기에 마치 평등한 것처럼만 보이는 시간이라는 사회적 자원조차도 경제구조에 따라 불균등하게 배분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한 24시간이 누군가에겐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24시간이기에, 양자 간에 짊어지는 사회적 위험의 크기도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문구에서 바랐던 것은, 그 24시간을 인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본권으로 복권시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일부에게만 허락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특권을 보편화하지 않는다면, 자살률 높은 우리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중구조를 묵인하는 것이야말로 ‘극단적 선택’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