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사기》 읽기 ⑨

《사기(史記)》 70열전(列傳)에 숨은 비밀(3)

사마천, 여성을 편견 없이 역사에 기록하다

  •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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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천, 악행 저지른 여후의 업적 인정해 〈본기〉에 포함시켜
⊙ 아들의 부족함을 직간했던 조괄의 어머니,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탁문군
⊙ 항우의 포로가 됐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어 아들의 길을 열어준 왕릉의 어머니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기원전 2세기경 전한(前漢)시대 팔방미인인 탁문군.
공자(孔子)의 여성관은 《논어(論語)》와 《주역(周易)》에 나오는 공자의 언급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공자는 《논어》 양화(陽貨)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자와 소인(小人)은 길러주기 어려운 자들이다. (사사로이) 가까이하면 공손하지 못하고 공정하게 대하면 원망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 등장하는 여자에 대해서는 약간의 풀이가 필요하다. 모든 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지 못한 여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즉 소인이 군자(君子)와 대비되듯이 숙녀(淑女)와는 대비되는 여성을 말한다. 숙녀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이다.
 
  그래서 《시경》에서는 요조숙녀(窈窕淑女), 개제군자(愷悌君子)라고 했다. ‘얌전한 숙녀’ ‘점잖은 군자’라는 뜻이다. 《시경》 첫 번째 시 ‘관저(關雎)’는 바로 이 얌전한 숙녀와 점잖은 군자의 러브스토리를 노래하고 있다.
 
  공자는 〈서괘전(序卦傳)〉에서 인간 사회 질서의 탄생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하늘과 땅이 있은 다음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다음에 남자와 여자가 있고 남자와 여자가 있은 다음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다음에 아버지와 자식이 있고 아버지와 자식이 있은 다음에 임금과 신하가 있고 임금과 신하가 있은 다음에 위아래가 있고 위아래가 있은 다음에 예와 마땅함[禮義]이 시행될 영역이 있게 된다.”
 
  여기서 보듯이 공자는 인간 사회 질서가 탄생하는 출발점을 남자와 여자에 두었다. 다만 공자는 안과 밖이라는 개념을 통해 여성을 안에다 가두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괘가 가인괘(家人卦·)다. 이 중 밑에서 두 번째 음효(陰爻)에 공자의 여성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루려는 바가 없으니 집 안에서 음식을 장만하면 반듯하여 길하다.”
 
  이루려는 바란 공적(公的) 영역에서의 활동을 말한다. 부인은 집안일에 전념하여 가족을 보살피고 손님 접대와 집안 제사에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끝이다. 여성의 인격을 존중했지만 활동 범위를 가정으로 제한한 것이 바로 공자의 여성관이라 할 수 있다.
 
 
  사마천의 편견 없는 여성관
 
사마천
  사마천(司馬遷)은 이런 점에서 분명히 공자를 뛰어넘었다. 사마천은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황후 여후(呂后)의 사실상 천자 역할을 인정하며 〈본기(本紀)〉에 포함시켰다. 이는 그저 기발한 착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가 후비(后妃)를 〈세가(世家)〉에 포함시킨 것 또한 여성의 공적 활동에 대한 그의 개방적 태도와 무관치 않다. 먼저 사마천은 여후가 한나라 건국에 공로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여후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굳세어 일찍이 고조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대신들을 주살(誅殺)할 때도 여후의 힘이 컸다.”
 
  이후 정치 투쟁 과정에서 여후가 저지른 악행(惡行)들도 갖추어 기록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여성이기 때문에 이런 악행들이 비롯되었다는 인식은 없다. 특히 사마천의 사평(史評)을 담은 ‘태사공이 말하다’에서 그는 여후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효혜(孝惠) 황제와 고후 때 여민(黎民·백성)들은 전국 시대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군주와 신하는 모두 억지로 일삼지 않는 원칙[無爲]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으니 그래서 혜제는 팔짱만 끼고 있었고 고후가 여자 군주로서 황제를 대행해[稱制] 모든 정치가 안방에서 나오지 않아 천하는 편안했다. 형벌을 쓰는 일도 드물었고 죄인도 많지 않았다. 백성들은 농사에 힘을 쓰니 입고 먹는 것이 갈수록 풍족해졌다.”
 
  간단히 말하면 황로(黃老) 사상에 입각해 무위(無爲)의 정치를 펼쳐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외척을 〈세가〉에 올려
 
  외척(外戚)을 〈열전(列傳)〉이 아니라 〈세가〉에 올린 것 또한 사마천다운 파격이다. 사마천은 외척이 정치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은 일종의 명(命)이라고 보았다. 어쩔 수 없는 일[不得已]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외척 세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예부터 천명을 받은 제왕이나 제위(帝位)를 계체수문(繼體守文·창업 군주가 아닌 모든 임금)하는 임금은 자기 스스로 (임금)다움을 갖추었기 때문도 있지만 대개 외척의 도움 또한 있었다. 하(夏)나라가 일어난 데에는 도산씨(塗山氏)가 있었기 때문이고 (말기에) 걸왕(桀王)이 쫓겨나게 된 것은 말희(末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은(殷)나라가 일어난 데에는 유융씨(有娀氏)가 있었기 때문이고 주왕(紂王)이 죽게 된 것은 달기(妲己)를 총애한 때문이다. 주(周)나라가 일어난 데에는 강원(姜嫄)과 태임(太妊)이 있었기 때문이고 유왕(幽王)이 붙잡히게 된 것은 포사(褒姒)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역》은 건(乾)과 곤(坤)에서 시작하고[基] 《시경》은 관저편을 첫머리에 두었으며 《서경(書經)》은 순(舜) 임금이 요(堯) 임금의 두 딸을 잘 데리고 산 것을 칭송했고 《춘추(春秋)》는 친영(親迎)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던 것이다. 부부 사이는 사람의 도리 중에서도 가장 큰 이치다.”
 

  사마천은 한나라 초기 후비들이 뒤에서 정치를 도운 일들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 문제(文帝)의 황후였던 두(竇)태후의 역할이 특히 두드러지는데, 아들 경제(景帝) 집권 내내 태후로서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고, 심지어 무제(武帝) 초기에는 태황태후로서 정치의 방향을 유학(儒學)이 아니라 황로 쪽으로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마천의 말이다.
 
  “두태후는 황제(黃帝)와 노자의 학설을 좋아하였다. 이에 경제와 태자 및 두씨의 외척들은 모두 황제와 노자를 읽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들의 학설을 받들었다.”
 
 
  외척 때문에 망한 한(漢)나라
 
반고
  그런데 만일 사마천이 반고(班固)처럼 후한(後漢) 초 사람이어서 전한(前漢)의 역사 속 외척들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면 〈외척 세가〉라는 항목을 두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무제와 이후 선제(宣帝) 시대를 지나고부터 본격적으로 외척 정치의 시대가 열렸고 심지어 외척 왕망(王莽)이 나라를 찬탈하는 일까지 벌어졌기 때문이다. 반고는 《한서(漢書)》에서 외척을 전(傳), 즉 〈열전〉으로 끌어내린다. 반고의 〈외척전〉에 대한 사평, 찬(贊)이다.
 
  “무릇 여자에 대한 총애가 심해서 이로 말미암아 지극히 미미한 데서 지극히 존귀한 데에 이르게 되면 부귀를 한없이 누리는데도 아무런 공로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도가(道家)가 두려워하는 바이며 복록과 재앙의 근본이다.
 
  한나라가 일어나서부터 효평(孝平·평제)에서 끝마칠 때까지 외척과 후궁들 중에서 여색으로 총애를 크게 받은 자 20여 명을 앞서 말했지만 그러나 지위를 보전해 집안을 온전히 한 자는 단지 문제와 경제와 무제의 태후 및 공성후 네 사람뿐이다. 사량제[史良娣-여태자(戾太子)의 비]와 왕도후[王悼后·선제의 어머니]와 허공애후[許恭哀后·선제의 허황후(許皇后)]의 경우에는 그들이 일찍 죽어 아무런 허물이 없었고 그 집안도 옛 은혜에 힘입어 감히 방자하게 굴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할 수 있었다. 그 나머지는 대부분 집안 전체가 주멸(誅滅)됐고 일부는 쫓겨났으니 아! 이 같은 지난 일을 거울삼아서 바뀌고 또한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반고의 〈원후전〉
 
왕망
  이어 반고는 〈원후전(元后傳)〉을 두었다. 이것은 칭송보다는 경계의 의미가 컸다.
 
  〈원후는 원제(元帝)의 황후로 성은 왕씨(王氏)이고 이름은 정군(政君)이며 왕망(王莽)의 고모다. 18세 때 액정(掖庭)에 들어가 가인자(家人子)가 되었고 태자(太子·원제)에게 총애를 입어 성제(成帝)를 낳았다. 원제가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성제가 즉위한 뒤에 황태후에 올랐다. 오빠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어 상서(尙書)의 일을 관장했다. 하평(河平) 2년(기원전 27년) 형제 왕담(王潭)과 왕상(王商), 왕립(王立), 왕근(王根), 왕봉(王逢) 등 다섯 사람이 동시에 봉후(封侯)되었다. 애제(哀帝)가 즉위하자 태황태후(太皇太后)에 올랐다. 평제(平帝) 때 임조(臨朝)하여 정치를 왕망에게 맡겼다.
 
  왕망이 칭제(稱帝)하자 안양후(安陽侯) 왕순(王舜)을 시켜 국새(國璽)를 전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태후가 국새를 땅에 내던졌다. 이 때문에 압박을 받아 호칭이 신실문모(新室文母)로 바뀌었다.〉

 
  원후는 여후와 달리 정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결국 유씨(劉氏) 나라가 왕씨(王氏) 나라로 바뀌게 만든 견고한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반고의 아버지 반표(班彪)의 사평이다.
 
  “삼대(三代·하은주) 이래로 《춘추》에 기록된 왕공(王公)이나 국군(國君) 중에서 그 시대를 잃어버림에 있어 여자를 총애해 그렇게 되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후비(后妃)의 집안으로 여씨(呂氏), 곽씨(霍氏), 상관씨(上官氏)는 거의 나라를 위태롭게 했던 적이 여러 차례였다. 왕망이 일어나게 되자 효원후(孝元后)는 한나라의 4대에 걸쳐 천하의 어머니가 돼 나라를 향유한 것이 60여 년이었고 여러 동생이 대대로 권력을 물려받아 다시 국가의 칼자루를 쥐어 오장십후[五將十侯·오장이란 왕봉, 왕음, 왕상, 왕근, 왕망 등 대사마(大司馬) 5명을 말함]를 거쳐 드디어 신도(新都·왕망)의 일이 이루어졌다. 지위와 칭호가 이미 천하에서 옮겨졌건만, 그런데도 원후는 그저 충근(忠謹)한 마음으로 한 개의 새(璽)를 쥐고서 망(왕망)에게 주지 않으려 버텼으니 아녀자의 어짊[婦人之仁]이란 참으로 슬플 뿐이로다.”
 
  사마천의 생각 또한 이 점에 대해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유향의 《열녀전(列女傳)》
 
유향
  한나라 원제 때 정치가이자 유학자 유향(劉向·기원전 77~6년)은 《열녀전(列女傳)》이라는 책을 지었다. 오늘날의 열녀(烈女)가 아니라 〈열전〉의 열(列)이다. 분류 항목이 흥미로운데 다음과 같다.
 
  1부 모의전(母儀傳)은 본받을 만한 어머니의 사례들이다.
 
  2부 현명전(賢明傳)은 뛰어난 지혜를 발휘한 여성의 사례들이다.
 
  3부 인지전(仁智傳)은 어짊을 행한 여성의 사례들이다.
 
  4부 정순전(貞順傳)은 여성의 도리를 고분고분 실천한 사례들이다.
 
  5부 절의전(節義傳)은 절개를 지킨 여성의 사례들이다.
 
  이 밖의 것들은 문맥에서 벗어나 있어 생략한다.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2부 현명전과 3부 인지전이다. 이런 부류의 여성에 처음 주목한 인물이 바로 사마천이다. 별도로 열전을 두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열전 속에 속한 부전(附傳)이라는 방식을 통해 다양한 여성들의 지혜와 인의(仁義)를 찬양하였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조괄의 어머니
 
  먼저 전국(戰國) 시대 조(趙)나라 장수 조괄(趙括)의 어머니를 만나보자. 〈염파 인상여 열전(廉頗藺相如列傳)〉이다.
 
  〈조괄은 어려서부터 병법을 배워 군대의 일을 말하면 천하에 누구도 당할 자가 없었다. 일찍이 아버지 조사와 병법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사도 쩔쩔맸지만 그러나 잘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괄의 어머니가 사에게 그 까닭을 묻자 사가 말했다.
 
  “전쟁이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이건만 괄은 그것을 너무 쉽게 말하오. 조나라에서 괄을 장수로 삼지 않으면 그걸로 그만이겠지만, 만약에 기어이 그를 장수로 삼겠다면 조나라 군대를 무너지게 할 자는 틀림없이 괄일 것이오.”
 
  괄이 장차 출정하려 하자 그 어머니가 왕에게 글을 올려 “괄을 장수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왕이 “어째서인가?”라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애초에 첩이 그 아비를 모실 때 그이는 장군이었는데 그가 직접 먹이고 마시는 일을 받들며[奉·봉] 대접하는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친구처럼 대한 이는 수백 명이었습니다. 대왕과 종실(宗室)에서 상으로 내려주시는 것은 모두 군리(軍吏·장교)와 사대부에게 나눠주었고 명을 받은 날에는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괄은 하루아침에 장군이 되어 동쪽을 향해 서서 조회를 받는데 군리들이 감히 그를 올려다보지 못합니다. 왕께서 내리신 돈이며 비단은 집에 가져다 쌓아놓고 날마다 살 만한 싸고 좋은 땅과 집이 없는지 보고 다니며 그것을 사들입니다. 왕께서는 그 아비에 대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비와 아들의 마음이 이렇게 다르니 바라건대 왕께서는 제발 보내지 마십시오!”
 
  왕이 말했다.
 
  “에미는 그만두라. 내가 이미 결정했다.”
 
  괄의 어머니는 그 참에 말했다.
 
  “왕께서 끝내 그 애를 보내시겠다면 곧바로 그 애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더라도 첩을 연좌(連坐)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왕이 그러겠노라고 허락했다.〉

 
  다소 매정해 보이기는 하지만 조괄의 어머니는 공평무사한 태도로 앞일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끝내 조괄은 참패(慘敗)하였고, 조괄의 어머니는 이 일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여성에 대한 통념에 도전한 사례도 사마천은 놓치지 않았다. 한 문제(文帝) 때의 일로 아들보다 나은 딸의 사례다.
 

  〈문제 4년 연간에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려 (한의사) 순우의를 고발하니 순우의는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육형(肉刑)의 판결을 받고 역마(驛馬)를 이용해 서쪽 장안으로 압송될 처지에 놓였다. 순우의에게는 딸 다섯이 있었는데 그를 뒤따라가며 울기만 했다. 순우의는 화가 나서 딸들을 꾸짖었다.
 
  “자식을 낳았으나 사내아이를 낳지 못해 위급할 때 아무 쓸모가 없구나!”
 
  이에 막내딸 제영(緹縈)이 부친의 말을 애처롭게 여겨 마침내 부친을 따라 서쪽으로 장안까지 가 글을 올려 말했다.
 
  “첩의 아버지가 관리로 있을 때 청렴하고 공정하여 제(齊)나라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만, 지금은 법에 걸려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첩이 통절하게 비통해하는 것은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육형을 받은 자는 몸이 다시 전처럼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잘못을 고쳐서 스스로 새롭게 되고자 해도 그렇게 할 방법이 없으니 끝내 새롭게 살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제 한 몸을 관비(官婢)로 바칠 터이니 아버지의 형벌을 속죄(贖罪)해 아버지가 행실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글이 올라가자 상(上)은 그 마음을 가슴 아파하여 그해 중에 육형을 시행하는 법을 없앴다.〉

 
 
  ‘자유로운 영혼’ 탁문군
 
  탁문군(卓文君)은 그 시대에는 드물게 자유로운 영혼을 보여준 인물이다. 전한 촉군(蜀郡) 임공(臨邛) 사람으로 탁왕손(卓王孫)의 딸이다. 거문고를 잘 연주했고 음률(音律)에도 정통했다.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아버지 탁왕손과 술을 마시는데, 그때 탁문군은 막 과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처지였다. 사마상여가 주위의 권유 때문에 거문고를 들어 ‘봉구황(鳳求凰)’이란 곡을 연주하니 그녀의 마음이 동요되었다. 마침내 함께 몰래 달아나 성도(成都)로 갔다가 다시 임공으로 돌아왔다. 주점을 열어 술을 팔았는데 아버지가 부끄럽게 여겨 재물을 나누어준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 사마상여가 나중에 부인을 들이려고 하자 ‘백두음(白頭吟)’을 지은 뒤 절교(絶交)를 선언했다. 사마상여는 그 뜻을 포기했다.
 
  당연히 사마천은 대의(大義)와 분수(分數)를 아는 여성들에도 주목하였다.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진영(陳嬰)의 어머니 이야기다.
 
 
  분수와 대의를 알았던 어머니들
 
  〈진영이라는 사람은 원래 동양의 영사(令史)로 현에 살았는데 평소 신의가 있고 신중해 장자(長者·덕망이 있는 사람)로 불렸다. 동양의 젊은이들은 그 현령을 죽이고 서로 수천 명이 모여 우두머리를 세우고자 했으나 마땅히 쓸 만한 사람이 없어 마침내 진영에게 그 역할을 맡아줄 것을 청했다. 진영은 자신은 그럴 능력이 없다며 사양했으나 결국 억지로 세워 그를 우두머리로 삼으니 현에서 그를 따르는 자가 2만 명이나 됐다. 젊은이들은 영을 세워 (기존의 왕을 바꿔서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다른 군대와 구별하기 위해 (푸른 띠를 묶거나 모자를 쓰고) 창두(蒼頭)라 하고서 특별히 봉기한 뜻을 드러냈다. 진영의 어머니가 진영에게 말했다.
 
  “내가 너의 집안으로 시집온 이래 너의 조상들 중에 일찍이 귀하게 된 분이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왕이라는) 큰 이름을 얻는다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남 밑에 있는 것이 낫다. (그렇게 되면) 일이 이루어지고 나서 후(侯)에 봉해질 수도 있고 일이 실패하더라도 쉽게 화를 면할 수 있으니… 이유는 네가 세상 사람들이 지목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은 마침내 감히 왕이 되지 않았다.〉

 
  반대로 목숨을 던져 아들을 지킨 왕릉(王陵)의 어머니 이야기는 지금 읽어도 숙연케 한다.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다.
 
  〈왕릉은 패현(沛縣) 사람으로 처음에는 패현의 호걸이었는데 고조(유방)가 한미하던 시절에 릉(陵)을 형님으로 섬겼다. 릉은 꾸밈이 적고 매사를 기분에 따라 했으며 직언을 잘했다. 고조가 패현에서 일어나 함양(咸陽)에 들어갈 때 릉도 무리 수천 명을 모아 남양(南陽)에 머물면서 패공(沛公·유방)을 기꺼이 따르지 않았다. 한왕(漢王·유방)이 군사를 돌려 항적(項籍·항우)을 칠 때가 되어서야 릉은 마침내 군사를 한(漢)에 소속시켰다. 항우(項羽)가 릉의 어머니를 잡아 군중(軍中)에 두었는데 릉의 사자가 도착하자 릉의 어머니를 동쪽으로 바라보며 앉게 하고는 릉을 부르게 했다. (그러나) 릉의 어머니는 이미 몰래 사자를 보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바라건대 늙은이를 위해 릉에게 한왕을 잘 모시라고 말해주시오. 한왕은 훌륭한 분이시니 이 늙은이 때문에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시오. 이 늙은이는 죽음으로써 당신을 보내주겠소!”
 
  드디어 칼에 엎어져 죽었다. 항왕(항우)은 화가 나서 릉의 어머니를 삶아버렸다. 릉은 결국 한왕을 따라 종군해 천하를 평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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