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일본 애니메이션·홍콩 영화 등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
⊙ 외국인 아이돌 연습생들, 문화 충돌 일으키며 ‘K팝 산업’ 비판
⊙ 영화·웹툰 산업, 20년 가까이 세대교체 안 돼
⊙ 코로나 이후 뮤지컬·스포츠 관객 늘고 영화는 줄어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 외국인 아이돌 연습생들, 문화 충돌 일으키며 ‘K팝 산업’ 비판
⊙ 영화·웹툰 산업, 20년 가까이 세대교체 안 돼
⊙ 코로나 이후 뮤지컬·스포츠 관객 늘고 영화는 줄어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으로 노리개 등 한국 전통 장신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한류 5년 안에 끝날 수도…’(중앙일보 2005년 1월 10일 자), ‘위기에 빠진 한류, 한국 영화 수출 물량 급감’(파이낸셜뉴스 2006년 8월 4일 자) 등부터 시작해 ‘외국인 10명 중 6명 “한류 5년 내에 끝날 것”’(매일경제 2012년 3월 21일 자), ‘한류, 4년 내 끝날 것’(뉴시스 2012년 5월 10일 자), ‘“한류 열풍 5년 내 끝날 것” 우울한 전망’(한국경제 2013년 6월 19일 자) 등을 거쳐 ‘[한류, 90조의 위기] 덩치는 커지는데 실속은 없다’(이코노믹리뷰 2015년 1월 2일 자), ‘너무 빨리 찾아온 중국 한류 위기설’(미디어스 2016년 8월 6일 자) 등까지 셀 수도 없다.
그렇게 ‘한류 위기론’은 언론 미디어의 월례(月例)행사에 가깝다는 말까지 돌았다. 엄밀히 5~6년 전, 즉 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상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하고 보이그룹 방탄소년단이 미국 빌보드 핫100 차트 1위를 차지하던 2020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 같은 위기론은 사실상 한시도 끊인 적이 없었던 셈이다.
한류,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럼 저 숱한 불안과 우려, ‘몇 년 안에 한류 끝난다’는 경고를 거친 2025년 현재의 한류 근황은 어떨까? 우려와 정반대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2020년의 〈기생충〉과 방탄소년단 열풍, 2021년의 〈오징어 게임〉 열풍을 성공적으로 이어받고 한류 영역을 더욱 넓히기까지 했다.
가깝게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대성공이 있다. K팝 아이돌을 소재로 한 최초의 해외 제작 애니메이션으로, 세계적 인기를 누리는 K팝 걸그룹이 비밀리에 악마 사냥꾼으로도 활약한다는 내용을 담은 판타지 액션 영화다. 지난 6월 20일 공개돼 46개국에서 시청 시간 1위를 차지하며 공개 한 달 만에 넷플릭스 사상 가장 많이 시청된 애니메이션 영화 자리에 올랐다. 테디 등 K팝 기업 더블랙레이블 소속 음악 프로듀서들이 다수 참여한 삽입곡 ‘Golden’은 8월 11일 미국 빌보드 핫100 차트 1위, 영국 오피셜 차트 1위를 동시 석권해 애니메이션 삽입곡 사상 가장 성공적인 곡 중 하나가 됐다.
그 직전인 6월 8일에는 ‘미국 공연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브로드웨이로 진출한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뮤지컬 부문 작품상·연출상·극본상·음악상 등 6개 부문을 석권했다. 여기서 토니상은 대중 취향 안배(按排)를 위해 해당 공연의 흥행 성공 여부를 보는 측면도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지난해 10월 프리뷰 공연 후 입소문을 타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처음 주간 수익 100만 달러를 넘긴 뒤 계속 승승장구 중이다. ‘뮤지컬 한류의 〈기생충〉’이라고까지 볼 만하다.
그 전인 올해 1월에는 K팝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로제가 미국 팝스타 브루노 마스와 함께 부른 노래 ‘아파트(APT.)’가 빌보드 핫100 차트 3위를 차지하며 K팝 여성 아티스트 최고 순위 기록을 경신했고, 지난해 10월에는 한국 소설가 한강이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류 경사의 연속이다. 꾸준히 발판을 쌓아 온 K팝과 영화, TV 드라마 등은 물론 불과 10년 전만 해도 해외 진출 여부가 아리송했던 뮤지컬과 문학 부문까지 일제히 성과를 거두며 점차 전방위(全方位)적인 한류 진영의 태세가 갖춰졌다는 평가다. 매년 한류의 고점(高點)을 경신하고 있다는 평가도 많다.
이처럼 모든 게 만사쾌조(萬事快調)로 보이는 시점에 ‘한류 위기론’을 주창하는 건 어딘지 상황을 크게 잘못 읽고 있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저 습관적인 비관론 내지 언론 미디어의 ‘이슈 되새김질’ 관행 정도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 지금이야말로 저 ‘한류 위기론’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거론될 필요가 있다. 모든 게 잘나갈 때일수록 방심하지 말자는 수준의 ‘주의(注意)’ 정도가 아니다. 오히려 대중문화 산업과 시장 차원에서 사뭇 근본적인 요소들이 흔들려 뿌리 깊은 우려를 낳고 위기 신호를 보내는 상황이라 볼 만하다. 크게 세 가지 지점에서 저 근본적 위기를 살펴볼 수 있다.
〈케데헌〉의 함정
가장 먼저, 최근 성과인 〈케이팝 데몬 헌터스〉부터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체 뭐가 문제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답은 단순하다. 〈케데헌〉은 한국을 배경으로 K팝 아이돌을 다루는 콘텐트일 뿐 그 제작 주체이자 판권을 갖고 있는 건 넷플릭스, 즉 미국 기업이라는 점이다. 콘텐트로 얻는 상업적 이득도 당연히 미국 기업 몫이다. 앞선 ‘Golden’ 등 삽입곡들 역시, 한국 음악 프로듀서들이 대거 참여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넷플릭스 측에 판권이 있다. 미국 음악기업 유니버설 뮤직그룹 레이블인 리퍼블릭 레코드를 통해 배급됐다.
물론 〈케데헌〉을 통한 한국 측 이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K팝이 해당 애니메이션 주(主) 시청층인 유소년층에 널리 알려져 미래 소비층을 키워 내는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또 영화 속에 등장하는 한국적 요소들이나 서울 곳곳의 관광지들도 홍보 효과를 얻어, 국립중앙박물관의 호랑이 배지·곤룡포·갓 등의 굿즈가 줄을 세워 가며 팔리는가 하면, 성곽길이나 남산타워 등도 영화 배경 효과로 찾는 이들이 한창 늘고 있다는 보도다.
그러니 한국 측으로선 ‘투자 없이 거둔 이득’ 같아 보이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이런 흐름이 미국 문화 특유의 ‘타(他)문화 빨아들이기’, 즉 해외 문화상품의 글로벌 반응을 지켜보다 어느 순간 미국 대중문화 산업에서 그를 흡수해 자신들의 콘텐츠로 소화하고 결국 모든 것을 ‘미국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흐름의 시작 단계로 보인다는 점이다.
미국의 타문화 빨아들이기

돌이켜보면 2020년대 미국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로 올라 화제가 됐던 두 편의 영화, 〈미나리〉와 〈패스트 라이브즈〉도 한국인 또는 한국계 미국인 주인공에 일부 한국어 대사와 한국인의 감성 체계로 만들어져 ‘한국의 성과’처럼 보도되기도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미국 제작사에서 만든 미국 영화였다. 다만 한국계 교포 감독들을 기용해 한국 정서가 반영됐을 뿐이다. 미국 대중문화 산업은 대략 그런 식으로 타문화를 빨아들여 왔다.
예는 많다. 옆 나라 일본도 그랬다. 1950~60년대에 일본 영화가 서구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자 1970년대부터는 미국에서도 일본의 사무라이나 야쿠자 등 소재를 취해 〈암흑가의 결투〉 〈부시도 블레이드〉 등이 나오기 시작했고, 1980년대가 되자 닌자 소재 〈아메리칸 닌자〉, 학교 폭력 당하던 미국 10대 청소년이 가라테를 배우며 성장한다는 〈베스트 키드〉 등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일본 고유 소재들에 흥미가 생기더라도 굳이 일본 영화를 찾아볼 필요가 없어지게 됐다. 그즈음부터 일본 장르영화의 글로벌 진출도 둔화(鈍化)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어 일본의 또 다른 글로벌 인기 장르인 괴수(怪獸)물까지 흡수해 1998년에는 미국판 〈고질라〉가 개봉, 일본 오리지널판은 근처에도 가지 못할 글로벌 흥행 수익을 거두게 된다.
2001년이 되자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이 배경과 설정, 등장인물 등 요소에서 일본의 1990년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를 표절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지기까지 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특유의 분위기와 전개 등에 있어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형적 경향을 따르는 통에 이제 미국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일본 애니메이션까지 흡수하려는 것 아니냐며 빈축(嚬蹙)을 샀다.
〈엑스오, 키티〉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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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드라마 〈엑스오, 키티〉. |
이러니 지금 한국과 한국문화, 한국인의 삶이 미국 콘텐츠에 반영된다며 〈케데헌〉이나 〈패스트 라이브즈〉 〈미나리〉 등에 열광만 보낼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어느 미국 소녀가 서울의 국제학교로 전학 와서 벌어지는 연애담을 마치 한국 트렌디 드라마처럼 연출한 또 다른 미국 넷플릭스 드라마 〈엑스오, 키티〉가 대단한 인기를 얻어 시즌 3까지 연장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더더욱 그렇다. 미국 현지 회사에서 K팝 풍의 보이그룹, 걸그룹 제작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는 벌써 수년 전부터 들려온다. 어쩌면 지금이 미국의 광포(狂暴)한 흡수전략 직전의 마지막 한류 전성기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아이돌 연습생이 사라진다
그다음으로 짚어 봐야 할 부분은, 한국 대중문화 산업 인력 풀(pool) 문제다. 일단 ‘가장 흥하는 분야’인 K팝 분야부터 아티스트 인력 수급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 다소 의외일 수 있는데, 일단 ‘뉴스핌’ 2025년 6월 26일 자 기사 ‘[아이돌 해부] 아이돌 연습생이 사라진다… Z세대가 떠난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통계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기획사 소속 연습생 수는 1895명이었으나 2022년 말에는 1170명으로 감소했다. 2년 만에 38.3% 줄어든 수치다. 공식 통계는 2022년이 마지막이다.
하지만 최근 중소 기획사들은 확연히 줄어든 연습생 지원자 수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연습생 시스템은 주로 10대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저출산으로 해당 연령대 인구 자체가 줄어들었고 혹독한 트레이닝을 견디더라도 성공은커녕 데뷔도 불투명하다는 어려운 현실은 도전의 문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연습생 생활 강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중략)
아이돌이 더 이상 유일한 성공의 길이 아니다. SNS, 유튜브, 틱톡 등을 통해 스스로 팬덤을 형성하고 콘텐츠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루트가 늘어난 것이다. 기획사의 사전 투자와 트레이닝을 거쳐야만 데뷔할 수 있다는 공식은 점점 힘을 잃고 있다.〉
걸그룹 비차(VCHA)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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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YP엔터테인먼트의 미국 현지화 다국적 걸그룹 VCHA의 첫 앨범. |
일단 문화적 차이로 인한 해외 연습생들과의 갈등과 충돌이 지금까지도 숱하게 벌어져 왔다. 예컨대 JYP엔터테인먼트의 미국 현지화 다국적 걸그룹 비차(VCHA) 건이 있다. 멤버 6명 중 4명이 미국, 한 명이 캐나다, 또 한 명이 미국과 한국 복수(複數) 국적으로 구성됐지만, 데뷔 1년도 지나지 않아 멤버 케이지가 소속사를 상대로 계약 해지 소송을 걸며 “특정 스태프로부터 학대를 당해 정신적으로 좋지 않은 환경에 노출돼 왔으며, 나는 멤버가 자살을 시도하게끔 하고 섭식장애(攝食障礙)를 조성하는 K팝 산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문을 올렸다. 올해 7월에는 또 다른 멤버 케일리가 입장문을 올리며 소속사와의 계약 해지 사실을 전해, 비차는 활동 1년 6개월 만에 멤버 3분의 1이 탈퇴하는 혼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은 중소 기획사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해외에서 지역 오디션 등을 통해 입사한 연습생들이 엄청난 연습량과 스파르타식 생활 관리를 요구하는 K팝 연습생 제도에 적응하지 못해 그만두면서 ‘비인간적인 산업’이라 고발하는 상황은 K팝 그룹으로 데뷔하기 전에 훨씬 자주 목격된다는 것이다. K팝 아티스트의 한국인 대 외국인 비율이 역전되는 상황이 온다면 그만큼 위와 같은 혼란도 한층 가중될 가능성이 높다. 또 K팝의 글로벌 인기가 현시점에 이르러선 그간 K팝과 K드라마 등을 통해 형성된 ‘한국인’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도 저 막무가내(莫無可奈)식 외국인 노동자로의 대체 해법을 무색(無色)게 한다.
여전히 한국 영화계 상징하는 감독은 ‘봉박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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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봉준호, 박찬욱, 홍상수, 이창동 감독. 사진=조선DB |
그런데 그 외에도 원인은 많다. 위 아이돌 지망생이 줄어 가는 이유 중 하나로 지목된 부분과 상통하는 점인데, 이제는 그 길고 힘든 과정을 거쳐 충무로에서 데뷔하지 않아도 창작적 능력을 바로 시장에 팔 수 있는 출구가 여럿 생겼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유튜브 등에 짧은 영상물들을 내놓는 채널을 개설해 바로 수익화를 꾀할 수도 있고,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OTT가 이미 한국에 진출해 있어 해외 자본이 국내 인력들을 빨아들이는 상황도 함께 연출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제작 측 세대교체 실패에 대해 필자는 대중음악계와 웹툰계 등에서도 같은 하소연을 듣고 있다는 점이다. 제시되는 원인들도 대부분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만큼 해소 방안도 요원하다.
‘시장 쏠림’ 현상
끝으로,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발전은 시장 ‘쏠림’이라는 비정상적인 현상에서 비롯됐다는 점도 언급해야 한다. 한국 내수(內需) 문화시장 자체가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한두 가지 부문으로만 ‘쏠림’을 보여 온 탓에 그 선택받은 몇몇 부문들은 인구 규모를 한참 능가하는 규모의 경제를 이뤄 고도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는 논리다.
대표적으로 영화 부문이 있다. 가장 싼 값에 가장 오랜 시간 즐길 수 있고 도심 한복판에 상영관이 있어 접근성이 좋다는 점 때문에 모두들 ‘만만한’ 영화로만 몰리다 보니 2019년에 이르러선 국민 1인당 연평균 영화 관람 횟수가 4.37회로 세계 1위에 올라서기도 했다. 이처럼 ‘쏠림’에 의해 한껏 부풀려진 시장을 바탕으로 한국 영화는 비교적 여유롭게 각종 실험을 시도해 가며 양질의 콘텐츠를 내놓을 수 있었다는 것. 결국 한국 영화 글로벌화도 불균형한 시장 현실 덕에 이뤄질 수 있었다는 얘기다.
다른 부문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TV 드라마계만 해도 그렇다. 고도성장기 이후로도 한동안 한국 대중이 이렇다 할 문화적 취미들이 없어 안방에서 편히 볼 수 있는 TV 드라마를 주요 여가로 갖다 보니, 1990년대만 해도 해외 선진국에선 찾아보기도 힘든 시청률 60% 이상 드라마가 4편(〈첫사랑〉 〈사랑이 뭐길래〉 〈허준〉 〈모래시계〉)이나 탄생했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TV 드라마는 1990년대 동안 점차 질(質)을 높여 가고 다양한 실험을 꾀할 여력을 갖추게 돼 2000년대 들어서자마자 ‘K드라마’라는 글로벌 브랜드를 성립시키게 됐다는 순서. K팝이나 웹툰 및 게임 산업 등도 많건 적건 유사한 경로를 거쳐 글로벌 산업으로 우뚝 섰다.
문제는 이 같은 ‘비정상’에 의한 특수(特需)가 3년여 걸친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철저히 무너졌다는 점이다. 고강도 방역 조치로 옥외 활동이 제한되면서 대중의 온라인 체류 시간과 미디어 이용 시간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고, 정신적 여유가 없어 이전까지 손대지 않았던 갖가지 새롭고 모험적인 여가 소비에 골몰(汨沒)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2023년 5월 엔데믹으로 전환되고 나니,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간 수면 아래 잠자고 있던 다양한 문화·여가 시장이 일제히 폭등세를 보였다. 2000년 불과 140억원대에 불과했던 국내 뮤지컬 시장 규모는 서서히 몸집을 불리다 팬데믹을 거치며 급등세를 보여 지난해 4652억원대를 기록, 역대 최대를 달성했다. 대중음악 공연 시장도 2024년 전년 대비 31.3% 상승하며 총 7569억원 규모로 역대 최대, 연극 역시 지난해 전년 대비 16.5% 성장하며 국내 공연 시장 총매출 1조4537억원이라는 신기록을 달성했다. 스포츠 시장 역시 활황세다. 지난해 1088만7705명 관중을 동원하며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세운 프로야구 KBO 리그를 중심으로 스포츠 산업 전반에 걸쳐 2023년 기준 매출액 81조320억원을 기록했다. 역시 역대 최대 규모다.
코로나가 바꾼 세상
대신 기존에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대중문화 분야, 특히 영화 부문이 크게 주저앉았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인 2019년 대비 2024년 극장 매출 회복 수준은 주요 영화 시장 중 미국이 73.3%, 일본 90.6%, 프랑스 95.2%, 영국 79.3%, 독일 93.4%로 드러났다. 그런데 한국은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는 62.4%다. 한국만 한번 발길을 돌린 관객들이 되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얘기인데, 이들이 이제 팬데믹 동안 눈뜬 ‘다른 문화·여가거리’들로 흩어졌음을 보여 준다.
이 같은 분위기는 물론 한국 문화 시장의 건전성 차원에선 다분히 긍정적이다. 그러나 한국은 비정상적 ‘쏠림’으로 몇몇 산업이 비대하게 키워져 그 여력을 통해 양과 질을 ‘과분하게’ 드높여 온 환경이다. 그러던 것이 ‘정상화’ 단계에 접어든다면 오히려 문제가 된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만다.
아닌 게 아니라, 인구 5분의 1이 관람한다는 ‘1000만 영화’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1년에 2~3편씩 등장하곤 했지만, 올해는 절반을 넘어선 7월까지도 1000만은커녕 400만 돌파 영화조차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그럼 저 ‘1000만 영화’를 바라보며 투자와 인프라를 키워 온 한국 영화 산업은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비슷한 ‘쏠림’을 통해 덩치를 키워 온 K팝 내수 시장 등 다른 부문들도 대부분 비슷한 딜레마를 겪고 있다. 풀기 힘든 난제(難題)다.
‘진짜 위기’가 오나
다시 서두의 ‘한류 위기론’으로 돌아가 보자. 대략 20년 전 시작된 위기론 남발(濫發)은 조금 엉뚱한 지점에서 비롯됐다. 위기론 시작점에 해당하는 2005년, 《서울신문》이 2월 24일 자로 내보낸 기사 ‘한류, 한(韓)도 일(日)도 아닌 잡종문화?’를 보자.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싱겁게도 ‘한류(韓流)’에 ‘한(韓)’은 없다. 그래서인지 호들갑스러운 외국의 반응에 우리 스스로가 당혹스럽다. 어쩌면 당혹스러워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는 이미 한류 뒤에 숨어 있는 무차별적인 자본의 욕망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한국문화의 자부심 운운하는 한류 ‘생산자’들의 합창과는 상관없이. (중략) 일본문화도, 한국문화도 아니고 한·일 공동문화도 아닌 성립과 기원부터 잡종적 문화가 한류다. 문제는 뿌리가 없기에 아시아의 소통을 겉돌게 만든다는 데 있다.〉
1980~90년대 내내 공적 개념에서까지 줄기차게 외쳐 댄 문화민족주의의 영향일 수도, 또는 일본과 중화권에선 일찌감치 오리엔탈리즘 기반으로 전통문화 상품들을 서구에 먼저 알린 뒤 대중문화 진출에 나섰다는 가까운 전례들 탓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당시 한국에선 한복, 김치, 국악, 민화 등 전통문화 부문들이 해외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K팝과 K드라마 등 대중문화만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는 데 상당한 불안감을 가졌었다. 소위 ‘한국적인 것’을 먼저 알려야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한류가 되지, 대중문화만 인기 있는 한류는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팽배(彭排)했다는 것이다.
‘한류’라는 용어가 탄생한 지 어느덧 사반세기를 넘어선 지금, 이 같은 한류 초기의 불안은 많이 사그라든 상태다. 한류도 나름 오래 지속된 흐름인 만큼 쉽게 무너지진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겼고,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옮아 가는 광경도 지켜본 탓이다.
그런 점에서 추상적인 민족주의 도그마(dogma)로 비롯된 과거의 ‘한류 위기론’과 달리, 지금 주창되는 위기론은 보다 현실적이고 한층 뿌리 깊으며 보다 치명적인 형태의 ‘진짜 위기론’이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한류 융성(隆盛)의 기반 자체를 흔드는 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왔고, 그중 일부는 이미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뚜렷이 진행 중이다. 〈케데헌〉으로 다시 확인된 한류 전성시대의 중심에서 또 한 번 위기론을 외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